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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땀 흘리는 아내

2004.05.19 07:5205.19

주의사항: 이 소설에는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묘사가 다수 등장하오니 미성년자와 노약자는 읽는 것을 자제해 주십시오.

## 땀 흘리는 아내

## 투덜이 스머프 지음

진수는 마당에 서서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꺼운 나무판들을 길게 붙여만든 한옥집 대문. 대문 나무판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갈라지고 수축되어 있었고, 못과 경첩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무판들은 여기저기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문은 지붕까지 빈틈없이 들어찬 나무기둥과 석회벽에 포위되어 있었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이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

마당에서는 하얀 석회벽과 대문에 가려 밖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진수는 대문으로 다가갔다. 대문의 갈라진 틈에 눈을 가까이 갖다댔다.

밖에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한옥과 양옥이 섞여 늘어서 있었다. 골목길 끝은 다른 큰 길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골목길 끝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두 남자.

다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였지만,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건장한 체격에 검은 양복, 그리고 두 사람의 손에는 시커멓게 얼룩덜룩한 야구 방망이. 방망이에 묻은 얼룩은 왠지 피같아 보였다.

그 두 사람 외에는 길에 아무도 없었다.

진수는 대문 틈새로 바짝 눈을 붙이고 선 채 조심조심 숨을 쉬었다. 조금이라도 큰소리를 내면 저 무서운 사람들이 다가올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서로 뭔가를 말하며 고개를 움직였고, 그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엿보이긴 했지만, 완전히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대화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걸까? 좋은 얘기는 아닐 거야. 지금같은 대낮에 저 사람들이 태연하게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서있는 이유는 뭘까? 좋은 이유는 아닐 거야.

그들이 뒤돌아섰다. 진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진수네 집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얼굴도 또렷이 보였다. 한 명은 얼굴에 살이 올라 통통한 편이고, 다른 한 명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뺨이 홀쭉해서 날카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대화도 또렷이 들렸다.

통통이. "...든지간에 일은 잘 끝났다."

광대뼈. "그러길래 반항하는 새끼들은 내 손에 다 뒈지는 거야."

통통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남사장한테는 뭐라고 하지? 그 새끼들은 다 죽여버렸으니."

그들이 진수네 집 대문 바로 앞에 멈춰섰다. 제길, 왜 우리집 앞에 온 거야! 진수는 쪼그라드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딱 네 걸음. 다리가 굳어버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진수는 대문을 응시했다. 갈라진 나무판들 틈새로 검은 양복의 사내들 모습이 아른거렸다.

"김삼수 씨한테 가야 될 택배가 잘못 배달됐다고 그러지 뭐."

"뭐? 김삼수가 누구야?"

"나도 몰라.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대충 핑계꺼리로 삼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 짜샤?"

"뭐?"

두 사람이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웃는 사람들을 따라 손에 들린 야구 방망이도 유쾌하게 흔들렸다. 진수는 어떻게 이런 깡패들이 벌건 대낮에 흉기를 든 채로 활보하고, 남의 집 앞에서 민폐를 끼치는 것인지 화가 나면서도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택배로 피묻은 생리대 한 박스를 보냈느니, 택배 배달하다 날 새겠느니하는 이상한 소리들을 해대며 맘껏 웃어댔다.

빨리 가라, 이 놈들아, 빨리 가라, 이 놈들아, 빨리 가라니까...

"어?" 대문 오른쪽에 서있던 광대뼈의 몸이 들썩거렸다. 대문으로 다가왔다. 대문이 살짝 흔들렸다. 갈라진 대문 틈새로 광대뼈 남자의 한쪽 눈 일부가 나타났다.

그 눈이 진수를 보았다.

"너 이 새끼. 거기서 뭐해?"

내 집에서 내가 뭘하든 니가 뭔 상관이냐! 그러는 니가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진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머리 속에서는 별의별 답변이 떠올랐지만, 입에서는 그 어느 것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중해야지. 까딱하다간 피묻은 야구 방망이랑 인사를 나눌 수도 있으니까.

좀 떨어져 있던 통통이도 대문으로 뛰어와 틈새로 눈을 갖다댔다. 이제는 두 사람의 눈이 진수를 보고 있었다. 진수는 두 배로 무서워졌다.

"뭐야 뭐야. 저 새끼 아까부터 우리 훔쳐본 거야? 야 새꺄, 말해봐 정말이야? 훔쳐봤어? 우리가 말하는 것도 다 들었어? 새꺄, 생까지 말고 빨랑 말해. 죽고 싶어?"

통통이가 야구 방망이로 대문을 쳤다. 휘두른 것이 아니라 살짝 친 건데도 대문이 출렁거렸다. 저걸로 머리를 맞으면 아프겠지? 그렇겠지?

"어... 아까부터 전 그냥 여기 서있었는데요." 사나이답게,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답게 주먹으로 상대하고 싶었지만, 그저 마음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주먹이 더 세냐, 야구 방망이가 더 세냐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주먹은 별로 믿을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해서 마당에 나왔다가 그냥, 그냥, 정말 그냥 마당에 서있는 건데요. 전 뭐가 뭔지 잘 몰라요."
진수는 대문을 앞에다 두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대문 바깥 틈새에 붙어있던 두 눈이 떨어졌다. 두 남자가 서로 상의를 했다.

"야 그냥 가자. 우리가 아까부터 쭉 저 골목 바깥에서만 얘기하다 여기 골목 안에는 얼마 안 있었으니까 자세한 건 못 들었을 거야." 통통이가 말했다. "배고픈데 여기서 힘빼지 말고 가자."

"가만 있어봐. 저 새끼가 나중에 큰일내면 어떡할라고. 일은 확실히 해둬야지. 방금 일곱 명 죽여버리고 나왔는데, 한 놈 더 죽여버리는 거 일도 아니지. 놔 봐, 저 새끼-" 광대뼈가 야구 방망이로 대문을 후려쳤다. 대문이 삐걱대며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대문에 잠가놓은 나무 빗장이 덜컥거렸다.

진수는 꼼짝 못하고 서있기만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용할 정도로 온몸이 굳었다.

"자, 자, 자. 진정해." 통통이가 광대뼈를 달랬다. "오늘 두 탕 더 뛰어야 하는데 저런 애새끼 데리고 시간 죽일 타이밍이 아니지."

통통이가 다독거리는 동안 광대뼈가 씩씩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차츰 숨쉬는 소리가 차분해졌다.

대문 틈으로 무섭게 노려보는 눈 하나가 나타났다. 통통이였다. "너 우리 본 거, 우리가 말한 거.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너 여기 사는 거 다 알고, 네 얼굴 똑똑히 기억해 뒀어. 알았지? 뭔 일 생기는 날에는 너 가만 안 두겠어. 알았지? 왜 대답 안 해, 알았냐구?"
진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대문에 붙어있던 통통이의 무서운 눈이 물러났고, 두 사람이 대문에서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났다.

"야 씹쌔끼들아! 니들 깡패새끼들이지! 그 야구 방망이로 사람 죽여놓고 왜 남의 집에 와서 행패냐! 깡패새끼들이 뭐 잘났다고!"

깜짝 놀란 진수가 열린 입을 다물었다.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니,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깡패들이 발길을 돌리려는 안도의 순간에 갑자기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어처구니 없는 말을 스스럼없이 뱉어낸 것이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잠재의식의 무의식적인 발현이란 것인가? 자기 집에 우두커니 서있었다는 이유로 깡패들에게 시달리는 게 분하고 원통했던 진수의 속마음이 이성과는 상관없이 의사표시를 한 것인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미 물은 쏟아지고 말았고,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는데.

대문에서 멀어져가던 깡패들의 발소리가 뚝 그쳤다. 잠시 기척이 없는 듯 하더니 발소리는 다시 대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수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소리였다.

