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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멸망 이후의

2017.07.20 20:1107.20

 


  
끔찍한 밤이었다. 물론 더 나빴던 때가 있긴 했지만 그건 다 지나간 밤들이었다. 친구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설주는 어둠 속에 앉아 다시금 폰 화면을 켰다. 파랗게 빛나는 불빛 속에 떠 있는 것은 고작해야 광고성 알림이 전부였다. 설주가 화면을 껐다. 몇십 분 전만 해도 죽고 싶을 정도로 졸리더니 갑자기 정신이 말끔해진 판이었다. 센터에서 만난 동견이라는 사람은 아마 아직 깨어 있을 거였다. 알긴 알았지만. 설주는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어디선가 진탕 술을 마시고 온 설야는 제 방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 설주는 그 인간의 위장이 원래 제 것보다 튼튼한지, 아니면 저와 똑같은 꼴인데 일단 술을 들이붓고 보는 건지 늘 궁금해 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란성 쌍둥이였고 설야 쪽이 누나였다. 이란성 쌍둥이야 유전자 조합이 좀 다르긴 하다지만, 결국 가족은 가족이었다. 여전히 술을 더 잘 마시는 건 설야 쪽이었다. 즐기는 것도 설야 쪽이었고. 마시려는 노력을 해 보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설주는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그는 술자리 분위기 자체를 싫어했다.
  
눈보라가 치는지 창문이 요란하게 덜걱거렸다. 설주는 이불을 몸에 더 단단히 두르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렸다. 일어나서 굳이 불을 끄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불쾌했고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되짚어 보려고 노력했다. 친구와의 약속도 지켰고 할 일도 끝내 놓은 판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대단히 불쾌할 일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탄 택시 기사가 꽤 무례하긴 했었다. 서너 날 전에 거스름돈 주는 걸 까먹고는 역으로 제게 화를 냈던 종업원도 있었고. 그러나 지나간 일이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더 깊이 묻으며 친구와 똑같이 집착에 대한 모든 욕구를 내놓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설주는 욕구를 팔고 오는 길이었다. 받은 값을 보면 거저 주고 온 쪽에 가까웠지만. 그들은 부작용을 경고했다. 아마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이런 극심한 불쾌감인 모양이었다. 설주는 감정을 눌러 보려 했다. 잘 되지 않았다.
  
이튿날부터는 새 시대가 시작될 거라고 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을 반겨 주던 회색 양장의 영업사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왜 하필이면 제가 사는 마을에 찾아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조사도 하지 않고 찾아온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설주는 앉은 채 몸을 뒤척였다.
  
그가 사는 동네의 거의 모든 사람이 세상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는 건 주민이라면 다 아는 얘기였다. 마을 앞에 서 있는 비석에는 그들이 정감록이나 미륵 신앙이 유행할 즈음 모여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의 사상도 변화하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변화의 흐름은 그들 마을을 비껴 간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기분이 나빠지면 그들은 친구들과 함께 지구 폭파 버튼이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년만화에 나오는 악당이 지구를 파괴하겠다고 떵떵거리면 그를 위해 환호성을 지를 사람들이었다. 진짜로. 물론 조건은 있었다. 기아나 질병 따위로 고통 받는 일 없이 단번에 목숨을 끊어 줄 것.
  
외부에 직장을 얻은 설주의 선배는 밖으로 나가고서야 외부인들이 그런 농담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외부 방송 매체에서 지구 멸망 이야기를 잘 안 하는 건 그냥 방송 매체라 그런 줄 알았다나. 사투리가 심한 지역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낯간지러운 서울말은 드라마에서나 쓰는 말이겠거니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소위 지구 멸망의 날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자주 등장했다. 새천년이 되는 999년이나 1999년에도 그런 식이었다고 했고, 2012년만 해도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 떠들썩했었다. 사람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시들을 해석하며 어떻게든 멸망을 예언하려 했지만 세계는 결국 알아서 잘 굴러갔다. 2000년 1월 1일에도, 2012년 1월 1일에도 사람들은 깨어났고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러니까 사실 설주의 마을 사람들도 실은 세상이 그렇게 쉽게 멸망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진심으로 멸망을 바라는 것처럼 굴었다. 그들은 일반인을 연기하는 광신도를 연기하는 일반인으로 살아갔다. 지구를 폭파시키기 위해 무슨 적극적인 프로젝트를 벌이는 일은 드물었다 해도.
  
