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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드래곤의 연인 (1)

2004.09.02 16:5509.02

1.

아틀라스 산맥 휴화산에 있는 레어의 서재에서 블랙 드래곤 로드 율리히 메이슨은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휴화산의 적당한 열기 덕에 한겨울에도 춥지 않은 이곳에서 약초 따위나 재배하며 은거한 지 200년 가까이 되고 있던 때였다. 그는 갑자기 온몸을 꿰뚫을 정도로 강렬한 마나의 분출에 마시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읽고 있던 책에서도 눈을 떼었다.

이 마나는 불의 속성이 강했다. 결국 미스테리우스 장로가 서거한 것인가? 오랫동안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마나를 분출하고 사라져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작은 상이 메이슨의 앞 허공에 맺히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상은 점차 또렷해지면서 굉장한 미녀가 되었다. 붉은 빛을 띤 블론드의 머리에 새파란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고, 거의 나체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 부위만 가린 몸은 늘씬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인지 메이슨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안 보였다.

“안녕, 율.”
“꺼져버려요, 로리엘.”
“어머, 보자마자 그런 과격한 인사라니 이 엄마는 무섭다구요~♡”

이 말에 메이슨의 얼굴이 확 구겨졌지만 여자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용건이나 말하고 꺼져버려요.”
“그래도 이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 없는 짓이야, 율.”
“당신 같은 중성에게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맘 같은 건 지렁이 꿈틀거리는 것만큼이나 없다구요.”

메이슨은 <중성>이란 단어에 액센트까지 넣어서 말했지만 그다지 여자에게 타격을 입힌 것 같지 않았다. 로리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등을 입에 대고 “오홋홋홋.”하는 요란한 웃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잔말 말고 할말이나 하고 꺼시지지요, 노친네.”

발끈한 메이슨이 로리엘에게 꺼지라고 말하기 바쁘게 갑자기 여자는 몸을 바로 잡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미스테리우스 장로가 서거하셨다. 그 사후 처리를 위해 모일 테니, 빈치 산맥의 회의실로 지금 모여라. 그리고 엄마한테 <당신>이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언젠가 혼쭐이 날 줄…….”

메이슨은 앞의 얘기만 경청하고 뒤에 얘기는 잽싸게 끼어들어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알았습니다. 잠시 후에 뵙지요.”

이렇게 되어서 한동안 두문불출 깊은 산 속 옹달샘이 아니라 깊은 산 속 마이 홈의 서재에서 책이나 보(고 놀)던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 율리히는 200년 만의 외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 외출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빈치 산맥의 회의실은 산 정상의 인간이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꼭대기에 있는 돌로 지은 거대한 콜로세움 같은 곳으로, 다섯 개의 드래곤 혈족별로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맨 앞의 상석 몇 개에 로드와 장로가 앉게끔 되어 있었다.

블랙 드래곤의 로드 좌는 비어 있고 장로들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용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원래 회의에 늦게 나타나서 요점만 듣고 사라지는 게 다반사였다.

메이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 세계의 드래곤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물론 메이슨처럼 만년 지각생이라 느지막이 나타난 드래곤들도 있었지만 그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회의실은 가지각색의 다양한 차림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 같지만, 모두 폴리모프한 드래곤들이었다. 본 모습이 거대하단 말로도 부족한 산만 한 크기의 드래곤들은 태어날 때야 작은 알이지만 어느 정도 성체가 되면 다양한 모습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했다. 또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본 모습보다는 폴리모프한 모습으로 사는 것에 더 익숙해지기도 했다. 따라서 회의하러 모이거나 아니면 각자 만날 때에도 드래곤들은 모두 폴리모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폴리모프는 대부분 인간으로 하는데, 왜냐하면 인간과는 언어를 같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엘프나 드워프, 호비트, 골룸, 혹은 고블린과 같은 아인종으로 폴리모프하는 변태들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서 인종 전시장과 같은 회의실에 전세계의 드래곤 107마리의 용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신탁은 어떻게 내려왔습니까?”
“신탁이 오긴 온 거요? 왜 공개하지 않는 거요?”

모든 용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때, 블랙 드래곤족의 로드인 그가 들어서자 조금은 조용해졌다. 그의 더러운 성질머리는 워낙 유명했기에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게 정확했다.

전의 회의 때 시끄럽다면서 제일 시끄럽게 했던 어린 용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린 일화는 유명했다. 그때 없었던 다른 동료 용들도 그걸 알고 있기에 조용해졌다. 어린 용은, 그 용의 일가가 사정사정 메이슨에게 부탁하고 나서야 다시 이 차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탁은 내려왔습니다. 발표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로리엘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자 다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신성한 드래곤들이 아니라 수다쟁이 아주머님들의 반상회인 양 회의실은 자잘한 수다로 가득 찼다.
갑자기 그녀가 라우드니스 마법으로 큰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닥치고, 듣지 못하겠어요, 다들.”

