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유다의 가을] 프롤로그

2004.08.30 06:5608.30

Prologue: It's a rainy day.

옛날에, 옛날에 태양이 여덟개인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는 밤이 없고, 항상 낮만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 식물들은 불면과 기갈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그들은 대표자를 하나 뽑아 신에게 보내기로 했다. 태양이 너무 많으니 그것들을 다 없애고 하나만 남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제비뽑기를 통해서 뽑힌 자는 다름 아닌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무거운 사명을 갖고서 신을 찾아나섰다. 황금으로 된 신전 앞에서 까마귀가 무릎을 꿇고 태양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을 하였을 때 신은 그에게 붉은 표지로 된 책을 건네주었다.

"이 책을 먹어라. 이것은 입에서는 달콤하나 네 뱃속에서 쓰디 쓰리니. 봉인된 비밀을 받으라. 생명을 받은 모든 존재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비밀을 알게 되리니. 그러므로 너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이나 연약한 자요, 아무도 가져오지 못하는 어둠을 가져올 자가 되리라. "

까마귀는 입을 벌려 그 책을 받아먹었다. 혀에는 달콤하나 뱃속에서는 쓰디 썼고, 까마귀는 곧장 하늘로 날아가 일곱개의 태양을 먹어치웠다. 일곱개의 태양은 입에넣는 순간은 달았지만 곧 까마귀의 뱃속을 활활 태우기 시작했고, 까마귀는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신이여, 신이여. 내 입이 달았으나 정녕 뱃속에서 쓰나이다. 몸 속 가득히 주체할 수 없을만큼 쓰라리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생명을 먹었으되 뜨거움으로 목이 타고, 빛을 먹었으되 내 안은 어둡기만 합니다."

신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신의 비밀된 책을 먹은 자여, 그 글자 하나하나가 네 안에서 낱낱히 토해내지기 전에 너의 아픔은 끝나지 않으리. 일곱개의 태양을 먹은자여, 그 빛 하나하나가 네 안에서 꺼지기 전에 너의 고통은 끝나지 않으리."

까마귀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 남은 태양 주위를 날아다녔다. 모든 사람들은 까마귀가 날때마다 하나 남은 태양의 빛이 가려지며 천지가 칠흙같이 변하는 것을 보며 두려워했다.

.............................................................
....................

이곳은 어둡다. 빛이라고는 들어오지를 않는다. 제이가 나를 위하여 온 방 창문에 테이프를 붙여 봉해놓은 탓이다. 방 안 한구석에 있는 빛 바랜 크리스마스 츄리에 걸려있는 조약하게 반짝이는 전구들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그 불빛은 성모 마리아상의 단정한 푸른색 가운에 빛을 던지고 있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그녀는 동정녀이다. 나는 그녀가 나의 어머니와 비슷하다고 느낀다. 나의 어머니가 동정녀였던가. 아니다. 그녀는 두 아들을, 아니, 세 아들을 가진 행복한 아내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동정녀라고 말했다. 누구였더라.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인가 보다. 생각나는 것은 호박파이와 러시아 사람들이 쓰고 있는 긴 털 모자이다. 왜 이런게 떠오르는 것일까. 춥다. 몸이 차가워서 팔이 저릴 지경이다. 언젠가 이렇게 누웠다가 차갑게 몸이 식어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게 될까. 나는 옆으로 돌아눕는다. 차가운 바람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그 바람이 속삭인다. 얘야, 너는 어디에 있니. 바람이 나를 놀린다. 얘야, 너는 죽은 애란다. 바람이 나를 농락한다. 얘야, 너는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잡히는 것을 벽에 집어던진다. 둔탁하게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

그때, 딸깍하며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가 돌아오는 소리이다. 오랜 정적을 깨준 그가 반가워서 나는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제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제이! 보고 싶었어....."
"아앗, 형...."

제이는 식료품을 가득 담은 봉투를 안고 있었고, 나의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하여 봉투를 떨어뜨렸다. 툭-하며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애의 품을 파고 들었다. 제이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내 동생이었지만 이제는 그애가 형 같았다. 내가 그애에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제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두 팔로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나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살아있구나. 살아있구나. 살아있구나. 제이가 그런 행동을 할때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애는 오래도록 나를 그렇게 안아주었다. 그러나 발 밑에서 굴러다니는 것들이 걱정이 되는지 나를 가볍게 밀치려고 했다.

"잠깐만, 형. 잠깐만. 이것 좀 부엌에 갖다놓고 말야."