그런 마을에 그런 영업사원들이 나타난 건 고로 지대한 계산 오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욕망을 삽니다.
  
일단 그 문구부터가 문제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욕망을 산다고 하면 무슨 비유적 표현인데, 밑에는 제대로 된 설명이 거의 없었다. 웬만하면 다 사지만 몇 가지 사지 않는 것이 있다고 짚어주고 있을 뿐이었지. 잘못 보면 무슨 성인용 마사지샵 광고로 보일 판이었다. 신고가 몇 건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광고는 철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와중에 포스터 개수도 무식하게 많았다. 붙이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를 돌려 보면 보이는 게시판마다 그 문제의 종이가 팔랑이는 것이었다.
  
욕망을 삽니다. 다만 이하에 게재되어 있는 몇 가지는 사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 타자를 배려하고 싶은 욕구, 특정 지칭 없는 일체의 욕구. 본사에서는 범죄자 양성이나 자살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상황을 지양합니다.
  
"돈 준다고 괜히 하고 그러지 마.“
  
승강기 벽면에 붙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설주에게 설야가 툭 말을 던졌다. 설주는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누가 돈 준다고 저걸 하겠냐."
"농담이잖아, 멍청아.“
  
설주는 인상을 쓰면서 밑에 있는 글씨를 마저 읽었다. 들어온 욕망은 세계를 구하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모두가 멸망을 바라는 동네에서 관심을 가질 법한 내용이 아니었다. 설주는 아마 이 괴상한 광고가 기부 장려 홍보지일 거라고 판단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광고 한 번 알아듣기 힘들게 만들어 놨다고 생각하면서.
  
12월의 겨울이었다. 덜컹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설주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 하나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설주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을 받곤 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짚기는 힘들었다. 굳이 따져 보자면 두어 해 전부터 그랬을까.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듯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쌓여 정신을 내리누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누군가 왜 살아가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는 죽는 게 힘들어서 살아간다고 했을 거였다. 목표 지점이라는 게 없었다. 오래 전에는 있었던 것도 같았다. 한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캘리그라피를 죽어라 했던 걸로 기억했다. 왜 그랬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꿈이 뭐냐고 하면 직업을 말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오래 전의 설주는 그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꿈이라는 건 대개 잡기 힘든 것들을 의미했다. 직업은 대개 목표였다. 어른이 되어 살아가다 보면 태반은 손에 넣게 될. 물론 그 직업을 얻지 못하게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직장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면. 그 다음은.
  
설주는 꿈과 목표를 구분했지만 꿈은 버리고 목표를 세우라고 하는 치들을 싫어했다. 사람에게는 종교가 필요했다. 그 종교란 꼭 신을 향한 것일 필요도 없었고, 내세를 생각하는 것일 필요도 없었다. 대개는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에 매달려야 했다. 그것이 사람의 얼굴을 덮어 눈이 멀지 않게 도왔다. 목표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설주는 판도라 이야기를 생각하곤 했다. 모든 재앙을 흩어 버리고 항아리에 희망만을 잡아 둔 판도라.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
  
희망은 종교였다. 그 자체였다. 설주는 그렇게 보았다. 그는 오래 전에 자신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들이 흔히 꿈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종교를 잃었고 그의 손 안에 남은 건 아주 못하지도, 동시에 아주 뛰어나지도 않은 글씨들뿐이었다. 엉성한 재능. 단순히 캘리그라피 자체가 목표여서 그렇게 살았던 건 아니었던 듯 했다. 틀림없이 뭔가가 더 있었을 텐데. 그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저는 수많은 다른 것들 중에서 글씨를 선택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손을 빠져나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주는 숨을 쉬었기에 살았다. 그뿐이었다.

 

"왜 다들 그렇게 세계 멸망 얘기를 좋아하지."

"죽고 싶다의 변형판 아닐까?"

"그럼 왜 죽고 싶다고 안 하고."

 

오래 전에 설주는 설야에게 물었었다. 설야는 상황을 간단해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설령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더라도 설야의 입을 통하면 뭔가 곧 죄다 해결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설야는 말했다.

 

"좀 더 터무니없으니까."
  
