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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잘못된 시작

우주의 동쪽 지역에 눈에 띄는 한 행성이 있었다. 갈색 물감을 물에 섞어 놓은 듯 연한 황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소박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게 했다. 그 행성에 사는 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통칭하여 '알파리아'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유난히 빛나는 무언가가 세 개나 있었다. 그것은 알파리아를 구심점으로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큰 타원 궤도를 따라 천천히 공전하고 있었다. 알파리아 대지 위에서 보면 그것은 꼭 지구의 달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스스로 빛을 낸다는 점이 지구의 달과는 달랐다.

척박하지만 적어도 저들에게는 살기 좋을 것 같은 알파리아 행성은 지금 증오와 공포로 얼룩져 따뜻하고 정의감 넘치던 저들의 마음마저 사막처럼 황폐하고 삭막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저들이 지금껏 보지도 못한 무기들로 자신들의 땅을 침략해 온 무서운 적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알파리아를 침략한 지 고작 몇 달만에 그 큰 행성(지구의 세 배 크기정도 된다)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총 들고 쳐들어 온 적에게 창칼로 대항하는 수준밖에 안 되는 저들은 그저 죽거나 도망치거나 아니면 항복하는 이 세 가지 선택밖에 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알파리아 행성은 겉보기와는 달리 주어진 환경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물론 지구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특별한 몇 몇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끔찍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바다가 압권이었다. 적갈색 빛을 띈 채, 걸쭉하게 출렁이는 바다는......과학수업에서 흔히 듣는 이름인 황산이라는 무서운 녀석만으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생각해 보라! 그 바다에 뛰어들면 어떻게 될지......

알파리아 북쪽은 진한 밤색 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때로 진한 구리 빛 색깔로 빛나기도 하는데, 어쨌든 그 땅은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니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아주 신비하면서도 아주 괴기스러운 지역이었다. 이 땅에 사는 저들은 이곳을 가리켜 죽음의 대지 혹은 무서운 악마가 잠든 저주받은 땅이라고도 부른다.

어둑한 구름이 금방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듯 낮게 깔린 구리 빛 대지가 사방으로 굴곡 있는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구름과 대지 사이는 약간 까만 회색구름 탓인지 초저녁처럼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간혹 불어대는 바람 탓에 옅은 밤색 흙가루가 악마의 비웃는 얼굴 같은 오싹한 모양을 한 채, 저 지평선 위로 흩날려갔고, 괴물의 이빨처럼 이 저주받은 땅위에 군데군데 높고 낮게 솟아있는 짙은 남색의 돌산들이 구름을 관통할 듯 날카롭게 서 있었다.

척박한 사막에서도 서식하는 끈질긴 생명력의 짐승조차 이 땅위에서만큼은 살수가 없을 것이다. 마른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는 이 저주받은 땅위로 대형 월드컵 경기장 보다 세, 네 배정도 더 큰 전함 한 척이 웅장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구름 아래 창공을 가득 채운 옅은 어둠은 이 웅장하고도 거대한 전함에서 빛나는 수 백 개의 하얗고 노랗고 빨간 불빛 탓에 감히 버티지 못하고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수 백 개의 밝은 불빛 사이로 여러 개의 영문철자가 으스대듯이 띄엄띄엄 반짝거리고 있었다.

'I.N.T.E.R.P.R.I.Z.E'......황량하고 척박한 이 땅위에 거대한 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그것의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전함의 높이는 어눌한 회색구름에 닿을 듯 말 듯 까마득히 높았다. 그 중 가장 높은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꼭 인터프라이즈의 두뇌처럼 보였다. 정확히 표현하면 새 머리 모양과 아주 흡사했는데, 정면, 좌우 모두 투명한 유리창이 달려있는 탓인지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안은 너비가 작은 대신 길게 쭉 나있는 깔끔한 널판지 모양의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십 수 개의 조명 탓에 지나칠 정도로 밝았다. 안은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밖에서 보면 정면에 해당하는 창 가까이로 길다란 은빛 철제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그 뒤로 푹신푹신한 꺼먼 가죽으로 씌운, 엉덩이에서 머리끝까지 편안하게 받쳐주는 등받이를 갖춘 의자가 일곱 개가 놓여있었다.

그 테이블의 주인들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마찬가지로 비슷한 테이블들이 양쪽 계단의 공간 새에 보기 좋게 정렬돼 있었다.(그것들은 앉아있는 다리가 보이지 않도록 되어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처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배치돼 있었다. 각각의 테이블에는 이미 배정된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갈색 제복 왼쪽 가슴에 아주 잘 보이는 색깔로 치장된 계급장과 몇 개의 훈장들이 으스대듯이 빛나고 있었다.

방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기 일만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테이블에 움푹 패인 채 주인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는 작은 모니터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며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테이블에서 자신의 배 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받침대 같은 부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양손으로 몇 장의 페이지로 이루어진 보고서 같은 것을 차례차례 넘겨가며 훑어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쪽에 위치한 자동문이 '스잉'하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스르르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양쪽 가슴에 훈장들로 화려하게 치장한 제복을 입은, 근엄하게 보이는 중년 사나이들이 위엄 있게 걸어들어 왔다.

