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젊은 기사, 스티그마르 폰 동찬 이야기


0


  이제 진짜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멜론 플레이어로 음악만 켜고 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문 너머로 종이에 낙서 같은 거 그만 좀 그리고 공부나 좀 해라고 고함을 질렀다. 왠지 모를 반항심이 생겨, 지금 막 하려고 했는데 왜 그러냐? 라고 외치는 동시에 컴퓨터를 켰다. 엄마는 내가 컴퓨터만 켜면 무조건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난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편이다. 인터넷에서는 하늘을 나는 차의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미국의 테라푸기어라는 이름의 회사에서 두 번째로 개발된 이 차는 플라잉 카 TF-X라는 촌스러운 이름이 붙어있었다. 최대 800km 정도의 거리를 날 수 있었고, 조종사가 없을 때 자동 착륙하는 기능이 탑재된 것 등 안전도 완벽하게 고려된 모델이었다. 흥미로웠다. 그래서 자세히 알아보려는데 엄마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내 머리를 으깨고선 공부를 시켜 그러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려면 자질구레한 취미들은 잠깐 제쳐두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너희 아빠처럼 평생 택시나 몰고 다닐 생각이냐고 한 끼 이, 삼천원 하는 뭐 들었는지 모를 기사식당 밥이나 먹고 살 거냐고 말했다. 누나 반만큼이나 해보라고, 적어도 이름은 있는 회사에 들어가야지 않겠냐고, 굶고 살진 말아야지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난 도무지 공부에 매달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내겐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 미래가 다 보이는데 뭘 열심히 할 생각이 들겠는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덧셈 뺄셈을 할 수 있다면 우린 모두 미래를 볼 수 있다. 미래라는 것은 결국 과거에 입력한 값들의 총합이다. 엄마는 네가 하는 꼴을 보니 네 미래가 훤하다, 라고 말한다. 딱 그 맥락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단 소리다. 평소에 하는 말들을 보면, 엄마는 나 한 사람의 15년 정도 미래까지를 볼 수 있다. 나는 엄마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50년 정도 미래까지를 볼 수 있다.

  아무튼 나는 30년 후의 대한민국, 그러니까 2043년의 대한민국에서 스티그마르 폰 동찬이란 이름의 기사를 봤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

  동찬, 그는 2020년 겨울에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기사는 아니었다. 그는 엄청난 노력 끝에 기사가 되었는데, 그것은 집안의 불우한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의 어머니는 서예학원 강사였고 그의 아버지는 백수였다. 백수인 아버지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백수일리는 없다지만, 적어도 동찬이 태어난 이후로는 그랬다. 그러니 그의 과거에 대해 시시콜콜 떠드는 대신, 그냥 쭉 백수인 아버지, 영원불멸한 백수 아버지라고 정리하자. 백수인 아버지는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술만 마셨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간다는 자괴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는 술을 마시면 아내와 동찬을 때렸다. 다행히 그는 학생시절 매일 맞고 다닌 사람이어서 그의 주먹은 솜방망이 같았고 전혀 아프지 않았다. 때리고 나서는 꼭 약을 발라주거나 쓰다듬어주며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동찬은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손이 참 크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동찬이 받아본 아버지의 사랑 전부였다. 하지만 굳이 아버지의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받지 못한 것이 그가 기사가 된 이유는 아니었다. 잠깐이지만 행복할 뻔 했던 시절도 있었다.

