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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플라스틱 프린세스

2006.01.11 03:0401.11

플라스틱 프린세스
The Plastic Princess







2015년 12월 25일

안녕. 어제는 영화를 보느라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어.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봐야지, 하면서 유료로 결제한 영화들이 계정에 쌓여서, 전부 삭제하지 않으
면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도 못 찍을 정도였거든. 아무래도 아까워서 싹 지워버리
기 전에 대충이라도 한 번 봐야지, 하고. 말마따나 돈 주고 산 건데.
   아니 뭐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
따위,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면서 날려버린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응, 사실 집이
너무 조용해서 영화가 아니더라도 뭐든 소리나는 게 필요했어. 그게 개건 고양이건
사람이건 상관없었던 거지. 물론 핸드폰이어도 상관없었지. 영화를 보기 전에는
기특하게도 청소를 했는데, 더 이상 먼지 하나 남지 않게 되니까 영화 말고 소리를
낼 만한 게 마땅히 없더라. 그냥 진공청소기를 켜둘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닌
데, 너무 비생산적이라서.
   으, 외로웠냐니, 닭살돋게 왜 그래. 알잖아, 난 독립적이지 못한 태도는 딱 질색
이야. 오히려 열세 번이나 지나간 예전의 크리스마스 이브들보다 어제가 훨씬 즐거
웠단 말야. 참견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내맘대로였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그래,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야.
   영화를 고를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 다운로드받은 영화들은 다
그게 그거였는데, 말하자면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공통점이랄까. 매력적
인 휴머노이드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두 시간 동안 중얼거리는 거라곤 ‘나는 인간
인가’, 뭐 이런 게 전부인 영화들. 웃기지? 아니, 인간이 아니면 좀 어때서? 세상천
지에 부러울 게 없을 미인들이 크리스마스에 입을 옷을 고민한다면 모를까, 왜 쓸
데없는 걸 고민하지? 누가 날더러 그렇게 쭉쭉빵빵하게 만들어줄 테니 대신 인간
이기를 포기하라고 말한다면 난 한 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수술대에 대자로 눕겠
어.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밖에 없었어. 대충 볼 생각이었는데.
   나도 요즘 고민이 있어. 아니, ‘나는 인간인가’ 같은 건 아냐. 비슷한 말투로 하자
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니? 나도 사실 잘 몰라.
그게 알고 싶어서 눈독들여놓고 살까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산 크리스마스 초컬릿
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영화만 본 거였어. 그렇지만 마지막 영화가 끝나서 자, 이
바보같은 영화를 만든 바보들을 소개합니다, 짠~ 하고 스탭롤이 올라갈 때까지 내
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어. 어쩌면 원래 그런 건 영화에서는 찾
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어. 핸드폰의 전원을 끄지도 않은 채 머리맡의 버
튼을 눌렀지. 수면유도음향에 취해 잠들기 바로 전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게
아직까지 기억나. 난 왜 울었던 걸까? 그 우스운 영화들에 감동한 게 아니라면 난
왜 슬퍼했던 걸까? 넌 알 것 같니?

   이 세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내 평소 지론이야.
   난 2015년쯤 되면 학교 같은 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앗, 하는 사이
벌써 2015년이 되고 만 거야. 이대로라면 인류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학교에 다
닐지도 몰라. 끔찍하지.
   응? 마땅한 대안이 왜 없어? 핸드폰이 있는데. 핸드폰으로 수업을 들어서 안될
건 또 뭐야? 얼마나 좋아, 핸드폰으로 수업듣고 숙제내고 시험보고, 너랑 데이트하
러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번에 코스요리처럼 끝내버릴 수 있잖아.
   아니, 학교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려는 게 아니라, 요점은 매일 아침 학
교에 가지 않으면 이 세계의 가장 나쁜 점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수업시간
에 교탁 뒤에 숨어서 사타구니를 긁어대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라던지,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팬티의 빨간 얼룩을 제 짝에게 보여도 아무렇지
않은 듯 멍청하게 웃는 바보들이라던지, 우리 학교 정문을 세낸 양 떡하니 기대고
서서 지나가는 여자아이들 가슴 크기나 품평하는 주제에 자기가 쿨하다고 생각하
는 바보들이라던지. 한두 가지가 아니지. 난 이따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에 멈춰선 채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해. 그러면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모든 것들이 더러워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는 거야. 벌써 2015년이나
됐는데 좀 나아진 게 있잖을까, 하고 몇 번이나 그렇게 해봐도 늘 똑같아. 이 세계
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는 거야. 방이 더러우면 청소하면 되지만 이
세계가 더러우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진공청소기로 다 빨아들여 버렸으면 좋겠
다.

   이런, 이마에 여드름이 났네. 너한테 음성 메시지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가 눈에 딱 띄었어. 하필이면 이렇게 잘 보이는 데 여드름이 날 게 뭐야. 뭐, 괜찮
겠지. 세수나 해야겠다.
   넌 알까? 오늘은 우리가 만난 지 3년째 되는 날이야. 플로리스트에게 주문한 꽃
이 벌써 도착했어. 장미 300송이로 ‘사랑해’라는 글자를 만들어서 예쁜 상자에 넣
었지. 내 선물이 네 맘에 들길.

