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비와 달팽이

2015.10.16 08:5910.16

비와 달팽이


1

컹컹! 이 밤에 누가 찾아온 걸까? 혹시 P? 하지만 자동차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P가 돌아오려면 며칠 더 있어야 했다. 그럼 누굴까? 밖에 누가 와 있기에 토토가 저리도 시끄럽게 짖어대는 걸까.


며칠 전, P가 전화를 걸어와 집 좀 봐달라고 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별말하지 않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좀 더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며 재차 물었다. 대개 이삼일 정도 봐주곤 하는데, 하루나 이틀은 더 봐줄 수 있었다. 나는 대답하기도 귀찮아 열쇠나 잊지 말고 우편함에 잘 넣어놓고 가라고 말했다. 전자식 자물쇠로 바꾸면 열쇠 같은 건 필요도 없는데, P는 전자식이라고 다 좋은 것 아니라며, 당장은 어렵고 열쇠를 분실하면 그때쯤 생각해보겠다 했다. 그 말은 바꿀 뜻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내 승낙이 떨어지자 P가 고맙다며 열흘 뒤에 보자 말하고 끊었다. 일주일도 아니고 열흘이라니. 암만 생각해도 열흘은 너무 길어 거절하려다 그만뒀다.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서, 다시 전화 걸어 말해봐야 시간 낭비였다.

 

P가 집을 봐달라고 한 건 지난봄 도둑이 든 뒤부터다. 출장 가고 없을 때 누가 들어왔다 나간 모양인데, 문만 활짝 열려 있고 도둑맞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해 자신이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나갔으면서 괜히 남을 의심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다른 건 몰라도 문단속만큼은 철저히 한다고 했다. 그 뒤로 P는 출장 갈 때마다 전화를 걸어 사람을 귀찮게 했다. 한번은 우스갯소리로 “너무 지나쳐도 병이다”라고 말하자, 피해망상증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빙그레 웃었다. 정 불안하면 아파트에 들어가 살아도 되는데, 공기도 맑고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다며, 도시에 나가서는 하루도 못 살 것처럼 말했다.


P의 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시가지에 있는 집을 놔두고 인적이 뜸한 농가에서 혼자 살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농사일을 전혀 모르는 P의 어머니는 가끔 반찬거리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놓고 가곤 했다.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도 P의 아버지는 아무리 일손이 부족해도 자식들 손을 빌리지 않았다. 그런 P의 아버지가 간 경화로 쓰러진 건 이 년 전이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농사일을 시작한 것도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P의 아버지는 입원하고 다섯 달 만에 저세상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죽고 없는 빈집에 아무도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P가 내부를 말끔히 고쳐 들어와 살았다.


P의 집은 이차선 도로에 접해 있으며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수원지가 내려다보였다. 수원지는 아주 크지는 않아도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치가 좋았다. 녹음이 짙은 한여름에는 더더욱 보기 좋은데, 물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는 새벽녘에 나와서 보면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 P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글은 이런 데 와서 써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했다. P의 부탁을 받고 와서 새벽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잠들면, 오후에 느지막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토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안 좋아 오래 달리지는 못하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마치고 돌아왔다.


컹컹! 잠시 잠잠하던 토토가 또다시 맹렬히 짖어댔다. 낯선 사람을 봤을 때 보이던 행동이다. 조그만 녀석이 어찌나 사나운지 누가 소리만 질러도 물려고 달려들었다. 저대로 놔두면 밤새 짖을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제야 녀석이 입을 다물고 가만있었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밖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거실 창문을 닫았다.



