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외로움에 대하여

2012.08.15 05:4408.15

  한솔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찬 공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분의 도움도 필요했다. 도심의 불빛에 점령당한 하늘에는 별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 분이 나를 보고 있을까? 한솔은 한 번도 종교를 가져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최대한 경건한 감정을 끌어 모아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같은 시간, 경찰청 교통과 CCTV 화면에는 텅 빈 한남대교를 비틀거리며 질주하는 세단 한대가 보였다.
  기도를 올리기 위해 눈을 감은 나를, 그 분은 구해줄까? 한솔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을 듣고 눈을 떴다. 핸들을 바로 잡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엔진 울림이 잠시나마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영란의 집? 지금쯤 기자들이 한 트럭쯤 몰려들었을 것이다. 한솔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벤틀리는 교차로를 지나 강변북로로 빠져나갔다.
  일주일 전, 김치 냉장고 광고 촬영을 마치고 하영란을 만났다. 노출 위험이 없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하영란은 섬유유연제 광고를 계약했다며 즐거워했다, 집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특별할 건 없었다. 티브이를 보면서 와인을 마셨고, 광고에 나온 나에 관한 농담을 하고, 늘 그랬듯이 침대로 이끌었다. 그리고? 한솔은 번쩍거리는 백미러를 훔쳐봤다. 다음날은 개봉을 앞둔 <운명은 남자다>의 포스터 촬영이 있어서 9시에 매니저가 태우러 왔었다. 메이크업을 하고, 11시에 촬영장에 도착해 포스터를 찍고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하고……. 아니, 그 전에. 한솔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탄내가 올라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지막으로 방 안을 둘러봤을 때, 분명 아무도 없었다. 식탁 위에 쓰러진 와인잔, 살짝 벌어진 블라인드, 방수천이 덮인 풀, 흐트러진 시트……. 2층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물론, 아무도 없었다. 한솔은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탁,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 전에 나갔나? 어디 간 거지? 그 날은 스케줄이 없다고 했는데? 한솔이 창문을 내렸다.
  “왜 그러시죠?”
  경찰이 볼펜으로 목을 긁고 있었다. 몸집이 거대해보였다.
  “과속하셨네요.”
  “미안합니다. 급한 스케줄 때문에…….”
  한솔이 멋쩍게 웃어보였다. 경찰이 한 손을 창틀 위로 올려놓았다. 두꺼운 손가락에 낀 금반지가 번득였다.
  “당신 미쳤어요? 얼마나 달린 줄 알고는 있는 겁니까?”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솔은 모자를 벗었다. “제가……. 실은 박한솔 인데요.”
  경찰이 뒤로 펄쩍 뛰었다.
  “뭐야. 당신 술 먹었어? 이리 나와 보세요.”
  한솔은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잠깐 제 매니저와 통화를…….”
  한솔이 입을 다물었다. 경찰이 음주측정기를 내밀고 있었다.
  “부시죠.” 경찰이 지붕 위에 손을 올리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부시라고요. 박한솔 씨.”

