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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적과 흑의 시기

2021.02.13 17:2602.13

적과 흑의 시기

 

 

영채가 한 마짜리 누런 천을 덮고 숙소 바닥에 누웠을 때 백부장 사무실 방향에서 김형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요양원에서 도착한 편지를 읽으려던 참이었다. 편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영채에게 전달되었다. 햇빛보다 편지를 더 자주 보는 셈이었다. 봉투 한구석에 금박으로 인쇄된 ‘Town of Oh-Melnas’라는 이름은 영채의 0전 1패 인생을 위로하는 듯 빛났다. 이전부터 모아온 편지들은 영채의 잡동사니 상자에 쌓여 몇 달 사이에 금세 삭았다. 영채는 한 달에 한 번씩 상자를 열어 가장 빛나는 그 편지를 담았다.

영채는 숙소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김형은 백부장 사무실 문틈에 몸을 반 끼운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사내 한 명이 그 앞에 서서 주눅이 든 표정으로 김형의 난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 복도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사내는 김형과 함께 소각조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실 안쪽에서 백부장이 밀쳐냈는지 김형은 또 비명을 지르며 복도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김형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나무토막 같은 사람 팔이 몇 바퀴를 굴렀다.

“내가 먼저 잡았잖애! 내가 먼저 봤고 내가 먼저 잡았잖애!” 안 그래도 목소리가 다 갈라진 김형이 찢어져라 외쳤다. 갈라진 동시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은 소각조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광부들의 특징이었다. 시끄러운 소각로를 가까이서 가동해야 하는 그들은 가는 귀가 반쯤 먹었고, 자신들끼리도 큰 목소리로 의사를 주고받아야만 했다. 짜증이 난 백부장이 사내를 째려봤다. 사내는 결백한 얼굴이었다. “아깐 혼자서 들고 날랐담서?” 백부장이 묻자 사내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눅은 들었어도 챙길 건 챙겨야겠다는 의지였다. “나 혼자 나르고 나 혼자 제사까지 지냈제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이보게요 형님. 시체 하나 갖고 두 명이 노나먹는 법이 전에 있었대요? 배 떠났소. 떠난 배 뒷구녕에다 대고 이러고 소락배기 질러봤자 아무런 의의도 없다고.” 백부장은 그렇게 못을 박고 다시 사내를 쏘아봤다. “자네도 다음엔 연장자한테 양보도 한 번씩 좀 하고. 어린노모 새끼가 언제 뒤질지 모르는 양반 상대로…….” 백부장은 조금 궁시렁거리는가 싶더니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자 사내도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겨진 김형은 주저앉아서 목놓아 울었다. “늙은 놈은 몸이 느려서 그럼 뭘로 휴가를 받으라고! 햇빛도 못 보고 여기서 뒈지라고!” 그렇게 10분 정도 울다가 지쳐서 자기 숙소로 조용히 돌아갔다. 검은 팔과 정체불명의 썩은 찌꺼기들이 사무실 앞에 덩그러니 놓였다.

김형에겐 참 안 된 일이긴 해도 시체를 수습해 위로 휴가를 받을 기회는 소각조나 운반A조 광부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다 타고 남은 잿가루만 뒤집어쓰는 영채 같은 용해조나 운반B조 광부들은 무급 월차를 쓰거나 꼼짝없이 연가만 기다려야 했다. 어차피 요양원 생활비나 약값, 검진비, 간병비까지 요양원에 들어갈 돈들을 생각하면 바깥에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광산 어른들은 거의 매 순간 휴가만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영채에게 젊은 놈이 바깥에도 좀 나가야 연애도 하는 법이라고 충고했지만 모르는 소리였다. 오래 나가봐야 일 년에 보름이 채 안 됐다. 바깥엔 광부를 사랑해줄 사람도, 영채가 지낼 집도 없었다.

영채는 다시 자리에 누워 편지봉투를 열었다. 할머니 사진들과 종합검진결과보고서가 영채의 가슴 위로 쏟아졌다. 영채는 그것들을 다시 모아 들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꽃병을 어색하게 들고 있거나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아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건강 상태를 증명하는 듯했다. 종합검진결과보고서는 온통 알 수 없는 말들만 적혀 있었다. 대충 어떤 수치가 낮다거나 무언가가 의심된다는 내용 같았다. 의사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영채는 ‘같은 연령의 환자들 평균에 해당’한다는 소견만 확인하면 되었다.

단순한 관찰보고가 인쇄된 편지 하단부에는 간호사의 전달사항이 볼펜으로 정중하게 적혀 있었다.

 

‘FreshFacilities, SafeHesitation, TechnicalMedical Equipment, Sincerity를 쏟는 Smart and Professional Methodology. 안녕하세요. 고객 감동과 입주민 행복을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Town of Oh-Melnas의 매-2동 수석 간호 요원 최현담입니다. 고객님께 안부를 전달 드리기 전에 우선 저희 오멜라스 타운의 공고한 원칙들 중 두 가지를 말씀해두고 싶습니다. First, 확실한 Physical Health Care에서 더 나아가 입주민의 Mental Health를 위해 힘쓸 것. Second, 피상적인 Mental Care에 그치지 않고 보다 ScientificMethod를 적용하는 데에 주저하지 말 것. 이에 저희 오멜라스 타운에서는 Artical한 미술 작품과 오케스트라 공연 제공은 물론이고 국내에 단 세 대밖에 들어와 있지 않은 최첨단 Brain Wave Screening Device, ‘EGGD’를 운용하고 있으며 입주 등급과 상관없이 해당 장치를 모든 입주민 여러분들께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입주민의 안부를 걱정하시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십니까? 종합검진결과보고서에서 확인하셨다시피 고순례 할머니께서는 건강하게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제가 이렇게 긴 안부를 전하기 위해 직접 펜을 들게 된 건 다름이 아니오라 할머니께서 보름 전부터 보이고 계시는 이상 행동에 관련하여 한 가지 요청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물론 아주 사소한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할머니께서 저희 타운에 처음 입주하실 때 물건을 하나 두고 오신 모양입니다. 할머니께서 아끼시는 물건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좌측에 흰 뱀, 우측에 붉은 뱀이라는 이미지와 관련된 물건이 있나요? 할머니께서 애타게 그 물건만 찾고 있어서 의료진들이 걱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빨리 물건이 할머니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부합하는 물건이 있다면 부디 지참하시어 저희 타운으로 방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가족 같은 마음으로 언제나 입주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Town of Oh-Melnas 올림