"아... 아니, 실수에요. 아저씨들한테 한 소리가, 그런 소리가 아니구, 딴 사람한테 하-"

대문이 출렁댔다. 깡패들의 발길질과 야구 방망이 세례가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 그와 동시에 굳어있던 진수의 몸이 반사적으로 풀어지면서 쏜살같이 대문으로 달려가 양팔로 대문을 힘껏 눌렀다.

"이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너 그렇게 죽고 싶어, 응? 그렇게 죽고 싶냐구!."

"좋게 말로 타일렀더니 기어오르냐? 이 좆같은 새꺄, 개쇄꺄! 죽어, 십새꺄, 죽어!"

"실수였다니깐요. 말이 잘못 나왔어요. 아, 그만 좀 해요." 진수가 말했다. "날 갖고 왜들 그래! 난 그냥 내 집 마당에 서있었을 뿐인데!" 무섭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처음부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깡패들은 진수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욕을 해대며 대문을 때려부쉈다. 그럴 때마다 대문은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거렸고, 문을 떠받치는 진수의 몸도 따라서 흔들거렸다. 어떻게든 놈들이 집으로 못 들어오게 대문을 막아야 할텐데,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대문이 출렁대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진수는 고개를 들어 대문 가장자리를 살펴보았다. 문틀 옆면에 고정돼 있는 대문의 경첩들이, 특히 윗부분 경첩이 헐거워졌고, 경첩에 박혀있던 못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깡패들의 무지막지한 타격이 이어질 때마다, 대문의 경첩과 못의 상태가 더욱 악화돼 가고 있었다. 더욱이 왼쪽 문짝 윗부분 끝에 돌출해서 문틀 홈에 들어가있던 고정막대가 부러졌고, 그래서 문짝이 흔들릴 때마다 왼쪽 문짝 윗부분이 심하게 덜렁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문짝이 떨어져내려 진수를 덮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진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등짝으로 대문을 막아섰다. 문짝 중간에 빗장이 걸려있는 나무틀을 양팔로 꽉 움켜 쥐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난 죽는다. 버티지 못하면 죽는다. 죽는다.

언제까지 버티면 살 수 있는 거지?

그 순간 진수는 보았다.

대문을 등지고 서니 대문 앞에는 시멘트 바닥이 깔린 마당이 있었다. 마당 다음에는 짧은 마루가 있었다. 짧은 마루 끝에는 안방이 있었다. 안방 미닫이 문이 열려 있었다. 열려있는 문 바로 앞에 아내가 앉아 있었다.

진수의 아내다. 진수가 사랑하는 아리따운 아내.

그는 아내를 보자 소리쳤다. "여보! 빨리 경찰에 전화해."

아내는 하얀 원피스를 입었다. 그 옷만큼이나 하얀 얼굴이 길게 자란 검은 머리와 대비되어 돋보였다. 안방 문턱이 높아서 앉아있는 아내는 상반신만 보였다. 아내는 무표정하게 앉아있기만 했다. 커다란 눈만 크게 뜬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 이 사람이. 지금 뭐하는 거야. 우리 다 죽게 생겼는데, 모르겠어? 빨리 경찰에 전화해서 깡패가 죽일려고 달려든다고 신고하란 말야!" 깡패들 성화에 무너지려는 대문을 지키느라 죽겠는데, 아내까지 저러고 있으니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여보, 제발!"

갑자기 아내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부터 시작해서 처음엔 한두 방울 흐르더니 순식간에 한증막 사우나에서 살다나온 사람처럼 땀이 얼굴을 온통 뒤덮었다. 어찌나 땀을 흘려대는지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이 원피스 목부분을 온통 까맣게 적셨다. 쉴새없이 땀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아내는 커다랗게 뜬 눈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부릅 뜬 채 꽂꽂이 앉아있었다. 꼭 다문 입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진수는 방금 전 자신도 깡패들의 위세에 눌려 대문 앞에서 얼어있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렇다. 아내도 진수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적인 사태 앞에서 혼란스러운 나머지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진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대로 아내를 지켜줄 수 있는 믿음직한 남편, 믿음직한 가장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씨발 놈아, 문 열어!"

"잡히면 죽어, 죽는다!" 깡패들이 속타는 진수의 심정도 모르고 성화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죽어도 아내와 함께, 살아도 아내와 함께. 위태로운 대문을 버려두고, 우선 아내가 있는 안방으로 뛰어든다. 어떻게든 안방문을 사수하면서, 휴대폰이나 유선전화기로 경찰에 신고한다. '어떻게든'이라는 말이 애매하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결판이 날 때까지는 아내와 같이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아내를 혼자 내버려두는 남편은 개만도 못한 놈이다. 더욱이 저렇게 두려운 나머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아내를 혼자 내버려 두는 놈은 개똥만도 못하다.

진수는 등지고 섰던 대문을 내버려두고 나왔다. "여보!" 처절하게 아내를 부르며 마당으로 달렸다. 안방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크게 뜰만큼 떴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눈이 더욱 커졌다. 땀방울들이 폭포처럼 아내의 얼굴을 덮었다. 뒤에서 큰소리가 났다. 안방으로 달려가던 진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왼쪽 대문의 윗부분이 문틀에서 떨어져서 마당 쪽으로 갸우뚱거렸다. 그 틈으로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는 광대뼈의 모습이 보였다. 한껏 흥분해서 얼굴이 시뻘개진 모습이다. 나머지 오른쪽 문짝에서 쿵소리가 들리더니 아찔하게 기울었던 문짝이 아예 전부다 마당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통통이의 모습까지도 보였다. 깡패 둘이 진수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냅다 마당으로 뛰어들어와 진수를 쫓아왔다.

진수는 다급하게 안방으로 달렸다. 아내를 보았다. 땀 흘리는 아내를. 다시 한 번 아내를 불렀다.

"여보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 순간 억센 손이 진수의 목덜미를 움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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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자기가 내지른 비명에 자기도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주위가 어두웠다.

그는 긴 소파 위에 앉아있었고, 불 꺼진 컴컴한 거실에서는 간장 게장 홈쇼핑 광고를 내보내고 있는 TV 화면만이 빛을 발했다.

그는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고서야 자신의 상태를 알고 안도했다.

그는 특별한 외출 약속도 없는 무료한 일요일을 맞아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소파 위에 누워 TV를 보다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깨어난 것이다.

늦게라도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서운 꿈을 꾸다 놀랬기 때문이었다. 엉뚱하게 깡패들한테 걸려들어서 도망가고, 땀 흘리는 아내에게 달려가는 꿈.

꿈 속의 상황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나서 진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꿈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절박하고 다급했던 상황이었다.
땀 흘리는 아내라니...

그는 '아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째서 꿈 속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자를 아내라고 생각하고, 여보라고 불러댔던 걸까? 오랫동안 외롭게 지내서 꿈에서나마 아내를 등장시킨 건가? 그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진수는 노총각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가 노총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고, 그도 사람들 앞에서는 펄쩍 뛰며 부인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노총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외로웠다. 하지만 외롭다는 핑계로 아무하고나 덥석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맞선이니 소개팅이니 하는 인위적인 만남으로 자신을 내몰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우울하게 자취하며) 생활하는 가운데서 어느 날 불현 듯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되는 날을 꿈꿨다. 그렇기는 해도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두리번거리기만 하다 십 년도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는 사실이 좀 우울하기는 했다.

그렇다, 외로웠다. 하지만 이제까지 노총각이라는 확실한 신분으로 접어들 때까지 십몇 년간을 운명적인 사랑을 위해 기다려 왔는데, 앞으로 몇 년 더 기다려보는 것이 힘든 일이겠는가? 앞으로 몇 년 더 애가 고생을 덜해서 철이 덜 들었다는 친구들의 농담에 시달려보는 것이 힘든 일이겠는가? 앞으로 몇 년 더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제발 장가 좀 가라고 잔소리를 해대시는 어머니의 성화에 달달 볶여보는 것이 힘든 일이겠는가?

