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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드래곤의 연인 (2)

2004.09.02 17:0209.02

2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올 때가 됐는데, 계속 주변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얼굴에 와서 간질이는 아침 햇살도, 일어나 일어나! 라고 소리치고 있을 세라문 자명종도 없었다.

가연은 불안한 마음에 살며시 실눈을 떴다. 지금쯤이면 방 안 가득 햇살이 메우고 있을 때고, 엄마가 어디선가 홍가연 당장 일어나지 못해에~ 하면서 잔소리를 시작하고, 자명종이 때르르르릉 거리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연의 눈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손으로 옆을 더듬더듬 거리다, 뭔가 물컹거리는 것이 만져지자 순간적으로

“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물컹거리는 젤리와, 바퀴벌레와 나방이라는 가냘픈 아가씨 홍가연 양으로써는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기 전의 불쾌한 기억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맨홀에 잘못 빠져 이상한 세계로 왔고 자기 몸에서 이상한 빛이 번쩍이면서 덮치던 녀석을 밀어냈다. 그 뒤 감옥에 갇혀 마녀로 고문을 당하다가 화형당하기 직전 상공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고 비를 뿌려 불을 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기 중에 둥실 떠 있던 인상 나쁜 남자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살에 파고들던 밧줄들이 힘을 잃고 풀려서 자신이 앞으로 쓰러지던 것까지 기억했다.

가연의 옆에서 자고 있던 메이슨은, 가연이 몸을 꼼지락거리는 걸 느끼면서 슬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나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성량 좋은 목소리로 꺄악- 소리를 지르자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메이슨은 손가락으로 부딪치며 중얼거리자 천장 높은 데 매달려 있던 샹델리에의 초에 불이 붙고, 벽의 여기저기 붙어 있는 등잔에도 불이 붙으면서 방의 전경을 들어났다.

방은 드래곤 로드의 방답게 화려했다. 바닥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의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고, 침대는 윤이 나는 두터운 나무로 된 사주식 침대에 거미줄처럼 얇은 레이스가 드리워져 있었다. 가벼운 깃털을 가득 채운 암록색의 비단이불과 푹신한 베개, 매트는 보드라운 벨벳이었다.
벽의 두 면은 천장까지 올라가는 나무책장으로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다른 한 면은 기타 괴이한 도구들이 선반마다 가득했다. 창도, 문도 없는 막혀 있는 방이었다.

방을 둘러보던 가연과 메이슨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의외로 입에서 말은 술술 나왔다.

“여기는 누구, 나는 어디? 아, 이게 아니지.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너, 설마…….”

역시 이세계의 언어가 귀에 술술 들어왔다.

“오홋홋, 이 대사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어. 적재적소의 기회에 나이스 타이밍!”

메이슨은 멍하니 가연을 쳐다보았다. 가연은 손등을 입에 가볍게 대고 오호호호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서, 설마 고문으로 머리가 돈…….’
메이슨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만 들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가연이 다 웃고 나자 시미치를 뚝 떼고 가련한 여주인공인 척(!) 물었다.

“어떻게 되긴?”

메이슨이 반문하자, 가연이 여주인공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소리를 버럭 냈다.

“왜 내가 이런 데 와 있고, 당신이 왜 내 옆에서 누워 자고 있던 거냐구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난 여자, 아저씨는 남자이고 합의되지 않은 남녀가 이렇게 같이 침대에 있게 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로 말하자면 납치라던가 강간과 같은 소위 불법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거죠.”

메이슨은 어이가 없었다. 점입가경이라더니 점점 알 수 없는 이상한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역시 자기가 초반에 이 여자를 안았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여자가 맞다면 그건 참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조짐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한 거였다.

가연은 아무 말도 없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이 남자한테 갑자기 짜증이 버럭 일었다.

“이봐요. 아저씨.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뭐라고 설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가연은 자기가 이쪽 세계에 올 때부터 입고 있던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걸렸다. 도대체 이런 풍성한 하얀 잠옷을 갈아입힌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하얀 질 좋은 면 잠옷은 목 부분에 공단으로 된 단추가 세 개 달려 있고, 소매는 빨간머리 앤이 부러워할 정도의 퍼프에, 소매 끝에는 역시 공단단추와 함께 아기자기한 프릴로 장식되어 있었다. 가슴 아래로는 주름이 길게 잡혀 있는 빅토리안 풍의 잠옷이었던 것이다.

“너, 다른 세계에서 왔지?”
“그런…… 거 같은데요.”
“역시 그랬군. 어떻게 된 건지 얘기를 좀 해보는 게 좋을 듯싶은데.”

가연은 그래서 롱롱 스토리의 썰을 풀기 시작했다. 종종 그가 뭐라고 가볍게 묻기도 하면서 얘기가 진행되어 결국 묶여서 화형당하기 직전의 얘기까지 왔다.

“내 이름은 성은 홍이요, 이름은 가연 28세 낭랑소녀죠…… (중략) 그래서 이렇게 여기 제가 어둠 속에서 눈을 떠서 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른 거죠.”

