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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스 시대의 사랑

2005.03.31 22:1103.31

사스 시대의 사랑

국제 공항에서 떠나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쫓아 가는 일은 영화에서 보는 것 보다는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우선 외국으로 가려는 사람을 갑자기 붙잡자고 뛰어가는 자체가 충동적인 일인 만큼, 대체로 그런 일을 하고자 결심하는 것은 비행기 시간이 몇 시간 남지 않았을 때이다. 그렇다면, 아슬아슬한 타이밍, 조금이라도 빨리 공항까지 내달려야하고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택시를 잡아 타야 한다. 우선 택시 요금부터가 어마어마하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수만원치씩 돈을 내고 택시를 타고 내달릴 때도 마음은 이만저만 초조한 것이 아니다. 분명이 도심에서는 차가 막혀서 속절없이 시간만 지나가는 시간이 있을 것이고, 그럼 괜히 돈만쓰고,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조금씩 생긴다. 그러다가 겨우 도심을 떠나서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영종도로 가는 다리 위에 올라설 때 쯤이 되면, 낯선 섬들과 서해의 수평선이 보이는데, 그러면 이제는 "지금 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이 잘 하는 짓인지 어떤지 무슨 정신나간 짓인지" 하는 후회 내지는 부끄러움 비슷한 것이 얼굴을 붉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인천 국제 공항의 그 포스트 모던한 철골 구조물 청사 안으로 딱 들어서면,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 하는 탄식이 나온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한 10초에서 20초쯤 두리번 거리는 남자 주인공과 엇갈리는 여자 주인공을 보여주면 끝이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 A1부터 H23이라는 큰 기호가 박힌 팻말 아래, 수백개씩 늘어서 있는 항공사 부스. 그리고 그 부스마다 줄서서 늘어선 사람이 가득가득하여 수천명의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고, 그런 것이 3층을 이루고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비틀즈 앤솔로지 앨범에 들어 있는 속지에, 뉴욕 셰어 스타디움 공연 실황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혹시 그 때 공연에 갔었다면, 이 실황 음반에 녹음된 2만여명의 관중 환호성 소리중에 분명히 당신의 목소리도 섞여 있을 것이다."

유쾌하고 멋진 해설인지 몰라도, 지금 인천 국제 공항의 수많은 인파속에서 그녀를 찾아야 하는 내 머릿속에 갑자기 그 문구가 떠오르자, 나는 그 속지를 쓴 자식의 엉덩이를 걷어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도 공항 근처였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그녀를 보았다. 흰 상의에 검은 스커트. 단정하고 수수한 정장. 꼭 친절한 은행원 같아 보이는 그녀는 어딘가에 전화를 하며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무척 밝고 신선하게 들렸다.

당시 나는 별로 안 진지하게 사귀던 한 여학생에게 차이고, 그 다음에 무지하게 진지하게 사귀던 다른 여자에게 양다리를 걸쳤다는 이유로 결별 선언을 당한 지 두 달 쯤 지난 후 였다. - 양다리라니. 얼토당토 않다. 그 애는 그냥 친한 후배였을 뿐이고, 그 미친 소문은... 세상에, 그 날처럼 술을 퍼마셨을 때는 권양숙 여사도 캐서린 제타 존스 처럼 보이는 법이다. - 나는 망상처럼, 버스 정류장의 그녀를 보면서, "저런 여자하고 같이 다닐 수만 있어도 옛날에 차였던 애들 코를 납작하게 해줄텐데" 하는 공인중개업자 내지는 세무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신촌쪽으로 나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 돼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내가 타려는 81번 버스가 어디쯤 오는지 길 저쪽을 보려는 찰나에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였다. 나는 관광 서울의 문화시민 답게 반사적으로 친절히 길을 설명해 주었다.

이 동네 처음 와보는 사람이 분명했다. 여기서 신촌이라니. 수도권 비대화의 무서움을 일요스페셜에서 보지 못했던가. 한강 다리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만도, 마켓가든 작전을 다룬 숀 코네리의 명작 전쟁 영화, "머나먼 다리" 전편을 다 볼 수 있을 것이외다.

"302번 버스 타면 되기는 하는데, 차라리 여기서 80번 버스 타고 가다가 지하철 타고 가는게 빠르실 거 같은데요."
"어.. 그럼 몇 분이나 걸려요?"
"한... 두 시간... 반 쯤 걸리려나?"
"아예..."