귀가 쟁쟁할 정도의 그녀 목소리에, 인근 산들이 들썩이고, 산 밑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미 이 화염의 드래곤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가 동네 반상회인 줄 알아요? 국회도 아닌데 뭔 얘기가 그리도 많은 거예요? 그리고 메이슨,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너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잖아. 빨리 자리에 가서 앉아.”

메이슨이 미적미적 자리에 앉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메이슨의 엄마(라고 주장하던) 로리엘이이 회의봉을 탕탕 두드렸다. 로리엘은 회의에 맞춰서 야한 발리 댄서 분위기의 옷 대신 엄숙한 로브를 입고 머리에 티아라까지 쓴 여왕님같이 우아한 자태였지만, 그 눈 속의 불길은 숨길 수 없었다. 로리엘이 신탁을 발표하겠다고 하면서 탁자에 올려놨던 의식용 양피지를 피더니 읽기 시작했다.

“위대한 신 월든의 세 자식 중 하나인 우리 드래곤 족은…… (중략)…… 따라서 레드 드래곤 미스테리우스 장로의 후계자는 블랙 드래곤 로드 율리히 메이슨의 자식이 승계합니다.”

그러자 레드 드래곤 족 자리에서 불이라도 뿜을 것처럼 소동이 났다. 붉은 머리를 산발한 수십 명의 인간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심지어 본체로 폴리모프한 다음에 때려부술 것처럼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뭐라구! 우리 장로를 왜 저런 거무튀튀한 놈의 애새끼를 앉혀야 하는데?”

그에 맞서 블랙 드래곤 진영도 만만치 않았다.

“흥! 우리라고 좋은 줄 알아!”
“왜 우리 로드의 애가 저따위 시뻘건 애들 뒤를 이어야 하냐구!”

그 난장판이 되기 직전 콜로세움 안에 탕 하는 회의봉 치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로리엘이 나무망치를 들고 이마에 빠직하는 번개를 달고 좌중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거 참, 성질들도 급하셔. 말을 일단 다 듣기라도 하고 난리를 치든 불을 뿜든 하란 말이야. 레드 드래곤 일족인 나도 블랙 드래곤 메이슨을 낳았다구. 원래 같은 혈족이 아니더라도 종종 이런 교차적인 아이가 나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인 건 피차 다 알고 있잖아? 이건 신탁이니까 알아서들 해. 난 모르는 일이라구! 위대한 월든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는데 댁들이 그렇게 떠들어봐야 뭘 하겠어? 내 말이 틀려?”

원래 드래곤의 수는 108마리로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같은 혈족이 그 자리를 승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끔 예외적인 일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메이슨였다. 레드 드래곤 장로 중 하나인 로리엘이 블랙 드래곤 로드의 자리를 승계할 메이슨을 낳은 것이었다. 로리엘이 메이슨을 낳을 부모용으로 신탁이 내려왔을 때도 소동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 소동 만만치 않았다. (그때의 소동의 원인은 로리엘이 워낙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나이 값 못하는 드래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는 건 메이슨이었다. 막상 자신은 원하지도 않는 애를 두고 저런 소동이 일어난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내가, 애 같은 걸 낳아야 하는 것인가. 털썩 하고 비극의 여주인공마냥 쓰러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왜 이리 노랗게 보이는지 현기증이 다 일 정도였다.

그런 연유로 이 소설의 남주 아니, 어쩌면 남주라고 주장하고 싶은 율리히 메이슨 블랙 드래곤 로드가 이 마을을 습격하게 된 일이었던 것이다. 습격과 자식은 다른 얘기라고? 물론 다른 얘기지만 이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몇 가지 이 소설의 설정을 얘기를 하겠다.

드래곤은 같은 드래곤끼리 생식이 가능하지 않다. 너무나 강력한 생물인지라, 신은 그 수를 제한하고자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드래곤은 어떻게 생식을 하는 걸까?

무성생식? 그러니까 몸에서 머리가 두 개로 늘어나면서 갈라지는 것일까? 드래곤은 아메바 같은 단일 세포 생물?

아니, 드래곤은 인간의 몸을 빌려서 번식한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 모두 가능한 것이 아니라 드래곤과 파장(다른 말로 하면 속궁합이라고 한다.)이 맞는 몇 세기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아주 희귀한 체질의 인간의 몸만 빌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게 어떨 때는 남자이고, 어떨 때는 여자이다. 결국 남자일 경우에는 중성인 드래곤이 여자로 변해 아이를 낳고, 여자일 경우에는 그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알을 낳는다.

