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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검은 벽

2015.11.08 00:5211.08

해가 조금 짧아졌다. 조금이라고 할까, 해를 본 지가 오래 되었다.
낮에는 형광등 아래에서 시간을 채우고 밤에는 노란 백열등, 혹은 엘이디 아래에서. 네온사인같이 화려한 것은 차마 쳐다보지 못한다. 나 같이 수수한 사람과는 맞지 않는다고 할까. 그냥 동네가 오래됐다고도 한다.
솔직히 조금 과장된 표현이다. 일하는 도중 잠시 시간을 내서 햇빛이야 볼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다란 말이지. 일주일에 5분만 쬐면 영양에는 문제가 없다고도 하더라만.
아무튼 가로등 아래, 노랗게 물든 길을 따라 걷는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길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기숙사를 향해 걷다 보면 별의별 것이 다 보인다. 30년 묵은 마녀, 사람 잡아먹는 폐가,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골목, 꼴도 보기 싫은 나 대리 등등. 마지막 것은 꽤 흔하게 보이는데 보고 나면 속이 쓰리다.
아직 20대인 주제에 머리나 벗겨지고 말이지. 벗겨진 정도는 미묘하지만 틀림없이 벗겨지고 있다. 얼굴과 머리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쳇.
그리고 또 하나 묘한 것이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선망하고 바라고 동경하고 우러러보는 것.
미묘하게 밝아서 기분 나쁜 와중에, 특히 나 대리의 이마에서 비치는 빛이 기분 나쁜 와중에 유일하게 내 마음에 위안이 되는 완전한 어둠. 검은 벽.
검은 벽은 꿈틀거리는 다리를 지나, 악마의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한 뒤, 마녀와 인사하고 적당히 먹이를 던져준 뒤, 원혼이 잠자는 수풀을 지나 나오는 벤치에서 지친 발목을 쉬어주고 10분을 더 걸어가면 나오는 조명가게와 공구점 사이 골목, 바로 거기에 있다.

꿈틀거리는 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뱃사람의 위대함을 느낀다. 단단한 바닥이란 것, 중력과 흙, 대지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낡아서 흔들리다 못해 꿈틀거리는 다리를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그 생각은 모두 날아가고 내 몸을 의자에 짓누르고 있는 중력 죽어라, 애초에 땅이 있어서 이 고통이 시작된 것이니 이 대지도 모두, 아예 지구가 망해버려라, 우주 만만세다. 싶어진다.
그래, 우주다. 바닥이 없는 하늘도 없는 공간에 둥둥 떠서 지내는, 인류는 그곳에 가야 한다. 끝없는 공간, 끝없는 어둠을 느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검은 벽에 가고 싶다. 파묻히고 싶다.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거기에 이미 모든 것이 있는데.
“야, 일월아.”                                                                                                                                                                                                               나를 부르는 소리에 이 과장의 자리로 뛰어간다. 언제나와 같이 짧고 간결한 지시와 길고 별 쓸모없는 잔소리를 듣고 내 자지로 돌아왔다.
나는 제품을 설계한다. 판타지로 치면 마법사다. 내가 마법진을 열심히 그려 놓으면 현장에서 그걸 보고 재료와 여러 공정으로 제품을 만들어 낸다.
내가 지금 긋고 있는, 검은 바탕에 흔적을 남기는 초록선이 조금만 어긋나도 잘못된 제품이 나온다. 그렇게나 중요하니까 내가 이 과장에게 불려가 잔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하려 한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열 받으니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그려대는 이 선에 그런 의미라도 부여하지 않으면 너무 싫으니까.
역시 검은 벽에 들어가고 싶다. 그 외의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읊조리며 다시 선을 긋기 시작한다. 슬프지만 결국 일은 해야 하니까.
선을 긋다가 모르는 게 생기면 이 과장에게 묻고 잔소리를 듣고 다시 그리고 이 과장이 부르고 잔소리를 듣고 다시 그리고. 오늘은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를 보냈다.                                                                                                                   