메이슨은 갑자기 머리에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상황도 황당하지만, 구멍에 떨어져서 다른 세계로 와서 드래곤의 알을 낳아야 하는 이 아가씨도 역시 골치 아픈 상황인 것이다.
그때 가연이 팔을 가슴에서 엑스자로 꼬면서 물었다.

“자, 이제 아저씨 차례예요.”
“응? 뭐가?”
“내가 왜 여기 와 있고, 여기는 어디고 등등을 설명해 주셔야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당신이 내 옆에서 자고 있던 거죠?”

가연이 이렇게 당당하게 물을 수 있는 이유는 이판사판 막판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세계로 떨어져 잡혀가서 고문에 화형에, 그러다가 구조되었으니 이 사람은 자기한테 어떤 볼일이 있을 것이었다.

“일단 여기는 창조주 월든 님께서 만든 포시즌이다. 너는 뭔가 시간의 틈바구니에 잘못 빠져서 여기로 온 것 같아.”
“그리고요?”

메이슨은 뒤의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한참 망설였다. 가연은 눈에 힘을 주고 메이슨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뒷말을 이으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 박력에 눌려, 결국 알아야 할 일이니… 하는 유유부단한 마음으로 메이슨은 말을 하고 말았다.

“음……, 이런 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는 현재 내 반려로 내 옆에서 자고 있던 거다.”
“내가 왜 아저씨 반려인데요?”

가연은 이 충격적인 말에 아주 냉담하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머릿속에서는 광풍이 휘몰아치고, 블랙홀이 약혼녀라는 말로 변해 모든 걸 빨아들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겉으로는 새발의 피도 티를 안 내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반면 메이슨은 어이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여자애가 소리 지른 것이나 기타 등등 다 이해하겠다 이거다. 그런데, 이 여자애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침착하게 하나하나 요모조모 따져가며 묻고 있었다. 메이슨은 여자애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느끼며 자신의 결혼 생활이 결코 평탄치 못하겠다라는 것을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결혼(아니, 신방)이나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실 나는 드래곤인데, 폴리모프해서 인간인 척하고 있는 거야. 드래곤이 뭔지 아니?”
“사람 바보 취급하지 마, 이 토룡아! 나도 그런 것쯤은 안다고!”

일단 소리부터 치고 난 홍가연 양은 순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더니만 말을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에엣, 다, 당신이 드, 드래곤이라구?! 포올~리모오~프?!”

그렇다. 그녀는 은근슬쩍 판타지 소설 매니아였던 것이다. <드래곤 라자>도 보았고, <용의 신전>도 보았다. <가즈나이트>도 보았고, <카르세아린>도 보았다. 게다가 휘긴 경의 <비상하는 매>의 열혈 독자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카르세아린 같은 드래곤이고, 카르세아린이 했던 폴리모프 같은 걸 하고 있다는 거죠?”

메이슨은 가연의 뚱딴지같은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일단 드래곤이 뭔지 또 폴리모프가 뭔지 소녀가 대충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 그래서요? 당신이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든 토룡이든지 간에 그건 당신 사정이고요. 왜 내가 여기에 와서 당신이랑 약혼을 했네 등등의 같잖은 얘기를 들어야 하는 건지 설명해 보시죠!”

홍가연 양은 꽤 긴 말을 숨도 쉬지 않고 좔좔 해댄 뒤에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메이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왜 하필이면 이런 괴이한 반려를 만나 이런 식으로 모든 걸 까발려야 하는 걸까? 오 월든이시여!

“그러니까, 이 월든이라는 세계는 드래곤족, 마족, 신족과 같은 상위계급과, 인간, 엘프, 드워프 등과 같은 하위 계급이 공존한다. 하위계급은 그들 사이에서 자식이 나오는 것이 가능하나, 상위계급은 가능하지 않다. 상위계급은 따라서 그들의 반려를 하위계급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위계급의 인간인 내가 상위계급인 드래곤족의 당신의 반려가 되었다구요? 왜 하필 나죠?”
“그, 그건 네가 특이체질이니깐 그렇지.”

결국 메이슨은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버어버한 상황 속에서. 냉철과 지성으로 똘똘 뭉쳐진, 월든이 와서 호통을 쳐도 꿈쩍 않을 것 같은 메이슨으로서는 생전 처음 겪는 참 당황스런 일 중 하나였다.

“내가 특이체질이라구요?”
“그래. 드래곤족의 유체를 낳으려면 드래곤족과 파장이 맞아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거의 드물다. 그런 인간은 특이한 체질이어야만 가능하고, 또 굉장히 드문 편이다. 마침 네가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우리 장로 중 하나가 서거하면서 자리가 하나 비었고, 따라서 네가 나의 아이를 낳아서 그 자리를 채워야 할 거라고 월든께서 친히 신탁을 내리셨다. 그래서 너는 나의 반려, 즉 약혼녀가 된 셈이지.”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씨받이군요!”
“그, 그런 셈인가.”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도 이쯤 되니 뭐라고 더 할말도 없고, 게다가 엄마 잃은 소년의 가슴에 눈물이 흘러 내리고가 아니라 이계로 떨어진 소녀의 눈에서 짓밟힌 소녀의 순정이 불타오르며, 은하철도가 달리는 게 아니라 음산하게 오오라가 발산하는 것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천하의 홍가연이 씨받이로 이따위 세계에 끌려와 있다는 거군요. 고로 나는 멀쩡하게 저쪽 세계에서 잘 살고 있다가, 이노무 이상한 세계에 뱀새끼 따위나 낳으라고 끌려와서 붙잡혀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은 다 당하고, 거기다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불에 통구이가 될 뻔했다는 거지! 젠장할! 이런 막돼먹은 소설이 어디 있담! 분명 작가라는 것은 숏다리에 배만 나온 이티에 가슴은 절벽이고, 허벅지는 내 허리만 하고, 남자친구도 없고 게다가 취직도 안 되고 등등의 삼류인생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막나가는 걸 쓸 리가 없어!”

