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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디도의 영주

2016.11.02 15:2911.02

새가 울고 날씨는 화창했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는 비가 오지 않아 날씨만 놓고 보면 말을 몰고 달리기에 불편한 점이 없었다. 유리 왕자는 야트막한 봉우리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정상 주변의 평평한 바위에 앉아 병사들이 새로 발견한 민가를 약탈하는 현장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황량한 벌판에는 고작 두 채의 집이 서있었다. 지붕에 누군가 불을 붙여서 연기가 하늘로 올랐고, 병사 셋이 돼지우리 옆에서 사로잡은 여자 둘을 강간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돼지처럼 꽥꽥댔고 유리 왕자는 고개를 돌려 하품을 했다.

부장인 가일이 다가와서 예를 갖췄다.

“왕자님. 농부 한 놈이 도망쳤습니다. 병사들을 보내 잡아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도망친 자가 있는데 잡지를 않으시겠다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도망친 농부 놈이 적에게 우리의 정황을 알릴 것입니다.”

“이미 어제 도망친 자들이 있지 않느냐? 한명이 더 도망간들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병사들을 피곤하게 할 셈이냐?”

유리 왕자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부왕이 자신에게 붙여준 자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인지, 부장이 하는 말은 언제나 간섭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들렸다.

“도망친 자를 잡지 않으시겠다면 최대한 서둘러서 적을 쳐야 합니다.”

“지금의 행군 속도라면 늦어도 사흘 후에는 성에 도착할 것이다. 더 이상 무리할 필요 없다.”

저 자는 오래 전부터 동생의 사람이었고 동생이 다칠까봐 조바심이 나는 거야. 충신이로군! 왕자는 속으로 부장을 비웃었다. 그는 지금 하는 이야기가 최대한 그럴듯하게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부장에게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어제 도망친 자들이 있으니 적은 우리의 정황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병사들은 여러 날을 와서 이미 피곤한 상태인데 약탈하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이 돌밭은 어떻게 된 것이 하루 종일 행군을 해도 사람 사는 집 한 채 만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게. 간신히 찾은 민가인데 약탈하는 도중에 고작 냄새나는 농부 하나 잡아오라면 병사들도 신경질이 나지 않겠는가? 장군 말대로 지금 서두른다고 해도 내일이 되어야 도착하겠지. 고작해야 며칠 차이인데 그만큼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지금 적의 성에는 병사가 별로 없으니 혹시 아나? 농부들 얘기를 듣고 무서워서 도망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지.”

왕자는 말을 마치고 부장에게 물러가라는 명을 내렸다. 부장은 유리 왕자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명에 따랐다. 유리 왕자에겐 부장의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 지루한 일이라 그는 혼자 있고 싶었다.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왕자 본인도 자기 말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다. 왕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그가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있더라도 끄집어낼 위인이었고 아래 사람들이 게으름 피우는 것을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만큼이나 싫어했다. 만약 왕자가 누군가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는데 약탈하는 중이라 못하겠다는 자가 있다면 그가 손수 허리를 잘라버릴 것이었다. 어차피 그럴듯하게 들리기만 하면 되는 말이었다. 다만 부왕이 특별히 강하고 날랜 병사 100기를 붙여준 것은 서둘러서 동생을 찾아오라는 뜻이었으니 지금처럼 뜸을 들이는 모양이 심하게 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돌아가서 욕이나 먹을 것이다. 그만큼 부왕이 동생을 아꼈다.

유리 왕자는 배다른 동생을 찾으러 국경을 넘어 이 변방으로 왔다. 황량한 땅이었다. 사막과 돌산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그나마 농사를 지을 만한 손톱만한 땅에 덕지덕지 민가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그 민가도, 하루 종일 말을 달려봤자 한 두어 채 정도 만날까 말까할 정도로 드물었다. 인근에 성이 하나 있고 영주도 있다지만 나라에서도 돌보지 않는 버림받은 땅이었다. 이런 땅을 일주일이나 달려왔다.

어디 먹을 것이 없어서 땅거지 같이 이런 땅에까지 기어들어온 것인지, 유리 왕자는 속으로 동생을 욕했다. 배다른 동생이었다. 동생은 한 달 전 이 지역으로 들어와 병사들을 이끌고 약탈을 하다 실종됐다. 며칠 뒤에야 나타난 몇몇 병사들이 자신들은 왕자의 부대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며, 왕자는 그곳 영주가 보낸 부대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잡혀갔다는 사실을 알렸다. 왕은 왕자를 버리고 자기들끼리 돌아온 병사들을 보고 격노, 그들을 고문대에서 굴려 팔과 다리를 뽑아버렸다. 왕위를 두고 은밀히 다투던 동생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유리 왕자는 속으로 기뻐했지만 부왕은 그에게 직접 동생을 찾아오라고 명을 내렸다. 백여 기의 병사들과 부장 한 명을 붙여줬다.

적당한 장수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자신을 시켜서 이 귀찮은 일을 하게 하는지 유리 왕자는 의심을 품었다. 왕비가 꾸민 일인지도 몰랐다. 왕비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죽이려한다면, 이 촌구석이야말로 그런 일을 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유리 왕자는 생각했다. 부왕이 자신에게 동생의 사람인 가일을 동행하게 한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하지만 유리 왕자가 동생을 구출하기 전에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도 서둘러서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그에겐 아직 여유가 있었다.

부왕에게 미움 받는 왕자는 골치가 아프다. 부왕의 신임이 있었다면 어떤 일을 해도 권력의 지엄함이 뒤를 받쳐주었겠지만, 유리 왕자는 힘은커녕 사방에서 견제를 받았다. 그 견제가 지겹고 짜증나서 유리 왕자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왕위 경쟁자 여러 명 중에서 하나를 먼저 제거하기로. 지금 그는 동생을 구하러 가는 척 하면서 동생을 죽게 하려는 참이었다. 그는 적이 동생의 처리를 놓고 고민할 시간을 늘려주고 싶었다. 자신이 부대를 이끌고 천천히 진군하는 사이에 적이 동생을 죽여주면 좋고, 만약 적이 동생을 살려놓은 상태에서 거래를 하려고 한다면 적당한 때에 판을 깨버릴 생각이었다.

대신 적이 방비를 강하게 하고 필사적으로 방어한다면 유리 왕자 자신에게도 유리할 것이 없기 때문에 적당히 하는 게 중요했다. 이런 일을 할 때는 줄 위의 광대처럼 균형을 잘 잡아야 된다. 그들이 동생을 죽이게 할 만큼의 자극, 하지만 유리 왕자도 죽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정도로 잘 빠진 도발, 그것이 바로 유리 왕자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생이 죽은 것만 확인하면 적당히 공격하는 척을 하다 물러날 것이고, 부왕에게는 최선을 다했으나 동생이 이미 죽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만 알게 할 셈이었다. 그러면서 왕비의 사람들이 칼을 들이대는 것만 막하면 완벽한 성공이다.

