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모두의 XX 上

2003.11.21 19:1011.21

                                               §

눈을 뜨니 완연한 가을이었다. 깨질 것 같이 푸른 하늘이 유리창에 꽉 들어차 밀려들어올 듯 넘실대고 있었다. 마을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건물들도 지금은 모두 빛이 났다. 가까이 다가가면 먼지 낀 회색 건물이라는 것이 금방 들통 날 테지만, 언덕 위에서 게다가 4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바라보니 가라앉은 구름처럼 보기 좋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도회를 밀어내듯 바다는 코발트빛으로 굽이쳤고 날개 끝이 까만 새, 신비로운 등대까지 더해져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어젯밤에 휘몰아친 폭풍우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의사를 따라 나갔던 램이 돌아왔을 때도 라비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흰 베개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이 하늘과 같은 색으로 반짝였다. 램은 그쪽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보조 침대를 끌어내 그 끝에 걸터앉았다. 탁자 위에는 옆 침대의 노인에게 받은 사과가 놓여져 있었다. 과도까지 챙겨주는 병원 안 인심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 어색하기도 했다.
사과 깎는 소리가 잠시 병실 안을 맴돌았다.
“좋아한 거지, 그 여자?”
“아니.”
손놀림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라비는 어느새 몸을 돌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램은 반쯤 벗겨진 사과를 한 번 들어 보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길게 늘어진 껍질이 움찔움찔 흔들렸다.
“결혼식에는 왜 안 갔어?”
“네가 아프잖아.”
말하고 나서 그가 웃었기 때문에 라비는 울컥 화가 났다. 항의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왼쪽 팔에 꽂혀 있던 링거 선이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침대 밖으로 넘어갔다. 그 바람에 모처럼 길게 이어진 사과 껍질도 램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게다가 내가 가면 마카오가 싫어할 거야.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 일이 왜 생겼게.”
껍질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램은 묵묵히 과도를 집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늦은 오후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좋기는 엄청 좋은 날씨였다.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라비는 안 보는 척 동료를 곁눈질로 훔쳐보기 시작했다. 램이 손을 놀릴 때마다 사과 껍질은 빨갛고 노란 면을 번갈아 보이며 움직였다. 그게 어쩐지 기분이 나빠서 라비는 이내 외면하고 침대에 누웠다. 몸을 움직인 탓에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는 한 손을 뻗어 침대 각도를 조절하는 레버를 찾았다. 그 짤막한 쇠붙이는 좀처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데다가 겨우 잡은 후에도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 언저리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라비가 이런 수고를 하는 동안 그의 동료는 태연히 사과 깎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힘에 겨운 한숨을 내쉬던 라비는 그런 동료가 밉다는 듯 윗눈으로 노려보았다.
몇 번이나 시도한 다음에야 그는 겨우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가 다시 물었다.
“역시 좋아한 거야, 그렇지?”
“아니야.”
돌아보니 그는 사과를 우물우물 씹으며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라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어 웃어보였다. 도무지 가식이라곤 찾을 수 없는 미소였다. 다시 등이 배겨와 라비는 몸을 뒤척였다.

이제 라비는 이 도시에 완전히 싫증이 났다. 위병이 나 누워있는 것도 이곳에 오래 머문 탓이라고 생각했다. 위가 뒤틀려 고통스러울 때도 이럴 줄 알았다며 투덜거렸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오자고 한 건 너였어.”
“아니, 누가.”
우기기는, 하고 램은 진저리를 냈지만 라비로서도 할 말이 있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유바에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둘은 여행자끼리 연 조그만 가든파티에 참가하고 있었다. 발갛게 타오르는 모닥불과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 바비큐를 굽는 냄새에 작은 정원이 들썩였다. 고기는 곧 두 사람 앞으로도 돌아갔다. 둘은 통으로 구운 돼지고기를 먹으며 앞으로도 무사히 여행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유바는 서북부 일주의 마지막 도착지였다. 아무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 다 이 페어는 얼마 못가서 깨지고 말리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몇몇 사람이 앞장서서 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두 사람의 옆방에 묵었던 남자도 끼어있었다. 그는 파란 머리 소년을 기억해내곤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막상 술을 받은 것은 램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술을 경계하듯 냄새를 맡다가 남자와 잔을 마주쳤다. 처음 접하는 음료에 그의 얼굴이 금방 달아올랐다.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이것으로 서북부도 끝이다> 라고 말한 것이 램인지 라비인지 이제 와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후에 고개를 저은 것은 램이었다.