즉, 드래곤은 영화 <에일리언>의 에일리언이었던 것이다, 라고 하면 이 소설은 호러가 되겠지만 본작은 명랑코믹엽기발랄 판타스틱 로맨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리는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호러와 로맨스의 차이는 남자주인공이 미남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한 마디로 메이슨 씨가…… 이 마을 상공에 나타난 이유는, 자신의 알을 낳아줄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막 화형에 처해지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냥 죽게 내버려둘까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저 여자가 죽고 난 뒤에는 얼마 전에 태어난 사내애밖에 후보자가 없고 그렇게 될 경우 자기도 엄마라고 주장하는 변태처럼 여자로 변해서 본인이 직접 알을 낳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끔찍할 경우가!) 그래서 그 여자를 살려서 애를 낳게 하기로 결심을 해버렸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거대한 그림자가 마을에 깔리면서 갑자기 사람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대한 그림자와 함께 떨어지기 시작한 비 사이로 거대한 검은 몸체가 보였다. 이 비는 정상적인 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헉, 드, 드래곤이다.”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하다 말고 후다다닥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우왕좌왕 도망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빗줄기는 곧 강해져서 불길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못내 불안했던지 메이슨은 주문을 외웠다.

“아이스 윈드!”

평소에는 폼을 잡기 위해 훨씬 긴 주문을 외우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으므로 아주 짧게 평소에 외워두었던 마법을 불러내는 수준에 그쳤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불길을 누그러뜨렸고 불길은 곧 사그라졌다.

인간으로 폴리모프 해서 땅에 유유히 착지한 드래곤 로드는 형틀에 아직 묶여 있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가 늦지 않았는지 형틀은 그다지 불길이 옮겨붙지 않은 상태였다. 아가씨의 다리 부분만 약간의 화상을 입었을 뿐 다른 데는 멀쩡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고문으로 인한 보기 흉한 상처가 가득했다. 아가씨는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가씨를 잠시 살펴보았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몸매도 적당한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봐줄 만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알을 낳게 할 만하다라고 혼자 멋대로 판단한 드래곤 로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튼튼하게 묶여 있던 밧줄이 쓰윽 풀리면서 아가씨가 형틀에서 놓여나며 바닥으로 떨어지려 했다. 메이슨은 가볍게 아가씨를 받아 안고 이동했다.


홍가연(洪嘉戀), 자기는 재수 있는 일이라곤 눈곱만큼 없고, 언제나 불운의 비구름이 쫓아다닌다고 하는 착각과 망상 속에 사는, 할 일 없는 아니 해야 할 일만 많은 28세 아가씨이다. 이제 슬슬 서른 살을 향해 달려가고 주위의 하나둘 어느새 아군을 찾아가는 나이에 아직 싱글로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키 168cm, 몸무게 53kg 정도의 현실적으로 딱 좋은 몸매의 소유자였던 것. 사이즈가 제각각으로 노는 국산 브랜드의 55 사이즈 정도 되는 옷을 소화해 낼 수 있으며 33-24-35의 환상적인 몸매를 자랑했다.

꽤 길게 기른 머리는 염색 한 번 안 한 채로 브래지어 약간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고, 상당한 동안에 피부도 좋고 속 쌍꺼풀이 있는 꽤 큰 눈은 웃으면 반달처럼 되었다. 애기입술처럼 핑크빛을 띤 입술이라던가, 모양 좋은 긴 다리라던가, 피아니스트처럼 우아한 손이라던가, 귀족적인 발목이라던가 등등을 갖추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성격상 미녀란 모름지기 유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절대로 그렇게 좋은 성격이 못 되어서 남자친구는 전무였다. 물론 초반에야 얼굴과 몸매만 보고 찝쩍거리는 불쌍한 청년들이 있었으나, 다 그 성격에 질려서 말도 제대로 못 부쳐보고 나가 떨어져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여중-여고-공대라는 엄청난 집단에서 살다보니 주위를 보면 언제나 여자친구 혹은 목 다 늘어난 인텔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공돌이 군단이었으니, 남자를 사귀고 말고가 없었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공대의 여왕님으로 등극했으나 실제로 입으로 채찍질을 한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그 가혹한 말버릇에 된서리를 맞고 떨어져나간 남자가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얼굴만 보고 다가오는 남자들이라도 있었지 이제 20대 후반으로 가고 있는 나이에 그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날은 정말 재수없는 날이었다. 전날 퇴근할 때 동네 만화방에서 빌려간 만화 <하늘의 붉은 강가>가 너무 재미있어서 빌려간 세 권을 마저 읽은 뒤에 나머지 뒷권까지 왕창 빌려 왔다. 내일은 즐거운 금요일이니 나머지는 내일 봐야지 하다가 한 권만 한 권만 더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였다. 결국 아침에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치사한 오라버니들은 자기네들만 먼저 출근하고 여동생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냥 두고 먼저 가버렸다. 분당에서 역삼동까지 큰오빠의 차를 빌려타고 편안하게 출근하던 가연은 결국 지하철을 타야 했다. 하필이면 지하철이 연착인지라 아저씨들로 득시글거리는 와중에 치한까지 만난 것이었다. 웬 낯선 손이 자신의 엉덩이 근처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안 순간 가연은 그 손을 살며시 잡아 깍지를 끼면서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이 순간을 위해 길렀다고 해도 과언이 없을 정도로 긴 손톱으로 지익 그어버렸다.