그런 상황이었다.

유리 왕자는 그날 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곤하지만 지루한 밤이었다. 이런 거친 들판에는 왕궁의 편안함이 없었지만, 편안하지 않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지루했다. 푹신하고 안락한 것은 이불뿐이고 사방에 적들이 깔려있는 왕궁의 적대적인 환경이 그에게 이상한 활력을 주고 있었던 것일까. 어딘가 적이 있지만 지금은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고, 벽지에 있는 성의 한줌도 못 되는 적병들은 왕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는 일어나서 망토를 두르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산뜻한 바람이 아니라 황무지의 모래를 운반하는 불쾌한 바람이었다. 여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왕자는 생각했다. 그는 난봉꾼이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았고 여러 여자와 한꺼번에 관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또한 변태였다. 여자에게 상처 입히는 걸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여자와 관계할 때 부드러운 가슴을 몸에서 뜯어낼 것처럼 아프게 쥐고 그 신음소리를 듣는 것, 어느 부위든지 상처를 입히는 일에서 희열을 느꼈다. 여자를 관계를 가지고 학대하는 것은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낮에 병사들이 강간한 여자들을 생각했다. 그 돼지 같은 천한 것들이라도 있었으면. 양쪽에 눕혀놓고 둘 다 항문을 찢어놓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멀리서 모닥불이 타닥타닥 튀는 것이 보였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있는 곳까지 온 것이었다. 병사들 몇 명이서 그가 온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에는 무리가 없는 거리였다. 경계를 제대로 서지 않고 잡담만 한다고 병사들을 혼내려다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그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그들이 공격하려는 성의 영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성은 황무지에 세워진 성이라 영주가 별다른 백성도 거느리지 못했고, 힘이 없었다. 나라에서도 버린 땅으로 취급하는 곳인데 영주가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1년 전부터 새 영주가 들어섰고 그 영주가 여자라는 것이었다. 여자인데, 맨 손으로 들어와서 전에 있던 영주를 살해하고 왕의 승인을 받아 영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 여자는 마법을 쓰며 용맹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 왕자의 동생도, 단순히 약탈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영주와 관계된 일로 뭔가를 하려다 잡힌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병사들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유리 왕자가 나섰다.

아무리 대충 싸우기로 했어도 병사들이 이상한 소문 때문에 동요하는 것은 좋지 않다. 더구나 동생이 실종된 이유까지 말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는 자칫하면 왕실의 체통을 떨어뜨릴지도 모른다.

그 영주가 정말로 마법을 쓴다면 그게 무슨 종류의 마법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유리 왕자는 소문을 이야기한 병사를 그 자리에서 목 졸라 죽였다. 천막에 칼을 두고 와서 무기가 없었다. 시체는 잘 보이는 곳에 버렸고 돌아가는 길에 수습해서 묻어주기로 했다.




그 뒤로도 비는 오지 않았다. 이 땅이 황무지인 것은 비가 잘 오지 않는 탓도 있는 것 같았다. 왕자가 왕궁을 떠났을 때는 우기가 막 닥쳐오던 시기여서, 지금쯤 성도에는 비가 들이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유리 왕자가 이끄는 병사들은 이제 멀리 성이 보이는 곳까지 진군한 상태였다.

작고 야트막하게 보이는 성은 왕궁에 비하면 마치 여염집 담장에 불과한 정도라고 왕자는 코웃음을 쳤다. 허술한 성이었다. 그들이 달리는 곳 주변에는 드넓게 펼쳐진 황무지 위로 산들이 여기 저기 높지 않게 솟아 있었고, 성으로 가는 길도 낮은 산 두 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산 사이를 지나가는 샛길 너머로 드넓게 보이는 밀밭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넓은 밀밭이었는데, 그 너머로 성이 있었다. 말을 달리는 채찍질에 힘이 붙었다. 며칠 전에 죽인 병사가 한 말, 영주가 여자인데 용맹하고 마법을 쓴다는 말이 유리 왕자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에게 기이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황무지를 달리는 것이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왕자의 부대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산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고, 산이 각자 끝나는 곳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며 곧게 뻗은 길이 있었다. 길의 끝에 이르면 성은 손에 잡을 만큼 가까이 오게 된다. 그런데 왕자는 산을 지나면서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고 느꼈다. 높지도 않고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것이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데가 있었다. 자신은 한없이 비천한 자이고 아무 꿍꿍이가 없으니 마음 놓고 들어와도 된다고 상대를 안심시키려 애쓰지만 속에 꿍꿍이가 숨어있는 간사한 자를 만난 것처럼.

숨어있다는 생각은 꼬리를 물고 다른 생각을 낳았다.

복병이 있을까?

척후를 보내지 않았다. 방심하고 있던 탓일 것이다.

어쩌면 산 사이로 난 좁은 길이, 여자의 엉덩이 사이로 난 그 길을 닮아서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드는지도 몰랐다. 양쪽에 하나씩 솟은 산은 여자의 가슴 같기도 하고, 뒤돌아 누운 엉덩이 같기도 했다.

길에 들어선다기보다는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미끌미끌하고 간질간질한 그곳으로 한없이 들어가서, 온 몸의 기운을 쏟아내는 느낌.

왕자는 예전에 한 건방진 귀족 여자를 겁탈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름이 아마 알비온 메넬라오스였나, 그랬을 것이다. 핏줄은 귀족이라지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주제에 얼마나 도도하던지. 그 여자를 갖기 위해서는 꽤나 수고를 들여야 했다. 협박하고, 비싼 선물을 안기고, 감언이설로 구워삶고, 한 나라의 왕자씩이나 되는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녀는 처녀였고 남자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정숙한 귀족 처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공을 들여서 망가뜨리고 싶은! 그녀의 온 몸을 때려서 멍을 들이고, 비명 소리가 더 이상 높아질 수 없을 때를 기다려 왕자는 그녀의 속옷을 벗기고 그곳을 손으로 쥐었다. 까슬까슬한 계곡은 지옥의 입구를 숨긴 깊은 계곡 같았고 혀를 우악스럽게 대어 그곳의 속에 들어있는 오돌토돌한 돌기를 애무하자 곧 불같이 뜨겁고 축축해졌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애원을 무시하고 사정없이 물건을 밀어 넣었을 때, 그는 곧 실정하고 말았다. 왕자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조루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창피하다는 생각은 마음 한구석에서 떠돌다 죽어갔다. 어두운 동굴로 끝없이 굴러 떨어지는 감각이 발끝에서 머릿속까지 울렸고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남자는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이 길의 끝에 남아있는 것은 죽음이다.