 

앞부분은 대부분 알아먹지 못했지만 등급별 알츠하이머 요양 금액표가 동봉돼 있는 걸로 봐서는 치매 등급을 수정하려는 것 같았다. 간단한 치매 증상은 이미 있었고, 또 건강검진에서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으니 어차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좌측에 흰 뱀, 우측에 붉은 뱀. 영채는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봤지만 떠오르는 물건은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별 수는 없었다. 집을 정리하고 요양원에 완전히 입주한 지 벌써 3년째였으니까. 영채는 반송하기 위해 편지지를 뒤집어 적었다. ‘못 가요. 제가 여기서 나가면 할머니도 거기서 나와야 해요.’ 요양원 비용이 조금 저렴해진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영채가 용해조로 배정됐을 때, 소각조에서 냉각을 담당하는 김형은 영채를 ‘소각조를 배신한 오입쟁이’라고 나무랐다. ‘오입쟁이’는 소각조 광부들만의 은어였다. 여러 명의 남성들이 하나의 구멍에 걸쭉한 액체를 밀어 넣는다고 지어진 별명이었다. 처음엔 김형이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도시광산에 처음 들어온 광부라면 일 년 동안 부서 내 네 개의 조에서 수습 기간을 거친 뒤에 조를 배정받게 되어 있었다. 소각조에서 결의 같은 걸 한 적도 없었고, 영채는 그냥 백부장에 의해 용해조 광부가 되었을 뿐이지 오입질에 무슨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고작 시커멓고 뜨거운 정체불명의 싱크홀에 액체 형태로 용해시킨 폐기물들을 쏟아 넣는 게 용해조 작업의 전부였다. 웃어넘기기 위해 같은 청백부 식구잖아요, 하고 목소리를 높여 유대감을 건드리면 “오입쟁이하고는 말도 안 섞는다.”라고 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항상 먼저 말을 건네는 건 영채가 아니라 김형 자신이었는데도 말이다.

드릴 장치 안에 앉은 영채는 멜팅박스 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흰 뱀과 붉은 뱀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그건 물건 같은 게 아닐 것이었다. 흰 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붉은 뱀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뱀 인형도 아닐 터였다. 짐작할 수 있는 건 그런 색상의 머리끈 정도인데 할머니는 머리를 고정할 때 끈이 아니라 머리핀을 이용했다. 붉은 뱀 같은 건 영락없는 헛소리였다. 벽에 똥칠을 하게 된다는 치매에 대해 영채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조장이 신호를 보내왔다. 요란한 신호음에 화들짝 놀란 영채는 다급히 하강 버튼을 눌렀다. 영채가 탑승한 드릴 장치가 천천히 돌며 잿더미를 향해 조금씩 내려앉았다.

영채는 장치가 잿더미 표면에 닿았을 때 고도를 기록했다. 용해제 투입 위치를 정하는 건 신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잿더미 표면이 너무 낮거나 용해제를 너무 높은 곳에 심을 경우엔 용해제가 터질 때 광부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용해제를 너무 깊게 심으면 멜팅박스 하부가 마모될지도 몰랐다. 멜팅박스는 내식성이 굉장히 높은 듀플렉스 특수강으로 되어 있었지만 용해제가 터질 때 충격이 너무 강했으므로 용해제 위치는 최소한의 고도가 갖추어져야 했다. 고르지 않은 잿더미 표면의 평균을 잘 측정하고 안으로 파고드는 동안 빠르게 고도 계산을 마치는 게 영채의 역할이었다. 잿더미 무게 때문에 장치 하강 속도가 더뎌졌을 때 ‘약 진동’ 버튼을 눌렀다. 장치가 헐겁게 진동하며 다시 파고들기 시작했다.

용해제를 설치하고 장치를 다시 상승시키려던 순간 관측창 너머로 붉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영채는 잠시 장치를 멈추고 그 물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잿더미에 파묻혀 있어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털실 재질의 천 조각 같았다. 혹시나 관측창을 두드리면 잿더미가 섞이면서 물체가 더 잘 드러날까 싶었지만 관측창은 진동이 전달되기엔 너무 두꺼웠다. 눈을 비비고 관측창 너머를 얼마간 들여다보다가 경보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용해제 폭발까지 2분도 안 남았다는 뜻이었다.

겨우 30초 정도 늦게 이탈했을 뿐인데 선배 광부들이 영채를 강하게 윽박질렀다. 차라리 한숨 푹 자고 나오지 그랬냐고 소리쳤다. 장치 원위치한 뒤로 20여 초나 여유가 있었음에도 모두가 하나같이 성화였다. 사람은 죽어도 금방 대체가 되지만 장치가 박살나면 몇 주는 고생해야 한다는 원색적인 비난이 시커먼 멜팅박스를 채웠다. 하지만 영채의 머릿속엔 붉은 뱀과 정체불명의 붉은 천 조각밖엔 들어 있지 않았다.