  한솔은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좀처럼 술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잠이 쏟아졌지만, 기자들이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 누울 수도 없었다. 매니저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회사에 연락을 해볼 수 있을까요?”
  한솔이 가까이 있는 경찰에게 물었다. 경찰은 키보드를 경쾌하게 누르고 의자를 빙 돌려 유치장에 있는 한솔을 바라보았다.
  “80km 제한도로에서 200km로 폭주. 면허증 없음. 지갑도 없음. 수억 짜리 차는 리스에, 음주측정 불응.” 경찰이 다리를 꼬고 몸을 뒤로 기댔다. “본인이 박한솔이라고 주장하나, 매니저라고 알려준 번호는 결번…….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 당신 차량 절도범 아냐?”
  한솔은 기가 막혔다.
  “이봐요. 내가…….” 그때 경찰의 책상 위에 놓인 책이 보였다. 그제야 한솔은 경찰이 기껏해야 20대 중반 정도로 앳되다는 걸 알았다.
  “그 책, 그래요 그거. 제가 쓴 겁니다. 확인해보세요.”
  “아. 그러세요?” 경찰이 책을 들었다. “그럼 문제를 내볼까요?”
  한솔은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데 어이가 없었다.
  “자. 보자…….” 경찰이 한솔을 흘끗 쳐다봤다. “좋아. 당신이 무명이던 시절, 전 재산을 털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습니다. 그건 단지 어떤 배우를 보기 위해서였다고 했는데. 그게 누구죠?”
  파리? 한솔은 얼굴을 찡그렸다. 다른 경찰들이 모여드는 게 보였다. 단역 시절 때 내가 파리에 갔다고? 설마. 여행이라면 질색인 내가? 아, 그래. 얼마 전에 칸에서 이자벨 아자니를 만났었잖아? 그래서 그런 얘기를 엮어서 썼나보구나!
  “이자벨 아자니!”
  동료들이 일제히 책을 든 경찰을 바라보았다. 경찰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땡!”
  경찰들이 배를 부여잡고 웃어댔다. 한솔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소녀가 창문을 연다. 손바닥만 한 사각형 하늘이 보인다. 침대를 밟고 올라서자 티브이 케이블 두 가닥과 인터넷 케이블, 맥도널드 간판(m)이 보인다. 소녀는 입술을 내밀고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연기는 비틀거리다가 공기 속에 형체(ל)를 숨긴다. 소녀는 마지막으로, 담배 연기 보다 조금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침대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다각다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각다각. 침대 위 빨래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녀는 걱정스런 얼굴로 젖은 옷은 바라본다. 내일 아침까진 마르렴. 다각다각. 이제 소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녀는 사람들을 만든다. 이름을 불러주고 행동하게 만든다. 차근차근 그들이 쌓아나가는 행동을 바라본다. 차근차근 쌓인 행동들이 만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느새 세상 속에 있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아름답고 이상한 세상.
  쪽창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든다. 소녀는 전자시계(05:51)를 확인하고 노트북을 덮는다. 공동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공동냉장고에서 셜록 홈즈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우유병을 꺼내 한 잔 따라 마시고, 이름은 지운다. 낡은 배낭에 노트북과 책, 담배, 깨끗한 여권을 담는다. 그리고 조금 덜 마른 옷을 입고 아직 푸르스름한 세상으로 나간다. 소녀가 가진 가장 예쁜 원피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솔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티브이에는 거대한 구조물의 건설현장이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잠시 후면 기자들이 몰려올 것이다. 아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극단과 단역을 전전하다 우연히 맡게 된 인디영화의 주연. 그해 신인 남우상을 받고, 충무로에 입성. 그 뒤로 승승장구하며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영화를 찍고, 칸에 가고……. 수많은 평론가들의 말대로 엔터테인먼트는 사양 산업이 되었다. 대중들은 연예인을 숭배하는데 점점 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진정한 경배의 대상을 찾은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자신은 돌파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한솔은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매니저는 아직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솔은 유치장에 함께 있는 한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유치장에 있는 것 치곤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일단 혈액 채취해서 음주측정부터 하셔야죠. 지금 상태를 보니 0.2 정도는 나올 것 같은데. 흠, 측정불응 괘씸죄, 과속 플러스해서 면허취소에 벌금 500정도 나오면 다행이고.”
  “벌금을 못 내면요?”
  “구치소에 가서 노역 해야죠. 하루 5만원이니까 100일쯤 살면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은 어쨌든 가니까요.”
  한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저요?” 남자가 한솔을 바라보았다. 한솔은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난동죄랄까요. 방송국에서 소란을 좀 피웠습니다.”
  “왜요?”
  “그건 말이죠. 박한솔 씨. 제가 물어볼게요. 혹시 언젠가 부터, 갑자기, 세상이 어딘가 이상해졌다고 느끼지 않았습니까?”
  한솔은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티브이에서 이상한 말들이 나오질 않나, 매니저는 연락이 안 되고, 여자 친구는 실종되고…….
  “박한솔 씨. 이리 와보세요.”
  남자가 속삭였다. 한솔이 남자에게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창살 밖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지금 소설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한솔은 숨이 막혔다.


  한솔이 그 남자를 본 건 자신의 팬 사인회에서였다.
  스타크래프트의 뒷자리에 앉아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 겸 여행기의 북파티 행사장으로 이동하면서 한솔은 빳빳한 느낌의 얇은 책을 펼쳐보았다. 셀카컨셉의 사진들 사이에 편집된 자필체의 짧은 인상기들은 곰곰이 읽어봐도 직접 쓴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책은 멋졌다.