“아, 아니. 사실 더 북쪽으로 가면 섬이 하나 있긴 해. 하지만 역시 귀찮으니까 관두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고기 굽는 냄새, 모닥불 향기 그런 것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은 라비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파티가 끝나자 취기가 잔뜩 오른 램은 평소 버릇처럼 곧 잠이 들었다. 라비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저녁의 이모저모를 되새겼다. 그러자 이런 밤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못내 아쉽고 서글퍼서 저도 모르는 사이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우울한 감상이 고조에 달했을 때 문득 동료가 말한 또 다른 장소가 떠올랐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당시의 상황, 동료의 목소리와 표정 심지어 모닥불이 타올랐던 하늘까지도 되새겨보았다. 그럴수록 그가 정말 섬에 가길 싫어했던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울함도 걷히고 겨우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서북부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는 패스파인더에게 라비는 자신의 의사를 조심스레 타진해보았다. 그는 어째서 섬 이야기 같은 게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찮아서? 하긴 딴은 그래. 배편이 여드레 만에 하나씩 있으니까. 장소야 좋지. 지금 가면 시원하고 딱 좋을 때네.”
말하자면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다음 날에도 램은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얌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라비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섬 따위 가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 서북부를 떠날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렇다고 유바의 어디를 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어서 라비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대체 어쩔 작정일까. 램은 훌륭한 패스파인더였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우유부단했다. 어쩌면 그냥 망연하게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런 램의 성격에 싫증을 느끼면서 라비 역시 타고난 성격 탓에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실마리를 던져 준 것은 옆방의 남자였다. 그는 체크아웃을 하며 그쪽도 슬슬 떠나겠지, 하고 인사를 했다. 그 천진한 인사가 어쩐지 두 사람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라비는 한참 서성대다가 창틀에 엉덩이를 붙였다. 괜한 신경을 쓴 탓인지 속이 조금 쓰렸다.
“형은 어떻게 되든 좋은 거지? 나야 여길 다시 오게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문 앞에 쓰러진 가방을 바로 세우고 램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막 해가 지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가 동료의 머리 위에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고 라비는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고 나서는 착착 진행되었다. 다음날 새벽, 두 사람은 노인에게서 받은 보따리를 들고 합승마차에 올랐다. 열어보니 아침 도시락이었다. 감격하던 램의 얼굴이 작은 술병을 발견함과 동시에 핼쑥해 지는 걸 보고 라비는 깔깔 웃었다. 둘은 도시락을 나누어 먹은 후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선잠이 들었다. 마부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두 사람의 무릎 위에 내리쬐고 있었다. 동승했던 사람들은 도중에 내린 모양이었다. 라비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공기와 흙내가 새삼 여행하고 있다는 실감을 불러 일으켰다. 옆자리에서는 램이 이제 다 왔네 하며 기지개를 키고 있었다.
마차는 <라바냐>라고 쓰인 입간판이 있는 곳에서 멈추었다. 삯을 치룬 두 사람은 짐을 챙겨들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마차에서 내리는 라비는 마치 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항구로 이동하면서 라비는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가 서는 곳에 있기 마련인 센타도 없고 편의점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소박한 마을이었다. 밤에 주전부리라도 생각나면 큰일이겠다. 나쁜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그는 걱정을 하면서도 평소처럼 불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고집을 부린 것은 이쪽이니까 불평을 하면 꼴이 우스워질 터였다. 그는 부러 사소한 것에도 감탄한 척 조잘거렸다. 오히려 평소와 다르게 말수가 줄어든 것은 램이었다. 그는 언덕배기에 이르러 하얗고 파란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여기 처음 온 게 아니야, 하고 겨우 입을 뗐다. 그거야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한참 더?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릴래. 어깨 아파.”
마을은 마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 들어간 곳에 있었다. 항구는 더 멀었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듣자 라비는 가방을 팽개치고 보도에 주저앉았다. 가을치고는 더운 날씨였다. 목 언저리에 맺힌 땀을 닦으며 램은 청청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좀 쉴까?”
