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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최고의 결말

2016.02.14 14:1602.14

01. 이민아, 회상
 또다시 그 날이 가까이 다가왔다. 
 3년이나 지났지만,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머릿속에 영상이 생생하게 재생된다.

 - 너희들은 하나도 못 받았지? 불쌍하니까 내 거 나눠줄게. 아, 이건 내 거. 얘는 좀 예쁘더라. 

 그는 자신이 받은 초콜릿을 축구부원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그 와중에도 남겨진 초콜릿들은 있었고, 그 안에 내 초콜릿이 섞여 있었다. 

 - 야, 이건 왜 안 먹어?

 그가 남은 초콜릿들을 들어올린 채 말했다. 누군가 소리쳤다. 

 - 걔네들 걸 누가 먹어요 솔직히.

 터지는 폭소에 귀가 먹먹해졌다. 하긴 그렇지,라며 남은 초콜릿들을 밟아다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의 모습이 내 눈에 박혔다. 휘파람 소리가 먹먹한 귀 한가운데를 날카롭게 찔렀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속이 메스꺼웠다. 현기증이 났다. 
 화장실까지 어떻게 간 걸까, 기억이 안 난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물과 콧물, 위액을 변기에다 토해내고 있었다. 한참동안 속을 게운 뒤 천천히 세면대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얼굴이 토사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물을 틀어 흉한 얼굴을 지워내고 거울을 다시 보았다. 증오와 분노, 실망과 경멸이 뒤섞여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만이 보였다. 

 현서를 처음 만난 날도 그 날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현서가 손을 내밀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그 편지 보낸 사람이에요. 

 [5시 즈음에 축구부실로 가세요.]
 내가 축구부실에 가서 그 광경을 보도록 만든 편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02. 동아리방
 "요즘은 어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민아는 현서를 조용히 바라본다. 

 "모르는 척 할 생각 하지 마시고요."
 "언제나 생각하는 건데 너는 날 너무 잘 알아서 기분 나빠."

 민아는 웃으며 현서에게 말했다. 

 "걱정 마. 신경 안 써."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음,하며 민아는 잠시 고민한다. 

 "미안, 우리 친구로 계속 지내면 안 될까?"
 "그렇게 얼버무리는 거 보면 있긴 한가 보네요?"
 "너는 어때? 초콜릿 받고 싶은 사람 있어?"

 현서는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연다. 

 "아뇨, 없어요."
 "진짜? 선희가 준다고 해도?"
 "뜬금없이 걔가 왜 나와요."
 "아니, 그냥 '만약 얘가 초콜릿을 준다면 어떤 남자도 거절하지 않을 것 같다.' 하면 바로 떠오르는 애가 걔야."
 "일어나지 않을 일은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 혹시 모르잖아."

 민아가 능글맞게 말한다. 

 "걔가 누구 좋아하는 지 알고 있거든요."
 "진짜? 누군데?"
 "태원이요."
 "어떻게 알아? 너한테 말해줬어?"
 "말해줬다기보다는 제가 알아냈어요."
 "기분 나빠."
 "평소 행동에서 그렇게 티가 팍팍 나는데 도대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난 모르겠던데."
 "선배가 둔감한 거죠."

 민아가 현서를 째려본다. 현서는 시선을 무시한 채 노트북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린다. 민아는 시계를 보더니 가방을 챙긴다. 

 "언제쯤 집에 갈 거야?"
 "묘하게 잘 안 풀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이 부분만 조금 더 쓰다가 가려고요."
 "알았어. 내일 보자."
 "네."

 민아는 동아리방을 나간다. 동아리방에 혼자 남은 현서는 하품을 하며 팔을 쭉 편다. 

03. 이민아, 회상
 현서는 근처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갔다. 

 - 아무거나 시켜도 돼죠?

 누구 맘대로 그러냐,고 따질 힘도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저기 가서 앉아 계세요. 돈은 제가 다 낼게요.

 잠시 후 현서는 케이크 한 조각과 아메리카노 두 개를 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 케이크는 다 드시면 돼요. 