문득, 나는 애처롭고 가슴 아픈 느낌이 들어서 그애를 놓아주기가 싫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아플까. 왜 이렇게 순간이라는 것은 빨리 스치고 지나갈까. 한번 흘러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애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팔을 푸는 순간, 그애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제이는 곧 나의 반응을 읽어내고 체념했다. 지난 2년간 나와 함께 지내면서 그는 많은 것들에 대해 포기하는 것을 배웠다. 나는 그게 가슴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 기뻤다. 그애가 나를 위해서 이 너저분한 도시에 왔을 때도, 나를 위해서 신부가 되길 포기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었을 때도, 나를 위해서 집안에 두꺼운 커튼을 켜놓고 빛을 차단했을 때도 나는 가슴 한곳이 찌르는 듯이 아프면서 기뻤다. 나를 위해서 그애가 포기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애가 나를 무시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는다. 나는 식물이 되고, 공기가 되며, 반투명한 어둠이 될 것이다. 애처로움에 나는 그애의 품에 더욱더 파고들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제이는 다시 달래는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 그만 놓아줘야지. 나 배 고프단 말야."

배고프다는 말에 나는 강렬한 허기를 느낀다. 그런 나의 몸이 너무 낯설어서 후다닥 그애에게서 떨어졌다. 인간의 가장 강렬한 본능이 성욕과 식욕이라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본능에 가까울까. 나는 후자쪽이라고 생각한다. 섹스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수도사들은 존재하지만, 먹지 않고 사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비명을 지를 줄 모르는 식물조차 무언가를 먹는다. 몸 안으로 들여놓는 것이 없으면 생명은 자기 기능을 하지 못한다.

내가 놓아주자 그애는 떨어진 식료품을 모아 담고서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다시 방해하기 전에 빨리 해치워 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나는 낡은 쇼파위에 앉아 그애의 거동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애는 작고도, 작은 한마리의 늙은 생쥐같다. 이리 쪼르르, 저리 쪼르르. 그애는 오물렛과 베이컨을 구워 식탁 위에 차렸다. 그애가 나의 몫의 할당량을 놓은 순간 나는 허겁지겁 입에다 음식을 쓸어넣는다. 그리고, 그애가 보지 않는 순간 손바닥에 토해버린다. 그리고, 주머니속에 토사물을 넣는다. 몇번 그렇게 반복을 하면 접시위의 음식은 사라진다. 제이가 마지막에 하얀 알약 몇알과 물잔을 건네줄 때도 나는 같은 행동을 한다. 약을 입에 넣고, 삼키지 않고 간직한다. 그리고, 그애가 익숙한 동작으로 접시를 치우는 순간 약을 손에 뱉는다.

제이와 나는 거실에서 서너시간을 함께 TV를 본 후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그 어둡고, 어두운 방으로 돌아가서 숨을 죽이며 집 안의 기척을 살핀다. 똑. 똑. 똑. 수돗물이 떨어지는 소리, 윗층에서 녹화된 야구 중계를 보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그리고, 이 두터운 벽 너머로 제이가 스탠드를 켜고 바쁘게 펜을 놀리는 소리. 나는 기다린다. 마치 먹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야수처럼 한껏 몸을 웅크린채 신호를 기다린다. 윗층 사람들이 슬리퍼를 끌고 침실로 가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에서 하나 둘씩 불을 끄고 잠이 드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 제이의 기척이 들린다. 조금 더 지나면 평온하게 잠이 든 그애의 숨결이 잡힐듯이 들린다. 모든 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되어도 나는 기다린다. 소리의 파장이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 사람의 긴장이 풀리고 그들이 방어본능을 푸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모든 것이 잠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가만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제이가 나에 대해 신경을 쏟지 못할 때면 나는 언제나 그애에게서 벗어난다. 그것은 그애의 잘못이다. 나는 꼭 움켜쥐고, 묶어두고, 매달아 놓아야만 된다. 나는 유다의 자식이며, 돈 몇 푼에 홀연히 마음을 바꾸는 두꺼운 화장을 한 창부이며, 끝없이 간악하게 홀리는 뱀이다. 곁에 있다고 방심하는 순간 끝없는 어둠에 잠겨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너의 잘못이다. 네가 잠든 순간이면 나는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다. 어두운 밤은 네가 잠들어 있음으로 더욱 어둡다. 한없는....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둠.


.............................................................
....................

