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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크로스로드

2016.01.10 13:4701.10

 

 

 

 

크로스로드

Crossroad

 

 민경일



  문이 열리고,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동양인 남성이 들어섰다. 건장한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그는 바텐더 앞자리에 앉았다. 캐시미어 코트 속으로 보이는 에메랄드색 넥타이. 사내는 검은 가죽장갑을 바 위에 포개놓고는 김 서린 안경을 닦아냈다. 강인한 턱선과 오뚝한 콧날, 그 위에 갈색 뿔테가 내려앉고서야 그는 바텐더를 불렀다.

 

  “위스키 좋은 거 있습니까? 싱글몰트로.”

 

  마른행주로 맥주잔을 닦던 제임스는 뒤편의 진열장에서 발베니 포트우드 21년산을 꺼내 들어 손님에게 보였다.

 

  “손님, 이게 여기서 드실 수 있는 최고급입니다.”

 

  “그걸로 하죠. 스트레이트로 하겠습니다.”

 

  제임스는 작은 잔을 내어 위스키를 따랐다. 마호가니 원목으로 이뤄진 실내의 짙은 적갈색을 품어 잔에 채워진 호박 빛은 더욱 짙게 느껴졌다. 수십 년의 흔적이 담긴 선술집의 푸근하면서도 중후한 깊이가 담긴.

 

  “손님,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제임스의 질문에 사내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연갈색 머리를 돋보이게 하는 청회색의 눈빛. 아래턱을 뒤덮은 단정한 수염. 바텐더다운 양팔을 걷어 올린 흰색셔츠 그리고 연회색의 헌팅캡과 정장 베스트. 사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댁도 여기서 바텐더를 할 정도로 늙어 보이지는 않소만.”

 

  뉴욕 브루클린 공장지대의 근로자들이 쉬어가던 시절부터, 화려한 카페들이 거리에 즐비하기까지, 술집 크로스로드는 그 자리를 몇 십 년 동안 지키던 곳이었다. 이제 30대 후반에 접어든 제임스는 그곳에서 보조로 일하다가 몇 년 전에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으니, 사내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내의 말에 제임스도 따라 웃었다.

 

  “손님, 오해하진 마십시오. 여기가 워낙 후미지기도 했고. 그저 오늘처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는 단골들도 집에 일찍 들어가거든요.”

 

  “그냥 오늘 좀 할 일이 있어서…….”

 

  “그럼, 시간을 보내러 오셨나 보군요?”


  제임스의 말에 사내는 끄덕이고는 술을 들이켰다. 만족스럽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사내는 말했다.

 

  “뭐 흥미로운 이야기 없습니까?”

 

  초면의 이방인이 재밌는 이야기를 갈구했다. 보통 정말로 심심하거나, 상념에 젖기 위해 배경처럼 틀어놓는 TV 잡음 따위가 필요하거나. 제임스는 무심하게 선반을 정리하고 있었다.

 

  “글쎄요. 옆 블록에 재담꾼이 운영하는 술집이 하나 있습니다만…….”

 

  사내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지갑에서 지폐 여러 장을 꺼내 바에 올려두고는 말했다.


  “이야기가 재미있다면 제가 저 술병을 모두 비우도록 하죠. 오늘 장사로 충분하실 겁니다.”

 

  사내의 눈빛에는 날려 보내야 할 슬픔도 무료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관은 금융계에서 일하는 고연봉의 사내처럼 멀끔해 보였지만, 무취의 꽃처럼, 회색의 광야에 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불쾌한 진지함이란. 제임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믿거나 말거나, 재작년 이맘때 즈음 손님을 떠올리게 하는 한 노인이 왔다 갔답니다. 생각해보니 날씨도 비슷했던 것 같군요.”

 

  사내는 흥미가 생겼는지 씩 웃었다.

 

  “저랑 닮았었습니까? 예를 들면 제가 늙는다면 그렇게 보일 거라든지…….”

 

  “전혀요. 이건 제가 사는 겁니다.”

 

  제임스는 사내의 빈 잔을 채웠다. 궂은 날씨에 방문해준 유일한 손님에 대한 호의였다.


  “아무튼, 지금 손님처럼 식상하게, 본인이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할 테니 재미있다고 생각된다면 가장 싸구려 위스키를 한 병 달라고 했었죠. 사실 장사를 하다보면 그런 손님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흔한 술주정뱅이로군요.”

 

  “글쎄요. 그럴 수도. 그는 대뜸 본인을 닥터 킴이라고 소개했었습니다.”

