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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공기를 마시는 벌레

2015.09.16 08:5809.16

공기를 마시는 벌레


밤사이에 흑염소 스무 마리가 죽었다. 일이 벌어진 장소는 마을 앞산에 있는 흑염소 목장이었다. 목장 주인이 아침 일찍 일어나 우리 안에 가둬둔 흑염소를 풀어주러 갔다가, 흑염소 스무 마리가 폭탄을 맞은 듯 갈기갈기 찢어진 채 죽어 있는 걸 목격했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이 흑염소 사체를 유심히 살피더니, 맹수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물어뜯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흑염소 스무 마리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죽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사체가 널브러져 있는 우리뿐만 아니라 목장 주변을 샅샅이 훑어봐도 맹수가 침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울타리가 이 미터 높이로 높게 쳐져 있으므로 아무리 높이 뛰는 맹수라 할지라도 단번에 뛰어넘는 건 불가능했다.

 

“간밤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나요?”

 

경찰이 우리를 빠져나와 목장 주인에게 물었다.

 

“자느라 못 들었어요.”

 

목장 주인과 마찬가지로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도 못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했다.

 

“흑염소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죽었는데,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경찰이 두 부부를 번갈아 보며 언성을 높였다. 흑염소 스무 마리가 떼죽음당할 때 우리 안이 떠내려갈 정도로 시끄러웠을 텐데, 근처 숙소에서 잠을 잔 부부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니까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니까요. 소리를 들었으면 당연히 일어나 가봤을 것 아닙니까?”

 

목장 주인이 경찰을 빤히 쳐다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거참! 이상하군요. 우리 안에 백 마리가 넘는 흑염소가 들어 있었고, 스무 마리가 죽을 때 분명히 떠들썩했을 텐데, 두 사람 모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니.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누군가 무단으로 침입해 죽인 것 같지 않으니, 저희는 일단 여기서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차후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하면 즉시 연락하시고요.”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흑염소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죽을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두 사람은 아무 소리도 못 듣지 못했다니까, 경찰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조사를 마치고 떠났다. 경찰차가 목장을 빠져나가자, 검은 개가 경찰차를 향해 컹컹 짖었다. 개는 덩치가 큰 셰퍼드 종이었다.

 

“메리! 조용하지 못하니!”

 

목장 주인이 소리를 지르자 검은 개가 곧 꼬리를 내렸다. 목장 주인은 곧바로 우리 안으로 들어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사체를 한 곳에 모은 후 기름을 부었다. 경찰이 떠나기 전에 땅을 파서 묻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혼자서 구덩이를 파려니 엄두가 나지 않아 불태워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왜 메리가 짖지 않았을까요?”

 

목장 여자가 화염에 싸인 사체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그러게. 우리야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니 못 들었다 해도 저 녀석은 소리를 들었을 텐데 말이야.”

 

목장 주인이 고개를 돌려 철문 옆에 서 있는 검은 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 검은 개는 귀가 밝아 소리를 들었으면 분명히 시끄럽게 짖었을 것이었다. 그럼 두 사람 중 한 명은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텐데, 개 짖는 소리는커녕 염소 울음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염소 스무 마리가 죽을 때, 검은 개도 소리를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염소 스무 마리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죽였을까. 그것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서.

 


그 시간 마을에 사는 두 노인이 마주 보고 앉아 밭에서 막 뽑아온 채소를 정성껏 다듬었다. 오른쪽에 앉은 조금 통통한 노인이 집 주인이고, 맞은편에 앉은 노인은 큰딸 이름이 옥이라서 옥이 엄마라 불렸다. 옥이 엄마는 덩치는 작아도 여간 부지런하지 않아, 장날만 돌아오면 직접 기른 채소를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았다. 마침 내일이 장날이라 시장에 내다 팔려고 노인과 함께 채소를 열심히 다듬는 중이었다.

 

“간밤에 목장에서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는데, 이야기 들었소?”

 

옥이 엄마가 잘 다듬은 열무를 바구니에 담으며 불쑥 말을 꺼냈다.

 

“아니요, 못 들었어요. 목장에서 무슨 요상한 일이 벌어졌는데요?”

 

노인은 밖에 나갈 일이 없다 보니 눈을 뜨고는 줄곧 집에만 있었다. 그래서 목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 글쎄! 염소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죽었다지 뭐요.”

