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고백

2016.03.19 22:5603.19

(올려 놓고 수정을 꽤 많이 했는데,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제는 수정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1.

밤의 도서관은 고요했다.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도 이제는 많이 사라져 마치 바람도 없는 절해의 고도에 갇힌 것 마냥 고립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일이 잔뜩 밀렸다. 호스가 막힌 것처럼 밀렸다. 거기다 오후에 민원인을 상대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KOLAS에도 등재가 되어 있는 네임드 민원인이었다. 공공도서관인 만큼 민원 처리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민원인은 현장에서 완벽하게 해결할 것!’이 이곳 공공도서관의 모든 사서들에게 주입된 철칙이었다. 동기들 얘기를 들어보면 학교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 이상 민원으로 고통 받는 것은 공통된 운명인 듯싶었다.

민원인을 겨우 달래서 돌려보낸 후에는 어린이 도서실에서 그 민원인의 아들이 저지른 일을 뒷수습했다. 어린이 도서관 담당 사서님의 얘기에 따르면 회전식 서가에 매달려서 베이블레이드 흉내를 내는 바람에 책이 원심력에 의해서 폭발하듯이 뛰쳐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책만 폭발한 것이 아니고, 사내애들의 섬세한 감수성도 폭발하여서 베이블레이드가 탑블레이드의 짝퉁이네 아니네 하는 주제로 예송논쟁보다 치열한 싸움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환란은 너무나 참혹해 차마 글로 남기기도 힘들 정도이다.

어차피 내 담당도 아니고 해서 모른 체 할 수도 있겠지만 사서란 이용자가 많은 것만으로도 고통 받는 직업인데 거기에 그 이용자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반짐승이라면 얘기는 다 했다. 도서원부를 정리하느라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크나큰 봉변을 당한 어린이 도서실 사서가 울기에, 난 참 사람이 좋은 것 같다, 내 일도 밀린 상태에서 배가를 도와주었다. 쓰레기도 치워 주었다. 민원인도 함께 상대해 주었다. 어린이 도서실 보조사서가 있기는 했지만 출장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창 중고교생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 전체가 은근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어 일손이 부족했다.

이후로는 내 밀린 일을 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고, 어린이 도서실 사서도 좋은 사람이니 부탁만 했으면 팔 걷어붙이고 달려와 주었을 테지만, 일 자체가 내가 미루고 미루다 급하게 된 일인 터라 남에게 부탁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상황이었기에 그냥 혼자 처리하자고 작심한 것이다. 특히 계약직 관리하시는 팀장님이 성격이 불같고, 공시에 붙은 사람과 아닌 사람 간의 관계에서 예의를 깍듯이 지키기를 강경하게 따지시는 터라 괜히 불똥이 튈까 저어되는 부분도 있었다.

같은 자료실 사서 분에게 듣기로는 일전에 경력이 나름 있던 계약직이 공익과 작당해서 초임 사서를 소위 말하는 태우기로 길을 들이려다 팀장님에게 걸린 이후로, 관장님 주도 하에 예외 없이 적용된 규칙이라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곳 도서관에 와서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적응하고 살았다 싶다. 하지만 요즘은 걱정이 많다. 이용자들과의 충돌에서 오는 일이 특히 힘들었지만 사서라는 직업이 도무지 나에게는 맞지 않다는 회의감이 심했다. 문정과에 입학할 때는 글 쓰는 것이 꿈인 사람으로서 막연히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뿐인데, 들어가서 한 학기가 지나자 여기는 그런 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얼른 발을 뺏어야 했는데, 어영부영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막상 부딪쳐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심정도 있었다. 4학년 때 실습 갔다 온 곳이 나름 괜찮아서 직업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는데, 졸업 후 계약직으로 일하다보니 한때의 환상이었구나 싶어진 것이다.

여하간 정리하자면, 일반기업으로의 취직활동을 마음먹었다. 이대로 무경력으로 나이만 먹으면 그 힘들다는 콜센터 같은 데 밖에는 선택지가 없어질 터이다. 이미 원서를 낸 곳 중에 면접을 보러 오라 한 곳은 주5일제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면접은 토요일에 보겠다는 기업의 사무직 밖에 없었다. 이전처럼 우물쭈물하다가는 또 시간에 쓸려가 원하지도 않는 곳에 내팽겨질 것 같아 이번만은 크게 마음먹고 능동적으로 움직이자고 결심한 것이다.

도서관 계약직은 불안한 자리이다. 되는 것도 힘들지만, 유지시키는 것도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실장님 처조카가 이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것도 있어서, 재계약 관련해서 팀장님에게 은근히 언질을 줄 때마다 연전과는 다르게 묘하게 회피하는 꼴이 심증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서둘러 사서공무원 시험을 봐야 할 텐데, 적성에 맞지도 않는 직종에 티오도 끔찍할 정도로 없는 시험을 무기한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나는 강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이번 달 근무표에는 금주 토요일, 그러니까 내일 주말출근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내일은 돌연히 잡힌 기업 면접을 볼 계획이므로, 급하게 수배해서 대체할 선생님을 찾았다. 면접을 본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혹여나 구직 활동이 잘못되면 좋던 싫던 이곳에 붙어 있어야 할 것이므로 내 얕은 계산으로는 총무과에 쟤는 언제든지 떠날 애라는 인상을 주면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바닥은 좁기 때문에 책잡힐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문정과가 소문정보학과의 준말이라는 것은 다들 흔히 농담조로 하는 말이라지만 농담에도 뼈는 있는 것이니까.

여하간 사서 언니랑 금주 토요일에 교대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원래는 토요일에 출근해서 진행시키자는 안일한 마음으로 여직 늦춰왔던 일을 야근을 감수하며 몰아서 하고 있다. 사서 언니는 내가 언니 대신 들어가는 근무일이 도서관 월간 행사일이니 만큼 자신도 이해관계가 들어맞기 때문에 교대한 것이니 괘념치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무심히 넘기기에도 불안한 입지였다.

일단 운영일지가 밀렸다. 네 달치가 밀렸으니 기실 내 입으로도 할 말이 없다. 교대한 사서 언니는 나하고 친하니 적당히 모르는 척 하겠지만 문제는 관장이다.

올해 하반기에 있을 기습 감사 대비로 한차례 서류업무에 대한 점검이 이번 토요일에 있을 것이란 소문이 있다. 그러니까 이번 토요일에는 집에 국립중앙도서관장(!) 명의로 된 1급 정사서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전설의 베테랑께서 강림하사 도서원부와 운영일지와 기타 등등을 점검하시겠다는 것이었다. 보통 공공도서관 관장은 행정직 공무원이 담당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 분은 1급 정사서 출신으로 관장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고 동경어린 소리를 많이 들었다. 자서전도 썼는데, 당연히 우리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다.

사실 밀린 운영일지 중에는 내 담당이 아닌 것도 있어서 내일 내가 있다면 어떻게든 변명이 되겠지만, 언니에게 이렇게 변명하시면 돼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다행히 개인 노트에 적어 놓은 대출권수와 이용자수를 기틀로 해서 네 달치를 다 쓰니 해가 졌다.

원래는 이렇게 늦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낮에 어린이 도서실 사건도 있었고, 공익이 도통 일을 안 한다. 일을 안 하는 것을 넘어서 오늘은 결석을 했다. 내가 계약직이라서 우습게 보는 건가 싶어서 쏘아붙여도 그때만이다. 결석을 하면 군대에 있어야 하는 날짜가 하루 늘어난다는데, 얼마나 편하면 저러나 싶기도 하다. 다른 자료실에서 일하는 공익들은 괜찮은데 유난히 얘만 속을 썩이는 것이다. 얼마 전에 디지털실에 있던 공익은 업무용 컴퓨터에 p2p 프로그램 깔아 놓고 게임하다가 다른 기관으로 갔다는데 이곳 자료실에 있는 공익도 좀 조치가 취해졌으면 좋겠다.

거기에 지하서고에서 일하던 알바가 그만 두는 바람에 서가 하나를 맡아서 정배열 작업에 투입된 것도 있다. 손이 느린 편도 빠른 편도 아니라 적당하게 끝냈는데, 그래도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다. 지하서고 열쇠를 반납해야 하는데 잊고 있었다. 내일 출근해서 전해주면 되겠지. 하지만 내일도 지하서고 배가를 해야 할 분위기이기는 했다.

종합자료실에 출몰하던 노숙자가 우리 자료실이 한산하니까 자꾸 들어와서 배회하는 것 때문에 생긴 민원도 처리했다. 워낙 도서관에 출근하듯이 자주 오는 사람이라 민원인 중 한 명이 이번에는 여기서 나오네요.’라고 무슨 포켓몬 출현지역 표현하듯이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다.