  술을 마시고 화난 아버지는 인터넷에 악성댓글을 달아대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의 휴대폰에 전화가 오더니, 아버지에게 댓글알바로 일하지 않겠냐고 물어온 것이다. 그날 동찬은 처음으로 아버지가 매운 맛 새우깡 대신 김밥과 떡볶이를 안주로 술을 마시는 것을 봤고, 그들의 앞엔 따뜻한 미래가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잠깐 뜨뜻했다. 댓글을 다느라 바빠진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고, 남는 돈으로 종종 새우깡을 사줬기 때문이다. 새우깡 한 봉지를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동찬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깐이었다. 직업을 가지게 된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게 되자, 쫄깃쫄깃했던 댓글의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업주는 아버지를 잘랐다. 어차피 비정규직이었고, 제대로 된 계약서도 없는 이상 자르는 것은 발가락 만지던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잘린 이후, 아버지는 또 다시 술을 마시고 어머니와 동찬을 때렸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에 맞는 거야 그런대로 맞을 만했지만, 비정규직이 그렇게 쉽게 잘린다는 사실은 동찬에게 있어서 충격이었다. 그래서 동찬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꼭 정규직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왕이면 전문성을 가진 걸로. 20년 뒤의 대한민국에서도 '사' 자로 끝나는 직업이 인기가 많았다. 동찬은 '사'자 돌림의 유망한 직업들을 노트에 적으며 궁리했다. 의사, 약사, 변호사, 검사, 판사, 기사.

  기사, 이 시대 최고 인기 직업을 말하자면 기사가 일 순위로 꼽힐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고, 명예로운 직업이었으며, 법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2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동찬은 목표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수십 권이 넘는 책을 달달 외우다시피 하며 공부했고,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엔 운동장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나는 동찬이 도장을 다니며 권투나 태권도, 주짓수와 같은 무술들을 연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의 어머니가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서예학원 강사 일을 하는 동시에 전단지 붙이는 일과 인형 눈 붙이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찬을 위한 노력은 어머니만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쪽을 바라본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새우깡 값을 아끼고 깡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자면 지금이랑 별 다를 게 없다는 설명을 할 수 있겠다. 20년 후의 사과 맛과 지금의 사과 맛은 별 차이랄 것이 없고, 꿀수박이란 상표를 단 채 용산시장에 진열된 수박은 미래에도 밍밍한 맛이었다. 수산시장에서 머리가 둘 달린 피폭참치가 DHA 두 배라며 수험생 엄마들에게 유행해서 신기했지만, 그 뿐이었고 현재와 다를 건 별로 없었다. 과학이 지금보다 훨씬 발달했지만 상상 못할 무언가가 나오진 않았다. 다 나올 만한 것이 나왔고, 그런 것들로는 띠처럼 팔에 차고 다니는 스마트 폰이라던가, 가상현실 게임기라던가, 하늘을 나는 차 등이 있겠다.

  아무튼 동찬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20살 성인이 되어 기사 자격시험의 원서를 냈다. 시험 전날 밤 그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는데 그건 유서였다. 그의 엄마와 아빠는 동찬이 다칠까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축하한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기사다.”

  시험관의 그 말에 조용했던 시험장은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동찬은 벅차오르는 감격에 하늘을 바라봤다. 드디어. 드디어 기사가 된 것이다. 진정한 이 시대의 엘리트가 된 것이다. 막대한 연봉과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감개무량한 표정의 합격자들은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 주먹을 툭 치거나 악수를 하면서 기쁨을 나누었다. 그 중 카키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합격생, 동찬은 옆에 있던 동료 은석과 악수를 나누려다 멈칫했다. 악수할 손이 없었던 것이다. 시험 중에 손이 떨어졌단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합격자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화상이나 흉터가 몸 여기저기에 나있고, 팔과 다리에 무수히 난 베인 상처에는 흐르다가 멎은 피가 뭉쳐있기도 했다. 심한 경우에는 동찬처럼 손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이나 한쪽 눈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처참한 몰골과는 다르게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팔이나 다리? 그런 건 사붙이면 된다. 눈? 눈 없이도 웃을 수 있다. 팔 다리에 비해 눈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이젠 별 상관없다. 기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사로써 명예를 지켜라, 전투에선 물러남이 없어야 하고,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며, 한 번 충성을 맹세한 군주를 마지막까지 따라야 할 것이다.”

  시험관의 말은 그들의 잡담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시험관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는 굳이 했던 말을 또 하는 대신, 단상 밑에 있던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하얀색 장갑다발과 카드더미들이 있었다. 은색으로 빛이 나는 카드에는 합격자 개개인의 사진과 고유번호가 새겨져있었다. 그 카드의 이름은 면허증이었고, 합격자들은 그걸 보자마자 조용해졌다. 어서 빨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만을 기다렸다.