2

요 며칠 많은 비가 내렸다. 양동이로 퍼붓지 않나 싶을 정도로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전날 오후부터 조금씩 가늘어지더니 오늘 아침 완전히 그쳤다. 하지만 먹구름이 잔뜩 끼어 또 언제 쏟아질지 몰랐다. 불어난 계곡 물이 끊임없이 흘러드는 통에 수문을 반쯤 열었는데도 수위는 낮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수면은 온갖 부유물로 뒤덮여 쓰레기처리장을 방불케 했다. 물 위에 떠 있는 건 마른 나뭇잎과 잔가지가 대부분이지만, 페트병이나 옷가지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저 많은 부유물을 건져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물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허연 것이 칠십은 넘은 듯 보였다. 노인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수면을 뒤덮고 있는 부유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뜰채와 낫을 검은 고무보트에 옮겨 실었다. 간혹 나무가 뿌리째 뽑혀 떠내려오곤 하는데, 보트에 실으려면 낫으로 잔가지를 쳐내야 했다. 페트병이나 스티로폼 같은 생활 쓰레기는 따로 담아 버려야 하므로 마대자루는 반드시 챙겨야 했다. 노인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구명조끼를 입었다. 끝으로 물병을 챙겨 들고 보트에 오르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검정 뿔테 안경을 쓴 관리사무소 직원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노인은 직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보트를 물 위에 띄웠다.

 

“지금 바로 시작하게요?”

 

노인을 부른 건 직원이다. 수면을 뒤덮고 있는 부유물을 치워야 할 것 같아 출근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와서 보고 언제부터 시작할 것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이십 분쯤 지나자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인근 마을에 살아 십 분이면 능히 오갈 수 있는데, 이것저것 챙겨오는 통에 다소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노인은 부유물 치우는 일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사십 대 중반부터 해왔으니까 이십 년은 훌쩍 넘었다. 칠십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라서 젊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해도 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마지못해 노인을 불렀다. 그래도 노인의 근력이 젊은 사람 못지않아 마음이 놓였다. 물기를 머금어 무척 무거운데도 부유물이 가득 든 마대를 번쩍 들어 옮겼다.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노인은 부유물이 많은 곳부터 차근차근 해치울 모양이다. 건져낸 부유물은 상류 쪽 넓은 공터에 쌓아놓으면 청소차가 들어가 실어 갔다. 여름에는 부패가 빨라 물의 오염을 막으려면 건져낸 후 삼 일을 넘기지 말아야 했다.

 

직원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또 한 차례 쏟아지면 공터에 쌓아놓은 것까지 도로 죄다 휩쓸려가고 마는데, 그럴 바에야 일을 시키지 않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일을 중단시키기에는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벌써 일을 시작했는데, 그만두고 가라고 하면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었다. 비가 걱정되면 처음부터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날씨는 노인이 더 잘 알았다. 비가 내릴 것 같으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비는 저녁 늦게까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다.



3

다음날 늦은 시간에 깨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제법 세찼다. 토토는 어디가 많이 안 좋은지 한쪽 구석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보자마자 꼬리를 치며 달려들었을 텐데, 토토야! 하고 불러도 힐끗 쳐다보고는 말았다. 신발을 신어도 따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혼자 밖으로 나와 천천히 수원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로를 따라 철책이 길게 쳐져 있었다. 어른 키보다 훨씬 높고 트럭이 와서 박더라도 뚫리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철책을 따라 걸으니 어느새 관리사무소가 눈에 들어왔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밖에 나와 있다가 이쪽을 흘끔 쳐다보고는 들어갔다. 밤중에 글을 쓰다 막히면 머리를 식힐 겸 잠깐 바람을 쐬고 들어가는데, 볼 때마다 관리사무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순간 간밤에 시끄럽게 짖어댄 토토가 생각났다.

 

혹시 저 남자가 다녀간 건 아닐까?