흠... 뭐 그렇게 그럭저럭 당당하게 살아가는 거지.

땀 흘리는 아내라. 꿈 속의 그녀는 좀 날카롭게 생기기는 했어도 요염하게는 보였는데. 정말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면 좋겠지. 그 동안 내가 외롭긴 외로웠나 보다. 장가도 안 간 '노'총각이 아내가 나오는 꿈도 꾸고.

아, 그 꿈에서는 깡패들도 나왔었지.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는데. 진수는 또 몸을 떨었다. 꿈 속에서 입은 충격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는 TV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홈쇼핑 선전에서는 아빠, 엄마, 아들, 딸을 연기하는 모델들이 나와 맛있게 간장 게장을 먹고 있었다. 진수는 엄마 모델의 빨간 입술이 게다리를 쪽쪽 빨아먹는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홈쇼핑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야. 그는 괜히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잠자느라 긴 소파 위로 뻗었던 다리를 소파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어두운 실내 속에서 소파 앞 작은 탁자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TV 리모컨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리모컨에 닿으려는 순간 TV가 꺼졌다.

실내는 방금 전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 잠겼다. 베란다 유리문이 열려 있었지만, 빛은 거의 들어오고 있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조심조심 베란다로 나갔다. 아파트 10층 베란다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불빛이 밝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는 물론이고 그 부근까지도 완전히 어둠에 묶여 있었다. 창문으로 불이 켜진 것이 보이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아파트에 대규모 정전사태라도 났나? 베란다 아래로 보이는 시커먼 암흑은 달도 보이지 않는 음침한 밤하늘과 어울려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겼다.

진수는 다시 거실로 들어와 어둠 속에서 물건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양손을 좌우로 휘저으며 신중하게 걸어다녔다.

어이쿠! 조심한다 했는데 그만 소파 앞에 놓인 작은 탁자 모서리에 오른쪽 다리가 부딪혔다. 그는 투덜대며 더욱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파트 관리실과 연결된 인터폰을 찾았다. 수화기를 들고 관리실과 연락이 닿길 기다리니 관리실 아저씨가 받았다.

"여보세요, 관리실이죠? 어, 여기 101혼데요. 갑자기 전기가-"

"아니, 지금 거기서 뭐해요? 빨리 나와요, 빨리. 지금 우리 아파트에 웬 미친 놈들이 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 죽이고 난린데. 그 놈들이 그랬는지 아파트 전기도 다 나갔고 말이지. 사람들 다들 밖으로 피신하느라 한바탕하고 잠잠해져서 이제 나올 사람은 다 나왔나보다하고 생각해서 나도 빨리 도망가려는 참인데... 아까 한창 시끌벅적할 때 뭐했어요, 잠이라도 잤수? 부른 지가 언젠데 경찰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말야, 나 원 참... 101호, 빨리 나와요, 빨리-"

인터폰이 툭 끊겼다. 그는 한동안 관리실과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인터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관리실 아저씨가 무슨 소리를 해댄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진수가 사는 아파트에 외부인이 침입해서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빨리 대피하라는 소리였지? 정말 그런 소리였나? 미친 놈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데, 경찰이 오지를 않는다고? 맙소사, 그게 정말이야?

어쨌든 아파트에 정말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으니 나가봐야 했다. 불 꺼진 거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10층에서 1층까지 가야하는데, 전기가 나갔다고 하니 엘리베이터는 작동을 안하겠고, 천상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란 소린데.
불꺼진 계단을 10층 높이만큼 내려가다니. 그것도 혼자서. 이렇게 컴컴한 거실에 있는 것만도 막막한데, 그 어두운 공간을 뚜벅뚜벅 걸어서... 게다가 아파트엔 미친 놈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니... 계단 내려가다 만나기라도 한다면... 관리실과 통화하던 인터폰이 갑자기 끊어진 것도 불안한데... 진수는 한참동안 멍하니 서서 어찌해야 하는 건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불현듯 좀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야구 방망이를 든 건장한 체격의 깡패들 생각이. 진수는 다시 인터폰으로 연락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먹통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TV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TV 옆에 있는 전화기로 경찰과 통화할 생각이었다. 경찰이라면 뭔가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들려주겠지. 하지만 부른 지가 언젠데 경찰은 코빼기도 안보인다는 관리실 아저씨의 말이 떠올라 기분이 안 좋았다.

어쨌든 전화기를 찾아 더듬더듬 두 발자국을 내딪는 순간, 현관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왔다갔다하는 발소리. 조그맣게 소근대는 말소리.

진수는 심장이 오그라들 듯한 두려움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TV쪽으로 가려던 그 자세 그대로, 오른발은 앞으로 왼발은 뒤로 벌리고, 두 팔은 앞으로 나란히하듯 쭉 편 상태로. 관리실 아저씨가 말한 그 미친 놈들? 닥치는 대로 아파트 주민들은 죽인다는 그 미친 놈들? 또다시 조금 전에 꿨던 무서운 꿈 생각이 났다.

쿵, 쿵, 쿵, 쿵.

진수네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진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쿵.

다시 침묵. 그리고 묻는 소리.

"계십니까?" 다시 침묵. "안에 누구 안계세요?"

진수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들려오는 소리는 꿈 속에서 만났던 바로 그 통통이 깡패의 목소리였다.

"김삼수 씨 댁 아닙니까? 택배 왔습니다." 이건 광대뼈의 목소리였다. "배달이 밀려서 말이죠, 좀 늦게 왔습니다. 안에 계시면 대답 좀 하세요. 늦게 왔다고 토라지셨나?" 통통이가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남사장 님이 아주 좋은 물건 보내셨어요. 빨리 문 열고 받아보세요."

"뭔고 하니 피묻은 생리대 한 박스라니까요. 변태같은 김남수 씨가 정말로 좋아할 물건이죠." 두 깡패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큰소리로 웃어댔다.

진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당혹스런 기분으로 서있었다. 이제서야 방금 전에 꿨던 꿈이 실감났다. 그건 결국 현실에 일어날 위험을 미리 경고하는 꿈이었던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지. 하지만 기왕 경고하는 거 빨리 경고할 것이지, 이제와서 이게 뭐야! 꼼짝없이 당하고 있잖아!

진수의 가슴이 쉴새없이 두근거렸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정말 안에 아무도 안 계세요?" 광대뼈가 약올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통통이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조금 전에 아파트 관리실에 들러서 101호에 지금 사람 있다는 거 확인하고 왔는데."

"우리가 택배 때문에 저녁 늦게 힘들 게 찾아왔는데, 일부러 이렇게 약올리시면 큰일납니다. 화나요. 김삼수 씨, 안에 계시면 대답을 하세요. 그게 예의지."

"대답 없으면 문 따고 들어가서 확인한다." 통통이가 전혀 택배 배달원답지 않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우린 김삼수 씨한테 물건만 배달하면 끝인데 뭘 망설이세요? 셋을 세겠습니다. 그 동안에 대답을 하시고 문을 여시면 물건을 전달하고 우리는 물러가겠지만, 대답이 없으면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가서 택배 배달하는 사람들 무시한 대가로 혼구녕을 내겠습니다."

진수는 생각했다. 백 번을 이해한다쳐도 저 놈들이 정말로 택배배달하는 사람일리는 없다. 저 놈들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관리실 아저씨가 했던 말도 있었고, 게다가 내가 꿨던 불길한 경고의 꿈도 있었고. 어쩐다? 대답을 안 하면 저 놈들이 쳐들어 온댄다. 정말 문을 따고 들어올까? 몰라. 대답을 하면? 저 놈들 말대로 순순히 물러갈까? 설마. 게다가 김남수란 놈은 대체 누구야?