“한 마리도 아니고,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죽었다고요?”

 

노인은 염소 스무 마리가 어떻게 한꺼번에 죽을 수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체는 갈기갈기 찢기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요. 이상한 점은 염소 스무 마리가 죽을 때 목장 부부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요. 목장에서 기르는 개도 짖지 않았고요.”

 

노인은 갈 때마다 무섭게 짖어대는 검은 개를 떠올렸다. 밤에 목장을 잘 지키라고 데려다 놓은 개가 왜 짖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듣고 보니 참 이상하군요. 염소 스무 마리가 갈기갈기 찢기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니. 아이고! 끔찍해라.”

 

생각만 해도 장면이 끔찍해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말하기가 조심스러운지 옥이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뭔데, 그래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어서 해봐요?”

“어제 저녁때 고추를 한 바구니 따서 돌아오는데,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목장으로 가더군요.”

 

목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옥이 엄마네 고추밭이 있었다. 낮에는 더우니까 고추를 못 따고, 해 질 무렵 잠깐 가서 딴다는 게 그만 늦어져 저녁을 넘기고 말았다. 옥이 엄마는 일 욕심이 많아 한번 일을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래서 어두컴컴해진 뒤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노인은 그런 옥이 엄마를 볼 때마다 불빛도 없는 데서 혼자 일하면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럼 옥이 엄마는 “이 나이에 무서울 게 뭐가 있데요.” 하고 웃어넘겼다. 전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해 고추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제야 일손을 놓고 밭에서 나왔다. 그때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목장 쪽으로 걸어갔다. 옥이 엄마는 귀신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고, 고추가 바구니에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오늘 아침에 열무를 뽑으러 갔다가, 간밤에 목장에서 염소 스무 마리가 죽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러니까 어제 저녁때 귀신을 봤다는 것 아니오?”

“귀신인지 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하얀 옷을 입고 가더군요.”

“그럼 귀신이 염소를 죽였을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요. 귀신이 죽였는지 사람이 죽였는지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옥이 엄마도 누가 염소 스무 마리를 죽였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전에 어린 처녀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잖아요. 혹시 그때 죽은 처녀 귀신이 나타난 게 아닐까요?”

 

십 년 전, 목장에서 살던 소녀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처녀 띠가 물씬 풍겨, 다들 죽은 소녀를 어린 처녀라 불렸다. 노인이 죽은 소녀 이야기를 꺼내자, 옥이 엄마도 그날 일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했다.

 

“처녀가 죽은 게 이맘때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때 목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 좀 해봐요.”

옥이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서 살았던 데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주워들은 게 많아,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마을 일에 빠삭했다. 그래서 노인은 전에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면 옥이 엄마를 찾아가 물었다. 그럼 옥이 엄마가 다른 사람 의견까지 보태 자세하게 말해줬다.




*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마을 앞산에는 목장이 있으며, 젖소들이 한가로위 풀을 뜯었다. 산이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해, 젖소를 기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풀밭을 밟으며 위로 올라가면 목화밭이 나왔다. 원래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자라던 곳인데, 모조리 베어 없애고 땅을 골라 목화를 심었다. 목화밭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박혀 있었으며, 주변에 밤나무를 심어놓아 늘 그늘이 졌다. 그곳에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앉아 책을 읽었다. 목장 뒤쪽은 경사가 심해 장난치다 떨어지면 목뼈가 부러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목장 위로는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데, 소년은 틈만 나면 이곳에 올라와 시간을 보냈다. 바위에 앉아 있으면 뒤쪽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책을 읽기에는 더없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늘 밑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벌들이 날아와 꿀을 땄다. 밤나무 꽃이 하얗게 피어 벌들이 꽃향기를 맡고 날아오는데, 벌들의 날갯짓소리도 소년의 책 읽기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때 목화밭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소년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책 읽기를 원체 좋아하다 보니 한번 독서에 빠지면 옆에서 누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모르고 책만 읽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목화밭을 지나 밤나무 쪽으로 옮겨갔다. 밤나무 뒤에 누군가 몸을 숨기고 소년을 훔쳐보았다. 소년보다 두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사내는 한 손을 뒤로하고 바위에 걸터앉아 책 읽기에 몰두해 있는 소년 쪽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때 꿀벌 한 마리가 나타나 소년 머리 위를 윙윙 날았다. 소년은 머리 위에서 귀찮게 하는 꿀벌을 쫓으려고 손을 높이 쳐들어 내저었다. 꿀벌이 휘젓는 소년의 손을 피해 밤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소년은 그제야 자신의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걸 알았다.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갑자기 나타나니까 깜짝 놀랐잖아.”

