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언더워드(5)

2003.12.03 22:1112.03

2003. 12/2


#

깊게 눌러쓴 모자, 얼굴에서 시작하여 온몸에 감겨진 붕대,

모자와 같이 낡았지만  온통 검고 번들거리는 롱코트.

그가 코트자락을 열어제껴 보았자,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붕대를 풀어보았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이탤릭체의 내장들. '심장'이라는 글자가 꿈틀거리는 것이

나에게는 보인다. 잘려져 나간 복부의 붕대 사이로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글자색은 'red'

  내가 방금 뚫어놓은 곳이다.


#

  잊은 사람들도 있을까봐, 다시 설명한다.

  거대한 구멍이 뚤린 화장실. 구멍 안에 한 <소녀>

  바깥에는 머리가 지저분한 남자애가 오른손에 빵을

  들고 서 있다. 그게 나다.

  자세히 보면 팔꿈치까지 오른팔은 언어화되어 있다.

  손가락을 움직이면 끼끽하는 마찰음이 들린다.

  <소녀>가 말한다. 늘 그렇듯,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줘."

  이런 상황에서 평범한 고등학생이 생각해낼만한 이름들은

  얼마없다. 그 중에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확신하며

  나는 말했다.

  "오른쪽이"

  학산문화사 버전이었다.


#

  알아서 학습하고, 대신 싸워주고, 냉정하게 판단해주는

  최절정의 무기...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 중요한 순간, 내 오른손은 잠들어있다.

  <그>가 보낸 놈들이 천지책방의 책들을 통해 무한증식하며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도,

  내 오른손의 눈은 감겨있고, 입은 닫혀있다.

  이봐, 깨어나라구!! 나 죽는다니까!!

  물론 나는 목이 졸린 상태인지라 그저

  웅얼거릴뿐이었다.

  내가 등을 대고 있던 책장의 책들을 뚫고

  거대한 팔이 나를 움켜쥐고 목을 졸랐다.


#

  내가 그것의 이름을 부르자,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손이 되었다. 손등에 눈이 돋고, 손바닥에

  입이 생겼다. 그 입이 움직이자 작지만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였다. 오른쪽이가 말했다.

"배고프군"

  그리고는 내가 들고 있던- 아니 녀석이 들고있던? - 빵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에게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자 녀석이 말했다.

  "아, 알고 있어. 아니 알아가고 있어"

  무슨 소리지?

  한심하다는 듯이 오른쪽이는 빵을 씹는 것을

  멈추지도 않고 내게 말했다.

  "응,,웅얼..웅얼..으우으믐..."

  이 자식, 말 똑바로 안해..라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오른쪽이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생각하는 것을 너도

  알수 있지, 그럼 그 반대도 당연한거 아냐?]

  나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

  주인아줌마가 겁에 질려서 나를 보고 있다.

  붕대가 저절로 나의 목을 휘감고 조여들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놈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기어올라와 눈을 찌르려고

  하고 있는 중이니까!!

  내가 들고 있는 '총'은 이미 '총알'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오른쪽이는 아직도 잠자고 있다. 나는 오른쪽이가

  이전에 '글자들'을 다루는 방식을 흉내내고자 했다.

  그때 오른쪽이는 빵을 거의 먹어치우고는 그것을 우유로

  바꾸어 마셨었지. 나도 총과 연결되어 있는 기호들의 연쇄를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놈의 손가락이 구부려지며 내 눈을

  찍어내리려 했지만 가능한한 목을 제끼고 얼굴을 치켜들어

  간신히 그것을 피했다... 빨리하자...그러나 조급해서 그런지

  자꾸만 기호들 사이로 미끄러진다. 가늘게 이어진 기호들은

  무의미와 역설들 위에 부유물처럼 떠다니고 있다. 하나의

  단어에서 또 다른 단어로 건너뛸때마다 그것들은 진동을

  하고 자리를 바꾸고 나를 떨어뜨리려 한다. 내가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버둥대다보면 어느새 처음의 단어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손가락은 다시 한번 내 광대뼈를 찍어내리는

  이 판국에...으, 내 짜증이 '총'의 글자들을 뒤흔들었다.

  음소들이 삐그덕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다시 한번,

  나는 그것들을 뒤흔들었고, 틈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총'의 'ㅗ'를 90도 회전시켰다. '총'은 '창'이

  되었다. 순간 놈들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내가

  휘두른 '창'에 베여진 녀석들의 얼굴이 바닥에서 구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녀석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든간에,

  일단 나는 비스듬하게 위로 '창'을 뻗었다. 뒤에서 나를 조르고

  있던 팔의 힘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뿜어져 나오는 '피'들을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주저앉아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내 몸에 묻은 '피'자들이 꾸물거리며 본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게 상처를 내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

   나는 다시 총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녀석들이 재생되는데는

   시간이 꽤 걸리는 듯 했다. 주변은 온통 붉다. 고개를 드니

   주인아줌마가 염려반, 경계반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긴, 보통사람이 보기엔 내가 혼자 쑈하는 것으로 보이겠지.

   이 쓰러진 책장하며, 흩어져 있는 책들을 어이한다.

   다가오는 아줌마에게 나는 말했다.

   "아, 죄송해요. 놀라셨죠........"

   총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탄피가 마구 튀어 오른다.

   주인아주머니의 친근한 얼굴은 무표정하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는데도. 아줌마가 뒤로 쓰러지며 그 뒤에 쌓여져

   있던 책들을 무너뜨린다. 그래도 여전히 내 오른손은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긴다.

   오른손등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계속.

  
moodern
댓글 2
  • No Profile
    진아 03.12.04 03:12 댓글 수정 삭제
    언더워드(5) 드디어 올라왔군요! *^^*
  • No Profile
    moodern 03.12.04 17:19 댓글 수정 삭제
    기다려주셨다니 영광~
    곧 기말고사 기간인지라...방학이 되면, 그땐 좀 더
    빨리 결말을 짓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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