내 예상으로는 그 노숙자가 내 휴대폰 충전기를 훔쳐간 것 같았지만, 목격자가 없어 결국 찾지는 못했다.

이후 대출반납 업무를 하는 틈틈이 면접 예상 질문을 공부했고, 이른 저녁을 먹고, 다른 사서님들과 팀장님, 실장님이 퇴근하는 시간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다가 경비 아저씨한테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핑계를 대고 자료실로 돌아와 업무를 재개했다.

원래 토요일까지 생각하고 여유를 부렸던 신간도서 작업하고, 도서폐기 작업이 계획대로라면 열 시 전까지 이루어져야 했지만, 몸을 쓰는 것보다는 머리를 쓰는 것을 조금이라도 맑은 정신일 때 해 놓자 싶어서 서류작업에 먼저 달려들었다.

서류작업이 마무리된 이후에는 몸 쓰는 일을 했다. 도서 폐기 작업은 훼손 도서에 대해 목록 작성 정도만 하면 되었고, 문제는 신간도서 정리였다. 등록과 라벨붙이기는 다 했는데, 감응테이프 붙이기하고 서가배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사실 서가배열은 어제 하려다가 계산 실수로 책이 넘치는 바람에 다시 하게 된 짝이다. 이제 책만 자리를 잡아주고 대출가능 도서로 변경만 하면 자정 전에는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내일 배포할 설문조사지도 최종 검토해야 하지.

주말출근을 윤번하여서 그나마 칼퇴근은 보장해 주는 것을 위안거리로 삼아 살던 탓에 급작스런 야근이 심신을 피폐케 했다.

 

2.

세상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선생님! 엘리베이터가 멈췄어요.”

경비실에서 책을 보고 있던 경비아저씨에게 달려가 말했다. 예전에 근처 초등학교에서 교장 일을 하시던 분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우리 도서관 직원들은 모두 이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수필을 광적으로 좋아하셔서 언제나 대출자 목록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점이 나름의 특징이었다.

경비 아저씨는 시계를 보더니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열한시 반 이후에는 작동이 멈춰.”

, 잠깐만 작동시키면 안 될까요?”

그러려면 서류도 써야 하고 복잡한데. 나 혼자서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요.”

배가할 여분의 책을 북카트에 담아서 일 층에 놔뒀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췄으니 꼼짝 없이 삼층까지 들고 올라가야 할 판이었다.

힘쓰는 일이면 도와줘?”

경비 아저씨가 말했다. 확실히 운동을 하는 것 같은 몸이었지만 나이도 많으신 분에게 책 좀 옮겨달라고 말하는 것이 괜찮을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결국 최대한 후환 없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책이 무겁다. 갱지도 튼튼하고 보관이 오래되면 얼마나 좋을까.

구직활동은 순항인가 하면 당연히 아니다. 요즘은 이공계 나와도 취업이 힘들다는 마당에 문정과 나온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저 구직을 핑계로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는 것뿐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건너 듣기로, 우리 과 남자 선배 한 명은 공시에 실패하고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공사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연락이 닿는 여자 선배들 얘기를 들어 보아도 사서로 일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결혼을 하거나 다른 진로를 택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아얏!”

이동횟수를 줄이려고 무리를 해서 들고 올라가던 책 더미가 무너졌다. 다행히 난간을 부여잡아서 몸뚱이가 굴러 떨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책은 죄다 쏟아져서 삼층 올라가는 계단과 계단참에 흩뿌려졌다.

책이 인공 대리석 바닥을 치는 소리가 고요한 도서관 안에 울려 퍼졌다.

앞치마에 손을 털고 시무룩한 심정으로 책을 추스르러 계단참으로 내려갔다.

귓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계단 아래쪽이었다.

순간 놀라서 들고 있던 휴대폰 플래시를 계단 밑으로 향했다가 스스로 놀라 얼른 전원을 꺼버렸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지 않아 불이 꺼진 순간, 빛의 잔상에 부옇게 된 어둠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비 아저씨였을까? 소리를 크게 지르면 아마 경비실까지 들릴 것이다. 정확한 시간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야간 경비인 만큼 순찰을 돌기는 할 텐데,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한참을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수상한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고, 이어지는 발자국 소리 같은 것도 들리지 않는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얼른 책을 추려서 양 옆구리에 들고 바짝 긴장한 신경으로 계단을 올랐다. 자료실 안으로 들어가서 감응테이프를 붙이는데 손이 떨린다. 진짜 누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경비 아저씨한테 내려갔다 올 것을 잘못했다 싶었다.

아가씨, 괜찮아?”

!”

갑자기 들린 남자 목소리에 숨이 막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로 주저앉았다. 자료실 입구에 서 있던 사람이 플래시를 끄고 다가왔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경비 아저씨였다.

아뇨, 갑자기 나타나셔서 조금 놀래서.”

아저씨가 부축하는 대로 일어서는데 다리가 떨렸다.

아까 큰 소리가 나기에 와 봤어.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일이 많아? 다음에 와서 하면 안 돼?”

아뇨, 조금만 하면 끝나요. 제가 계속 미루다가 결심 난 김에 해버리자고 한 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경비 아저씨는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아까 밑에서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데, 선생님이셨나 봐요?”

발소리? 아마 나였을걸? 순찰 중이었어.”

아아.”

여하간 힘들면 내일 와서 해. 뭘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서 한다고.”

경비 아저씨는 걱정 반, 투덜거림 반이 섞인 것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순찰을 가셨다.

나는 지루한 작업을 재개했다.

 

공포소설의 무대로 적합할 괴괴한 곳에서 책이나 꽂고 있으니 유정 언니 생각이 난다. 김유정이라고, 대학 동기로 책을 좋아한다는 취향을 공유하는 까닭에 나름 가깝게 지냈던 사람인데, 자신과 동명인 근대소설 작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정 언니가 이런 클로즈드 서클 같은 장소와 연계되어 심상에 떠오른 이유는, 언니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통상 읽으려 하지 않는 특이한 책들을 수집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산해경 유의 지괴문학부터 시작해서, ‘해리와 몬스터로 유명한 이상윤의 문학서적들이나, 유원목의 지리서적, 근대명작문학인 속 양들의 침묵’, 황선자씨에게 링크된 우주신의 대우주 참서, 그 외에 자비 출판한 서적처럼 그나마 출판사를 끼고 편찬한 탓에 상대적으로 건전하고 메이저한 서적들도 수집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언니가 특히 아꼈던 컬렉션은 출판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던 가각본이나 저자(?)의 사적인 문서들을 모아서 언니 스스로 책 모양으로 편집한 것들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만주 731 부대의 고등관으로, 요시무라반에 소속되어 있던 이시가와 테츠야라는 사람이 쓴 수기였다. ‘백악의 설녀라는 이름으로 아사히신문 사회부 출신 저널리스트인 요시모토 신페이가 편집했지만 사카키바라 사건과 시기가 겹쳐 책으로 출판되지는 못했던 문서를 어찌어찌 구한 것이라 했다. 뒷부분에 언니가 직접 번역한 내용이 부가되어 있었는데, 별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대충, 얼어붙은 여자의 나체에 도착증을 가지고 있던 남자가 인상주의적인 필치로 유키온나운운하며 써 갈긴,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글이었다. 출판이 못 된 것도 이해가 갈 정도였는데, 전문을 번역한 언니에게 오싹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외에 소련인 식인종인 드미트리 코스마체프의 옥중 회고록이나, 끔찍한 삽화들이 곁들여진 타프트압카스트 민중종교 사제들의 강령비급서, 도쿄대공습 이후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야스타로 뭐라는 할아버지가 그때 당시의 정경을 묘사한 그림과 시가 담긴 지옥정경 B-29’라는 영인본도 보여주었는데, , 지금 같은 한밤중에 생각하기에는 별로 좋은 모습들이 아니었다. 어쩌다 이런 게 생각나버려서.

근자에 언니를 만났을 때, 언니는 새로운 전집을 수집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잊히지도 않는데, ‘버나드황금용이라는 아리송한 이름을 가진 자가 쓴 것이었다.

언니의 말에 따르면 현재 비공개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범인은 아직 (최소한 언니가 말을 꺼낸 사 주 전의 시점에서는) 인적사항이라는 것이 전연 밝혀지지 않은 자로, 그 자가 납치해살해한 사람만 열 명에 다다르는데 피해자 간에 공통점이 없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아이, 노인, 여자, 남자, 지역, 계층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나면 잡아다 죽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경찰 측에서 이 사건을 비공개로 수사하는 방침을 고수하는 것도 이러한 피해자 선정 방식에 있었다. 만인이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따라올 수 있는 혼란을, 수뇌부가 저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상 이런 장소에서 떠올리기는 고통스러운 내용이다. 생각의 방향을 돌려야겠다.