라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주절주절 숨도 쉬지 않고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참을 혼자서 메이슨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며 귀기를 뿌리며 입을 재잘대던 그녀가 말을 딱 멈추고, 헉헉 잠시 숨을 몰아쉰 뒤에 쏘아봤다.

“그래서, 날 어떻게 할 건데요?”
“어떻게 하다니?”
“그래서 날 어쩔 거냐구요! 나 일요일에 엄마가 잡아놓은 선도 봐야 하고, 대여점에 만화책도 돌려줘야 하고, <기억의 저편>도 아직 2권이 안 나왔단 말이에요. 게다가 오늘 엄마가 장어구이 해놓고 기다린다고 했는데. 흑…….”

갑자기 자신의 처량한 신세가 떠올랐는지, 고문당하면서도 이건 꿈일 거야라고 믿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독한 그녀가 맑은 눈망울에 이슬방울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작은 시내처럼 고운 뺨을 흘러내린 눈물줄기는 곧, 장마 때의 하늘처럼 찡그린 그녀의 얼굴에서 빗줄기처럼 폭우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 흑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돌려보내줘요. 엉엉.”

홍가연이 울면서 앙탈거리는 걸 보고 있는 순간, 작가도 ‘네가 앙탈수냐 지지배같이 질질 짜게. 엇 여자애지 미안.’ 하고 짜증이 나려던 찰나 가만히 푹신한 베개에 기대 지켜보고 있던 메이슨이 그녀의 어깨에 하얗고 긴 손, 소위 백수의 손을 얹더니 가볍게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토닥이기 시작했다.

가연이 아무리 독하다고 해도 그녀는 한국 나이로 28살의 평범한 아가씨였던 것이다. 여태까지는 독기로 어떻게든 버텨왔다 셈 치더라도 앞으로는 막막했다.

메이슨의 품에 안기자 가연은 더욱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메이슨은 속으로 이게 왠 꼴같지 않은 보모 노릇이냐고 원망도 좀 했다. 그러나 품에 안고 있는 부드러운 몸에 그의 평정한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고 있었다.

이 냉철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으로서는 생전 해보지도 못한 것이고, 사비네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변태) 로리엘에게 들킨다면 두고두고 몇백 년은 놀림감이 될 정도로 충격적인 행동이었다.

어느 정도 가연이 진정된 듯하자, 메이슨은 눈물과 콧물로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나이트셔츠 자락을 살며시 떼면서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울어서 충혈된 토끼눈같이 빨간 가연의 눈과 메이슨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눈물방울이 고여서 샹델리에 불빛에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메이슨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마치 뫼르소가 햇빛이 강해서 살인자가 되었듯이, 소녀의 아직 덜 마른 눈밑의 눈물자락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나비처럼 가비~엽게 그녀의 눈물을 입으로 훔친 그는 다른쪽 눈에도 살짝 입맞춤을 했다.

어깨를 그의 강한 손아귀에 잡힌 홍가연 양은 이미 그 충격적인 행동으로 얼어붙어 할말을 잃어버린 쇼크 상태였다.

눈물방울을 훔친 메이슨은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끌며 거슬리던 그 붉은 입술에 살며시 입을 가져다 대었다. 가연은 어릴 때부터 분할 때 울면 입술을 뜯는 나쁜 버릇이 있었고, 계속 울면서 아랫입술을 뜯은지라 발갛게 홍조를 띄며 살짝 부어 있었다.

처음에, 으레 그렇듯이 메이슨의 키스는 아주 가벼운 것이었다. 살짝 입만 마주쳐 있는 상태. 그러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유리컵을 들어 살며시 당신 입술에 대었을 때, 바로 그런 상태였다.

물론 우리의 남주 메이슨이 결코, 수도승같이 여자, 그게 뭔데 하는 아니면 여자 보기를 돌같이 보라 등의 생활을 한 건 결코 아니었지만, 원래 시끄러운 건 싫고 못생긴 것도 싫고 등등의 결벽증 환자에 가까울 정도로 까다로운 메이슨인지라 제대로 성생활(^^;)을 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이놈도 초짜였던 것이다.

하지만 수영 한 달 다니면 숨쉬기 배우듯이 이 녀석도 기본은 좀 하는 놈이었다. 게다가 남자주인공에게 따라다니는 천하의 절륜이라는 법칙도 있는 것이다. 자고로 남자주인공치고 키스도 못하고, 여자도 못 꼬시는 바보를 보았나? (종종 있기도 하다.)