광대뼈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두울... 세-"

이왕 이렇게 된 거 원하는 대로 해주자. 대답해 주자고. 뭐 다른 방법도 없잖아? "자, 잠깐만!"

조용해졌다.

"여기 김삼순가 뭔가 그런 사람 없어요. 집 잘못 찾아왔어요. 그, 그러니, 그러니까 다른 데 가봐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니까 차츰 현관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조용히 큭큭거리는 소리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파트가 떠나갈 듯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폭소로 변했다.

진수는 불안했다.

"아, 대답해 줘서 고마워." 통통이가 말했다. "우린 말이지 세상에 불만이 많은 놈들인데 말이지, 오늘 밤 여기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걸려드는 사람들마다 아작내고 있는 중이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눈치는 빨라서 도망가 버리고 사람있는 집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더라고."

"니가 셋 셀 동안 대답 안 했으면 사람 없는 줄 알고 딴 집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수고를 덜어줘서 고마워. 씹새꺄."

"거봐, 내가 뭐랬어. 단순한 방법이래도 꼭 걸려드는 등신들이 있다니까."

현관 앞이 다시 웃음꽃으로 만발했다.

진수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탈해서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풀어지고 기운이 빠졌다. 결국 요 놈의 입이 사고를 치는 구나, 제길.

"안에 있는 네가 순순히 문을 열어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우리가 알아서 문 따고 들어갈게. 심심해도 쫌만 기다려."

현관문을 긁어대는 소리가 났다. 놈들이 문 자물쇠를 따는 소리다.

진수는 벌떡 일어났다. 현관문이 확실히 잠궈져 있나? 현관문은 문 손잡이 자물쇠, 그 위의 안전자물쇠까지만 잠궈 놓았고, 안전자물쇠 옆에 달린 단추 잠금장치나 더 위에 달린 굵은 쇠빗장은 채워놓지도 않았다. 아니, 빗장까지 죄다 채워놓았던가? 그 반대였던가? 몰라, 몰라. 기억 안 나.

어떻든간에 문에 가서 직접 확실히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만, 컴컴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현관까지 가는데 시간이 걸릴테고, 그러다 문 앞까지 가더라도 그 때쯤이면 빗장이 채워지지도 않았을지도 모르는 문을 따고 들어온 놈들과 정면으로 맞딱뜨리게 될 위험이 있었다.

어쩌면 기억과는 달리 그는 단추 잠금장치나 쇠빗장을 단단히 채워놓았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한동안은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써보는 게 좋겠다.

경찰에 신고하자.
(부른 지가 언젠데 경찰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말야, 나 원 참...)
이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데가 경찰 밖에 더 있나.

아까까지만 해도 소극적으로 헤매던 진수가 어둠 속에서 전화기 있는 곳을 찾아 서둘렀다. 그러다 손가락 끝이 TV 옆면에 부딪혀 너무나 아팠지만, 꾹 참고서 그 근처를 더듬거렸다.

현관문에서는 계속해서 부시럭대는 소리가 났다. "김삼수 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갑니다요."

이윽고 진수의 손이 전화기를 찾았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번호판을 더듬거려 112를 눌렀다. 수화기에서는 거친 음색으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녹음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 통화량이 폭주하여 경찰청 콜센터와 연결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신록의 계절 봄을 맞이하여 저의 경찰청에서는 범죄예방 백일장을 열고 있습니다. 다채로운 상품이 마련되어 있사오니, 경찰청 홈페이지의 응모방법을 참고하셔서-"

씨발, 지금 급해 죽겠는데 뭐하자는 플레이야. 진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위기가 닥쳐왔는데도 세상은 그의 편이 되어줄 것 같지 않았다. 계속해서 전화기에서는 태평스럽게 경찰청 이벤트 소식과 연결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만 흘러나왔다.

그래, 119다, 119! 119에 전화해보자.

"안녕하십니까. 국민의 안전을 신속하게 보호하는 중앙 119 구조대입니다. 현재 통화상태가 고르지 않아 통제실과 연결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 119 구조대에서는 안전사고 예방 수기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안전사고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참신한 수기를 보내주신 분들께는 7분을 선정해 1등 김치 냉장고-"

씨발 새끼들, 내가 낸 세금 받아쳐먹고 이 따위 이벤트나 벌이고 있냐, 개새끼들. 그는 마음 같아서는 청와대에 전화해서 강력한 항의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때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제자리에서 허둥댔다.

그러다 요란하게 쿵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결국 현관문에는 빗장이 제대로 걸려있지 않았나 보다. 니미, 문 진짜 빨리도 여네. 감탄하는 소리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소리였다.

시커먼 사람 둘이 거실로 들어섰다.

"택배 왔다, 씹새꺄."

"왜들 이러세요.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왜 남의 집에 무단침입하고 그래요?"

진수네 거실로 들어온 사람들은 어둠 속에 가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진수는 그들이 통통이와 광대뼈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꿈에서 이미 똑똑히 봤잖은가. 이제와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봐야 아나? 게다가 지금 이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도 꿈 속의 그 목소리와 완벽하게 똑같잖은가. "저기... 혹시 꿈 때문에 그러세요? 저기 혹시라도 꿈 속에서 있었던 일때문이라면, 저는 아무 것도 못 들었고-"

"이 새끼가 무슨 헛소리야. 아까 말했잖아, 우린 세상에 불만이 많은 놈들이라고. 그래서 손에 잡히는 인간들마다 아작내고 있다고. 넌 오늘 재수없어서 걸린 거야, 븅신아."

그들은 캄캄한 실내를 꿰뚫고 있기라도 한 듯 서슴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진수 앞으로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진수는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김삼수 씨, 기분이 어때?" 두 깡패가 기분나쁘게 웃었다.

"저 김삼수 씨 아니에요. 명진수에요. 저 좀 살려주세요, 네?" 진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누가 네 이름 궁금하데? 우리가 김삼수라고 부르면 김삼수고, 개새끼라고 부르면 개새낀거지." 통통이 깡패의 목소리를 내는 남자가 큰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닿는 순간 묵직하게 여러 가지 물건들이 부시럭대는 소리가 났다. "이제 우리가 갖고 온 택배 받아야지. 안 그래? 김삼수 씨."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원하시는 게 뭐에요? 돈, 돈이면 될까요?"

"이 새끼가 아직도 상황 돌아가는 거 파악을 못하네. 넌 끝이야, 끝이라고. 꼭 말해줘야 아냐? 귀찮게스리."

광대뼈가 진수의 멱살을 붙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진수의 턱이 바위같은 주먹에 짓눌리며 얼굴 전체로 충격이 전해졌다. 처음엔 얼얼하다 순식간에 얼굴이 가시 철조망에 억눌리는 것같은 고통 속에 휩싸였다. 그는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광대뼈가 진수를 집어던졌다. 강한 힘으로 내던져진 진수가 거실 저편으로 위태롭게 걸음질 치다 발이 서로 꼬이는 바람에 엎어졌고, 싱크대에  부딪혀 튕겨나왔다 떨어졌다. 바닥에 옆어진 그는 맥없이 흐느적거렸다.

통통이가 바닥에 놓았던 큰 상자를 진수한테 던졌다. 상자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다 진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속 안의 내용물이 흔들거리는 소리를 내며 상자는 진수 옆에 안착했고, 그 무거운 상자에 정통으로 머리를 눌려버린 그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손으로 감싸안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두 깡패가 다가왔다. 통통이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손봐줄게." 그가 상자에서 전기톱을 꺼냈다. 그리고는 등을 대고 누운 채 고통스런 소리를 내던 진수의 배를 한쪽 발로 힘껏 밟았다. 진수는 비명도 못 지르고 바람빠지는 소리만 낸 채 배를 밝은 통통이의 다리를 잡았다. 잡아빼려고 했지만, 사내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수의 배에 뿌리내린 굳건한 나무 기둥 같았다.