설주는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숨을 쉬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기 때문에 숨을 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길을 잃어버린 뒤였다. 설주는 기다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꿈이 사라진 순간 닫혀 버린 셈이었다. 아침은 오지 않았다. 설주는 멸망한 세계에 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 살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마음에 안 들어."

 

설주가 말했다. 설야는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술자리에 더 나가 보든가. 얘기하는 거 듣다 보면 마음에 들 걸."


아무 일 없이 시간만 흘렀다. 설주는 이야기의 재해석을 시도했다. 판도라 이야기는 멸망 속에 남아 있는 희망의 이야기였다. 희망이 무엇에 대한 희망이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설주가 읽은 건 아동 서적이었고 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설주는 그게 행복에 대한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목숨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아마 그 행복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설주는 민들레에 대한 동화책을 읽었다. 동화책에서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어디선가에서 어렴풋이 듣기로 세상의 불행 중 구십 퍼센트 이상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고 했다. 솔직히 그 구십 퍼센트가 어디서 끌어온 통계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마 또 다른 게을러터진 비유일 테지. 다른 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짜증을 낼 소리기도 했다. 그러나 설주는 꿈이라는 종교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희망을 생각할 때 사랑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래서일 거였다. 그는 욕망을 산다는 영업사원에게 사랑을 팔았다.
  
사실 설주도 원래는 그 광고에 대단한 관심이 없었다. 12월이 끝나기 사흘 전 그는 친구의 집에 들를 준비를 했다. 졸업 이후로 한동안 마주치지 못했던 친구였다. 설야는 현관 밖으로 발을 디디는 설주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곰팡이가 외출도 하냐."
"친구 약속."
"세상이 망해? 네가 나가게."
"망한다잖아.“
  
설주가 말했다. 설야가 인상을 썼다.
  
"진짜 거기 가?“
  
설주는 문을 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방문 사이로 앉아 있는 설야의 모습이 보였다. 설주는 최대한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낸 뒤에 밖으로 나갔다.
  
그와 그의 남매는 엄밀히 말하면 이주민이었다. 집값도 그럭저럭 쌌고 부모의 직장 또한 근처였던 걸로 기억했다. 그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마을에 들어왔다. 원래 소규모 마을 공동체라는 곳은 폐쇄성이 강한 편이었다. 당시 설주에게 관심을 보여 줬던 건 그가 찾아가고 있는 친구 한 사람밖에 없었다.
  
분명 이틀쯤 전에 약속은 다 잡아 놨는데 아침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설주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30분 뒤에 도착. 읽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1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을 때 설주는 옅은 불안감을 느꼈다. 만약에 없으면 어떡하지. 연락도 되지 않는 판이었다. 몇 초 정도가 흘렀을까, 종소리가 멎었다. 누군가 안에서 무어라 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기계가 망가졌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나야.“
  
짧은 침묵. 문 근처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잠시만.“
  
설주는 박스 따위가 쓸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포대 자루를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고. 그는 기다렸다. 잠금장치가 풀렸다. 반쯤 열린 틈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는 예상 외로 멀쩡해 보였다. 머리가 심하게 헝클어져 있는 것만 빼면.
  
"미안. 방금 일어나서 집 치우는 걸 깜박했어."
"괜찮아. 나 여기 서 있어?"
"아냐.“
  
거기까지 말한 친구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설주는 집 안의 어둠 속에서 굴러다니는 먼지 덩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전반적으로 살짝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외에는 딱히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들어와.“
  
이어지는 말. 설주가 조용히 웃었다.
  
"진짜 청소기 안 돌렸냐."
"안 치웠다니까!"
  
친구가 그러면서 웃었다. 입가가 조금은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설주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어쩐지 미소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이내 집 안이 어두운 이유를 알아챘다.
  
"방에 누구 있어?"
  
설주가 말했다. 열려 있는 방이 하나도 없었다. 문을 열지 않고는 거실과 부엌밖에 갈 수가 없었는데, 집 자체가 북향이라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친구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 거실 불을 켰다.
  
"아냐, 없어. 그냥 안 치워서 닫아 놨어."
"진짜 너무하구먼. 연락도 했는데."
"나가서 치킨이나 뜯을래?"
"괜찮아. 앉아도 되지?“
  
설주는 그러면서 거실 소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친구는 잠깐 거실을 살피는가 싶더니 마찬가지로 몸을 돌렸다.
  