뭔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그녀는, 감사하는 뜻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예,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런데, 그 미소. 바로 그 미소가 확 나를 덥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완전 얼빠진 놈이 되었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는 1년 반 전의 그 잠시 동안의 미소는 이런 것이었다. 그녀는 착하고 명랑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성실하고 꼼꼼하지만, 답답하지 않고, 재미있고. 똑똑하고, 그렇지만 교활하지 않아서 괜히 인간 관계 만든답시고 친한 척할 줄 몰라서 가끔 외로움 탈 때도 있고.

그러면서도 동정심 많고, 진지하지만 밝고, 그래서 따뜻하고. 누구라도 처음부터 그 밝은 미소에 다시 미소 지을 수 밖에 없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길가다 처음 만나서 스칠 때의 짧은 순간 하얀 이를 드러내는 시원한 웃음 한 번으로,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는 최소한, 나를 뭔가 길눈 잘 알면서도 친절하게 잘 설명해줄 것 같은 마음씨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만은 틀림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이 길을 지나다니는 수천명의 사람 중에 나에게 물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약간의 자신감이 들었다. 나는 그래도 좀 긍정적인 첫인상이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말했듯이 나는 그 때 얼빠진 놈이었다.

나는 과감하게 시치미를 뚝떼고, 나도 신촌으로 가는 길이라고 사기를 쳤다. 평생 정직하게 살라고 하시고는 초등학교 3학년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평소에 친하던 사람하고도 괜히 분위기잡고 데이트 할 때가 되면 뭔가 말이 잘 안통하고 좀 어색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물었을 때,

"신촌에서 어디 가세요?"

여기서 나는 지난 주에 뚱뚱한 고등학교 동기 놈을 만난 일과 내일 반쯤은 소개팅 삼아 만나는 아가씨와의 약속을 대충 섞어서 말을 지어내 답했다.

"아예, 거기서 친구 만나서 저녁먹고 발레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어, 발레요?"

서울에 발레에 관심있는 사람 참 없는 편인데, 놀랍게도 버스 안에서 나란히 선 그녀와 나는 둘 다 발레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둘이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유니버설 발레단과 국립 발레단 이야기가 나오다가, 어쩌다보니까 크리스마스 때 호두까기 인형을 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찬송할 지어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를 주셨지 않은가.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든 그 길 버스안에서 오늘 만난 낯선 사람과 갑자기 이야기가 잘 통하고 있는데, 더군다나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게 되었다니. 그게 데이트였다면 내 평생에 가장 잘풀려나간 완벽한 아트 데이트였으며, 나는 지네딘 지단에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은행원이 아니라, 증권회사 기획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큰 할아버지의 이름을 인명사전에서 찾아보면 반페이지 좀 넘게 나오는 집안의 사랑받는 막내딸이었다. 재료공학을 전공하는 과학자인 나는 그녀 연봉의 반의 반을 좀 더 받는 형편이긴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나보다도 검소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귀걸이와 목걸이를 살 때 터무니없이 엄청난 것을 사는 것만 빼면.

무엇보다 우리는 기막히게 마음이 잘 맞았다. 내가 하는 말이 그녀에게는 가장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느껴졌고, 그녀의 행동들이 나에겐 가장 가치있고 즐거운 것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였는데, 그 모든 것이 1년반 시한부의 시간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대로, 조지 W 부시가 다스리고, 뚱뚱한 마이클 무어가 짜증내며 영화를 만드는 그 별로 좋아보이지도 않는 나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게다.

싱가폴로 간다고 하면, 국내 항공사와 캐세이 패시픽, 싱가폴 항공 정도를 뒤져보면 될거고, 뉴질랜드로 간다고 하면 국내 항공사와 콴타스 에어라인, 에어 뉴질랜드 정도를 뒤져보면 될 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뉴욕이 목적지 였다. 오늘 저녁 비행기라는 것만 알았지, 어느 항공사인지를 모르니. 뉴욕으로 가는 항공사는 한 두개가 아니다. 놀라지 마시라, 세상에, 서던 패시픽 에어라인에서도 인천-뉴욕 노선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애초에 너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작은 여자 딱 한 명을 찾는 일이었는데, 이런 상황이고 보니, 죽어라 공항을 뛰어다니며 돌았지만,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인천 공항이니까 땀만 흘리고 있지, 청사가 둘로 불리된 나리타 공항이나 샤를 드골 공항이었으면 나는 지금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실려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으니, 이제 분명히 표를 들고 보안 구역을 지나 탑승구 앞으로 그녀가 나갔을 법 하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탑승구앞까지 가서, 앞으로 뉴욕으로 가는 모든 비행기들을 다 체크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일본 나리타나 간사이, 혹은 홍콩 거쳐서 가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 비행기들도 체크해야 겠군.