붉은 천 조각은 이후로도 계속 발견되었다. 소각로에서 살아남은 불순물일 리는 없었다. 웬만한 강철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게 소각로의 열기였다. 그런 천 조각이라면 폭발을 하기도 전에 이미 불타 사라졌을 터였다. 소각된 이후에 섞였을 가능성밖엔 없어서 처음엔 운반B조 광부들이 장갑 같은 걸 떨어뜨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자주 발견될 리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운반조 광부들도 장치를 이용해서 폐기물을 운반했고, 장갑도 손바닥 부분만 빨간 목장갑을 사용했다. 그마저도 하루 이틀 사용하면 금방 닳아서 연한 분홍빛을 띄게 되었으니 차라리 영채가 자주 환각을 본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하강을 멈춘 채 약 진동 버튼을 누르자 장치가 제자리에서 요란하게 움직였다. 천 조각은 잿더미에 섞여 조금씩 움직였다. 모습을 감추고 드러내길 반복하다 마침내 관측창에 바짝 붙었다. 진동을 멈추고 천 조각을 유심히 살폈다. 체육대회 때 사용하는 아대였다. 면밀히 살필수록 확실해보였다. 하지만 붉은색 아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학교를 다녀본 소수의 광부들에게 물어봤지만 모두가 청군 혹은 백군이었을 뿐, 도시광산에 적군 출신은 없었다.

 

고객님의 사랑과 효심에 잘 무르익은 오멜라스 타운의 가을, 고순례 할머니께서는 건강히 아주 잘 계십니다. 아직 끼니를 거른 적이 없으시고 밤마다 아주 잠깐 잠을 설치며 흘리시는 눈물은 오멜라스 타운의 성심과 고객님의 사랑에 기름진 할머님의 마음 밭에 흐르는 감동의 젖과 꿀인 듯합니다. 미약한 고혈압과 동맥경화는 저희 오멜라스 타운의 조리사들이 특별히 계획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통해 호전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장용종과 백내장에 대해서는 관련 분야 최고 전문의들로부터 집중적인 약물치료 과정이 진행 중입니다. 정상 중에서도 아주 정상적인 상태에 계시며, 조금이라도 증세가 악화되면 즉시 수술할 여건이 되는 상태입니다. 특히 수술은 걱정하실 바가 전혀 없을 정도로 아주 간단한 공정을 거치는 시술에 가깝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상황은 굉장히 낙관적입니다. 타운에 방문할 여건이 없으시다는 회신은 잘 전달받았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입주민 할머니의 안부를 걱정하시는 고객님의 효심에 저희 오멜라스 식구들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저희가 그 물건을 대신할 수 있을 만한 다른 대체품이 없을지 고견을 묻고 싶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수고를 더해주신다면 할머님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삼가 생각합니다.

ps) 할머님께서 다치게 하신 저희 직원의 진단서를 동봉합니다. 전혀 신경 쓸 바 없으시며, 치료비는 요양비로 일괄 청구됩니다.’

 

*

할머니는 영채의 기억이 시작된 때부터 이미 너무 늙어 있었다. 참관수업이 있어도 할머니에게 알리지 못했고, 운동회 때엔 친구들 가족네 돗자리를 옮겨 다니며 김밥을 얻어먹곤 했다. 영채가 참가할 수 있는 팀 대항 종목은 모두가 뛰어들어야 하는 줄다리기나 박 터뜨리기뿐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했겠지만 팀에 기여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남몰래 진을 뺀 다음날이면 예외 없이 몸살을 앓았다. 자신의 역할은 주인공들의 체력을 보전하기 위해 익명의 공간에서만 불타는 연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찍 이해했다.

비록 대표 계주로 뽑히지는 못했지만 영채는 달리기가 빨랐다. 학부모들의 응원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영채는 모든 학생들이 번갈아 달리는 개인 경주에서만 뛸 수 있었다. 영채는 일곱 줄의 트랙에서 중간에 섰다. 총성이 터져 나왔다. 영채는 달렸다. 십수 명의 학부모가 트랙 바깥에서 함께 달렸다. 여섯 개의 이름들이 트랙 위로 끼얹어졌다. 누구도 자신의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채는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누군가 넘어지지 않는 이상 영채는 언제나 붉은 인주가 묻은 7등 도장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맞은편 먼 곳에서 높이 솟아 연기를 뿜는 굴뚝이 보였다. 그 굴뚝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다가 모르는 사이 아파트단지 입구 앞을 지나치기도 했다. 영채는 기진맥진했고, 굴뚝은 매일 연기를 뿜었다. 친구들은 그걸 탑이라고 불렀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단순히 높기만 한 굴뚝은 정말로 굴뚝이라기보다는 탑에 가까워 보였다. 누군가는 바벨탑이라고 불렀고, 에펠탑, 다보탑, 피사의 사탑 등 붙일 수 있는 모든 별명이 굴뚝에 붙었다. 용도는 아무도 몰랐다. 오직 높았고, 연기는 하늘나라에 오르려는 죄인들처럼 계속 치솟았다. 집에 도착한 영채는 어디든 바로 누웠다. 손등에 찍힌 7등 도장은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번져 있었다.