  스포트라이트가 멈추면 -박한솔이 들려주는 솔직한 인생 이야기-

  타이틀 밑으로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가장 매력적인 웃음이 보였다. 한솔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금이 커리어의 정점일지도 모른다. 자동차는 도로를 점령한 여성들을 뚫고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성함이?”
  한솔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되물었다. 이 남자는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남자는 굼뜬 동작으로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아무 이름이나 적어 넣고 있는 한솔에게 슬며시 다가와 속삭였다.
  “저……. 본인이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는 거, 아시죠?”
  한솔은 움찔했다. 미친놈인가? 이 헌책은 또 뭐야?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한솔이 책을 건네며 눈치를 주자 키 큰 보안 요원들이 남자를 끌어냈다. 여성 팬이 다가왔다. 한솔은 매력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남자가 기억 난건 그날 밤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거실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본 티브이 프로그램이 떠오른 것이다. 무슨 박사라고 하는 노인네가 대담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현했었다. 그는 최근에 밝혀진 신의 존재를 십여 년 전 러시아 우주비행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 방청객이 마이크를 잡았다. 방청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저, 여러분. 우리는 어느 순간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내게 명확한 증거가…….”
  방청객들이 웃었고, 박사와 진행자도 웃었다. 그가 입을 벙긋하는 모습이 크게 잡은 화면에 보였지만 마이크는 이미 꺼져있었다.
  한솔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컴컴한 티브이 패널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티브이를 거의 보지 않았다. 광고에 자신이 너무 자주 나왔다. 가끔 데리고 오는 여자들과 있을 때 말고는 티브이를 통해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화면 속 자신을 볼 때마다 거울 속 반영이 된 것만 같았다.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살아가는 진짜 자신이 바라본 거울.
  소설 속 세상. 가능성이 있을까? 한솔은 부풀어 오르는 맥주거품을 바라보았다. 대리석 식탁 위에 거품이 흘러내렸다.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고양이. 그 노인네는 고양이 얘기를 했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물질은 확률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한솔은 티브이를 켰다. 지난 방송을 찾아보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리모컨을 만진 끝에 자신을 여섯 번 보고 티브이를 껐다. 화장품, 면도기, 냉장고, 금연 공익 광고, 영화 예고편, 화장품.

  한솔은 욕조에 누워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접속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온라인 세계에서의 자신은 팬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트위터를 관리하는 게 어떤 매니저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온라인에서의 박한솔은 여전히 따뜻하고 위트가 넘쳤다. 한솔은 그녀와 약속한 암호를 멘션 끝에 붙여 넣었다. 연예인과 사귀는 것은 불편했지만 스릴과 함께 약간의 해방감 또한 가져다주었다.

  박한솔 @parkhansol
  북파티와사인회 너무즐거웠습니다. 멀리까지 찾아와주신 팬여러분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람. 일일이 답멘션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따뜻한 샤워하고 자야겠어요. 아디오스.

  한솔은 전화가 걸려오길 기다렸다.

  새벽 2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이런 적은 없었다. 어떤 여자도. 실은 한솔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한솔은 인터넷으로 그 프로그램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보니 패널이 박사 한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빗어 넘긴, 신학자라는 그 사람은 시종일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는 최첨단의 과학 지식이 결국은 신을 찾아냈다며, 근대에 신의 원리를 탐색하던 과학자들이 자만에 빠져 신을 거부했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집트에 건설하고 있는 우주엘리베이터는 제2의 바벨탑이 될 것이고, 신의 DNA를 채취했다는 것도 재야 과학단체의 ‘발악적’ 거짓말이라며 저주를 퍼부었는데, 이 부분에서 한솔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주엘리베이터? 신의 DNA? 요즘 뉴스를 통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프로그램의 뒷부분은 계속 볼 수가 없었다.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익스플로러 한 구석에 뜬 이슈 키워드. 하영란 실종.


  소녀는 오후 무렵 직장에 도착한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쓰고 스테인리스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는다.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한다. 네모난 통로를 따라 소녀에게 쪽지가 배달된다. 내용은 거의 읽어보지도 않은 채, 소녀는 패티를 굽고, 빵을 데운다. 알록달록한 포장지 위에 빵을 깔고 양상추와 토마토를 쌓는다. 몸을 돌려, 기침을 한다. 패티를 올리고 피클을 넣고 소스를 뿌린다. 따뜻한 빵을 마지막으로 덮고 포장지의 양 끝을 모아 휙 돌려 네모난 통로로 내보낸다. 또 다른 쪽지가 대답처럼 튀어나온다. 소녀는 선반 위에서 마스크를 꺼내 입에 쓴다. 테이블 한쪽에 세워둔 책을 바라보며 따라 미소 짓는다. 쓸쓸하고 따뜻한 미소를.