 

가끔 유리창에 불빛이 비칠 때가 있었다. 밤에 글을 쓸 때는 노트북만 켜놓고 하므로 유리창에 불빛이 비치면 방안에 훤해져 금방 알았다. 그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시간에 순찰을 하는지 직원이 손전등을 비추며 지나갔다. 순찰하러 나왔으면 철책만 비추고 가면 될 텐데, 왜 남의 집 유리창에 비추고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나가다 잠깐 비추는 거야 상관없지만, 모습을 보일 때까지 비추는 건 문제가 있었다. 나는 관리사무소에 들어가 남의 집 유리창에 함부로 비추지 말라고 한소리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다음부터 조심하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게 왜 잘못이냐고 핏대를 세우면 나만 손해였다. 벌어질 일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 벌써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P가 출장 가고 없을 때, 몰래 들어왔다 나간 사람도 저 남자일지 몰라.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니까 끝이 없었다.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치는데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페인트칠이 햇빛에 바래 군데군데 까졌고, 유리창도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무척 지저분했다. 창가에 누가 서 있는 것 같아 유심히 보니 직원이었다. 저쪽에서 걸어올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지 싶은데, 바라보는 눈빛이 굉장히 거슬렸다. 기분이 잡쳐 한 발짝도 더 가지 않고, 바로 P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토토는 나를 보고도 반가워할 줄 몰랐다. 그릇이 비어 있어 사료를 반쯤 채우고, 뒤늦게 아침을 먹었다.

 

이십 분 후에 가서 보니 그릇에 사료가 그대로 있었다. 아파 보이지는 않는데, 아침부터 계속 엎드려 있으려고만 했다. 오후에는 내내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는데, 옆에 엎드려 꼼짝도 않는 토토가 신경 쓰여 책장을 넘겨도 내용이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잘 먹지도 않고, 지금껏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행동이라 수상쩍었다. 오후 다섯 시쯤에는 숲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가 무척 컸다. 아마도 창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녀석이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우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토토! 뭐가 무섭다고 그러니?”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이 부엌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물을 마시러 가는 것이리라.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이 밤중에 빗줄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창문을 닫으려다 멈칫했다.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 도로 위에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아쉽게도 수원지 쪽을 향해 있어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여자가 관리사무소 쪽으로 걸어가는 것까지 보고는 창문을 닫았다.

 

날이 저물면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밤 열 시가 지나고부터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로 쪽에는 아무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거실에 혼자 남겨진 토토가 컹컹! 짖었다. 간밤에 녀석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또 시작한다 싶으니까 화가 나 “토토, 조용히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방문을 열고 나가자,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녀석이 화들짝 놀라 소파 뒤로 숨었다. 아무래도 달래줘야 할 것 같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녀석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눈치를 살피며 슬슬 꽁무니를 뺐다. 평소 잘 짖지도 않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P의 집에 처음 오는 거라면 낯설어 그런다 하겠는데, 다른 때는 아무 이상 없이 잘 지내지 않았는가.

 

하는 수 없이 거실 전등을 끄고 방문을 닫았다.



4

물고기 한 마리가 보트 주위를 헤엄쳐 다녔다. 어른 손바닥만 한 제법 큰 놈이다. 일하다 보면 흔히 보는 게 물고기라 노인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상수도보호구역으로 묶인 뒤로 낚시를 금해 물속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사는지는 노인도 잘 알지 못했다. 가끔 팔뚝만 한 게 눈에 띄곤 하는데, 그물을 던져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그럴 수도 없지만, 물고기를 봐도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노인은 뜰채를 물속 깊이 담갔다가 번쩍 들어 올렸다. 부유물이 생각보다 많이 들려 팔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물기가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트에 실었다. 그때 노인 눈에 하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신지도 않고 잃어버렸는지, 헤진 곳 하나 없는 새것이었다. 노인은 운동화를 건져 마대자루에 집어넣었다. 마대자루에는 조금 전 물속에서 건져 올린 것들로, 아이들 장난감뿐만 아니라 등산모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었다.


 그런데 여자 속옷은 왜 들어 있는 걸까.