메이슨이 입은 처음에 주스잔을 핥듯이 가볍게 가연의 입에 맞닿아 있었지만, 슬슬 제 목적을 생각한 듯 입술선을 가볍게 헤매더니만 살짝 갈라진 그곳에 혀를 강하게 밀어넣었다.

순간적인 쇼크로 앞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우리의 순진한 그녀 홍가연 양은 입에 뭔가 물컹한 것이 와닿자 더욱 화들짝 놀라면서 꺄악, 민달팽인가봐 하면서 눈을 꼬옥 감아버리고 말았을 리는 없고, 이 변태 놈이 내 첫키스를 감히 get 했단 말인가! 하는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메이슨은 가연의 입속을 혀로 샅샅이 탐색하기 시작했다. 진줏빛의 작은 하얀 가지런한 이들(여주인공치고 덧니 보았나?), 사실 이 이들은 가연의 어머니가 곗돈을 깨서 400만 원 주고 교정해 준 것이었다. 붉은 아네모네와 같은 입술은 보드랍고 촉촉했다. 사실 작가는 아네모네가 어떻게 생겼는 줄도 모른다. 다만 아라비안 나이트에 그렇게 나오길래 한 번 써본 표현일 뿐이다.

메이슨은 일단 분위기가 제대로 조성이 되는 듯싶자, 가연을 부드러운 깃털 이불로 가볍게 밀고 잽싸게 그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가연의 잠옷 앞섶을 헤치면서 봉긋한 가슴에 손을 대고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가연은 푹신한 깃털 이불에 폴썩 쓰러져, 무겁고 뜨거운 것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오더니만, 브래지어 속으로 뭔가 따뜻한 것이 헤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라 정신이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메이슨은 입 속 깊이 혀를 집어넣고 가연의 혀를 휘감았다. 도망치려는 가연의 혀를 강하게 빨아들이며 어느새 브래지어 속에 들어간 한 손은 가슴의 정점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라는 옛말을 떠올리며 눈을 일단 슬쩍 실눈을 떠 상황 돌아가는 걸 지켜보았다.

가연이 실눈을 떴을 때, 그 상황에 너무 놀라 눈은 저절로 화들짝 크게 500원짜리 동전처럼 크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눈을 감으며, 왜 내가 눈을 떴던가, 차라리 꿈이면 좋으련만 이라고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생각했던 말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말았다.

메이슨은 한 손으로는 가연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 이 난국을 벗어나고 보자는 현명한 21세기의 아가씨답게 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홍가연 양은 일단,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몸 위에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있는 변태 아저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메이슨은 부드러운 그녀의 몸에 점점 세력권을 넓히면서, 흥 그래봐야 겨우 키스 따위에 넋을 읽는 여자면서라는 말도 안 되는 19세기적인 사고를 하다 뭔가 이상한 기운에 고개를 번쩍 들어보니, 아틀라스 산맥의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황량한 삭풍보다도 더 매서운 눈을 한 홍가연 양이, 냉풍을 그득 실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어버린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에서 잡아 떼내면서 가연이 딱 한 마디 했다.

“변태 중년!”

이 한 마디에 얼음이 되어 쩍쩍 갈라진 메이슨을 이 세계에 오면서 얻은 이상한 힘 덕분에 천하장사가 되어 있던 홍가연 양이 가볍게 제쳐버렸다.

가연의 말에 넋이 나간 메이슨은 엉겁결에 침대 바닥에 꼴사납게 굴러떨어져버렸다. 그러자 메이슨의 몸에 금이 쩍쩍 가더니만 갈라져서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이 있대더라 하면 당연히 말이 안 되고, 몸이 굳은 채로 굴러떨어졌던 메이슨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찾은 그는, 나이트셔츠 자락을 툭툭 털며, 블랙 드래곤 로드에게 감히 도전한 저 싸가지 없는 계집애에게 대전하기 위해 일어났다.

침대 위에서 쿠션에 기대 그를 지켜보고 있던 가연이 한 마디 던지려 하자, 메이슨이 탁 막아섰다.

“내가 말하라고 하기 전까지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뭐, 뭐라구 이 변태 중년이?”
“일단, 난 변태도 아니고 중년도 아니다.”
“당신 이름도 안 밝히고 아직 순진한 여고생을 덮치는 중년이 변태 아니고 뭐야? 아 맞아. 치한이라는 용어도 있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홍가연 양도 할말은 많았다. 첫째, 그녀는 아직 처녀다. 둘째, 키스 한 번 못해 본 정말 순진한 아가씨다.(몸만. 마음은 Y물을 즐기는 있는 대로 음흉한 한 마리의 늑대이기도 했다.) 셋째, 가연의 취향은 미중년이 아니라 미소년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상한 세계에, 처음 본 아저씨랑, 한 침대에 있는데 약혼녀래, 게다가 덮치기까지 하니 그녀가 기분이 좋을래야 좋을 수도 없었고 이미 있는 대로 뚜껑이 열려 있는 상태였다.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와야 정상이지만, 워낙 우아한 여주인공이었기에 꾸욱 눌러 참고 있는 거였다. 게다가 여주인공이 육두문자 남발해 봐라 그게 어디 우아해 뵈겠나.