  “406호.”
  방으로 올라가는 소녀를 총무가 부른다. 소녀는 플라스틱의 작은 창을 통해 회색 봉투를 받는다.
  소녀가 검지로 봉투와 자신을 한 번씩 가리킨다. 총무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의 손에도 같은 봉투가 들려있다. 소녀는 봉투를 한번 뒤집어보고 계단을 총총 오른다.
  총무가 플라스틱 창을 탁, 닫는다.
  잭과 콩나무 프로젝트. 소녀는 책상에 앉아 검정색 엽서를 읽어본다. 하얀 글씨 위에 작은 떡잎 모양 로고(♣)가 보인다. 소녀는 회색 봉투를 탁탁 털어본다. 노란색 비닐팩과 편지봉투가 쏟아진다. 소녀의 입에서 기침이 튀어나온다. 엽서를 뒤집어본다. 잭을 찾습니다. 민간단체. 유전정보제공? 소녀는 물건들을 옆으로 밀어놓고 노트북을 켠다. 서랍을 열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침대에 올라가 창문을 연다. 연기와 함께 기침이 터져 나온다. 소녀는 담배를 담벼락에 비벼 꺼버린다.
  다닥다닥. 소녀는 자신의 삶이 소설 같다고 느낀다. 소녀를 입양했던 거대한 그 수녀는 소녀에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소녀는 ‘버림받은 것’에서 ‘똥오줌 못 가리는 것’으로, ‘울보’에서 ‘말썽쟁이’로, ‘철딱서니 없는 년’에서 ‘이제는 빚을 갚을 차례’로 바꿔 불렸던 날들을, 수녀원을 떠나 스스로 이름을 정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대개 ‘이봐, 알바생’이나 ‘저기, 406호’로 불렸던 날들을. 기분에 따라 다른 이름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이나가 되었다가 안병철이 되었다가 알베르또 모리아스가 되었다가 지금은 천사라가 되었다. 소녀는 누구나 될 수 있었고 아무도 아니기도 했다.
  다닥다닥. 이제 소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녀는 스스로 만든 세상에 들어간다. 현실을 기묘하게 닮은, 그리나 아름다운 세상으로.


  어째서?
  한솔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노와 분노를, 복수와 복수를> #77. 주인공은 31명의 중간보스들을 죽이고 보스를 따라잡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한솔은 한순간 이것이 대리 인생 체험으로 인한 환각증세가 아닌가 의심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어째서?
  한솔은 벌벌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복을 입거나 혹은 메리아스 차림의 경찰들이 책상 위에, 바닥에, 의자에, 문 앞에, 또 바닥에, 바닥에,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일렬로 서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한결같이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가느다란 연기가 그들 이마의 구멍과 한솔의 양 손에 들린 권총에서 피어올랐다. 한솔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총을 떨어뜨렸다.
  “휴. 대단한데.”
  남자가 유치장에서 나오며 옷을 탁탁 털었다.
  “어, 어째서?”
  한솔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어째서긴? 네가 그랬잖아?”
  “꿈……꿈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남자가 책상에 엎어진 시체 밑에서 총을 잡아 뺐다. 그리고는 줄줄 흐르는 피를 털어낸 후 티브이를 가리켰다. 화면에는 거대한 건물의 외곽이 보였다. 카메라가 건물의 아래에서부터 위로 훑고 있었는데, 한참동안이나 길게 이어진 건물은 결국 구름 속으로 소실점을 그리며 사라졌다.
  “저게 뭔지 알아?”
  한솔이 고개를 저었다.
  “우주 엘리베이터야. 신을 만나러 간다니, 웃기지?”
  한솔은 멍하니 티브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티브이 하단에 다음과 같은 자막이 보였다. <잭과 콩나무 프로젝트 측, 신과 99% 유사한 유전자 샘플 확보 공식 발표>.
  “신을 찾았다고 했을 땐 나도 많이 놀랐지.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내게 이상한…… 말도 못할 일들이…….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았지. 나조차 믿지 못했어. 내가 미친 건가. 그런데 그걸 찾았어.”
  남자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것을 바라보며 한솔은 식은땀을 흘렸다.
  “뭐를……?”
  “일기장. 어렸을 때 썼던 일기장. 까맣게 잊고 있었지. 당연하잖아? 철없을 때 썼던 일기 따위. 그런데 나는 좀 괴짜인 꼬마였나 봐. 매일매일 미래 일기를 써놨더라고. 내가 어른이 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가 어떤 것이 될지…….”
  “어떤 것?”
  남자가 한솔을 바라보았다. 한솔은 순간 그의 눈동자가 텅 빈 것처럼 느꼈다.
  “거기에 내게 일어난 이상한 일들이 모두 적혀 있었지. 그럼 예언이었을까? 아니야. 난 평범한 아이였어. 그렇다면? 네가 나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 글쎄요.”
  “난 이렇게 생각했지. 내가 일기 속으로 들어왔다고. 어느 순간 어렸을 때 쓴 일기장의 이야기 속에 들어와 버렸다고. 그럼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은?”
  남자는 티브이로 고개를 돌렸다.
  “난 신을 의심하기 시작했어. 누군가, 현실과 똑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현실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이야기를 읽는 다고 생각해봐. 네가 이야기 속 너를 읽는 건지, 이야기 속의 네가 너를 읽는 건지 알 수 있을까? 그 순간 우주가 두 개로 나뉜다면, 너는 어느 쪽 우주에 남게 될지 알 수 있을까?”
  “그런 엉터리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를…….”
  남자가 우아한 동작으로 경찰서 내부를 훑듯이 가리켰다.
  “네 작품을 봐. 이걸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거야?”