광대뼈가 진수의 두 발목을 한 데 모아 손으로 잡았다. 진수가 아무리 움직여도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통통이가 전기톱의 시동줄을 잡아당겼다, 한 번만에 전기톱에 시동이 걸렸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요란한 엔진소리가 거실 안을 진동했다. 두 깡패에게서 빠져나오려 기를 쓰는 진수에게 의욕을 잃게 만드는 소리였다. 그리고 전기톱날이 거실 바닥을 긁어대며 그의 발목으로 왔고, 원래 용도대로 톱날에 닿는 물체를 절단내 버렸다. 처음에는 오른쪽 발목, 그 다음에는 왼쪽 발목을.

전기톱날이 발목을 완전히 훑고 지나간 뒤에야 두 깡패는 진수를 놔주었다. 그의 발목이 피를 내뿜었다. 그는 다리를 이리저리 버둥대며 몸부림쳤다. 울부짖었다. 다른 누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그것이 성인 남자가 내는 소리였다고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유치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아주 어린 아이가 거대한 고통에 온몸을 난자당해 본능적으로 내뱉는 순수한 비명, 세상물을 먹은 성인이 낼만한 점잖은 비명이 아니라 체면을 다 벗어던진 흉한 비명이 진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야, 꿈틀대는 꼬락서니가 꼭 소금 먹은 지렁이같은데." 광대뼈가 동료로부터 전기톱을 건네받았다.

통통이가 다시 진수의 배를 밟았다. 광대뼈는 진수의 오른손을 밟았다. 그러고는 전기톱으로 진수의 오른팔을 완전히 어깨에서 절단냈다.

진수는 오른쪽 어깨와 양쪽 발목에서 피를 쏟아냈다. 극심한 고통에 어찌할 줄을 모르는 왼손이 자기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다. 머리카락이 뜯겨져 나왔다. 진수는 뜯긴 머리카락을 진 채로 몸부림쳤다. 비명을 계속 질러대다 이제는 소리도 못내고 목을 긁어대는 듯한 숨소리만 내뱉었다.

깡패들이 히죽거리며 진수를 발로 찼다. 진수의 몸은 놈들의 발길질을 따라 거실을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진수의 머릿 속은 평온한 일요일 저녁에 이렇듯 끔찍한 상황에까지 처하게 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라면을 끓여먹고 소파에서 TV를 보다 경험하게 된 낮잠이 문제였다. 그 놈의 꿈, 마당 있는 나무대문 집이 나오는 그 놈의 꿈이 문제였다. 결국 그 꿈은 현실의 위험을 경고해주는 고마운 꿈이 아니라, 현실의 위험을 예고하는 더러운 꿈이었던 것이다. 보라. 이렇게 충실하게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잖은가.

충실하게?

전기톱이 지나간 고통 속에서도 그의 머릿 속에서는 짧은 순간 온갖 복잡한 생각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꿈에서는 중요했던 뭔가가 지금에서는 빠져있었다. 그것은...

땀 흘리는 아내.

꿈에서는 그가 그토록 애절하게 보호하려 애쓰던 땀 흘리는 아내가 지금의 현실에서는 보이지가 않았다. 실제로는 그가 노총각이기 때문에, 아예 아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꿈에서 아내로 나왔던 그 여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뭐야, 꿈에서 봤던 깡패들은 고대로 나왔는데, 그 땀 흘리는 아내는 왜 안 나와?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나? 꿈과 현실의 차이인가?

하지만 꿈 속에서도 처음에는 그가 아내의 존재를 느끼지는 못했다. 나무 대문이 부서지는 걸 막는데 급급하다 몸을 돌리고 났을 때 우연히 아내를 보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지금같은 현실에서라도 내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본다면 아내를 보게 될까? 노총각에게는 아내가 없지만, 지금같은 이상한 상황에서는 아내가 나타날까? 꿈 속의 깡패도 나타나는 판국이니...

진수는 몸부림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지만, 아까처럼 길길이 날뛰지는 않았다.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천장을 배경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두 깡패의 실루엣이 보였다.

"뭐야, 이 새끼. 기분 나쁘게 눈깔을 굴리고." 광대뼈가 진수의 머리통을 발길질했다.

진수는 아파서 몸을 굴렸고, 머리를 울리는 고통으로 이를 악물면서도 이리저리 몸을 굴리는 순간에 가급적이면 눈을 뜨고 주위를 보았다. 이렇듯 고통스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하다니. 그는 인간이 고통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고통에 눈을 질끔 감을 수 밖에 없는 순간이 많았지만, 가급적이면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그는 보고 말았다. 아내의 모습을.

우연히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그가 잠을 자고 있었던 소파 위였다. 열려있는 베란다 유리문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빛에 소파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였다. 그 윤곽 마저도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 겪은 극악무도한 고통 때문에 그의 뇌는 눈으로 들어오는 영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소파의 윤곽이 보였다 흐려졌다 찌그러졌다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그러다 차츰 소파 위에 히끄무리한 빛이 감도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차츰 강렬해지고 굳어져서 사람의 모습을 나타냈다.

꿈에서 본 아내가 소파 위에 앉아있었다. 얼굴은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지만, 하얀 원피스 대신 하얀 소복을 입은 것이 달랐다. 야광이라도 되는 듯 아내의 모습은 빛을 내고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론 진수의 시각이 지금 제상태가 아니어서 아내를 온전히 볼 수는 없었지만, 잠깐씩이나마 자세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꿈에서는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아내의 모습은 오싹하기만 했다. 고통 속에서도 진수의 몸에 오싹한 기운이 전해져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그런 아내가 소파 위에 앉아 그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을 꼭 다문 채로.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순식간에 땀을 비오듯 흘렸다.

진수의 머릿 속에서는 또다시 복잡한 상념들이 휘몰아쳤다. 각기 다른 생각들이 서로의 입장을 주장했다.

저 여자는 나의 아내가 아니다. 나는 총각이어서, 저렇게 소복을 입고 나타날만한 대단한 아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저건 아내가 아냐. 사람이 아냐.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 봤냐? 어둠 속에서 야광이 되는 사람 봤냐? 저건 아내가 아니라... 소복 입은 귀신이다.

그의 몸 속으로 오싹한 추위가 또 한 차례 불어 닥쳤다.

귀신이 나를 보고 있어. 내가 정체불명의 깡패들한테 잡혀 죽어 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구경하고만 있어.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놀랬으니까. 몰래 구경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들켰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다음에는 땀을 비오듯 흘렸다. 꿈에서처럼.

왜?

글쎄. 뭔가 두려운 건가. 우리 인간도 뭔가 무서워지면 식은 땀을 흘리곤 하잖아. 귀신도 땀을 흘리나? 뭐, 쟤는 원래 그런 앤가 보지 뭐.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도 두려워 땀까지 흘리나?

자신의 계획이 망가질까봐? 내가 귀신의 존재를 알아채는 순간 이 악랄한 현실이 다 무효가 되기라도 할까봐?

그것은 진수의 착각인 것 같았다. 소복 입은 귀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통통이와 광대뼈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는 여전히 우렁차기만 했다.

"김삼수 씨가 별로 재미가 없나봐. 소리지르는 게 예전 같지가 않네." 광대뼈가 엎어져 있던 진수의 등짝 한가운데를 밟았다. "다시 재미있게 해줄테니 재미있어 즐거운 표정을 지어봐, 씹새야."

광대뼈의 전기톱이 진수의 발목에서부터 위쪽으로 다리를 토막내기 시작했다. 진수는 눈을 질끔 감고 다리를 버둥댔지만, 전기톱의 위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목이 쉬어버린 줄 알았던 진수에게서 피끓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발목에서부터 다리를 깍두기 썰 듯 토막내고 나니, 진수의 다리는 무릎 아래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김삼수 씨가 키가 팍 쪼그라 들었구랴." 통통이가 말하며 웃었다.

