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아들에게

2016.03.18 06:4703.18

아들에게


사랑하는 내 아들!


네 걱정에 아빠는 잠이 오질 않는구나.


서울은 지금 밤공기가 차다만, 네가 겪을 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근래에 서울에서 재밌는 경기가 열렸다. 세계적인 대기업 Google이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와 한국의 이세돌 9단이 바둑 경기를 치렀단다. 알다시피 이세돌 9단은 세계를 호령하는 천재 바둑기사가 아니더냐. 상대는 잘 봐줘야 비싼 계산기 수준일 것이고. 대회 우승 상금이 자그마치 10억이었는데, 사람들은 이세돌 사범으로부터 지도 바둑을 받는 대가로 Google이 비싼 수업료를 내게 되었다며 마치 자기가 받을 상금인 양 흥분을 하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오늘로 다섯 판의 대국이 모두 끝이 났다.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생후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인공지능이 인간 최고수를 압도했다는 사실을. 인공지능이 4승을 거두고, 이세돌은 1승을 가까스로 챙겼을 뿐이었다. Google의 통 큰 마케팅이라며 떠들어대던 호사가들도, 인공지능의 혁신적인 행마를 떡수로 낮춰 보던 해설진도, 누구보다도 이세돌 본인이, 모두가 충격에 빠지는 대사건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거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을 터이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그러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국이 끝난 후, 사람들은 앞으로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직업을 가능성이 높은 것부터 차례로 나열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단다. 종국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며 신인류로 등극할 거란 우스갯소리도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네가 다 컸을 무렵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지 아빠는 상상도 할 수 없구나.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데, 어째 인간의 불안함과 공포심은 좀처럼 가라앉는 것 같지 않구나. 이게 무얼 위한 기술이고 발전인지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고작 바둑 몇 판 졌다고, 내 호들갑이 좀 심한 것 같기도 하다만...


인공지능과의 대국 결과를 들먹이며 비관적인 미래를 그린 이야기가 신문지면에 소개되고 있는 가운데, 다른 페이지에서는 이런 낱말을 큼지막하게 다루고 있구나. <저성장> <인구 절벽> <침체>. 이 단어를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요는 돈 벌기 힘들고, 앞으로도 계속 힘들 거란 소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끊임없는 경제 성장을 전제로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란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성장의 동력이 멈추는 순간이 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톱니바퀴의 움직임이 정지하고 부품이 마모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겠지. 이미 사회 저변에서 관련 징후가 하나둘 발견되고 있다. 기업이 힘들고, 실업률이 오르고, 빚이 불어나고, 가정을 꾸리기 어려워지고, 그렇게 점점 사회적 무기력이 확산되고... 동력이 꺼진다는 것은 곧 사회의 기능이 모두 정지한다는 의미란다. 누구의 잘못일까. 기업일까. 정부일까. 어쩌면 잘못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게 있었던 건 아닐까?


예지와 나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통해 만났다. 예지는 네 엄마가 될 수도 있었을 분이다. 첫 데이트 때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구나. 둘 다 돈이 없어 분식집엘 갔다. 떡볶이에 김말이와 오징어 튀김을 시켰는데, 우리는 둘이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김말이를 떡볶이 국물에 적셔 먹고 오징어 튀김은 끄트머리만 살짝 간장에 찍어 먹었다. 왁자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바로크 풍의 음악을 듣고 서로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임을 단박에 알아차리기도 했지. 사람의 취향이란 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우린 늘 만나면 되도 않는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시시껄렁하고 하찮은 이야기들이 마냥 행복했단다. 즐거운 시간은 황급하게도 흘러 지났다. 알파고의 등장이 그러했듯이 느닷없는 ‘결혼’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우리에게 벌컥 들이닥쳤고, 무방비 상태였던 나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가 당연하게 지속될 거라 생각했다. 아니, 지속되었으면 했다. 나는 현실을 외면하고자 예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굳이 예지가 아니었어도....... 내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예지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시점부터 우리는 싸우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예지는 그저 ‘다른 가정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 말했고, 나는 그건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다’며 서로의 흑과 백을 교환했다. 나와 예지는 그렇게 요원해졌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그러면서도 나로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비로소 내 삶을 의심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 왔으며 바쁘게 일했는데 어째 축적한 것보다 갚아나가야 할 것이 산더미 같이 많은 것인지. 어째서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에 뜻 모를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 내 존재의 목적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이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원망하곤 했다. 왜 이런 식으로 가난을 대물림하시느냐고. 도대체 이렇게 힘든 세상에 무슨 생각으로 나를 끄집어내셨느냐고. 이런 원망은 곧 내 심장을 조이는 자괴감으로 옮아갔다.


