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들은 우리를 사랑했다. 사랑의 이름으로 첫 번째 구호물품이 도착한 것은 화석연료의 잔여량이 바닥을 쳤을 때였다. 정부가 그동안 은폐해왔던 실제 원유 매장량을 발표한 순간 음모론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닌 확언이 되었다. 내용물이 졸아들어 바닥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냄비처럼 자원은 종류를 막론하고 고갈 된지 오래였다. 공영 방송인은 개발 중인 대체 에너지 사업을 들먹거리면서,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지난 크리스마스에 정부 청사 앞에 세워졌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연휴 몇 주 전부터 희망의 상징이라고 선전되던 트리가 불이 들어오고 캐럴의 첫 소절을 채 부르기도 전에 정전으로 꺼져버렸던 것이다. 방송이 끝난 후 전 세계는 숨죽인 밤 혹은 시차에 따라 목 졸린 낮을 보냈다. 고요는 전쟁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 정부관계자들이 수면 부족과 피로로 감기는 눈과 쑤시는 이빨로 아침 해를 맞이했을 때, 처음으로 구호품이 도착했다.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놓여있는 선물상자처럼 누가 놓고 갔는지 모르게 감쪽같이, 그러나 무너질 수 없는 방호벽처럼 음울한 위용으로 수 백 개의 상자들이 해안가에 쌓이고 늘어놓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긴장을 갖고 상자를 대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바닷가로 나온 사람들의 머리통 속에 떠오른 생각은 같았다.

 폭탄일 것이다. 생화학 무기일 것이다. 최후의 생존자들이라고 자칭해온 우리들을, 그 오만한 예명으로부터 나가떨어지게 만들 치명적인 무언가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4차 대전의 시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곧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이 폭약이 아닌 수 억 배럴의 석유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긴장은 의심스러운 안도로 와해되었다. 뒤로 이어진 몇 가지 뉴스들, 상자의 구성 성분이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광물이라는 것, 인근의 황야에 나타난 미스터리 서클들, 그리고 처음으로 어느 누구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 먼저 나서지 않는 얼떨떨한 반응들은 하나의 지침만을 향하고 있었다. 우주. 증거에게 손가락이 있다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가르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 손가락의 끝에 위치한 것이 신이냐 혹은 외계인이냐 등 해석에 대해서는 분분한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그들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것 외에는 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나 황폐해져 굶어 죽어가는, 한 때 현존했던 인구의 십분의 일도 채 남지 않은 자살 중인 행성에게 도움을 뻗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손이 있는지 없는지, 그래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도움의 손길이라는 말을 써도 될지 그 여부조차 몰랐다. 하지만 뒤이은 며칠과 몇 달간 멸종한 종들로 가득 찬 동물우리와 수조가 도착했을 때, 더 이상 우선순위라는 것을 정하지 않고 배급해도 될 만큼의 식량이 도착했을 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이름을 믿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실제로 내일이라는 것을 기대하기 시작했고 잊었던 노래들을 기억해냈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만들어 불렀다. 그러는 사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였다.

 난 별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어.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우리의 감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촛불을 들고 해안가에 모였던 밤에, 우리들 중 하나가 내뱉었던 그 수줍은 고백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별빛 밑에서 내가 지금의 아내에게 고백했던 밤도. 그래서 우리는 내일을 만들어준 사랑을 ‘그들’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사랑이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혹은 사랑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일 가능성도. 어쨌든 우리는 눈을 감아버렸다. 지난 몇 천 년 간 그 모든 문제들에 그래왔듯이,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지구의 역사는 수십억 년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고작해야 만년도 되지 않았고, 개개인은 백년밖에 살지 않는데다가… 그러니까, 정말로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지구를 맡기지 말았어야 했다. 여러 번 생각했지만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는 했다.

 그들로부터의 첫 대가를 받은 지 삼십년 째, 지구는 모든 것이 풍족하다. 다만 우리의 아이들은 태양을 모른다.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구호품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인수하는 대가임을 이해하기까지 인류는 십년의 세월이 걸렸다. 첫 번째 미스터리 서클을 이해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나머지 미스터리 서클들은 무슨 내용일지, 연구가 계속되고 있기 한 건지, 나는 잘 모른다. 그들과의 계약서에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이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 계약을 파기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사실이니까. 영원한 죽음과 인공적인 불빛에만 의존하는 영원한 어둠 중 무엇이 더 사랑에 가까우냐고 물으면, 나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후자를 고를 것이다.

 잠자리에 들 시간. 우리에게 시간을 말해주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연료를 공급받아 돌아가는 시계다. 아내는 수많은 별들의 이름을 알지만 태양은 모르는 아이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불을 껐다.

 

 

toasty3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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