머릿속에서 그 문장이 떠올랐을 때, 길의 끝에서 마치 솟아난 것처럼 적의 병사들이 장창을 들고 일어섰다. 보병이다! 우리 편 기병으로 돌파할 수 있다! 왕자는 명을 내렸다.

“수가 많지 않다! 멈추지 말고 빨리 돌파하라! 진형을 갖추기 전에 무너뜨리면 된다!”

왕자의 병사들은 평소 훈련대로 2열로 새가 날개를 펴는 진형을 짜서 돌진했다. 왕자는 부장에 이어 2열에 위치했고, 긴 창을 뽑아들었다.

죄인을 둘러싸고 있던 사슬이 풀리는 것처럼, 적병의 대열이 흩어지고 그 가운데서 적의 영주가 튀어나왔다. 영주의 깃발을 든 종자가 곁에 있어서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영주가 칼을 빙빙 휘두르며 말을 건넸다.

“죽기 전에 너희 부모님들에게 마음으로 안부나 물어보아라. 내 이미 우리 땅을 침범하고 백성들을 약탈한 네 놈들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가 병사들이 이야기하던 그 사람이었다.

왕자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창술로 이제껏 쓰러뜨리지 못한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영주를 본 순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체격이 컸다. 사람이 저렇게 클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키가 컸고 뚱뚱했다. 육중하고 풍만한 가슴은 갑옷에 둘러싸인 채로 솟아있었고 팔뚝은 사람 허벅지만큼 굵었다. 마을 어귀마다 서있는 늙은 나무를 떠오르게 하는 체격이었다. 왕자도 자기 나라에서는 거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영주는 유리 왕자보다 머리 두 개, 아니 세 개 정도는 더 컸다. 체격에서 받은 위압감을 더하는 것은 휘황찬란한 차림이었다.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피처럼 붉은 비단 전포를 입고 있었는데 전포의 겉에는 용 두 마리가 뛰놀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는 묶지 않은 채 허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장검 두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날카롭게 빛나는 도신은 그 검 두 자루 모두가 보기 드문 명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말을 달리던 병사들이 비치는 칼 빛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원래 장검은 양손으로 다루는 무기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장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슥 돌렸다. 마치 나뭇가지를 다루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타고 있는 말도 심상치 않았다. 말은 피처럼 빨간 갈기를 하고 있었고 그 여자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씩씩 뿜어내는 콧소리가 적에 대한 악의와 전의를 사방에 내뿜고 있었다.

저 정도로 돋보이는 외모라면 용맹이 있다는 소문이 날만 하다. 그래서 꼭 1대 1로 싸워보고 싶었다. 동생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일단은 저 여자의 목을 꺾어서 자르고 통째로 소금에 절여서 벽에 걸어두고 싶었다. 아니면 저 기이하게 큰 두개골을 꺼내서 거기다 술을 부어 취하도록 먹고 싶었다. 저 목을 일생의 자랑으로 삼으리라. 나머지 무리들은 허수아비다. 영주만 쓰러뜨리면 다른 적병들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었다.

왕자는 명을 내려 달리던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그 다음에 창을 쳐들어 영주를 가리켰다.

“나는 작센 왕가의 유리 왕자다! 너의 이름을 말하라!”

영주는 입을 열어 낮고 깊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이 땅의 영주다. 영광스럽게도 국왕 폐하의 은혜를 입어 이곳을 다스리고 있지만 폐하의 적인 그대에게 밝힐 이름은 없다.”

누구에게든 존중보다는 능멸과 증오를 보내는 것이 유리 왕자의 삶의 자세였다.

“하찮은 사막 땅뙈기나 부쳐 먹고 사는 돼지 년이 영주라는 직위를 달더니 감히 나를 모욕하려 하느냐? 여기엔 본디 내 동생을 찾으러 왔다만 네가 방자하게 군다면 이 창으로 너의 목구멍을 훑어줄 것이다. 내 동생은 어디에 있느냐?”

영주는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그대의 동생이라는 자가 온 것 같긴 한데, 어디에 있는지는 그대에게 말해줄 만한 것이 없다. 영혼은 이승을 떠났고 육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짐승들의 밥이 되었는데 영혼이라도 찾으려거든 교회에 갈 것이고, 육신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하랴? 이미 흩어진 걸 찾아서 맞춰주기라도 하랴?”

“이 돼지 같은 년이 존엄한 작센 왕가의 혈육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내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어깨에 머리가 몇 개 달려있는 거냐? 우리 병사들이 너를 화살로 쏘면 빗나갈 수가 없을 텐데, 내 친히 네년을 과녁으로 만들어 우리 병사들의 무예를 단련시키리라.”

왕자가 병사들을 입에 담자 그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욕을 퍼부었다. 상대를 모욕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병사들도 왕자와 합이 잘 맞았다. 수많은 전쟁터를 떠돌면서 싸움 실력뿐 아니라 비열함까지 잘 단련시킨 그들이었다.

영주가 칼을 들고 말을 달려 왕자를 덮쳤다. 매가 날개를 펼쳐 먹이를 향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왕자도 지지 않고 말을 마주 달려 부딪쳐갔다. 황무지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말이 한번 엇갈리는 순간, 왕자는 자신의 오른쪽으로 달려오는 영주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창은 뱀의 머리처럼 영주의 가슴을 향해 찔러갔다. 영주는 왼손에 든 검을 방패처럼 사용하여 창을 받아내고 오른손의 장검을 깊숙이 휘둘렀다. 영주 본연의 힘에다 말이 달리는 속도까지 더하여 그야말로 쾌속! 왕자는 창을 재빨리 끌어들여 검을 막아냈다. 영주의 검이 왕자의 창 자루를 가격했지만 왕자의 창에는 강철로 된 심이 박혀 있고, 창 자루도 오랜 시간 동안 기름을 거푸 먹이면서 단련시킨 것이어서 아무리 명검이라도 쉽게 잘라낼 수 없었다. 장검은 창 자루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고 물러갔다. 상대를 지나쳐간 말들이 다시 말머리를 돌리고 앞선 공격보다 더 빠르게 부딪쳐갔다. 그렇게 세 번, 네 번쯤 공방이 오갔다.

왕자는 상대의 검의 빠름과 강함을 맛봤다. 정면으로 싸우기에는 쉽지 않은 상대임을 느꼈다. 싸움을 할 때는 양심이 필요 없다. 비열하든 깨끗하든 살아남아야 한다.