 

사내의 손에 낫이 쥐어져 있었다. 소년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이 매서웠다. 소년은 사내의 시선에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쳤다.

 

“형! 왜 그래?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소년은 사내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도망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사내는 낫을 높이 쳐들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권투선수 못지않게 체격이 좋은 사내와 달리 소년은 팔도 가늘고 가슴팍에 살점이 붙지 않아 빈약했다.

 

“너를 죽이고 말겠어!”

 

사내가 높이 쳐든 낫에 햇빛이 비쳐 번쩍했다.

 

“제발 그러지 마!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는 거야?”

 

소년은 발뒤꿈치를 바삐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사내가 들고 있는 낫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라, 뒤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간 밤나무 꽃에 내려앉아 꿀을 따던 벌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을 덮었다. 소년과 사내의 귀에는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위험하니까 더 이상 가지 마!”

 

사내는 소년에게 겁만 주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소년은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는 줄 알고 계속 낭떠러지 쪽으로 기어갔다. 사내는 위험을 감지하고 소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소년을 붙잡아 낭떠러지 쪽으로 더 이상 못 가게 막아야 했다. 하지만 소년은 사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더 겁이 났다. 가까이 다가와 들고 있는 낫으로 가슴을 찍을까 봐 두려웠다.

 

“오지 마! 오지 말라는데, 왜 자꾸 오는 거야?”

 

사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오자 소년이 흙을 흩뿌리며 소리를 질렀다.

 

“알았으니까 내 손을 잡고 일어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정말로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

“내가 너를 죽일 이유가 없잖아. 네가 일은 하지 않고 허구한 날 책만 읽으니까, 보기 싫어 겁만 주고 가려고 했어. 단지 그것뿐이야.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나 털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말고, 뒤로 물러나 있어. 그래야 내가 안심하고 일어날 것 아냐.”

 

사내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소년을 한심하게 생각하고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소년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부리나케 도망칠 생각이었다. 사내가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갑자기 변해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제 사내가 갑자기 달려들더라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졌다. 소년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하늘을 빙빙 돌던 벌들이 한곳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일제히 소년에게로 날아왔다.

 

“사람 살려!”

 

사내는 돌아서서 목장 쪽으로 내려가려다 비명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화염에 휩싸인 사람처럼 두 팔을 내저으며 몸부림쳤다. 사내는 소년이 왜 살려달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벌들은 보이지 않고 미쳐 날뛰는 소년만 보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나 좀 도와줘, 형! 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해.”

“벌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

“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잖아.”

 

소년이 고개를 숙이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털었다.

 

“장난치지 마. 그런다고 내가 속을 것 같아?”

 

하는 행동을 봐서는 몸에 벌레라도 한 마리 붙은 것 같은데, 보이지 않으니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더 있어 봐야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방향을 틀었다. 순간 소년이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사내가 달려가 소년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게 보였다. 사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가, 뒤로 발라당 드러누워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을 보았다. 강한 햇빛에 눈이 부셔 현기증이 일었다.

 

“이제 어쩌지. 이대로 내려가면 다들 나를 의심할 거야.”

 

사내는 허겁지겁 일어나 들고 있는 낫을 목장 뒤편으로 힘껏 던졌다. 그러고는 곧장 목화밭을 지나 목장 울타리를 통과해 도망쳤다. 이제 소년이 앉아 있던 자리에 주인을 잃은 책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날 오후 목화밭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책 한 권 챙겨 들고 목화밭으로 올라간 소년이 오후 늦게까지 내려오지 않자 뭐 하는지 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소녀는 몸이 허약해 풀밭을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팠다. 그래서 밖에는 잘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소년은 소녀와 함께 풀밭을 뛰어다니며 놀고 싶은데, 소녀가 집 안에만 있으려고 하니까 답답해 혼자 목화밭에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소녀도 소년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소녀는 목화밭을 지나 소년이 자주 찾는 바위에 다다랐다. 혼자 무슨 재미로 올라가 있느냐고 물으면 소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어도 재미있다고 했다. 소녀도 소년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책만 읽을 수는 없으니 다른 무언가를 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니까 시시하게 느껴졌다.