 현서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포크로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다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한 아몬드 향이 입안을 가득 매웠다. 날카롭게 서 있던 신경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현서는 바로 본제에 들어갔다. 

 - 선배 도움이 필요해요. 

 내 기분을 망쳐놓고서는 무슨 헛소리일까,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내 기분을 망쳐놓은 건 현서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꼈다. 

 - 저도 그 사람한테 개인적인 원한이 있거든요. 그래서 복수하고 싶은데, 선배가 있어야 제 작전이 완성돼요. 
 - 무슨 원한인데?

 무심코 그렇게 물어봤다. 아차,하는 생각보다는 괜히 그런 식으로 계속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니 편지 때문에 이런 꼴이 됐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아? 나는 현서를 노려봤다. 

 - 알려주기 전까지는 도와줄 생각도 없고, 결정도 들어보고 할 거야. 

 현서는 피곤하다는 듯 양 눈을 감은 채 턱에 손을 괴었다. 조금 생각하더니 왼쪽 눈을 살짝 떠 나를 쳐다봤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서 결국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 알려드릴게요. 

04. 복도
 "아침부터 시끌시끌하네요. 누가 공개 고백이라도 했나."

 현서가 자기 반 앞에 구름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한다. 

 "그러게. 무슨 일일까."
 "보러 가고 싶어요?"
 "응?"
 "궁금하면 보러 가야죠."
 "잠깐, 야. 멋대로 끌고 가지 마!"

 현서가 민아의 손목을 잡은 채 사람들을 뚫고 지나갔다. 민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애써 현서를 따라간다. 두 사람이 마침내 사람들을 뚫고 문 앞까지 도달하자 민아는 현서의 손을 뿌리치며 말한다. 

 "그렇게 막 끌고 가면."

 어떡해,라며 현서에게 화를 내려는 민아의 귀에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민아는 교실 안을 둘러본다. 쓰레기통 앞에서 울고 있는 선희, 그 주변을 둘러싸고 그녀를 위로하는 목소리. 선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현서와 민아를 향해 달려온다. 문 근처에서 그 장면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옆으로 몸을 피했다. 선희는 그대로 문 밖으로 뛰쳐 나갔다. 여자 몇 명이 선희를 따라 갔다. 

 "선배도 따라가 봐요."

 현서가 속삭이듯 말하며 등을 토닥인다. 민아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현서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희를 쫓아간다. 현서는 천천히 교실 안으로 들어가 쓰레기통 안을 본다. 
 그 안에는 선희가 만든 초콜릿이 있었다. 

05. 이민아, 회상
 현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선배랑 똑같이 그 사람을 좋아했죠. 그래서 좋아한다는 티를 안 냈어요. 저같은 애보다 그 사람이 훨씬 더 멋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사람이랑 사귀는 편이 더 나을 거다, 그러니까 바라보면서 응원만 해 주자. 

 헛소리. 그럴 거면 왜 좋아했는데? 

 - 좋아하는 상대를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마치 내 마음을 들여보고 있다는 듯 대답해서 깜짝 놀랐다. 기분 나빠. 

 - 저는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관 없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내가 원하는, 나의 행복과 그 사람의 행복이 서로 배치되는 거라면 내 행복을 포기하는 것. 그게 사랑이라고. 

 그리고 자조하듯이 웃는다. 

 -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걔가 울고 있더라고요. 짐작하셨겠지만, 선배가 봤던 그 장면을 똑같이 봤대요. 서럽게 우는 걸 어찌저찌 달래주고 집에 가서 생각했어요.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 내가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걸까.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 있죠. 

 커피를 다시 한 잔 마신 뒤 말한다. 

 - 바뀌기로 결심했어요. 그녀를 위한 복수는 그 결심이고, 첫 발자국이에요. 거기에 선배의 도움이 필요해요.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마치 싸구려 연애 만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인데, 내뱉는 말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묘하게 내 마음을 울렸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06. 최현서, Note

조건 1. 초콜릿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
조건 2. 굳이 쓰레기통에 버릴 만한 이유가 존재할 것. 