왕자는 오른손을 살짝 뒷주머니에 넣어 폭죽 알갱이들을 쥐었다. 상대의 몸에 맞으면 바로 터지는 물건으로 상처를 입히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눈에 모래처럼 뿌리면 한동안 눈을 뜨기 힘들게 만들 수 있었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준비하고 가까이 왔을 때 뿌려야 된다.

왕자는 폭죽 알갱이를 숨긴 손으로 태연히 창을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두 말 사이가 머리 하나가 남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창을 놓고 재빨리 흩뿌렸다. 폭죽 알갱이들은 영주의 눈을 향해 잘 날아갔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영주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속력으로 말안장을 박차고 솟아오른 것이다. 폭죽은 허공을 갈랐고 왕자는 영주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떠오른 것을 보았다.

왕자는 멍해졌다. 영주가 정말 마법을 쓴 단 말인가? 말안장을 밟고 있던 사람이 저렇게 높이 뛰어오를 수가 없다. 뛰어오르려면 단단한 곳에 발을 디뎌야 되고, 말이 달리는 속력이 있으니까.

왕자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영주의 사타구니 사이에 뭔가 끼어있었다. 영주의 체격이 워낙 커서, 그것도 크기가 웬만한 남자 팔뚝만큼은 되어 보였다. 거친 나무 무늬에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각좆? 여자들이 갖고 노는 그거?

영주가 덮쳐오는 바람이 얼굴을 때렸을 때 왕자는 정신을 차렸고, 재빨리 창을 곧추 세워서 영주가 떨어지는 기세 그대로 꿰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영주가 왼손의 칼을 버리고 창을 잡았다. 그녀가 지닌 무시무시한 힘이 왕자의 팔에 전달되었다. 영주는 왕자의 창을 빼앗기 위해 체중을 실어서 아래로 착지해갔다. 창은 영주의 힘과 떨어지는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휘어졌지만 부러지지 않고 잠시 버티고 있었다. 영주는 바닥에 착지하기 전, 왕자보다 아직 높이 위치하고 있는 순간과 곧 왕자보다 아래에 위치할 순간의 사이에 오른손의 장검을 머리 위로 들어 왕자를 내리쳤고 왕자는 공격의 기세를 피하느라 창을 놓아버리고 허리를 숙여 피했다.

아직 말 위에 타고 있는 왕자는 이제 땅에 내려선 영주를 향해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고, 병사들의 함성은 지축을 울렸다. 영주가 다시 한 번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을 때 왕자의 검과 영주의 검, 왕자의 말과 영주의 허공이 엇갈렸다.

영주의 검은 왕자의 갑옷을 깨고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유리 왕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을 다 버리고, 부장 하나만 거느린 채 이 땅을 떠나고 있다니.

동생이 죽었다면 유리 왕자가 애초에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되는 건 맞다. 그러나 왕자가 건강한 몸으로 병사들을 모두 데리고 귀환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 패배자가 되어 부상을 입은 몸으로 초라하게 돌아간다면, 부왕은 물론 고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적들의 경멸을 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왕자의 야심은 모두 끝장이 난다.

옆구리에서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술은 말라갔다. 왕자는 자기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현재와 그의 육체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죽어가고 있었다.

수치심이 왕자를 덮쳤다.

‘그 돼지년에게 이렇게 망신을 당하고 물러가다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석양은 비도 내리지 않는 황야를 물들이고, 그 아래서 간신히 목숨 부지하고 있는 미물들에게 더위로부터의 휴식을 내렸다. 그러나 석양은 낮에 움직이지 않던 짐승들에게 서로 잡아먹고 죽임으로써 배를 채우는 시간도 함께 내렸다.

왕자는 아직도 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적이 뒤쫓는 게 두려웠다. 다시 영주의 질풍 같은 검을 받아내는 것이 무서워졌다.

왕자의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왕자를 영원히 끝장낼 수 있는 큰 패배였다.

왕자의 혼미해져 가는 정신은 수치심을 넘어, 과거의 거의 유일하게 따뜻한 기억을 찾아냈다. 왕자 자신도 그 기억이 얼마나 자신에게 뿌리깊이 박혀있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기억은 왕자가 처음 여자를 안았을 때였다. 그는 아직 자신이 얼마나 변태적인지 모르고 있었다. 왕자를 떠받들고 아첨하는 귀족 자제들이, 이제야 거뭇거뭇하게 털이 나기 시작한 열다섯 살의 그를 포주와 창녀들의 마을로 이끌었다. 살집이 두툼하고 늙은 포주는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고, 그 집에서 제일 예쁘다는 여자를 붙여 주었다. 여자는 빨간 치마에다 이상하게 큰 리본을 매고 있었는데 미소를 지으면서 왕자를 위층으로 이끌었다. 손은 살짝 살짝 샅을 더듬고 있었다. 생전 처음 그 일을 시작했을 때 왕자는 생각 외로 재미가 없어서 놀랐다. 여자 옷을 벗기는 것, 살을 만지는 것, 몸 위에 올라가는 것, 모든 것이 어색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왕자님이 처음이라 할 줄 모르셔서 그래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그 여자가 왕자의 등 뒤로 손을 뻗고 꽉 잡은 다음에 몸을 뒤집었다. 왕자의 위로 올라가서 두툼한 가슴이 길게 늘어져 왕자의 젖꼭지에 닿을락 말락 흔들거렸을 때.

여자는 정성을 다해서 왕자의 물건을 빨고는 자기 몸에 억지로 박은 다음에, 남자가 허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되는지 가르쳐주었다. 그건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음악을 들으면서 박자를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내 몸이 상대방의 몸이라는 악보를 따라 연주를 하고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연주하는 보람이 있는 악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정을 했을 때 그의 몸에서 나온 물은 이상하게 색이 진하고 양이 많아서, 이제껏 자위를 해본 적이 없던 그는 자신의 생명이 빠져나온 게 아닌지 괜히 두려웠다. 여자는 왕자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잘 하셨어요.

왕자는 거기서 그를 평생 따라다닐 병을 얻었다.

왕자의 기억은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가일 부장이 말을 걸었던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고 적이 쫓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쉬어 가셔야 합니다. 말에서 내려오실 수 있겠습니까?”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말에서 내린 부장은 팔을 뻗어 왕자를 부축하려 했다. 왕자는 상처가 깊어 혼자 말에서 내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부장은 말을 적당한 높이의 바위 앞에 세웠다. 그는 바위 위에 올라 왕자를 부축했다. 왕자가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말에서 떼어놓기 위해 바위 위에서 두 팔로 그의 겨드랑이를 잡아 높이 치켜 올렸고, 그 무게를 받아 신음 소리를 냈다. 조심스럽게 왕자를 미리 깔아둔 모포 위에 눕혔다.