 

  닥터 킴은 눈보라가 몰아치던 밤, 지금 사내와 똑같은 자리에 앉았었다. 그 추운 날에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버버리코트에 중절모를 눌러쓴 그는 예순이 훌쩍 넘어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차분하게 뒤로 넘긴, 행동부터 어투까지 전형적인 신사였다. 인종차별적 발상이라기보다는 크로스로드에 방문한 몇 안 되는 동양인이었기에 제임스는 그날의 유일한 손님을 세세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요?”

 

  “그 사람은 싸구려 위스키를 한잔 비우더니 제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느냐고 물었죠.”

 

  사내는 코웃음 쳤다.

 

  “뻔한 레퍼토리군요.”

 

  “글쎄요. 그건 손님에게 달렸을지도 모르죠.”

 

  사내가 제임스의 눈치를 힐끗 살피자, 제임스는 태연히 웃으며 본인의 술잔을 채웠다. 그때 그날처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닥터 킴이 묻자 제임스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뻔한 이야기군요.”

 

  “글쎄요. 그건 여기 주인장에게 달렸을지도 모릅니다. 재밌게도 이 이야기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정확하게는 당신의 딸에 대해서 말입니다. 곧 아기가 생길 겁니다. 아주 건강하고 소중한 아이……

 

  제임스가 피식 웃자 닥터 킴은 기다린 반응이라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서 볼로 이어지는 굵은 주름살들이 미소와 매우 잘 어울렸다.

 

  “이런, 농담이 과하시군요. 제가 기혼인건 맞습니다만, 아직 애는 없거든요. 그리고.”


  닥터 킴이 말을 잘랐다.

 

  “지독한 난임이군요. 그렇죠?”

 

  제임스는 멈칫했지만, 둘은 허공에 건배를 날리고는 술잔을 비웠다. 애주가들은 이 세상에 나쁜 위스키는 없다, 더 좋은 위스키만 있을 뿐이다.” 라고 하지만, 제임스는 헛기침에 거친 알코올 향을 날려 보냈다.

 

  “아무튼 제가 딸을 갖는다는 이야기군요.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그건 저도 바라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서 어떻게 재미난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더더욱 사양하겠습니다.”

 

  제임스는 입술에 묻은 위스키를 훔치며 말했다.

 

  “다시 말해, 게임오버라는 말입니다.”


  “근본의 궤를 같이할 수는 있겠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갑자기 돌풍과 함께 문이 덜컥 열렸다. 오래된 창문으로 눈보라가 따갑게 부딪치고. 제임스는 고심 끝에 영업종료 간판을 내걸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닥터 킴에게는 뒷문으로 나가면 된다고 했다. 이야기가 끝나면 닥터 킴과 함께 퇴근할 요량이었다.

 

  닥터 킴은 말했다.


  “나는 인생이란 무얼 즐기고 싶은지에 대한 선택보다, 그 이면의 고통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표현했지만, 알고 싶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그렇죠.”

 

  “마치 당신이 핀치의 술집을 인수해서 운영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임스는 또 한 번 흠칫했다. 수십 년 세월의 크로스로드를 지켜온 핀치는 건강 문제로 조수였던 제임스에게 아주 좋은 조건에 술집을 인계했다. 둘은 우연히 만났지만 핀치는 제임스를 막냇동생처럼 챙겨줬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핀치가 동양인 신사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사람일지도.

 

  제임스는 조심스레 말했다.

 

  “핀치를 아신다니 꽤 오랜 손님이시군요?”

 

  “그렇다고 합시다. 그럼,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주인장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뭐 누구나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번에 어떤 손님은 과학기술이 조만간에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줄 거라고 하더군요. 손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우리 모두 죽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고 싶군요.”

 

  “그럼 누군가는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신지.”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필멸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새 삶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두 번째 삶이든 세 번째 삶이든 말입니다…….”

 

  제임스의 이야기를 듣던 사내는 말했다.

 

  “환생이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군요.”

 

  제임스는 씩 웃었다.

 

  “비슷했죠. 하지만 뭐랄까, 솔직히 지금까지도 잘 믿기지는 않지만 흥미로웠다고나 할까요……..”

 

  뜸을 들이던 닥터 킴은 말했다.

 

  “중요한 점은 그 과정이 아주 오래 걸린다는 점입니다. 섭리를 따르면 말이에요. 하지만 몇 가지 속임수로 말미암아 죽자마자 새 삶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전생의 기억도 그대로 기억하고. 믿어집니까?”