 

“어디에 갔지?”

 

소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년은 보이지 않고 책만 한 권 떨어져 있었다.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책을 집어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곳 흙이 어지럽게 파헤쳐져 있었다. 소녀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낭떠러지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밑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끄트머리까지는 가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내밀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소녀의 입에서 “어머나!” 하고 비명이 새어 나왔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소년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곧장 젖소들이 풀을 뜯는 목장 쪽으로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사람이 죽었어요!”

 

소녀의 외침을 듣고 사십 대 초반의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함께 살면서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여자였다.

 

“무슨 일인데, 큰소리로 떠들고 난리니?”

“저기 아래쪽을 보세요. 어서요, 빨리!”

 

소녀가 여인을 낭떠러지 쪽으로 이끌며 다급하게 말했다. 여인은 소녀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죽은 것 맞죠?”

“저 아이가 떨어질 때 너도 여기에 있었니?”

“아니오. 나는 조금 전에 왔어요. 오후 늦게까지 내려오지 않아 뭐 하는가 보려고 왔거든요.”

 

소녀의 시선이 땅이 어지럽게 파헤쳐진 곳으로 향하자, 여인의 눈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저건 또 뭐니?”

 

여인은 파헤쳐진 모양을 보고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올라와서 보니까 땅이 저렇게 파헤쳐져 있었어요.”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없었니?”

“아니오.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죠?”

 

소녀는 여인이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을 왜 무서운 눈으로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었으면 됐다.”

 

여인이 평소처럼 부드럽게 말하고는 아무도 못 알아보게끔 파헤쳐진 곳을 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소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여인이 하는 행동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이제 같이 내려가 사람들한테 알리도록 하자. 내 말 알아들었니?”

 

소녀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여인의 뒤를 따랐다. 목장에서 일하는 일꾼 두 명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목화밭 쪽으로 올라왔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집 안에 들어가 있어라.”

 

소녀는 알았다 말하고는 두 일꾼을 지나쳐 내려갔다. 집 앞에 이르러 돌아보니 여인이 두 일꾼을 데리고 소년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소녀는 집 안에 들어가 조금 전 목화밭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다른 무엇보다 파헤쳐진 땅을 발로 자근자근 밟은 여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의심스러워 그런 행동을 보였을까.”

 

소녀는 소년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분명히 누군가와 함께 있었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 누가 소년을 밀어뜨렸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눈치를 보니 여인은 누가 밀어뜨렸는지 대충 아는 것 같았다.

 

“누구였을까. 무엇 때문에 낭떠러지로 밀어뜨려 죽였을까.”


 