기다렸던 말에 라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천진하게 기뻐하는 동료를 보고 램은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방을 들쳐 매고 라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문을 모른 채 끌려 일어난 그는 동료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몇 개의 노천카페가 두 사람 옆을 스쳐지나갔다. 또 몇 개의 골목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구불구불 꺾이는 길에 들어서서 라비는 동료의 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잰 걸음을 놀려야 했다. 이윽고 램이 걸음을 멈춘 곳은 3층짜리 건물 앞이었다. 3층이라고 해도 폭이 좁았기 때문에 거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감 집 같은 아취가 났다. 길과 맞닿아 있는 작은 정원에 부엉이가 그려진 입간판이 서 있었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작은 길이 건물 입구에 이어져 있었다. 라비는 고개를 쳐들어 그 일대를 쭉 둘러보았다. 시선을 옮기니 램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을 열자 방울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램은 문 앞에 놓인 카펫 위에 멈춰 섰다. 그런 동료를 안쪽으로 밀면서 라비는 문을 닫았다. 방울이 한 번 더 울리자 바깥의 동향의 살피듯 인기척을 죽이던 누군가가 카운터 안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소리쳤다. 젊은 여자였다. 그 소리에 실내를 채우고 있던 달걀 껍질 빛 조명이 은은하게 떨렸다. 공기에서 분향이 난다고 생각하며 라비는 구석에 놓인 테이블로 가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동안 램은 고집스럽게 입구에 서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얼굴이 마치 숨이 통하지 않는 상(像)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기이함을 느끼며 라비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그가 공기를 들이마시듯 로테, 하고 입을 열었다. 부산히 들썩이던 카운터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곧 평정을 찾은 듯 여자는 다시 손을 놀려 주변을 정리하고 옷을 털었다. 라비는 걷어 올린 소매를 내리며 카운터로 나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가 허리를 감았다가 등 아래로 떨어졌다.

라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남녀는 마주친 곳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인사가 끝나고 막 무슨 말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 여자는 얼른 일어나 머리를 다시 묶었다.
“그럼 여기 있을래?”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아.”
램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넋이 나가있던 라비도 얼른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짐을 푸는 동안 라비는 평소보다도 말을 적게 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내일 배가 있다는데 마침, 그렇게 말하고 또 입을 연 것은 램이었다. 그는 적절한 어휘를 찾으려는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냥 아는 사이야.”
그때 라비는 창가에 기대서서 동료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며 하늘에 그라데이션처럼 섞여 들어갔다. 그래서 머리가 무겁다는 듯 이마를 탁탁 치고 그는 동료를 향해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그게 전부는 아닐 테지, 하고 묻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램은 머리를 긁적이며 무언의 질문에 대답했다.
“또 첫 클라이언트이기도 하고.”
두 사람의 문답은 거기서 끊겼다. 시원치 않은 기분에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고 해도 달리 알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라비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램은 침대로 돌아가 지친 허리를 뉘였다.

점심 겸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을 때 1층에는 여자와 그녀의 어머니가 있었다. 동료를 바라보는 주인여자의 시선이 어쩐 일인지 냉담해서 라비는 주눅이 들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하자면 퉁명스러움에 가까운 눈초리였다. 그녀는 램을 한 번 보고 무심한 목소리로 자네로군, 하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로테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식사 후에 라비와 로테는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래비어트 시번. 열여덟 살의 소년. 그러나 아직 아이 티가 났다. 그런 말을 들으면 라비는 표준 신장이라고 화를 냈다. 사실 그는 적당히 키도 컸고 보통 소년답게, 아직 덜 여물었지만 성장 가능성이 엿보이는 무릎과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돌아보면 어린애 같았다. 그것은 눈이 크고 걸음이 성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로테는 그런 남자애가 귀여운 듯 다정스레 인사를 건넸다. 어깨를 살짝 숙이자 이번에는 가지런히 허리 위로 풀어져 있던 머리칼이 앞으로 내려왔다. 그것이 라비의 눈에는 퍽 아름답게 보였다. 둘은 오랫동안 손을 흔들며 악수를 했다. 램은 동료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아아, 하고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