진수는 절규하며 눈을 부릅 떴다. 고개를 들어 소파 위에 앉아있는 땀 흘리는 아내, 아니 땀 흘리는 소복귀신을 바라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소복귀신의 눈이 한층 커졌다. 땀이 더욱 철철 쏟아져 내렸다.

너는 대체 뭐가 그리 두려운 거냐... 내가 너의 변태적인 엿보기를 방해할 능력이라도 되냐? 이렇게, 이렇게 팔다리가 절단났는데, 내가 어쩌겠냐고?

그러다 문득 그는 귀신이 소파에 앉아있는 자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붕 뜬 것 같은 모습. 소파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앉아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자 긴 소파 위로 역시 길면서 시커먼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실의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게 존재감이 눈에 띄는 검은 형상이었다. 그 형상은 더욱더 검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땀 흘리는 소복귀신의 모습이 연한 빛으로 나타났다 점점 밝아져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검은 형상은 점점 눈에 띄는 모습으로 굳어져 갔다. 이제는 마치 소파 위로 두꺼운 이불이 깔려서 울퉁불퉁해 보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 두꺼운 이불같이 생긴 긴 시커먼 물체의 한쪽 끝 위에 소복입은 귀신이 땀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뜬 채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 위에 두꺼운 이불. 두꺼운 이불 위에 소복귀신. 재밌군, 재밌어.

"이 새끼가 건방지게시리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 그렇게 집중을 못해? 이 놈, 이거, 눈깔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 겠구만." 통통이가 욕을 하며 바닥에 있는 큰 상자를 뒤졌다. 두 개의 긴 드라이버를 꺼냈다.

소파 위의 시커먼 물체를 보고 있던 진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통통이의 드라이버때문이 아니었다. 소파를 덮고 있는 시커먼 물체의 정체를 불현 듯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아차리고 나니 그 시커먼 물체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거실의 어둠과는 상관없는 더욱 명확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소복귀신을 처음 본 게 언제지?

아까 소파 위에서. 하지만 거슬러올라가자면 마당있는 집이 나오는 꿈에서가 처음이었지. 그 때는 땀 흘리는 아내라고 생각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주접을 떨었지.

그럼 그 마당있는 집이 나오는 꿈은 어떻게 해서 꾸게 되었지?

그야... 일요일이어서 나같은 외로운 노총각이자 독신은 딱히 갈 데도 없으니, 라면이나 먹고 TV나 보다가 잠이 든 거지.

그래, 잠이 들었어. 어디서?

소파에 누워. 소파, 소파, 소파!

진수는 이제 소파 위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린 때문인지 오락가락하던 눈의 시각도 상당히 좋아졌다.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귀신이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는 진수를 깔고 앉아있는 모습을. 진수의 얼굴을 깔고 앉아있는 모습을.

소복귀신도 진수가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땀을 더욱 많이 흘렸다. 이제 귀신의 눈은 자기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기괴한 모습으로 커졌고, 흐르는 땀은 세찬 폭포수처럼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잠을 자다 사망했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봤지? 그래, 신문에도 나오고, TV에도 나오고, 영화에도 나오고, 흔한 얘기잖아. 잠을 자다 뇌출혈이나 심장마비같은 이유로 죽었다고 하잖아.

표면적인 이유는 그럴 거야.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로맨틱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의 나처럼 말이지.

겉으로는 뇌출혈이나 심장마비로 인한 수면 중 사망이지만, 실제로는 가위에 눌려, 악몽에 눌려 사망한 것일지도 몰라. 꿈 속에서 나처럼 극심한 고통 속에 눌리다 눌리다 눌리다 한없이 눌리다 정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육체가 파열하는 것이지.

나는 일요일 오후에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 듯 소복 입은 귀신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얼굴을 깔고 앉았다. 우습게 보이거나 또는 야시시하게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하여간에 내 얼굴을 깔고 앉은 소복귀신은 나의 머리 속으로 악몽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악몽을 현실로 착각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차츰 육체가 못 견딜 정도의 죽음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진수는 분노했다. 자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깔고 앉은 귀신을 노려보았다. 왜 하필 나를 죽이려 드는 거냐, 이 좆같은 년아.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망쳐놓는 거야.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 좆같은 악몽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야. 말 좀 해봐, 이 년아!

통통이가 길쭉한 드라이버 두 개를 각각 하나씩 진수의 두 눈에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그의 시각은 먹통이 되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당혹감과 고통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통통이가 진수의 박혀있는 두 눈에서 튀어나와 있는 드라이버 손잡이를 잡고 흔들었다.

"기분이 어때요? 김삼수 씨? 택배로 받은 고통이 맘에 드시나요, 씨발 놈아?"

진수는 외팔로 남은 왼팔을 버둥대며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다 왼손에 잡게 된 물건이 그의 혼란스러운 정신을, 그 중에서도 아주 일부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그의 왼손이 잡은 것은 불룩한 나무기둥, 바로 거실에 놓인 작은 탁자의 다리 중 하나였다. 손을 휘저어 보았다. 잡았던 탁자 다리의 오른쪽에서 또다른 탁자가 느껴졌다. 그는 다시 좀 전에 잡았던 탁자의 왼쪽 다리를 손에 쥐었다.

이 탁자 다리의 왼쪽에 소파가 있다. 눈이 안 보이더라도 소파까지의 거리는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소파까지의 거리를 짐작해서 뭐하게?

당연하잖아. 소파까지 가기 위해서지.

왜?

바보 같으니. 생각을 해봐. 소파 위에서 잠자는 내 얼굴을 깔고 앉은 소복귀신이 악몽을 만들어 내고 있어. 그러길래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통통이도 광대뼈도, 전기 꺼진 아파트도, 관리실 아저씨도, 경찰청 안내방송도, 119 구조대 안내방송도, 좌우지간 이 모든 것들이 죄다 좆같은 소복귀신이 만들어낸 꿈일 뿐이란 말야. 먼젓번 꿈에서는 아내가 있는 안방까지 뛰어가는 내용이었지. 그 때 문턱이 높아서 아내가 앉아있는 상반신만 보이고 하반신은 보이지 않았어. 만약 그 때 꿈에서 안방까지 뛰어가 확인해 보았더라면 나는 땀 흘리는 아내가 안방에 누워있는 나의 얼굴을 깔고 앉은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 틀림없어.

그런데 지금에 와서 소파까지 가는 것과 악몽과 무슨 상관이야?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서지.

아!

소파로 가서 잠들어있는 나를 깨우는 거야. 깨어날 때까지! 흔들어대든 물을 끼얹든 몽둥이로 때리든 별지랄을 다 떨어서라도 소파 위의 나를 잠에서 깨워야돼. 잠에서 깨면 해결되는 거야. 악몽은 깨어나는 순간 사라지니까.

소복귀신이 가만있을까?

그러니까 재빨리 움직여야지. 귀신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하하하! 팔다리가 불구가 됐는데, 빨리 움직일 거라고? 하하하!

비웃을 거면 비웃어봐. 난 시도해 볼거야. 가만히 죽기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저질러보는 것이 훨씬 낫잖아.

행운을 빌겠어.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워.

통통이가 드라이버 손잡이를 흔들며 고문을 가하는 가운데, 광대뼈는 전기톱으로 진수의 마저 남은 무릎 위 다리를 토막내기 시작했다.