   넌 어쩜 그렇게 흠 하나 없이 완벽하니? 너같은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이 없어. 널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지금까지도 이 세계가 완전무결한 더러움 그 자
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단 한 가지 예
외는 있다고 생각해.
   넌 이 세계의 모든 아름답지 않은 것들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처음 그대로의 모
습이야. 눈을 감고서 널 생각하면 네 모습은 레이어 케이크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
로부터 한 층 떨어져 난 언제고 네 손을 잡기만 하면 이 세계와는 영원히안녕, 작별
을 고한 채 너와 함께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
렇게 생각하면 힘이 나. 갑자기 모든 고민들이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벌써 고민에서부터 저만치 멀리 가 있는 거야.
   기억나니? 이 더러운 세계에 나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네가 내 손을
잡아줘서 내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거야. 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아냐. 지금도 맘만 먹으면 그때 네 손의 감촉을, 오래 전이지만 지금처럼 느낄 수
있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기억나니? 언젠가 우리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지. 우리 헤어지지 말자. 세계
의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함께야. 그럴 리 없겠지만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때가 되
면, 같이 죽자.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서로의 약속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자.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곳에서 함께 뛰어내리자. 그러면
우린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겠지만 그대로 이별은 아니
야. 서로의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만 기억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우연히 스쳐지나가다가 갑자기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기억해, 잊지 않았어, 우린 함께 있어, 하고 다시 서로의 손을
잡게 되는 거야.
   기억나니? 우리 둘만 함께라면 세계 따위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고 했던 말. 그
래,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앵커 아저씨가 말하길,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병이 발견됐대. 일단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하면 관절부위가 썩기 시작해 죽는 데 채 1주일도 안 걸린대. 워낙 전염
성이 높은 병이라 백신을 만들 시간이 부족하대. 벌써 세계의 종말이 오고 있는 걸
까?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하는 내 일부에게. 이렇게 말해도 내 마음의 반도 표현하
지 못한다는 것을 슬퍼하면서.





2016년 12월 25일

안녕. 어제는 집에 있었어.
   데이트 펑크 미안해. 하지만 이 꼴을 한 채 네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내가 죽으면 넌 슬퍼할까? 단 한 번이라도 날 위해 울어줄까? 내가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그게 네게 먼지만큼의 의미라도 있을까? 그건, 절대
로, 참을 수 없어. 네가 날 비웃고 내 얼굴에 침을 뱉고 지옥으로 떨어지라고 저주
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난 지금 죽을 수조차 없어. 말해줘.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
니?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니? 정말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니?

   그건 며칠 전부터 계속되고 있어.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양 다리 사이가
뜨거웠어. 시뻘건 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보고 말았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 거야. 세제로 박박 문질러 닦은 지 얼마 안 된 욕실 타일 위로 빨간 피가 조금씩
떨어지는 걸 보고 있으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어. 그건 엄마 말처럼 꽃 같은 게 아
니라 더러운 음식물 찌꺼기였어. 김칫국물, 타바스코 소스, 케첩 같은 게 잔뜩 들
어간, 악취를 풍기는, 설거지를 하고 나면 꼭 손을 씻어야 할, 그런 구정물. 그런
게 내 몸 속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남들보다 내가 늦는 거라서 아직일 뿐이지 언젠가는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무서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너도 그걸 할 때 나처
럼 무서웠니? 아니, 너도 그걸 하기는 하니? 세상 여자들 모두 그걸 하더라도 너만
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네 몫까지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 이건 너무 더럽
고 무섭고 아파.
   미안해. 난 이기적인 여자아이라서, 이렇게 괴로울 때면 나도 모르게 널 미워하
게 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이렇게 추해지는데 넌 천 년이 지나도 그럴 것처럼 아름
답기만 해. 그래서 난 널 만날 수 없어. 내가 다시 네 옆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
이 될 때까지 난 감히 네 옆에 설 수 없어. 아, 평소처럼 내가 얼마나 힘든지 네게
어리광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안 돼. 그러느니 죽는 게 나아.

      ―――12월 25일 오전 10시 53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어디야? 난 벌써 도착했는데. 오늘도 바람맞히면 맴매할 거예요. 빨리 와. 기
다릴게.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그건 며칠 전부터 계속되고 있어. 난 떨리는 손으로 클렌징 폼 튜브를 쥐어짜서
얼굴에 발라. 이마를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당기고, 뺨 위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코
에서부터 T존을 몇 번씩이나 문지르는 거야. 1시간에 한 번씩, 30분에 한 번씩, 아
니 5분에 한 번씩, 얼굴이 하얗게 뜰 때까지 몇 번이나 세수를 해도 여드름은 없어
지지 않아.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은 온통 징그러운 돌기로 뒤덮여 나도 날 알아볼 수
없어. 날 보고 있는 저 여자아이는 누구지? 난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조심
스럽게 누르고, 그렇게 해도 수건에 피가 배는 것을 알고, 그리고 저 여자아이가
나처럼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려. 여자아이의 몸이
란 건 원래 기름과 물과 피가 가득찬 주머니 같은 걸까? 그래서 주머니가 오래되면
기름이 새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 여드름이 나는 걸까? 이 세계의 모든 여자아이들
은 거울을 볼 때마다 늘 만날 수 있었던 귀여운 여자아이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맨 처음 무슨 생각을 할까? 왜 아무도 내게 이런 걸 말해주지 않는 거
지?

      ―――12월 25일 오전 11시 23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설마 나 오늘도 바람맞는 건가? 크리스마스잖아. 전화 좀 받아요, 아가씨.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그건 며칠 전부터 계속되고 있어. 느린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지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면 비로소 깨닫고서 울 수밖에
없는 거야. 플라스틱처럼 매끄럽던 팔에, 다리에, 그리고 내 몸의 모든 곳들에 털
이 나기 시작해. 방금 용기를 내서 오른손을 들여다보니 이제 모공이 거무스름하게
변해서 면도한다고 해도 소용없게 돼버렸어. 손가락에도, 손등에도, 손목에도 온
통 털뿐이야.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도 마찬가지야. 내 몸을 바라보는 것조차 두
려워. 드러난 곳에도, 은밀한 곳에도, 어느 곳에도 털이 나지 않는 곳이 없어. 팔이
긴 옷을 입어서 아무리 더워도 벗지 않는다면 넌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손
은 어떡하지? 아무리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손은 어떡하지? 이 손으로는 예전
처럼 네 손을 잡을 수 없다니 잔혹한 운명이기도 하지. 난 이대로 영원히 널 만날
수 없는 걸까?