눈에 있는 대로 쌍심지를 켜고 메이슨을 쳐다보는 가연의 위풍당당한 기세 눌려, 일단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은 성인답게 한 발 뒤로 양보했다.

“흠, 그건 내 실수인 듯하군. 나는 블랙 드래곤 로드… 율리히 메이슨이다. 앞으로 나를 메이슨 님이라고 불러.”
“헛, 주제에 로드래요. 그거 ROAD죠, Lord가 아니라.”

더욱더 기가 찬 메이슨은 저 미친X 널뛰기 하듯 날뛰는 여자애 때문에 자신의 평정한 호수와 같은 마음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우박이 쏟아지는 희귀한 일을 경험해야만 했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구긴 체면에, 마땅찮게 날뛰는 반려의 모습 등이 메이슨의 두통을 유발하면서 피아노줄처럼 가늘고 질긴 메이슨의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서며 조율이 안 된 피아노처럼 이상한 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너, 이쯤에서 닥쳐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뭐, 뭐라구? 당신이 뭔데…….”

가연도 눈치가 좀 있기 때문에 긴 검은 장발을 휘날리며, 꼴사나운 나이트셔츠 바람이라 길고 늘씬한 장딴지를 있는 대로 드러낸, 이 음침한 얼굴의 아저씨 기분이 결코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판타지나 로맨스의 세계에 보면 싸가지 없게 말하면서 잘난 척하는 주인공들이 무수히 넘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살면 하루도 못 가서 뒤에서 칼 맞고 모두 모가지일 거라고 평소에 그녀는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싸가지 없고 막말한다지만, 그것도 경우를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자신이 기분이 좀 나빠서 이 아저씨를 많이 들볶았고, 실제로 여태 자기의 얘기도 들어주고 구해 준 것으로 보아할 때 이 사람도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게 여태까지 그녀의 결론이었다.

“너만 곤란한 게 아니라, 나도 상당히 곤란하단 말이다, 이 이세계에서 온 처치 곤란한 말썽꾼아!”

메이슨이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도 자식을 보고 싶어 보는 것도 아니고, 월든 님이 보라고 하는 거니까 보는 거고, 너가 포시즌으로 온 것도 신의 의지이니 여기서 더 이상 도망가봤자다. 그러니까 적당하게 입 닥치고 지금 몸도 제대로 성하지 않을 테니 대충 쉬고 내일 날 밝으면 그때 얘기하자.”

메이슨은 자기가 할말만 딱 한 채,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가연을 내버려둔 채 휙 사라져버렸다. 메이슨의 침실은 텔레포트로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침실에서 나간 메이슨은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간이침대가 있으니 거기서 자면 될 것이다. 간이침대에서 메이슨은 쿠션을 있는 대로 긁어모으고, 얇은 로브를 이불 삼아 덮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고 말았다.

“내 침대 두고 내가 왜 여기서 자야 하냔 말이다아아아-!”

그런 메이슨을 수정구로 쳐다보며 엄마 로리엘이 히죽 웃고 있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바보, 메이슨~! 역시 이곳에도 몰래 카메라는 존재하는 법이니, 여러분도 조심하세요!


메이슨은 가벼운 샤워를 한 후 가연을 깨우러 침실로 갔다. 아침엔 그나마 좀 기분이 나아져서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점심에 가까울 시간이니 지금쯤 푹 자고 일어났을 법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실수 중 하나였다!

홍가연, 한국 나이로 28살의 아리따운 제3의 성, 아줌마 후보인 아가씨였다. 홍가연 양에게는 엄청난 병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저혈압! 그렇다. 그녀는 오전에는 사람이 아니라 거의 좀비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메이슨이 자고 있는 가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어이, 일어나 해가 거의 하늘 중간쯤 걸렸다구. 늦게 일어나면 밥 없다.”

그러자 밥 소리에 후다닥 일어난 가연은, 엄마랑 비슷한 멘트를 했지만 엄마가 아닌 까만 헐렁한 로브를 입은 장발의 미남자에게 날카로운 눈을 던졌다.

“우씨. 아침부터 까만 게 어른거리네.”

여기에 Check Point가 있다.
홍가연 양은 심한 근시라, 평소에 두터운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끼고 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콘택트렌즈는 한 달 착용 후 버리는 물건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감옥에서도 콘택트렌즈를 끼고 자고 밥 먹고 고문 당하고 등등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콘택트렌즈 사용자들은 알 것이다. 렌즈를 세척해 주지 않으면 미끌미끌한 단백질이 껴서 렌즈가 어떻게 되는지……. 가연 양은 이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자기 전에 눈의 건강을 위해 렌즈를 물컵 속에 넣어놓고 잤던 것이다.

고로 가연의 눈앞에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은 검은색 흐리멍텅한 한 마디로 말하면 마꾸로구로스케의 확대형 정도로나 보일까?

가연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메이슨은,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화를 식히려고 침대 머리맡에 있던 물컵을 들어 가볍게 원샷~ 해버렸다.
가연이 머리맡을 손으로 뒤적뒤적 하자, 메이슨이 말했다.