열여덟 살의 가을, 거대한 명제가 래비어트 시번의 내부에 멋대로 둥지를 틀다 - 그러니까 남녀가 단둘이 남았을 때 무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방으로 돌아온 라비는 달아오른 뺨과 쿵쿵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문 앞에 웅크렸다. 머리까지 고동이 울려와 정말이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어두워진 하늘 안에 노란 초승달이 무기처럼 박혀있었다. 그제야 아무 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다시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해가 완전히 가라앉자 라비는 배가 고파졌다. 그의 식습관은 그랬다. 아침은 거르거나 대충 먹고 점심은 잘 먹고 저녁은 간식으로 해결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선호하는 식단이었다. 더불어 그의 위도 다른 아이들처럼 차근차근 망가져갔다. 이 날 저녁에도 라비는 주리고 한편으로는 쓰린 배를 안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램은 어스름이 되자 말없이 방에서 사라졌다. 계시를 받은 것처럼 라비는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내려갔다. 모녀가 모두 주방으로 들어갔는지 카운터는 비어있었다. 기세가 꺾인 그는 하는 수 없이 여관을 나왔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가게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는 길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며 모든 길, 모든 건물을 기억하려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혼자 들어가기 어색한 대형 식당과 일찌감치 문을 내린 가게가 몇 개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몇 줄기 골목을 무용하게 지나쳤다. 귀퉁이로 들어갈수록 여기저기에서 소금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그 냄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졌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낯선 골목이 꿈틀대고 있었다. 새삼 요람과 한참 떨어진 이방의 도시에 와 있다는 감각이 덮쳐왔다. 실제로 그는 여관에서도 아주 멀어진 모양이었다. 더 이상 갔다가는 미아가 되기 십상이었다. 일찍이 램은 이 소년을 선천적 방향감각 상실자로 판명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야 곤란하지 하면서도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구멍가게가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그는 하염없이 걸었다. 그 동안 공복감은 아플 만큼 깊어졌다.
들쑥날쑥 늘어선 회색 건물 사이를 쏘다니다가 도착한 곳은 작은 놀이터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 쌍의 그네와 작고 비틀어진 미끄럼틀이 뻣뻣하게 서 있었고 벤치와 그 위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두 사람, 곧게 뻗은 등나무가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그 낡은 놀이터에서 라비는 정신이 들었다. <또 길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방향 감각이었다.
경험 많은 미아는 허둥대지 않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차라리 기뻐하며 저 두 사람에게 길도 물어보고, 내친 김에 가게가 어디 있는지도 알아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훌쩍훌쩍 잘 우는 라비지만 이런 일로 가슴 아파하기에 그는 너무 자주 길을 잃어버렸다. 적어도 길을 묻고 되찾아 가는 일에서만큼은 늙은이처럼 성숙했고 완전히 닳아있었다. 그는 첫 말머리를 생각하며 놀이터의 모래를 밟았다. 미끄럼틀에 이르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자는 저렇게 머리를 기르고 있지만 남자다. 곧게 벌어진 어깨가 길게 내려온 머리칼과 제법 어울렸다. 그리고 한 사람 몫의 자리를 비우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자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가 끝에 가서는 갈고리마냥 살짝 구부러져 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라비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미끄럼판에 막 머리가 닿으려는 지점에서. 라비는 눈을 비비며 마른 목구멍에 침을 흘려보냈다. 어서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밥을 얻어먹고, 세 사람이 함께 여관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왜 서 있는지 몰랐지만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귀 뒤에서 고동이 꽝꽝 울려댔다.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행인가, 어색해도 좋으니까 차라리 들켜서 셋이 돌아갔으면 하고 라비는 간절히 소망했다. 한참 방황한 몸도 고민하는 머리도 이제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했다. 미끄럼틀을 잡고 있는 손에서 조금 전부터 기분 나쁜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했으면서 끝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적어도 이 밤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상 이 구도가 쭉 이어질 것 같은 이상한 확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방심한 탓에 불시의 기습을 당했을 때, 남자가 갑자기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라비는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뒷걸음질 쳐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는 숨이 차도록 뛰었다. 도중에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성을 내는 행인의 손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부딪히고 길안내까지 해준 그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라비를 전송했다. 주방에 홀로 서 있는 주인여자를 보고 그는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 난 두 사람이 무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 그 탓에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라고, 그는 다시 달아오르는 뺨에 차가운 손등을 가져다대며 중얼거렸다. 어깻죽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목욕을 하기 위해 외투를 벗던 그는 커다란 회색 나방이 등 뒤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며 옷을 털었다.