      ―――12월 25일 오후 1시 12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바람맞다니 너무하잖아. 무슨 일 있어? 아파서 자는 거야? 음성
메시지 받거든 연락줘. 화 안 낼게.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미안해. 나 따위가 감히 널 화나게 하다니. 네게 용서를 구하지 않겠어. 내게 그
럴 자격이 없다는 걸 난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넌 내게 살아야 할 이유를 줬는데 난 네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데다 널 걱정하게
하고 널 울게 하고 널 화나게 하고, 배은망덕한 여자아이라는 욕을 들어도 싸지.
내 값싼 목숨으로나마 네게 지은 죄를 갚을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텐
데. 하지만 부탁이야, 1년만 기다려줄 수 없니? 1년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이면 돼. 그럼 난 주저할 것 없이 네 두 손에 내 목을 맡길게.
   내년 크리스마스까지,안녕,안녕,안녕.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겁쟁이야. 벌써 1시간이나 지났
는데 아직 이꼴이라니. 널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줄 알았는
데. 차라리 널 만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하고 있어. 욕실이 온통 피투성이야.
뱃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피가 천장에서부터 벽을 타고 내려
와 타일이 깔린 바닥으로까지 똑, 똑, 똑, 노크하듯이 떨어지고 있어. 마치 빨간색
물감만으로 욕실 전체에 데칼코마니를 한 것처럼.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려고 황급
히 샤워 밸브를 틀었다가 물이 확 터져나오는 바람에 머리부터 푹 젖었어. 손이 피
에 전 것처럼, 손가락 끝이 부르틀 때까지 물에 씻어도 피부의 결을 파고든 피가 없
어지지 않아. 칼에서 튄 피가 하필 입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몇 번이나 침을 뱉는
데도 비린내가 풍겨. 여기는 온통 물 냄새, 살 냄새, 피 냄새. 지옥에 온 것 같은 기
분이야.
   미끄러워서 똑바로 설 수조차 없어. 넌 지금 어디 있니? 난 왜 이렇게 간단한 일
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 국에 넣을 고기를 자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
는데, 잘못 생각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내게 용기를 줘. 한 번 더 이를 꽉 깨
물어 참아낼 수 있도록.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넌 알 수 없겠지. 상처가 아물 무렵 널 다시 만
나면 넌 깜짝 놀랄지도 몰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고 물을지도 몰라. 어
쩌면 조금은 날 다시 보게 될지도 몰라. 그때 난 자랑스럽게 말할 거야. 다시 널 만
나기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용기가 나는 것 같아.
   그래, 난 널 위해서라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어.
   지금 네가 내 곁에서 날 바라봐주면서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고, 힘내라고 말해준다면 좋을 텐데. 아니, 이제 이렇게 겁쟁이 같은 생각은 그만
둘래. 말했잖아, 우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과 같아. 지금 넌 내 곁에 있는
거야. 날 봐.
   이렇게 주먹을 쥔 오른손을 욕조 모서리에 올려놓는 것을.
   이렇게 고기용 칼을 든 왼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치는 것을.
   한 번 더,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이렇게 짐승처럼 울부짖는 것을.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이 모든 것들이 다
너 때문이야. 한 번만이라도 날 볼 수 없니? 내가 아무리 추해지더라도 날 싫어하
지 않을 수 없니? 날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내가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니? 겁쟁이인 내가 처음으로 널 위해 날 포기
할 수 있다고, 네게 자랑할 셈이었는데. 이제 더는 안돼. 아무리 애써도 할 수 없
어. 날 도와줘. 아파…….
   한 번만 더.
   사람의 살을 자를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니? 살의 바깥쪽을 자를 때는 약간
딱딱한 소시지 껍데기를 자를 때처럼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살의
안쪽을 자를 때는 냉장고에서 며칠 묵혔다가 꺼내면 금세 녹아 흐물흐물해지는 고
깃덩어리처럼, 칼로 자르면 말랑말랑하게 날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뼈에 닿을
때는 칼이 나이프 샤프너에 부딪힐 때처럼 둔탁한 느낌이 들어. 고통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내 손목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
을 거야. 생각했던 것만큼 아프지는 않지만 무서워서 칼이 떨리니까 몇 번이고 완
전히 잘릴 때까지 자르지 않으면 안돼.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앗, 피 때문에 미끄러워서 칼을 놓쳤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잠들었던 걸까? 몇 시간 동안이나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았는데 견딜 수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아. 난 뭐라도 좋으니 소리를 들으려고
허둥지둥 핸드폰을 찾아.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기 전부터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도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는 것처럼 피에 젖어서 미끄러워. 14년 동안 익
숙한 오른손이었다면 핸드폰을 떨어뜨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어쩔 수 없지.
   내 오른손은 지금 욕조 안에 뒹굴고 있으니까.
   핸드폰을 주워 버튼에 튄 피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른 뒤, 삑, 삑, 삑……. 버튼
을 누르니 익숙한 효과음이 들려서 난 조금 진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리를
내려고 아무렇게나 버튼을 눌러. 삑, 삑, 삑……. 계속, 계속, 계속.

      51670161845160707070770707707070

   액정에 표시되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전화번호. 이대로 통화 키를 누르면
네게 연결되지 않을까? 버튼을 누르는 걸 멈추니 다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그래
도 좋아. 네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난 이 세계가 영원히 정적에 휩싸인대도 견
뎌낼 수 있을 것 같아. 넌 어디 있니? 넌 나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혼자라는 걸 화내
고 있니? 넌 날 사랑하니? 날 이 세계의 모든 더러움들보다 더 증오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내게 네 목소리를 들려준다면 난 살 수 있을 것 같아. 넌 지금 내가 뭘 하
고 있는지 알 수 없겠지? 난 통화 키를 누르고 있어. ……1분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넌 전화를 받지 않고 있어.
   이렇게 절실한데도 난 네 곁에 설 수 없어.

   메리 크리스마스, 나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정말 1년이 지나면 네게 사
죄할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잡을 수 있을까?