영채가 사는 아파트는 시원하게 굽어 있는 12차선 고속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은 고층이었다. 영채의 부모가 할머니에게 남기고 간 집이라고 했다. 그들이 누군지, 왜, 어디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출처 모를 넓은 집에 누워서 창밖을 보면 어김없이 탑이 솟아 있었다. 해는 탑의 반대편으로 졌다. 높은 곳에서 보면 역시나 탑보다는 굴뚝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렸다. 연기는 지하 깊은 곳에서 연소된 도시의 동력원이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거실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할머니는 고속도로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영채가 착용하고 있는 아대 색깔을 보며 청군이었냐, 백군이었냐, 뻔한 질문을 건넬 뿐이었다. 근데 파랑 반대는 빨강이고, 하양 반대는 검정 아니야? 언젠가 영채가 묻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적군이랑 흑군은 없어? 할머니는 생각에 잠겼다. 노을빛을 받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듬해 아대와 헤어밴드를 사기 위해 체육사에 들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체육사 사장에게 물었다. 40대 정도 되는 젊은 남성이었던 그는 진열된 아대들을 보며 할머니처럼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검정색은 쉽게 뜨거워지는 거 알지? 백군한테 불리해지니까 그런 것 같은데.” 영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적군은요?” 사장은 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붉은 깃발을 든 군중이 승리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빨강이나 검정이나 뭔가 안 좋은 축 같잖아. 무조건 청군 아니면 백군이 이겨야 좋은 거지. 내가 뭔소리를 하냐. 나가는 종목 있어?” 팀 대항은 박 터뜨리기랑 줄다리기밖에 없다고 영채가 설명하자 그럼 개인 달리기라도 이기라고 격려해줬다. 영채는 싸우기 전부터 패배하는 팀에 대해 생각했다. 그해 달리기에서도 영채는 붉은색 7등 도장을 받았다.

 

할머니의 치매가 처음 발견된 건 영채가 고등학생일 때였다. 밥을 먹던 할머니가 문득 어두운 창밖과 시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왜 이렇게 밤이 늦어서야 자신을 깨웠느냐고 나무랐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해결하던 중이었다. 영채는 자신이 그동안 막연하게 외면해왔던 비극이 기습적으로 찾아왔음을 즉시 받아들였다. 이후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에서 빠지고 일찍 하교해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치매가 확실해 보였지만 할머니 본인이 받아들일 때까지 병원에 가보자고 설득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할머니는 거동이 힘들었을 뿐 불행히도 건강했고, 병원에 갈 다른 구실이 생길 때까지 얼마간 방치해야만 했다. 진료가 없이는 약 처방도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면 매일을 집에서만 보내는 할머니가 치매로부터 오랫동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머니는 영채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어 달 동안 그 집에서만 버텼다. 그 뒤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영채는 도시광산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일반 요양원으로 할머니를 모셨지만 그 동안 크고 넓은 집에 살았기 때문인지 요양원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했다. 여러 요양원을 오간 끝에 지금의 오멜라스 타운으로 입주하게 됐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정정했다. 요양원으로 은행 관계자들을 불러 부동산과 모든 재산을 영채에게 상속 처리했다. 요양원 비용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영채는 상속받은 집을 즉시 팔았다. 은행 이자라도 받아서 요양비를 충당해볼 셈이었다. 하지만 세금을 제하면 큰 차이 없었다. 소액의 치매 지원금과 월 단위로 환산된 은행 이자를 포함해도 모든 월급은 요양비로 지출됐다. 모이는 돈은 없었다. 고작 현금 재산을 유지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도시광산에는 도시의 모든 쓰레기가 모였다. 운반A조부터 용해조까지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치면서 영채는 쓰레기의 모든 형태를 다 봤다. 도시에 패배하고 탈락된 쓰레기들은 공업용 긴 배관을 통과해 도시광산에 떨어져 운반되고, 소각되고, 다시 운반되고, 용해되어 지층 깊숙이 버려졌다. 더러 시체도 있었다. 공장마다 쓰레기를 밀어 넣는 구멍이 있었는데, 거기서 투신한 시체는 운반A조의 영역으로 떨어졌다. 시청에서 자살을 방지하겠다는 명목으로 굴뚝 꼭대기에 망을 설치한 이후로는 오히려 소각장에서 더 많은 시체가 검게 탄 채 발견되었다. 불만이 생긴 운반A조 광부들은 조심스럽게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무언가 발견될 확률이 적은 소각장에 즉시 시체가 떨어져야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헛된 행정을 했다는 것이었다. 실상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정말로 발견되는 시체는 적어졌다. 소각조 광부들 입장에선 기뻐할 일이었다.

우리가 탑이라고 불렀던 굴뚝을 김형은 좆대가리라고 불렀다. 광부들의 정력을 태운 연기가 그리로 배출된다고.

 

*

장치 탑승실에서 용해제를 제조하고 있을 때 쩡- 하고 도시광산 전체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철판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였다. 광부들은 도시광산이 무너지진 않을지 긴장했다. “시벌. 지진 아니여?” 누군가 외쳤다. 모두가 말을 아꼈다. 그들은 일이 끝나고 숙소에 누웠을 때도 광산에서의 힘든 생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말하지 않으면 허구가 된다는 듯이. 아마 지금쯤 압사될 것을 고려해 미리 준비해둔 유언을 되뇌고 있을지도 몰랐다. 불길하게도 더는 잿더미가 관문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분을 기다렸을 때 운반B조 광부가 멜팅박스 내부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소각로가 무너졌답니다! 다들 대기하시래요!” 광부들은 조금씩 웃었다. “예미, 대기는 무슨 대기. 소각도 나가리된 마당에. 나는 들어가서 편히 대기할라네.” 한 광부가 선동하자 다들 떠들면서 숙소로 떠났다. 영채도 뒤늦게 따라나섰다. 당황한 운반B조의 광부는 숙소로 향하는 대열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따르는 영채를 보곤 황급히 하치장을 떠났다.