아, 아, 충신이로군. 빌어먹을 놈.

그가 왕자 옆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왕자님께서 상처를 크게 입으셨으니 저도 돌아가면 왕자님을 보필하지 못한 죄로 목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왕비께서 제게 내리신 명이 있으니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한 다음 기꺼이 제 목을 바치려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왕자님과도 관계가 있는 명령입니다.”

그러고는 기분 나쁘게 뜸을 들였다.

“왕자님께서는 아마도 둘째 왕자님을 죽게 하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시 뜸을 들였다.

“말을 해 보거라.”

“아마 왕자님께서는 행군을 늦추면, 둘째 왕자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리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적들이 둘째 왕자님을 죽여주는 걸 바라고 계셨겠지요.”

왕자는 힘없이 웃었다.

“짐작하고 있었는가?”

피가 섞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그것을 막고자 왕비가 장군을 보낸 것 아닌가? 도중에 기회가 생기면 내 목도 취하고.”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만 맞고 하나는 틀리셨습니다.”

“하나는 틀렸다?”

“왕비께서 명령하신 것은, 두 분 왕자님을 다 죽이라는 거였습니다. 두 분을 다 처리할 수 없다면 첫째 왕자님 한분만이라도 우선.”

왕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야 자기 배로 낳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왜 왕비가 자기가 직접 낳은 아들을 죽이려고 하겠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부장은 헛헛하게 웃었다.

“왕자께서는 평소에 나라의 정세를 잘 알고 있다 생각하셨고 군략을 세우는데 능하다 생각하셨겠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십니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지금 이런 꼴이라고 감히 너 같은 천한 것이 나를 무시하려는 게냐? 자기 주제도 모르고. 그래. 내가 모르면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지 내가 죽기 전에 네 그 잘난 입으로 어디 한번 지껄여봐라. 내가 죽음을 앞두고 팔자에 없는 스승을 하나 얻었구나?”

왕자는 말을 많이 했지만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를 감싸고 있던 잔혹함과 오만이 피를 따라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부장이 이제껏 꿇고 있던 무릎을 천천히 펴고 일어났다. 왕자의 눈에는 갑자기 그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왕자가 누워있는 탓인지도 몰랐지만, 그게 아니었다. 왕자의 눈높이에 적당히 머무른 부장의 무릎에 팽팽한 원한이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왕자 전하께서 꼭 알아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곧 돌아가실 몸이니, 의심은 신께서 해결해주실 겁니다. 다만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래. 이 건방진 놈아.”

“왕의 핏줄을 타고난 자가 여염집 아낙네를 함부로 강간하고, 병사들의 목숨을 멋대로 앗아가고 있을 때 소인은 그것을 보면서도 목숨이 아깝고 가문을 망치는 것이 두려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소인은 전하를 향해 고개도 들 수 없는 미천한 신분이라 감히 털끝만치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하가 모시는 주군의 그릇된 점을 보면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정해진 이치이고 신하의 도리이거늘, 소인은 너무나 미련하고 용렬해서 전하가 그 더러운 손길을 소인의 집안에 뻗치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 동생이 되는 자가 전하에게 몸을 더럽히고 버림받아서 자살을 했을 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제게, 다행히 왕비 전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를 거둬주신 덕분에 이렇게 전하의 몸을 찢고 심장을 꺼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하의 시체를 갖고 돌아가면 임무를 다하지 못한 죄로 제 몸은 찢기겠지만, 왕비 전하와 제가 아니면 누구도 제가 일부러 전하를 해친 줄은 알지 못할 겁니다. 저희 집안이 무사하다면 저는 기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왕자는 부장의 이름을 떠올렸다. 가일 메넬라오스.

부장이 단검을 들어 숨결이 닿을 거리만큼 다가왔을 때 왕자의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공백. 영원한 것이 될 공백.

부장은 끝까지 등 뒤를 조심했어야 했다. 누군가 뒤에서 화살을 날려 부장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의 몸이 허물어지면서 왕자를 덮었고, 부장의 그림자가 물러간 자리를 더 거대한 그림자가 덮었다.

“너를 데려가려고 왔다. 보니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었군.”

영주가 못생기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왕자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웃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지 않겠나?”

“고맙네.”

“그 말을 꼭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도대체 뭔가. 자네는.”

뒤늦게 영주의 부하들이 나타나, 그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그를 담요에 싸서 말에 실었다. 다른 몇 명은 땅을 파고 부장의 시신을 던져 넣었다. 왕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장소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와서 부장의 시체를 파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시체를 찢을 것이다. 나는 너와 너의 형제의 몸과 마음을 다 찢어놓았고 너의 시체까지 그리할 것이다. 너는 절대 복수할 수 없는 몸이니 신에게나 도와달라고 울부짖어라. 아마 신께서도 너같이 천한 자의 말을 듣지는 않으실 것이다. 왕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왕자는 며칠 간 열이 심하게 올라서 고생을 했다. 혼수상태에서 알비온이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었는데 왕자를 돌보던 사람들은 당연히 누구 이름인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두고 온 여자가 있나 보다 생각하고는 잊어버렸다. 왕자는 워낙 체력이 좋은 사람이었으므로 죽을 만큼 심한 부상에서도 회복할 수 있었다.

간신히 혼수상태에서는 깨어났지만 당분간 일어설 수 없었다. 그만큼 깊은 부상이었다. 상처도 심하고 피도 많이 흘린 상태였다. 침상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왕자는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궁리를 했다. 하나는 영주의 말대로 동생이 정말 죽었는지, 다른 하나는 영주가 왜 자신을 도로 데려왔는지. 영주가 자신을 갖고 무엇을 하려는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돈을 쥐어주고 알아내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그가 지금 가진 것이 없었다.

“너와 섹스를 하기 위해서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왕자를 데리고 복도로 나온 영주는 긴 팔로 대뜸 그의 엉덩이를 치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영주라는 자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일까. 왕자는 실색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내 침실로 따라오면 네가 이제껏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걸 보여줄 수 있다.”

영주는 음란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왕자가 평생 포주들의 집을 드나드는 동안 거기서 일하는 여자들에게서 실컷 봐온 그런 웃음이었다.

왕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속사하듯 욕을 내뱉었다. 얼굴은 벌개졌고 몸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몸이 강대한 작센 공국의 왕자로서 어디를 가든 비단 같은 미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줄을 서는데 너 따위 천하고 못생긴 것이 나와 잠을 자겠다고?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는 것이냐? 아무 거나 던져주면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개로 보이느냐? 아니면 너 따위가 나를 한번 살려줬다고 내 주인 행세를 하려 드는 것이냐? 내 여기서 나가면 기필코 너의 심장을 꺼내서 궁문에 걸어놓으리라.”