소년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목뼈 골절로 밝혀졌다. 경찰이 사체를 가져가 조사를 벌였지만, 타살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소녀는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땅이 파헤쳐져 있었다는 말은 끝까지 숨겼다. 그날 사내가 목장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진 사내를 의심했다. 사내가 소년을 낭떠러지로 밀어뜨려 죽이고는 도망쳤다 생각했다. 하지만 경찰한테는 그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목장 주인이 함부로 입을 놀린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내쫓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목장에 들어온 건 삼 년 전, 집안일을 돕는 여인이 목장에 들어오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목장 주인이 전날 누군가와 길게 통화하고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다. 부인이 아침 일찍 어디에 가느냐고 묻자, 다녀와서 이야기하겠다 말하고는 차에 몸을 실었다. 그날 사내와 함께 밤늦게 돌아온 목장 주인은 장시간 운전한 탓에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부인이 누구냐고 묻자 부모도 없는 불쌍한 아이니 내 자식이다 생각하고 잘 대해주라 했다. 부인은 젊은 일꾼 한 명 데려온 모양이다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목장 주인은 자신이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내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밥도 식구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먹게 하고 아이들한테도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라 했다. 소년은 말투가 거칠고 야생마 같은 사내가 싫어 말도 잘 나누지 않고, 소녀와 장난치며 놀다가도 사내가 나타나면 자리를 피했다. 소녀는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 처음에만 불편하게 여기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하루하루 늘어나자 점차 친숙해져 한 식구처럼 대했다. 나이는 소녀가 한 살 더 많기 때문에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데, 사내는 “저기요!”라고만 하고 누나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목장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다른 일꾼들이 날이 저물었으니 그만 내려가자 해도 혼자 끝까지 남아 일을 마무리 짓고 내려왔다. 일꾼들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냐고 물으면, 사내는 스스로 좋아서 하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건 절대로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사실로 믿는 일꾼은 아무도 없었다. 목장 주인이 친자식처럼 대하니까 혹시라도 자신에게 목장을 물려주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주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책만 읽고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소년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사내한테 물려주는 게 타당해 보였다. 문제는 사내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내는 일꾼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듣지 않고 일만 죽으라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목장에서 쫓겨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목장에서 사내를 가장 끔찍이 생각해준 사람은 집안일을 돕는 여인이었다. 목장 주인이 아무리 친자식처럼 대한다 해도 집에 들어오면 신경 써야 할 사람이 많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부인 눈치가 보여 대놓고 사내를 챙겨줄 수도 없었다. 여인은 몸에 좋은 음식을 따로 챙겨놨다가 몰래 주고, 일하다 다치면 너만 손해니까 짐승처럼 멍청하게 일만 하지 말고, 아프면 언제든 주인에게 말하고 쉬어라 했다. 한번은 사내가 독감에 걸려 크게 앓아누운 적 있는데, 여인이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딱 달라붙어 밤새 보살펴줬다. 덕분에 이틀 만에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일꾼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친자식이라도 그렇게는 못할 거라고 말했다. 여인이 그렇게 자신을 잘 챙겨주니까 사내도 거리를 두지 않고 허물없이 지냈다.

 

그런데 하필 소년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사내마저 도망치듯 목장을 떠나버려 목장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목장에 불어 닥친 불행은 소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곧바로 부인에게로 이어졌다. 소년을 땅에 묻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이 시름시름 앓더니 이듬해 봄에 숨을 거두었다. 목장 주인이 온갖 약을 사다가 먹여봤지만,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빠져, 병원 한 번 못 가보고 허망하게 죽었다. 소녀는 소년이 죽고 엄마마저 그렇게 숨을 거두자 충격을 받아 말하는 법을 잊었다. 잠을 자다가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목장 주인은 허망하게 부인을 떠나보내고, 딸마저 잃는 것 아닌가 싶어 불안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소년의 영혼을 달래주면 좋아질 거라는 말을 듣고 무당을 데려와 굿판을 벌였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장에 머리가 허연 노파가 찾아왔다. 노파가 목장에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화밭에 있는 밤나무를 모조리 베어 없애라 했다.

 

“저놈의 밤나무를 없애지 않으면 더 큰 불화가 닥칠 거야.”

“이보시오. 당신이 뭔데, 남의 밤나무를 베라 마라 하는 거요?”

 

목장 주인이 축사에 들어가 일꾼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노파가 찾아와 이상한 소릴 지껄인다는 말을 듣고 쫓아와 언성을 높였다.

 

“밤나무에 액운이 끼었단 말일세. 액운!”

 

노파가 갑자기 두 눈을 부라리며 침을 튀겼다. 그제야 목장 주인은 노파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목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니, 알아듣기 쉽게 찬찬히 말해보세요.”

“당신이 이곳 주인이오?”

“그렇습니다.”

“당신 눈에는 시커멓게 날아다니는 벌떼가 보이지 않소?”

 

노파가 손을 들어 밤나무를 가리켰다. 목장 주인 눈에는 하얗게 피어 있는 밤나무 꽃만 보일 뿐, 꿀벌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벌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시커멓게 날아다니는 벌들이 정녕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보이지 않으니까 안 보인다 하지, 보이면 내가 왜 안 보인다 하겠습니까.”

“오호통재라! 저 밤나무를 당장 베어 없애시오. 그러지 않으면 더 큰 불화가 닥칠 거요.”