샤워기 아래서 되살아나는 래비어트 시번. 어린 시번.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끔찍한 사랑을 받았다. 다섯 살이 되기까지 그는 어머니 품속에서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동네 아이들과 놀아야할 시기가 되었을 때도 그는 어머니와 함께였다. 그에게는 또래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주 조용한 아이였던 시번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몰랐다. 할 말도 할 일도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는 또래 애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취급을 받았다. 그 새파란 머리랑 귀하도고 귀한 마법사 둘이 만나 태어난 아이. 그런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작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아이로서 시번이 잘 처신했는지도 미지수이다. 라비의 추억에서 그 시절은 그저 좁은 골목 하나였다. 모여앉아 때때로 규칙 모르는 게임을 하던 곳. 일곱 살이 되어서 시번은 할아버지를 따라 왕도로 갔다. 거기서는 원해도 또래를 만날 수 없었다. 티 없이 하얀 벽에 둘러싸여 그는 종일 기품 있고 고상한 사람들하고만 친구했다. 훌륭한 할아버지를 둔 덕에 시번은 그들로부터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더욱 조용해졌다. 왕궁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는 인사말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 아무 것도, 라고 라비는 생각한다. 그의 유년기는 적성에 맞지 않는 마법서를 연구하는 데에 모두 바쳐졌다. 그 흔한 소설책도 읽은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나 인사 말고 무얼 할 수 있는지, 그것은 완전히 상상의 세계였다. 특히 남녀에 관한 일은 아주 천박하거나 아주 고귀하기만 했다. 색욕에 빠지지 않고 또 성인도 아닌 평범한 남녀가 만나 무얼 하는지 상상할 만한 실마리도 그에게는 없었다. 무얼 했어요? 손을 잡아요? 키스를 했나요? 아님 그냥 이야기만 나눴나요.

이제 와서 로맨스 소설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빨간 잡지 노란 잡지가 필요하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목욕을 하면서 그는 몇 번이고 차가운 물을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일순간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 또 무얼 하려고 했어? 샤워기는 계속 물을 내뿜었고 라비는 벽에 기대선 채 그 부드러운 폭력을 음미했다. 감각이 둔해져 온도를 분간할 수 없어질 때까지 그는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조금 숨이 가빠왔다.
힘겹게 목욕을 마치고 라비는 찬장에서 수건 두 장을 꺼냈다. 몸을 닦으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거울에 어른거렸다. 그는 동작을 멈추고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조금 마른 듯한 상체와 뺨, 물에 젖어 거의 새파랗게 질려 보이는 머리카락, 입술. 자신의 모습이었다. 거기서 조금씩 뒷걸음치다가 툭, 하고 벽에 부딪혔다. 뭐야, 나도 꽤 무섭게 보이는구나. 라비는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 급하게 옷을 입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미 돌아와 있던 램이 여어, 하고 손을 흔들었다. 해후한 친구에게 하듯 새삼스러운 인사였다. 그제야 라비는 시계를 보고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통 터치하듯 욕실로 들어가면서 램은 일찍 자라고 당부했다. 내일 새벽 배니까. 침대에 누운 라비는 탁자 위에 하얀 종이봉투가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크로켓이었다. 내용물의 열기가 식어 밑 부분이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표면에 물기가 맺힌 음식물을 꺼냈다. 그러곤 우적우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날 밤 라비는 아주 오랜 만에 꿈을 꾸었다. 꾸면서 꿈인 것을 아는 이상한 꿈이었다.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절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집이 있었다. 어린애가 그린 것처럼 조악한 풍경이었다.
거기서 램이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처럼 머리가 길지 않았다. 귀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얼굴도 더 어려 보였다. 패스파인더 자격증에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일전에 보았을 때는 어쩐지 싱거워 보였던 그 모습이 꿈속에서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라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용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은 기묘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마치 음악처럼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질였다. 라비는 문득 자신이 지극히 행복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로 느끼는 가벼운 즐거움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시작되는 기쁨으로. 눈앞에 남자가 정말 멋있게 느껴졌다. 딱 그렇게 생각했을 때 램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검고 깊은 눈이 다정함으로 빛났다.
저기, 로테-.