 

“백날 땅 파먹어도 답이 안 나온게 도시로 와야지.”

“자네는 제 발로 왔나? 내 땅은 뽀클레인이 뒤집어 엎어버려갖고 쫓겨났는디.”

일찍 숙소에 누운 그들은 경쟁하듯 비극을 나눴다.

“누가 근대, 제발로 왔다고? 그럼 바로 여피 닭 공장 단지 들어서는디 거기서 뭔 농사를 져야것어? 이쪽으로는 울타리도 안 세우더만. 혹시나 땅 팔고 나가면 합쳐벌라고.”, “그러고 보니까 신통하네? 요즘도 누가 농사를 지나본디? 우리가 뭐라도 먹고 있잖애.”, “복층 농원 들어온 지가 언젠데 여즉 농사 겉은 소리하고 자빠졌어. 요즘 쌀은 공장에서 나와야?”, “공장이요? 햇볕은 어쩌고요?”, “답답하네 참말로. 요즘은 고딴 거 없어도 맛나게 잘 나와. 그렇게 무식헝게 오입쟁이 소리나 듣고 가만히 앉았지.” 그들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쌀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영채에게 물어왔다. “근데 너는 어린 놈이 왜 벌써부터 여기로 기어들어왔냐?”

할머니가 비싼 요양원에 있다고 대답하려고 했을 때 복도에서 악에 받친 김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씨벌 내가 뭘 어찌케 했어야 했는디!” 화들짝 놀란 광부들은 숙소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백부장 사무실 앞이었다. 김형과 백부장이 다투고 있었다. 다른 숙소에서도 광부들이 고개를 빼고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거 농땡이 피울라면 편하게 제대로들 피우지. 다들 들어가쇼들.” 곤란한 표정의 백부장은 광부들에게 손짓했다. 광부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럼 멀쩡한 소각로가 알아서 쪼개졌다고? 형씨가 온도 조절을 잘못한 거지.” 백부장이 조곤조곤 따지자 김형은 방방 뛰며 씨벌거, 개 씨벌러머거, 개 좆 같은 거, 욕설을 쏟아내며 가래침을 뱉었다. 목엔 핏대가 도드라져 있었다. “그라면 씨벌 내가 어쨌어야 했냐고! 내가 냉각관에 얼음 조각을 집어넣은 것도 아니고! 하도 과열이 심해갖고 공랭식으로 전환해서 300도 딱 맞추고 씹질하득기 존나게 쑤셨는디도 저 지랄판이 났으면 문제 있는 거잖애!” 씹질은 우리가 아니라 저짝에서 하고 있었고마. 용해조 광부들이 키득거렸다.

“욕은 허지 마시고.”

“그리고 애초에 싸이클 초과만 안 했으면 이럴 일 없는 거잖애. 글제. 맞제. 하루에도 수백번을 불로 쪼사댕게 암만 텅스텐 특수 합금이더라도 저 아작이 나지.”

“그럼 한번 냉각 쎈싸 이상 없는가 함 보게. 김형도 베테랑인게 실수했을 리는 없고 쎈싸에서 필시 엥꼬가 난 거겠지. 맞지? 따라오쇼. 함 뜯어보게.” 백부장이 큰소리치자 김형은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부들은 소각로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저 양반들 애꿎은 장치 뽀개러 가는고만.”

 

실제로 센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책임을 덜기 위해 일부러 ‘뽀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각로 붕괴는 냉각 센서 문제로 확인되었다. 소각로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소각로가 알아서 식기까지 기다리는 2주를 포함해 한 달 가까이 소요된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궁지에 몰린 백부장은 소각 과정을 생략하고 즉시 용해하기로 결정했다. 당분간 폐기물들은 소각로의 잔열로 대충 태워졌다. 소각조는 임시로 해체됐고 김형은 한 달간 ‘오입쟁이’가 되었다.

김형은 눕혀진 멜팅박스 관문 위에 덩그러니 주저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영채가 다가서서 김형, 하고 크게 부르자 고개를 들었다. “어이, 배신자 왔고만.” 호의적인 말투였다.

“형님, 혹시 세상에 빨간 뱀도 있어요?” 김형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시상 어딘가엔 있을 수도 있것지, 하고 대답했다. “아, 그런 건 없어요?” 영채가 다시 묻자 김형은 다시 담배를 빨아들였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우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옛날에 산에 가면 말이여.