나는 물질적으로 궁핍할지언정 정신적으로 궁핍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나는 너를 투자의 개념으로 보게 될까 그게 무섭다. 이 팍팍한 세상 속에서 가진 거라곤 너밖에 없는 내가 너에 대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며 너를 억압하고 강제하고 사사건건 참견하고, 뜻대로 되지 않아 네게 서운함을 느끼고. 너를 통해 내 진면목을 깨닫게 될까 나는 그게 두렵다. 아빠도 한때 호기로웠던 적이 있었다. 지금? 지금은 호기는커녕 몸뚱이에 못 보던 혹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구나. 호기와 혹이. 이런 늙다리 같은 농담이 이젠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시답잖은 유머가 떠오르면 이걸 말하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내가 원하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나 자신의 변모를 통제할 여력이 이제는 없는 것 같다. 나 또한 나약한 인간이었던 탓에.


아이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라.


결심을 굳히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실 감각이 있고,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이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니까.


나는 너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태어날 일이 없을 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란다.


네가 태어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똘망똘망할까. 생글벙글할까. 나는 네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브란덴부르크로 태교를 시작할 거다. 손발을 기민하게 움직이며 만화영화에 눈을 뜰 무렵이 되면, 너에게 피아노와 MAME 게임의 구동 방법을 제일 먼저 가르치고 싶다. 네가 그 조막만한 손으로 건반 위에서 하농을 타고 오르면 나는 너의 두 옥타브 위에서 정확한 박자를 짚어줄 거다. 피아노 교습이 끝나면 조이스틱을 꺼내 같이 MAME를 즐기는 거야. 영어 실력이 나보다 훨씬 뛰어난 너는 마메(MAME)를 유창하게 ‘매임’으로 발음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매임’을 발음하는 넌 무슨 게임을 좋아할까. 체르니 30은 뗄 수 있을까? 만약 네가 태어난다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는 질문에 너는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그리고 너는 실제로 누굴 더 좋아하게 될까. 내가 짧게 자란 턱수염을 네 얼굴에 문지르며 으이구 내 새끼, 하면 너는 손사래를 칠까 미소 지을까. 만약 네가 태어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


밤이 깊어질수록 공기가 점점 차갑다. 모래바람이 강하게 창문을 때릴 때마다 살을 에는 외풍에 몸집이 점점 움츠러드는구나. 날씨 예보에서 며칠 후면 날이 활짝 갤 예정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란다. 얼마 전에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활짝 웃으며. 나는 그치들을 믿지 않는다.


걱정이 많은 탓인지 요 며칠간 계속해서 악몽을 꾸었단다. 쿵쾅거리는 하농의 음표들과 아이 마이 미 매임... 따위의 온갖 소리가 두통을 몰고 왔다. 거듭되는 악몽 속에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동일한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동력이 꺼지면 기능이 정지한다. 나는 그제야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나를 닦달하고 있던 것은 너를 예감하는 폐몽(閉夢)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잊지 말거라. 나는 늘 네 생각뿐이다.


사랑한다. 우리 아들.




2016년 서울

네 아빠가

댓글 1
  • No Profile
    MadHatter 16.04.02 21:56 댓글

    아이 마이 미 매임.. 아이와 즐겁게 놀고 싶은 마음과 풍진 세상에서 영어 공부라도 열심히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뒤섞인 것 같아서 슬프네요..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234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저승의 원칙(방패우주를 만들며) 니그라토 2016.06.14 0
2233 단편 물과 불과 얼음과 노래 ash 2016.06.08 0
2232 단편 서울의 영광 타조맨 2016.05.24 0
2231 단편 슬픔이 가능한 기한1 오후 2016.05.18 0
2230 단편 가축 납치 Mr.Nerd 2016.05.18 0
2229 단편 고스트와의 인터뷰 Gorda 2016.05.18 0
2228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징가용사표간의 욕망 니그라토 2016.05.01 0
2227 단편 영원회귀 하는 빅 리치 니그라토 2016.05.01 0
2226 단편 부자랏자 니그라토 2016.04.29 0
2225 단편 잠자는 네크로맨서 목이긴기린그림 2016.03.29 0
2224 단편 고백 MadHatter 2016.03.19 0
단편 아들에게1 바닐라된장 2016.03.18 0
2222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인신족과 666 니그라토 2016.03.15 0
2221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인간 동물원엔 영혼이 없다. 니그라토 2016.03.14 0
2220 단편 [심사제외] 인공지능과 인류의 최후 그리고 구원의 영웅2 치무쵸 2016.03.11 0
2219 단편 편독과 필사 송망희 2016.03.05 0
2218 단편 백일몽 별바리 2016.02.25 0
2217 단편 원 갓의 미래 니그라토 2016.02.25 0
2216 단편 사형 집행인의 FPS 니그라토 2016.02.23 0
2215 단편 그날 산 속에서 시간여행자를 만났어1 치무쵸 2016.02.20 0
Prev 1 ...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