나는 오래 걸었다. 클럽 주차장은 아파트에서 두 블럭 정도 떨어져 있었다. 클럽에서는 귀가 멀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거리에는 어둠을 틈타 밀애를 나누는 연인들 쌍상이 묻혀 있었다. 내가 지나가면 오히려 그들은 애무를 멈추고 나를 진기하게 쳐다보며 자기네들끼리 속닥였다. 이런 밤은 더욱 춥다. 나는 클럽 보거스의 주차장 벽 한 구석에 기대어 기다린다. 몸의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걸은 탓이다. 나는 가볍게 떨면서 근처 아무데나 들어가, 그 누구든 붙잡고 싶어진다. 그런 천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두 팔로 몸을 꼭 감싸안는다. 구걸 따위는 딱 질색이었다. 그때, 클럽 뒷문이 열리면서 요란벅적한 소음이 들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뒷일을 보기 위해서였는지, 집으로 가는 참이었는지 건들거리며 나오던 체구가 좋은 한 사내가 벽에 기대어 멀쭘히 서 있는 나를 바라본다. 그는 흘끗 나를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굳히더니 기묘한 웃음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이봐, 예쁜이. 도대체 얼마지?"
"나는 비싸. 하지만, 솜씨가 근사하다면 절반으로 해줄 용의는 있어."

나의 차갑고, 또렷한 말투에 상대방은 실실거리며 웃더니 손가락을 까딱 거린다.

"좋아."

두어 발자국 내게 다가오는데 술내음이 독하게 풍겨온다. 그리고, 바로 나를 강하게 벽에 밀어부치더니 내 입술을 자신의 축축한 혀로 감싸며 한 손으로 바지 자크 위를 더듬는다. 나는 가볍게 저항한다. 그리고, 팔을 푼 후 발끝을 들어올려 상대방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춘다.

"여기선, 싫어."

나의 제지에 이빨새로 기이한 웃음 소리를 내더니 그는 강한 손으로 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클럽 뒷마당은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는데 그곳에 자신의 차가 있는듯 했다. 커다란 트럭 문을 열고 나를 밀어넣더니 바로 내 위에 몸을 쓰러뜨렸다. 육중한 무게에 나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듯 했다. 장시간 동안 샤워도 하지 못하고 운전만 한 탓인지 상대방의 셔츠에서 묻어나는 땀냄새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꺼끌거리는 턱이 나의 뺨을, 목덜미를, 가슴으로 쓸어간다. 나는 팔을 들어 상대방의 어깨를 잡는다. 양감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살갗이, 근육이, 핏줄이 움직인다. 나는 한동안 그 감촉에 매혹된다. 상대방이 거칠게 바지를 벗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눈 앞에 실재로 존재하는 부피감에 넋을 잃는다.

"썅. 왜 이렇게 뻣뻣해?"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상대방은 내게 몸을 밀착해 왔다. 그는 성급하게 나의 바지 버클을 풀려고 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상대방의 빠른 호흡과 애타는 손길이 느껴진다. 살아있다. 온 몸에 피가 도는 존재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상대방은 벗은 다리가 나의 벗은 몸에 엉킨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서서히 입 맞춘다. 나의 움직임에 상대방은 긴장을 푼다. 서서히 나는 온 몸의 근육을 혀로 핥으며 매만져 나간다. 그리고, 그의 턱과, 입술과, 눈두덩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이것은 성스러운 키스이니. 서서히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바라건데, 당신의 잔을 내게 허락하소서.

"헉-."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상대방은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더니 곧 파르르 떨기 시작한다. 생명의 호흡이, 붉은 핏빛의 기운이 내게 전달된다. 몸의 냉기가 서서히 풀린다. 따뜻해져 간다. 어머니의 품 같다. 나는 더욱 더 상대방에게 바싹 매달린다. 모유를 빨아대는 갓난아기가 온 힘을 다하여 생명의 물줄기에 매달리듯 나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품 안에서 파들거리는 것이 작은 나비같다. 사랑스럽다. 따뜻하다. 어딘가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소리는 감미롭게 나를 불렀다. 이리로 와. 여기에 네가 찾던 나리 꽃이 있어. 나는 있는 힘껏 상대방에게 매달리며, 그의 체온을, 온기를, 영혼을 나누어갖고자 한다. 지독한 합일(合一)이 아니던가. 얼마나 간절한 육체적 애원인가. 내 안에 너를 담는다. 정수를, 생명을, 영혼을 담는다. 나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가냘픈 양을 잡아먹는다. 나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되어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하이에나에게 뜯긴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얼마나 가엾은가. 살아있는 것을 죽여 먹음으로 죄를 짓고, 그 죄가 깊어 다시 살아있는 것을 죽인다면.... 그리하여 어느날 내 몸 밖으로 누군가의 먹이가 될 것을 배출해낸다는 것은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사람은 일평생 동안 먹고, 그 먹은 것을 되갚기 위해 낳는 것 외에는 하지 못하는가. 깊고도 큰 시기심과 질투로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더더욱 깊숙이 나의 송곳니를 받은채 상대방의 육체를 꽉 끌어안는다.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선혈은 눈 앞에 오색찬란한 영상을 펼쳐보인다. 아아, 나는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다. 색색깔로 현란하게 펼쳐지는 프리즘.