아까까지 무슨 생각을 했더라. 맞아. 취업의 어둠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공포가 연쇄살인마에 대한 공포를 몰아내 줄 것이다.

도서관 업무와 병행해서 취업을 준비하는 강행군은 내 정신을 좀처럼 갉아먹었다. 우울한 나날이 이어졌지만 마냥 우울하게만 있다면 며칠이 지난 후부터는 슬슬 공황발작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정신을 추스르는 것이 필요했다.

, 잘 쓴 글이 미래에 대한 걱정의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있는 내 정신에 대한 청량제였다. 커트 보네거트의 표현을 빌려서 변형시키자면, 구부러진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소리글자를 가끔 중간을 띄워서 줄줄이 나열시킨 것뿐인 글이라는 것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잠시나마 세정해 줄 수도 있다니, 그러한 것이 어찌나 신기하게 생각되는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자소서는 나에게 있어 크나큰 고통 중에 하나였다.

자소서는 여러 편 써 봤다. 떠올리기만 해도 닭살이 돋는 미사여구로 스스로를 치장해서 심신이 건강하고 업무적합성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열심히 어필했다. 나 스스로 나를 별로 좋아하거나 높게 평가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지는 않았다. 스토리를 넣으라고 해서 넣었지만, 완성된 글은 이야기글로서도 가치가 없는 잡문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기술매뉴얼처럼 정보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도 아니었다. 현실을 가공하면서도 형식은 기술매뉴얼처럼 해야 하는, 자소서는 내 인상에 일종의 방사능에 의해 태어난 병적인 키메라 같은 것이었다.

가치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써 봤자 서류도 통과되지 않으니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거기에 설령 서류가 합격했다 하더라도 뒤틀린 상태로 기능적이기만 한 글에 애정을 가지기는 힘든 것이다. 문학적인 글은 문학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고, 학술적인 글은 학술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소서라는 글에 대한 가치는 합격 통보와 함께 휘발되는 것이 아닌가.

자소서와 이력서를 준비하며 비관적이게 변질된 마음이 이런 생각에 가닿자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써 보고 싶어 실로 오랜만에 글을 끄적거려 보았었다. 온전하게 뼈대를 갖춘 글은 당장은 힘들겠지만 적당히 감성을 넣어서 그럴듯하게 보이는 글이라면 비교적 간단한 일이니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자는 셈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그러한 글조차 쓸 수 없었다. 자소서를 쓰기 위해 개조한 문투 때문에 도무지 원래 쓰고자 했던 글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제임스 조이스도 아닌 주제에 몇 단어를 쓰고 지우기를 수 백 번 반복하다가, 어쩐지 서러운 기분이 들어 책상에 엎어져 울었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 면접은 잘 봐야 할 텐데.

이러한 대목을 생각하며 아까보다는 줄어든 양으로 책 한 더미를 북카트에서 더 꺼내 안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도서관의 책이 모두 전자책으로 대체될까? 아직 전산화된 책이 모든 서적에 대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값이 비싸 서가를 늘리는 것보다 돈이 많이 먹히기는 하지만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필연적인 수순일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면 사서 일이 조금 편해지기는 할 것이다. 사서의 개체수가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상호대차 담당하는 사람은 필요 없을 것이고, 사람 피 말리는 마크 작업도 기계가 몇 초 안에 끝내버릴 것이다. 거기에 알파고 같은 게 더 발전하면 사서 보조원을 대체한다니 나 같은 사람은 발붙일 바닥이 불안해지는 격이다.

기계가 내 삶의 행복 중 하나인 도서 추천목록 작성도 빼앗아 가게 되는 것일까. 거기에 종이책의 촉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오래된 책의 그 바삭바삭한 감촉을 말이다.

이번에는 이층에서 삼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에 비하면 내 예민한 정신에 미치는 파급력이 보다 심대했다.

그대로 몸이 굳고 품에 안았던 책이 요란한 반향을 내며 와르르 쏟아졌다.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산해경의 대목들이었다. 포효라고 하는 크립티드는 사람의 얼굴에 양의 몸을 하고 있고, 눈이 겨드랑이 밑에 붙어있는데다가 호랑이 이빨을 가진 괴물로, 아기 울음소리로 사람을 꾀어 잡아먹는다.

울음소리가 한 번 더 들린다. 높은 확률로 고양이 울음소리일 것이겠지만 비이성적인 두려움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것이이전과는 소리를 달리해 날카롭게 울었다. 누가 들어도 명백한 고양이 소리였다. 몸에 힘이 탁 풀리고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제1자료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를 내는 양이 야생 고양이가 어떤 연유로 이런 곳까지 흘러와 고립되었는지 어쩐지, 애달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책이 있는 곳에 들짐승이 있어서 좋을 일은 없다는 생각이라, 최소한 서가가 없는 곳까지만 몰자는 심산이 들었다.

바닥에 쏟은 책을 긁어모아서 계단 위에 쌓아 놓고 손을 소매 안으로 넣고는 제1자료실로 향했다.

 

자료실 문은 열려 있었다. 보통 담당자가 퇴근 전에 잠가 두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경비 아저씨가 순찰할 목적으로 열어 놓는 것이 아닌가, 싶은 가벼운 생각이었다.

휴대폰을 보니 배터리가 부족하다. 여분의 배터리도 없고 충전기는 도난당한 상태이니 집에 가는 길에 쓰기 위해서는 아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맨눈으로 자료실 안을 둘러보니 뭐가 보이지도 않는다.

나비야!”

개에게 하듯이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부른다. 자료실 안은 고요하다.

야옹아!”

조금 더 소리를 크게 내며 부른다.

야옹!’

내 바로 좌측 편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린다.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트는데 엉덩이에 무엇이 부딪친다. 그리고 고요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놀란 마음에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나를 세게 밀치며 자료실 밖으로 달아났다. 그 기세에 넘어지면서 문설주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찧었다. 눈앞에 불이 번쩍 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

 

3.

얼마 후에 경비 아저씨가 플래시 빛을 휘두르며 자료실로 뛰어왔다.

아가씨, 또 무슨 일이야!”

누가! 어떤 사람이 있어요!”

경비 아저씨가 부축하는 대로 따라 일어섰다. 경비 아저씨는 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듣고 왔다고 했다.

방금 전에 도망하는 사람과 충돌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았다. 도서소독기였다. 내가 몸의 방향을 틀면서 엉덩이로 소독기 측면에 있는 스위치를 켰고, 그 바람에 자외선램프가 켜지면서 램프 점검음이 난 것이었다.

야옹!’

입구가 소란스러워지자 자료실 안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고양이?”

경비 아저씨가 플래시 빛으로 자료실 안을 훑었다. 서가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고양이의 눈이 빛을 반사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싶었는데, 금방 다시 자료실 안의 어둠으로 숨어들었다.

어디서 들어온 거지?”

경비 아저씨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 안에 외부인이 하나 들어왔었어요.”

고양이를 잘못 본 거 아니야?”

경비 아저씨가 눈썹을 찌푸리고는 되물었다.

아뇨, 분명히 사람이었어요. 제가 치어서 넘어졌는데, 체격을 봐서는 남자인 거 같았어요.”

경비 아저씨는 자료실 안으로 들어가 불빛을 이용해 창문이라는 창문은 다 훑고 다녔다. 그 창문들은 도서관 건물 중심에 있는 고립된 정원에 면한 것이다. 경비가 나에게로 와서 말했다.

일단 아가씨는 집으로 가요. 문까지는 바래다줄게.”

북카트에 쌓여 있는 책과, 계단과 위층 자료실에 널브러진 책들이 신경 쓰였지만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일 아침 일찍 와서 개관 전에 급한 불만 수습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

경비 아저씨를 앞장세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현관 앞에 도착하자 유리문 너머로 펼쳐진 인적 없는 어둡고 괴괴한 길이 내다보였다.

경비 아저씨는 현관문을 점검하며 현관이 확실히 전자식 자물쇠로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게 열릴 리도 없는데.”

아저씨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카드키로 현관문을 열었다. 더 늦기 전에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선생님. 조금만 여기 있다 가도 될까요?”

?”

경비 아저씨는 다소 짜증난 것처럼 보이는 태도로 반문했다.

그 사람이 제가 바깥으로 가는 걸 보고 따라 올까봐서요. 여기 잠깐 있으면서 가족한테 전화 좀 해도 될까요?”