 이민아
 ① 3년 전 일이 트라우마
 ② 자신과 동질감을 느낄 상대를 만들기 위하여
 ③ 태원이 혹은 선희와 뭔가?

 하태원
 ① 굳이 쓰레기통에 넣은 이유를 찾아야 한다
 └선희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보내기 위해서?

 김선희
 ①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하기 위해서 
 └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받을 수 있다

07. 동아리방
 민아가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현서는 안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민아는 책상 한가운데에 오늘 아침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초콜릿이 놓여 있는 걸 보고 어떻게 저리 내 생각을 잘 알까,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선희는 어때요? 괜찮아졌어요?"

 현서는 초콜릿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럭저럭. 그래서 누군지 알겠어?"
 "아뇨. 그런데 적어도 태원이가 아닌 건 알 것 같아요."
 "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네 개 있어요."

 현서는 종이를 꺼내 적는다. 

 "첫 번째, 2월 13일 방과 후부터 2월 14일 아침까지, 범행 시간 사이의 알리바이. 두 번째, 선희의 초콜릿인 줄 알고 있었는가. 세 번째, 안 보이게 처리하면 사건 자체가 늦게 밝혀져 범인 입장에서 더욱 편리했을 텐데, 왜 굳이 보여주듯 쓰레기통에 버렸는가. 네 번째, 왜 초콜릿은커녕 박스에조차 아무런 흠집이 없는가."
 "어, 그래?"

 민아는 초콜릿을 살펴본다. 

 "네. 부수거나 던져 넣지는 않더라도 그냥 위에서 툭 떨어트려도 깨지기는 할 텐데, 멀쩡해요. 누가 일부러 쓰레기통 안에 고스란히 넣어둔 거예요."
 "진짜 그렇네. 왜?"
 "저도 잘 모르죠. 덤으로 태원이가 아닌 이유는 두 번째 때문이에요. 자기 책상 서랍 안에 초콜릿이 들어가 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초콜릿이 쓰레기통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태원이는 선희가 자기한테 초콜릿을 줄 거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초콜릿을 쓰레기통에 넣을 수는 없었어요."
 "저거에 딱 맞는 범인이 있긴 한 거야?"
 "그래서 전 외부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 같아요."
 "외부인?"
 "첫 번째, 알리바이는 넘어가고, 두 번째, 선희의 초콜릿인 줄 모른 채 그냥 보이는 초콜릿을 쓰레기통에 넣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모두 우리가 밝혀내야 하는 점이자, 가장 중요한 점이에요. 전부 동기와 관련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거잖아."
 "그렇죠. 추리 소설과 다르게 현실은 모든 증거가 아귀가 맞게 딱딱 튀어나오지 않아요. 어쩔 수 없어요. 일단 선희가 태원이가 한 짓이라 오해할 일은 없다는 데 만족해야 해요."

 민아의 어깨가 축 쳐진다. 현서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문다. 

 "미안해요. 원하시는 걸 준비하지 못해서."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지. 어쨌든 고마워."

08. 이민아, 회상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둘의 복수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 사람이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우리가 처음 이 일을 꾸미기 시작한 카페에서 만났다. 

 "최고네요."

 현서는 웃으며 헤이즐넛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현서가 그렇게까지 좋아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우리 이제 공범자 맞지?"
 "새삼스럽게 또 확인할 것까지야."
 "그러면 이제 나한테만 말해주라. 네가 좋아했다던 사람."
 "아, 그거요?"

 현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럽다는 듯이 말한다. 

 "미안해요.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09. 최현서, 방
 민아 선배가 원하는 결말을 준비하지 못한 점은 솔직히 미안하다. 하지만 내 소설은 안 된다. 반드시 모든 독자들이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 내야 한다. 
 솔직히 누가 범인이어도 이야기는 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최고의 묘사에 걸맞는 최고의 범인, 최고의 진상, 최고의 결말이다. 이런 묘사를 위해 일부러 초콜릿까지 쓰레기통에 넣었는데, 모든 것이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 어떤 결말이 가장 드라마틱하고, 충격적이고, 독자들에게 어필 가능할까. 나는 노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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