아무래도 별 계획 없이 꾸역꾸역 공장들이 들어온 탓인 것 같은데, 우리 회사에서 큰길로 나가는 곳까지는 가로등이 없다.
가로등이 없는 길을 조심해서 나아간다. 가로등이 없다고 해서 완전히 어두운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비치는 빛으로 어떻게든 길의 윤곽은 볼 수 있다.
나도 그리 일찍 나온 것은 아닌데 아직도 이렇게나 환하게 걸을 수 있다니 기분이 묘하다. 구직할 때는 상상도 못 했다. 공고란을 보면 기껏해야 정규 퇴근 시간이 7시라고 하는 정도니까. 정시 퇴근이 7시인데 8시에 더 큰 퇴근 버스를 운행한다거나 아예 철야를 하고 다음 날 퇴근한다거나, 그런 일은 상상도 못 했다고.
그렇게 일하고 집에 가면 억울해서 잠은 올지 모르겠다. 참고로 난 잘 못 잔다.
그렇다고 야근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다. 추가수당도 안 주고 잠이 와 죽을 것 같지만 대신 검은 벽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정말 좋다.
슬슬 걸어서 조명가게까지 왔다. 골목 너머로 고개만 내밀어도 볼 수 있지만, 마음가짐이라고 할까. 제대로 길 중앙으로 걸어가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마음을 경건하게 숨을 고르게 하고 살짝 눈을 감은 뒤, 기대를 하고 골목 너머를 본다. 보이는 것은 어둠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야 할 거리에 이물질이 보였다.
30년 묵은 마녀다. 맨발에 소리를 내지 않고 걷다가 뒤를 돌아 나를 본다.
“….”
검은 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거리며 검은 벽을 향해. 검은 피부가 있으면 숨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 하지만 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검은 벽에 아무나 들어가게 두진 않아. 하나가 되는 것은 나니까.”
마녀는 나를 보는 채로 그대로 서 있다. 내 중얼거림은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마녀는 발이 빠르고 작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계심이 많다. 틈을 주면 바로 도망쳐 버릴 것이다.
마녀를 잡는 데 약 3분의 시간이 걸렸다.

차가 있으면 차를 타야지 왜 늘 걸어 다녀서 퇴근길마다 얼굴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돈 벌어서 차를 샀으면 팍팍 써야지 왜 주차장에서 썩히고 있느냐고.
늘상 싱글거려서 짜증 나는 녀석이 지금은 울상이라 더 짜증 난다. 그따위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보고 달려오는데 목격자만 없었으면 바로 한 방 날렸지 싶다.
“이봐, 이제 퇴근하는 거야?”
그럼 이제 출근하겠나. 뻔히 아는 것을 매번 새로 묻는 것도 참 능력이다. 나 대리는 누구와도 대화를 잘하는데 대신 누구와도 똑같은 대화만 한다. 뻔뻔스러운 건지 그저 기억력이 나쁜 건지 참 대단하다.
“나야 항상 그렇잖아. 너랑은 다르게.”
나 대리가 다니는 회사는 여러모로 선망의 대상이다. 딱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 돈을 많이 받는다. 둘, 야근을 하지 않는다.
내가 8시까지 일하고 아, 오늘은 일찍 끝났다며 기뻐하고 있을 때, 나 대리는 머리의 빈 곳을 자랑하며 조깅이나 하고 있다. 거 참 부럽, 짜증 난다.
“여전히 힘들겠구나.”
나 대리가 말했다. 평소와 같은 동정하는 표정이다.
“그야 항상 그렇지. 그나저나 조깅하는 표정이 영 아니네.”
“아, 그래? 어, 오늘은 조깅하는 게 아니거든.”
나 대리가 말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평소처럼 땀도 흘리고 숨을 헐떡이고, 표정 말고는 딱히 달라진 게 없는데 조깅은 아니라고. 좀 이상하다. 하긴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래? 뭐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럼 난 이만-”
“저기 혹시 검은 고양이를 보지 못했어?”
나대리가 내 말을 끊고 물었다.
“고양이? 아니. 본 적 없는데.”
“그래? 회사에서 사료를 주던 고양이인데 오늘부터 갑자기 보이질 않아.”
“고양이야 원래 제멋대로인 녀석들 아냐? 어차피 며칠 기다리면 나타나겠지.”
“그래도 요즘 너무 흉흉-”
“보면 알려줄게.”
이번엔 내가 말을 끊었다. 나 대리는 벌리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꼭 좀 부탁할게.”
“그래.”
나 대리를 남겨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 대리와 검은 고양이라, 아마 다시 보기 힘들겠지. 나 대리가 헛고생을 하는 건 내 기쁨이기도 하지만 너무 열심히 찾지 않았으면 싶다. 아무래도 찾아내면 곤란하니까.