진수는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대다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소파까지 가려면 통통이와 광대뼈 브라더스를 몸에서 떨어지게 만들어야만 했다. 진수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할수록 깡패들은 몸에서 떨어지려하지 않을 것이다. 변태들은 희생자의 고통을 계속 맛보고 싶어하니까. 계속 이렇게 붙잡혀 있다간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 몸부림치고 비명질러서 그들을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다. 고통에 지쳐 죽어가는 척 하는 것이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아무리 귀신이 만들어낸 악몽이라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아픈데. 하지만 '진짜' 고통은 아닌 것이다. '진짜'였다면 이렇게 사지가 절단나고 눈이 꿰뚤리면서도 살 궁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견딜만하니까 이런 생각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프잖아! 아픈 건 아픈 거야. 어떻게 티를 안 내냐. 이렇게 아프니까 사람들이 악몽 속의 정신적 고통 때문에 육체적인 '진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거야.

참자, 참자, 참자... 조금만 참고 죽어가는 척을 하자. 죽어간다 싶으면 놈들은 몸에서 떨어질 거다. 변태들은 희생자가 무기력해진 모습을 감상하면서 흐뭇해하는 걸 즐기니까. 자기가 망쳐놓은 불쌍한 인생의 마지막을 보며 감동하길 좋아하니까.

진수는 왼손으로 탁자의 왼쪽 다리를 힘주어 잡았다. 기를 쓰고 몸부림을 줄여나갔다.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통통이와 광대뼈의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탁자 다리를 움켜쥔 왼손에 더욱 힘을 주며 끈질기게 참았다. 고통이 뇌를 움켜잡고 어서 외부로 발산시키라고 위협했지만, 굴복하지 않으려 애썼다.

드라이버로 눈을 후비던 통통이와 전기톱으로 허리까지 절단낸 광대뼈가 진수에게서 떨어졌다. 진수의 허리에서 쏟아져나온 상당량의 피로 질척거리는 바닥 위를 깡패들이 걸어갔다. "이 놈, 이제 슬슬 숨이 빠져나가나 본데?"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그쳤다. 정신없이 요란하던 거실이 고요한 상태가 됐다.

진수는 몸을 부르르 떨며 희미하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최대한 죽어가는 척 연기를 한 것이다. 속으로는 제멋대로 진저리를 치며 비명을 질러대고만 싶었다.

깡패들이 바닥에 놓인 상자 속을 뒤지고 있었다. 자잘한 물건들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마지막이니까 화끈한 걸로 멋지게 장식해야지." 광대뼈가 말했다.

"화염방사기로 불에 완전히 구워버릴까? 아니면 칼로 얼굴가죽을 벗겨?"

깡패들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낄낄대는 동안 진수는 고통을 내내 참으며 생각했다.

왼손으로 잡고 있는 탁자 기둥에서 왼쪽에 있는 소파까지의 거리는 보통 걸음으로 대략 한 걸음 정도 된다. 하지만 지금 그는 탁자에서 조금 더 밖으로 벗어나 있으니 소파에서 '진짜' 진수의 몸이 누워있는 위치까지 가려면 두 걸음 정도 어쩌면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른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짐작으로 예상할 뿐이다.

사실 걸음이란 단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은 다리도 절단나고 없는데, 소파까지 걸어서 갈 것은 아니잖은가. 절단나서 허리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판국이다.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그저 왼팔뿐. 왼팔로 힘껏 몸통을 밀면서 소파까지 전진해야만 한다. 도대체 왼팔을 몇 번이나 휘저어야 소파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세 번? 네 번? 다섯 번? ??? 네 번 정도 왼팔을 움직였을 때 소파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해 두기로 하자. 어설픈 추측때문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자칫 하다간 깡패들한테 도로 걸릴 테니. 이번에 붙들리면 완전히 끝장나겠지.

자 더 이상 지체할 순 없다. 시작하자.

진수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왼팔로 탁자 다리를 힘껏 밀쳤다. 탁자가 방향이 틀어지며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를 냈고, 진수의 몸은 탁자를 밀친 반동으로 인해 소파를 마주하기 딱 좋은 각도로 회전했다. 하지만 왼손이 흔들리다 오른쪽 눈에 박힌 드라이버 손잡이를 세게 건드렸다. 그는 참고 있던 비명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왼팔을 앞으로 뻗었다 바닥에 꼭 밀착시킨 채 허리에 끊어진 내장을 줄줄이 달고 있는 몸통을 끌고 왔다. 그 과정을 나름대로 열심히 재빠르게 반복했다. 원래 계획은 네 번까지 반복하는 거였다. 하지만 다급한 마음에 그는 자기가 몇 번이나 팔을 움직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팔을 계속해서 움직이기만 했다. 소파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느낄 수도 없었고, 사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신이 팔을 내저을 때마다 얼마만틈의 거리를 이동하는 건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팔을 움직이지 않으면 도로 붙잡혀 죽을 것만 같았다. 소파 생각은 어처구니 없게도 싸그리 날아가 버렸다. 팔만 죽어라 뻗었다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몸통의 움직임이 멎었다. 진수가 탁자 다리를 밀쳐내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광대뼈가 상자에서 커다란 쇠꼬챙이를 꺼내들고 달려온 것이다. 그는 쇠꼬챙이를 진수의 등에 꽂았다. 진수가 고통스럽게 절규했다.

"요 새끼, 요거. 아직도 도망갈 힘이 남았네. 요거 아주 바퀴벌레같이 꾀만 많아가지고."

"옆으로 좀 비켜봐. 칼로 아주 얼굴 가죽을 벗겨내버려야 겠어. 아주 아파 죽을 맛이 들게 해주지." 통통이가 말하는 동안 칼날을 슥슥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광대뼈가 진수 등에 꽂힌 쇠꼬챙이를 손에 잡은 채 옆으로 비켰다. 통통이가 칼을 들고 진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진수는 등이 꿰뚫린 채 팔을 버둥거렸다. 사실 그 때까지도 소파 생각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저 고통에 못이겨 반사적으로 팔을 움직인 것 뿐이었다. 하지만 팔은 바닥에서 버둥대다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다 무언가 말랑하면서도 탄력있는 물체를 움켜쥐게 되었다.

그 순간 진수의 머리 속에는 다시 소파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움켜진 것은 소파의 오른쪽 팔걸이 부분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팔을 좀 더 오른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으로 내저었다.

잡았다. 물컹한 뭔가가 만져졌다. 그것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있는 진수의 왼쪽 종아리였다. 그 느낌. 꿈 속의 진수가 '진짜' 진수를 만진 느낌. 짜릿했다. 그는 힘껏 그 종아리를 끌어당겼다. 소파에 놓여있던 왼쪽 다리가 소파 아래로 내려왔다.

얼굴가죽을 벗기고 싶다는 통통이가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왼손으로 진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진수의 고개가 천장쪽을 향해 끌려 올라갔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통통이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머리카락이 빠져나왔다. 목이 삐끗하면서 머리가 아래로 고꾸라졌다. 급하게 떨어지느라 왼쪽 눈에 박혀있는 드라이버가 소파에서 내려온 진수의 왼쪽 정강이뼈에 정통으로 충돌했다. 그렇잖아도 왼눈에 박혀있던 드라이버가 더욱더 눈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시 통통이의 왼손이 진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 새끼, 마지막까지 뺀질거리는 거 봐라. 아주 질긴 새끼네, 이거." 놈의 손이 진수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진수는 끌려가지 않으려 머리를 흔들며 저항했다. 그러다 진수의 옆얼굴이 소파 아래로 내려온 그의 '진짜' 왼발과 부딪혔다.

보이지가 않아 자기가 어디랑 부딪힌 건지 정확히 알 길 없는 그였지만, 자신의 신체 일부와 접촉했다는 것은 직감했다. 불현듯 마음 속에서 명령 하나가 내려왔다.

물어라! 힘껏 물어라! 악몽 속의 고통이 극에 달하면 잠자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고통이란 것은 원래 육체를 자극하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육체를 자극시켜 악몽에서 깨어나라. 그러니 온힘을 다해 이빨로 깨물어버려! 잠아 확 달아날 정도로!