뒤에서 끙!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가연의 강한 손아귀에서 발버둥치려 했지만 가연이 그 손을 번쩍 들더니 외쳐버렸다.

“내 엉덩이 위의 이 손은 내 손이 아닌 듯한데 임자가 뉘시오!”

뒤에 서 있던 이마가 벗겨진 중년 아저씨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다음 역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가버렸다.

결국 지각은 당연한 수순. 회사에서 살금살금 걷다가 과장님한테 걸려서 잔소리를 있는 대로 들었고 점심 먹던 식당의 밥에선 바퀴벌레가 나왔으며 평소 사이가 안 좋던 위의 대리랑은 싸움박질까지 벌였다.

이런 악운에 맞서 싸우는 가연의 유일한 희망은 오늘은 즐거운 금요일 저녁, 어마마마가 집에서 장어구이를 한다고 했다. 이 유일한 희망을 안고 퇴근까지 겨우 견딘 가연은 6시 땡 치자마자 일어나 짐을 싸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을 나와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까지 걷으면서 장어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는 순간 신발에 닿는 단단한 바닥의 느낌이 없어졌다. 순간적으로 가연은 이 상황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비명을 질러버린 것이었다.

“꺄악……!”

그렇게 떨어지면서, 속으로는 윽, 어딘가 부러지는 것은 싫은데, 라던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던데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계속계속 그녀는 떨어졌다. 밑도 끝도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에 쓰일 법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앨리스가 떨어지면서 지구 반대편을 뚫고 나가 오스트레일리아가 나오겠지라고 생각한 것처럼…….

그런데 너무나 재수가 좋으려니까, 그 맨홀은 시간의 틈바구니에 있어서 게이트 역할을 했고 그 결과 방년 28세 아가씨 홍가연은…… 이세계(異世界)로 끌려들어간 것이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가연은 숲 속의 풀밭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난 가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건 또 웬일이란 말인가. 가연은 맨홀에 빠져서 정신을 잃고 깨어보니 웬 숲 속 한가운데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경악하고 말았다.

어쨌든 집에 돌아갈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죽더라도 권상우 혹은 비와 같은 꽃돌이와 연애라도 한 번 해봐야 하는 것이 가연의 소박한(하다고 주장하는) 소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해가 서쪽에 가까이 가 있는 게 어둠이 깔리려 하고 있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늑대와 벌레가 판을 치는 이 산 속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가연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주위를 보아할 때 이곳은 숲이다. 숲은 산에 있다. 고로 아래로 내려가면 민가(?)가 나올 것이다라고 판단한 가연은 길인 듯싶어 보이는 흔적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보통 이계깽판 판타지를 보면 이세계에 떨어져도 어떻게든 살아남던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니 진짜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가연은 손을 뻗어서 ‘Fire!'라고 작게 외쳐보았다. 만약 운좋게도 판타지 세계로 건너오면서 마법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지 않나 하는 만약의 마음에서였다.

역시나 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하고 포기하면 대안의 건아가 아니지 싶어서 다시 가연은 손을 뻗어서 좀더 큰소리로 “파이어볼!”을 외치면서 드래곤볼에서 오공이가 에네르기파 쏘는 흉내를 내보았다.

역시나 에네르기파의 에는커녕, 아니 파이어볼의 ㅍ은커녕 연기 한 줄기 나오지 않았다.

순간 더욱 막막해졌다. 일단 홍가연은 지구에서 부모의 부모 아래 편안하게 살았던 처자로 여기서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회사원의 스킬이 바로 먹고 사는 길로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다지 기대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법이라도 쓸 수 있거나 힘이 유독 좋아서 판타지 세계의 인기 직업 중 하나인 검사 혹은 용사, 마법사로 뛸 수 있을 수도 없었고, 용병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였던 것이다. 고로 이 세계에서 그녀는 ‘백수’였다.

게다가 말이 통할 리도 없고, 만약 어찌어찌해서 말이 통한다고 해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지할 사람 없는 ‘고아’였던 것이다. 그녀는 가녀린 아가씨의 몸으로 이런 어려운 세상을 어찌 살아갈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 막막하다고 하던가…….

그녀는 진짜 막막했다. 게다가 배도 슬슬 고파오고 있었지만 가방에는 파우치와 만화책, 사탕과 자일리톨 껌과 지갑과 명함 지갑 정도가 들어 있는 게 다일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담배라도 필걸. 그럼 라이터라도 있었을 거 아냐.”