바로 여기에 공항에서 가는 사람 붙잡기의 숨겨진 지독한 묘미가 있다. 비행기에 타기 직전, 사랑하는 이를 붙잡는 것이 가장 멋있지만, 그러려면 보안구역을 통과해야 되고, 그렇게 하려면 멀쩡한 나도 일단 국제선 비행기표를 사야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생으로 타지도 않을 비행기표를 사야만 이 미친 짓을 계속 할 수 있다.

일년에 적어도 10명정도는 인천 공항에서 이 짓을 한다고 상상해 보건데, 그 사람들마다 나와 똑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 비행기표가 그나마 제일 쌀 것인가? 샹하이 인가, 도쿄 인가."

샹하이와 도쿄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이 사람들 끼리 인터넷 모임이라도 하나 결성해서 노하우를 축적해야 될지 싶다.

"윗 분의 말씀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샹하이가 싸긴해도 티켓팅이 느리져. 5만원 절약한다고 표 수속하는데 1시간 더 걸리다가 잡으려는 사람 놓치면 바로 즐~ 되는 겁니다. --;;"
"사실 요즘엔 샹하이나 도쿄나 이것저것 다들 비슷해여. 갠적으로 차라리 블라디보스토크를 추천함돠. 러시아 애들이 비행기표 취소하는 애들이 많아서리 무쟈게 싼 표가 있을지도..."
"윗분 말이 맞아여. 블라디보스톡 강추~"

그런 망상을 하면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려고 줄에 서 있는데, 다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 말도 안되는 짓을 위해서 수백달러짜리 비행기표를 사야 하는가.

이게 따지고 보면 정말 이빨도 안들어갈 짓이다. 그녀가 분명히 나를 사랑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미국으로 유학가서 비즈니스 스쿨을 다닌다는 계획을 세웠었고, 더군다나 재작년부터, 영어공부에, 영어 시험에 여기저기에 원서내고, 추천서 받고, 자기 소개서 쓰고, 수많은 에세이 작성하며, 고생도 많이 했다.

부모님들과 친척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지금은 첫학기 등록금을 내고, 그곳에서 머물 곳까지 정해 놓았을 것인데. 그 모든 것을 비행기 타기 직전에 내 얼굴을 잠깐 보고 다 집어치울 수 있을까?

차라리, 개폼 잡는다고,

"너는 네 갈 길을 가도록 보내주마."

이럴 것이 아니라, 진작에 매달려서 아예 한 두어달 전쯤에 유학을 단념하도록 설득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똑바로 한 거지. 그 때는 괜히 분위기 잡는다고 헛짓하다가, 이제 와서 이게 뭐란 말인가. 나도 괜히 마지막 되니까 좀 마음이 이상해져서 오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설사 울컥하는 충동이 일어서 비행기를 안타기로 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한들, 부모님과 친구들 주변 친지들에게, "나 어떤 남자가 가지말라고 해서 거기에 정신 빠져서 유학이고 뭐고 다 때려쳤어요." 그러고 다니면서 정리하기가 쉽겠는가. 그러다가 뭔가 가라앉고 나면 다시 물거품이 되고 "그래도 유학은 가야겠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냥 도쿄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버렸다. 그녀를 처음 만나고 기뻐할 때의 그 설레는 마음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지만, 내가 오늘 아침부터 고민 끝에 이 미친짓을 감행하자고 결심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머리 좋고 일 잘하고 성격이 좋은 여자였다. 더군다나 내가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재미있어 한다. 그녀는 아직도 어머니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하고, 일요일 날 꼬박꼬박 예배를 보면, 그것으로 인생에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 조그만 어깨를 책상 앞에 팍 숙이고 열심히 일하면서 착하게 살 뿐이다.