2017년 12월 25일

안녕. 어제는 하루종일 옷장 앞에서 패션쇼를 했어.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넌 알
수 있겠니? 1년만에 만나는 네게 어떤 날 보여줘야 할지! 에밀리 템플 큐트(Emily
Temple Cute)의 귀여운 여자아이? 빅토리언 메이든(Victorian Maiden)의 소공녀?
마블(Marbel)의 엘리건트 고딕 롤리타?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도 너와
비교되는 순간 빛을 잃고 말겠지만.
   난 지금 약속장소로 가고 있어. 네가 날 1년만에 처음으로 보게 되는 순간 얼마
나 놀랄지, 생각하기만 해도 행복해. 내가 널 위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고 싶지
않니? 베이비 더 스타즈 샤인 브라이트(Baby, The Stars Shine Bright)! 핑크색 신
데렐라 원피스에 흰색 스핀 돌 헤드드레스, 레이스 리스트밴드, 레이스 오버니삭
스, 그리고 피처럼 새빨간 앵클벨트 슈즈! 두 손에는 흰색 실크 오페라글러브! 시간
과 돈과 노력이 낡은 고민들을 해결했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게 이제
까지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다는 것.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널 만나 네 얼굴을 보고 네 손을 잡고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까. 그러면 아무리 큰 용기가 필요할지라도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난 크림 빛깔 하트버클 벨트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지역정보를 확인해.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야.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직도 달콤
한 꿈을 꾸는 것 같은걸. 널 다시 만나게 되다니, 내가 감히 그럴 수 있는 건지, 내
게 너무 과분한 행복이 아닌지……. 하지만 이제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로 결심했으니까, 더 이상 칭얼대지 않을 거야. 틀림없이 내가 네게 가고 있다는
걸 지역정보로도 알 수 있으니까. 이건 꿈이 아니야. 난 여기 있어.
   내 새 살굿빛 핸드폰을 네게 보여주고 싶어. 생리와도 여드름과도 털과도―――이
제 그런 것들을 입에 담고 싶지 않지만―――, 이 세계의 모든 더러움들과도 무관한
플라스틱의 몸. 끊임없이 증식하는 생명의 징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함. 날
렵한 곡선이 매끄럽게 흘러 내 왼손의 촉각세포를 자극해. 마음에 들어. 너를 제외
하면 이 세계에 이 핸드폰만큼 아름다운 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들기도
해.
   약속장소로 정한 카페에 도착했어. 길어야 30초도 되지 않을 이 순간을 네게 어
떻게 말하면 이해할지! 그건 어떤 나라의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야. 심장이
너무나도 빨리 뛰어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해. 심장이 멈춰 이 세계가 정지하
는 것 같기도 해.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라. 카페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문에 달린 종이 흔들려 딸랑거리는 동안 네가 금세 찾을 수 있는 곳에 앉았는지 카
페 안을 둘러보고, 웨이트리스에게 입속에서 굴리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네 이름을
말하고, 그리고…….
   난 널 발견해. 이 세계의 가장 참혹한 장소에―――숲에, 섬에, 사막에, 그것도 아
니라면 지옥에―――있을지라도 눈부시게 빛나서 누구라도 금세 찾아낼 수밖에 없을
너를. 아, 그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너의 검은 머리카락, 흰 얼굴, 눈, 코, 입. 몇
번씩이나 단조롭게 반복되더라도 언제나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의미를 가지고 태어
나는 너의 몸짓.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너의 달콤한 향기, 존재감, 영혼.
난 막 사랑에 빠진 것처럼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서 있다가 네가 날 부르는 목소리
에 간신히 한 걸음씩 널 향해 걸어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리고 한 발자국. 창
가에 앉아 얼 그레이를 두 손으로 받쳐든 네 얼굴 위로 홍차 빛깔 조명이 비춰 널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넌 고개를 돌려 내게 말하지.안녕, 오랜만이야. 메리 크리
스마스. 난 얼어붙은 입술을 떼어 겨우 대답하지. 메리 크리스마스. 주문하시겠어
요? 아이리시 브렉퍼스트, 각설탕은 세 개. 넌 내 대신 웨이트리스에게 말하고서
내게 미소지어. 작년까지 그렇게 마셨지. 그렇지?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난 고개
를 끄덕여. 1년이나 지났는데 넌 날 아직 기억해. 기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아.
   어떻게 지냈어? 넌 내게 손을 내밀어 내가 잡을 수 있도록 해. 난 오페라글러브
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해. 네게 하려던 이야기가 산더미같은데, 가
슴이 벅차 말할 수 없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난 마음을 굳게 먹고 오페라글
러브를 잡아당겨. 오른손으로 왼쪽 장갑을 잡아당기자 드러나는 왼손. 지난 크리
스마스와는 다른 왼손. 어제 크림을 발라 손등에 단 한 개의 털도 남지 않은 왼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듯 희게 빛나는 왼손……. 그리고 왼손으로 오른쪽 장갑을
잡아당기자 드러나는 오른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른손.
   네게 할 말이 있어.
   난 널 향해 희미하게 미소지어.

