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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The Power - 2장 음모(3)

2003.08.16 14:5808.16



"빌어먹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길을 앞장서서 으스대듯이 걷던 고창천이 몹시 성난 투로 소리질렀다. 그는 무척 화가 난 듯 괴성을 내지르며 머리 위를 커다란 두 손으로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부러지는 소리가 어둠만이 가득한 공허한 공간을 날카롭게 가르더니 곧 바닥에 뭔가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나무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잔가지였다. 잔가지라고는 하나 그 굵기가 수안의 팔뚝보다 더 굵었다. 고창천은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듯,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를 발로 마구 밟으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 있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1시간이 넘도록 수안 일행은 컴컴한 어둠만이 가득한 길을 아무 소득도 없이 무작정 걷고 있었다. 적외선 상태로 전환된 앤턴을 통해 그들은 사방을 살피며 전진했지만, 보이는 거라곤 손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꽉 들어찬 나무줄기들뿐이었다. 게다가 발 밑이 푹푹 꺼지는 바닥 탓에 그들은 보통 때보다 체력이 더 빨리 소진되는 것 같았다.

길을 빽빽이 둘러싼 나무줄기들이 심하게 뒤엉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갈수록 짓누르는 무게 탓인지 길보다는 통로에 가까운 길의 높이가 점점 낮아졌다. 그러다 보니 키가 2미터가 약간 넘는 고창천 같은 경우, 머리가 닿을 듯 말 듯한 위쪽에서 간간이 삐죽 튀어나온 잔가지에게 머리를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처음에는 대범한 척 호탕하게 웃어대며 넘기더니 이렇다할 꺼리가 없는 따분한 상황에 무척 짜증이 났는지, 결국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좀 전 같은 거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대장님."

수안의 뒤에서 주변을 살피며 걷던 김찬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앤턴의 옅은 회색 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의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스플린트가 걱정됩니다."

김찬건의 조심스러운 충고에 수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쭉 그 생각을 했어. 생각보다 이곳은 너무나 방대한 곳인 것 같아. 벌써 1시간이 넘게 걸었는데, 아직도 끝이 보이질 않아. 후......"

"게다가 이 숲은 너무나 조용합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말입니다."

"두분 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시는 거죠?"

옆에서 중형 솟차레 총을(알루미늄 소립자를 이용한 플라늄 레이저를 증폭시킨 연방대의 대량 살상 무기 중 하나.)어깨에 메고 주변을 세심한 눈길로 살피던 고수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어 들며 물었다.

수안과 김찬건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겁고 두꺼운 전투복을 입긴 했지만, 그녀의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몸매가 그대로 들어 나있었다. 체구가 작고 호리호리한 그녀가 들기엔 너무나 무거울 것 같은 솟차레 총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앤턴 너머에서도 너무나 잘 보이는 그녀의 날카로운 두 눈이 수안과 김찬건을 파헤치듯이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별 다른 얘기는 아니야."

"스플린트에 대한 얘기라면 장문수와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고수휘는 수안이 자신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게 화가 난 듯 한껏 오만한 말투로 말하고는 저만치 떨어져 걸었다.

"고......고맙군."

수안은 그녀의 말에 무안한 듯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김찬건에게로 눈을 돌렸다. 사실 그는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믿고 신용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사내였다. 게다가 김찬건이야말로 가장 믿을만한 부하였다. 아마 누구라도 그의 모습을 한번 본다면 수안처럼 그를 믿고 신용하게 될 것이다. 떡 벌어진 어깨에, 1미터 80이 넘는 건장한 체구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남자다움이 철철 넘치는 사내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각이 뚜렷하게 진 얼굴, 강인함이 느껴지는 약간 앞쪽으로 돌출한 턱, 부리부리한 눈매, 까무잡잡한 피부가 한데 어울려 더욱 남자다운 매력을 한껏 뿜어냈다. 이런 그의 외모적인 성향은 지금껏 여자보다 남자에게 더 많은 호감을 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자네에게 좋은 생각이 있나?"