왕자는 그녀의 거대한 엉덩이가 흔들리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치를 떨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이 가라앉지 않았다. 영주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천천히 말했다.

“내가 보여주겠다고 한 것 말고도 아직 네가 모르는 것이 몇 가지 있지 않느냐? 내 침실로 들어오면 다 이야기해줄 수 있다. 사람들이 듣는 데서는 하기 힘든 이야기라서.”

저 돼지 같은 것의 등에 박아 넣을 칼 한 자루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왕자는 실눈을 뜨고 영주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발길을 돌리지는 못했다. 영주를 따라서 그녀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로 향한다면서 영주는 자꾸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까지 내려가는 건가? 시간은 밤이었다. 나선형으로 휘어진 계단은 구석구석 침침하고 어두워, 벽에 드문드문 걸린 촛불 몇 개에 의지하여 겨우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성에는 시중을 드는 자도 별로 없는지, 그들은 침실로 가는 동안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면 영을 내려서 이 길을 피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공식적으로 쓰는 침실이 따로 있고 여기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들어오는 곳이지.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않는 곳이다. 왕자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오.”

왕자에게는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영주의 체격에 맞게 거대한 나무문이었고 큼지막한 자물통이 달려 있었다. 아무 장식이나 부조도 없는 밋밋한 문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뭐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영주가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동생을 만나게 해주겠다.”

네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다. 왕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영주의 침실은, 이게 침실이라고? 들어서자마자 두꺼운 회색의 돌로 된 벽이 시야를 꽉 틀어막았다. 첫 인상이 주는 것은 위압감이었다. 천장은 높고 굴뚝이 여러 개 달려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침대는 크고 넓었지만 그것은 방의 벽에 붙어있었다. 오른 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긴 실험대 위에 이상한 기계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의 키만큼이나 큰 통들이 여러 개 있고, 그 통들 사이마다 구부러진 관들이 달렸는데 통 안은 투명해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은 비어 있었다.

그 큰 방에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이 영주란 자는 마법을 쓴다고 하더니, 연금술사였는가?

그 장치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실험대 위의 줄에 수많은 각좆들이 매달려 있는 것은 인상 깊었다. 색깔은 다양했지만 크기는 다들 남자의 팔뚝만큼 굵었다. 모양은, 끝이 사람의 머리를 닮아 있었다. 사람의 얼굴처럼 저마다 표정까지 갖고 있었다. 움직일 것만 같았는데 만약 그랬다면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동생을 만나게 해주겠다더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생은 어디에 있느냐?”

영주는 턱을 쳐들었다.

“저 위에 달려있다.”

무슨 말인가? 왕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저기 달려있는 저 좆이 내 동생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영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왕위를 두고 다투던 사이였고 죽이고자 마음먹은 녀석이지만, 한 아버지의 씨를 받아 태어나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자란 형제였다. 동생이 저 꼴이 되었다는 게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격렬한 화가 치밀었다. 왕자는 영주의 목을 조르려고 했지만 목에 손이 닿지 못하고 영주에게 팔이 붙들리고 말았다. 영주는 지그시 힘을 주어 쥐었다.

“내 말을 듣기 전에 너의 팔이 먼저 부러질 것 같구나.”

아무리 있는 힘을 다 써도, 영주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왕자는 분함에 눈물을 흘렸다.

영주가 왕자를 붙잡은 팔에 힘을 더해가며 말했다.

“환자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게다가 나는 너와 잠을 자러 온 것인데 팔을 부러뜨린 사람과 자는 것이 즐겁겠느냐?”

영주는 빙글빙글 웃음을 지었는데, 이제는 숫제 즐기는 것 같았다.

“말을.... 해... 주시오... 저게 어떻게... 내... 동생이란 말...”

왕자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영주가 꽤 강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팔은 아프고 식은땀까지 흘렀다. 얼굴은 땀과 눈물로 질퍽해져 있었다.

영주가 팔을 풀고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왕자에게 던졌다.

“얼굴이나 닦아라. 그리고 여기서 나에게 함부로 대드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내가 세상의 왕이다.”

왕자는 얼굴을 닦고 굴욕에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자신감과 오만함은 꼬리를 감추고 마음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날이 풀리면 싹이 트듯이 상황이 유리해지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이 많은 줄 알고 있을 테니 부디 다 얘기해주시오.”

영주는 이야기했다.

“소문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연금술사이자 마법사이다. 1년 전 내가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 영주는 탐욕스러워서 얼마 되지도 않는 땅에 의지해서 사는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었다. 나는 단신으로 영주를 죽이고 그의 부하들까지 쓸어버렸지. 그는 왕에 반역하는 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처리하는 데는 걸리는 것이 없었다. 나는 폐하에게 윤허를 올려 이 지역의 영주로 인정받았으며 지난 1년간 이 땅의 백성들을 너희같이 약탈하는 무리로부터 지키려고 애썼다.”

영주의 목소리는 차분해졌다.

“내가 용력이 있고 마법을 쓰기 때문에 이 땅을 지키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여러 가지 마법을 부릴 수 있고 연금술에 정통한데 내가 쓰는 것 중 특이한 건 사람을 각좆으로 만드는 거다. 나는 또 내가 만든 각좆으로 자위를 해서 절정에 오를 때 비상한 힘을 낼 수 있거든. 내 체격도 원래 크지만 그 힘에 더해 인간으로서는 낼 수 없는 힘을 낼 수 있단 말이다. 너희 부하 백 명 정도는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 달 전에 네 동생이 어디서 내 소문을 듣고 부하들을 데리고 왔다. 나는 약탈을 하러 온 무리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나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었다. 남의 눈을 속이려고 약탈을 하는 척 위장을 했지. 병사들은 죽었지만 그 녀석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왕자는 동생이 무엇을 요청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너와 네 동생을 죽여 달라는 요청이었다. 작센 왕국의 남아있는 왕자는 다섯 명, 그 중에서 지금 왕비가 낳은 아이들은 둘째와 셋째. 태자인 네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명분에 맞겠지만 지금 왕은 너를 미워하고 언젠가 왕비가 낳은 왕자를 왕위에 올릴 생각을 품고 있었지.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둘 다 사랑하지만 둘째가 너무 황음무도하고 난폭하여 왕위를 물려받을 재목이 아닌데다가, 그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셋째 왕자를 죽이고 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둘째를 죽이고 셋째를 살리려고 했는데, 둘째가 먼저 이것을 눈치챈 거야. 다만 자기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겠지. 너는 너의 용맹과 지혜를 자랑하지만 이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 네가 어린아이와 다른 게 무엇이냐?”

