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하죠?"

수안이 사령관 집무실 밖으로 나와 자기 방으로 발걸음을 떼는 순간, 뒤에서 정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사못 야릇한 기대를 걸지만, 수안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짜증부터 밀려왔다.

"아, 하연수 씨!"

그는 되도록 방그레한 얼굴이 풀어지지 않도록 애쓰며 반가이 외쳤다. 그러면서 그는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웬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등을 벽에 대고 서 있었다. 군대 안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매우 정성 들여 빗은 듯한 붉은 머리에 끝이 뾰족한, 갈색 빛이 도는 선글라스가 그녀가 얼마나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무척 자존심이 강한 여자로 보였다. 보기 좋게 균형 잡힌 오똑한 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물론 화장으로 떡칠 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백옥보다 더 하얀 피부는 어떤 사내라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푸른색 블라우스와 무릎 바로 아래까지 덮어 주는 회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외모만큼이나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물씬 배어 있었다. 그러나 수안은 그런 옷차림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종군기자라면 군 내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군내에서는 배정 받은 군복을 입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쓸데없이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짓은 하지 마십시오."

수안이 톡 쏘듯이 말했다. 그러자 하연수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쓸어 올리고는 말했다.

"다음부터 주의하죠. 그나저나 회의장에서는 아주 인상적이더군요."그녀가 선글라스 옆으로 흘겨보며 말했다. 수안은 그녀의 눈빛이 왠지 께름직했다."확실히 제 눈이 틀리진 않은 것 같군요."

"그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하자고 한 것 같은데......"

수안이 약간 굳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하연수, 그녀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붉으스름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뭔가 결심한 듯 들고 있던 손가방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는 본인이 더 잘 알겠죠?"

수안은 반쯤 뜬눈으로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하연수가 꺼내 든 물건이 뭔지 알고는 화들짝 놀랬다.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손바닥만한 시디가 담긴 주황색 케이스였다.

"호호호. 잊지는 않으셨나 보군요. 당신이 한 짓이 여기 다 들어 있지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지금 이런 일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여유도 없고, 또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오. 그런 말도 않는 얘기나 하려고 사람을 불러 세우다니! 난 그만 가보겠소."

수안은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을 간신히 억누르고 성난 어조로 소리쳤다. 하연수가 꺼내 든 시디가 진짜든, 가짜든 간에 그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그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노련함이 있었기에 다행히 그 영악한 여우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맘을 꿰뚫어 본 듯 묘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런가요? 난 이게 정말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는데......그렇지! 권철기 대장군 님은 이게 뭔지 잘 아시지 않을까? 그럼 이만 가보죠."그녀는 몹시 실망한 듯이 말했지만, 수안의 귀에는 마치 일부러 자신의 정곡을 찌르려고 과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결국 수안은 그녀의 노련한 행동에 두 손을 들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요?"

"이제야 솔직해 지셨군요."

하연수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바깥으로 드러난 그녀의 두 눈 정말 맑고 깨끗했다. 수안도 그녀의 크고 맑은 눈망울에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천박한 육체의 미를 한껏 뽐내는 외양과는 전혀 다른 순순함이 엿보이는 그녀의 눈이 정말로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안은 겉으로 아름답게 드러나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수안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겉으로 보이는 사람의 생김새를 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자기 기준대로 섣불리 결론 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자란 존재에 대해서는 더 심했다. 그는 여자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아주 무서운 존재로 분류해 두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여자가 예쁠수록 극단적인 악인이나 또는 파렴치한 악의 하수인에 보다 가까워진다고 생각해 왔다. 자기 기준에만 따른 매우 이기적인 판단이 아니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서기 2500년이 한참 넘어간 지금, 사랑이니 믿음이니 하는 말은 이미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특히 여자가 자신의 육체적 장점을 이용해 앞날이 창창한 남자를 파멸로 이르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 일어났다. 문제는 단순한 이성간의 만남과 이별이 아닌 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개입된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권력의 요직에 남자들이 들어앉아 있었으니, 여자야말로 라이벌을 제거하는데 가장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수안 역시 오래 전부터 그런 일들을 수 차례 보아왔다. 얼마나 한심스럽고 끔찍한 일인가? 그러니 수안 뿐 아니라, 남자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여자에 대한 혐오감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이 육체적 욕망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나 수안은 달랐다. 그가 어떤 것에 한번 아니다라고 마음을 정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절대로 그것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아직도 이해가 안돼. 대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수안이 노기를 띤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그는 하연수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기자였다. 그 중에서도 악질기자! 그녀는 한번 눈독들인 것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알아내는 위인이었다. 그런 인간에게 흔들리는 기색을 보여주면 곧바로 확신을 갖고 본격적으로 달려든다는 걸 잘 아는 수안이기에 시디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정하기로 마음 정했다. 그의 물음에 하연수는 고개를 젖히고 깔깔 웃어댔다. 통로를 거닐던 몇 몇 군인들이 흠칫 놀란 듯 수안과 하연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웃음을 뚝 그친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수안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살며시 쓸어 내렸다."난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제 방에 가는 어때요? 옛날엔 우리 좋았잖아요......"