  동찬은 면허증을 받자마자 면허증을 담보로 수많은 것들을 구매했다. 우선 자신의 피부색에 잘 맞고, 손가락이 두껍고, 악력이 센 인공 손을 사서 이식했다. 그리고 자신 전용의 파란색 어바일을 샀다. 그리고 트라이스타 공작 가에 임관서류를 보내 성공적으로 임관허가를 받았다. 물론 트라이스타 기사단 제복도 샀다.

기사 서임식 전날 밤 동찬은 보관해뒀던 트라이스타 기사단 제복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어머니는 옆집에서 빌려온 스팀다리미로 정성스럽게 그것을 다렸다. 아버지는 이 날 만큼은 어쩔 수 없다며 과감하게도 맥주와 소주를 섞어마셨다.

  처음으로 가게 된 트라이스타 공작 가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매끄러운 유선형의 빌딩, 커다랗고 넓고 반듯한 빌딩, 유리로 된 빌딩, 시멘트로 된 빌딩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동찬은 하늘을 나는 차, 어바일을 타고 있었다. 그는 어떤 감회에 젖어 트라이스타 공작가를 한 바퀴 돌았다. 그도 드디어 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하나의 공작 가에 몸을 의탁한 것이다.

  서임식의 과정은 단순했다. 기사 후보자들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트라이스타 리 드 건희 공작이 돈다발으로 어깨를 세 번 두드리며 말하는 것이다. 너는 기사다. 너는 기사다. 너는 트라이스타의 기사다. 세 번째의 말이 끝나는 즉시, 그는 트라이스타의 기사가 되었으며, 동찬은 이 날 스티그마르라는 성과 폰이라는 중간 이름을 받았다.

3

  물론 궁금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봉건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가. 인터넷과 교통이 저렇게나 발달된 사회에서 공작이나, 기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과학이 사회적 장치의 발달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늘을 나는 차, 어바일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가 있는데 어바일이 무슨 상관이냐. 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말하자면 비행기는 대중교통이고 어바일은 자가용이다. 자가용 교통수단이 대중교통에 비해 늘면 어떻게 되겠는가. 뭐, 막힐 것이다. 근데 막히기만 막힌다면 문제야 없지만, 하늘엔 신호등이 없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비행기가 왜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는가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고, 찾아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비행기도 다니는 길이 있다. 항공로라고 하는 길인데, 보이지 않는 전자신호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전자신호는 공항 관제탑에서 비행기 각 기를 향해 모두 보내진다. 또한 각 항공기는 자신의 위치정보를 다시 공항으로 보내는데, 공항에서 받은 각 항공기의 정보를 토대로 항공로를 일일이 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급속도로 늘기 시작하여 기존 자동차 시장을 모두 빼앗아버린 어바일, 어바일의 수는 수십만을 넘어 수백 수천만에 이르렀고, 기존의 방식으론 항공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기존 2차원 도로에 적용된 도로교통법으로는 높낮이가 새로 생긴 교통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어바일의 증가에 따라 관련된 새로운 도로교통법도 제정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공에 신호등을 만들거나 중앙선을 그을 수 없는 이상, 3차원 공간에 맞는 도로교통법은 도저히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정정한다.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건설교통부 직원들은 귀찮았다. 어차피 이 문제가 처음 대두되었을 때는 소수의 부유층만 어바일을 타고 다녔고, 공중교통사고 따위 거의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뒤늦게 대처를 시작한다. 하지만 역시 공중 신호등이나 공중 중앙선이 없이는 허공에 대응하는 도로교통법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공중 교통사고는 늘고 있었다. 도로교통법이 없으면 공중 교통사고도 자주 일어났지만, 사후 처리도 애매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나눌 수 있는 지표가 없었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건데, 그건 어른이 돼서 하기는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하긴 했지만. 아무튼 고심하던 정부는 기묘한 방안을 내놓는다. 그건 어바일을 모는 전용 면허증을 새로 만드는 것, 그리고 면허시험의 난이도를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최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너무 복잡한 문제라 해결하기 힘들다면, 정말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것이 당시 정부의 생각이었고, 공중 도로교통법에는 두 가지 법만 존재하게 되었다.