그러다가 가끔 내가 딸기 시럽을 얹은 초콜렛 케익에 그녀가 좋아하는 하얀 백합을 들고 야근하는 회사 앞에 나가면, "뭐하러 이런 건 샀어." 하면서도 밤새 기분 좋아서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설레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착하게 살면 행복해진다는 그녀의 믿음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내 영혼을 바쳐서 그녀를 진심으로 기쁘게 하겠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 했던가.

물론 그녀는 예쁘기도 예쁘다. 짧지만 그 눈부신 검은 빛의 머릿결하며, 애초에 나를 사로잡았던 시원한 환한 미소. 손을 붙잡고 신호가 짧은 횡단보도를 같이 뛰어 건널 때 내 딛던 다리. 무엇보다, 어쩌다 보름달이라도 뜬 날, 오페라 극장 앞에서 집에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 그녀의 그 크고 검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있을 때는. 나는 그냥 머릿속이 텅비는 느낌이 되어, 계속 맛이 가서 말도 못하고 그냥 마냥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세상에 널린게 여자라지만, 내 길바닥이나 빨랫줄에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몇 명씩 널려 있는 모습은 맹세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모든 것을 다 접어두고, 내 20대의 가장 소중한 청춘을 바쳐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녀인데, 다시 흘러가면 오지 않을 시간들을 같이 보낸 그녀인데. 그런 그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 많은 추억과 간절한 마음이 워낙에 강하게 나라는 인간을 푹 적셨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떠나가는 게 정말 싫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녀가 보고 싶고, 그 차갑지만 내가 잡고 있으면 곧 따스해지는 그 손을 지금 잡고 있고 싶다. 도대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고, 한 번 시도 해 볼 수도 있고, 불법도 아닌데, 못 할 이유가 뭔가?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용카드 두 개로 한도액을 나눠 쪼갠 끝에, 위풍당당하게 가지도 않을 도쿄행 비행기표를 손에 든 나는, 과감하게 마지막 추격전을 위해 대한민국 인천 영종도의 인천 국제 공항 보안 검색대를 향해 들어 갔다.

화려한 면세점이 늘어서 있고, 갑자기 바깥 보다 한층 조용한 안쪽으로 들어오자,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다. 오늘 점심 때부터, 미친듯이 뛰어다니기만 했지, 물한모금 마시지 못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하나 사마시면서 결의를 다졌다. 공항에서 연인 잡으러 가는 것, 정말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나는 오늘 이러다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다시, 뉴욕, 도쿄, 홍콩행 비행기들의 탑승구쪽을 찾아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공항의 터치스크린 안내시스템을 사용하는 데 나보다 더 능숙한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본다. 사방을 두리번 거리면서, 그 수많은 사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헤치며, 특히 아장아장 걷는 꼬마 아이들과 부딪히지 않을까 조심하며 또 나는 죽어라 뛰어다녔다.

어느새 저녁이 깊어지고, 힘은 빠지고, 무모한 마음이 현실적인 실패가능성에 쩔어갈 때 쯤, 나는 또 한 번의 회의감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이짓을 하다가 실패한 후에 느낄 좌절감이 몰려왔다. 예뻐서 인기가 많았던 그녀는 어쩌면 한 2,3년 후에는 나보다 한 스무 배쯤 멋있는 남자를 만나서, 오늘 나의 이 사투를 그저 자랑스런 과거의 무용담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나 옛날에 미국 건너올 때 공항까지 잡으러 온 사람도 있고 그랬어. 하하."

그렇게 웃으면서, 어쩌다 가끔 그 새 남자와 싸우면, 자신감이나 회복해 볼까 하는 생각에 가끔 나한테 전화하게 되겠지. 깔리는 어둠속에 창너머 거대한 비행기들이 느릿느릿 활주로를 오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가끔 날아가버리기도 하는 그 큰 비행기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강철 공룡떼들이 세상과는 따로 떨어진 아스팔트 정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번뇌가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초조함에 숨쉬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전화를 한 통 해보기로 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평소에 현명한 생각으로 많은 일에 조언을 해주었던, 침착한 대학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난데-"
"우......."
"어, 왜그래?"
"지금 일어났어."
"지금 저녁이잖아. 왜 지금 일어나?"
"몰라 임마. 새벽 다섯시 반까지 술먹었더니 미치겠다. 아... 머리 죽도록 아프다. 우......"