 

  닥터 킴과 제임스는 두 번째 잔을 비웠다. 제임스는 독주의 향기를 내쉬기 바빴으나 닥터 킴은 물을 마시듯 차분해 보였다.

 

  제임스는 솔직히 윤회는 진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영혼은 죽지 아니하며 새로운 삶을 얻는다. 십수 년 전에 드라마에도 나왔었고, 소설책으로도 읽었으며, 심지어 핀치에게도 지겹게 이야기를 들었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특별한 종교가 없어서인지, 핀치는 다음 생에는 완벽하게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줄곧 말했었다. 그곳에서 어떤 존재가 되던 선량하게 살고 싶다고. 아니면 영혼 따위 없이 정말로 무로 사라지고 싶다고. 핀치가 가계를 인계하며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그는 내게 무척 고마워했었다. 아마 연고가 없어서 그랬겠지만 내 덕분에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며, 특히나 더.

 

  제임스는 말했다.

 

  “그럼 지금 앞에 앉아계신 분께서는 그 비법을 아시나 보군요? 2천살쯤 되시는지?”

 

  “글쎄요.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SF를 좋아합니까?”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SF를 좋아한다고 하니 짐작은 하겠지만, 우주는 하나가 아닙니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계속 생겨나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어떤 우주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그것의 에너지며 자원이 조금 더 풍족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나라에서만 석유가 나는 것처럼.”

 

  “그래서요?”

 

  “예를 들면 9개의 우주가 복제된 마냥 탄생해 그 속에서 같은 시간에, 동일한 문명이 탄생했더라도, 어떤 우주에는 석기시대를 지나고 있을 때 또 다른 우주에서는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확률적으로 말입니다.”

 

  닥터 킴은 코트에서 수첩을 꺼냈다. 작지만 검고 단단해 보이는 수첩.

 

  “그런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인간이 과학기술로 영생을 꾸려내기 전에, 우리의 삶과 죽음을 밝혀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1차원의 존재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사내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천국이나 신이라도 찾았다는 듯 말하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비슷하게 물어봤었죠……..”

 

  제임스는 비꼬는 어조로 닥터 킴에게 말했다.

 

  “그럼 신이라도 찾았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작동 원리의 일부를 파악한 것이죠. 정확하게는 그것을 알아내려 했다기보다는, 평소처럼 걷던 길에서 부딪힌 돌부리가 유독 눈에 띄어 손에 들고 보니 그것이 알고 보니 화강암이라는 것을 인지하듯, 그렇게 우연히 말입니다.”

 

  닥터 킴은 조용히 수첩을 매만졌다.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듯 빳빳한 수첩의 날을 더듬으며 그는 말했다.

 

  “우리는 차원이동에 성공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영겁을 거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닌, 그 즉시 다른 차원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적하는 방법까지. 한 가지 과학적 사실이 물꼬를 터 모든 게 너무나도 빠르게 밝.”

 

  “이런 어르신,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신게 아닌지.”

 

  제임스의 능청스러운 표정에 닥터 킴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런 상상들이 진실에 다가가는 원동력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세 번째 잔을 비웠다.

 

  “이보시오, 주인장. 그런데 그런 엄청난 사실을 대중들은 전혀 모르고, 오로지 딱 1개의 회사가 그 작업을 독점한다고 하면 믿어집니까?”

 

  “정부와 국민은 그럼 바보입니까?”

 

  닥터킴의 목덜미는 붉게 달아올랐다. 술기운이 올라서일까. 상념에 젖은 듯했던 그는 곧 씩 웃고는 말했다.

 

  “아무튼 그들은 여행이 가능한 우주, 정확하게는 우리가 환생하게 되는 차원을 발견할 때마다 번호를 붙이기 시작했고, 여기는 9번째 차원입니다. 제임스.”

 

  아주 진지한 닥터 킴을 지켜보며 수염이 까슬한 턱을 매만지던 제임스는 키득거리다가 이내 박장대소했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듯 한 손을 공중에 휘저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못해 닥터 킴을 비꼬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제임스는 웃음을 참고 힘겹게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 앉아계신 닥터 킴께서는 한 2천 살쯤 되고, 영생의 비기를 알고 있으며, 차원 이동으로 9번째 우주에 볼일이 있어서 오셨다고요?”

 

  “제임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번째냐가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ID가 몇 번인지.”