아주 가아꼼 동충하초라는 버섯이 눈에 들어오고 그렸어. 그게 곤충 시체에서 나는 버섯인디, 처음엔 그냥 허여멀건허게만 나오다가 여름에 열 받고 잘 영글면 삘건혀지고 그러는 약초여. 허열 땐 눈에 잘 띄지도 않어. 어차피 쓸모도 없고. 붉어져야만이 약초로도 쓰고 술로도 담가 먹고 글지. 근디 그게 길쭉하게 생겨서 어른들이 삘건 뱀, 삘건 뱀, 하고 부르고 그랬어. 뱀주 먹는다고 좋아하고. 몸에도 좋거든.” 김형의 입에 물린 흰 담뱃대가 거의 끝까지 붙었다. 그날 밤 영채는 즉시 요양원에서 온 편지를 뒤집어 적었다. 할머니한테 동충하초를 사주세요. 좌측에 흰 뱀, 우측에 붉은 뱀. 그게 동충하초예요.’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온 연말, 고객님들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저희 오멜라스 타운에는 어제 첫눈이 내렸답니다. 방문 고객 주차장을 포함한 타운 내 전 부지에 열선이 매립되어 있기 때문에 입주민 분들이 거동 중 실족하실 우려는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겨울을 맞아 어르신들이 드실 수 있는 꼬막 칼국수, 연하게 삶은 오골계 백숙 등의 겨울 별미들이 특별 식단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입주민분들께 행복한 겨울을 선물할 수 있도록 모든 직원들이 불철주야로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타운 내 한의사 선생님의 진찰을 기반으로 동충하초를 처방해드릴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한약학적으로 할머니께 좋은 영향을 끼치리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잘 덖아서 차로 드시고 계시며, 좀 더 다양한 취식법을 위해 타운 내 요리사들이 동충하초를 활용한 요리를 고안하고 있습니다. 효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낼 수 있으면서도 미식적 즐거움까지 선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객님의 지도편달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한의사 선생님께서 동충하초는 노화 예방에 효과가 있을 뿐이라 치매 그 자체에 대한 효험은 기대할 수 없으시다고 하십니다.

ps) 신경뇌의학 매디컬 센터의 센터장께서 최신화된 의학적 조치를 위해 고순례 할머님의 알츠하이머 등급 재조정을 고려중이십니다. 고객님께서 지원금을 제때 보장받으실 수 있도록 저희 오멜라스 타운에서 법적인 사안을 처리해드릴 예정이오니 고객님께서는 안심하시고 연말을 즐기셔도 좋을 듯합니다.’

 

소각되지 않은 폐기물을 용해하는 일은 너무 위험했다. 처음엔 잿더미에 고철들만이 조금 섞여 있을 뿐이었지만 갈수록 무엇도 소각되지 않은 날것의 폐기물들이 멜팅박스를 채웠다. 용해제를 삽입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강 진동’ 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그동안은 기능상으로만 가능했던 강 진동을 갑자기 수차례 겪다보니 골이 다 으깨질 지경이었다. 밀도도 측정할 수 없는 폐기물들을 거의 멜팅박스의 꼭대기에 닿을 정도로 쌓았기 때문에 고도를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용해제를 두 번이나 주입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폐기물들이 운반되어 올 때까지 김형은 먼저 쌓인 폐기물을 위를 위험하게 누비며 도끼질을 했다. 멜팅박스 내부에서는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악취가 진동했지만 김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어이 김형! 간만에 오입질하는 기분이 어뗘!” 누군가 외쳐 묻자 김형이 허리를 쭉 폈다.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니까 오랜만에 호강하는구만.” 광부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김형은 다시 도끼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또 허리를 폈다. “어이 자네들!” 굉음에 가까운 김형의 목소리가 멜팅박스를 울렸다. 광부들이 일제히 김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형이 폐기물들 틈에서 무언가를 뽑아 올렸다. 검게 썩은 시체가 반쯤 드러났다. “자네들 햇볕 좀 안 쐬고 싶나?”

“거 주운 사람이 임자지. 나가서 쉬었다 오쇼.” 누군가 사양하자 김형은 산삼이라도 캐듯 조심히 시체 주변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그리곤 시체를 완전히 빼내 한쪽에 눕힌 뒤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 발견됐다. 김형은 지갑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한 구멍 나누는 식구끼리 임자가 따로 어딨대. 함마, 나랑 동년배고만. 빨리 아무나 좀 내려와보랑게!” 폐기물을 옮기던 운반B조 광부가 지갑을 뒤지는 김형을 힐끗 보고는 다시 소각로로 떠났다.

용해조 광부들은 질색을 했다. “에이쑤. 시체 쪼물딱대기 싫은디. 어야, 어린 놈아! 너 저번에 휴가 나가고 싶다고 했제!” 영채는 그렇게 말한 적 없었다. 광부들은 영채에게 멜팅박스로 내려가보라고 했다. “형님들 휴가 안 나가세요? 저 제사 지낼 줄도 모르는데.”, “거야 저 양반이 알려줄 거여. 어차피 지금 싸이클도 심상찮응게 사람 많이도 필요 없어. 그냥 짬 꺼져 좀 있으라고. 나도 간만에 드릴 좀 잡아봐여것어.” 영채는 광부들의 눈치를 살폈다. 일부러 영채 편하라고 떠넘기는 척하는 것인지, 정말로 시체가 무서워서 그러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결국 김형과 함께 시체를 들고 소형 소각장이 있는 제사장으로 향했다. 시체 얼굴을 본 영채가 숨을 참자 김형이 팔 쪽을 잡아 들었다. 시체 머리가 아래로 늘어지며 나무토막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발목을 잡은 손의 촉감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다리만 움직였다. 제사장으로 향하던 도중 김형이 말했다. “너 나가서 양갱 좀 사와라.”

 

*

영채는 도시광산에서 나오자마자 목욕탕으로 향했다. 겨울에 휴가를 나온 건 처음이었다. 가진 옷은 얇은 봄옷뿐이었다. 뜨거운 탕에 몸을 오래 담그고 나온 뒤엔 즉시 상가로 향했다. 주머니엔 김형이 시체 지갑에서 꺼내준 현금과 영채의 통장이 들어 있었다. 바로 옷가게로 갈지 은행에 들러서 돈을 인출할지 고민했다. 겨울바람이 영채의 옷 속을 들쑤셨다. 영채는 소름이 끼쳤다. 다급히 배회하다가 은행 건물을 발견했다. 높은 상가 건물들 너머로 ‘좆대가리’ 끄트머리가 드러나 보였다. 영채가 대신 입김을 뿜을 뿐, 좆대가리는 아무것도 뿜어내고 있지 않았다. 겨울 답지 않은 푸른 하늘과 흰 구름들만 도시의 공중을 채웠다.