"사령관께서 오셨습니다. 모두 자리에서......(가장 높은 지위인 듯한 자가 가볍게 손을 들어 형식적인 예우를 사양했다.)흠흠, 모두 이쪽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회의 진행자가 이미 자리에 앉은 일곱 명의 상관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맨 오른 쪽에 홀로 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가 작은 바람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장군 여러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좋은 소식이 들어 왔소이다. 남쪽 지역에서 끊임없이 후방을 괴롭혀 왔던 반군들이 우리 토벌대에 의해 섬멸되었소!"

일곱 명중에서 중앙에 앉아 있는 중년 사내가 불끈 쥔 주먹을 번쩍 쳐 올리면서 기운차게 외쳤다. 이에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이 7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들은 환희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손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사실 이 척박하고 우울한 땅에 그들은 석 달씩이나 머무르고 있었다. 옅은 어둠으로 가득한 이 황량한 대지를 바라보는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따스한 햇빛을 온몸으로 쐬어 본지가 벌써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늘 두껍고 무거운 전투복을 입어야 했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알파리아는 산소가 없다.) 그나마 그들은 장군이라는 지위 때문에 밑에 있는 부하들만 잘 부리면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밑에 있는 부하들은 이미 알파리아의 저주받은 환경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군 내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아 갔다. 알파리아 대륙 각지에 흩어져 점령지역을 관리하는 부대들로부터 본부 격인 인터프라이즈 호에 그들의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수 십 차례나 호소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인터프라이즈 호에 대기하고 있는 잉여 부대들은 원정 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설상가상으로 점령지역 일부에서 극심한 저항 운동이 봉기했다. 차라리 대놓고 싸웠다면 그들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군들이 이곳저곳에서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무기들과 보급물자를 약탈해 가 버렸기 때문에 이렇다할 방비도 못하고 당하기가 일쑤였다. 수뇌부도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을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그들의 행동은 훨씬 계획적이었다. 도무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알아낸 것인지 수뇌부조차 그들의 전략적 게릴라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상황이 두 달째 지속됐고, 마침내 우려했던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원정 나간 부대에서 잇따라 자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횟수는 점차 광범위하게 늘어났고, 벌써 그 희생자 수가 수 백 명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살 사건이 일어난 부대에 파견된 군의관들은 사인을 알파리아의 척박하고 우울한 환경과 길어지는 힘든 원정 생활에 의한 심각한 정신적 우울 증세 때문으로 판명했다. 처음 접했을 때는 수 십 만의 병사들 모두 정신이 미쳐버릴 정도까지 어려운 생활이 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직접 몸으로 부대끼는 병사들일수록 더욱 심한 정신 질환 증세를 보였다.

그 수는 우후죽순처럼 늘어갔다. 덩달아 자살 건수도 급격히 늘어갔다. 그러나 알파리아의 한 줄기 햇빛조차 내리쬐지 않는 척박하고 우울한 환경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동료들의 자살과 불분명한 수뇌부의 태도까지 겹쳐 결국 그들은 상관은 물론 그들이 영웅이라 불렀던 사령관까지도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사령관을 위시한 6명의 대장군들은 매우 심각한 이 상황을 잠시나마 해결해 줄 어떤 계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 시점에서 두 달이 넘어가도록 끈덕지게 괴롭혀 왔던 알파리아 반군들을 토벌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석 달 큰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은 희소식이었다. 물론 앞에 놓여진 보고서를 미리 읽은 탓에 기쁨의 강도가 약간 약해졌지만 말이다.


기쁨과 환희로 무겁고 엄숙했던 분위기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중앙에 앉은 중년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그의 두 눈은 몇 몇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하얀 점 하나가 또렷하게 일렁이는 꺼먼 눈동자는 어떤 강렬한 열정으로 가득 차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에서는 다른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힘이 느껴졌다. 게다가 잘 정돈된 희끗희끗한 머리에, 누런 피부 위로 보기 좋게 굵게 패인 주름살은 그의 연륜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런 그의 외모만으로도 그가 수 십 만의 병사들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이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조용히......조용히 하시오!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소."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시끄럽게 웅성거리던 회의장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 졌다. 조용해진 회의장 내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이윽고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의 상황은 좋지 않소이다. 우리는 레드라인에서 벌써 석 달씩이나 발목이 잡혀 있고, 이제 비축해 둔 전력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다가 식량 또한 앞으로 석 달 치 밖에 남아 있지 않소이다. 게다가 자살한 병사가 벌써 천 명에 육박하고 있고, 그 외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병사만 만 명이올시다......  현재 본국에서는 유로 연합과 대치 중이라 제대로 지원조차 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외다."그가 얼음장보다 차갑게 소리쳤다. "이 모든 것은 알파리아 행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 아주...... 아주 크오. 대체 이 지경이 다 될 때까지 전략부는 뭘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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