“물은 이미 내가 마셨어. 새 물을 떠다주지.”
“엥? 잠깐 물을 마셨다구우~?”
“응. 뭐가 잘못됐어?”

설마 물속에 뭔가 이상한 걸 타놓은 건 아니겠지? 별로 이상한 맛은 안 났는데…….

그 순간 가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그 새카만 형체를 향해 돌진했다.

“내 눈 내놔. 내 눈 어쩔 거야!”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에 메이슨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자아이의 하이톤의 징징짜는 소리는 들어줄 수 없었다.

“오, 월든이시여!”

한 마디만 내뱉고, 일단 가연을 진정시켰다.

“왜 그래? 물컵에 뭐가 들어 있었는데?”
“내 눈이 들어 있었단 말이야. 내 눈!”
“내가 보기에 네 눈은 제대로 얼굴에 잘 달려 있구만.”
“우씨. 그게 아니야. 아 난 시력이 나빠서 눈에 뭔가 넣는 게 있었는데, 그걸 물컵 안에 넣어놨다구. 그런데 그걸 당신이…….”
“어엇.”

그러고 보니 목에서 물이 넘어갈 때 뭔가 위화감이 느꼈던 것도 같다. 어쩌나. 하지만 드래곤의 위는 워낙 소화액이 강한 위산이라 분명, 지금쯤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몰라, 물어내 물어내란 말이야.”
“여분 없냐?”
“아 몰라~ 아, 맞아. 가방에 안경이 있었는데…….”
“안경?”
“당신네들 설마 안경 몰라?”
“안경이야 알지.”
“내 가방 찾아다줘요.”
“그게 어디 있는 줄 알고?”
“그 왜 내가 잡혀 있던 마을에 있을 거 아니야. 내 가방 찾아다줘요!”
“내가 왜 그런 수고스런 일을 해야 하는데?”
결국 해줄 거면서 일단 빼고 보는 치사한 남자, 그의 이름은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이었다.
갑자기 메이슨은 입가에 짖궂은 웃음을 띠더니 가연에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부탁합니다, 라고 제대로 말해 봐. 그러면 찾아다주지.”
“뭐라고? 남자가 아니, 드래곤 로드 주제에 치사하긴…….”

가연의 도발에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을 뻔했지만,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가면 냉혈할 블랙 드래곤 로드 율리히 메이슨로 알려질 리가 없다.

“어쨌거나, 부탁합니다 라고 제대로 해봐. 이 몸도 꽤 바쁘다고. 너랑 애도 만들어야 하고, 회의도 참가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메이슨이 계속 딴청을 부리자, 화가 난 가연이 소리를 빽 질렀다.

“하면 될 거 아냐!”
“거참, 무슨 여자가 오크 성대를 삶아먹었나. 목소리 되게 크네.”
“부탁할게요.”

가연이 기사에게 말하듯 새침하게 마지못해 말하자 메이슨이 다시 한 번 비아냥거렸다.

“그건 부탁하는 자세가 아닌 듯한데, 홍가연 양.”
“젠장. 저놈의 망할 영감탱이.”
“어헛!”

메이슨의 헛기침에 가연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 저기…… 부탁할게요. 내 가방 찾아다주세요.”

이번에는 제법 다소곳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온몸에 퍼버벅 돋은 닭살 때문에 침대를 구르며 난리를 부렸다. 그런 가연을 보며 메이슨은 실실 웃음을 쪼개었다. 그뒤에 주문을 몇 개 외자 가연의 가방이 나타났다.

“그런데 네 눈이란 거 그냥 마법으로 시력을 좋게 만들면 안 되나?”
“네에? 마법으로 라식을 할 수 있어요?”

그러자 가연의 세상이 확 밝아져왔다. 그러면서 실실 쪼개고 있는 메이슨과 그 뒤에 뻘쭘하게 서 있는 사비네가 보였다. 가연이 새초롬한 표정을 짓자, 메이슨이 사비네와 가연을 소개시켰다.

“가연, 여기는 사비네. 사비네, 여기는 가연. 가연, 필요한 거 있으면 사비네에게 부탁해.”

가연은 왜 초면에 반말이냐고 따질까 하다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자기의 상황을 깨닫고 얌전하게 굴기로 결심했다.

“저, 일단 씻고 싶은데…….”
“예, 이리로 오시겠어요?”

그러면서 사비네가 가연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테라스는 동굴 벽을 뚫어서 만든 것으로 꽤 높은 곳에 자리잡아 전망이 살벌할 정도였다. 바로 그곳에서 메이슨과 사비네의 아침은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아침이 좀 길어져서 거의 브런치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던 메이슨은 한숨이 푹 나왔다. 저 골칫덩이를 가지고 자기가 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한숨만 나올 정도로 어이없었다. 오 월든이시여!

그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들어보니 때국물이 흐르던 볼이나 끈적해 보이던 머리를 깔끔하게 씻었는지 가연이 상큼하고 발랄한 차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온천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볼에는 가벼운 홍조가 떠 있고, 하얀 피부는 햇살에 윤이 날 정도로 맨질맨질해 보였다. 아직 덜 말린 긴 머리가 길게 늘어져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사비네랑 무슨 얘기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활짝 웃고 있었다.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되고 볼에는 보조개가 깊숙하게 패였다. 확실히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외모임에는 틀림없었다.