 

노인은 보트를 옆으로 옮기려는 듯 노를 저었다. 나뭇가지에 걸렸는지 보트가 잠깐 움직이다 말았다. 노를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좌우로 크게 움직였다. 첨벙첨벙, 파문이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보트가 옆으로 살짝 밀려난 느낌이 들어 다시 노를 저어보지만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처음 겪는 일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나뭇가지에 걸려 잠깐 멈춰 서긴 해도 몇 번 노를 저으면 대부분 쉽게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앞으로 못 가면 옆으로라도 가야 하는데, 밑에서 누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안 했다.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보트 밑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노안이라 눈이 침침한 탓도 있지만, 폭우가 쏟아진 후에는 흙탕물이 흘러들어 늘 이렇게 혼탁했다. 평소처럼 물이 맑아지려면 며칠은 더 지나야 했다. 상체를 더 숙이자 보트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 하마터면 물속에 빠질 뻔했다.

 

보트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보트가 움직이지 않는 걸까. 노인은 허리를 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보다 더 많이 실었을 때도 잘만 움직였기에 보트에 실려 있는 부유물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편해 자세를 바꾸자 잔잔한 파문이 일어 수면에 비친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인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집 센 늙은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노인은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른들 말을 듣지 않아 맞기도 무척 많이 맞았다. 밥 안 먹는다고 괜히 고집부리다 아버지한테 작대기로 등짝을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그날 휘두르는 작대기를 손으로 막다가 손가락 하나가 부러져 보기 흉하게 굽었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하도 맞고 자라서 자신은 자식들한테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어느 날인가 아들놈을 방 안에 가둬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거짓말한다고 야단친다는 게 그만 몽둥이를 들고 말았다.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몽둥이까지는 들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그날 이후로는 자식들한테 손찌검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죽은 큰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났다. 아들이 군대에 가기 한 달 전에 친구들과 동해안으로 여행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함께 여행을 간 친구들은 새벽까지 소주를 나눠 마신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바다에 들어가는 건 못 봤다고 했다. 경찰협조를 받아 한 달 넘게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노인은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은 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누굴 탓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근처에서 툭! 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수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사라졌다. 물고기가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벌레를 낚아채 사라진 듯 보였다. 노인은 자세를 바로 하고 노를 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꼼짝도 않던 보트가 자연스레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커다란 나무가 떠 있었다. 노인은 낫을 집어 들고 잔가지를 내리쳤다. 젊었을 때는 단번에 꺾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힘이 달려 두세 번은 내리쳐야 겨우 꺾였다. 낫을 내려놓고 한 손을 쭉 내밀어 물속에 잠긴 가지를 하나하나 건져 올렸다. 순간 손등에 무언가 닿아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미끌미끌한 감촉이 무척 기분 나빴다. 노인은 낫을 집어 들고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물귀신이든 뭐든 나타났다 하면 낫으로 내리쳐 죽일 작정이었다.

 

그때 눈앞으로 무언가 휙 지나갔다. 생김새는 조금 전 봤던 물고기와 비슷한데 어른 키에 가까울 정도로 컸다. 정말 물고기였을까. 암만 생각해도 물고기는 아닌 것 같았다. 바닷속이라면 모를까, 이런 곳에 그렇게 큰 물고기가 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짐승이나 괴물이다. 노인은 다시 나타나리라 굳게 믿고 물속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놈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이 탁해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한곳만 너무 오래 본 탓에 눈이 침침해 손등으로 비벼 피로를 풀었다. 다른 한 손은 놈이 나타나면 언제든 내리치게끔 낫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드디어 놈이 나타났다. 머리를 정면으로 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노인은 놈의 머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몸통은 물고기가 틀림없는데, 머리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 얼굴이었다. 저런 짐승을 인면수라고 했다. 노인은 자세히 보려는 듯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니! 이럴 수가. 저건 분명히 자신의 젊었을 적 얼굴이었다. 어린 아들을 방안에 가둬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던 얼굴. 아들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잘못했다는 말은 끝끝내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왜 그날 얼굴이람! 화를 내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놈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놈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노인은 낫을 높이 쳐들고 두 번 세 번 연달아 내리쳤다.