"대장님도 아시겠지만, 스플린트를 잃게 되면 우리가 이 음산한 숲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인터프라이즈 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아직까지 이 숲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대원 한 두 명은 스플린트를 지켜야 합니다.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스플린트만 잃지 않으면 이곳을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김찬건의 일목요연한 설명에 수안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만족한 얼굴을 내보였다. 그 역시 김찬건과 같은 생각을 쭉 해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는 게 좋겠나?"

"고수휘 대원의 말대로 장문수를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장문수......"

수안은 처음 볼 때부터 장문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누가 그런 약골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는가! 장문수라는 이름 석자를 듣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장문수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게 탐탁치 않다는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스플린트를 자동으로나 수동으로나 완벽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 뿐입니다. 물론 장문수만으로 스플린트를 지킨다는 건 힘에 부친 일입니다. 그러니 대원 하나를 더 딸려 보낸다면 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가 없으면 인터프라이즈 호와 교신할 수 없네."

김찬건의 말에 수안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이곳은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왜 진작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나!?"

"저......저도 장문수 대원에게서 아까 전에서야 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김찬건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알고서야 급히 얼버무리는 식으로 말했다. 원래 수안은 참으로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특이한 성격 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투, 행동, 억양, 몸짓 같이 외부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무리 자신을 많이 도와준 고마운 동료라 해도 그 같은 외부적인 것들에게서 꺼려지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수안은 그 동료에 대해 냉정하게 재정의를 내려 버린다.

이 맘쯤 되니, 수안은 김찬건에게서 왠지 모를 억지스러움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눈은 앤턴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김찬건의 얼굴을 낱낱이 파헤치듯 훑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김찬건, 그 또한 수안 못지 않게 유능하고 눈치 빠른 인재였다. 그는 수안이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제가 미처 그 사실을 대장님께 보고하지 않은 것은 저의 어리석은 실수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진정으로 잘못을 고했다. 수안은 그가 연방대 내에서도 상당한 재능을 지닌 인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남자다운 외모 또한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차라 수안의 의심병은 더 커지지 않고 쉽게 사그라 들었다.  

"그렇다면 장문수와 누구를 보내야겠나?"

"고창천이라면 안심입니다."

"흠......고창천이라......가려고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수안은 김찬건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워낙 불같은 성격인데다가 상관에 안하무인인 고창천, 그 작자를 수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이라도 흉측한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이 음산한 숲에서야말로 팀웍이라는 건 바다 속에 감춰진 그 어떤 보물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사사건건 고창천과 부딪힐 게 뻔하다는 걸 잘 아는 수안은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중요한 팀웍을 깨뜨리는 그를 계속 이끌고 가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를 설득하겠습니다."

김찬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저 멀리 앞장서서 걸어가는 고창천에게로 날아가 듯이 뛰어갔다. 그리고는 고창천을 불러 세우고 그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를 했다. 그러자 그는 무척 화가 난 듯 길길이 날뛰며 두 팔을 허공에 벌려 뭔가를 해명하듯이 허우적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앤턴을 쓴 얼굴을 김찬건에게 들이대며 뭐라고 말했다. 이에 김찬건이 다시 그에게 귓속말로 뭐라 말하니 그는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크게 들썩하고는 김찬건의 뒤를 따라 수안에게로 걸어왔다.

"고창천 대원이 장문수 대원과 함께 스플린트를 지키겠답니다."

수안에게로 돌아온 김찬건이 고창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앤터 너머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썩 내키지 않아 보였으나,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약점 잡힌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여튼 절인 배추처럼 축 처진 고창천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던 수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 김찬건 대원, 장문수 대원을 불러다 주겠나? 서로 확실하게 안면이 터야지."

수안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장문수를 굉장히 못 마땅한 얼굴로 노려보던 고창천이 생각났다. 지금 앤턴 너머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이었다. 두꺼운 입술은 쉴새 없이 씰룩거렸고, 눈썹이 없는 눈가에는 흉측한 상처와 구별 없이 어울린 주름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수안은 자신도 모르게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으나, 다행히 그는 못들은 듯 했다. 수안은 대체 김찬건이 고창천, 저 험악한 거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왠만 해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저 인간이 저렇게까지 꼬랑지를 내린 걸 보면 분명 무슨 약점을 잡힌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데려왔습니다."