판타지 세계라면 으레 입을 것 같은 너풀거리는 긴 드레스 대신 노출도 별로 없고 소박해 뵈는 하얀 페전트 블라우스에, 진한 녹색의 플레어 스커트를 입었다. 빨간 머리 앤이 부러워할 정도로 부푼 퍼프 소매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밑에 입은 스커트는 진한 녹색의 무거운 벨벳으로 되어서 움직일 때마다 그 곡선을 타고 반짝거렸다.

메이슨은 모르는 척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지만 귀로는 그들이 하는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건성건성 책장을 넘겼다.

가연이 앉으라고 사비네가 의자를 끌어당겨주자, 가연은 살포시 의자에 앉았다. 메이슨은 책에서 눈을 떼고 쓱 본 뒤에 다시 책을 읽고 있었다.

사비네가 주방에 준비해 뒀던 갓 구운 빵, 막 삶은 달걀과 월귤잼과 신선한 버터와 진한 밀크티를 가지고 와서 각자 자리에 세팅해 주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보는 순간 가연은 앞도 제대로 안 뵈는 주제에 우적우적 마구마구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메이슨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긴긴 식사가 끝나고 메이슨이 사비네에게 지시했다.

“사비네, 대충 얘기 들었어?”
“네.”
“그러면 가서 가방 찾아와.”
“넵, 마스터”

사비네는 잠시 사라졌다가 곧 다시 나타나, 가연에게 뭔가 건네주었다. 익숙한 가죽 가방. 가방은 Furla의 빨간색 백이었다.

“고마워요, 사비네”
“뭘요. 아가씨.”

저 망할 영감 밑에서 몇백 년을 있었지만 고맙다는 말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만 월급이나 제때에 제대로 줄 뿐. 언제나 불만투성이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이런 간단한 일에도 고맙다고 생긋 웃으면서 인사하지 않는가.

가연은 백을 뒤지면서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일단 지갑을 열어 돈이 없어졌나 확인. 크레딧 카드, 현금카드 모두 오케이. 그리고 화장품 가방을 열어서 시세이도 자외선 차단제, 바비 브라운의 파운데이션 스틱, 시세이도 스킨, 로션, 라프레리 파우더, 스틸라의 립글레이즈, 맥의 아이쉐도우, 피어니 마스카라와 슈에무라의 비올라까지 모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방 안의 만화책과 책도 모두 안전. iPod, 클리에까지 모두 그대로 들어 있었다.

물건을 확인한 가연은 하나하나 모두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가방에서 저토록 많은 물건이 튀어나온다는 데 메이슨은 감동했지만 그걸 다시 집어넣는 가연에 더욱 큰 감동을 먹고야 말았다.

아아 세상이 밝다. 아, 세상이란 진짜 살 만한 곳이었구나, 란 생각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이고 테라스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보고야 만 가연은 잠시 휘청였다. 본능적으로 높은 곳을 피하던 홍가연이다 보니 확실히 어지러웠던 것이다. 가연은 주춤주춤 뒤쪽으로 이동해서 가급적 난간과 멀어지려고 했다. 그런 어정쩡한 가연이 거슬리다는 듯이 홍차를 마시던 메이슨이 쓰윽 쳐다보았다.

“너, 그렇게 어정쩡하게 있지만 말고 뭔가 하는 게 어때?”
“뭘요?”
“산책이라던가, 방구경이라던가 대충 아무거나 해. 자꾸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흥!”

가연이 콧소리를 심하게 내고 나가자 메이슨은 책을 덮고 한숨을 쉬었다. 반려는 반려인 것이다. 옆에 있으면 자꾸 신경이 쏠려서 보는 책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런 메이슨의 반발이 가연을 눈앞에서 쫓아낸 것이었으니.
가연은 방 여기저기 헤매면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다. 레어는 자기가 들어가면 빛이 또는 천장에 매달린 샹델리에나 벽의 우묵한 곳에 놓여져 있는 촛불이 저절로 켜졌다 꺼졌다. 그러다 책장 가득 책이 꽂혀 있는 서재에 도착했다.

아무 책이나 쓰윽 뽑았다. 가죽 장정에 얇은 종이에 아름다운 글씨. 처음에는 그림 구경 정도였지,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적응이 좀 되자 글자 하나하나 읽는 소리와 의미가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충 책장을 넘기며 구경하는 식이었는데, 나중에 가자 점점 쉬운 단어부터 읽히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말을 배우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메이슨은 슬슬 궁금해졌다. 그녀가 무얼 하고 있을지 신경이 갔다. 찾아보니 자신의 서재의 긴 의자에 앉아 정신 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책을 읽으면서 걸어가다 구멍에 빠져 이세계로 떨어졌다고 했다. 책을 좋아하는 아가씨인 모양이다. 신기한 일이다. 그가 아는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한정되어 있었고, 게다가 신성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마법은 말의 맹약이고, 말이 가지는 본성을 꿰뚫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다. 신성어는 고대 종족인 드래곤족의 본래 언어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의 회의해서 하는 말은 진실한 언어인 신성어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거짓말을 함에 따라 그 거짓말대로 진실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성어는 가공할 힘을 갖고 있는 언어였다. 그런 언어를 가연은 저절로 몸에 밴 것처럼, 드래곤족처럼 익힌 것이었다.
가연은 이런 것이 써 있는 책을 정신없이 보다가, 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보니 메이슨이 서 있었다.