왕자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누구든 내 도움을 받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

“이 성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남자는 누구나 이 방에서 나와 섹스를 해야 된다. 섹스를 통해 나에게 이기지 못하는 자는 저 각좆이 되어야 한다. 네 동생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는 싶어 했지만 내가 정해놓은 규칙까지 알지는 못한 채 이 성에 들어왔다가 나에게 패한 것이지.”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저기 달려있는 것들이, 나에게 패해서 내가 각좆으로 만든 남자들이다. 네 동생은 내가 너와 싸울 때 끼고 있었으니까 너도 의외로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왕자가 폭죽을 뿌릴 생각을 한 것처럼, 영주도 옷에 미리 구멍을 뚫어놓았고 싸우기 전에 그 구멍을 통해 각좆을 끼운 것이다. 달리는 말이 흔들리면서 진동이 그녀의 몸에 전달되었고, 절정에 이른 그녀는 힘을 내어 왕자를 물리쳤다.

“내가 굳이 너를 이 성으로 데려온 것은, 너 같이 체격이 크고 몸이 실한 자는 찾기 어려우니까. 사람이 각좆으로만 하라는 법이 있더냐?”

그 말을 하고 영주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음란하게 웃었다.

“너는 대단한 변태라고 들었다. 여자를 때리고 상처를 입힌다면서? 폭군이 될 재목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왕자를 경멸하는 말이었지만, 비장한 마음이 된 왕자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한번 각좆이 된 사람을 다시 되돌리는 방법은 있느냐?”

“있다. 그러나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 물건을 사람으로 되돌려달라고 나한테 부탁한 사람이 아직 없었거든.”

“만약 내가 이기게 되면 동생을 사람으로 만들어다오.”

“무슨 까닭이지? 어차피 너는 동생을 죽이려고 마음먹지 않았느냐?”

왕자는 단어 한 마디까지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강한 자가 왕국을 잇는 것이 하늘의 이치! 동생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기필코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일국의 왕자인 자를 저런 모양으로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유서 깊은 왕국의 명예, 나의 명예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영주의 눈은 반달처럼 아래로 쳐졌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묘하게 끝이 올라갔다.

“너는 네게 명예가 있다고 하지만 네가 겁탈하고 죽게 한 여자들의 원한이 넘치고 쌓일 정도라는 걸 다 안다. 너도 그래서 부하한테 살해당할 뻔하지 않았느냐? 그런 네가 명예를 찾는다? 게다가 너는 여자를 때리기 좋아하는 변태라면서?”

그 부분은 왕자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찢은들 그게 대수란 말인가? 하물며 이 나라에서 국왕 폐하를 빼면 내 위에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엄한 존재인 나 유리 왕자인데, 천한 것들 몇 명 죽였다고 내 명예가 더럽혀진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왕자가 그 천한 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기어오를 때는 갈가리 찢어놓아야 된다는 것뿐이었다. 두 번 다시 흉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든 것을 죄다 찢어놓아야 천하가 만대까지 태평할 거라는 게 왕자의 믿음이었다.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들을 말도 없고, 이미 나는 모든 것을 설명했으니 이제 그만 침대로 오라.”

왕자는 옷을 벗어던졌다. 영주도 옷을 벗으면서 왕자를 향해 말했다.

“나에게는 주먹으로 때리거나 상처를 입히는 방법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영주는 걸친 옷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금방 옷을 벗었다. 태산 같은 가슴은 둥글고 아름다운 모양이었고, 풍요의 신이 손이라도 뻗을 것처럼 풍만했다. 왕자는 속으로 감탄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뻣뻣하게 굴었다.

“너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만 하는데 도대체 섹스를 통해 어떻게 승부를 가린다는 것이냐? 돼먹지 않은 수작을 부리려는 것 아니냐?”

“지금부터 내 몸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아라.”

영주는 줄에 매달린 각좆 하나를 들고 오더니 몸에 넣고 힘차게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손길이 빨라지더니 얼굴에는 홍조가 피고 콧구멍은 벌어졌다. 신음소리가 잇새에서 새어나왔다. 한참을 그러더니 영주의 입에서 거친 일성이 터져 나왔고, 목이 뒤로 꺾이고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그녀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그녀는 물 한 잔을 마시는 시간 정도를 허공에서 머물렀고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칠어진 숨결은 차분해지고, 몸이 떨리는 것도 이윽고 멎었다. 그녀는 각좆을 제자리에 다시 걸어두었다.

“나는 절정에 오르면 몸이 공중에 떠오른다.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절정에 올랐다는 뜻이다. 믿어도 좋다. 네가 사정하는 것이 빠른지, 내가 절정에 오르는 것이 빠른지, 빠른 쪽이 지는 것으로 하자꾸나.”

왕자는 눈을 세모로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영주가 한 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때에 몸을 떠올릴 수도 있으면서 말만 그렇게 하는 것 아닌지 왕자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영주는 왕자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웃었다.

“내가 너를 속인들 무엇을 하겠느냐? 나는 이미 너의 병사들을 도륙내고 내 땅을 지켰는데, 너와 너의 동생을 풀어주고 안 풀어주고는 나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왕자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내가 살아 돌아가면 군대를 끌고 와 여기를 칠 것이다.”

“너는 어차피 돌아가도 태자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 자기 목이나 걱정해야 하는 사람을 내가 무서워할 것 같은가?”

왕자는 이를 깨물었다. 내기를 할 때는 뭔가 구실을 만들어두었다가 불리해지면 판을 깨야 된다. 그래야 지는 일이 없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왕자가 못하는 일도 아니었다.

“좋다. 승부를 내자.”

왕자는 옷을 벗었다. 폭음과 향락으로 속은 많이 망가진 몸이었지만 그게 아직 겉으로 떠오르진 않았다. 그의 근육이 넘치는 팔에는 불룩한 힘줄이 돋아나 있었고, 군살이 끼기 시작한 배도 그렇게 보기 흉하지는 않았다. 털이 부숭부숭하고 탄탄한 가슴에서 젖꼭지 두 개가 힘을 주어 위로 솟아 있었다. 가슴에 난 털은 말의 갈기처럼 위에서 시작하여 배 아래까지 달리고 있었다.

왕자는 영주를 밀어서 침대에 눕히고는 대뜸 물건을 집어넣었다. 일체의 전희도 없었다. 왕자답지 않게 뻣뻣하게 그 일을 시작하였다. 왕자가 이렇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상황은 자연스럽게 영주가 이끌게 되었다. 영주는 왕자의 가슴과 목에 입을 맞추고 그의 엉덩이를 잡아서 꽉 쥐었다. 왕자의 몸의 뿌리 부분을 자연스럽게 간질였다. 왕자도 영주가 주도하는 분위기에 이끌려 더 자연스럽게 행위에 임하게 되었다.