그러고 나선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배경도 갑자기 바뀌었고, 그는 다시 왕도로 돌아가 있었다. 확실한 것은 눈 뜨기 직전 자신이 어떤 보드라운 손을 잡고 저기, 로테 하고 불렀다는 것뿐이다.
눈을 뜨고 나서 라비는 한참 천장을 보며 누워있었다. 첫째는 생생하게 울리는 <저기, 로테> 때문이었고 둘째는 눈 아프게 쏟아지는 햇살 때문이었다. 건너편 침대가 비어있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새벽 배라고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저기, 로테>는 여느 꿈의 단어들이 그렇듯 급속히 퇴색해서 웅웅거리는 울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간밤에 동료가 누워 잤을 침대는 종업원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시계의 두 지침이 12 근처에 모여 있는 것, 기다란 갈색 배낭이 아직 문간에 놓여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새벽 배는 떠나갔고 그들은 여기 남았다는 말이다.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아니, 로테가 잡기라도 한 걸까. 그는 일어나서 방안을 어슬렁거렸다. 그런 가능성을 점쳐 본 자신이 갑자기 밉게 느껴졌다.
방을 나오니 그보다 연상이고 램보다는 어릴 것 같은 종업원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기름걸레질한 복도는 온통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그는 라비에게 방을 정리할까요, 하고 물었다. 고개를 저어보이자 청년은 곧 모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시로에 간다던 그 분이시죠? 배가 큰일을 당한 모양이에요.”

폭풍이야, 라고 말하며 로테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마치 그녀의 탓으로 폭풍이 불었던 것처럼. 마침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 위로 햇볕이 내리쬐었다. 희극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라비는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로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던 램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두 번 박수를 쳤다. 항구에서 금방 돌아온 탓에 그의 몸에서는 움직일 때마다 바다 비린내가 났다.
“바닷가 날씨라는 게 원래 제멋대로야. 잠깐 라비, 그렇게 소금을 많이 치면 못 먹잖아.”
“다 먹은 거야.”
의도하든 하지 않든 램의 잔소리는 정말 흥을 깨는 데가 있었다. 라비는 몇 번 흔들지도 않은 소금 병을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로테가 탁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접시를 드는 솜씨가 정말 훌륭하다고, 라비는 생각했다. 그녀가 주방으로 사라지자 램은 의자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다. 거의 무표정해 보일 정도였다.
종업원에게 배의 난파 소식을 전해 듣고서 라비는 무엇보다 램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기뻐할지도 모른다. 스물넷이나 먹어서 그렇게 천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얼굴을 찡그릴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탈 배가 난파되었어. 한데 그는 소금쟁이 한 마리 뜨지 않은 호수처럼 잔잔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폭풍에 관해서도 한 마디 늘어놓지 않았다. 결국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을 때 라비는 미미한 굴욕감을 느꼈다. 무감각한 동료의 얼굴은 그를 비웃는 것도, 꾸짖는 것도 같았다. 막상 입을 열게 되자 그는 시원한 태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시쯤이었나,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 바람 부는 소리도 나고. 하긴, 창문을 닫으려고 있어났을 때도 너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더라. 바람이 윙윙 불어댔는데. 새벽까지 그랬어. 조용해졌나 싶으면 더 크게 몰아치고. 대단했지. 그러다가 해가 뜰 쯤 거짓말처럼 사그라졌어. 큰일이 났을 것 같아서 항구에 가 봤는데……. 그래. 항구의 직원도 넋이 나갔더라고. 금방 배편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어. 적어도 아흐레 안에는 말이지.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응, 그렇게 됐어.”
“배가 난파되었으면 사람은?”
“아직 잘 모른대.”
그렇게 말하고 램은 작게 하품을 했다. 폭풍에 빼앗긴 잠이 이제 몰려오는 모양으로. 못 참겠다는 듯 그는 크게 하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녁에 다시 이야기하자. 좀 자야겠어.”