  <작전명 Q> #12. 주인공은 삼엄한 경계와 철통같은 첨단 보안을 뚫고 적 기지의 심장부로 진입, 그들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해킹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미끼였다는 복선이 숨어 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
  자신이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죠?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야. 눈치를 못 챘을 뿐.
  모두에게. 그런데…….
  그런데 뭐?
  그런데 왜, 제 사인회에 찾아온 건가요?
  네가 필요했으니까.
  제가……. 왜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대와 대적하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지. 누구보다 다양한 삶을 가지고 있는 사람. 박한솔 밖에 없더군.
  그럼 의도적으로?
  그래.
  제가 유치장에 갈 거란 건 어떻게 알았죠?
  암시를 통해서.
  암시?
  네가 사인했던 책에 암시가 숨어 있었어. 귓속말은 기폭제였지.
  그런…….
  그리고 네가 본 프로그램에서도 나는 줄곧 암시를 걸고 있었고.
  그럼 영, 영란은 어디에?
  네 집에 있잖아.
  우리 집엔 아무도…….
  잘 살펴봤어? 전부 살펴봤냐고. 예를 들어 네가 몇 주째 방치해 두었을 방수천 아래 같은 곳 말야.
  이……“이 개자식!”
  한솔이 벌떡 일어났다. 게임에 열중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자리에 앉아. 몇 번이나 설명해야 알아듣겠어? 영화 속에서 박한솔이 몇 번이나 죽었지?
  ……미안합니다.
  “자. 너의 이 능력을 보라고.”
  남자가 박수를 치며 한솔이 무력화시킨 시스템에 접속해 유전정보 제공자 명부를 열람했다. 한솔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영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느다란 연기가, 이마가, 경찰들이, 방수천 아래 차가운 물이.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좋은 놈인가요, 나쁜 놈인가요?”