혼자서 종알거렸다.
가연은 혼자 있을 때 엉터리 노래를 부르는 묘한 습관이 있다. 심심하기도 한 가연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목소리가 곱기 때문에 노래는 엉터리일지 모르나 소리만은 들어줄 만했다.

“가연은, 가연은 배가 고파요~ 오늘 엄마가 맛있는 장어구이 해주신뎄는데, 망할 고릴라와 침팬지가 다 먹기 전에 가연은, 가연은 집에 가고 싶어요~”
라는 노래였다.

그때,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혼자 숲에 있으면 흔히 벌어지는 현상, 즉 나뭇가지 밟는 소리와 함께 우락부락한 총각 한 떼거지가 나타났다.

사냥을 나갔다 죽 쑤고 돌아오던 마을의 건전한(?), 그리고 혈기 넘치는 청년들은, 이상하지만 고운 목소리에 누구일까 하고 따라가 보니 숲을 혼자 돌아다니는 이상한 짧은 스커트를 입은 절세미인이 있더라.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라 정확하진 않았으나, 피끓는 젊은이들의 눈에 상당한 미인인 듯싶었다. 게다가 사이렌의 노랫소리 같은 그 맑고 청아한 음성이라니…….

그래서 그들은 그 아가씨랑 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연을 둘러싸버린 것이었다.

“흐응?”
“오이, 아가씨 이 저녁에 숲에서 무얼 하는 거지?”
“호오, 귀여운데 이 오빠들과 술래잡기 놀이라도 할까?”

그들은 가연을 둘러싸고, 가연의 몸매를 느끼한 시선으로 훑으면서 가연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내뱉고 있었다.

가연은 갑자기 숲에서 나타난 웬 이상한 청년 한 떼거지가 자기 주위를 둘러싸자, 솔직히 좀 무서워졌다.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생김새도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불안한 것은 상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무섭긴 했지만 혹시라도 도와주러 올 사람을 찾기 위해 큰 소리로 말했다.

“에? 뭐라구요? 여기가 어디죠?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아니 Can you speak English?”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수군댈 뿐 가연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연은 그들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제 여기가 이세계라는 게 확실해지자, 앞날이 캄캄해졌다. 자기는 약하디 약한 여자요, 이 녀석들은 한 떼거지이다. 거기다 여기서 어떻게 잘 벗어난다 해도 집에 돌아갈 방도도 없음이요, 여기서 먹고 살 방법도 없는 거다.

가연이 혼자 한숨을 피식 하고 지을 무렵, 그중 한 녀석이 날쌔게 가연을 덮쳤다. 혼비백산한 가연이 피하려고 했지만, 운동치인 그녀가 그놈보다 빠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가연의 몸에 손끝 하나 닿기 전에 갑자기 가연의 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남자는 저 멀리 나무로 날아가 처박혔다. 남자는 머리가 나무둥치에 부딪칠 때 혀를 깨물었는지 입밖에 나와 있는 혀에서 핏물이 줄줄 새어 흘렀다. 그걸 본 다른 친구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순간, 주변에 적막이 흐르고 남자들은 또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외치면서 여태까지는 폼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고는 덤볐다. 그러나 역시 가연의 몸에서 나는 빛이 칼에 닿자마자 칼이 동강이 나거나 그들이 뭔가 강한 힘에 부딪쳐서 허공을 날아가 처박혔다.

그중 한 녀석이 마을의 신전으로 달려갔고, 사제들과 마을 사람들을 잔뜩 끌고 왔다. 도망도 못 치고, 그렇다고 숨지도 못한 가연은 그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가연의 몸에 손 댈 수 없었던 그들은 어망을 가져와 가연에게 뒤집어 씌웠다. 가연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생선 비린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어망을 뒤집어쓴 채 바둥바둥 거렸다. (여기서 왜 어망이 나오냐고 지적해 준 모 씨 감사하다오. 그러나 산촌마을이라고 해서 근처에 호수가 없으리란 법은 없지 않소?)

그들은 가연을 비린내가 풀풀 나는 어망으로 잡아서 끌어다가 감옥에 처박아버렸다. 그들이 보기에 가연은 마녀였다. 평범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 무릎이 훤히 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고 알아들을 수 없는 기묘한 말을 하는 걸로 보아할 때 그녀는 마녀였다.

처음에 가연은 그냥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마을 사제가 다녀갔지만 그녀와 그들은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문을 가하려고 해도 그녀의 몸에 의사와 상관없이 접촉하는 즉시 모두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나자빠지니 일절 고문도 불가능했다.

어찌 된 게 조금 지나자 그녀의 귓속에 그 사람들의 언어가 이해되기 시작하고, 자기도 심지어는 말을 조금씩 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러자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자기가 마녀로 몰려서 꽤 위급한 상황이라는 걸 더욱 알 수 있었다.