경비 아저씨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서는 한참 동안 궁리했다. 그런 후 혀를 한 차례 차고는 현관문을 다시 잠그고 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따라가니 경비실이었다. 내부에 도서관 내의 여러 장소를 투사하고 있는 CCTV 화면이 늘어서 있었다. 언뜻 보니 그렇게 시야각이 넓지는 않았고, 실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경우라도 어둠 때문에 뭐가 있는지는 보기 힘들었다. 내부의 모든 곳을 커버하는 것 보다는 주요한 통로가 되는 문이나 복도 정도를 감시하는 용도로 배치된 것처럼 보였다.

경비 아저씨는 CCTV실 뒤쪽에 나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간단한 침구류가 마련된 작은 방이 나타났다.

이 안에 들어가 있어. 가족을 부를 건가?”

.”

얼마나 걸릴까?”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을 해 보았다. 아빠는 차가 있지만 저녁 반주로 술을 마셨을 가능성이 있고, 아마 오빠가 올 텐데, 오빠는 이곳 지리를 모르니까, 대충

한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아요.”

한 바퀴 돌다가 그쯤 다시 올게.”

경비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 플래시 빛을 휘두르며 떠났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손노리의 화이트데이에 나오는 장면 같아서 웃음이 나와 잠시나마 긴장이 풀렸다.

 

플래시 빛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 다시 무서워져서 방 안으로 바짝 들어가 문을 닫아보았다. 하지만 걸쇠나 다른 잠글 수 있는 장치 같은 것은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CCTV실로 나와서 CCTV를 한 차례 훑어보고는 CCTV실은 잠글 수 있는지 보았는데, 열쇠가 있어야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낭패였다. 일단 바깥에서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숙이고 경비 아저씨가 평소 근무하는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차라리 여기가 더 안전할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숨어서 집에 전화하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이 없다. 다른 주머니를 뒤져봐도 없는 것이다. 순간 뇌리를 벽력처럼 치는 것이, 떨어뜨렸다면 제1자료실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배터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그 이후로는 고양이 소리에 신경 쓰느라 주머니에 넣었는지 어쩐지 기억이 없다. 십중팔구는 그 남자와 부딪쳤을 때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리라.

큰일이었다. 이대로 한 시간 기다리다가 경비 아저씨 오면 전화기 찾아달라고 해야 하나 싶었다.

 

그렇게 집중할 곳 없이 숨어있자니 또 몹쓸 버릇이 발동해서 흉흉한 생각이 머릿속에 자꾸만 갈마든다. 도서관에 숨어든 침입자. 그러고 보니 버나드황금용의 수법이라고 들은 것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버나드황금용의 피해자들은 공통점이 없다. 그리 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무작위로 선정한 것 같은 피해자들을 한 사건으로 묶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고백이라는 책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버나드황금용은 그 책의 편집자였다. 그리고 저자는, 그에게 살해된 피해자들이었다.

버나드황금용은 피해자를 잡아온 이후 제일 처음으로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말해라.’

전후사정 없이 이것만을 묻는 것이다. 당연히 피해자들은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면 버나드황금용은 피해자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버나드황금용은 유정 언니가 열거하던 고문방법들을 차마 들을 수 없어 멈춰달라고 사정했을 정도로 지독한 방식을 사용했다. 전기, , 금속, , 강염기, 질식, 절개, 절단, 골절, 강산, 약물, 저미기, 갈기 등등. 가능한 피해자를 오래 살려두면서도 심대하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피해자에게 묻는다.

말해라.’

그러면 각기 다른 시점부터 피해자들은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면서, 자신을 고문하는 자와 연결시킬 수 있는 죄악부터 끄집어내는 것으로, 스스로의 잘못들을 고백하는 여정을 출발한다. 하지만 버나드황금용은 피해자가 무엇을 말하던 멈추지 않는다.

말해라.’

모든 것을 쏟아낸 이후, 분노와 절망만을 뱉어내는 휴지기를 지나, 고문이 어느 선에 다다르면 피해자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이야기들을 노래한다.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까지.

그 고백의 마지막 내용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않았다.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편린으로만 들은 것으로도 아득한 기분이 느껴져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람 마음의 심연에는 누구나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문의 여파로서 새롭게 태동한 병적인 망상일까. 고문 받는 동안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대체 무엇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일까.

피해자가 죽으면 버나드황금용은 자신의 질문과 피해자의 고백, 46전지를 스스로 가위로 잘라 만든 것으로 보이는 46판 사이즈의 B6 종이에 워드프로세서와 잉크젯 프린트를 사용하여 인쇄한다고 한다. 이를 본드로 떡제본하고, 책등 부위에 거즈를 대고 백상지를 속표지로 댄 다음 다시 그 위에 붉은색 마니라지를 겉표지로 댄다. 이후 책 앞면과 책등에 검은색 마카로 고백 XX이란 글자와 버나드황금용이라는 글자를 쓴다.

유정 언니의 말에 따르면 각 권은 여러 개가 존재한다고 한다. 어느 순간 한 개씩 도서관에서 발견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책을 펼쳐본 순간 이것이 어떠한 종류의 물건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페이지 사이사이에 저자가 어떤 상태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내뱉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컬러 잉크로 인쇄된 스냅 사진이 첨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니는 그 시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4권과 7권뿐이라고 하였다. 어서 나머지 권도 수집하고 싶고, 특히나 버나드황금용이라는 괴이한 조어가 도대체 어떤 논리로 도출된 것인지에 대해서 특별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원래도 꺼림칙한 사람이었지만 그 만남 이후로는 되도록 관계를 끊자고 생각했었다.

 

난 경비실 문을 살짝 열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긴장한 상태로 휘휘 훑어보니 달빛이 비치는 1층 홀에 누가 돌아다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대로 몸을 잔뜩 낮추고는 액체가 흐른다는 느낌을 견지하면서 경비 아저씨가 향한 방향을 따라갔다. 경비 아저씨는 계단을 올라가지 않았고, 아마 1층부터 훑어보려는 심산 같아 보였었다.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얼른 따라잡고 휴대폰을 찾아달라고 하는 것이 누구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이 문도 잠기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한 시간 동안이나 속절없이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다.

 

4.

계단을 지나쳐 모퉁이로 향하는데, 희미하게 발자국 소리와 사람의 기척이 들린다. 복장 규정 때문에 구두를 신고 있는 경비 아저씨의 발소리와는 다르다. 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소리다. 걸음의 간격이 지나치게 길다.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고요한 곳이니만큼 기색을 완전히 숨기는 것은 힘든 것이다. 발소리는 모퉁이 쪽에서 홀 방향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모퉁이 너머에서는 플래시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나 하고 당황하는 와중에 낯선 사람이 달빛에 늘여 놓은 그림자 끝자락이 모퉁이에서 굼실댄다.

달빛으로 환한 홀로 도망가 봤자 시야에 잡힌다. 남은 선택지는 계단밖에는 없었다.

최대한 조심히 뒷걸음질 쳤다. 바닥이 폭신한 운동화라서 대리석과 마주치는 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밑바닥 쿠션이 눌릴 때마다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 계단 바로 밑까지 도달했다. 그런 와중에도 모퉁이 너머의 사람은 느리게, 하지만 꾸준하게 홀 방향으로 움직여오고 있었다.

그때 계단 위쪽에서 한 차례 또 다른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경비 아저씨의 발소리와 비슷한 것이, 바닥이 단단한 신발을 신은 것 같아 보이는 누군가가 짧은 간격으로 이동하는 느낌의 소리이다. 경비 아저씨일 가능성은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층으로 통하는 통로는 이곳 홀의 계단과, 역시 홀의 계단 옆에 있는 가동이 중지된 승강기, 그리고 각 층의 뒤편에서 도서관 바깥으로 이어지는 건물 외부의 비상계단뿐이기 때문이다. 잠가 놓은 비상구를 열고 비상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순찰을 간다면 일층의 반편은 살피지 않는 격이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로였다. 이 생각이 옳다면, 지금 이 건물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최소한 네 명이라는 말이었다.

남은 것은 지하였다. 달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되도록 피하려 했건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귀신이니 뭐니, 그런 건 낯선 침입자라는 현실적인 공포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에 몸을 낮추고 무릎과 손을 지점으로 하여 기었다. 손에 땀이 차는 바람에, 손바닥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아서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계단 중간에서 손이 땀 때문에 한 차례 미끄러지는 바람에 경황했지만, 다행히 굴러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계단참에 도착해서는 다시 두 발로 서서 내려갔다. 지하서고 열쇠는 주머니에 있었고, 들어가서 문을 잠글 수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서가를 잘 배열하여 숨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하 서고는 계단을 내려가면 펼쳐지는 복도 끝에 있다. 문득 뒤쪽에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공상이 덮쳐와 걸음을 빨리 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겠지만 어차피 서고문을 열면 지금보다 수십 배는 큰 소음이 날 것이다. 그보다 위층은 몰라도 일층 홀에서는 확실히 들리는 소리다. 서고 안으로 숨어들기 전에 이곳에서 따라잡히기라도 한다는 그때는 정말로 답이 없다.