 

  “아이고, 알겠습니다. 알았어.”

 

  제임스는 등을 돌려 선반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찌 알고 있을까. 핀치가 알려주었을까 하는 참이었다. 닥터 킴은 수첩을 집어 들고 아주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모건, 시퀀스 넘버 382. ID넘버 38626.”

 

  닥터 킴이 숫자를 읊어 내려가자 제임스는 말을 끊었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잠깐 수첩 좀 봅시다.”

 

  “그러시든지.”

 

  닥터 킴이 건넨 수첩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역시나 싶었는지 제임스는 너털웃음을 치고는 선반에서 싸구려 위스키 한 병을 꺼내들었다.

 

  “아이고 아주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식상한 소재였지만 접근법이 나쁘지 않았으니, 자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핀치를 찾는 손님이 왔으니 드리기도 하는 겁니다. 핀치는 은퇴하고서 가게엔 나오지 않으니까, 혹시 전할 말 있으시면 남겨두시죠.”

 

  닥터 킴은 수첩을 돌려받고는 다시 뒤적거리다 말했다.

 

  “에드워드 모건, 공장 근로자. 1952년에서 2013년 교통사고로 사망. 사만사 모건, 카페 종업원. 1958년에서 1978211일 제임스 모건을 출산하다 사망.”

 

  뒤돌아서 선반을 정리하던 제임스의 손이 멈췄다.

 

  “레이챌 모건, 파티 플래너. 1980년에서 201974일 괴한에게 총격.”

 

  제임스는 한껏 격앙된 어조로,

 

  “이봐요, 어르신. 말조심하쇼. 함부로 나불댔다가는.”

 

  “주먹이라도 날리시겠다?”

 

  “아니, 이 사람이!”

 

  제임스가 몸을 돌려 닥터 킴의 멱살을 잡으려 팔을 뻗었을 때, 닥터 킴은 코트 안쪽에서 리볼버 권총을 꺼내들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는 듯 총구를 까딱였다. 두 손바닥을 보이며 물러선 제임스가 슬그머니 손을 내리려고 하자, 닥터 킴은 엄지손가락으로 권총의 해머를 젖혔다. 찰칵.

 

  “제임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그 오른손이 샷건을 집어 올리기에는 너무나도 먼 여정이 될 테니까. 알아들었습니까?”

 

  제임스는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는 그저 이야기를 마치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이건 모두 예정된 일이에요. 마치 핀치가 당신에게 크로스로드를 헐값에 넘긴 것처럼. 이야기를 믿거나 말거나 결국 그건 당신 몫이 되겠지만, 지금은 내가 총을 거두면 원래대로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겁니다. 어떠신지?”

 

  제임스가 다시 한 번 끄덕이자 닥터 킴은 말했다.

 

  “아주 고맙소.”

 

  닥터 킴은 권총의 해머를 원상태로 돌리고는 권총을 바 위에 올려두었다. 제임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로챌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는 떨떠름하게 서 있기로 했다.

 

  한동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닥터 킴은 읊조리듯 말했다.

 

  “나는 차원의 추적자요. 한 회사의 직원이자, 비밀 학술단체의 회원이기도 하며, 여러 종교의 집행자이기도 하지. 아홉 번째 차원에서 머문 지난 수천 년 동안, 나는 내 일이 옳다고 믿었었지.”

 

  닥터 킴은 싸구려 위스키병을 집어 잔을 채우고는 바로 한잔 들이켰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듯했다.

 

  “아니, 믿어야만 그렇게 했지. 1차원에서 사랑하던 가족들을 뒤로 한 채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 나는 영겁의 저주에 뛰어든 게지. 그런데 어느 날, 선택 받은 소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 썩어 빠진 나의 운명을 벗어 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거야.”

 

  닥터 킴은 그제야 제임스가 뻣뻣하게 굳은 채 서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안한 듯 웃었다.

 

  “이런, 제임스. 미안하게 됐소이다. 내가 좀 피곤했나 보군.”

 

  양팔을 끼고 닥터 킴을 노려보던 제임스는 여전히 심드렁해 보였다. 닥터 킴이 술잔을 채워 그에게 권하자, 제임스는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잔을 비웠다.

 

  “제임스, 당신은 두 번째 기회를 믿습니까? 윤회의 선상에 놓인 그런 것 말고. 온전히 내가 내린 결정으로만 채울 수 있는 그런 것.”

 

  “그냥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쇼.”