사람을 잡아먹는 폐가…라지만 직접 사람을 잡아먹는 걸 보거나 한 것은 아니다. 조 부장님에게 차를 얻어타고 지나갈 때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이런 괴담들은 허무맹랑해 보여도 의외로 근거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 잡아먹는 폐가의 경우에는 요 몇 년간 급증했다는 실종사건이 그 근거이다.
덕분에 이곳은 방치되었다. 기숙사에서는 방을 함께 쓰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어렵다. 룸메이트라는 사람이 회사가 끝나자마자 방에 처박혀 컴퓨터만 붙잡고 있어서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곳에 온다. 공기도 시원하고 습도도 적절하고 벌레 소리도 들을 만 하고.
불청객만 없다면 딱 좋은데.
아래에서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불청객이 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별 방법이 없다. 깨끗하게 치워버리는 수밖에.
전에 한 번 귀찮다고 그냥 뒀을 때는 성가시게도 수가 늘어났다. 나타났을 때 바로바로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인 점은 폐가다 보니 갖가지 도구가 넘쳐난다는 점이지. 맨손으로는 아무래도 때려잡기 힘들다. 근처 바닥에 삐져나온 철근을 뽑아냈다. 같이 딸려 나온 시멘트 덩어리는 벽에다 쳐서 털어냈다. 같은 방식으로 철근 네 개를 준비한다.
소리를 들은 건지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두면 도망칠 거다. 서둘러야 한다.
창틀만 남은 창문을 통해 몸을 날려 착지했다. 낙하의 충격은 우거진 잡초가 모두 흡수한다. 대신 소리는 엄청나다.
처음에는 단순히 놀라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면 상대도 현상을 파악하려 한다.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앞선다. 그래서 하드갸를 잡는 것은 귀찮지만 유쾌한 일이다.
하드갸, 그렇다. 내가 적당히 붙인 이름이다. 하드 같이 생겨서 하드갸. 꺄꺄거려서 하드갸. 대충 그렇다.
예전에 문이 있던,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곳으로 하드갸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철근으로 머리를 꿰뚫었다. 손의 감촉을 확인하고 다른 철근을 손에 쥔다. 하드갸가 상황파악을 마치기 전에 개체 수를 줄여둬야 한다.
폐가 안으로 들어가 발을 멈추고 선 하드갸에게 한 방, 다시 뒤에 선 자에게 한 방. 순조롭다.
나머지 하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맨 뒤에 있기도 했지만 벌써 상황을 알아차리다니 기특하다. 상으로 머리통을 날리기 전에 기절시켰다. 그나마 고통은 덜했을 거로 생각한다.
머리에 철근이 꽂힌 시체가 네 구. 철근을 타고 피가 흐른다. 역시 산 지 얼마 안 돼서 녹아내리는 하드 같다.