램은 라비를 식당 한쪽에 놓아두고 방으로 올라갔다. 동료가 자고 있을 방에 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고 계속 거기 있는 것도 스스러워서 그는 여관 밖으로 나왔다. 혼자 나가도 괜찮니, 하는 로테의 목소리가 뒷전에서 들려왔다. 램이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고 생각하자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강렬한 햇빛이 정면으로 내리 쬐여서 라비는 또 얼굴을 찌푸렸다. 한순간 세상이 까맣게 보였다. 동그랗게 해의 잔상만 남기고, 그는 현기증이 가실 때까지 여관 문고리를 잡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문 옆에 난 작은 창문으로 로테가 불쑥 고개를 내밀어 그는 깜짝 놀랐다. 아니,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에요. 그 말을 할 때 라비는 부끄럽고, 스스로가 몹시도 별 볼일 없이 느껴졌다. 로테는 턱없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이마를 한 번 쓸어 올려주었다.
“그래, 이제 어딜 갈 참이니?”
“그냥 구경이요.”
또 무슨 말을 했더라. 웅얼웅얼. 날씨가 참 좋다고 이야기한 것 같다. 이 아가씨와의 대화는 소년에게 동료의 화를 돋우는 것, 모르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거는 것과 또 다른 거북함을 안겨주었다. 여관이 있는 골목 끝까지 도망 나와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이미 들어간 후였다. 그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늘게 뜬 눈에 골목 여기저기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가 비쳐보였다. 폭풍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놀리려고 꾸며낸 장난처럼만 느껴졌다.

이 산책길에서 라비는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아니,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묘하게도 머릿속에 남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여관을 나선 후 그는 하릴 없이 도시를 떠돌았다. 구경을 하겠다고 한 이상 금방 돌아가는 것도 우스워 보일 터, 허나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도시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도 잘 몰랐다. 바다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새벽에 배를 타리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던 그의 패스파인더는 그때가지 클라이언트에게 바다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로든 가는 것이라면 그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바다를 향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발걸음. 쨍쨍한 햇빛이 정수리를 따끈따끈하게 데우기 시작했다. 길을 다니는 동안 라비는, 정확히 라비의 신발은 물웅덩이와 수없이 조우했다. 두 남녀가 서 있는 좁은 골목에 이른 것도 흙탕물에 떠오른 뭉게구름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던 탓이었다.
그가 골목으로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남자는 내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마, 하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는 또 내 가족들도 만나지마, 우리 집에도 찾아오지 마, 하고 패대기치듯 내뱉었다. 두 사람이 각각 길 양 편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비는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도망치는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온 후 라비는 곧 여자가 쏘아대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이 막힌 듯 조용한 골목은 오히려 송연한 기분을 들게 했다.
다시 그 골목에 들어선 것은 오후의 끝자락 즈음이었다. 라비는 바다 비린내에 젖어 있었고, 물론 바다는 보지 못했고, 어지러웠으며 조금 전에 접질린 왼쪽 발목에서 올라오는 간헐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번에 소리를 지른 것은 여자였다. 끝내, 하고 내지르는 소리는 마치 비명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대상이 자신이기라도 한 듯 라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지치고 놀란 채 그는 골목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아까 일도 있고 똑같은 짓을 하기는 계면쩍었다. 등을 돌려 빠져나가는 것은 더욱 꺼려졌다. 결과를 말하자면 그는 다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야 했다. 두 남녀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사나운 눈빛을 던질까봐 그는 미리부터 얼굴을 붉혔다. 몸을 땅에 붙이다시피 하고 두 사람 앞을 지나갔는데 그들이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더욱 어색해졌다. 그들이 느껴야할 수치심까지 모두 자신이 떠맡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렇게 예쁜 여자가 무얼 그렇게 나쁜 짓을 했을라고, 하며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던 남자를 탓했다. 램이 들었으면 두고두고 웃을 일이었다.
낯이 두꺼운 커플을 지나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관 앞에 이르렀다. 우연이고, 운이 좋은 탓이었다. 조금 라비 덕을 보자면 너무도 부지런히 헤매서 숙소 앞을 지날 확률이 높아졌다는 점. 때마침 저녁이지 않은가. 바다고 뭐고 모두 지겨워졌기 때문에 그는 여관 문을 밀어젖혔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덮쳐왔다.