   넌 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지. 난 사고로 오른손을 잃어 의수를 연결할 수밖
에 없었다고 대답했지. 그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야. 부모님께 그렇게 말씀드렸
기 때문에 의수를 연결할 수 있었으니까 나만 입을 다물면 그건 정말이 되는 거야.
양심의 가책 따위 조금도 느끼지 않아.
   넌 내 오른손을 네 왼뺨에 가져가 내게 온기를 나눠주면서 속삭였지. 네 새 오른
손, 마음에 들어.
   난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숨을 멈췄지.
   네 슬픈 눈, 내 슬픈 것처럼 연기하는 눈, 두 개의 시선들이 허공에서 서로 만나
지. 넌 지금은 내 새 오른손을 슬퍼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처음부터 완전
무결함은 플라스틱에나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에 고깃덩어리에서는 찾을 수 없어.
이건 불가피할 뿐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야. 오히려 기뻐해야 해. 네가 슬퍼하기 때
문에 나도 슬퍼하는 척하지만 이건 슬픈 일이 아냐.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
어째서 기계가 고깃덩어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어째서 기계가 고깃덩어
리를 대신하는 것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어째서 기계가 고깃덩어리를 대신하는
것을 슬퍼하지? 이 왼손을 보라지. 기능성 화장품, 오일, 제모 크림이 없이는 한순
간도 플라스틱의 완전무결함을 따라갈 수 없는, 36.5℃의 미지근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이 왼손을. 너라면 내 새 오른손을 축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홍차 향기 몽롱한 테이블 위로 네 손이 내 손에 닿아. 네 오른손이 내 오른손을
탐색하듯 아래에서 위로 감싸. 이 세계의 멸망보다 더욱 느리게. 플라스틱으로 만
들어져 서로 부딪힐 때마다 잘각거리는 홍차 빛깔 손톱, 연성 플라스틱 인조피부로
코팅된 살굿빛 손가락, 모든 아름다운 기계들처럼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손등,
그리고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내 팔과 의수의 경계선까지―――네 손이 그곳에 닿자
난 흠칫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너라면 아무리 부끄러운 것이라도 보일 수 있으니
까, 어떤 치부라도 드러낼 수 있으니까, 모두 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너만은 날
이해할 테니까.
   네 손이 손등을 아래로, 내 손이 손등을 위로, 서로의 손가락 끝을 약속하듯 걸고
무도회의 홀로 향하는 연인들처럼 움직여.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개의 손
들이 마주하는 장면. 이제 겨우 네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됐어. 아직 오른손뿐이
지만.
   왈츠를 추시겠어요? 그렇게 묻는다면, 기꺼이, 그렇게 대답하겠지. 영원히 멈추
지 않을 음악이 흐르는 홀에서 우리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끝을 맞이할 때까지
춤추겠지. 이대로 우리들마저 끝이라 해도 후회하지 않겠지.
   그 끝마저 끝날 때 돌아와 다시 만날 테니.

   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 몇 번이고 두 손을 마주잡아. 왼손으로 오른
손을 잡아. 내 예전의 오른손의 기억들을 더듬어. 처음으로 너의 손을 잡았던 오른
손. 너의 머리카락을, 뺨을, 입술을 느꼈던 오른손. 네가 내게 보인 첫 번째 눈물을
닦아주었던 오른손. 그래서 첫 번째는 오른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제 잊혀질 정도로 오래 전 너의 보드라운 살갗을 쓰다듬었던 기억도 희미해지
고 있어. 새 오른손으로는 예전의 오른손과 다른 감각을 느껴. 그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원래의 오른손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감각이야. 그걸 뭐라고 말하면 좋
을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른손으로 널 만지면 장밋빛으로 물든 석양이 입속
에서 톡, 하고 즙이 많은 열매처럼 터지면서 아주 느리게 번지는 것 같아! 의료원에
서는 최고급의 의수를 연결하면 원래의 손과 거의 같은 감각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비슷하지만 달라. 똑같을 수 없을 거라고 짐작했
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달라. 그래서 기뻐.
   눈이 내리고 있어. 손바닥을 위로 하고서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눈송이가 한 개,
한 개, 그리고 또 한 개…… 내려앉아. 예전에 느꼈던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라, 차
게 식힌 연유가 후르츠 칵테일과 함께 혀 위에서 황금색으로 폭발하는 듯한 차가
움. 눈송이마다 조금씩 다른 맛이 폭발해. 한 번,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네게도
이런 느낌을 알려주고 싶어. 그럴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럴 수 있길.
   집에 도착하자 난 옷을 벗어 가지런히 개키고서 다시 한 번 칼을 든 채 욕실로
가. 떨리는 오른손으로 쥔 칼의 촉감은 차가운 물고기의 살, 비누, 녹슨 못에서 떨
어지는 가루를 피가 날 때까지 살에 문대는 것 같아. 이번엔 더 많이 아프겠지만 널
위해서라면 괜찮아.
   욕조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해.
   네 이름을 불러, 조용하지만 간절하게.
   그리고 난 오른쪽 허벅지 관절 부위에 댄 칼을 두 손으로 눌러.

   메리 크리스마스, 내 손을, 다리를,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네게. 그런데 아주 잠깐이지만 불안해졌어. 내가 오른손만이 아니라 온몸을 기계
로 바꾼다 해도 네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그렇지만 금세 깨
달았어, 그건 당연하다는 걸. 어떻게 감히 내가 너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겠니?
그런 생각을 다 했다니 우습기도 하지.
   내게 용기를 줘. 부탁이야. 이번에도 아파…….

   메리 크리스마스, 다시 한 번만 더. 사랑해.