"부......부...부르셨습니까?"

김찬건의 뒤에서 움츠리며 서 있는 장문수가 얼굴을 김찬건의 어깨 너머로 슬쩍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워낙 마른 탓에 두꺼운 전투복을 입었다기보다는 걸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전투복의 헐렁한 부분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전투복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그의 모습이 정말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거기에 더듬더듬하기까지 한 그의 말투에 수안은 정말 속이 뒤집혔다. 아무리 정식 군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 하나 하나는 수안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시간이 있으면 저 인간을 내가 완벽하게 개조시켜 버리겠어......수안은 속으로 이렇게 다짐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하여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던 두 명의 골칫덩이를 중요한 일이라는 명목으로(물론 중요한 일이다.)저 멀리 보내 버린다는 사실에 수안은 속으로 무척 기뻤다. 마치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기쁨이 어떤 건지 잘 아는, 족쇄로부터 해방된 죄수처럼 말이다. 당분간이지만 이 두 명을 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큰 짐 하나를 던 것처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수안이 한껏 무게를 잡고 말했다.

"자네 둘이 해야할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자네 둘은 왔던 길로 돌아가서 스플린트를 사수하도록. 스플린트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보루이다. 그것을 잃으면 우리는 여기서 꼼짝없이 죽어야 한다. 만약 예상치 못한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조명탄을 쏘도록. 알겠나!?"

건성으로 듣던 고창천은 씨근덕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뭔가라도 해보겠다는 듯한 투지를 불태우던 장문수도 공간이 많이 남아 흔들거리는 앤턴을 한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런데 장문수 대원......정말 여기에서 인터프라이즈 호와 교신이 되지 않나?"

"그......그...그렇습니다......이...... 숲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인터프라이즈 호에 우리의 자......작전 위치가 그대로 송신되었는데......수...숲에 들어오고......나...나서 부터는......언어 벼...변환기는 물론......렌스넉(허가 받은 프로그래머나 통신관이 쓰는 장거리 전용 통신기기)조차...... 부...불통입니다......"

수안은 얼른 허리춤에 차고 있는 언어 변환기의 가운데 버튼을 눌렀다. 그것은 언어 변환기를 통신 상태로 전환시키는 버튼이었는데, 제대로 작동하는 중이라면 초록색 불빛이 켜져야 하는데 장문수의 말마따나 작동불능 상태를 의미하는 빨간 불빛이 깜빡거렸다.

"확실히 이 숲엔 뭔가가 있어. 만약 먼저 파견된 조사팀이 이곳에 들어왔다면 그 동안 이렇다할 보고가 들어오지 않은 이유가 설명이 되는군."

수안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뿐만 아닙니다."저만치 떨어져 있던 고수휘가 어느새 수안의 옆까지 다가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직도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수안에게서 저만치 떨어져서 사방을 경계하며 걷던 곽철민, 서기수, 박 권도 수안 곁으로 모여들었다. 모두들 의미심장한 말을 꺼낼 것 같은 고수휘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보이지 않습니다."

"난 또...... 안개 따위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지금 우리는 안개......"

"바보 같군요, 대장님! 지금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는 이 숲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안개가 자욱하게 낀 걸 봤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안개 같은 것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부터 쭉 생각해 보니 우리가 처음 이 숲에 들어설 때부터 안개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이렇게 빨리 사라질리 없어요. 게다가 통신장비까지 작동불능상태가 됐습니다. 이게 뭘 뜻하는 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설마...... 포그월(Fog-Wall)!?"

포그월......아메리카 자유국에서 과거에 자주 사용했던 전매특허 무기 중 하나이다. 수안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우둔한 자신의 머리가 한심스러웠다. 왜 그걸 몰랐을까!? 이 멍청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하다니......그는 자신을 속으로 강하게 질책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폈다. 앤턴의 적외선 장치를 끄고 보통 상태로도 살폈다. 분명했다. 이건 포그월이 분명했다.

"자네 말이 맞군."그는 고수휘의 뛰어난 관찰력에 서투른 칭찬의 말을 했다."바보같이......이걸 눈치 채지 못하다니......"

"뽀글인지 포그인지 하는 그게 뭐요?"