주로 파본이나 폐기도서를 임시로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창고를 지나쳤다. 그러고 나서 오른편에 나오는 녹슬고 커다란 쌍여닫이 철문은 보일러실로 통한다.

살려주세요!’

난데없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쯤 되니 마음을 굳게 먹으려 해도 눈물이 닭똥 같이 뚝뚝 떨어진다. 흐느끼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튀어 나온다.

목소리는 보일러실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 귀가 감지하기에는 보일러실이 소리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는 단 한번 내 귀에 들린 후로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보일러실 문에 바짝 다가서 귀를 대어 봐도 이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낌새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기 무서워서 손나팔을 만들어 조용히 불러보았지만 들릴 리가 없을 것이다.

두 개의 문손잡이를 양손으로 하나씩 잡고 좌우로 여러 차례 돌려 보았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도 힘이 걸리며 돌아가지 않는다. 둘 다 잠겨 있다. 딱 한 번만 두드려볼까 고민이 든다.

 

! !”

위층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린다. 경비 아저씨의 목소리다. 이어서 두 개의 서로 다르게 들리는 발소리가 한 동안 요란하게 울리다가 멈추고 경비 아저씨가 누군가와 실랑이 하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일단 홀로 올라가보았다. 홀에서 경비 아저씨가 웬 작은 남자 하나와 옥신각신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쪽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기억이 난다. 일층 독서실에서 오가다가 가끔 마주친 얼굴이었다. 교복은 입고 있지 않았지만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그럴 것이다. 요즘 애들은 발육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구분이 힘든 사례가 왕왕 있다.

어디로 들어왔어!”

경비 아저씨가 잔뜩 화가 나서 소리쳤다.

뒤쪽 창문이 열려 있기에 거기로 들어왔어요.”

아이 쪽도 지지 않는다. 상당히 당당해 보이는 태도이다.

뒤쪽 창문이란 도서관 1층 뒤편의 문화강좌실 맞은편 벽에 있는 창문 세 개를 말하는 것이리라. 일층의 창문은 모두 유리로 된 벽면 중간에 나 있는, 다람쥐나 출입할 수 있을 자그만 환기창이었지만, 예의 창문은 열쇠로 잠그게 되어 있는 상대적으로 커다란 창이었다. 사람이 드나들기에 넉넉한 크기는 아니지만 아마추어 컨토셔니스트 정도의 유연성만 잠깐 발휘한다면 어느 정도 체격이 있는 사람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필기해 둔 참고서를 놓고 가서 찾으러 왔어요. 내일이 바로 시험이란 말이에요.”

시험 망치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냐.’ 대충 이러한 생각을 하고 배짱을 부리고 있음이 명백했다.

, 이름, 학교, , 번호 뭐야. 무단 침입이 범죄인 거 몰라?”

경비 아저씨가 이렇게 나가자 아이 쪽도 슬슬 저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몇 개의 짧은 대화가 더 오간 뒤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사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저씨, 잘못했어요. 참고서만 가지고 간다는 게. 아저씨, 저 이번 시험 망치면 정말 집에서 죽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참고서가 너무 절박해서 그랬어요.”

학생의 말에 따르면 몇 십분 전에 현관 앞으로 왔을 때 경비 아저씨가 안 보이기에, 순찰 중인가 해서 혹시나 창문 너머로 보일까봐 건물을 중앙에 끼고 크게 돌던 와중에 일층 뒤편에 있는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위층으로는 안 갔어?”

내가 물었어.

위층엔 안 갔어요. 여기 독서실만 들렸다가 조금 숨어 있다가 바로 나왔어요.”

방금 전에 위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하나 더 들렸어요.”

내가 말참례를 했다.

아까 고양이 소리 아냐?”

경비 아저씨가 물었다.

아니에요, 확실해요.”

살려달라는 여자 소리도 들었다고 여기서 말할까 하다가 외부인 앞에서 말하기에는 부적절한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말하지 않는 것도 꽤나 온당치 못한 일 같아 가능한 돌려 말했다.

아까 지하서고를 잠깐 내려가 봤는데요, 보일러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이상한 소리? 뭐 기계소리 같은 거야?”

경비 아저씨가 반문했다. 아이가 야릇한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 그 비슷한 거였어요. 확인해 주실 수 있을 까요?”

내가 꽤나 다급하게 보이도록 말했다 싶다. 내 긴장한 것 같은 묘한 태도에 나중에라는 말을 꺼내기 힘들어졌을 거라 생각되는 경비 아저씨가 나를 빤히 져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일러실 열쇠부터 가지러 가지. 아가씨, 따라 와요. 넌 잠깐만 예서 기다리고 있어.”

나와 경비 아저씨는 열쇠걸이가 있는 CCTV실로 들어갔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경비 아저씨가 엄청나게 많은 열쇠가 걸려 있는 열쇠걸이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 확실하지 않은데요, 여자 목소리를 들은 거 같아요.”

?”

경비 아저씨가 열쇠를 찾던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자?”

확실하지는 않은데요.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경비 아저씨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설득하듯이 말했다.

헛것을 들은 거겠지.”

확실히 한 번만 희미하게 들은 것이라 확신은 없었다. 경비 아저씨는 쉬지 않고 계속 이어 말했다. 어쩐지 나 때문에 지치고 화가 난다는 것 같은 태도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가씨, 아까 전에 나 보고 괜히 놀란 것도 그렇고, 계속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일단 보일러실은 확인해 줄게. 뭐를 들었다니까 확인은 해봐야겠지. 근데 방금 전처럼 외부자 있는데서 그런 얘기 꺼내면 되겠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 아니, 잠깐만. 내가 아가씨도 우리식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지금 상황이 안 좋아요. 나는 경비인데 지금 도서관 안에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아가씨 말에 따르자면 둘이나 있대. 그리고 거기에 저 학생 앞에서 보일러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느니. 저 학생 얼굴 봤어요? 저런 애가 밖에 나가서 이상한 소리 떠들고 다니면 소문이 금방 불어나요. 최대한 숨길 생각을, 아니 숨긴다는 게 좀 그런데, 원만하게 잘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자꾸만 문제를 키우면 나는 물론이고, 아가씨도 윗사람들한테 따로 말 안하고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거잖아.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내 부서도 지금 규제 이리저리 바꾸면서 빡빡하게 돌아가는데, 지금 아가씨 부서도 아가씨도 알고 있지만 돌아가는 사정이 안 좋다고 말들이 많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목이 위험하다는 말에 심장이 덜컹한다. 이후 취직처가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최악의 루트 중 하나였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경비 아저씨는 CCTV실 문을 열고 홀로 나가 아이에게로 다가가서 아이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넌 더 늦기 전에 빨리 집으로 가라. 여긴 직원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아이는 여태까지 시험이 급하다는 핑계인지 사실인지를 대어온 터라 집으로 가라는 명령에 군말이 없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이는 수은등으로 밝혀진 도서관 앞길을 따라가다 이내 밤의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다시 문이 잠겼다. 경비 아저씨가 나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가족은 데리러오라고 불렀어?”

뭘까, 언어로서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는, 직감에 가까운 불길함이 나를 휘감았다. 이렇게 경비 아저씨와 둘만 남게 되니 명확해진 생각이다. 이전까지는 외부의 적이라는 것이 명확했고, 내가 기댈 사람은 전적으로 경비 아저씨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보니.

내가 경비 아저씨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난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통화는 했고요. 선생님이랑 같이 있다고 말했어요. 근처에 있어서 금방 도착한다고 했는데.”

말끝이 떨린다. 직감이 흐릿하게 든다. 여기서 떨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일단 난 아가씨가 말한 대로 보일러실 한 번 갔다 와 볼게요. 위험하니까 저 안에 들어가 있어요.”

난 그 말대로 경비 아저씨가 잠을 자는 방으로 들어갔고, 경비 아저씨는 보일러실 열쇠를 꺼내서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십 분 정도 지난 후에 올라왔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일러실에도 그렇고, 혹시나 해서 창고하고 지하서고까지 봤는데, 없어요. 잘못 들은 거 같아. 아가씨, 너무 무리한 거 아니요?”

난 영업용 미소를 얼굴에 띠우고 고개를 저었다.

가족은 안 왔나?”

, 방금 또 통화했는데, 요 앞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 오겠다고 해서요, 이제 편의점 나온다니까 금방 도착할거예요.”

오면 부르쇼. 난 위층에 올라가볼 테니까.”