"어, 난 양치 잠시만 하고 올게."
"그래."
"들어오지 마라."
"내가 왜 들어가?"
"아, 혹시 모르잖아!"
  
하는 말에 군더더기가 많았다. 설주는 그냥, 그간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과 주로 어울렸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가 소파에 걸터앉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겨진 설주는 거실 안을 구경했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텔레비전 옆에 어항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엔 없었다. 공기 방울이 나오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아예 치워 버린 모양이었다.
  
전반적으로 많이 부족한 집이었다. 거실엔 텔레비전 한 대, 소파 하나, 베란다에 빨랫대 두 개. 제가 있는 곳에서는 부엌이 보이지 않았다. 거실 크기가 작다 보니 그리 비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 집에 전에 한 번이라도 와 본 사람 눈에는 뭔가가 많이 부족해 보일 거였다. 원래 물건들을 가득 채워 놓고 지내던 친구였다. 설주는 원래 있던 책장이 사라졌다는 것도 알아챘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나던 퀴퀴한 냄새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설주는 잠깐 친구가 사라진 방향을 확인했다.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실 중앙으로 갔다. 한 바퀴 빙 돌아보던 중에 그의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소파 밑에서 뭔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설주는 몸을 숙였다. 소파 밑에서 빛을 반사하던 건 수십 개의 비닐 포장지들이었다.
  
물소리가 났다가 금방 끊겼다. 설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문이 열리기 전에 도로 소파에 앉았다. 친구가 젖은 손을 털면서 밖으로 나왔다. 
  
"내가 뭐 어디 연락해 놓을까? 아니면 같이 밖에 나가서 볼래?"
  
그가 말했다. 설주는 소파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
  
"밖에 엄청 추워."
"그럼 어디 예약해 놓을게. 있어 봐."
  
친구는 핸드폰을 들고 계속해서 거실을 서성였다. 그게 그냥 거실이 편해서인지, 아니면 손님이 거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인지 설주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닫힌 방들을 생각했다. 틀림없이 뭔가가 있을 거였다.
  
친구는 전화를 끊으며 자리가 남는다고 했다. 설주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갈 준비가 됐냐고 물었을 때 친구는 기다리라고 했다. 그가 어느 방의 문을 살짝 열고 안에서 코트를 끄집어냈을 때, 설주는 그 안에서 이끼 낀 어항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문은 금방 닫혔다. 설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너 요즘 붙어 있던 광고 봤냐?"
  
친구는 끝까지 닫힌 방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일이 없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게 분명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비웃고 넘어갔을 문제의 광고에 꽤나 관심을 보였던 까닭이었다. 그는 마치 그 광고를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것처럼 굴었다. 어쩌면 정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주는 한 달은 치우지 않은 것 같은 복도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친구가 현관문을 닫았다.
  
"근데 그거 믿을 만한 거 맞아?"
"경찰서 앞에도 붙어 있던데."
  
경찰들이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옳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광고물이 경찰서 문 옆에 며칠째 붙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회사에서도 나눠 준댔고."
  
회사에서도 전단지를 나눠 줬다는 소식을 알린 건 설야였다. 설야는 중소기업에서 인턴 일을 하고 있었다. 인턴한테 야근을 시키려 드는 것도 짜증나는데, 이걸 회사에서 나눠줄 건 뭐냐고 화를 냈던 걸로 기억했다. 친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주는 친구와 함께 건물 밖으로 향했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 조각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함박눈이 내렸더라면 지상에 구름이 내린 것 같아서 예뻤을 텐데. 아주 세기말적 분위기였다. 바닥은 질척거리지, 반쯤 녹은 눈은 화산재처럼 정신없이 흩날리지.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섰을 때 친구가 물었다.
  
"너는 근데 뭐 팔게?"
"있어."
  
설주는 그러면서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냥 친구만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저는 밖에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팔고 싶은 욕망도 딱히 없었고. 그냥, 친구의 상태를 보아하니 뭔가를 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병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들이 없으면 범죄를 야기할 욕망을 제외하고는 다른 걸 다 산다면, 아마 친구의 집착 같은 것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설주는 생각했다. 최소한 그의 삶에서 종양으로 작용하는 것들을 떼 내 줄 수는 있을 거라고.
  