  1. 어바일 면허증이 없는 자는 어바일 웨이를 이동할 수 없다.

  2. 어바일 웨이는 모든 법률에 대해 보호받을 수 없다.

  국가가 도로교통법을 포기한 것이다. 법률에 대해 보호받지 못한다는 의미는 법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었다. 어바일 웨이 안에서라면 살인을 저질러도 법에 심판 받지 않았다. 사상 최악의 무법지대가 탄생한 것이다. 이에 트라이스타나 나우빅 같은 대기업들은 어바일 면허증 소지자가 향후 시장의 흐름, 혹은 국가의 흐름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눈치 챘다. 대기업들은 앞을 다투어 합격자들을 섭외했다. 그 과정에서 줄 수 있는 것과 줄 수 없는 것을 모두 제공했는데, 재산이 그것이고 명예가 그것이었다. 기사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국가가 도로교통법을 포기한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 어떤 치명적인 실수였다. 정권이 바뀌고, 공중 도로교통법을 다시 제정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무산됐다. 도로교통법 제정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이 모조리 어바일에 치여 죽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바일에 타고 있던 사람의 면허증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전국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났지만, 별 소용없었다. 기사들을 모은 것은 나라를 움직이는 10대 재벌기업이었고, 그들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인 동시에 기업들이 지배하는 봉건국가가 된 것이다.

4

  위대하고도 지혜로운 군주 트라이스타 리 드 건희 공작의 충성스런 기사이자, 명예를 아는 기사 스티그마르 폰 동찬은 군주의 명을 완벽하게 이행했다. TV 수신료를 내지 않거나, 청소기를 10년 동안이나 신형으로 교체하지 않는 농노를 처단하고, 영지 앞에서 팻말을 들고 서있는 수상한 자를 감시하고, 다른 군주가 보낸 군자금이 담긴 사과박스들을 수송했다.

  트라이스타 리 드 건희 공작은 일 년 동안의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수 억 원이나 되는 봉급을 하사했다. 그는 그 봉급으로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임관 준비과정에서 빌렸던 돈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고, 좀 더 넓고 쾌적한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지하창고가 있고 마당이 있는 2층짜리 대형 주택이었다. 어머니는 기뻐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어머니는 마당이 딸린 집을 원했고, 거기서 무나 배추를 재배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깔끔하고 넓은 집이 소주를 마시기엔 별로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동찬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고, 소주를 왜 마시시냐고 브랜디와 와인, 그리고 샴페인을 사왔으니 그런 걸 마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기를 사왔으니 파티를 하자고 말했다. 1등급 한우 소고기였다. 세 가족이 마당에 딸린 바비큐 가든에 모였다. 가족들이 모여 고기를 구워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불판 위의 고기를 몇 점 집어먹다가 젓가락을 놓았다. 넌 돈도 많이 벌었으면서 왜 이렇게 맛없는 고기를 사왔냐. 다시 가서 삼겹살이나 사오너라.

  동찬의 어머니는 신이 났다. 자식이 전부인 나이였다. 어느 모임에 가든 자식의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 나이였다. 그녀는 그저 아들이 기사가 되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 날 그 자리에 나온 어떤 아들 자랑도 물 먹은 휴지조각처럼 툭,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들 기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 트라이스타의 기사라는 그 단어 자체에 매료되어, 아들이 딸이 기사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쉽다고 생각했다.