경비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플래시 불빛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열려 있었다는 창문으로라도 도망칠까 궁리했다. 그러다 아직은 시기가 좋지 못하다는 생각에 가 닿자 충동적으로 보일러실 열쇠를 찾았다. 보일러실이라고 써진 견출지 밑에 열쇠는 없었다. 경비 아저씨가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경로가 있다.

결심이 선 이상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충분하니, 확인만, 확인만 하기로 하자. 아무도 없다면 가장 좋은 경우이고, 만약 누가 정말로 있다면, 그때는 곧바로 문화강좌실 앞쪽에 있는 창문을 여는 것을 시도해보자. 창문이 만에 하나 열린다면, 인적 없는 곳으로 달아나 차라도 잡아서 신고하자는 것이다.

CCTV실 문을 열고 나와 가능한 몸을 낮추고 곧장 지하로 향했다.

열쇠로 지하서고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난다. 이층 정도라면 희미하게 들리겠지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일 경우 높은 확률로 들었을 수 있을 것 같다. 제발, 만약 들었다면 침입자가 다른 층에서 낸 소리라고 생각하기를.

지하서고에서 보일러실로 통하는 쓰지 않는 문이 있다. 열주처럼 늘어선 서가들을 지나치며 그곳으로 향하는데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바쁜 싸움이 일어난다.

내가 미쳤지. 그럼 어떻게 해? 확실하지도 않은데 거기서 그냥 창문으로 도망쳐? 그랬다가 정말로 경비 아저씨가 무고해서 내가 납치당했다고 신고라도 하면 어쩌자고? 아니, 그 전에 창문이 여전히 열려 있을까? 내가 일단 여자가 도서관 안에 있다고 신고해? 아니라면? 그렇다면 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아침까지 버티는 게 나았을까? 경비 뒤를 따라서 이층으로 올라가서 휴대폰을 챙기는 건?’

아까 아이가 도서관을 나설 때 뒤따라갈 걸 하는 회한이 넘쳤지만, 그때는 분위기가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멍청하게도 경비 자신과 나를 한 무리로 묶고 아이를 외부자로 타자화시키는 장단에 넘어가서 같이 나간다는 발상에 다다르지 못했던 것이다.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도 않는 서가 손잡이를 돌린다. 보일러실 문을 가리고 있는 서가는 자리가 좋은 이 장소에 아예 붙박이처럼 놓여 있은 지, 내가 알기로는 수년째다.

겨우겨우 철제 외여닫이문이 반쯤 보일 정도로만 서가를 움직였다. 안쪽으로 열리면 좋겠는데. 손잡이를 돌려보니 다행히 열린다. 하지만 서고 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문이다.

손잡이를 조금 더 움직였다. 문을 열어보니 나 정도 체격이 지나갈 수 있는 틈은 만들어졌다. 손잡이를 돌리는데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보일러실 안으로 우겨넣었다.

 

5.

백열전구가 켜진 보일러실 바닥에 여자 하나가 묶여 있었다. 입에는 붉은 수건이 재갈처럼 물려서 뒤쪽 목 부위에 매듭지어져 있고, 손목과 발목은 엉덩이 부근에서 밧줄로 한 번에 묶여 있어서 마치 구부러진 방향이 반대로 된 새우 같아 보였다.

여자가 나를 보자 수건 너머로 목 막힌 소리를 내며 마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난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오른 검지를 입술에 대고, 보일러실에 혹시나 누가 있나 휘휘 둘러보면서 여자에게로 다가가 수건부터 풀었다. 리프노트로 두 번 매어있는 것이라서 첫 번째 매듭을 풀 때만 고생을 했고, 두 번째 매듭은 쉽게 풀렸다. 여자의 입 안에는 행주로나 쓰일법한, 견으로 된 하얀 천 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천을 입에서 꺼내자 천에서 침이 뚝뚝 듣었다.

입이 자유로워진 여자는 숨을 몰아쉬고 몇 차례 목을 가다듬고 견 조각을 퉤퉤 뱉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홍민지!”

홍민지는 내 이름이다. 화급히 얼굴을 뜯어보니 유정 언니다. 마음이 다급하기도 했었고, 머리가 산발이 되어 놓고, 얼굴에 피가 몰려 붉게 되어 있어서 첫 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언니!”

여기 왜 네가 있니? 혹시 여기 향사시립도서관이야?”

언니가 몸을 움직여 내 눈 앞에 한데 묶여진 손발목을 들이밀며 물었다. 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는 예전에 몇 차례 알려준 일이 있다.

, 맞아요.”

여기 경비원, 여기 경비원이 버나드황금용이야.”

?”

이름이 조성택이고 머리 반백에 키는 170 후반대고 왼쪽 눈에 안검하수가 있지.”

이 용모파기를 경비 근무자 세 명의 얼굴에 대입해보면 나오는 사람은 하나였다. 지금 위층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사람. 그냥 나쁜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죽을 때까지 고문하는 사람이라는 더욱 나쁜 패가 튀어나온 셈이다.

언니의 손발을 묶고 있는 매듭도 리프노트로 묶인 것이었지만, 밧줄을 여러 개 써서 강도를 높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살갗 바로 위에 철사를 매어 놓았다. 언니가 나름대로 저항해보려 했는지 손목과 발목 전체에 찰과상이 잔뜩 나있었고, 꽤 심해 보이는 열상도 하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같은 편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한 쌍으로 해서 케이블타이로 잡아매 놓았다.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 놓은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보일러실 바닥에 이질적인 검은색 더플백이 놓여 있다. 혹시나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지퍼를 열어보았는데, 별 게 다 들어 있었다. 토치와 연결된 부탄가스가 가장 위에 놓여 있었고, 라이터도 있었다. 그 밑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갖가지 금속 연장들이 들어 있다. 펜치가 있기에 잡아들고 와서 철사를 자르기 시작했다.

정보가 필요했다.

여기가 그 고문실이에요?”

사진이랑은 달라. 아마 임시로 잡아둔 걸 거야.”

어쩌다 잡힌 거래요?”

원래는 책만 빼돌리려고 했어. 아직 풀리지 않은 고백 제12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오늘 며칠이지?”

“428일이요.”

언니는 뭐가 웃긴지 한동안 웃다가 말을 받았다.

어제 잡혔어. 차를 뒤져보려고 했는데, 머리를 맞았지.”

마지막으로 케이블 타이를 절단하자 팔다리가 자유로워졌다. 언니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서 얼마간 퍼덕거리더니 일어나 앉아서는 오른 다리의 상박에 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아픈 표정을 지었다.

쥐났어.”

언니 휴대폰 있어요?”

언니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없어.”

몸집이 작은 언니라 부축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복도로 통하는 문은 안에서 열면 열리게 되어있었지만 어쩐지 그 통로를 이용하는 것은 부담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들어왔던 경로를 그대로 되짚어 지하서고로 나왔다.

여기가 지하서고지? 평면도면에서 봤어!”

보일러실로 통하는 문을 막고 서가와 책들로 요새를 만들면 낮까지 농성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데, 언니는 기분 나쁘게 들뜬 표정으로 서가의 손잡이를 툭툭 쳐보더니 망설임 없이 서고 입구로 향한다.

언니, 어디가요!”

난 신경 쓰지 마. 책을 찾아야 돼!”

옷소매에 매달려 막으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오랜 경험을 통해 언니가 이런 지경에 도달하면 막느니 앓는 게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잡혀서 고문당할 위기인데 제 고집대로만 하려는 것이 배알이 곤두섰다. 그래서 팔꿈치를 강하게 낚아채보았으나 자신은 뭐가 와도 책이 먼저라는 태도로 짜증을 부리며 도망가니 속수무책이다.

언니, 미쳤어요?”

잡혀도 너 봤다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호언장담하지만 고통 앞에 장사 없다고 기껍지 못한 기분이었다. 어디 숨어도 여기보다는 다른 데 숨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도 있어 일단 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지하는 완전히 고립된 공간이지만 일단 홀까지만 올라가면 선택지가 조금은 늘어나는 셈이니까.

그 와중에 언니는 나 들으라는 것인지 아닌지, 생각을 가다듬으려는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어제 밤에 잡혔다. 그러면 나에게 들켰다는 걸 알았으니 불안했을 거란 말이야. 아직까지 나한테 별 얘기도 듣지 못했으니까. 잠시 도주를 했거나, 고문실이나 암실에 굴러다니는 증거들을 파기하느라 바빴겠지. 책을 가지고 있었다면 얼른 배포하려고 했을 거야. 그렇게 정성을 쏟은 책을 불태우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 시간이 여의치 않았을 테니 일단은 어디에 숨겨두거나 그랬을 거야. 제발 그러기를.”