 

  “당신의 딸이 내게는 두 번째 기회이자 내가 속죄할 방법이라고 한다면, 나를 지금처럼 정신병자 취급 할 겁니까?”

 

  제임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번에는 영감보다 내 손이 빠를 거요.”

 

  닥터 킴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당신의 소중한 딸은 아주 특별한 ID 번호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정확하게는 번호를 알아낼 수가 없었지요. 혹시 너무나도 귀한 딸이라 번호가 없는 건지, 도통 그 정체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오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게 해결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정체도 모르는데 딸이 태어날 것은 어떻게 알았다는 말입니까. 순 엉터리 영감 같으.”

 

  “핀치.”

 

  제임스는 에? 하며 의아해 했다.

 

  “핀치는 나와 같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아이작 핀치 콜린스. 그와 친분이 없다면 미들네임인 핀치를 알 턱이 없었다. 핀치는 닥터 킴의 사수로서 오랜 세월 함께했다. 계약기간을 모두 이행한 그는 아홉 번째 차원을 선택했고, 평범한 집안에서 새로이 태어났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을까, 예전의 기억이 깨어나면서 그는 닥터 킴을 찾아갔다.

 

  예상치 못한 일에 두 사람은 규칙의 오작동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핀치의 엉성한 환영을 따라 탐색이 이어졌고, 두 사람의 움직임이 회사에 탄로 날 뻔도 했었지만, 작은 성과들과 함께 핀치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원인이나 그 과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이 마지막 생애일 것이라는,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것만 같은 느낌. 핀치가 이 사실을 닥터 킴에게 털어놨을 때, 과학과 미스터리의 경계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이었을까, 닥터 킴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핀치의 환영은 뉴욕 브루클린 한 골목에서 막을 내렸다. 환영 속 핀치는 크로스로드라는 선술집을 운영했고, 어느 날 제임스라는 직원을 고용했으며, 그 직원은 그곳에서 아내 레이첼을 만나 결혼을 했다. 핀치의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술집을 제임스에게 인수하고는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환영은 거기서 끝나지만 핀치는 또 한 번의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제임스가 난임으로 자식을 갖지 못할 것 같은, 하지만 자식을 갖는다면 그것은 딸일 것이며, 그녀는 전 우주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것.

 

  핀치와 닥터 킴은 그 환영대로 세월을 보냈다. 술집을 열자 제임스가 나타났으며, 손님으로 만난 레이첼과 실제로 결혼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핀치는 나머지 부분을 닥터 킴에게 맡겼다. 비록 과학으로 알게 된 우주의 규칙이었지만 핀치에게 일어난 알 수 없는 일처럼, 지금 이 모든 것이 이유가 있기 때문에 자기 앞에 놓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임스 부부의 딸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제임스는 말했다.

 

  “에이, 핀치는 지금 유럽여행 하면서 잘 지내는걸요. 엽서도 가끔 옵니다. 몇 주 전에 통화도 했고.”

 

  “, 그거? 독일 밤베르크에서 훈제 맥주를 마셨다는 엽서? 아니면 프랑스 니스에서 해지는 해변이 아름다웠다는 전화 말인가? 모두 핀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럼 핀치는…….”

 

  “그는 죽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진실된 죽음을 맞이한 사람.”

 

  핀치가 진정한 은퇴를 하고나서, 닥터 킴은 제임스와 그의 가족을 지키며 딸이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수첩을 뒤져도 그녀의 번호가 뜨지 않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닥터 킴은 점점 다급해 졌다. 곧 그는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이 태어난다면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까지 십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닥터 킴은 추적자의 기본 규칙을 무시하고 수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확률의 장막을 수없이 벗겨내어,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아냈다. 아마도 그녀는 번호가 자체가 없다는 것. 하지만 그 확률적인 존재는 가늠할 수 있다는 것. 다행히도 조만간에 그녀는 존재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회사로 부터 불법적 검색에 대해 징계 받을 것이 뻔했지만, 닥터 킴은 희망을 품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중을 위해 수첩에 약간의 장난질을 해놓았다. 닥터 킴은 바 위에 놓인 권총과 수첩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떤 물건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법입니다. 이것은 보통 권총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존재를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내는 무기라고나 할까요. 총알이 들지 않았지만, 필요할 때 격발될 것입니다. 조만간에 필요하게 될 테니 받아주십시오.”