“들렀다 가지?”
“응.”
  
그곳, 은 핸드폰 대리점처럼 생긴 곳이었다. 안에는 회색 정장을 입은 영업사원이 흰 데스크 뒤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설주는 친구와 함께 괜히 앞을 서성이다가 사원과 눈이 마주친 뒤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설주는 들고 있던 전단지를 괜히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다행이 사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 광고 보고 오셨나요?"
  
안은 상당히 깔끔했다. 하얀 벽. 위로 통하는 흰 나선형 계단. 핸드폰 사러 오셨나요, 같은 식으로 말하면서 영업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했다. 설주는 친구를 돌아보았다.
  
"네."
  
친구가 말했다.
  
누구도 욕망을 사고 팔겠다 따위의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작업은 꽤 전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최소한, 전문적으로 느껴지는 방식이었다. 사원은 계약서 네 묶음을 꺼내고는 두 개씩을 설주와 그의 친구에게 내밀었다. 설주는 약관들을 가볍게 눈으로 훑었다. 대단한 건 없었다. 개인정보는 외부에 유출하지 않을 것이며 필요가 끝난다면 바로 파기한다. 기타 등등. 단순 변심으로 인한 계약 변경은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여기서는 저 쪽이 구매자고 이쪽이 판매자다 보니 물건을 사는 경우와는 계약 방식이 다른 모양이었다. 설주는 이름을 적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친구는 이미 계약서 제출을 끝내고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주가 말했다.
  
"저는."
  
사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주는 잠깐 친구를 보았다가 말했다.
  
"약관을 좀 더 읽어봐도 될까요?"
"네, 그러셔도 됩니다. 그럼 이쪽 분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설주가 글자를 읽는 척 하는 동안 옆에서는 무언가 분주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대충 듣기론 그리 특별해 보이는 게 없었다. 사원이 친구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그가 내려왔을 때 설주는 빠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계약서를 다 채웠냐고 혹시 물어볼까. 마침 다른 사람이 또 하나 문을 열고 들어왔고 사원은 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광고 보고 오셨나요?"
"네, 그. 수면욕도 제거가 되나요."
"구입은 하고 있습니다만 수면욕이 제거된다고 해서 부작용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은 피로를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자잘하게 피로나 통증이 쌓일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사흘에 한 번 정도는 주무셔야 해요. 위 절제 수술을 수면에 적용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판매하시겠어요?"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평소 많이 바쁜 사람인 모양이었다. 설주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계약서의 글씨들을 읽었다. 욕구 판매 시 부작용 있을 수 있음. 몸이 욕구가 사라진 상황에 적응하는 기간이 있기 때문에 처음 며칠간은 욕구가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음. 약관들을 반도 읽기 전에 설주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꿈을 잃은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잃었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 꿈은 그의 곁에 없었다. 그걸 잃은 사람이 살아가려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거였다. 그는 삶의 불행 중 대부분이 사랑 때문에 발생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미국의 어떤 철학자에 의하면 행복은 욕구 나누기 현실의 값이라고 했다.
  
"어떤 거 팔러 오셨어요?"
  
문득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설주는 멈칫했다가 또다시 대충 말을 던졌다.
  
"아, 저는, 글쎄요. 둘 중 하나 고민 중이에요."
"저는 수면욕 때문에요. 프리랜서인데 마감 칠 때 졸려서 문제가 많이 생기거든요."
  
설주의 시선이 문득 상대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유리벽 너머로 누군가가 예의 그 욕구를 삽니다 전단지를 전봇대에서 뜯어내고 있었다. 설주는 펜을 집어 들었다. 어떤 충동이 저를 사로잡았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그는 이미 서명을 하고 있었다.
  
"저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좀 빼려고요."
  
그날 저녁이 되자 설주에게는 정말 원해서 욕구를 제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게 수면욕을 팔겠다고 말했던 프리랜서는 이름이 동견이라고 했다. 그들은 혹시나 부작용이 생기면 정보를 교환하자는 차원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들보다 조금 더 늦게 나온 친구는 설주에게 집을 청소할 예정이니 다음 날은 오지 말라고 했다. 설주는 그에게 무엇을 팔았는지 물었다.
  