언니는 초조한 듯이 손바닥을 마구 비볐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자기 집이나 고문실 같은 데에 경찰이 찾아오지 않으니까 마음이 놓였겠지. 그리고 다시 작업을 재개하려고 했어. 나를 야산 같은 데 파묻지 않고, 살려뒀다가 굳이 오늘 밤에 차 트렁크에 싣고 와서 여기로 옮긴 게 그런 의도였을 거야. 내가 왜 자기 차를 뒤지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 테니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겠지.”

오늘 밤이라 하면, 내가 삼층에서 일하는 도중에 언니가 보일러실로 옮겨졌다는 말이 된다.

고문실로 옮기지 않고 도서관에 숨긴다는 위험을 감수한 것은, 고문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잠시 맡아두는 장소로 사용하려고 했거나. 하지만 도서관은 습기제거 때문에 냉방 트니까 보일러실은 요새도 쓰잖아. 그럼 아마 나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책 작업을 들어가기 전에 급하게 알아둘 것들이 있었을 테니까 자기 근무 시간을 활용해서 예비로 고문하려고 했던 거겠지. 그런데 왜 아무런 짓도 안했을까? 아까 재갈 풀렸을 때 어떻게 알고 잠깐 내려온 때 말고는 오지도 않았어.”

그건 도서관에서 백귀야행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나까지 말을 보태서 소란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김목환 선생한텐 내가 정보를 줬는데 너무하네. 신고라도 해줄 줄 기대했는데.”

언니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 둘이 걸으면서 내는 바스락대는 소리와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침 삼키는 소리, 호흡소리 외에는 고요한 사위에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 김목환 선생은 학교 사서야. 사서교사. 최근에 장서 폐기 때문에 아동도서 수집에 도움을 많이 받아서 알아낸 걸 조금 흘려줬지.”

, 그래요.”

그렇겠지?”

뭐가요?”

언니 혼자 신난 듯이 속삭이는 와중에 다행히 계단까지는 거북이걸음으로 어떻게 도착했다. 멈출 기세가 아닌 언니의 얼굴을 얼른 손바닥으로 덮어서 잡아챈 다음 내가 앞장서서 계단을 기어 올라가 숨도 쉬지 않고 둘러보았다. 내 감각에는 뭐가 있다는 기색이 잡히지 않는다.

언니와 나는 홀로 나왔다. 경비가 제발 아직 위층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휴대폰도 없고, 홀에는 시계가 없으니 흐른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달이 움직인 거리로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생전 해 본 일이 없으니 쓸모가 없다.

더 늦기 전에 창문으로의 탈출이라도 시도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경비가 아까의 순찰에서 창문을 잠가 놨다면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거기에 만에 하나 경비가 이층 발코니를 지나는 도중이면, 창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내 모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들켰을 때 둘러댈 말이 마땅치 않은 만큼, 실패 시의 위험성이 크다는 점에서 쉬이 선택하기 꺼려지는 면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고민하는 동안에 언니는 제 깐에는 몸을 숨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모양새로 안내라는 글자가 정면 유리에 새겨져 있는 경비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며 넌 얼른 가라는 표시로 손을 휘휘 젓는데 조만간 꼼짝없이 다시 잡힐 짝이다. 내가 도주해서 경찰을 불러온다고 해도 버나드황금용이 언니를 데리고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면 끝장이고, 나는 나대로 불쾌한 기분에 잠도 못 이룰 것 아닌가.

문득 제1자료실에 놓고 온 휴대폰 생각이 났다. 케이스가 분홍색에다가 뒤편에 잠수복을 입은 샌디 칙스 그림까지 새겨져 있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모습이다. 확실히 위층의 경비도 일전에 디지털실에 놓고 간 휴대폰을 나에게 찾아다 준 일이 있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까 휴대폰으로 가족에게 전화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경비가 그걸 발견이라도 한다면 사고가 어디로 튀게 될지 두려웠다.

내 예측으로는, 아마 경비도 심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을 것이다. 학생 건은 적당히 무마되었다고 해도 아직 도서관 안에 이상한 사람이 하나 더 있는 것 같고, 내가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고 대놓고 말했으니 휴대폰이 기화가 되어 나까지 고문실에 나란히 앉게 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정말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휴대폰이 있다면 당장 신고를 할 수 있다. 경찰에 신고를 해 본 적이 없고, 신고 관련해서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던 터라 걱정도 들었지만 요새는 문자 신고도 가능하다고 하고, 지금 경비의 의심을 최대한 받지 않고 모든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라고 내 직감과 이성은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망설이다가는 진짜 위험하다. 위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은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경비도 위층에 있을 것이니 여차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침입한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거나.

여하간 웬만한 일을 당해도 버나드황금용인지에게 산채로 잡히는 것보다는 사정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언니는 경비가 잠을 자는 방까지 들어가서 뒤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결심이 섰고, 확신이 있는 이상 망설이는 것은 후환이 따른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안다.

제발 경비가 삼층부터 천천히 수색을 시작했거나, 이층을 돌았더라도 내 휴대폰을 발견하지 못했기를 빌며, 신발을 벗어 홀 기둥 아래에 붙어 있는 의자 밑에 적당히 숨기고 양말만 신은 채로 이층으로 향하는 첫 계단에 발을 디뎠다.

 

이층에는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마주치면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창문 쪽에 바짝 붙어 기면서 이동했다. 이층부터 위쪽 층의 바람벽에 나 있는 창문은 걸쇠로 잠그는 식이었지만, 잘못 뛰어내리면 시멘트 바닥에 다리가 부러질 위험성이 큰 높이에 있다.

달빛이 있던 곳에서 광량이 적은 곳으로 들어오자 눈이 암순응되지 않아 방향감이 없다. 더구나 시야가 낮은 데 있어 어두운 느낌이 더욱 심한 것이었다. 이런 경우 대개 반시계방향으로 돌게 된다는데, 과연 나는 직진한다고 하지만 자꾸만 몸이 벽 쪽으로 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층의 제1자료실로 통하는 통로에는 비상구, 소화전, 소화기의 위치를 나타내는 녹색 야광 외에는 인공적인 불빛이 없었다. 최소한 경비는 내가 지나가려하는 루트에는 없거나, 혹은 경로 상에 존재하는 여러 장소 중 한 곳에 문을 닫은 채로 들어가 있거나, 모종의 이유로 플래시 불빛을 꺼 둔 상태 중의 하나에 해당할 것이다.

길의 중간에서, 지금 자세로 경비와 만나면 매우 수상하게 여겨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마주쳐도 당당하게 무서워서 올라왔다고 공갈을 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그러니 더 이상 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거기부터는 걸어서 이동했다.

그렇게 별 일 없이 제1자료실에 도착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과 손의 촉감을 이용해 도서소독기를 중심으로 탐사했다. 그 결과, 도서소독기 바로 앞에 놓인 서가 밑에서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휴대폰은 배터리가 없어 운명한 상태였다.

 

6.

이제는 정말로 언니를 데리고, 혹은 나 자신만이라도 건사해 도서관 내에 숨어 있거나, 열려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창문으로 도주를 시도하거나 양자택일밖에는 없다는 생각이다. 절망감에 또 다시 눈물이 뚝뚝 흐른다. 무심코 코를 훌쩍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휴대폰을 오른손에 쥔 채로 홀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까지 되짚어간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부옇다. 열심히 소매로 눈을 훔쳤지만 고인 눈물까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층 계단에서 떨어져 내려와 나를 덮치는 사람을 피할 수 없었다.

묵직하고 따뜻한 것이 덮쳐오자, 비명을 질러야한다는 생각과 비명을 지르면 안 된다는 양분된 생각으로 당황한 내 뇌가 잠깐 작동을 멈췄다. 그러다 곰 같은 사람인지 뭔지 밑에 깔린 채, 뭔가 새로운 위험이 따라오지는 않자 뒤늦게 주지화로 대처했다.

수재너 케이슨의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케이슨이 소라진을 먹으니까 물의 벽이 덮쳐오는 것 같다고 표현했지. 그 짝인걸?’ 따위의 생각이 묘하게 침착한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내 오른손으로 내 입을 막고 있다.

으으으.”

내 위에 있는 남자가 아픈 것 같은 신음을 흘린다.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몹시 나쁘기도 하여 열심히 몸을 움직여 깔린 상태에서 벗어났다.

일어서서 내려다보니,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은 살찌고 신장이 작은 남자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통수의 모발에 두 가지 색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연배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남자가 몸을 뒤척이려는 것처럼 움찔거리다가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힘없이 엎어졌다. 그리고 그 몸에서 천천히, 너무나 피처럼 보이는 액체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레드 드래건에서 한니발 렉터가 말한 것처럼 달빛을 받은 피는 정말로 검은색이구나!’