나는 그냥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런 도움안되는...... 바로 그 때, 눈 앞에, 오늘 하루 종일 찾아 헤메던 그녀가 들어 왔다. 그녀는 무슨 책장을 넘기며 탑승구 앞의 의자에 조금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과연 그녀는 아름다웠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애니까, 내가 이렇게 푹 빠져서 정신을 못차렸던 것이었다. 그렇게 푹 빠져 있었으니까, 내가 오늘 이렇게 공항으로 뛰어 든 것 아닌가.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그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자,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온몸이 같이 쿵쿵거리는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듯 하여, 나는 뭔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을 듯이 정신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떨리는 마음을 몰아내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마음놓고 불러보자는 생각으로,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크게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나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놀라 바라보는 모습은 좋았는데, 공항의 다른 한 팔백명쯤의 사람이 우렁차게 고함을 지른 나를 일제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 니가 어떻게 여기에 왔어?"
"그....... 그게 말이야."

그녀는 항상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 유머를 달고 사는 내 모습이 보기 좋다고 했는데, 지금의 상황은 여유나 유머와는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뭐라고 그녀에게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 때 나는 무슨 꿈을 꾸는 사람처럼 뭐라고 말했....더라. 하여간 이마에 땀이 솟아나는 듯한 긴장된 느낌에 뭐가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분명히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너에게는 내가 필요하다고. 미국에 가지말고, 여기에서 나와 함께 있자고.

그녀가 멍하게 충격을 먹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갑자기 깨운 것은,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들의 탑승이 시작되어,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르르 몰려간 일이었다. 그녀는 말을 제대로 있지도 못하고 그냥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의 만남이 뭘 어쩌진 못했는지, 아니면 저 망할 승무원이 빨리 탑승하라고 말하는데 그냥 딸려 움직인 것이었는지, 그녀는 말없이 비행기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처다 보았다. 어디 딴데서 보면, 그 뒷모습에다 대고 애처롭게 누구야 누구야 이름이라도 부르던데, 나는 이미 이곳에 있는 수백명 사람들의 시선을 계속 받고 있었기에, 그렇게 이름부르기도 민망했고 굳이 이름 부르지 않아도,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과 나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가 그 좁고 긴 통로를 따라 걸어들어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완연히 찾아온 어둠에, 활주로와 비행기들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불빛만 창밖에 가득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종일 뛰어다닌 피로가 온몸을 적셨다. 나는 그만 의자 위에 털썩 쓰러지듯 주저 앉아 버렸다.

높은 공항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을 푹 쉬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기에 비행기들이 이륙하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사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좀 김이 샌다.

내가 그렇게 온갖 생각과 별별 감정에 휩싸여 늘어져 있을 때, 환각처럼 그 탑승구 통로로 사람들이 걸어나왔다. 마치 비디오 테입을 뒤로 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도 걸어나왔다.

"홍콩에서 사스 때문에 사람들 검역한다고, 비행기가 제대로 못 다닌대. 그래서 여섯시간 반 출발 연기 되었다는데."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눈으로, 예의 그 세상을 밝게 해주는 그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새도록 그녀의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나는 사실 별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뜨고 내리는 거대한 비행기들과,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서해 밤하늘의 별들을 같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1년만 시간을 연기하기로 했고, 나는 그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서, 우리는 같이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그녀와 함께 공항에서 지새우면서, 맹세코 나는 평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뼛속 깊이 스며드는 깊은 감동과 웃음과 눈물로 뒤범벅된 넘쳐나는 승리의 기쁨을 과연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새벽에 그녀와 함께 공항에서 걸어나오면서 청량한 아침 공기를 마셨다. 나는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는 것이 한 번쯤 해볼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생으로 비행기표를 샀다가 타지 않아도 반값이 훨씬 넘게 환불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지프 드리시 박사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사스에 대한 긴급 조치를 제안한 그는 내게 그녀를 되찾을 기회를 준 세상에서 가장 팬시한 과학자였다. 하늘이 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천국의 가장 좋은 자리를, 이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생화학자를 위해 비워주기를 기원한다. 나는 이미 지금, 사랑하는 그녀 옆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 2004년 8월. 인천에서 곽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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