  소녀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모서리의 각진 어둠(◆)에서부터 서서히 얼어붙고 있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궁금해 한다. 침대 위에 걸어둔 수건이 똑, 부러져 바닥에 떨어진다. 창문에 서리가 끼고, 방안의 온기가 한차례 휘몰아치며 순식간에 냉기로 변한다. 소녀는 한때 천장이었던 빙판 한 가운데, 램프 없이 덩그러니 소켓만 있던 그 자리에, 황금 문고리가 번쩍이는 것을 본다. 여왕의 썰매를 끄는 북극곰과, 검을 든 늑대들, 노래하는 펭귄이 새겨진 문고리를 조심스레 당겨본다. 곡선의 문틈으로 갑자기 들이친 바람이 방안의 얼음 결정들을 날뛰게 한다. 하지만 방안의 공기는 곧 따뜻한 바람으로 바뀐다. 멀리, 세상의 첫 나무에서 시작된 바람은 계곡을 타고 내려와 부리가 긴 새들과 함께 산을 넘고, 작은 수풀을 쓰다듬으며 들판을 가로질러 와 소녀의 방을 자신의 온기로 채운다. 소녀는 손을 뻗는다. 봄바람이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빠져나간다. 소녀는 분홍색 초원을, 불투명한 바람이 부는 에메랄드 빛 하늘을 바라본다. 순간 출근할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든다. 소녀는 의자에 걸어둔 유니폼을 돌아본다. 유니폼에 묻은 얼룩을 바라본다. 그리고 점장이 소녀를 일으켜 세우던 것을, 바지에 묻은 기름때를 털어주던 것을 기억한다. 이마를 짚어보고 어서 병원에 가라며, 소녀를 내보내던 것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던 것을, 또다시 수녀의 손에 이끌려 광주리 같은 독방에서 기도를 강요받지 않기 위해, 병원에 갈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소녀는 지난겨울에 그랬던 것처럼 아스피린을 두 알 꺼내, 하나는 잘게 부셔 코로 들이마시고 나머지 하나는 꼭꼭 씹어 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이 끊임없이 기침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잭과 콩나무 프로젝트>의 DB에서 뽑아낸 DNA 분석자료를 기준체와 일일이 대조하는 과정은 한솔로써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름 20옴스트롬의 이중나선 안쪽에는 짝을 맞춘 염기쌍이 30억 개 있었다. 그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한 걸까?
  한솔은 이야기를 섞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우당탕탕 스페이스 대소동> #101. 주인공은 마침내 인류의 기원으로 돌아가 악어인간으로 진화하지 않을 올바른 유전자를 주입한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오면서, 박멸하려고 분석했던 바퀴벌레의 유전자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꾸러기 수사대> #40. 숲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대부터 숨겨져 내려온 황금도토리가 없어졌다! 수사대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한 갈색 털 뭉치를 분석해 털의 주인이 최근 날다람쥐의 도움으로 강 건너 숲으로 도망친 욕심쟁이 다람쥐라는 것을 알아낸다.
  어떤 역할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무명시절에 찍은 작품들, 탈을 쓰고 나와 다행히 아무도 알지 못했던, 애써 잊어버렸던 역할의 도움으로 한솔은 한 사람 한 사람 분석해나갔다.
  한솔은 턱을 쓰다듬었다. DNA의 이상한 점은 빈 곳이 많다는 것이다. 단백질의 구성 정보를 가진 실제 유전자가 DNA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단지 1%에 불과하고, 이 부위는 누구나 동일했다. 이 일정한 부위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선천적인 기형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빈 칸은? 이 비 유전자 부위에는 돌연변이가 수시로 발생한다. 그래서 지문이나 홍채와 같이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 이 부분의 특정 위치를 잘라 기준체와 일치 여부를 비교하는 것. 이것이 최선일 터였다.

  한솔은 벤틀리를 몰고 목포로 내달렸다. 남자는 외국에 사는 예상 후보자를 찾기 위해 출국했다.
  ‘만나는 즉시 죽이는 거야.’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등장인물을 만나면, 소설가는 어떻게 할까? 계속 쓰거나, 쓰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거야. 헌데 현실과 똑같은 이야기를 쓰려는 정신 나간 소설가라면 어떻게 할까? 알겠어? 지금 저 놈들이 하려는 일이 어떤 건지? 막아야해, 돌아가고 싶다면.’
  기준체와 근사치의 유사성을 보인 후보는 총 셋이었다. 두 명은 한국에 한 명은 스페인에 있었다. 한국에 있는 두 명중 하나는 남자였고, 지금 한솔이 시속 170km로 다가가고 있었다.
  후보자 중 한 명이 신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한솔은 마치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차량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자신과 가장 닮은 등장인물을 만나게 되면, 그의 말대로 세상이 붕괴될까? 후보자를 죽이는 게 혹시 신의 일부를 죽이는 건 아닐까? 한솔은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벤틀리가 휘청 거렸다. 옆 차선에서 달리던 덤프트럭이 경적을 울렸다. 한솔이 핸들을 꽉 쥐었다. 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거야. 이건 그의 이야기야. 어쩌면……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고 있는 건 바로 그 자신이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는 자기가 만든 세상의 온갖 기술을 이용해서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이 자신을 찾아오게 하고 있어. 왜지? 만나서 무엇을 하려고? 그건…… 지금은 알 수 없어. 좋아,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어떤 인물이 자신을 찾아오게 하고 있어. 그 인물은 다른 사람들과 공정한 방법으로 평가돼. 그리고 틀림없이 선정되지. 언뜻 생각하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기술들에 의해 틀림없이 선정되어야만 해. 선정되어야만. 눈에 띄어야만. 유사한 후보자가 아니라 확실한 한 사람으로. 특별한 한 사람. 다른 사람과 다른 한 사람으로. 다른 한 사람으로. 다른. 다른.
  한솔은 벤틀리를 급히 돌렸다.