고창천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대원들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포그월일세. 한때 아메리카 자유국 녀석들이 이걸로 우리를 많이 골탕 먹였지. 우리도 지금 그걸 사용하고 있는데, 자네는 그것도 모르나?"

옆에서 서 있는 곽철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쳇! 총만 잘 쏘면 그만이지...... 뽀글인지 포그인지 하는 그 따위 걸 알아선 뭐해!"

"모두 조용히 내 말을 잘 들어라."수안은 이렇게 말하면서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우주의 하얀 악마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어떤 녀석들인지 몰라도 포그월을 썼다면 뭔가를 감추려는 게 틀림없어. 숲에 들어온 지 벌써 1시간이 넘었다. 녀석들의 의도가 은신이라면 아마 놈들은 지금쯤 우리가 이곳에 온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장문수, 고창천! 너희 둘은 지금 즉시 스플린트로 돌아가라! 스플린트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반드시!"

"지......지...지금 도...돌아가는......게"

"멍청한 소리! 싸우지도 않고 그냥 돌아간다구. 이런 겁쟁이 녀석하고 같이 있어야 하다니!"

"그만! 지금 돌아갈 수 없다. 분명한 건 적은 알파리아 인은 아니라는 거다. 알파리아 인이 포그월 같은 게 뭔지 알 리가 없을 테니까.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렇게 방대한 숲에 포그월을 깐 껄 보면 수가 만만치 않을 거야. 일단 먼저 파견된 조사팀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대체 포그인가 하는 그게 뭐 길래 이렇게 난리들이요?"

"내가 말해 주지."김찬건이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포그월은 안개를 만들어 내는 장치를 말하지. 포그월을 일직선상에 여러 개 설치하면 가상의 선을 따라 안개가 형성된다. 그 안개는 위에서 보면 얇은 두께로 형성돼 있는데 꼭 벽처럼 생겼지. 그러나 정면에서 포그월을 보게 되면 단지 벽으로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마치 진짜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 같은 입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게 포그월인지 모르는 사람은 안개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게 낀 것만 보고 다가가기를 포기하지. 그것뿐만 아니라, 포그월로 사방을 둘러싼 지역에 들어가면 강력한 에너지 장 때문에 모든 통신 기기가 작동불능상태가 돼버린다. 그 옛날 본국도 아메리카 자유국과 싸울 때, 포그월 때문에 많이 당했었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포그월이 아니라, 과연 그걸 누가 사용했는지야......"

"자네 둘은 빨리 돌아가게. 다시 말하지만 목숨을 걸고 스플린트를 지켜야 한다. 앞으로 24시간 내에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인터프라이즈 호에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도록. 그 때까지 안 돌아오면 우린 죽은 거니까."

수안의 말에 모두들 모골이 송연해 졌다. 물론 수안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정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주의 하얀 악마와 그 잔당들이 이곳에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안의 가슴속에서는 왠지 모를 흥분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구쳐 올랐다. 악인이든, 살인자든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우주의 하얀 악마, 존 말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시킨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적외선을 통해 단조로운 색감으로 가득한 길을 바라보았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 있었다. 하얀빛으로 번들거리는 바닥은 은하수처럼 반짝거렸고, 양옆으로 빽빽이 들어찬 나무줄기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수안 일행이 포그월을 뚫고 공포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이 저주받은 숲에 들어선 그 때부터 알 수 없는 적과의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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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아 03.08.16 16:12 댓글 수정 삭제
    첫번째 것부터 이것까지 다 보고 나서 리플은 하나만 다는 이 중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인이 미천하여 높으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나이다. 이 한 목숨 바쳐 그 기상 높이리라... [퍽] 자자, 장난은 그만두고... 아무튼 최현진 님, 정말 잘 쓰셨습니다. 세상에, 서술을 이렇게나 길게 쓰실 수 있다니, 저로선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전 이곳에 감히 올리기도 부끄러운 극악을 써대는 바보 글쟁이걸랑요. 아니, 저한테 글쟁이란 명칭을 달았다간 오히려 글쟁이란 명칭이 분노할 테죠... 흑흑. [퍽] 방정 좀 그만 떨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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