 

  닥터 킴은 권총을 집어 들어 리볼버에 총알이 없음을 보여줬다. 아주 익숙하게 연뿌리 모양의 실린더를 드르르륵 돌리고는 손목 스냅으로 실린더를 재결합시키자 찰칵하는 믿음직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가 입술 양 끝을 매만지며 주저하자 닥터 킴은 권총을 제임스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권총. 그것은 아주 평범한 리볼버 권총이었다.

 

  “그리고 수첩은 비록 내 것이지만, 내가 추측하고 믿는 바가 맞는다면 언젠가 그대에게도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꼭 따님에게 물려주십시오. 이게 내가 여기 온 이유입니다.”

 

  “저기, 권총은 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수첩은 저기 책꽂이에 꽂아두죠. 만약 진짜로 딸이 태어난다면 댁이 다시 와서 전해주시든가 하세요…….”

 

  이야기를 듣던 사내는 물었다.

 

  “정말로 권총을 돌려줬습니까?”

 

  “그럼요. 술집에 무기가 많아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믿음직한 샷건과 야구 방방이 정도면 되죠. 그리고 딱히 털어갈 것도 없어요.”

 

  “, 아쉽네요. 진짜인지 한번 보고 싶었는데…….”

 

  사내의 말에 제임스는 씩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댁이 와서 직접 딸에게 주면 안 되느냐. 하지만 닥터 킴은 말했다.

 

  “나는 곧 떠납니다. 다음 생으로. 만약 내 기억이 온전하다면 그리고 이 차원에 계속 머물게 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기약하기는 힘들겠습니다.”

 

  “얄궂은 운명이로군요.”

 

  닥터 킴은 끄덕였다.

 

  “제임스, 책을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딸을 소중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키워주십시오. 굳이 내가 당부하지 않더라도 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키워낼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선반 끄트머리에는 크기도 두께도 제각각인 책들이 대충 정리되어 있었다. 제임스는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닥터 킴, 아무튼 재미난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저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많은 손님이 바에 물건을 기증하고 가시거든요. 책은 특히나. 그 수첩은 저기 꽂아둘 테니 다음에 또 들려주십시오. 딸이든 아들이든 내 팔자요 내 새끼니 괜한 오지랖은 접어두시고.”

 

  “그럼, 그러시던지.”

 

  닥터 킴은 일어서서 코트를 매만졌다.

 

  “닥터 킴, 5분만 있다가 같이 나가시죠. 정리 조금만 하고.”

 

  “나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서. 뒷문으로 나가면 된다고 했습니까?”

 

  제임스는 닥터 킴의 눈을 천천히 바라봤다. 아쉬운 마음에 손을 내밀고, 닥터 킴은 흔쾌히 악수했다. 중절모를 눌러쓴 닥터 킴은 느릿한 걸음으로 뒷문으로 사라졌다. 덜커덕거리는 문소리가 들리고, 크로스로드는 아주 조용해졌다. 그때 제임스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 여보. 무슨 일이야.”

 

  “제임스, 나 임신한 것 같아. 임신테스트를 두 번이나 했는데 두 번 다 줄이 두 개지 뭐야.”

 

  제임스는 순간 멍했다.

 

  “제임스? 듣고 있는 거야? 우리 저번에 이야기했듯이, 지금 임신은 매우 곤란해. 비록 나도 노산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곧 지역 매니저로 승진할 텐데 지금 임신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오랫동안 노력하기는 했지만, 당신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

 

  제임스는 정신을 차리고는 속사포처럼 말했다.

 

  “레이첼, 우리는 그 딸을 꼭 낳아야만 해. 꼭 낳을 거야.”

 

  “무슨 말이야. 왜 꼭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딸이라니…….”

 

  “아무튼, 내가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제임스는 뒷문으로 뛰쳐나갔다.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는 바람이 잦아들어 어느덧 함박눈으로서 천천히 쌓이고 있었다. 부디 닥터 킴이 멀리 가지 않았길 바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역시 느린 걸음걸이대로 닥터 킴은 옆쪽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임스는 뛰었다.

 

  “닥터 킴!”

 

  함박눈이 소리를 머금는 듯 제임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신호등이 곧 푸른색으로 바뀌고, 닥터 킴은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닥터 킴!”

 

  그제야 목소리가 들렸는지 닥터 킴은 뒤를 돌아봤다. 10초면 닫을 거리, 제임스가 이야기 좀 하자고 외쳤다. 닥터 킴은 구세주의 잉태를 직감하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닥터 킴!”