  총무는 오늘, 이상한 전화를 한통 받는다. 총무는 먼저 설레었다가, 의아했다가, 분노한다.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요. 제 생각에는 말이죠.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게 아닌가 싶어요. <406호>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요. 그 사람이요. 여기서는 틀림없이 <406호>에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인터넷으로 제가 찾아보니까―저는 언제나 인터넷을 하니까요. 인터넷은 모르는 게 없으니까요―당신네들은 그 신과 비슷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406호>는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406호>는 사실 벙어리…… 한마디로 말을 못한다 이 말입니다. 물론 저도 인터넷으로 세련된 생각은 배웠습니다. 인권신장이니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우니 뭐 그런 것 있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각해보세요, 사지 멀쩡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놔두고 <406호>라니? 그 아이는 신과 비슷한 게 없으면 없었지 더 있지는 않단 말입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컴퓨터로 연예인이나 들여다보는…… 아니, 그건……. 어떤 관계냐고요? 저는 저, 그…… 그 아이의 총무 되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고시원 총무…… 하지만 저,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총무인 이상 제 허락 없이 그 아이가 나갈 수는…… 방값도 밀렸고…… 네? 전부 내준다고요? 그래도…… 결정적으로 그 아이는 지금 아파서 갈수가…… 뭐라고요? 직접 오시겠다고요?”


  그랬다. 한솔은 전율을 느꼈다. 염기 서열 분석 프로그램을 재구성하여, 1%의 유전자, 인간을 구성하는 단백질 정보가 담긴 단 2만5천여 개의 유전자를 직접 비교해본 것이다. 심지어 기준체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완전히 다른 1%를 가진 사람. 신과 1% 다른 사람을 찾은 것이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사람. 선정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들은 그것을 99% 유사하다고 표현했었다. 한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매력적인 웃음일까? 내 인생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솔은 ‘선정자’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한솔은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남자는 한솔이 놓쳤을 경우를 대비해 다음 경유지에서 이집트로 가기로 했다.
  한솔 고시텔. 한솔은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박한솔 고시텔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전체적으로 누런 쪽으로 기운 복도, 그 복도만큼이나 변색된 머리가 반쯤 벗겨진 왜소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한솔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한솔은 이미 찡그리고 있었지만.
  “또 무슨 일로?”
  그의 이도 누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천사라라는 사람 있습니까?”
  한솔이 물었다.
  “아니. 벌써 데려갔는데.”
  “데려가요? 누가?”
  “그거야 당신이 더 잘 알겠지.”
  한솔은 한 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와 벤틀리에 올라탔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자 몸이 뒤로 기울었다. <불타는 레이싱> # 집어치워! 한솔은 주차된 차들 사이로 질주했다. 비행기를 막아야한다. 천사라가 그들과 함께 이집트에 도착하면, 남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벤틀리가 도로로 굉음을 내며 미끄러져 나왔다.