겨울 옷으로 차려 입은 영채는 즉시 요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요양원은 산을 끼고 있었다. 유럽풍으로 잘 조성된 부지엔 3층도 되지 않는 저층 건물들이 이곳저곳 배치되어 있었다. 부유한 유럽 국가의 소도시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부지 내 광장에 있는 높은 시계탑엔 ‘Town of Oh-Melnas’라는 영단어가 새겨져 빛났다. 영채는 성탄 전구를 두른 나무들을 보며 루돌프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산타가 도시광산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굴뚝은 하나뿐이었다. 도시광산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처음 입주할 때 들렀던 사무소 건물로 들어섰다. 거대한 로비가 영채를 맞이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된 벽면엔 조각상이나 은은한 조명등이 달려있었다. 중간중간 난해한 패턴이 반복되는 추상화나 헐벗은 근육질의 남성이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곤 했다. 벽 바로 앞엔 물이 졸졸 흘렀다. 조명을 받은 물은 흐르며 반짝였다. 로비는 전체적으로 차가운 순백색의 공기를 가두고 있었다. 얼굴이 하얀 여자가 접수대 너머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박영챈데요. 할머니 뵈러 왔어요.” 여자는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타자기를 두드렸다. 영채의 이름을 조회 중인 듯했다. “아, 고순례 할머니 보호자분이시구나. 어쩐지 낯이 익으시다 했어요. (영채는 여자를 처음 봤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지금 바로 할머님 뵈러 가시겠어요?” 영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벨을 눌렀다. 청명한 알림음이 사무소 내부에 울려퍼졌다. 잠시 후 응급구조사 복장을 한 남성이 ‘대기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은 자동문이었다. “매-2동 고순례 할머님 보호자분이세요.” 여자가 카드키를 건네며 말했다. 남자는 영채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남자는 영채를 골프장에서나 탈 것 같은 카트로 안내했다. 영채가 올라타자 남자는 운전하기 시작했다. 카트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부지 내 구조물이나 정원을 지날 때면 누구의 작품이라느니, 무슨 풍의 구조물이라느니 친절하게 설명했다. 영채는 듣는 둥 마는 둥 눈이 가는 대로 구경했다. “저 건물은 사방신 섹터의 현무-1동이에요. 알고 계시다시피 온화하고 현명한 수호신이죠. 사방신 섹터에는 남성 입주민분들께서 살고 계세요.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사군자 섹터의 매-2동인데, 일전에 방문해보신 적 있으시죠?” 남자가 말을 멈췄다. 영채는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는 사군자 섹터 앞에 카트를 세웠다. 카드키를 입력시키자 카트를 막고 있던 바가 조용히 올라갔다. 남자는 다시 카트를 움직였다. 매화가 그려진 건물 앞으로 도착하자 두 명의 간호사가 카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영채는 카트에서 내렸다. “어서오세요. 박영채 고객님 맞으시죠?” 둘 중 한 명의 간호사가 물었다. 영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2동 수석 간호 요원 최현담입니다.”

수석 간호 요원은 영채를 한약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한자가 가득한 서랍장에서 약초 하나를 꺼냈다. “이게 바로 동충하초인데요.” 동충하초는 굵은 지렁이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정말 곤란한 일이에요. 고객님 말씀처럼 빨갛게 익은 것들은 많이 구했지만 보시다시피 전혀 하얗지가 않아서요.” 정말로 나무껍질에 가까운 갈색이었다. “말리기 전엔 이만큼 색이 진하지 않지만 그마저도 결코 하얗다고 할 수는 없는 색깔이거든요. 빨리 하얀 동충하초를 구해야 할 텐데. 저희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고객님.” 동충하초라는 버섯은 영채로서 처음 들어본 약초였다. 하얀 동충하초가 정말로 따로 있는지 김형의 표현이 과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수석 간호 요원의 말은 마치 세상에 하얀 동충하초는 없으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채가 묻자 수석 간호 요원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약방엔 침묵이 흘렀다. 영채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제가 한번 할머니 소지품을 좀 볼게요.” 수석 간호 요원이 반갑다는 듯 웃었다.

 

할머니는 영채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대신 요양보호사가 할머니에게 손주가 왔다며 법석을 떨자 아무것도 모르는 채 눈만 꿈뻑거리며 영채의 손을 잡았다. “영채야?” 영채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안 보여.”, “네?”, “잘 안 보여서 못 알아보겠어. 그냥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지…….” 얼굴엔 무언가에 긁힌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영채의 시선을 느꼈는지 요양보호사가 조금 이따가 이야기하자는 듯이 검지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댔다. 통유리로 된 창 너머 빨갛게 기운 햇빛이 호실 내부로 들이쳤다.

요양보호사가 할머니 다리를 주무르면서 시시콜콜하게 떠드는 동안 영채는 할머니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반짇고리, 동전이 들어 있는 쌈지, 소형 자개장 등 잡동사니들이 손에 잘 닿지 않는 곳에 뒤섞여 있었다. 옛날 제과점 브랜드의 상호가 새겨진 양철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빛이 바랜 채 녹슬어 있었다. “할머니, 이거 뭐야?” 할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영채는 뚜껑을 열어보려 했지만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것인지 완전히 들러붙어 있었다.