2018년 12월 25일

안녕. 어제는 핸드폰으로 적응훈련 프로그램을 다운로드받아서 전부 한 번씩 따라
해보느라 집 밖으로 나갈 틈이 없었어.
   또 1년이나 만날 수 없었지. 어학연수니 뭐니 둘러댔지만 사실은 의체에 익숙한
내 모습을 네게 보여주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야. 의수에 익숙해지는 데만
1년이나 걸렸으니 이번에는 시간이 모자랐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은 크리스마스
니까.
   네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 1년이 10년처럼 느껴질 만큼 많은 이야깃
거리들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네게 숨겼던 것, 둘러댔던 것, 거짓말했
던 것……. 내가 감히 그럴 수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원한다면 네 앞에 무릎을
꿇어 몇 번이고 용서를 빌게. 하지만 그 전에 한 번만 내 얘길 들어줘. 내 얘길 듣고
나면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너도 이해할 거야.
   기억나니? 1년 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먼 나라에서부터 무서운 바이
러스가 퍼져나가고 있었다는 걸. 뉴스에 잠깐 나왔더랬지. 감염되면 아무리 길어
도 1주일이면 관절부위가 썩어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야. 손가락 끝처럼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마디마다 싹둑 잘려나간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운 병
이지.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손목이 떨어져나가고, 팔꿈치가 떨어져나가고, 그
렇게 먼 곳에서부터 죽음이 다가오는 걸 남 일 보듯 보다가 죽는 거야. 어떤 약으로
도 낫기는 커녕 감염속도를 늦출 수조차 없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병에 걸렸
다는 걸 알면 얌전히 누워 죽음을 기다려야 할까? 기도나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했어.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대부분은,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선택한 건 첫 번째야. 그건 한 편의 코미디였지.
   반 년 전쯤, 세계최초로 전신의체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웬만한 포털 모바일 사이
트라면 대문에 걸릴 정도로 떠들썩했지만 다들 국위선양이라면서 목에 힘주기만
했지 피실험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 카이스트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니 보건복
지부니 하는 곳에선 처음에는 1급 장애인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으스대다가,
그 다음에는 중환자 여러분들 중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말을 바꾸다가, 마지막
에는 증세의 경중을 막론하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던가, 빚쟁
이처럼 애원하더라. 웃겼어. 의사들이 피실험자가 없어서 광고를 낸 것도 웃겼지
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게 더 웃겼어. 바보같으니. 0.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플라스틱이, 15년도 채 안 돼 기름에 털에 피에 너절해지기 시작하는 고깃
덩어리보다 못할 게 뭐야? 난 한 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신청서를 전송했어. 반대
하면 딸의 시체를 보게 될 거라고 부모님을 협박했지. 아빠 엄마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 집에 왔을 땐 이미 내 몸엔 성한 곳이라곤 없었으니까 반대고 뭐고 너무 늦었
지. 내가 어떻게 했는지 네가 알아야 할 텐데! 난 팔을 칼로 잘랐고 발을 벽돌로 으
스러뜨렸고 얼굴을 못으로 찔러 썩어들어가도록 했어. 잘 드는 미용가위로 눈을 찌
르고 코를 도려내고 입속을 휘저어 못 쓰게 만들었지.
   내 몸에 위해를 가할 때의 분위기는 왕비의 목을 단두대에 올릴 때처럼 우아했더
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는 흰쥐를 실험대에 올릴 때에 더 가까웠어. 선반에 거즈,
반창고, 지혈대, 마취제가 든 앰플과 주사기와 솜, 간단한 의료기구들을 늘어놓은
뒤에야 그걸 할 수 있었으니까. 다 한 다음엔 지쳐서 힘들게 냉장고를 열어 죽 같은
걸 꺼내다 데워 먹곤 했어. 한쪽 팔이 없어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요리를 할 수 없잖
아. 아예 한 달치 먹을 인스턴트 푸드 따위를 냉장고에 채워두고, 다 못 채운 건 박
스째 부엌에 쌓아두고, 흰쥐에게 먹이 주듯 조금씩 먹어치웠지.
   난 다시 태어나려는 거였지 죽으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했어. 하나라도 잘못되면 괴사, 통증, 출혈과다, 뭐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죽는
거잖아. 덕분에 인체생리학이니 뭐니 하는 두꺼운 책들을 몇 권이고 외우다시피 했
지.
   모든 게 완벽했어. 어느 것 하나도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없었어. 굳이 하나
꼽자면 만신창이가 된 딸이 목에 칼을 들이대는 꼴을 보여드린 게 부모님께 죄송했
다는 것 정도지만 어쩔 수 없지. 날 정신병원에 데려간다거나 하면 진짜로 죽어버
릴 거라고, 한 번 더 불효자식이 되어야 했으니. 가엾게도 엄마는 몇 번쯤 기절하
기까지 했어. 불쌍한 우리 엄마.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일으켜주려고
했더니 몸살이라도 든 것처럼 떨면서 뿌리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어.

   그 뒤로도 모든 게 완벽했어.
   의체의 소프트웨어가 내 몸에 맞도록 데이터를 입력한다던가, 덕분에 병원에서
몇 달이나 살아야 했어. 심박수부터 앨러지까지 별걸 다 측정하길래 도대체 수술은
언제 하는 건지 지루했지만 막상 수술이 끝나니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했다는 느낌
이 들었어.
   생각해봐, 난 다시 태어난 거야! 생각과는 달리 수술이 끝났다고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뇌만 빼면 갓난아기가 된 거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거였어. 난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나갔어. 구식 SF영화들은 이런
과정을 러닝타임을 잡아먹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지
만 이거야말로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 말고 누구도 이런 걸
겪어보지 못했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먼지낀 돌 사진을 남 사진 보듯 보면서
난 어떤 아기였을까, 하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로 존재하는 지금 내 손가
락 한 개를 움직이기 위해 며칠이고 애써야 하는 걸 말야! 그건 지루한 만큼 숭고
한, 내가 내 몸의 통제권을 되찾는 과정이었지. 난 매일 오전 9시까지 의료원 부속
피트니스 센터에 출석했어. ID카드를 체크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석진 자리
를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내가 맨 처음 하는 일은 벽에 네 사진을 붙이는 거였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미소짓는 네 사진. 난 네 뺨을 쓰다듬는 것을 상상하
면서 내 손가락을 움직이기 위해 애썼어. 네게 달려가는 것을 상상하면서 내 다리
를 움직이기 위해 애썼어.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내 음성기관을
움직이기 위해 애썼어. 난 오직 널 위해 몇 달이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지루한 적응
훈련 코스를 반복하면서 이 지루한 과정이 내게 널 돌려줄 거라고 기뻐했어.
   그건 기도였어. 기도하는 방법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말야.

   앗, 깜짝이야.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춰놓아서 다행이야. 네 생각에 취해 옷장 앞
에 앉은 채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어. 늦지 않게 출발해야지.
   1년만에 만나는 네게 맨 처음 뭐라고 인사할까?안녕? 잘 지냈니? 메리 크리스마
스? 또다시 어떤 것도 말하지 못한 채 널 바라보기만 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더라
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줘. 네가 눈앞에 없어도 널 생각할 때마다 황홀해서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은데 네가 눈앞에 있으면 어떻겠니? 그러니까 넌 날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
   그럼 조금 있다가 만나. 내 몸과 바꿔 되찾은 네게, 늦지 않게 달려갈게. 사랑해.

