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르르 쾅쾅.
멀리 천둥소리가 들린다. 아직 머리 위 하늘은 맑지만 서쪽 하늘에서 검은 먹구름이 몰려온다.
한 대의 지프가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일어나는 먼지만큼 바퀴는 심하게 흔들리지만 노면에 맞춰 바퀴만 위아래로 흔들릴 뿐, 다이내믹 서스펜션을 장착한 차체는 운전사가 입력한 범위 안에서 지면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 덕에 조수석에 앉아있는 김도열은 뻥 뚫린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듯 미동도 없이 편안히 앉아있지만, 얼굴은 편치 않다.
며칠 동안 면도도 못해 까칠한 수염에 퀭한 눈, 지친 듯 팔을 들어 창에 기대고선 주먹을 쥐고 관자놀이를 바치고 앉아 심술이 난 아이처럼 턱을 내밀고 있다. 이젠 지치고 짜증이나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듯하다. 게다가 좋아하지도 않는 세기말 신세대들의 최신 유행곡은 21세기중반에 태어난 도열에게는 상사의 잔소리만큼 따갑기만 하다. 거기에 이제 경찰이 된지 6개월 째라는 신참의 입에선 지치지도 않는 듯 연신 짜증스런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젠장. ……이런, 제발 좀 내려가라, 좀, 젠장. 말짱한 길을 놔두고 이게 뭐냐. ……빌어먹을 놈. ……왼쪽으로 가라고, 왼쪽. 젠장. ……망할 자식, 잡히기만 해봐. 아주 분해를 해서 고철로 팔아치우겠어. 빌어먹을."
"제발, 입 좀 다물어. 입 다물기 싫으면 음악을 끄던가!"
드디어 도열이 폭발하고 말았다.
신참 형사 나정훈은 도열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다물고 계기판 우측에 설치된 GPS 화면을 힐끗거리며 중간, 중간 도열의 눈치를 살핀다. 자동운전시스템으로 차는 안전하게 달리고 있었지만 위치를 표시하는 GPS화면에는 지도 위로 반투명한 빨간 네모 안에 [도로이탈]이라는 글씨가 깜빡거린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산아래 황금들판에선 자동화된 농기계들이 무익한 비를 빼기 위해 배수로를 정비하고 있다. 모든 게 무료하게 느껴진다. 정훈은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선배의 호통에 마음이 언짢았는지 가속 페달을 힘껏 밟는다. 분명 처음 달리는 산길이다. 그래도 그는 과감하게 핸들을 돌렸다.
[수동으로 전환됩니다.]
갑자기 주행방식을 수동으로 전환하자 도열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안한 눈길로 정훈을 힐끗 바라본다. 자동주행에 익숙한 요즘 세대들이, 그것도 산길에서 수동으로 전환을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길을 잃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눈앞에 표적이 있기 때문이다.
호리호리한 로봇이, 마치 피를 흘리는 사냥감처럼 절뚝거리며 지프 앞을 달리고 있다.
로봇의 얼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처럼 울상이다. 로봇은 등산로가 아닌 곳을 갈 수 없다. 그건 경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로봇도 알지만 로봇은 계속 고민중이다.
"산으로 가야하는데, 산으로 가면 되는데. 산으로 가면 못 따라올 텐데. 하지만, 그건 불법이고, 또 그랬다가 괜히 차가 전복되면 어쩌지. ……하지만, 산으로 가야하는데 산으로 가면 되는데."
그러나 산은 농업인구 감소와 기계화 영농으로 공동화(空洞化)된 농촌지역의 자그마한 산이다 보니 오랫동안 찾은 이가 없었고, 결국 등산로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잠시 후, 산길도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로봇의 모습이 순간 사라지자 놀란 정훈이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 미처 내리막길이라는 걸 눈치채기도 전에 차가 허공을 날았다.
삐삑삐삑.
자동차의 인공지능이 운전자의 상태가 비정상이라고 판단하고선 자동운전으로 전환한다. 차체가 잠시 요동친다.
"죄송해요."
정훈은 건성으로 사과하며 도열을 바라보았다.
도열의 시선은 여전히 달리는 로봇의 뒤를 좇고 있다.
앞서 달리던 로봇이 꽝하는 소리에 놀라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쫓아오는 차를 살폈다. 그러다 자신을 노려보는 도열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마치 고양이에 쫓기는 생쥐처럼 움찔하며 다시 앞을 보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멀리 잘 포장된 도로가 보이자 더욱 낙심한 얼굴이 된다. 반면, 운전석 정훈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진다. 그 미소에 화답하듯 GPS화면에 빨간 상자가 사라지고 다양한 선택메뉴가 뜨며 모든 계기들이 정상으로 작동하자 정훈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그때 포장도로로 접어들던 로봇이 갑자기 몸을 돌려 마주 달려온다. 다시 산길을 달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막 차를 지나치려는 순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조수석의 도열이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빼더니 '이 자식.'하는 호통과 함께 주먹을 휘두른다. 깜짝 놀란 로봇이 주먹을 피해 뒤로 껑충 뛰어오른다.
"이런."
이미 로봇의 발은 도로에 닿았고, 차를 피해 뒷걸음질치다 도로 중앙까지 들어섰다. 다행히 한가한 국도라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로봇은 실망스런 얼굴로 '갓길, 갓길.'을 외치며 도로 오른 편에 붙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다른 차들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때 도열이 탄 지프도 도로에 접어들며 서서히 속도를 내며 로봇의 뒤를 바짝 따라붙는다. 이대로 가면 그대로 로봇을 지나칠 판이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젠장, 추적모드, 추적모드."
정훈이 깜짝 놀라 제동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낮추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음성을 인식한 인공지능이 차의 주행모드를 자동주행에서 추적모드로 전환한다.
[표적을 설정해 주십시오.]
정훈은 [직접 선택]버튼을 누르자 전환된 화면에는 전방의 도로 상황이 영상으로 나타났다. 정훈은 앞서 달리는 로봇을 선택하고 추적모드를 실행시킨다.
"휴, 정말 귀찮네. ……어? 젠장, 비까지?! 갈수록 가관이구만."
층층이 쌓인 먹구름에서 굵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차체에 떨어지자 차체 표면의 나노와이어가 전력을 생산해 자동으로 안개등이 켜진다.
정훈은 차창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는 핸들에 기대어 목을 빼고 하늘을 바라본다.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사이드 창에 머리를 기댄다. 이젠 지칠 대로 지쳤다.
벌써 8시간째 이유도 모른 채, 저 로봇을 쫓고 있다. 쫓기는 로봇이 불쌍하기도 하고,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나 싶은 회의도 든다. 음악도 이젠 그의 기분에 맞춰 느려지고 심지어 세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21세기의 우울증]이라는 음악이 흐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옆의 선배는 자신보다 더 오랫동안 저 로봇을 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경찰이 보유한 전기자동차의 1회 주행가능 시간이 대략 12시간이고 내 앞에 다른 녀석이 있었으니까. 20시간?'
정훈은 나름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고는 물었다.
"한 20시간 됐나요?"
정훈의 질문에 도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마치 '너도냐' 라는 듯한 시선으로 정훈을 바라본다.
"4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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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면 아시겠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탑돌이(Runround)를 읽고 착안해서 써 본
중편입니다.
조금 로봇 3원칙에 대한 해석이 억지같은 면도 있을 것 같은데..
여튼 올려봅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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