동찬은 애인도 여럿 생겼다. 근처 대학교를 다니며 자취하는 여학생 J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K, 그리고 인녕과 사귀었다. 어바일이 있는 이상 양다리, 세 다리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사귀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5

  그러나 명백히 기사의 봉급과 사회적 지위는 생명수당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나우빅의 기사들과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얼마 전부터 불안했지만 결국 세탁기로 인한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트라이스타 세탁기는 최신 큐브 기법으로 만들어진 최첨단 세탁기였다. 큐브 기법은 정육면체 모양의 세탁통을 자기장으로 공중에 살짝 띄운 채로, 전방위로 회전시키는 기법으로, 빨래가 더 잘 되고 그러진 않았지만, 주부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기법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해 나우빅은 구체 모양의 세탁통을 자기장으로 돌리는 스피어 기법의 세탁기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게 표절분쟁이 벌어졌고, 법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한 편, 기사단끼리의 전쟁이 같이 벌어진 것이다.

  트라이스타 기사단은 전쟁에 앞서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중앙에는 트라이스타의 용맹한 기사단장 알퐁스 구데리안 드 병철의 어바일이 있었다. 알퐁스 구데리안 드 병철은 그다지 말이 많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대오가 갖춰지자마자 헤드라이트를 켜고 클랙션을 울렸다. 그와 함께 트라이스타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트라이스타 기사단은 15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우빅 공작가의 영지와 트라이스타 공작가의 영지의 중간쯤 되는 바다 위가 전투예정지였다. 바다 위는 기사단의 결투에 가장 선호되는 장소였다. 기사는 중요한 전력이었고, 지상 위로 떨어졌을 때보단 물 위로 떨어졌을 때, 그들의 생존확률은 높았다. 녹색으로 칠해진 나우빅의 어바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보기사, 스티그마르 폰 동찬은 긴장했다. 트라이스타 기사단은 분명 국내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개개인의 역량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우빅은 원래부터 어바일을 만드는 일을 하던 회사. 어바일의 성능에 있어선 트라이스타를 훨씬 앞설 것이 자명했다.

  “명예도 모르는 나우빅의 기사들아. 너희는 도둑을 군주라고 모시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트라이스타 기사단의 부단장 에밀 고르곤 폰 형식은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적을 비방했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적의 사기를 꺾기위한 말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트라이스타의 기사처럼 장애인을 섬기는 것보단 낫겠지.”

  “이 녀석, 내가 섬기는 군주를 모욕하다니!”

  나우빅 기사의 반격에 형식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비방은 트라이스타 공작이 공개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휠체어를 타고 몸이 아픈 척한 것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기사단장 병철은 대열을 갖추도록 명했다. 더 이상의 비방전은 불리했다. 어차피 싸움을 결정짓는 것은 전투력이었다. 이길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외쳤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트라이스타 기사단 돌격하라!”

  트라이스타 기사단 소속 100기의 어바일이 일제히 돌격하자, 나우빅도 질 수 없다는 듯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200여 기의 어바일이 공중에서 맞부딪치며 거센 마찰음을 일으켰다. 어바일과 어바일의 전투는 마치 놀이공원에 있는 범퍼카의 싸움을 연상시켰다. 어바일들이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상대 어바일의 급소를 노렸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엔진이 있는 적의 앞부분을 노리는 것이었다.

  동찬은 왼쪽 최전선에 위치해있었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오는 나우빅의 어바일을 보고, 운전대를 왼쪽으로 돌리며 있는 힘껏 밀었다. 어바일이 급격하게 하강동작을 했다. 그리고 나우빅의 어바일이 자신의 어바일 위를 지나가자마자 운전대를 당기며,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적의 아랫부분, 앞바퀴와 앞바퀴 사이를 노렸다. 그 곳엔 냉각장치와 배터리가 있었다.

  어바일은 자동차와 다르게 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을 다치게 하려고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충돌 때마다 레버로 빠르게 작동시킬 수 있는 전방위 충격완화장치가 있었다. 동찬은 눌렀지만 상대는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나보다. 창문을 열고 피를 토하는 상대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동찬은 신나는 듯 웃고 있었다. 갈비뼈, 갈비뼈가 부러졌어!

  동찬은 다시 한 번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들 모두는 한 번쯤 범퍼카를 타본 경험이 있었다. 더 세게, 더 빠르게 부딪칠수록 범퍼카는 재미있었다. 동찬은 있는 힘껏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상대의 어바일에 자신의 어바일을 부딪혔다.