가연의 가방 안의 만화책들과 기묘한 도구들은 마녀의 물건들이 되었다. 특히 만화책은 이상한 마법서와 주문책 혹은 그림이 곁들어진 악마의 책으로 둔갑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런 것은 한국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가연은 감옥에 갇혀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짚을 깔고 누워서 천장의 작은 문으로 밖을 내다보거나 가만히 앉아 있거나 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그릇에 꿀꿀이 죽 같은 것과 물을 조금 주고 양동이에 볼일을 처리하라는지 지저분한 오물이 달라붙어 있는 양동이가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잠시 새벽에 선잠이 들어도 한기에 깨어나기 일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이렇게 갇힐 정도로 나쁜 일도 하지 않았고 왜 이 세계로 와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운명이 본인의 선택이 아닌 다른 자의 농간에 의해 이렇게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분한 것이었다.

며칠 뒤에 낯선 자 둘이 나타났다. 검은 헐렁한 로브를 입은 남자와 꼽추였다. 그들은 자칭 마녀재판관이라고 했다. 매일같이 어휘는 늘고 있어서 대충 그들이 하는 말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떠듬떠듬 할 수 있는 이 세계의 말로 자기는 마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설득이 불가능했다.

이미 모두 그녀가 마녀라고 믿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녀가 마녀라는 걸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작은 일 하나도 크게 부풀려져서 결국 증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녀재판관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몇 가지 조작된 도구로 그녀를 고문해서 거짓 정보를 끌어내려 했다.

떠듬떠듬 나는 마녀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어떤 마법도 듣지 않는다는 신성한 은 꼬챙이만이 그녀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뒤 그 마녀재판관과 조수는 매일같이 살 여기저기 불로 지지고 어떤 마법도 막을 수 없다는 신성한 은만이 그녀의 몸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 은으로 된 불에 달군 꼬챙이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고문을 당할 때마다 가연은 비명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밖에 어떤 행동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가연의 27년 인생에서 이토록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적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 은 꼬챙이로 몸 여기저기 지졌을 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지지고 찌르고 때리고… 그러나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상처는 나아 있었다. 차라리 상처가 계속 남아 있으면 그들도 불쌍해서라도 내버려둘 텐데 치유가 무섭게 빨리 되니 더 더욱 의심을 받을 뿐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 일이 될 거라고 생각도 해본 적 없는 평범한 처자로로서 힘든 일이었다. 지치고 힘들고 괴로워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싶은 날도 있었다. <붉은 강가의 노을>에서는 남주인공이 나타나서 키스 한 번 하니까 말도 통하고 남주인공이 알아서 구해 주던데, 그녀는 키스해서 말을 통하게 해줄 남자도, 구해 줄 남자 한 마리 없었다. 왜냐고? 이세계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잡혀왔으니까.

가연은 몇 번이나 죽고 싶었다. 너무나 아프고 또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질러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왜 자신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아파야 하는지 진정 몰랐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일절 어떤 동정에도 기댈 수 없었고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에 지쳐 가연은 거의 정신을 놓아버렸고 이젠 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삶에 대한 의지도 조금씩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한편에서는 그래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주겠지 싶은 일말의 뭔가라도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세계로 온 것도 이상한 일이고 자신을 이상한 세계로 보낸 무언가도 목적이 있어 보낸 이상 이렇게 죽게 내버려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나에게 힘이 생긴다면, 나에게 든든한 백이 생긴다면 너네 전부 죽음이얏~

대한민국의 독한 아가씨 홍가연은 그 둘을 보면서 이를 갈고 또 갈면서 복수를 맹세하며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길 어언 열흘……
그렇게 얼마나 되었을까…… 어망을 씌우더니만 밖으로 끌고 나가 형틀에 그녀를 묶었다.

가연은 억울했다.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니고, 단순하게 말이 안 통하고 복장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녀로 몰려 이렇게 고문당하고 죽는다는 것이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간절히 기도했다. 나, 다시 살아나면 착한 OL이 될게요 라고.

재수가 없어서 맨홀에 빠졌기로소니, 이렇게까지 막 가다니. 역시 이거 쓰고 있는 사람은 컴플렉스 덩어리임에 틀림없다고 굳게 믿고서 어떻게든 작가신이 뭔가 해주지 않을까, 그래도 미소녀 주인공인데 하면서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신은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저 매드사이언티스트 같은 마녀재판관이 불을 붙이라고 명령했고, 콰지모도처럼 생겼지만, 절대로 콰지모도 같지 않은 곱추가 불을 붙였다.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다리 부분이 뜨겁기 시작하면서 고통이 서서히 밀려왔다. 나, 이렇게 가는구나 란 생각을 하자, 평소에 나지 않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맨홀에 잘못 빠지면 이렇게 인생 종치는구나, 란 생각을 하면 누가 안 억울하겠는가.