요양보호사에게 열어달라고 요청하자 할머니에게 “오랜만에 손주분께서 다리 주물러주신대요.”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별 관심 없는 모양이었다. 영채는 얼떨결에 할머니 다리를 주무르게 됐다. 멜팅박스에서 옮겼던 시체 같은 감촉이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할머니는 잠이 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요양보호사는 윤활제로 보이는 라카통을 가져와서는 양철 상자에 골고루 뿌렸다. 그 뒤 뚜껑을 이리저리 돌리자 시원스럽게 열렸다. “어? 할머니 어릴 때 사진이네요?” 요양보호사는 웃으며 사진들을 뒤적거렸다.

안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코팅 기술이 있기 전에 인화한 사진이었는지 비닐 성분이 녹아 끈적거리지는 않았다. 대신 사진 표면이 군데군데 벗겨진 상태였다. “무슨 사진들 있어요?” 영채가 묻자 요양보호사가 영채와 할머니에게 한 번씩 사진을 보여줬다. 대부분 농촌에서의 사진이었다. 종종 예쁘게 꾸며 입은 채 찍은 사진들이 나왔지만 그게 할머니인지 다른 누구의 사진인지 사실 확실치 않았다. 영채는 요양보호사 쪽으로 주의를 집중한 채 풀어줄 만한 근육도 별로 없는 할머니의 다리를 서툴게 주물렀다.

“와. 할머니 때도 운동회가 있었나보네.” 요양보호사가 말했다. “운동회요?” 영채는 솔깃해서 할머니의 다리를 놓고 요양보호사 옆으로 붙었다. 누렇게 변색 된 흑백 사진이었다. 어린 소녀가 운동장 한가운데에 정자세로 선 채 웃었다. “여기 봐요. 깃발 있고, 헤어밴드랑 아대 하고 있잖아요.” 요양보호사 말 그대로였다. “청군이었나봐요.” 영채 눈엔 파란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아요?” 영채가 묻자 요양보호사가 소녀의 헤어밴드를 가리켰다. “흑백 사진이니까 백군이었으면 색깔이 하얗게 처리가 돼 있겠죠. 지금 이 헤어밴드랑 아대는 어둡잖아요. 그럼 청군이죠.” 소녀의 뒤에 찍힌 어린이들 중에는 소녀보다 밝은 색상의 아대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구나.” 영채는 다시 침대 앞으로 돌아와서 다리를 주물렀다.

“아. 아니네. 홍군이셨네.” 요양보호사가 정정했다. “옛날엔 홍군이 있었다고 하던데, 진짠가보다.” 영채는 다시 요양보호사 옆으로 가서 사진을 봤다. 요양보호사는 이번엔 깃발을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요. 홍이라고.” 깃발엔 ‘紅’이라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소녀는 산란된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영채가 매-2동을 나왔을 땐 해가 다 떨어져 있었다. 낮보다 더 떨어진 기온은 영채를 다시 떨게 했다. 광장의 시계탑은 9시를 가리켰다. 굵은 눈이 검은 하늘을 가득 채웠다. 나무를 둘러싼 성탄 전구들이 형형색색 점멸했다.

요양원 부지 바깥엔 눈이 얕게 쌓여 있었다. 휴가는 2박 3일이었다. 낮에 내렸던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췄다. 이 방향 그대로 더 가면 고속도로였다. 영채는 버스에 올라탔다. 주머니에서 시체 지갑에서 꺼낸 현금을 두 장 꺼내 넣었다. 동전 서너 개가 떨어져 나왔다. 손끝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영채는 시체의 돈이 든 주머니 지퍼를 조용히 닫았다.

버스는 고속도로로 들어서기 전에 방향을 바꿨다.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달렸다. 버스 내 노선도에 적힌 ‘급행’이라는 글자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10분 정도 달렸을 때 영채와 할머니가 살았던 고층 아파트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고속도로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얌전하신 상태예요. 요양보호사가 말했다. 자주 오락가락하시는데 심하실 땐 간호사들 때리고 그러세요. 막 울고. 대화도 안 돼요,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도 무슨 뱀만 자꾸 찾고. 얼굴에 상처도 먼젓번에 날뛰시다가 다친 거예요. 내가 때린 거 아니에요. 날뛰시다가 침대에서 떨어지시면서 구속장치에 긁히셨어요. 늙으셔서 그런지 금방 아물지가 않네요. 사실 동충하촌가 뭔가 그것도 잘 안 드세요. 요양보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금액을 올려달라는 뜻일 것이었다.

시내로 접근해갈수록 도로가 넓어졌지만 속도는 줄어들었다. 눈길에 정체가 심한 모양이었다. 버스는 거의 영채가 걷는 속도로만 앞으로 나아갔다. 영채는 내려야 할 곳을 알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눈만큼 하얀 쌍라이트를 켠 채 줄지어 빠르게 지나가는 반대편 차선의 자가용들만 넘겨다보았다. 정체된 시내를 뚫고 나와 마침내 고속도로로 향하는 차들일 것이다. 버스는 브레이크등이 뱀처럼 끝없이 늘어선 붉은 도로의 끄트머리에서 참을성 있게 정체를 견뎌냈다. 눈앞이 침침했다. 마치 개인 경주 트랙 위를 천천히 달리는 초등학생 같았다. 버스가 몇 번이고 요양원 앞을 지나는 동안 영채는 잠들지도 않고 계속 창밖만 응시했다. 창에 성에가 낄 때마다 옷으로 닦아내고 닦아내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200*100.5)

 
동록개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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