  전황은 트라이스타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두 기의 트라이스타 어바일이 나우빅의 앞, 뒤를 들이박았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바일이 격추되어 떨어지는 어바일을 한번 더 들이박고, 그 밑의 어바일이 한번 더 들이박았다. 나우빅의 뛰어난 어바일 기술에 부담을 느끼긴 했지만, 전투기술에 있어선 트라이스타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우빅의 마지막 어바일을 향해 다섯 기의 어바일이 동시에 날아가 부딪혔다. 트렁크판을 엔진을, 냉각기와 천장을 짓밟았다. 귀를 찢는 듯한 충돌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승리의 함성이. 위대한 트라이스타 기사단이 나우빅 기사단을 짓밟고, 다시 한 번 최강의 기사단이란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함성을 지르던 동찬은 갑자기 함성소리가 사라지자, 의아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기사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 곳을 같이 바라봤는데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곳에 있는 사람은 나에게도 낯익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좀 늦었군."

  검은색 어바일 한 대가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한 명의 기사가 앉아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에 이마에 있는 큰 주름, 그는 노년의 기사였다. 그는 기사면서 이상하게 제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기사단의 문양이나 신분을 알려주는 어떤 표식도 없어, 어디 소속의 기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어바일의 끝을 트라이스타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동찬은 멍하게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지, 기사단장 병철이 문을 열고 자신의 어바일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죄송하지만 나우빅은 이미 전멸했습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그의 말에 노년의 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이미 돈을 받았네. 그리고 나 하나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럼 받으신 금액 두 배의 돈을 드리지요. 서로 물러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렇게 가능성 낮은 싸움에 목숨을 거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동찬은 돈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늙은 기사의 어바일을 바라봤다. 노년기사의 어바일에는 네모난 뿔이 하나 달려있었다. 그 곳에 적혀있는 말. TAXI. 그는 택시기사였던 것이다.

  택시기사, 그들은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최악의 용병집단이었다. 주로 자신의 군주에게서 기사자격을 뺏긴 자와 면허증을 가지고도 임관하지 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지. 안 그런가? 그리고 지난번에 봤을 때도 말 하지 않았나? 택시기사는 신용이 생명이라네."

동찬은 이상하다 여겼다. 택시기사가 대개 실전경험이 풍부하다지만, 트라이스타 기사단도 명실상부한 최강의 기사단, 저렇게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 그의 궁금증은 대부분의 기사들이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고, 그것을 풀어준 것은 에밀 고르곤 폰 형식이었다.

  "흑빛섬광 봉팔, 그는 이 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모범택시기사야. 마음 단단히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에 기사들은 경악했다. 모범택시기사, 모범택시기사의 요건은 너무나 다양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세 번째 요건이었다. 무사고 운전경력 10년. 도로교통법이 붕괴되고 무법천지가 된 이 땅에서 10년이나 사고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 그 사실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의 가능성 밖에 없었다. 운전을 하지 않았다거나, 귀신과도 같은 드라이빙 실력을 가졌다는 것.

  흑빛섬광 봉팔은 더 이상의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어바일의 창문을 통해 미끄러지듯 어바일에 탑승했다. 경고의 의미로 클렉션을 세 번 울렸다. 그리고는 트라이스타 기사단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솜씨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트라이스타보다 두 배는 빠르게 움직였다. 앞으로 가는 가하면, 뒤로 날아가 공격하고, 뒤라고 생각하면 앞에 있었다. 그는 어바일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를 계속 유지했고, 그의 어바일은 크게 휘둘러진 철퇴처럼 상대에게 꽃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충돌음이 울리고, 몇 대씩이나 되는 어바일이 추락했다. 충돌이란 공격의 방식은 분명 공격자와 피공격자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봉팔의 어바일에 달린 범퍼도 전투의 경과에 따라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추격이 잠깐 늦추어진 틈을 타 어바일의 창문에 매달렸다. 그리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범퍼를 교체했다. 기사 중 누군가가 창문 밖에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내리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흑빛섬광은 분명 창문에 매달린 채였지만, 발가락으로 운전대를 돌려 피한 것이다. 오히려 이어진 봉팔의 반격에 그는 팔을 잃어야했다.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면 안 되겠다는 큰 깨달음을 얻어야했다.