“들었어? 어제 폐가에서 또 사람이 죽었대.”
나 대리가 옆에서 웅얼거린다. 본의는 아니지만 근처에서 걷고 있기도 하고 주변에 사람도 없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음, 다시 둘러봐도 역시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 이건 나에게 말을 하는 건가.
“그러니까 그런 위험한 데는 왜 계속 가는 거야?”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위험한 장소에는 찾아가지 마라. 어른들의 흔한 가르침이다.
“아니, 여기서는 살인범 쪽을 탓해야지. 사람을 그런 식으로 죽여대다니 미치광이 사이코패스가 틀림없잖아.”
사이코패스는 딱히 미쳤다는 의미는 아니다… 라는 말은 조용히 삼켰다. 별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래, 그러네.”
적당히 이야기를 끊었다.
“우리 고양이도 그런 녀석이 해코지했을 지도 몰라. 아니, 그 살인마가 했을지도 모르지.”
흥분했는지 내 눈치도 모르고 말을 계속 이어간다. 그런 눈치 외엔 별 장점도 없는 녀석인데 오늘은 정말 짜증 난다.
“그 고양이는 다른 동네를 갔던, 뭐든….”
말을 멈추고 골목을 보았다. 나 대리의 회사에 도착했다. 우드덱이라는 곳으로 조명가게 삼거리에서 좁은 골목 사이로 빠지면 바로 보인다.
짙은 갈색의 벽에 초록색 간판이 달린 곳으로 주변과 상당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연한 녹색 벽에 간판만으로 비교할 수 있는 곳들과는 다르다. 여유가 느껴진다.
음향기기의 외관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이라고 한다. 제조 계통의 하청업체란 소린데, 그런 주제에 제법 잘 나가는 곳이다. 보통 제조업이라면 납기를 맞추네, 이익을 높이네, 쉴 새 없이 굴리고 굴리는 법인데 우드덱은 그런 것이 없다.
솔직히 꽤 부럽고 그렇기에 더욱 나 대리가 꼴 보기 싫다. 나는 피곤해 죽겠는데 울상을 지으면서도 쌩쌩한 눈빛과 이마를 보라지. 벗겨진 이마. 하하.
나 대리가 인사를 하고 우드덱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내 발걸음도 저렇게 기운이 넘칠까?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우리 회사를 향해 발을 옮겼다. 그저 빨리 밤이 오고 검은 벽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언제 오든 울려 퍼지는 소음에 감싸일 수 있다. 정말 싫은 곳이다.
지금 진행되는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굳이 올 일 없었을 텐데. 신규제품인지 뭔지 도통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는다. 마법진을 제대로 보기는 하는 건지 알 수도 없고, 인간들. 그 안에 전부 넣어놨는데 왜 모르는 거지.
오 대리는 나보고 현장 사람들과 친해지라고 했다. 도대체가 일을 잘할 생각은 안 하고 왜 사람, 사람거리는지 모르겠다. 정작 술 먹고 해롱거리는 것밖에 모르면서.
“여, 일월 씨.”
“요즘 통 안 보이네.”
“잘 지내?”
등등. 가벼운 묵례까지 갖가지 인사에 답한다. 인사만 하는 데도 지친다. 뭣보다 난 이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 이미 확인할 건 다 끝냈다. 이제 그냥 집에나 가고 싶다.
하지만 집에 갈 수는 없다. 시간이 되기 전에는 사무실로 돌아가 마법진을 고쳐 그려야겠지. 여기서 작업이나 구경하는 게 낫다.
금속에 뭔가 때려 박는 사람들. 선반에서 갈고 자르고 드릴도 있고 에어건으로 불어내고. 마법진이 제품이 되는 과정이 이렇게 지루하다.
해는 대체 언제가 되어야 질까. 그전에는 집에도 못 가고 검은벽도 없다. 빨리 밤이 오길, 어둠이 내리길 기대한다.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현장에서 버텼다. 귀와 머리가 아프지만 사무실에서 소득 없이 있는 것보다는 낫다. 팀장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우리 회사의 정규 퇴근 시간은 7시다. 어째선지 8시, 10시에도 퇴근 버스가 있고 8시 퇴근 버스가 제일 크다.
아무튼 오늘은 칼퇴근을 하는 날이다. 하지만 나 대리는 이미 집에 들어갔겠지. 비교하면 안 된다. 이길 수 있는 점이 없다.
아직 해가 떠 있다. 검은 벽을 볼 수 없다. 검은 벽은 어둠이 찾아왔을 때만 볼 수 있는, 아니 오히려 볼 수 없는 그런 존재다. 밤이 되어야만 진정한 검은 벽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해가 떠 있을 때의 이 길은 얼마나 재미가 없는지. 수풀은 메말라서 윤기가 없고 건물의 벽돌들에서 마른 먼지가 나온다.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는 차들 때문에 나뭇가지에 찔려가며 몸을 웅크리고 걸어야 한다.
애초에 통근버스를 탈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 맞춰 사무실로 돌아와 피시를 끄려는데 갑자기 자료를 달라니 어쩔 수 없었다. 자료를 보내고 급하게 뛰어나왔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고,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도 없으니 걸어서 나왔다. 어차피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다. 그렇게 생각한 거다.
매번 그렇게 생각하고 후회한다. 자주 있는 일이다. 망치를 두들기는 작업자들을 지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폐가를 지나 조명가게가 있는 골목까지…. 거기에는 아직 검지 않은 갈색 건물이 있다. 나는 곁눈질을 하고 건물을 지나갔다.