 

“죽어! 죽어!”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5

그날 밤 자고 있는데, 얼굴 위로 무언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것이 연체동물이 아닐까 싶었다. 잠결에 툭 치고 돌아누우려는데, 침대 위로 무언가 뚜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무엇인가 보려고 살며시 눈을 떴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빗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저녁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새벽 두 시가 넘은 그 시간까지 맹렬히 쏟아졌다. 반쯤 열린 창문을 닫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물컹한 게 손끝에 닿았다. 감촉이 어찌나 불쾌한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등을 켰다. 으읔! 기겁해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방 안에 벌레가 득실득실했다. 생김새를 봐서는 껍데기가 없는 민달팽이 같은데, 어떤 건 내 손바닥보다 더 컸다. 이렇게 큰 달팽이가 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놈들은 땅속에 숨어 있다가 비가 내리자 전부 밖으로 기어 나온 듯 보였다. 이런 게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아무튼 창문을 열어둔 게 실수였다.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 방문을 열고 나갔다. 토토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거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방문을 열자 얼른 일어나 쪼르르 기어 들어왔다.

 

“토토! 저리 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온 사이에 토토가 달팽이를 물어뜯고 있었다. 발로 밀어내도 녀석은 악착같이 달팽이를 물고 늘어졌다. 말로 해서 듣지 않아 엉덩이를 때리려고 빗자루를 높이 쳐들자, 눈 깜짝할 사이에 달팽이를 하나 입에 물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쫓아가 뺏으려고 하다가 방 안에 있는 달팽이가 급해 내버려뒀다. 나는 천장에 붙어 있는 달팽이를 몽땅 떼어낸 후 쓰레받기로 쓸어 담아 창밖에 버렸다. 수십 마리가 넘어 한군데 모아놓고 보니 엄청났다. 창밖에 버려진 놈들은 다시 쭉 펴고 꿈틀꿈틀 기어갔다. 볼수록 징그러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손바닥만 한 놈들이 빗물이 닿자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소금 덩어리도 아니고, 어떻게 달팽이가 빗물에 녹을 수 있단 말인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달팽이마저 녹아 없어진 걸 확인하고 창문을 닫았다. 행여나 하고 둘러봤지만, 달팽이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일렀다. 달팽이를 물고 달아난 토토가 생각나 거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토는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달팽이를 먹어치우기 전에 뺏어야 하는데, 아무리 불러도 토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거센 바람이 몰아쳐 현관문이 쾅하고 닫혔다. 빗자루를 가지러 나갔다 들어올 때,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한 사람이 처음부터 잘못 달았는지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문이 스르르 열렸다. 저번 때도 P와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 현관문이 저절로 열려 귀신이 들어온 것 아니냐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여튼 문이 열려 있었던 것으로 봐서 토토가 밖으로 나간 게 분명했다.

 

곧장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져 귀가 먹먹했다. 물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녀석이 과연 퍼붓는 저 비를 맞으며 나갔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혹시 몰라 집 앞 도로까지 나가보기로 하고, 신발장에서 우산을 꺼내 들었다. 중간쯤 갔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폭우가 쏟아져 둘러보러 나온 듯한데, 검정 우의를 입은 데다 발걸음마저 빗소리에 묻혀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직원은 철책 쪽을 비추며 지나갔다.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일부러 피하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토토를 보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면 모를까 일부러 피하는 사람에게 굳이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낮에 봤던 눈빛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잠깐 딴생각을 하고 돌아서는데, 직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보았다. 순간 얼굴이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랐다.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얀 불빛이 저만치 가고 있었다. 빗물에 녹아 없어진 달팽이도 그렇고, 완전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거기서 발길을 돌려 바삐 P의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와서도 흥분한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기에 약병을 찾아 알약 하나를 씹어 삼켰다. 이삼 분쯤 지나자 가슴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토토는 날이 밝으면 찾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니까 오직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거실 전등을 끄고 걸어가는데, 파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사라졌다. 분명히 밖에 누군가 있었다. 얼른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였을까. 낮에 봤던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였을까.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그녀가 왜?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빗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 귓속이 윙윙 울렸다.