그때였다. 갑자기 어두운 큰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지더니만,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치면서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떨어지던 빗방울은 큰비가 되어 불을 끄기 시작했고,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웬 남자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차가운 바람이 생겨서 불을 완전히 소거해 버렸다.

살아났다, 라는 생각을 하자 그간 쌓였던 긴장이 풀리면서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블랙 드래곤 로드 율리히 메이슨과 가연의 첫 조우였다.

메이슨은 의식을 잃고 풀썩 쓰러지는 그녀를 가볍~게 받아 안았다. 하얀 뺨은 창백해져 있었고, 찢긴 옷 사이로 고문으로 인한 핏자국과 멍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우윳빛의 맑은 피부였겠지만 지금은 은꼬챙이로 인한 고문으로 인해 불에 지져진 화상과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긴 하얀 목을 메이슨의 가슴에 기댄 채 정신을 잃은 아가씨는, 창백한 하얀 뺨에 새카만 머리카락, 오똑한 콧날 등이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묘한 여자였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 역시 독특했다. 드래곤의 반려의 기운인 걸까, 아니면 종종 나타나는 이계인인 걸까.

그녀에게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무지갯빛 오오라는 말할 것까지 없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혼미한 눈에 자신도 정신을 놓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파악해야겠단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이 자리를 피한 다음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나오면 귀찮단 말이지.’

메이슨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연을 안고 그 자리에서 텔레포트를 해서 아틀라스 산맥의 자신의 레어로 이동했다.


골든 그리핀 사비네, 언제나 내 인생은 왜 이리도 구질구질해서 저런 마스터를 만났단 말인가 투덜거리는 게 일인 그녀가 정말 놀랄 노자로 눈이 둥그레지는 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녀의 마스터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이 웬 여자를 안고 와서였다. 여자는 정신을 잃은 듯, 검은 로브 차림의 차가운 표정의 마스터의 품에 죽은 듯이 안겨 있었다.

“마, 마스터…… 그건 웬…….”
“주웠어.”

메이슨은 잔말 말라는 듯이 딱 잘라 말하곤, 여자를 안고 척척 걸어서 자신의 거처로 갔다.

메이슨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2세를 봐야 한다는 그런 낯부끄러운 얘기는 알에서 나온 지 3천 년은 넘은 자신이지만 절대로 저 수다쟁이 녀석에겐 할 수 없었다. 어차피 곧 소문은 나겠지만 정말정말 창피했다!

남자라면 폼생폼사! 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메이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수도승처럼 경건하게 산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조용하게 자신의 삶을 잘 가꾸어왔다고 생각하던 자신에게, 이런 날벼락이라니! 게다가 징징대고 시끄럽기만 한 애새끼 따위를 자신이 이 경건한 몸으로 낳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던 것이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던 메이슨은 일단 자신의 방으로 그녀를 데려다 옮겼다. 처음엔 손님방에 던져둘까 했으나, 일단은 자신의 알을 낳아줄 귀한(?) 몸인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살을 섞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니 자신의 방이 아무래도 유리할 것이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네 경건한 몸이 어쩌니 하고 있어도 메이슨도 애인을 둔 지 꽤 되었기 때문에 은근하게 두근거리고 있던 것이다. 그저 남자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메이슨의 뒤를 사비네는 종종걸음으로 수선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사비네는 금빛 그리핀답게 탐스러운 밝은 밀빛의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눈도 금갈색으로 요염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다만, 그 우아함도 그 잽싼 입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서, 늘 메이슨에게 조용히 좀 있으라고 잔소리를 듣는 수다쟁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사비네에게 큰 약점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마법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뭔가 마법이 엉켜 이상한 주문을 폭발시키던 사비네를 메이슨이 단순하게 재미있어 보인단 이유 하나만으로 거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2백 년 전 얘기로, 그 이후 메이슨의 조용하고 편안한 전원생활은 막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멀뚱멀뚱 보고 있는 사비네에게 메이슨이 확 째려보며 말했다.

“뭐해? 이불 안 치우고. 이불 치워야 내려놓고 아가씨를 내려놓고 이불 덮어줄 거 아냐.”
“아, 예.”

지난 2백 년을 멍하니 회상에 잠겨 있던 사비네는 이 말에 화들짝 놀라 잽싸게 이불을 치우고 그가 아가씨를 내려놓자 이불을 토닥토닥 덮어주었다.

메이슨은 아무 말 안 하고 사비네가 아가씨를 챙기는 걸 인상을 쓰고 보고 있었다.

“일단 힐링으로 치료해 놔. 엉뚱한 거 쓸 생각하지 말고 힐링만 해! 힐링만!”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얄미운 메이슨이었다.