 

  그 순간 묵직한 경적 소리와 함께 트럭이 닥터 킴을 밀고 지나가고, 급브레이크를 밟은 트럭은 그것의 관성에 휘청거리며 급정거했다. 굉음 후에 밀려온 적막. 반짝거리는 주홍빛 신호등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속삭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에 제임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입김을 뿜어낼 따름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사내는 물었다.

 

  “어이쿠, 그럼 그 닥터 킴이란 사람은 죽었습니까?”

 

  “, 그런 트럭에 치였는데 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급정거한 트럭 쪽으로 갔는데 시체는 사라지고 없더군요.”

 

  “정말인가요?”

 

  “그럼요. 믿는 것은 손님 자유겠지만요. 오히려 트럭 운전기사가 많이 다쳐서 병원으로 후송됐고, 저는 목격자 진술을 한 걸요. 시체 따위는 없었고요.”

 

  “그리고 그 아기는 정말로 생겼나요? 딸아이 말이에요.”

 

  “그럼요. 정말로 그때 임신을 했고 실제로 딸 아이였답니다.”

 

  제임스는 선반 중앙에 있는 작은 액자를 보여줬다. 레이첼이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

 

  제임스는 말했다.

 

  “아내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지금은 축복이라며 애기를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랍니다.”

 

  사내는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고, 얼굴에는 느리게 미소가 번져갔다.

 

  “아주 끝내주는 이야기군요. 지나가다 들린 술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요. 한 편의 영화 같다고 할까요? 내기에서 이기셨으니, 이 돈이면 위스키 한 병값 이상은 할 겁니다.”

 

  제임스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폐를 챙겼다.

 

  “그나저나 바텐더 양반. 혹시 그 책을 볼 수 있습니까? 정말로 책장에 꽂아두셨는지?”

 

  제임스는 선반 끝을 가리켰다.

 

  “저기 있으니까 한번 꺼내 보시던지요. 표지가 검은 가죽으로 된 작은 수첩입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거든요. 아주 실망하실 수도.”

 

  제임스의 말에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넥타이를 만지고, 코트를 추스르고, 가죽장갑을 꼈다. 이야기가 정말로 만족스러웠는지 사내는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흔쾌히 끄덕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가죽장갑을 손에 꼭 맞게 끼고는 좀 더 똑 부러진 어조로 말했다.

 

  “이거 영 취기가 올라서, 남은 술은 보관해야겠군요. 명함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명함을 꺼내기 위해 코트에 손을 넣었을 때 찰카닥하는 소리가 났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제임스가 겨눈 총구를 눈앞에 마주했다. 사내는 두 손을 급히 치켜들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 왜 이러십니까.”

 

  제임스는 리볼버 권총의 해머를 당겼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여긴 왜 온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 저는 평범한 주식 트레이더일 뿐, 지나가는 길에 눈보라 좀 피하려고 들어온걸요. , , 총 좀 치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 나도 평범한 애 아빠다. 내가 한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이었어. 총을 보관했다는 것만 빼고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 , 지갑에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대 신고 안할게요. 그냥 보내만 주십시오. 제발…….”

 

  단정한 옷매무새와 우월감으로 충만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내는 움츠러든 어깨를 파르르 떨면서 시선을 바닥에 깔았다.

 

  “제발…….”

 

  사내를 지켜보던 제임스는 문득 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로 평범한 손님인지도 몰랐다. 아랫입술 안쪽을 살포시 깨물며 집중력이 흐려진 바로 그때였다.


  잔뜩 움츠렸던 사내는 순간 양손으로 총구와 제임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면서 바 위에 놓였던 술병과 잔이 바닥으로 밀려 떨어졌다. 이빨을 드러낸 사내는 주먹으로 제임스의 얼굴을 힘껏 치고,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균형에 제임스의 권총은 바 안쪽으로 튕겨 선반 아래쪽으로 떨어져 버렸다. 사내가 품에서 뽑아든 자동 권총의 총구는 쉼 없이 제임스를 향해 화염을 내뿜고, 잽싸게 몸을 숨긴 제임스에게로 깨진 유리병들이 와장창 쏟아져 내렸다.

 

  호기 있게 한숨을 내쉰 사내는 아까처럼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임스, 제발…….”

 

  사내는 날렵하게 탄창을 갈아 끼고 재장전했다. 넥타이 단추를 느슨하게 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제에--스으-.”