  기사단장 알퐁스 구데리안 드 병철은 고심 끝에 품 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분명 기사들이 어바일 웨이에선 법의 제한을 받지 않았지만,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항상 공중에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지상에서 총을 휴대하고 있었다는 혐의가 생길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권총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기사단의 반이 흑빛섬광에게 격파되었다. 더 이상의 피해가 생기는 일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흑빛섬광을 겨눴다. 쐈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흑빛섬광의 어바일, 어바일의 앞 유리 앞에 있는 두 개의 와이퍼, 그 와이퍼가 집게처럼 총알을 잡아낸 것이다. 창문 너머로 봉팔이 씨익 웃는 모습이 보였다.

  스티그마르 폰 동찬은 동료기사들과 함께 여덟 방향에서 흑빛섬광을 포위한 채 돌격했다. 무서웠다. 포위공격은 적이 피했을 경우 서로 부딪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공격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를 막지 못하는 것이 더 무서웠다. 이미 수도 없는 동료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기사는 하늘에서만 기사일 수 있었다. 땅으로 떨어진 기사들이 어떤 꼴이 되었을지 그는 상상하기 싫었다. 기사가 아니게 된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에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동료 기사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있는 힘껏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기사들은 일제히 흑빛섬광을 향해 돌진했다. 제대로만 됐으면 그를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한 명이, 한 명의 기사가 두려움에 최고 가속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흑빛섬광은 그 틈으로 빠져나왔다. 이윽고 우측 사이드미러에 흑빛섬광의 모습이 보였다. 동찬은 기겁했다. 왼쪽으로, 아니, 위로 피해야했다. 재빨리 운전대를 돌리려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위험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법이었으니.

6

  동찬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모든 것은 끝나있었다. 동찬이 그 모든 결말을 본 것도, 그 결말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끝났다, 라고 하는 어떤 안도감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자신이 누워있는 것은 어떤 방이었다. 요즘은 보기 힘든 나무로 된 테이블과 나무 의자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테이블 위엔 찻잔과 물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동찬은 방 밖으로 나갔다. 집은 살풍경했다. 생활에 필요한 몇몇 물건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별 하나 떠있지 않았다. 오직 오래 된 가로등 하나가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부둣가 앞에는 까만색의 택시가 한 대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봉팔이 있었다. 동찬은 깜짝 놀라 그를 경계했다.

  "너무 경계하지 말게나. 죽이려고 했다면 하늘에서 이미 죽였을 거라네."

봉팔은 자기도 왜 그를 살렸는지 모르겠다며 껄껄 웃었다. 동찬은 그런 그의 말에도 잠시 동안 경계를 풀 수 없었다. 기사로 살아간 짧은 시간동안 그는 사람을 경계하는 생활방식을 배웠고, 경계를 푸는 것이 경계를 하고 있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는 잃은 것이 많지 않았지만, 많은 일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경계조차 풀면, 자신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편해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리로 오게."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동찬이 머뭇거리다가 다가가자, 그는 동찬의 어깨를 부드럽게 당겨 자신의 어바일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동찬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의 명예에 대해 칭송해야 하나, 온갖 생각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동찬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그 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기사가 되느라 많이 힘들었지?"

  동찬은 네, 라고도 아니오, 라고도 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냥 뭐, 라는 말로 대답했다. 봉팔은 그의 대답에 벌써 택시기사가 된 지도 40년이 지났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그 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로 딸에 대한 자랑이었다. 사춘기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수도권의 대학에 입학했다고, 매 학기 장학금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고, 매 주마다 꼬박꼬박 안부 카톡을 보낸다고, 안 그런척 하지만 효녀라고, 그는 말했다. 동찬에게서 그를 부르는 호칭, 흑빛섬광은 천천히 잊혀져갔다. 동찬의 눈에 그는 어느 새 딸을 사랑하는 한 명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다른 자녀분은 없으신가요?"