나.는.빛.을.듣.고.생.명.을.본.다.

저 시간의 어디엔가 아득히도 작은 점에서 팽창이 일어난다. 수 많은 빛이 쏟아진다. 무한의 우주가 업겁의 세월동안 펼쳐진다. 내 품안에서 차가워져 가는 생명을 느낀다. 나에게 생명을 주는 어머니가 내 품 안에서 죽어간다. 모든 아들의 슬픔. 우주는 수축되고, 점점 모여들어 하나의 검은 점이 된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어둠의 혹이 된다. 노쇠와 소멸이 애달프고, 몹시 슬퍼서 나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친다.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을 붙잡고 희미한 불꽃에 집중한다. 꺼져서는 안돼. 꺼져서는 안돼. 내가 몸부림을 치며 매달릴수록 불은 급속도로 차가워져 간다. 시퍼렇게 식어있는 사체를 본다. 빛은 사라지고 껍질만 남는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는 커다란 몸뚱이에 나는 가슴이 쥐어뜯기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뒷 주머니에서 칼을 커내 목에 나 있는 상흔을 더더욱 깊숙히 찌른다. 피가 흘러나오면 나는 입을 댄다. 죽지마, 죽지마, 죽지마, 죽어버리지마. 나를...... 혼자 두지마. 그렇게 미친듯이, 혼자 외로워 병신춤을 추고 나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피에 젖어 누워있다. 마치 타버린 성냥개비처럼 재만 남아있다. 불길이 일어내던 환상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트럭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내 손이 닿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톡, 톡, 톡. 빗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오는 탓에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두 손을 폈다. 톡, 톡, 톡. 차가운 물 방울이 손 위에 떨어졌다. 핏방울이 물방울과 섞여 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빗줄기는 서서히 거세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수 많은 빗줄기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를 향해 떨어지는 가늘고, 긴 바늘 같았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쏴아아아. 빗줄기가 거세져 내 몸으로 파고 들었다. 옷이 젖고, 머리가 젖고, 신발이 젖어갔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안에 서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End of Prologue: It's a rainy day.
RS
댓글 1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51 중편 드래곤의 연인 [3] 비겁한콩 2004.09.16 0
50 중편 드래곤의 연인 (2)1 비겁한콩 2004.09.02 0
49 중편 드래곤의 연인 (1) 비겁한콩 2004.09.02 0
48 중편 드래곤의 연인 - 프롤로그 비겁한콩 2004.09.02 0
47 중편 [댕!] 화성으로 가는 꿈 #11 댕! 2004.08.31 0
46 장편 [유다의 가을] Part1. 제이....... (1) RS 2004.08.30 0
장편 [유다의 가을] 프롤로그1 RS 2004.08.30 0
44 장편 화조월석 101 명비 2004.06.30 0
43 장편 화조월석 9 명비 2004.06.30 0
42 장편 언더워드(7) - 완결 moodern 2004.01.04 0
41 장편 언더워드(6)1 moodern 2004.01.02 0
40 장편 카시오페이아 5부 민들레 2003.12.17 0
39 장편 카시오페이아 4부 민들레 2003.12.17 0
38 장편 카시오페이아 3부 민들레 2003.12.17 0
37 장편 카시오페이아 2부 민들레 2003.12.17 0
36 장편 카시오페이아 1부1 민들레 2003.12.17 0
35 장편 카시오페이아 <프롤로그>1 민들레 2003.12.17 0
34 장편 언더워드(5)2 moodern 2003.12.03 0
33 장편 [有水有火] 첫 번째 매듭 ::珠有我(주유아):: unica 2003.11.25 0
32 장편 [有水有火] 첫 번째 매듭 ::珠有我(주유아):: unica 2003.11.2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