6

놈은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리친 낫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서 놈은 언제든 불쑥 나타날 수 있었다. 들고 있는 낫을 내려놓는데,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겉으로는 평상심을 유지한 듯 보여도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다시 뜰채를 집어 들었다. 두렵다고 여기서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대로 놔두면 부유물이 부패해 코를 찌를 것이고, 냄새나는 물을 무서워 먹겠느냐며 항의전화가 빗발칠 것이었다.

 

노인은 뜰채를 물속 깊이 담갔다가 서서히 들어 올렸다. 물속에 뭔가 딸려 올라오는 것 같아 상체를 숙이고 보니 꼬리 달린 짐승이었다. 족제비 정도 크기로 물기를 머금어 제법 묵직했다. 가끔 죽은 짐승이 딸려 올라오곤 하는데, 갑자기 불어난 계곡 물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죽는 건 날렵한 짐승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떠내려오는 도중에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머리 없는 짐승이라니. 잠깐 멈칫하는 찰라 미세한 떨림이 뜰채에 전해져, 머리 없는 짐승이 풍덩 빠졌다. 꼬리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이미 물속 깊이 가라앉은 뒤였다. 노인은 망연자실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유충으로 보이는 작은 벌레가 꿈틀꿈틀 헤엄쳐 다녔다. 그때 물속에서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들었다.

 

흐흐흐! 웃음소리가 사람을 몸서리치게 했다. 듣기 싫어 귀를 막아보지만, 웃음소리는 끊임없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보트가 심하게 흔들렸다. 물속에서 누군가 붙잡고 흔들지 않고서야 잔잔한 수면에 떠 있는 보트가 이리도 심하게 흔들릴 리가 없었다. 균형이 무너져 옆으로 쓰러지려고 하자 얼른 바닥을 짚었다. 그래도 몸이 자꾸만 옆으로 기울었다.

 

놈을 죽이고 말겠어! 노인은 이를 악물고 다시 낫을 집어 들었다. 웃음소리에 서서히 미쳐가는 걸까. 낫을 높이 쳐들고 물속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눈동자에 핏발이 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는 거야.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거야.”

 

노인이 수면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내리치는 낫이 행여 보트를 찢어놓지 않을까 불안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 익사할 위험은 낮지만, 수가 사나우면 접시 물에도 코를 박고 죽는다지 않는가. 한참 동안 미친 듯이 수면을 내리치더니, 지치는지 힘없이 낫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았다. 수면에 노인의 얼굴이 비쳤다. 하지만 노인 눈에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물속에 헤엄쳐 다니는 검은 짐승만 보였다. 사람 얼굴을 한 인면수. 검은 짐승이 서서히 보트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눈동자는 황소 눈알처럼 커다랗고 입술은 잘 익은 앵두처럼 조그맣다. 노인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었다.

 

이태 전 이맘때,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달려와서 보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여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노인은 옆에 서 있는 남자 부탁을 받고 여자를 보트에 실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몸뚱이는 막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했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물 위로 물안개가 피어올라 멀리서는 보트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밀어서 빠뜨리기 전에 노인은 보드라운 젖가슴을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다음 날 노인은 보트를 타고 나가 부유물을 건졌다. 그리고 틈틈이 여자가 떠오르지 않았나 주변을 살폈다. 돌멩이를 매달아 빠뜨린 게 아니므로 언제든 물 위로 떠오를 수 있었다. 부유물을 전부 다 건져내기까지 보름 넘게 걸렸는데, 그때까지도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었다. 노인은 낫을 높이 쳐들고 검은 짐승을 노려보았다. 거추장스러워 구명조끼마저 벗어 던진 상태였다. 검은 짐승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눈앞에 이르자 두 눈을 꼭 감고 내리쳤다. 고무보트에 구멍이 뚫려 슈웅 소리를 내며 바람이 빠져나갔다. 보트가 점점 가라앉았다. 노인도 곧 보트와 함께 물속으로 사라졌다.