 마법진을 통해 1차로 완성된 제품은 품질 테스트를 거친다. 제품을 작동시키고 끄고 작동시키고 끈다. 이것을 반복하여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 살핀다. 아주 간단하다.
지루한 노가다 작업이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노가다는 모두 기계가 한다. 사람이 하는 것은 출근하고 장비를 켠다. 퇴근하며 끈다. 그게 다다.
단순하지만 중요한 작업이다. 기계는 제품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이 끄고 켤 때 제품을 확인하도록 되어 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깜빡했고 그 때문에 지금 회사까지 뛰고 있다.
밤새 돌고 있으면 터질 수도 있다니 그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뭐 좋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덕분에 이렇게 밤거리를 둘러볼 수도 있고 검은 벽을 다시 볼 수도 있다. 좋아, 기분이 한결 낫다.
걷다 보니 조명가게 삼거리까지 왔다. 그래서 공구점과 조명가게 사이 골목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빛이 있었다.
아주 작은 창 하나가 있다. 그 안에는 형광등이 있고, 그 안에는 수은 가스가 있고 전자가 일정 주기로 흔들리며 발광한다. 그것이 내게, 내게는 빛으로 보인다.
검은 벽에서 빛이 나온다.
벽을 향해 걸어갔다. 발에 닿는 감촉에 자신이 없다. 아마도 허공을 걷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벽을 가까이에서 보니 문이 있다. 당기기도 하고 밀기도 했지만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닫이인 것도 아니다. 문은 잠겨있다.
포기하지 않고 벽을 따라 걸었다. 어느 공장이든 똑같다. 보안을 위해 정문을 잠그더라도 결국 사람이 관리하는 것. 어딘가 열려 있는 문이 있다. 틀림없이 있을 거다.
벽을 쓰다듬던 손에 뭔가 잡혔다. 손잡이다. 집중해서 보니 거대한 문이 보인다. 자재를 옮기는 용도의 거대한 문이다. 밀어보니 의외로 조용하게 열린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굉장히 넓은 공간이란 것이 느껴진다.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검은 벽에 생긴 빛의 근원에 다다라도 좋고 그 전에 무언가 손에 쥘 수 있게 되어도 좋다. 도구가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방향이 잘못된 건지 처음엔 벽에 부딪혔다. 그다음엔 뭔가 차량, 거대한 장비에 순서대로 부딪혔다. 그리고 드디어 쓸만한 것이 손에 잡혔다. 금속성의 기다란 막대다.
딱딱한 금속을 만지며 계단을 찾는다. 창문의 위치는 틀림없이 2층이었다. 계단을 찾아 한 칸 위로 올라가야 한다.
계단의 위치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넓은 곳에서 벗어나 좁은 복도에 들어간 후 우회전하자마자 비상구 표시가 나타났으니까. 그 표시를 따라 쭉 올라갔다.
흐름이 붙었기 때문인지 빛의 근원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아무런 결계도 없는 평범한 나무문이다. 문 틈새 사이로 빛이 나온다. 초라해. 아주 초라하다.
이런 허접스러운 나무문이라니. 보안은 어떻게 유지하려는 건지. 결국 이 정도, 이따위 회사란 말이다. 우드락은 그냥 이 정도다. 내가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문을 열기 전에 문이 열렸다. 안에는 하드갸가 서 있다. 멍한 표정, 점점 넓어지는 이마, 반짝거리는 것이 짜증 난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드갸의 말은 무시하고 막대를 하드갸의 목을 향해 꽂아 넣었다. 명중했지만 무디다. 하드갸가 목을 움켜쥐고 내게서 멀어진다.
콜록거리며 움츠리고 있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착실하게 내게서 멀어진다. 버둥거리며 기어가는 꼴이 웃기다.
“일월, 너….”
하드갸가 내게 말했다. 고통이 가라앉았는지 하드갸가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본다. 머리 벗겨지는 아저씨가 추하게.
“이 시간에 뭐하는 거야, 나 대리. 너는 이 시간엔 길에서 헤매며 땀 냄새라도 풍겨야지.”
“그딴 건 내가 물을 얘기야! 일월이 너 뭐하는….”
손에 든 막대로 책상을 내려쳤다. 손바닥이 울린다. 나 대리가 움츠리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색은 하지 않았다.
“검은 벽은 검기 때문에 검은 벽인 거야.”
멍하던 나 대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사이코패슫가 너였-”
나는 막대를 휘둘렀다. 오랜만에 하드갸를 공겨하며 소리를 쳤다. 그도 그렇지. 사이코패스는 살인마랑 다른 거라니까. 얘기를 안 듣잖아. 아니, 얘기를 안 했던가.
시야가 빨개질 때까지 하드갸의 머리를 깼다.

오늘 아침에는 꽤 난리가 났다. 미친 연쇄살인마가 공단까지 침범해 와서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일한다. 신기하다. 어두운 표정으로 수군거리는 것은 잠시고 이내 일상으로 돌아가니까. 내가 저지른 짓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잖아. 그래도 뭐 역시, 나도 일을 해야겠지.
심지어 오늘도 야근을 하겠지. 슬프다. 그래도 밤에는 검은 벽을 볼 수 있으니까. 오늘은 아주 깨끗한, 캄캄한 벽을 볼 수 있을 거다.
이번에 사람이 빠졌으니 새로 뽑지는 않을까? 그러면 나도 노려보고 싶다. 야근은 사람을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 피폐해지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힘들고. 사람을 미치게 한다.

만든다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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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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