"집착욕인데."
"뭐, 모든 집착욕?"
"응. 그간 내가 좀 그게 심했던 것 같아서."
  
욕구를 판 것치곤 그리 지갑이 두꺼워진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번 돈으로 뼈 없는 치킨을 먹었다. 친구는 간간히 자기 얘기를 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물건들을 버릴 수 없더라고. 정확히 언제부터 그랬냐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어. 어느 날 면접에 연속으로 세 번쯤 떨어지고, 사람들하고 헤어지고…둑이 터지기 직전이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진짜 터졌던 것 같아. 흘러나가는 걸 막으려고 무조건 모았어. 사진부터 시작해서 쓰레기라든가, 뭐 귤껍질 이런 것도 차 끓여먹을 작정도 아니면서 다 챙겼다?"
  
그는 맥주를 들이켰다.
  
“이젠 버릴 거야.”
“사진도?”
“사진도.”
  
첫날은 그래도 평소처럼 지나갔다. 둘째 날, 그러니까 12월 30일의 저녁에 설주는 설야와 함께 방송을 보고 있었다. 무슨 지구 멸망 버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고 혼자 남았을 때 지구를 멸망시킬 버튼이 있다면 누르겠냐는 거였다. 태반이 누르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 버튼 여기다 던져 주면 인류가 멸망했든 안 했든 누를 사람이 백 명도 넘는데."
  
그러면서 설야가 웃었다. 설주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근데 왜 누른다고 그러지?"
"뭐, 봐봐. 딱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사라졌는데 살 이유가 없다잖아."
"그럼 자살을 하면 되지. 왜 굳이 지구를 같이 없애는데?"
  
설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게스트가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다 사라졌고, 내가 굳이 그때 가서 아마존 밀림 같은 거 신경 쓸 필요가 없잖아요. 설주는 말이 끝나길 기다린 다음에 제 말을 뱉었다.
  
"난 저게 이해가 안 된다니까."
"솔직히 나도 이해가 안 되긴 하는데."
  
설야가 그러면서 말을 잠깐 끊었다. 또 뭐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없는 지구가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설주가 말했다.
  
"그러니까, 자기를 제외한 세상의 생명체들은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 죽이겠다 그거지.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 쟤들도 행복하면 안 된다."
"별로 다른 생명체의 행복 자체를 고려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근데 일관성이 없잖아."
  
일반적으로 유아들이 그런 식으로 사고한다고 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세상의 사물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고. 애초에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법이라고 대꾸할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설주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계속 말했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쳐. 그때 지구 멸망 버튼을 준다 해도 저 사람은 누르겠다고 할까?"
"글쎄. 그 얘기는 안 하니까 나도 몰라."
"아까 그 논리대로라면, 저 사람이 죽은 뒤에 쟤한테 지구가 무슨 의미가 있어?"
  
일반적으로 할 법한 대답들이 동시에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기억해 줄 사람들이 있다. 기타 등등. 그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죽어가게 된다면 그 때도 그 사람은 버튼을 누를까. 단순히 사랑받고 싶기 때문에 윤리를 지키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윤리라는 건 어차피 사회적 약속이니까, 사회적 약속과 함께 흔들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부류들. 사회가 없으니 윤리를 지킬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설주가 중얼거렸다.

"그냥 지구를 자기랑 같이 순장시키고 싶단 소리잖아."
"우리처럼 좀 가식을 버리면 좋을 텐데, 그치."
  
설주의 대답은 조금 후에 나왔다.
  
"그러게."
  
설주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지구를 구하고 싶어서 욕망을 판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실 전단지에 적혀 있는 지구를 구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글귀가 결정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준 게 아닐 뿐이지. 그가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 늘 지구를 구하고 싶어 하는 용사들의 마을이고,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욕망을 산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어도 그는 욕망을 팔았을 거였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팔면 아마 죄책감도 줄어들 거라고 설주는 믿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속은 불편해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 가슴 속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설주는 둘째 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언가 찬 것이 가슴에 점점 더 차오르고 있었다. 친구는 어째선지 연락이 없었다. 그는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밤을 보냈다. 새벽이 오기 직전에 그는 동견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잠이 안 오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아서요.
  
답은 잠시 후에 왔다.
  
잠은 잘 모르겠지만, 일 효율이 되게 떨어지네요.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욕망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뭔가 하던 일이 있긴 했던 걸까요.
  