   내가 내 팔을, 발을, 얼굴을 썩은 고기라도 되는 것처럼 잘라내버릴 수 있었던 건
너 때문이었어. 내가 베어낸 내 살을 음식물 찌꺼기 다루듯 두 손가락으로 집어 쓰
레기통에 넣으면서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애쓸 때 머릿속으로 되뇌었던 건 네가 내
게 했던 몇 마디 사랑스러운 말들이었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생
각하지 않으려 해도 갑자기 떠올라 한밤중에 잠들지 못한 채 헐떡거리면서 머리맡
을 더듬어 찾았던 건 네 사진이었어. 넌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에서 내가 따
라갈 수 있는 단 하나뿐인 빛이었어.
   듣고 있니?
   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내가 네 눈을 바라봤을 때 내 눈을 피해서는 안 되
는 거였어. 내가 네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내가 네
게 다가섰을 때 황급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안 되는 거였어. 듣고 있어? 내가
네게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어. 난 네가 날 이해하길 원했어. 내 선택을 축하하길
원했어. 아니,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날 외면하지 않길 원했어.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날 손가락질하더라도 너만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넌 다른 사람
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어. 널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어. 듣고
있어? 넌 날 무서운 괴물을 보는 것처럼 봤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이 살인가스처럼 무겁게 발밑을 흐르는 카페에서 넌, 날 보더니, 비명을 질렀지.
난, 비명을, 지르지 않았지. 왜냐하면, 성대로 비명을 지르는 너와 음향합성 카트
리지로 비명을 지르는 나는 비명조차도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 그걸, 뭐라
고, 말해야 하지? 어느 순간부터 네가 내게서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
지기 시작했는데 바보같이 몰랐던 것을 내가 어떻게 납득해야 하지?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듣고 있느냐고, 내가, 네게, 묻고 있잖아! 네가 날 이해할
수 있어? 이 공포스러운 좌절감을! 이 세계의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을 때 넌 늘
그랬던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으로 족하겠지만 난 어떤지 알아? 파인애플과 자몽과
레몬을 쥐어짠 끈적거리는 즙이 몇천 마리의 송충이들과 함께 머리 끝부터 발끝까
지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 온몸의 피가 링거액을 역류하듯 연성 플라스틱 피부를
뚫고나와 공기중으로 퍼져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끈적이는 허공의 안개를 지나
치는 느낌. 내 날갯죽지에, 목에, 허리에, 그리고 그렇지 않아야 할 모든 곳에 내가
잘라내버린 팔이, 발이, 얼굴이, 눈이, 코가, 입이 돋아나는 것 같은 느낌. 네가 날
외면했을 때 내가 그따위 것들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넌 알까? 안대도 이해할 수
있을까? 넌 네가 죽을 때까지 그런 느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듣고 있어?
   넌, 지금, 어디 있어?

   네가 날 봤을 때 너의 크게 뜬 두 눈,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잡은 두 손, 떨리는
두 다리, 그런 것들마저도 난 사랑해. 네가 듣고 있지 않대도 난 말할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널 사랑해.
   메리 크리스마스, 영원히 만날 수 없을 네게. 내일이 오면 넌 나쁜 꿈을 꾼 걸까,
하고 모두 잊어버릴지도 모르지.
   그래도 좋아.





2019년 12월 25일

안녕. 어제는 올해 늘 그랬듯 혼자 집에서 보냈어. 이젠 그럴 필요 없는데도.
   너도 알겠지만 또 한 번의 1년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백신이 개발되지 않
는 동안 바이러스가 우리나라까지 포함해 전세계로 퍼져버린 거야. 오늘은 크리스
마스잖아? 만약 오늘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면 모든 관절들이 해체돼 죽
는 데 1주일밖에 안 걸리니까 가엾게도 새해를 맞이할 수 없는 셈이야. 물론 과학
자들이라고 백신을 만들 시간에 놀고먹은 건 아니지만 바이러스의 변종이 3,700만
개 정도 발견되자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다 죽은 거지. 웃기
지?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어. 신의 심판이 시작됐으니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
다면서 기도하는 사람들, 어느새 몇 개의 폭도집단들로 갈려 서로 다른 폭도집단을
만나면 일단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총을 쏘는 사람들, 그리고 백신에 의존하지 않
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건 없는 거나 다름없었어. 그 방법이란 건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
도록 몸을 의체로 바꾸는 거였거든. 예전에도 그랬듯 사람들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몸이 동강나 죽었지. 웃기지?
   그게 이 모든 것들의 발단이야. 레고 블럭으로 만든 사람이 분해되는 것처럼 비
현실적인 죽음이 가까운 사람에게 닥치는 것을 본 사람들은 한 명씩, 전신의체화수
술을 받기 시작했어. 한 명씩, 한 명씩, 한 명씩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몸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어. 뒤늦게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간 사람들은 겨우 며칠만에
의체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아진 걸 알고 돈을 구하려면 뭘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
작했어. 병원에 다녀온 사람들은 또 세 부류로 나뉘었어. 이번 폭도가 저번 폭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싸우는 이유 정도. 어차피 죽을 테니 같이 죽자, 가 아니라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일 테다, 랄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어. 의체화하지 않은 사람들
이 모두 죽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어. 뉴스에서는 이제 지구에 의
체화하지 않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집계된 100만 명 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더라. 웃기지?
   난 내가 모르는 사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어. 의체화했다는 것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난 겨우 몇 달이 지나 나 말고도 모든 사람들이
의체화했다는 걸 안 거야! 모두 비정상이 되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거야! 이제 날
손가락질할 사람은 이 세계에 아무도 없는 거야!

   그래서 난 너도 이제 날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도 날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다시 1년만에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널 만나면 맨 처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행복해하고 있었
는데, 네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어.
  