남자는 몸 바깥쪽으로 뻗어 있는 오른손에 붉은 표지를 댄 책을 한 권 쥐고 있다. 표지 전면에 고백 제12이라는 검은색 글씨가 쓰여 있었다. 판단이건 뭐건 마비되어서 그 꼴을 멍하니 감상하는 것 마냥 보며 가늠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서 있었다.

계단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반쯤은 본능에 떠밀려, 계단을 통해 내려가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둔마 상태로 급히 움직인 것이 화근이었다. 피웅덩이에 양말 신은 발이 미끄러졌다. 계단의 시작점에서 앞으로 구를 것 같았다. 얼른 상체를 뒤로 뺐지만 지지점이 되어줘야 했을 발이 미끄러지는 상태다. 그대로 구부러진 오른 다리에 체중이 죄다 실린 채로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발목이 뒤틀린다. 일순간 모든 세계가 한 차례 점멸했다. 심한 통증에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발자국 소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통증이 내 정신을 깨웠다. 촉박한 상황에 도망치면 사태만 더 나빠질 것이다. 일어서보려 했지만 삔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지금은 홀로 가서 휴대폰을 내보이며 태연하게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경비를 한 차례 지나 보낸 이후엔 숨어야 한다. 낮까지 숨어 다니며 살아남는 것이다.

피 발자국이 남을까 염려된다. 바닥에 주저앉아 양말을 벗고, 하의를 걷어 올린 다음 피 묻은 맨발을 반대 다리의 장딴지에 문질러 닦았다. 계단 위쪽에서 요란하게 들까불리는 플래시 불빛이 희미하게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네 발로 기어 계단참을 돌아 나머지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의자 밑에 넣어 둔 신발을 꺼내 신었다. 양말은 바지 뒤춤에 쑤셔 넣었다.

돌아보니 계단참의 벽에 플래시 불빛이 선명하게 비춰지고 있다. 경비가 시체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기어서 현관까지 갔다. 다리가 다쳤다는 것을 최대한 숨겨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일어났다. 경비실 안에서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때 좋게도, 내가 자세를 잡은 이후에야 경비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다 내가 현관 앞에서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오른다. 경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그렇게 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스위치가 다시 켜진 것처럼 서둔 걸음을 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난 열심히 바지를 뒤졌다. 휴대폰은 없었다. 지하에서 철제문의 경첩부위가 삐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다.

경비는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금방 올라왔다. 나에게 곧장 플래시를 비치지는 않았다. 달이 역광이었다. 때문에 경비와 마주보고 있는 내 전면은 그늘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내 앞모습을 잘 가려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비는 플래시 빛을 나와 자신 사이의 바닥에 던져 놓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말을 고르는 듯 했다. 겨우 일 분 남짓한 시간이었겠지만 체감하는 것으로는 훨씬 길게 느껴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긴장을 풀었다. 호흡을 고르게 하고, 다리를 다쳤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벽에 등을 기대고 자세를 최대한 곧게 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경비와 눈을 마주친다. 여상스러움을 가장하던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고, 먼저 태연하게 무슨 일이세요?’라고 물어보려는데 경비가 먼저 입을 연다.

혹시 여기 홀로 나온 사람 있었어요?”

막상 대답하려니 뛰는 심장에, 호흡도 막혀서 휴지기가 생긴다. 정신을 차리고 먼저 고개를 좌우로 휘젓는다. 그 새에 날숨을 짧게 끊어 내보낸 후 말을 이었다.

아뇨, 아래로 내려온 사람은 없었어요. 선생님도 위층에서 누구 못 찾으셨어요?”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마른다.

확실히 수상한 사람을 본 거에요?”

본 게 아니라 들었어요.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데, 아까 듣고는 지금까지 계속 못 들었지만, 분명히 누가 위에서 발자국 소리를 내는 걸 들었었어요.”

경비는 경비복의 넥타이를 잡고 답답하다는 듯이 좌우로 당긴다.

나는 그 사이에 침을 한 번 삼켰다.

아까 그 학생도 위층에는 안 올라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전 1자료실에서 누구랑 부딪쳤었어요.”

이상하네.”

경비는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뜨거운 구처럼 변해 내려앉았다. 하도 태연스러워서 뭐라고 말하기도 뭣한 행동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저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 계속 있었어요?”

경비는 평소의 친근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계속 있었죠. 어디 갈 데도 없는데.”

가족이 늦는데 오고 있는 거요?”

, 잠깐 어디 들렸다 오느라 늦는다고 하네요. 나온 김에 밀린 일을 죄다 처리하려나 봐요.”

경비는 나와 서너 걸음 떨어진 데서 멈췄다. 쏘아보는 것 같은 눈초리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

인후가 말라 따갑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세탁물도 찾고 뭐. 그보다 위층에 누구 있는지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도서관에 불이라도 지르면 어떻게 해요?”

침을 삼켜 보지만 입은 진작 말라 목으로 넘어가는 것이 없다. 마른기침을 몇 차례 했다.

경비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분홍색의 네모난 뭔가를 꺼낸다. 내 휴대폰이다.

이거 위층에서 주웠는데, 자기 거 아냐?”

경비가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며 은근슬쩍 두 걸음을 다가선다. 눈은 여전히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 경비의 얼굴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다.

난 무해한 사람이다. 걱정이란 것은 하나도 없고 당당하며 아주 여유로운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제 거 아니에요.”
목소리가 흐느끼는 것처럼 떨린다.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막을 수 없었다.

경비는 한 차례 사람 좋게 웃고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경비실로 걸어갔다. 그대로 침구가 놓인 방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살짝 닫는다. 방 안의 광경이 내 시야에서 가려진다. 언니가 아직도 저 안에 있는지 모르겠다.

무언가 나무 같은 것이 뜯기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이내 고요해졌다. 얼마 안 있어 경비가 방 안에서 나왔다. 그리고 여상스런 얼굴로 내게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왔다.

아무도 여기 안 왔다고?”

경비가 단단한 플래시로 내 머리를 내려친다.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몸의 중심이 기울어지면서 다리를 삔 쪽인 오른편으로 쓰러졌다.

그럼 내 책은 어디 있지?”

경비가 분노서린 목소리로 말한다. 난 공포에 사로잡혀 마구 비명인지 괴성인지를 지르며 네 발로 기어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경비가 무릎인 것으로 생각되는 단단한 부위로 나를 바닥에 찍어 누르고, 내 등에 걸터앉아 목에 오른팔을 두른 다음 무시무시한 힘으로 압력을 가한다.

!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시리즈에서 봤는데, 뇌는 7초만 피를 굶기면 커널 패닉을 일으킨다지?’

머리에 공기가 가득 찬 것 같은 충만감이 느껴지다가 서서히 세상이 흐릿해지던 때, 목의 압박이 일시에 풀리고 폐 속으로 밤의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KDC 030 분류에는 흉기로 쓰일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많다.

 

7.

사정은 이렇다.

유정 언니는 경비실에서 찾은 고백 더미를 자료실로 들고 가 읽고 있다가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버나드황금용의 뒤통수에 손에 쥐고 온 백과사전을 내리꽂았다. 이산화티탄이 많이 섞인 질 좋은 종이라서 꽤 타격이 컸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가격으로 운 좋게 버나드황금용이 쓰러지자, 언니는 나를 데리고 도서관 밖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경찰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경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의 죄상은 언니가 (아마 자신 것은 빼 놓았겠지만) 경비실 안에서 발견한 고백 제12권 더미로 확실시되었다. 아마 언니를 보일러실에서 예비로 고문하고 고문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같이 가져가려 했던 것 같다고 언니는 추론했다.

계단에서 죽은 남자는 언니가 말했던 김목환 선생이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언니에게서 경비에 대한 정보를 듣고 비슷한 생각으로 도서관에 침입했던 것 같다.

언니 말에 따르면, 시간상으로 보았을 때 김목환 선생은 경비실에 있던 책 더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 하니, 그가 들고 있던 고백 제12권은 아마 경비가 3층 자료실에 배포해 놓은 권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면접은 망쳤다. 참고인이니 뭐니 시달리던 것도 있고, 그 일이 있은 후 신경쇠약에 고생하느라 버스에서 잠도 못자고 거의 시체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면접을 보러 가기라도 한 것만으로 나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면접 장소가 지방이었기 때문에 귀가가 늦었다. 노란 나트륨등이 밝히고 있는 골목길은 고적하다.

무언가 뒤에서 부스럭거린다. 소스라치며 돌아보니 고양이다.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보다가 나트륨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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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소서와 면접의 공포를 표현해봤습니다.


심사위원님이 아직 못 읽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첨언합니다.

원래는 178매였는데, 이런 저런 미진한 부분이 너무 거슬려서 수정하니까 183매네요. ㅜㅜ

분량 문제는 심사위원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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