 

노파가 혀를 끌끌 차며 목장을 떠났다. 그날 오후 목장 주인이 일꾼들을 시켜 밤나무를 당장 베어 없애라 했다. 일꾼들이 밤나무를 베어와 한군데 모아놓고 불을 지르자, 검은 연기가 치솟아 하늘을 덮었다.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와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들은 바람 소리는 벌떼가 하늘을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목화밭에도 더 이상 목화씨를 뿌리지 않아 풀만 무성했다. 그곳은 퇴비를 자주 주던 곳이라서 풀들이 잘 자라, 젖소들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풀을 뜯었다. 목장 주인은 젖소들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 풀을 뜯는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을 졸였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낭떠러지라서, 풀을 뜯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 소중한 젖소를 잃고 말았다. 처음에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일궈 목화씨를 뿌린 것도 그곳까지 젖소들이 못 올라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젖소들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 풀을 뜯는 횟수가 늘어나자, 목장 주인이 직접 쇠스랑을 들고 올라가 다른 데 가서 뜯으라고 내쫓았다. 하지만 그때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곳에 가서 풀을 뜯었다.

 

일꾼들이 밤나무를 불태워 없애는 날, 소녀는 창가에 서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가, 바닥에 검은 재만 남자 그제야 자리를 떴다. 그날 이후 소녀는 집 안에 틀어박혀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소녀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 머리가 이상해져 집 안에 갇혀 지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소녀는 소년이 죽고 세 번째 맞이한 봄에, 소년이 떨어져 죽은 낭떠러지에서 똑같이 떨어져 죽었다. 어른들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목화밭 주변을 거닐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낭떠러지 쪽으로 걸어가 떨어져 죽은 것이었다. 소녀마저 비참하게 숨을 거두자 목장 주인은 사는 집마저 헐값에 내놓고 마을을 떠났다. 헤어질 때 가장 슬퍼한 사람은 집안일을 도맡아한 여인이었다.




*

옥이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린 처녀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이야기는 언제 해도 가슴이 아팠다. 노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간밤에 목장에서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때 죽은 처녀 귀신이 나타나 흑염소를 죽였을까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분명히 하얀 옷을 입고 목장으로 가는 여자를 봤으니까요.”

“하얀 옷을 입었다 뿐이지, 귀신이라는 증거는 없잖아요?”

 

노인은 귀신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옥이 엄마가 목격한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귀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장 여자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어제 저녁때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목장에 나타나 문을 열어달라고 했으면 귀신이 아닐 테니까요.”

 

귀신이라면 굳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옥이 엄마가 찾아가 넌지시 물어봐요. 혹시 간밤에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목장에 찾아오지 않았냐고요. 그런데 목장 여자도 알고 있을까요? 어린 처녀가 이맘때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요.”

“이야기를 들었으면 알고 있겠지요.”

 

처음 땅을 일구어 일을 시작한 목장 주인이 그렇게 떠나고, 십 년 동안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목장 주인이 자주 바뀐 건 일할 사람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무엇보다 생각한 만큼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젖소가 줄어들어, 두 번째 주인이 이 년 만에 포기하고 떠났을 때는, 목장에 젖소가 스무 마리도 채 남지 않았다. 지금 있는 주인이 들어온 건 삼 년 전이며, 부부는 남은 젖소를 모조리 팔아 없애고 흑염소를 길렀다. 흑염소는 유순하고 젖소만큼 손이 많이 가지 않아 부부 둘이서도 충분히 기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욕심 부리지 않고 흑염소 열 마리로 시작했다. 부부 모두 짐승을 기르는 건 처음이고 성공한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인데, 흑염소가 한 마리 두 마리 늘어나더니 올봄에 백 마리를 채웠다. 흑염소 고기를 찾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 힘든 시기를 이제 겨우 벗어나는가 싶은 이때에, 하필 흑염소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죽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애지중지 키운 흑염소다 보니 사체를 불태워 없애는 부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조금 무섭네요. 밤나무에 액운이 끼었다는 이야기요. 그것 때문에 목장 주인이 가족을 모두 잃고 마을을 떠났잖아요. 노파가 말한 대로 밤나무를 다 베어 없앴는데도 안 좋은 일이 끊이지 않고 계속 벌어진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사람들 말대로 목장에 안 좋은 기운이 흐르는지도 모르죠. 다른 데는 다 괜찮은데, 거기만 가면 으스스한 데가 있잖아요.”