왕자는 처음에 영주의 위에 올라가 있었지만, 행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영주가 자신의 무게에 눌려 떠오르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영주가 왕자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그를 잡아 몸을 돌리고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가서는 허리를 돌렸다. 누군가 그때 영주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 관능에 마음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영주의 체격과 무게가 처음에는 왕자를 거북하게 만들었지만 곧 그녀의 부드러움이 왕자의 신경을 끌어들였다. 왕자는 영주와 관계를 하면서 그녀에게 감탄했다. 그녀의 살결은 야들야들했고 관악기처럼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신음은 감미로웠다. 영주는 유연해서 그에게 큰 무게를 전달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유희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에 왕자는 그녀가 체구가 커서 자기 성기가 그렇게 꽉 조이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래에도 입이 달린 것처럼 그녀의 물건은, 자신의 안에서 자유롭게 그를 빨아들이고 뱉고 굴렸다. 이빨과 혀가 달린 것 같았다. 필요하면 잘근잘근 씹고 핥으면서 그의 몸이 폭죽처럼 터지도록 불을 붙였다.

‘안 돼...’

그는 힘을 빼고 딴 생각을 했다. 궁궐의 은밀한 곳에서 음모를 꾸미고 왕의 험담을 나누는 신하들의 지루한 대화, 끝날 것 같지 않은 교회 미사, 천국을 갈구하는 늘어지고 맥없는 노래 소리. 그녀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힘을 다해서 땀을 흘리고 교성을 냈다. 내가 이긴다.

그런데 그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 밉살스런 신하, 냉정한 왕비, 웃는 얼굴 뒤로 다른 마음을 숨긴 왕위 경쟁자 동생들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 얼굴들이 하나씩 영주의 얼굴로 바뀌어갔다. 마치 영주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날 보라고, 집중을 하라고 닦달하며 쫓아다니는 것 같았다. 미사를 올리는 신부를 떠올리면 그 못생긴 남자의 거추장한 예복 위로 그녀의 얼굴이 날아와 박혔다. 거리로 사냥하러 나가던 날을 생각하는데 왕자가 지나갈 때 거리에서 무릎을 꿇은 농부가 얼굴을 들었을 때 그것이 영주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감히 왕자가 지나가는데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고 왕자는 손수 그의 얼굴을 짓이겨 놓았었다. 그의 짓이긴 얼굴은 다시 농부의 얼굴이 되었다가, 영주의 얼굴로 바뀌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자신은 평생 의문을 품은 적이 없는 세계가 고통을 안기고 죽음에 이르게 할 때, 신에게 괴로움에 차 질문을 던지는 그런 사람의 얼굴이었다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조소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른 얼굴들도 늘어나서 그가 회상하는 사람들을 덮어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하나, 둘씩 생겨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점차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제일 처음 눈에 뜨인 것은 알비온의 얼굴이었다. 집안의 보에 목을 매었다는 그녀의 시신을 왕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것을 직접 보았던 것처럼, 혀를 빼물고 눈자위가 희어진 그녀의 얼굴, 밧줄에 깊이 패고 목뼈가 부러져 늘어난 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허공을 떠돌다가 그의 머리 안에 들어와서 반드시 그 사실을 알려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다른 죽은 여자들, 왕자가 하룻밤을 보내고 살해한 여자, 강제로 범하고 자기에게 아부하는 불량배들에게 노예로 던져준 여자들의 얼굴이 하나씩 늘어났다. 왕자가 그동안 잊어버렸던 얼굴, 머릿속을 한참 뒤져야 떠오를 얼굴들이 왕자의 머릿속에서 비오는 날 싹이 올라오는 것처럼 쑥 나타나 수군수군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다가 눈을 홉뜨고 노려보았다. 자신들이 어떤 원한을 갖고 있는지 이야기하면서 혀를 깨물고 입안을 피로 물들인 채 울었다. 한 여자는 그를 노려보면서 애가 끊어지는 심정을 담아 길가의 풀을 뿌리째 뽑아내고 있었다.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더 커지면 왕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여자 하나가 왕자 앞으로 불쑥 다가와 그의 팔을 깨물었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여자들이 피와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하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은 후에 왕자의 상념의 세계는 영주가 젖꼭지를 혀로 핥고 몸을 조이는 감각의 세계로 귀환하였고, 죄책감과 공포는 아찔한 쾌락으로 바뀌었다.

왕자는 그제야 자신이 원한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자기가 영원히 지루할 일이 없는 세계, 악행으로 권태로움을 덮을 일이 없는 세계가 영주의 몸 안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인간으로 남아있을 때의 마지막 행위를 시도했다.

왕자는 자신이 위로 올라가는 자세로 돌아와 영주의 몸에 폭풍같이 자신을 몰아넣었다. 빗줄기가 휘몰아치고 폭풍으로 천지가 부서지길 기도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영주의 허리가 휘고 고개가 뒤로 넘어갈 때, 그녀의 긴 머리채는 파도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목에 구슬같이 찬 땀이 유리창에 맺어진 빗방울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영주의 가슴을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고는 사정해버렸다.

그는 패배했다. 패배함으로써 영원히 그녀의 안에서 안식을 얻게 되었다.

왕자의 몸이 그 자리에서 허공에 둥실 떠올라 빙빙 돌더니 통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몸은 줄어들고 굽어지더니 관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면서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그의 동생과 마찬가지로 물건 하나뿐이었다. 다른 물건들은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물건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 영주는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유리 왕자는 생전에 권력을 다투느라 불량한 무리를 가까이했으며, 자기 병사를 비롯하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자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왕국에서 살아 돌아다니는 암 덩어리 같은 존재였고 그가 왕이 되었으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왕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영주는 그 물건을 아끼고 오랫동안 사랑했다.

영주의 용맹은 곧 세상에 알려졌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물건만을 갖고 나갔다. 아끼는 물건이 그녀에게 더욱 큰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영주의 마법과 용맹은 적들을 떨게 만들었지만 백성에게는 존경을 얻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백성들은 황무지로 들어와 마침내 그 땅을 아름답게 일구어냈다.

영주는 유리 왕자에게 자기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물론 이름이 있었다. 영주가 다스리던 땅에는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곳을 원래 이름 대신 그녀의 이름을 따서 디도라고 불렀다. 영주가 죽은 후, 후대에 만들어진 지도에도 그 지역은 그 이름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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