  젊은 기사가 던진 그 질문에 노년의 기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아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뺀질거리던 놈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부는 잘 못했지만, 그림을 잘 그렸다고. 뺀질거리긴 했지만 심성은 착한 놈이 있었다고 말했다. 취업을 준비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고 말했다.

둘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말을 꺼낸 것은 봉팔이었다. 그는 30년 전만해도 어바일이 없었다고 했다. 누구나 차를 몰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30년 전 만해도 택시기사는 천직 중에 천직이었다네."

  바다는 잔잔했다. 동찬은 느릿하게 움직이는 파도의 모습을 바라봤다. 늙은 택시기사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택시기사 따위 되기 싫었어."

  동찬은 고개를 숙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어바일의 표면은 차가웠다. 그리고 거칠었다.

  "누군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았겠나. 그런데 그 놈은."

  바다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봉팔의 셔츠 깃을 살짝 흔들었고, 나는 그들을 더 이상 보고 있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봉팔은 아버지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택시기사는 어느새 30년의 나이를 더 먹은 나의 아버지였다. 난 미래를 보는 것을 그만뒀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엄마가 들어왔다. 나는 얼른 펜을 들고 참고서에 줄을 그었다. 엄마는 나의 모습을 흘깃 보고는, 삶은 계란과 소금을 담은 접시를 내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삶은 계란이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해라. 그렇게 말한 엄마는 이어서 아까 혼내서 미안하다고,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말했다. 난 괜찮다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며, 엄마를 방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계란껍질을 깠다. 계란껍질을 까자 그곳에는 계란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다 깐 계란을 입에 넣었다. 씹어서 삼켰다.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물을 찾았지만 물은 내 방 어디에도 없어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야만 했다.

(200×85)

댓글 2
  • No Profile
    Serinus 15.10.14 08:19 댓글

    술술 잘 읽혀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배경이 되는 세계관이 너무 근사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을 정도로요. 다만 궁금한 것이, 피폭참치의 DNA가 두 배 라는 것은 DHA의 오타인가요? 

  • Serinus님께
    No Profile
    글쓴이 엠제이 15.10.19 17:07 댓글

    네. 오타 맞고, 수정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94 단편 속 검녀전 이니 군 2015.11.27 0
2193 단편 브레인스톰 민경일 2015.11.22 0
2192 단편 고리, 幻 장피엘 2015.11.16 0
2191 단편 니그라토 전체주의 니그라토 2015.11.09 0
2190 단편 검은 벽 칭소마라 2015.11.08 0
2189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마왕 깡치의 환생 니그라토 2015.11.06 0
2188 단편 지친 인간 블라우드 2015.11.04 0
2187 단편 [심사제외]괴우주야사 외전 : 인신국 옥황 투반 시니스 4세 니그라토 2015.10.30 0
2186 단편 [심사제외]초딩 우가우가 니그라토 2015.10.25 0
2185 단편 비와 달팽이 장피엘 2015.10.16 0
2184 단편 대가없이 사랑케 하소서 Serinus 2015.10.13 0
2183 단편 물속 아래 잠긴 시간1 레몬 2015.10.11 0
2182 단편 광야 qui-gon 2015.10.02 0
단편 젊은 기사, 스티그마르 폰 동찬 이야기2 엠제이 2015.09.21 0
2180 단편 42번째 지구의 대니 그린트 카엘류르 2015.09.21 0
2179 단편 식사진전 목이긴기린그림 2015.09.16 0
2178 단편 공기를 마시는 벌레 장피엘 2015.09.16 0
2177 단편 [심사제외]괴우주야사 외전 : 산야강, 옥황이 되다 니그라토 2015.09.13 0
2176 단편 [심사제외]괴우주야사 외전 : 카르즈키의 의뢰 니그라토 2015.09.12 0
2175 단편 [심사제외]스테이크 데이비드 니그라토 2015.09.07 0
Prev 1 ...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