“네, 마스터.”

사비네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일단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저 무뚝뚝하고 성질머리 더러운 마스터가 제대로 얘기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불타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온몸에서 얘기해 주세요- 오오라를 풍기는 사비네를 가볍게 무시해 주고 메이슨은 자신의 서재로 이동했다.

메이슨의 뒷모습을 불이라도 태울 기세로 슬쩍 노려보던 사비네는 가연의 옷을 갈아입혔다 그동안 정체불명의 아가씨는 쌕쌕거리며 자고 있었다.

한편 마왕성도 한바탕의 시끄러움으로 가득했으니!
마왕의 신부 후보가 나타났다! 는 소식이 좌악- 퍼져가면서 마족들도 술렁술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이 세계의 창조신은 마족, 신족, 드래곤 일족들에게 각각의 임무를 부여하며 그에 맞는 힘과 영토를 주었다. 지상을 다스리는 용족과 사후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신족과 마족이 있었다. +가 되는 신족, -가 되는 마족, 그 중간의 드래곤족까지 해서 힘의 평형은 깨어지지 않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그 힘에 맞추어 수를 제한했고, 그 방법은 마족, 신족, 드래곤족 모두 알에서 나오며 알을 낳을 수 있는 자는 인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인간은 파장이 맞는 특수한 체질의 인간만 가능했기 때문에, 자손을 불리기는 정말 힘들었다.

게다가 드래곤족과 마족의 파장에 동시에 맞는 인간들은 정말 드물어서, 역사상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고로…… 홍가연 양은 그 파장에 맞는 굉장히 희귀한 특이체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왕성에, 마왕의 신부 후보가 나타난 건 너무나 오래전 일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놓치면 언제일지 모르는 상태였다.

음산한 귀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마왕성은, 마족의 우두머리 마왕이 사는 곳이었다. 남들은 마왕성이라는 재미없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제로 마왕은 이곳을 sweet my home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귀여운 베이베들 혹은 아기 고양이들이 로즈 가든을 뛰놀며 노는 것을 보는 것도 낙 중 하나였다.

이쯤 되면 눈치 챈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 마왕이 범상치 않은 작자라는걸. 평소에 마왕이라고 하면 검은 가죽옷에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냉소적인 미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악은 모르는 새에 어느새 곁에 와 있는 거라고, 실제로 마왕은 금발에 사이다병처럼 맑은 초록 눈을 한, 상냥한 미남자(인 척하는 놈팽이)였다.

가끔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버릇없게 발톱으로 할퀸다던가 하는 일이 있다면 아주 가끔 채찍으로 가볍게 혼내주기는 했지만 자신은 온화한 마스터라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밤이면 밤마다 새로운 귀여운 베이베들 또는 어린 양들을 찾아 전세계를 방랑하는 로맨티스트였던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플레이보이였다.

재미없는 나날들이 계속이었다. 1500년 전, 제15차 신족, 마족, 드래곤족의 사이에서 벌어진 삼파전의 결과, 평화협정이 또(!) 수립되었고 그 결과 꽤 지루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귀여운 아기 고양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잠깐씩 하는 일로는 재미있었지만 역시 계속되면 재미없는 것이다. 밤마다 새로운 베이베들 또는 어린 양들 찾는 것도 정말 지겨웠다. 매일 밤 파트너 바꾸고, 새로운 베이베들을 꼬시는 것도 슬슬 지쳐갔다. 세상은 정말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고, 계속 악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려보지만, 신족과 드래곤족의 훼방으로 되는 일도 그다지 없는 심심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때 마침 시기라도 맞춘 듯, 마왕의 신부 후보가 나타났다.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제위에 오른 지 어언 3500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선위 마왕에게 자리를 이어받은 지 1580년. 눈치 챌 사람들도 있겠지만, 1500년 전의 삼파전은 이 마왕이 제위하자마자 심심해서 벌인 일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그만큼 심심한 거라면 딱 질색이다 싶을 정도로 부산한 마왕이었다. 이제 슬슬 심심해서 몸을 비비꼬며 괴로워할 지루한 나날들 속에, 새로운 장난감이 되어줄 귀여운 피앙세가 나타났다니 이 얼마나 반가운 운명의 조화이련가!
그는 정말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세상을 훑듯이 자신에게 파장을 뿜어내며 존재를 알리는 그녀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녀가 있는 곳은 아틀라스 산맥 아래의 블랙 드래곤 로드 메이슨의 레어 쪽이었다. 젠장, 한발 늦은 것이었다.

“흐음,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입을 살짝 비틀면서 특유의 냉소적이면서 우아한, 그리고 주변에 마왕 팬클럽이 있었더라면 <꺄악, 오빠~> 하면서 넘어갈 정도로 매력적인 페로몬을 뿌리면서 살짝 웃었다.

비겁한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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