  사내가 껑충 뛰어 바 위로 올라서자, 제임스는 야구 방망이를 집어 들고 사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꾸라진 사내는 바 앞쪽에 정돈해둔 유리잔 위로 쓰러지고, 방망이로 손목을 후려치자 사내의 권총이 바 구석으로 튕겨져 사라졌다. 제임스가 다시 야구 방망이를 힘껏 치켜든 순간 사내는 오른발로 제임스의 옆구리를 차내고, 헉헉거리는 제임스를 향해 앞차기를 날렸다. 앞차기를 정통으로 맞은 제임스는 뒤로 쓰러지고, 선반에 진열되어 있던 술병 그리고 유리조각들이 우당탕 쏟아져 내렸다.

 

  구두 굽에 유리파편이 밝혀 부스럭 소리가 나고, 사내가 제임스의 야구 방망이를 집어 들고 다가가자 제임스는 등을 돌려 안간힘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힘껏 제임스의 등을 방망이로 후려치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제임스는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헉헉거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 모습은 본 사내는 미소 지으며 턱을 풀고는, 방망이를 입구 쪽으로 내던졌다.

 

  “아무튼 그놈의 닥터 킴이 문제라니까.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제임스 네놈을 찾아내는데 어찌나 오래 걸렸는지 아나? 이번 생에는 지랄이 풍년이라니까.”

 

  사내는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서 단정히 바 위에 올려두고, 넥타이를 고쳐 매고는 우월함을 충전하듯 어깨를 반듯이 폈다. 홀가분하게 심호흡도 했다.

 

  “제임스, 이만하면 됐어. 다음 생에는 좀 더 평범하고 고분고분하게 살라고, 친구. 고분고분하게.”

 

  사내가 가죽장갑을 고쳐 끼고 제임스의 등을 붙잡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

 

  사내는 믿기지 않는 듯 한동안 서 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가슴에서 핏물이 배어나고, 바에 기대앉은 그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이봐, 제임스…….”

 

  제임스는 난장판이 된 선반을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섰다. 입술에 뭍은 피를 훔쳐내고, 옆구리를 부여잡고는 절뚝거리며 사내 앞에 섰다. 이번에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총구를 사내에게 겨누었다.

 

  사내는 말했다.

 

  “우리가 두렵지 않나, 제임스…….”

 

  사내는 피를 토했다. 고단한 눈빛으로 제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당신을 찾아낼 거야, 당신의 그 딸은 죽, 죽어야만 해. 그게 우주의 섭리니까…….”

 

  제임스는 아무 말 없이 사내의 가슴에 두 발의 총알을 박았다. 사내의 흉곽이 내려앉자 시체는 미약한 푸른빛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숨을 길게 내쉰 제임스는 선반 위편에 압정으로 박아둔 폴라로이드 사진을 바라봤다. 그동안 핀치와의 추억들. 크로스로드라는 이름이 유독 마음에 드는 순간, 손에든 권총은 어느덧 세련된 글록 자동권총으로 변해있었다. 탄창을 꺼내 보니 역시나 총알은 없었다. 제임스는 지금 현실이 허탈한 듯 가볍게 웃었다.

 

  힘겹게 뒷방으로 걸음을 옮긴 제임스는 사물함을 열었다. 헌팅캡과 베스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가죽 재킷과 코트를 입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매일같이 들여다보던 백지에서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해할 수 는 없었지만, 제임스는 수첩에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거뭇한 흐름이 추적자들로부터 가족을 지켜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닥터 킴이 지금 이 차원의 싱가포르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는 무척 반가웠는지 본인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제임스는 핸드폰을 꺼내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넘어로 레이첼의 고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임스. 이제 막 스텔라는 잠들었어. 일찍 퇴근한다고?”

 

  “당신이 내 이야기를 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도 확신이 없었던 일인데, 오늘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꿀 새로운 이야기가 막 시작됐다고나 할까.”

 

  레이첼이 싱겁다는 듯 피식 웃고는 말했다.

 

  “으이그, 나는 우리 딸 스텔라만으로 충분하네요.”

 

  “나도.”

 

  제임스는 미소 지었다.

 

  “레이첼, 아무튼 나를 믿어줄 거지?”

 

  수화기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흥, 알았으니까 어서 오기나 해.”

 

  전화를 끊고 제임스는 크로스로드 실내를 한번 둘러보았다. 비록 엉망이 되었지만,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두꺼비집을 내리고 뒷문을 단단히 잠갔다.

 

  크로스로드에서 발을 내딛은 그날, 눈보라는 어느덧 함박눈이 되어 길가에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끝.

m98st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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