“어?”

가연은 아까의 일이 기억나서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흥, 너 같은 것의 자식 따위 내가 낳아주나 봐라! 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슨 책을 보고 있지?”
“<마법의 역사>라고 써 있는데요.”

메이슨은 사실 기분이 아주 좋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책 중간중간에 자기만 아는 방식으로 은밀한 책들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가령 책 표지에 <월든의 위대한 성직자 한나 아렌트의 철학적 신학론>이라는 제목일지라도 책을 꺼내서 넘겨보면 총천연 칼라로 살색이 가득하다거나, 이중장정이 되어 있어서 <한나 아렌트의 즐거운 성생활> 같은 책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가연이 그런 책을 멋모르고 빼서 봤더라면 얼마나 창피하겠는가.

이렇게 고고한 척하고 있지만, 그도 남자였던 것이다. 나중에 가연이 자고 있을 때 몰래 그 책들은 치워야겠다 싶었다.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뭐?”
“나 잡혀서 고문 받을 때, 은이 아니면 내 몸에 상처를 입히지도 못했고, 게다가 나를 덮치려고 했던 사람은 이상한 빛이 번쩍이더니만 나가 떨어졌어요. 또 상처도 금방 아물었고요. 왜 그렇죠?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와서 그럴까요?”
“아니, 넌 현재 은총을 받은 몸이다.”
“네? 으……, 은총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든 일은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나눌 수 있다. 아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아나?”
“알아욧! 그러니까 설명이나 마저해요. 모르는 건 내가 물을 테니까!”
“그건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문제인데, 은총은 플러스에 해당하지. 너는 마법과 물리력에 방어를 할 정도의 행운을 갖고 있는 거지.”
“그렇다면 마이너스는요?”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총명하다.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이 중성이라는 것도. 실제로 불행해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뒤에 그에 해당하는 플러스적인 일이 있다는걸.

“그건 네가 드래곤족의 반려가 되어 알을 낳아야 한다는 거겠지.”

갑자기 그녀가 표정을 바꾸더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거봐. 나는 역시 정말 재수 더럽게 없다니까. 젠장 젠장.”

발을 쿵쾅쿵쾅 구르면서 종알거렸다.
현실적으로 처음 본 남자가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해서 사람도 아닌 파충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리고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도 갈 수 없고 게다가 자기가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다면?

현재 가연에게는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일절 희망이 없었다. 벼랑의 끝까지 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오후는 그렇게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했으나, 저녁이 오자 가연과 메이슨 둘 다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둘 다 성인이고, 가연은 왜 자기가 메이슨에게 구원을 받아 여기까지 끌려왔는지 대충 인지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밤이 오니 안절부절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메이슨이라고 무조건 좋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러니까 메이슨은 가연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고 있었다. 그로서는 왜 자신이 가연에게 끌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강한 반발감과 함께 본능 때문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다지 연애질을 해본 것도 아니고, 건전하게 살았던 천 살 넘은 수도승 같은 드래곤에겐 꽤 벅찬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녁 후에 서재에 파묻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하고 있었다.

가연 역시 잠도 안 올 것 같고 죽어도 저 변태 토룡 중년이랑 한 침대를 쓰기 싫었기 때문에 산책을 좀 하기로 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 늦춰보기 위한 노력이었다. 메이슨은 책을 읽는지 침실에 돌아올 기미도 안 보였다. 레어 근처에 메이슨이 취미 생활로 약초와 꽃을 기르는 온실 비슷한 곳이 있었고, 가연은 그곳에 가서 잠시 있기로 했다. 정원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과 장미 화단이 꾸며져 있었다. 레어는 휴화산에 있기 때문에 땅밑에 온천이 있다. 따라서 사계절 내내 기온이 화사했던 것이다.

높은 산이라 차가운 밤공기에 후드러지게 핀 밤바람에 장미향이 실려왔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강한 향이었다. 가연은 눈을 감고 온몸으로 장미향을 빨아들이는데, 갑자기 뒤에  누군가 나타난 것 같은 기척을 느꼈다.

“메이슨?”

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 가연은 어두운 그림자의 강한 손아귀에 입이 막히고 독한 향에 정신을 잃었다. 그림자는 쓰러지는 가연을 가볍게 받쳐 안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겁한콩
댓글 1
  • No Profile
    가연 04.09.03 13:59 댓글 수정 삭제
    아하하 :D 재밌네요.
    주인공 이름이 제 필명과 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물론 전적으로 우연입니다만.. ^^;; )
    그런데 버그가 하나 있어요..
    가연이 메이슨에게 가방을 가져다 달라고 하니까 가방을 가져다 주고 마법으로 라식을 했는데..
    나중에 사비네에게 다시 가방을 가져오라고 하네요.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다음 화도 기대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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