그의 동료는 얼굴이 붉게 익은 아저씨들 사이에서 한잔 걸치는 중이었다. 머리가 헝클어졌고 옷깃은 구겨져 있었지만 기운차 보였다. 라비는 그쪽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때렸다. 이런 때, 램이 전략적인 파당을 만들고 ‘한잔 걸칠’ 때, 라비는 인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면 어영부영 한 자리에 끼게 되고 그러면 라비는 홀로 벙어리,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도 할 말도 없었다. 인사를 하지 않으면 싫은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 끝이 났다. 뭐야, 이 어린 녀석은, 뻔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지지 않을 만큼 인상을 써주고 라비는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밟는 소리가 돌림 노래처럼 따라온다. 이런 때 램이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라비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방에 도착하자 그는 전해들은 소문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라비도 결국 모두 죽은 것 같대,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몸을 움츠렸다.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그는 얼마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 고개를 숙이던 로테의 모습이 생각나 어찌할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저, 그럼 배가 금방 뜨지는 못하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이번 주 내에 여객 편은 없을 것 같아.”
말을 맺고 램은 몸을 돌려 동료를 마주보았다. 무언가 기대하는 말이 있는 눈빛으로. 라비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입이 마르고, 적잖이 당혹스러워서 하마터면 저녁밥은 먹었는지 물어볼 뻔했다.
“그럼,”
“역시 떠나고 싶지?”
“어, 어째서?”
“아니, 아냐? 정말?”
마치 서로 다른 페이지의 대사를 읽고 있는 것 같은 대화 어쩐지 진저리가 나 라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램은, 또 그 나름대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라비는 제법 잘 설명했다. 비록 불세출의 길치이고 타인의 태도에는 둔감, 심지어 자신이 무얼 생각하는 지에도 무감한 래비어트 시번이었지만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 허다한 마법서를 잘도 이해했으니 좋은 편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위안삼기도 했다. 자, 그러니까 이런 말이야. 우린 그 섬에 가서 계획을 세우기로 했어. 느긋하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일년 중 8개월은 눈에 덮여 있다는 동북부, 부르주아의 관광도시 남부, 아, 거긴 왕도를 넘어가야 하니까 빼는 게 좋겠어, 그러고도 남는 동부 평야 남서쪽의 유적지들. 사방팔방, 어디로 가야하지? 아무 것도 정한 게 없는데. 가끔 차분하게 이야기 하는 라비는 이기니 지니 하는 것에 목숨 거는 치기 어린 시번과 다른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램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오랫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얕게 움직이던 턱이 목에 닿을 때까지 머리를 숙이더니 한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정말 내 말이 옳아, 하고는 빙긋이 웃었다. 그게 지도찾기 기계의 작동 신호라는 것은 다음날이 되어서 드러났다.

다음날도 맑았다. 창 밖에서 내려다보니 물웅덩이도 모두 메말랐고 길가는 흙먼지로 덮여 있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은 바 또 이렇게 맑은 날씨는 드물단다. 하여튼 폭풍이 오는 일도 드물었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들이군, 하고 라비는 생각했다.
아침과 점심 사이에 걸린 때라 식당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빈 카운터를 둘러보고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그것이 로테인지 그녀의 어머니인지 하는 것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까. 램은 볕이 들지 않는 자리에 앉아 테이블보다 큰 지도를 펴 놓고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이미 몇 장의 사서함용 메일이 지도 위에서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무게감이 없어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한 이 반투명의 편지를 라비는 싫어했다. 일단 방법론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그의 호불호는 아무 효용이 없었지만. 한참동안 라비는 그의 옆에 서서 알록달록한 화보와 달력, 깨알 같이 글씨가 박힌 소책자를 넘겨다보았다. 업무를 볼 때의 램은 견고한 성벽 같아서 감히 침입하기도 어렵고 스스로 움직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마침내 지친 라비가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야?”
“응, 아니, 그냥 준비 좀.”
“로테는 어디 간 모양이지?”
책에 눈을 붙인 채로 우물우물 대답하던 램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다른 세계로 끌려나와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주위를 살펴보았다. 저러니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메일들처럼 무게감 없이 하늘하늘 흔들리지 않겠는가. 관두자고, 배나 채울까 몸을 돌리려는 찰나에 그가 아아, 하고 라비를 불러세웠다.
“그 아가씨라면 약혼자를 만나러 갔어.”
“뭐?”
“데이트.”
그는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굳게 닫힌 성문이 되었다. 비척비척 카운터 쪽으로 간 라비는 문득 식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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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왜인지, 쑥쓰럽고 죄송한 기분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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