  한솔은 인천공항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비행 편을 알아보았다. 천사라는 약 30분 후 그들의 전용기를 타고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 뒤 5시간 뒤에나 카이로 행 비행기가 있었다.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천사라가 탑승자로 뽑혔다는 것은 이미 언론에도 알려져 있었다. 또다시 하영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가운 풀에 잠겨있을 그녀가. 염소와 오존 속에서 분해되고 있을 그녀가. 방수천 아래 잠겨있을 그녀가.
  한솔이 벤틀리에서 뛰어내려 공항으로 달렸다. 등 뒤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출국장을 어떻게든 통과해야 한다. 한솔은 허리띠에 감춰둔 권총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난생 처음, 공항에 뛰어 들어갔다.
  플래시가 터졌다. 환호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한솔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자놀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공항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NG카메라도 보였다. 다시 한 번 큰 환호성이 일었다.
  “박한솔 씨,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리포터로 보이는 한 여자가 친근하게 말했다.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형님. 대체 어디 계셨어요?”
  매니저가 한솔의 팔을 잡아끌었다. “영란씨랑 같이 있는 줄 알았잖아요. 애타 죽는 줄 알았네.”
  “하영란? 하영란은 실종…….”
  한솔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하영란이 기자들 사이에서 팔짱을 끼고 웃고 있었다.
  “형님. 그럼 가시죠.”
  매니저가 말했다.
  “어딜?”
  “어디긴요. 이집트죠. 여기 여권이요.”
  “이집트?”
  한솔은 매니저에 이끌려 출국장으로 갔다. 그리고 전용기 출입구 앞에서 <잭과 콩나무 프로젝트>홍보팀을 만났다. 그들은 한솔에게 악수를 청하고, 그의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간이 포토존에서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박한솔씨 여기요. 여기도요. 박한솔씨 오랜만입니다. 여기도요―보안 검사도 없이 전용기인 봄바르디어 글로벌익스프레스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는, 원피스를 입은 천사라가 거대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녀는 처음 느끼는 이륙의 기분에 가슴이 뛴다. 비행기가 고도에 이르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소파에도 누워보고, 티브이도 틀어보고, 선반에서 비스킷도 꺼내먹어 보고, 블라인드도 닫았다 열어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나중에 쓰기 위해 메모지에 적어둔다. 한솔은 그런 행동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선택했다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솔을 힐끗 보고, 배낭에서 책을 꺼낸다. 스포트라이트가 멈추면. 표지를 한 장 넘겨 한솔의 사인을 자랑스레 보여준다. <천사라님 삶에 언제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길. 박한솔.> 소녀는 책을 집어넣고 다시 소파에 앉는다. 구름의 모양에 감탄하다가, 박한솔의 굳은 표정을 감상하다가, 잠이 든다.


  “……말씀드린 것과 같이 본 우주 엘리베이터 <콩나무>는 밀리미터 당 40톤 이상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로 설계 되어 있으며, 여러분이 도착하게 될 우주정거장 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데려다줄 것입니다. 자, 그럼 황금알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박한솔씨?”
  우주복을 입은 한솔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일본인 과학자에게 황금알을 받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주복 차림의 천사라가 황금알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카이로국제공항과 카이로 시내, 기자지구까지, 이동하는 곳마다 받은 떠들썩한 환영에 한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째서 천사라를 쏘지 않았을까?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방문하려는 사람이 킬러를 동행인으로 지목하면, 그 분은 그를 구해줄까? 이런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마침내 한솔과 천사라에게 간단한 보호 장비를 착용시키고 우주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 뒤 알 수 없는 노인이 나와서 30분 정도 이 여행의 의미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했다. 한솔과 천사라는 성실한 자세로 신의 메시지 전달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내부는 반원통형 구조에 의자가 부채꼴로 고정되어 있었다. 커다란 창문은 푸른색으로 약간 불투명했다. 한솔과 천사라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안전요원이 보호 장비에 안전 잠금 장치를 부착하고, 보호구를 씌워주고 바깥으로 나갈 때, 한솔은 군중을 헤치고 나오는 남자를, 서늘한 눈빛의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가 권총을 꺼내 하늘로 한발 발사했고 군중들이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그리고 또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사실은 두발의 총성이. 한솔이 손에 든 권총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두터운 문이 자동으로 잠겼고, <콩나무>는 예정대로 신을 향해 날아올랐다.


  소녀는 지금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한솔이 우주복을 벗도록 도와주고, 나중에 쓰기 위해 가져온 메모지를 뜯어 한솔의 배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닦아내면서, 소녀는 자신의 삶이 약간은 소설 같다고 느낀다. 불투명한 푸른색 창을 통해, 긴 꼬리를 가진 거대한 검은 물고기 같은 남자가 <콩나무>를 따라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작은 공만 한 지구도 보인다. <콩나무>는 곧 멈춰 선다. 한솔의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소녀는 검은 물고기가 하영란이 되었다가 수녀가 되었다가 경찰이 되었다가 박한솔이 되었다가 총무가 되었다가 소녀가 되었다가 다시 남자로 변하는 것을 본다. 남자는 불투명한 창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절박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른다. 다닥, 다닥,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녀는 부유해 엘리베이터 위로 천천히 다가간다. 천장에 부착된 해치를 한 바퀴, 한 바퀴 돌린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솔을 뒤돌아보고, 연습한대로 침착하게 밖으로 나간다. 소녀는 이제 이야기의 끝에 왔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소녀를 바라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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