"집어치워!"수안이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무척 화난 듯 날카롭게 외쳤다."당신한테 이제 관심도 없어! 그 때 일은 내 생애 최악의 실수였어! 그게 할 말이라면 난 그만 가보겠어.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게 뭔지 몰라! 그러니 볶아먹든지 삶아먹든지 마음대로 햇!"

수안은 그녀의 손을 탁 치고는 자기 갈 길로 횅하니 가버렸다. 수안이 밝은 빛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그녀는 피식 웃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주황색 시디 케이스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 안으로(인터프라이즈 호의 쓰레기 통은 벽에 붙어있다. 경첩이 달려있는 입구에 쓰레기를 버리면 모두 자동적으로 쓰레기 처리장으로 옮겨진다.)던져 버렸다.

"역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수안이 갔던 길과는 정반대로 따각따각 걸어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연수에게서 벗어나 자기 방으로 가던 수안은 중간에 있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한쪽 칸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지금 손목에 입을 닿을 듯 대고 화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하고 있다. 그의 매끈한 손목에는 제법 묵직해 보이는 시계 비슷한 게 걸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돌았는데 가운데에는 작은 스크린이 붙어 있었고, 그 주위로 작은 단추가 수 개씩 붙어 있었다. 스크린에는 눈부신 빛과 함께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는 지금 스크린 속의 사내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무슨 말을......하시는 건지?"

스크린 속의 사내는 몹시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어째서 하연수, 그 여자가 그 시디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 시디라면?"

"익셀리온 컴퓨터를 해킹 할 때 썼던 시디 말이야!"

수안의 말에 그는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한 얼굴로 뭔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그는 쉬지 않고 한참이나 그런 행동을 했다. 그 동안에 수안은 무척 초조한 얼굴로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는 스크린을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응시했다.

"찾았다."텅빈 공간만이 보이는 스크린 안에서 기쁨의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여기 찾았습니다."

"확실히 그게 맞는 거야!?"

수안이 스크린에 시디가 든 투명한 케이스를 들고 나타난 그 사내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며 반신반의한 얼굴로 외쳤다.

"확실합니다. 같이 작업하실 때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여기 제 이름의 약자인 'F.C'가 써 있지 않습니까?"

그가 시디를 케이스에서 꺼내 글자가 쓰여 있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스크린에 들이대며 말했다. 수안은 그제 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속으로 하연수의 교활한 속임수에 넘어갈 뻔했던 자신에게 마구 욕을 했다.

한편으로 수안은 그녀가 어떻게 해서 자신이 익셀리온 컴퓨터를 해킹했었는지를 알고 있던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뿐이었다. 자신과 전문 프로그래머인 푸칭, 그리고 아버지......그런데 하연수가 어떻게 알고 있었지? 설마 짐작만으로......그럴 리가 없다. 어느 누구라도 완벽한 보안 체계를 갖춘 익셀리온 컴퓨터를 해킹했을 거라고 생각 치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대체 무슨 수로......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다할 가설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깨달은 건 하연수, 그 여자는 여전히 교활하고 영악하다는 거였다. 어쨌든 다행히 그가 마지막에 부정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영악한 악녀의 마수에 걸려 꼼짝없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됐을 것이다. 수안은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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