7

다음날 밖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창밖을 내다보니 도로에 경찰차와 구급차가 앞뒤로 나란히 세워져 있고, 사람들 시선은 일제히 수원지를 향해 있었다. 누군가 철책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밖으로 나갔다. 가서 보니 젊은 남자 둘이서 물속에 잠겨 있는 시체를 기다란 막대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 언뜻 봐서는 마네킹처럼 보였다. 철책이 높게 둘러쳐져 있는데,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 죽었을까. 수원지를 가로질러 놓여 있는 다리 위에서 버려진 후 물살에 떠밀려온 건 아닐까.

 

옆에서는 사복경찰이 등산복 차림의 남자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었다. 물속에 잠겨 있어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하고 경찰이 묻자, 남자가 우연히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고 대답했다. 아무리 우연히 눈길이 갔다 하더라도 부유물에 뒤덮여 잘 보이지 않는 시체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도 그 부분이 의심스러운지 우연히 본 게 확실하냐며 거듭 물었다. 진술을 마친 후, 남자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경찰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쩔쩔맸는데, 신고한 자신이 의심받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으리라.

 

그때 철책 안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려다보니 건져낸 시체에서 무언가를 떼어내고 있었다. 가슴과 복부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시커멓게 생긴 무언가 들러붙어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복경찰이 뭐냐고 묻자 한 사내가 “달팽이 같은데요.” 하고 말했다. 그건 정말 껍질이 없는 달팽이였다. 간밤에 P의 집에서 봤던 달팽이만큼 크지는 않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조그만 달팽이였다. 달팽이는 만지기만 해도 툭툭 떨어져 나갔다. 달팽이를 다 떼어낸 후 시체를 들것에 실어 철책 밖으로 나왔다. 경찰차가 떠난 후 내려다보니 달팽이는 벌써 사라지고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오후에 작은 배낭을 메고 P의 집을 나섰다. P가 퇴근하고 와서 승용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버스를 타면 금방이라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토토는 그날 오후 농기계가 들어 있는 창고에서 찾았다. 한낮에도 잘 가지 않는 곳인데, 한밤중에 거긴 왜 들어가 갇혔나 몰랐다. 물고 간 달팽이는 삼켜버렸는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밤 출장에서 돌아온 P에게 달팽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라도 그럴듯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크게 웃었다. 하긴 빗물에 녹아 없어지는 달팽이는 내가 생각해도 엉터리 같았다. 수원지에서 시체가 나왔다고 말하자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였으나, 더는 아는 게 없어 긴말은 못했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 이야기도 마저 할까 하다가 또 엉뚱한 소리 한다고 할까 봐 그만뒀다. 눈앞에 나타난 것도 아니고, 내가 헛것을 봤을 수도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려면 버스 종점까지 좀 걸어야 했다. 사람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근무복 차림의 젊은 사내들이 옆으로 길게 늘어서서, 갈고리가 달린 긴 막대로 부유물을 건져내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 이르렀을 때, 토토가 갑자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토토, 가만있어!”

 

녀석이 거칠게 몸부림치더니 품에서 빠져나가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나는 토토를 뒤쫓아 달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 뒤쫓다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저 멀리 달아나는 토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배낭을 열고 약병을 찾았다. 분명히 있을 거라고 예상 곳에 약병이 없자 가슴이 철렁했다. 깜빡하고 약병을 놓고 나온 것이다. 근처에 누가 있는 것 같아 돌아보니 검은 그림자가 옆으로 쓱 지나갔다. 등골이 오싹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P의 집을 향해 걸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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