   네 장례식에 다녀왔어.
   입관 전 마지막으로 본 넌 사지가 분해된 구체관절인형처럼 아름다웠어. 창백한
얼굴에 감겨진 두 눈과 오똑한 코와 다시 열리지 않을 입술이 죽은 사람의 그것들
로는 보이지 않는, 지금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인형. 두 팔이, 두 다리가, 허
리가 없는 인형.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른손만이 아직도 죽지 않은 채 사람들에
게 뭐라고 말하려 하는 듯한 인형. 냉동실에서 막 나와 잠든 것처럼 보이는 네 주위
에는 네 어머니, 몇 명의 친척들, 그리고 나뿐이었어. 네 어머니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른손으로 널 가리키면서 내게 말했지. 병을 피하기 위해 일단 네 오른
손만이라도 의수로 바꾸느라 여기저기 손을 벌려야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고. 아버지도 죽었고, 어머니도 바이러스의 확산이 잠시 늦춰
졌을 뿐이었고, 겨우 며칠 사이 너도 죽었고, 네가 독약을 먹기 전 남긴 유서에 네
의수를 내게 주라고 씌어 있다고. 친척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어. 의체화하지 않
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데다 의체가 집 한 채 값쯤 우습게 넘기는 요즘 세상에,
주인이 죽어서 쓸모없게 된 의수가 있다면 친척들 중 한 사람에게 넘겨야 도의적으
로 옳지 않느냐는 거였어. 네 어머니는 친척들을 무시한 채 내게 네 오른손이 든 상
자를 내밀었어. 그 상자를 내가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니? 우리가 만난 지
3년이 된 걸 축하하려고 내가 네게 선물한 꽃 상자, 기억하니?

   그게 이 모든 것들의 결말이야.
   한 개의 이야기가 끝나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도, 네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애써 뭔가 하려 해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수 없
어. 처음부터, 한 개의 이야기가 아무리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아름답대도 이 세계
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걸까? 사람이, 아니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고 죽
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반복한대도 이 세계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걸까? 그래서 이 세계가 멸망한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몰랐
던 걸까?
   모든 것들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깃덩어리 몸을 플라
스틱 몸으로 바꾼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이 ‘나는 인간인가’를 두 시간 동안, 아니 그
보다 더 오래 고민한대도 우스꽝스럽지 않은 때가 아닐까? ‘인간’이 영혼이 깃든
플라스틱을 의미하게 된 지금 인류의 멸망이니 어쩌니 호들갑떠는 건 구식 SF영화
에나 나올 법한 얘기겠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인류가 어쨌거나 우
리는, 너와 나는 멸망했다는 거야.
   난 널 위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의체화한 지금 난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는 걸
까, 어떻게 해야 자살기도자로 분류돼 의료원에서 치료받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
게 해야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우린 만날 수 있겠지?

   난 방에 누운 채 눈앞에 있는 네 오른손을 향해 내 오른손을 뻗어. 더 이상 움직
이지 않는 네 오른손을 만지면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물든 네가 폭죽처럼 머
릿속에서 폭발해 구체관절인형처럼 산산조각난 네 파편들이 내 플라스틱 몸 위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져. 내 손은 네 손가락들을 쓰다듬고, 네 손등을 미끄러지
고, 네 손목의 경계선을 더듬고, 그리고 난 몇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는 울음을 터
뜨려. 고깃덩어리 손으로 널 만졌을 때의 기억, 플라스틱 손으로 널 만졌을 때의
기억, 그리고 널 기억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때의 기억. 내 오른손은 네 오른손
과 함께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언젠가 이렇게 약속했지. 우리 헤어지지 말자.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함께야. 그럴 리 없겠지만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때
가 되면, 같이 죽자.
   난 이미 정지된 네 핸드폰에 몇 번이고 음성 메시지를 보내. 좋은 아침이지? 기
분은 어떠니? 네게 하려던 말들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서 이제 난 어떡해야 하니?
듣고 있니?
   메리 크리스마스.

      ―――12월 25일 오후 11시 54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지금 내 손과 함께 있겠지?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4분에 발송되도록 지정된 음성 메시지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5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내 손을 잡아줘.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5분에 발송되도록 지정된 음성 메시지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6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함께라고 했던 말, 기억하니?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6분에 발송되도록 지정된 음성 메시지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7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뒤에도 함께야.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7분에 발송되도록 지정된 음성 메시지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8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8분에 발송되도록 지정된 음성 메시지입니다.


   난 네 손을 잡을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뒤에도 놓지 않을게.
   메리 크리스마스, 영원히 함께할 연인에게.
   사랑해.

      ―――12월 25일 오후 11시 59분에 도착한 음성 메시지입니다.
      사랑해.
      연락받을 전화번호는 그애입니다.
      12월 25일 오후 11시 59분에 발송되도록 지정된 음성 메시지입니다.
댓글 11
  • No Profile
    아키 06.01.12 00:59 댓글 수정 삭제
    ....뭔가 섬찟하면서도 슬픈 이야기 멋집니다-_-b
  • No Profile
    배명훈 06.01.12 10:38 댓글 수정 삭제
    수작이네요. 깔끔한 문장에 템포 조절까지. 그래서 재미있었습니다.
  • No Profile
    유서하 06.01.12 19:10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 No Profile
    요한 06.01.13 06:57 댓글 수정 삭제
    유서하님의 오랜만의 글이 맘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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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하 06.01.13 18:01 댓글 수정 삭제
    요한님/부비부비 구간반복~
  • No Profile
    ^^ 06.01.23 04:07 댓글 수정 삭제
    다시 읽었습니다. 마음이 아프네요. 왜 '나'는 사랑을 하면서도 2차 성징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그 사랑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요.
  • No Profile
    유서하 06.01.23 22:06 댓글 수정 삭제
    나도 그애도 그 밖의 모든 것들도 정지된 화면처럼 이대로이길 원했던 게 아닐까요? 이 세계에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요. 그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걸 알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원래 사랑이란 건 거짓말을 하는 거잖아요, 자신에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행복한 꿈을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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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그런데, 좀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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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하 06.01.28 11:01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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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70 06.03.22 11:27 댓글 수정 삭제
    너무 멋지네요. 소름이 확 끼쳐요.
  • No Profile
    유서하 06.03.25 14:34 댓글 수정 삭제
    앗,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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