설주가 적었다. 동견의 답변은 금방 도착했다. 일을 아예 손에서 놓은 모양이었다.
  
반작용이 있긴 한가 보죠.
  
설주는 동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전까지 며칠 정도 밤을 샜었는데, 상태가 좀 나아져서 계속 자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설주가 연락할 때까지. 그러나 정신이 말끔해졌을 뿐이지 그의 스트레스 수치까지 낮아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작업물을 검토할 때 점점 더 강박적으로 변했다. 설주가 연락했을 때는 그냥 컴퓨터를 부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했다. 설주는 좀 쉬라고 한 뒤에 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왜 자신이 그토록 속이 시린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사라진 대신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나? 그래서 속이 시린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욕망을 제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욕망을 떼어 내서 팔았는데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해 봤자 의사는 저를 미친 놈 취급할 거였다. 설주는 천천히 숨을 뱉었다. 입 속마저 찬 것 같았다.
  
인간은, 아니, 생물 개체는 유전자를 넘겨받으며 태어났다. 인간의 욕망이 여태껏 도태되지 않고 그렇게 강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뭔가 쓸모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꼭 필요한 특정 욕망을 빼고는 웬만하면 절제하라고 했던 철학자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말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렇게 지내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인류의 대부분은 들끓는 감정 속에서 살았다.
  
설주는 밤을 샜다. 그리고 12월 31일의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한 채 곯아떨어졌다. 그가 깨어난 건 대략 1월 1일의 새벽 즈음이었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양말 두 켤레가 추가되어 있을 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다시 폰을 확인하려다가 말았다. 어쩐지 앞으로도 친구에게서는 따로 연락이 안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판 것은 일체의 집착이었다.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 얼마나 많을지는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설주는 광고지에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욕망들은 지구 멸망을 막는 데 쓰인다고 했다. 지구가 어떻게 멸망할 예정이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게 부서지는 세계를 보수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그 욕망은 뭔가 대단한 것들일 터였다. 정확히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 정도까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제 꿈이 예전에 사라진 것도 욕망을 사는 회색 신사들에게 팔아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글쎄,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원래 불안정하기 마련이었다. 팔아 버리고 나서 잊었을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되게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저 자신의 재능을 엉성한 것으로 평가했었다. 영원히 제대로 된 실력자는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어느 날 차라리 꿈이 없으면 불행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문득 거래의 취소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잘 말하면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할지는 가면서 생각하면 될 거였다.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고 할까. 수면욕을 팔지도 않았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거래를 취소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차올랐지만 설주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해가 뜨기 전에 그는 나갈 준비를 했다. 설야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제가 자는 동안 나가서 술파티를 한 모양이었다. 설주는 나가기 전에 집 내부를 한 번 돌아보았다. 고요했다.
  
나가려는 찰나 그는 갑자기 문에 드리워지는 제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해가 뜬 것처럼 창밖이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해가 뜨기 전이면 푸른빛이 천천히 퍼지다가 새가 지저귀기 시작하는데. 그는 망설이다가 창가로 돌아갔다.
  
회색 양장을 입은 사람들 몇몇이 분주하게 뒷산의 산책길을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설주는 나무들 사이로 산 능선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곧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산등성이를 따라 정체불명의 노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회색 신사들이 팔을 움직였다. 무언가가 창문에 달라붙었다가 미끄러져 내렸다. 눈송이였다. 순식간에 거세진 눈발이 시야를 가렸다.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이었다. 눈은 여전히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부서진 하늘 조각이 떨어지는 것처럼. 설주는 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회색 신사들이 하늘에 난 까만 구멍 같은 것에 무언가를 채워 넣고 있었다. 눈발이 점점 더 심하게 흩날리다가 일제히 그쳤다.
  
하늘은 연한 파란색을 띠고 있었다. 눈이 내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색 신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빛이 번지면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설주는 거리를 달리는 차들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기현상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설주는 한때 자신의 세계였던 것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12월 31일의 세계는 1월 1일의 세계로 이어졌지만 두 가지는 완전히 달랐다. 설주는 창을 열고 겨울바람 속에 서서 가만히 하늘의 끝을 바라보다가 침대로 돌아갔다. 그는 또다시 자신의 종교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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