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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저편에는

1. 비 (非)



이스트 에이 잭슨빌 E. A. Jacksonvill (중기-2103 ~ 후기-21)

인간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던 중기의 끝자락에서, 잭슨빌은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의 재능은 인간의 멸망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세상은 <후기 시대>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협의적인 것에서 탈피하였고, 무수히 많은 이종족(異種族)들의 각각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얻어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가운데 잭슨빌이 있으며,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후기 시대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중략) 기실 종족으로써의 인간은 멸망하지 않았지만, 인간 종족만이 스스로 주인되어 살아가던 중기 시대가 소멸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도달하려 한 까닭이 아닌가. (중략) 그러한 이유에서라도 한결같이 올곧았던 그가 인간을 위해 한 일들을 이 책에 다 기록할 수 없다는 말은 두 번 말하면 잔소리고 세 번 말하면 게소리일 것이다. (후략)

- H. T. 에멜, [이 땅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기록(인명록)] 315페이지. 후기 6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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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도 변함 없이 하늘은 뿌옇다. 우리 마을의 하늘은 늘상 뿌옇다. 그러다가 비가 내리기도 하고, 그냥 저렇게 뿌옇게 한나절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왜 우리 마을의 하늘은 저렇게 잿빛 희뿌열까?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혹자는 물의 여신들을 지고 다니는 바닷바람이 산기슭을 만나서 여신들을 산자락에 내동댕이치기 때문에 여신들이 놀란 나머지 그녀들이 평생에 맺어왔던 물방울을 떨구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중기 인간들의 기술의 더러운 잔재라고 한다.

어쨌든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잭슨빌 마을은 일년 이백팔십팔일 늘 이렇게 희뿌연 색깔의 하늘로 둘러 싸여있고, 마을사람들은 반질거리는 민머리들을 자랑하면서 마을 이곳저곳을 쑤시고 돌아다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마을은 특별한 직업이 없는 한량들의 집단공동체이다. 늘 희끄무레한 하늘색아래 깎아지른 절벽 위로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그 유명한 잭슨빌이 깎아지르다 못해 질려버리도록 가파른 저 절벽의 꼭대기에서 하나하나 계단을 곡괭이로 파 다듬어가면서 이곳으로 들어와 그의 말년을 보낸 장소 이외에는 어떠한 값어치도 없는 땅이며, 잭슨빌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과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거대한 야망을 품고 - 그러나 절대로 이룬 사람을 본적이 없는, 적어도 이루었다면 그들의 자서전 혹은 전기 속에 우리 마을에 대한 감상정도는 있어야하지만 그런 건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 그들의 표상이 될만한 위대한 사람의 흔적을 열심히 붙좇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대학생들에게 야망 비슷한 것이라도 품게 해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선생님들의 간절함으로 선택된 수학여행 장소로써 각광받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의의도 없는 곳이다. 결국 쉽게 말하면 우리 마을은 잭슨빌 장군으로 먹고사는 관광명소이다.

이래저래 살펴보면, 막상 신기하고 기이한 구경거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디에 써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요상한 것들이 우리 마을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가령 우리 마을 중앙에는 거대한 네모 판이 우뚝 서있다. 네모반듯하지는 않은 거대한 검정색의 이 판은, 마치 책을 가로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으로 두께는 얇고 가는 편인데, 과거에 이 판 앞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서 무엇인가를 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판에서 그림이 나왔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범선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신호판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막상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 없는 것들이며 그다지 돈벌이가 되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인지라 마을 사람들은 '유적관리'의 명목을 내세워 - 사실은 돈 벌려고 - 검정판을 맨들맨들하게 닦아놓고는 햇빛이 대형 판 앞의 널따란 광장으로 반사되도록 해서 그 곳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깔판을 잔뜩 깔아두고는 관광객들에게 일광욕장소로 - 물론 돈을 받고 - 제공하고 있다. 1년 288일 중에 단 며칠 햇볕드는 우리 마을에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다고 그런 장치를 하는지... 그 광장에는 잭슨빌의 검정상자(Jacksonbill's blackbox) 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마을 사람들의 생존본능에 의거한 사소한 호객행위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창문 밖의 뿌연 하늘을 보며 비가 올지 안 올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눈 안으로 파고들어 온 검정상자 때문에 생각이 잠시 딴 곳으로 달아났다. 나는 창문가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기 쉬운 오후지만, 바닷바람이 만만찮게 불어대고 있다. 바닷가 까마득하게 깎여져있는 절벽 위로 자리잡은 마을, 그리고 마을을 병풍처럼 휘어감고 있는 까마득한 절벽, 그 덕택에 우리 마을은 일반적인 9월의 초여름 날씨와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창문을 열어두고 바깥을 바라보는 나는 물기어린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있다는 말이다.

에취!

춥다. 여기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이 정도로 그쳐야지. 무료한 점심 후의 오후시간을 이렇게 무료로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 또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한량의 한 족속임에 분명하다. 자조감이 마음속으로 진하게 느껴진다.

흠.

바닷바람이 더 거세어지기 전에 창문을 닫으려는 그 때에, 집 앞으로 뚫려있는 샛길을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어디 보자... 머리에는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고, 오른팔에는 보자기로 덮은 바구니를 끼고는 황급하게 어디론가 가고... 아니, 이리로 오고 있었다. 허리춤에 부엌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니 요리 중이었을 듯하고, 요리를 만들자마자 누군가에게 그 요리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좌우 재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나온 듯하다. 이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요리를 먹어야 할 대상은 바로 나인 듯 한데... 그렇다면 저 사람은 메이지 양이 분명하다. 그건 머릿수건 밑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 궂은 날 - 매일 궂은 날이지만 - 저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받으면서도 흔들림없이 나에게 달려올 수 사람은 메이지 양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 3
  • No Profile
    진아 03.10.29 01:37 댓글 수정 삭제
    아라.. 처음 뵙는 분이군요, 라고 하려고 보니... 닉을 바꾸신 건가요?
    '죽음 저편에는'의 건필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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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형 03.10.29 08:10 댓글 수정 삭제
    음. 건필이라는 말에서 큰 어려움이;; (털석!)
  • No Profile
    해그리 03.11.01 17:35 댓글 수정 삭제
    흐음. 하리야님의 연재장소가 하나 더 늘었...;ㅁ; (퍼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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