 

드디어 그 많은 채소를 다 다듬고, 바닥에 찌꺼기만 남았다. 옥이 엄마가 마저 치우고 가겠다고 하자, 노인이 손사래를 치며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빨리 가보라 했다. 옥이 엄마는 덕분에 빨리 끝났다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노인은 채소 찌꺼기를 쓸어 모아 두엄자리에 버리고, 빗자루를 가져와 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그렇다면 전날 밤, 목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날이 저물자 목장 주인이 언덕 위로 올라가 워워! 하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 흩어져 있는 흑염소를 우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흑염소는 매일 겪는 일이라 주인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행군하는 군인처럼 줄을 맞춰 내려왔다. 흑염소 무리는 서열이 정해져 있어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기다리고 있다가, 우두머리가 앞장서서 내려가면 나머지 흑염소가 순서에 맞춰 그 뒤를 따랐다. 목장 주인은 배고플 때 먹으라고, 흑염소를 몰아넣기 전에 건초를 미리 바닥에 깔아놓았다.

 

그렇게 흑염소를 우리 안에 몰아넣고, 목장 주인이 잠자리에 든 시간은 밤 열 시 반이었다. 부인은 삼십 분 늦은 열한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매일 보는 드라마가 그 시간에 끝나기 때문인데, 여자는 아무리 피곤해도 드라마는 꼭 보고 잤다. 그래야 잠을 푹 자지,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궁금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장 주인은 드라마에 빠져 사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드라마 중독자라고 불렀다. 여자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 귀담아 듣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며 드라마를 봤다. 그때마다 목장 주인은 “그놈의 드라마가 그렇게나 재밌나!” 하고 혀를 끌끌 찼다. 가끔 텔레비전 때문에 부부가 심하게 다툴 때도 있는데, 항상 이기는 쪽은 여자였다.

 

“저놈의 텔레비전을 없애든가 해야지, 원!”

“그랬다가는 내가 조용히 있을 줄 알아요.”

“조용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짐을 싸들고 나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나가긴 내가 왜 나가요. 나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아이고! 내가 말을 말아야지. 저런 꽉 막힌 여편네랑 이야기하는 내가 바보지.”

“밖에 나가서 물어봐요. 꽉 막힌 사람이 누구라고 하는지. 다들 당신이라고 할 걸요.”

 

더 이상 이야기해봐야 자기 입만 아프므로 목장 주인은 방문을 콱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여자도 적당히 하고 말아야 하는데, 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보니 싫은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렇게 다툼이 벌어져도 젊었을 때처럼 치고받으며 크게 싸우지는 않았다. 신혼 때는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네가 죽나 내가 죽나 보자며 치고받으며 격열하게 싸웠다. 그렇게 금방 헤어질 것처럼 대판 싸움을 벌이고, 다음 날 눈을 뜨면 부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마주하고 앉아 밥을 먹었다.

 

여자가 텔레비전을 끄고 들어가 잠자리에 들자 목장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목장을 지키는 검은 개도 그때까지 깨어 있다가 바닥에 바짝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우리 안에서 파란 불빛이 새어나왔다. 하나둘 늘어난 불빛은 스무 개를 채우고 멈추었다. 불빛의 진원지는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호랑나비 애벌레와 비슷하게 생긴 무척 큰 벌레였다. 애벌레 몸통에 형광물질이 들어 있는지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났다. 애벌레 스무 마리는 머리를 들어 주변을 살피고는, 각자 마음에 드는 흑염소 쪽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그때까지 흑염소는 자느라 아무것도 몰랐다. 애벌레가 가까이 다가오자 잠든 흑염소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애벌레는 그대로 벌어진 입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애벌레가 자취를 감추고 일 분도 안 돼, 풍선에 공기를 불어넣듯 흑염소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애벌레를 삼킨 다른 흑염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점점 부풀어 오르던 흑염소가 동시에 펑! 하고 소리를 내며 터졌다. 다른 흑염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지 잠에 빠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펑! 소리가 멈추고 난 후, 사방에 갈기갈기 찢어진 흑염소 사체가 나뒹굴었다. 사체들 속에는 흑염소 입 속으로 기어 들어간 애벌레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봤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반짝반짝 빛나던 푸른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몸통은 양동이 두 개를 맞대놓은 것만큼이나 컸다. 순간 애벌레 입에서 삐!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애벌레가 점점 작아져, 우리에 처음 나타났을 때 크기로 변했다. 반짝반짝 빛나던 푸른빛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잠시 후 애벌레가 한곳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차례로 우리에서 빠져나와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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