진수는 입에 와닿은 자신의 신체를 깨물었다. 그는 정말로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다.

어두컴컴한 아파트 거실 안에 '진짜' 노총각 진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비명을 지르며, 진수가 눈을 떴다.

그러자 눈 앞에 땀 흘리는 아내가 있었다. 거실 천장을 배경으로 땀 흘리는 아내는 검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얀 소복을 흩날리며, 허공에 떠있었다.

진수는 귀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이용해 귀를 틀어막았다. 악몽 속에서는 내내 침묵하던 귀신이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귀신의 비명은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초음파같은 비명이었지만, 그 날카로운 충격파는 진수의 귀를, 손으로 막고 있는 그의 귀를 뚫고 들어와 머리 속을 긁고 다녔다. 그는 열었던 눈을 질끈 감고서 귀를 막은 채 귀신의 비명을 참아내느라 기를 썼다. 충격파가 그의 머릿 속 압력을 점점 높여가며 고통스러우면서도 간지럽게 뇌를 자극했고, 진수는 할 수만 있다면 머리 뚜껑을 열고 시원하게 뇌를 긁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명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는 천천히 귀에서 손바닥을 떼고 눈을 떴다. 허공에 떠있던 땀 흘리는 귀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누워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이 뻐근해서 손으로 목덜미를 잡아주어야 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아파트 거실이었다. 밖은 어둡고 거실의 조명까지도 꺼져 있어 거실은 깜깜했고,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빛만이 그나마 실내를 밝혀주고 있었다. TV에서는 런닝 머신을 판매하는 홈쇼핑 선전을 내보내고 있었는데, 작동 중인 런닝 머신 위를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 쇼핑호스트 남자가 시청자들을 향해 연신 유혹의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하고 심신이 다 피곤하다 싶을 때 있으시죠? 그럴 땐 운동으로 푸세요. 이렇게! 달리면서! 즐겁게!"

진수는 머리가 멍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조금 전 귀신의 모습과 비명의 충격파에 시달린 탓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어두컴컴한 자기 집 거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자기가 이 곳에서 뭘하고 있는 건지, 그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할 엄두 조차 내지 못했다.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한 상태였다.

그는 왼다리가 소파 아래로 내려가 있다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못한 채, 소파에서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며 왼발로 거실 바닥을 딛고 서려는 순간, 마치 왼발이 순식간에 늪에 빠지는 것만 같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게다가 쓰러지는 와중에 소파 앞에 있는 작은 탁자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고, 손으로 탁자 모서리에 부딪힌 아픈 머리를 문질러댔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관심은 늪에 빠지는 줄로만 알았던 왼발로 향했다. 극심한 통증이 왼발을, 특히나 엄지발가락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 격렬한 고통 덕분에 그의 얼굴은 저절로 일그러졌다. 그는 왼발을 조심조심 움직여 TV 불빛이 비추는 쪽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통증때문이기도 했지만, 상처를 바라보는 섬칫한 두려움때문이기도 했다. 왼발 엄지발가락의 굵은 마디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소파 아래쪽은 엄지발가락에서 흘러나온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엄지발가락에서 발톱뿌리 바로 밑이 길게 까져서 허연 뼈가 살짝 드러나 있었고, 살이 불룩한 발바닥쪽 아랫부분은 두 동강 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깊숙이 찢어져서 상처가 입을 벌리고 피를 흘렸다.

그런 처참한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 다음에야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의 낮잠, 마당 있는 집을 뒤흔드는 깡패들, 사랑하는 땀 흘리는 아내, 전기가 나가 고립된 아파트, 택배를 배달하러 온 통통이와 광대뼈, 노려보고 있는 땀 흘리는 소복귀신, 처절한 고문, 그리고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에 닥치는대로 물어뜯기.

내가 악몽 속에서 허겁지겁 물어뜯었던 것은 내 왼발 엄지발가락이었구나. 그는 탁자 앞에 앉아 피 흘리는 엄지발가락을 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혀로 입 안 여기저기를 건드려 보았지만 피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군. 그러다 핑그르르 눈물이 맺혔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심하고 불쌍했다.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며, 천생연분을 꿈꾸며, 외로운 독신생활을 고수한 결과가 겨우 이런 거라니. 총각이 데이트 약속도 없는 쓸쓸한 휴일 오후에 낮잠 자다 여자귀신의 농간에 빠져 허무하게 죽을 뻔하다니. 그건 무서운 경험이 아니라 슬픈 경험이었다. 더욱이 그는 결혼도 안한 주제에 멋도 모르고 귀신을 보고 아내라고 불렀다지. 슬프네, 슬퍼.

그렇게 슬퍼하다 진수는 일어섰다. 병원에 가서 발가락을 치료받을 생각이었다. 씩씩한 청년이라면 이따위 상처쯤이야 소독약 좀 바르고 붕대로 칭칭 싸서 한 며칠 조심하면 그만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진수는 씩씩한 청년이 아니라 너무도 연약해서 누구에겐가 기대고만 싶은 불쌍한 노총각일 뿐이었다.

우선 답답한 거실에 조명을 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진수는 왠지 그 전화가 불길할 것 같았지만, 절룩거리며 걸어가 TV 옆에 있는 전화를 들었다.

"나다." 어머니였다. "너 왜 전화를 그렇게 안 받냐? 아까부터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너 또 잠 잤냐? 뻔하지, 네가 언젠 노는 날에 남들처럼 데이트를 해보기는 했냐? 아 참, 너 며칠 전에 네 이모가 맞선 보라고 했는데, 싫다고 그랬다며? 얘라이, 한심한 자식아. 나이를 그렇게 쳐먹도록 사람 구실도 안 할 참이냐? 저기 옆집에 동군이네 집 막내아들은 낼모레 장가 간다더라. 걔가 너보다 열 살은 아래라는 거 너도 알지? 부끄럽지도 않냐? 남들은 부모가 말 안해도 알아서 연애질하고 결혼하고 그러는데. 난 언제쯤 남들한테 손주 자랑해 보냐? 너 그냥 그렇게 쭉 살 작정이냐? 썩을 놈아. 너 거기 아파트에서 맨날 혼자 자고 그러면 무섭지도 않냐? 귀신 안 나와? 왜 그렇게 궁상맞게 살려고 그러니? 네 이모가 그래도 너를 생각해서 좋은 자리 하나 알아봐놨는데, 그걸 마다해? 에라이, 이 화상아. 네 이모가 말하는 거 들었는데, 그 처자가 어떤 처잔고 하니-"

"맞선 볼께요."

어머니가 너무 놀라 말을 못했다. 장가가란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7 대 3의 비율로 실실 웃으면서 대충 피하거나 짜증을 내던 아들이 대뜸 맞선을 보겠다니. 얘가 왜 이래? 뭔 일 있었나?

어머니는 너무 기쁘고 좋아서 전화기에 대고 맞선보는 요령을 구구절절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수는 한참동안을 그렇게 어머님의 수다를 들으며 수화기를 들고 서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맞선을 보는 것도 괜찮겠지. 소개팅을 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어색하고 껄끄러운 만남이라도 좋은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 뭐든 해보자. 그러면 적어도 일요일 오후에 잠자다 귀신한테 놀림당하는 경우보다는 낫겠지.

진수는 왼발 엄지발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엄지발가락이 빨간 눈물을 흘린 끝에 얻어낸 교훈치고는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막판까지 몰린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TV에서는 아직도 아까 그 쇼핑호스트가 런닝 머신을 선전하며 외쳐대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하고 심신이 다 피곤하다 싶을 때 있으시죠? 그럴 땐 운동으로 푸세요. 이렇게! 달리면서! 즐겁게!"

진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 The End 2004. 5. 19. 투덜이 스머프 지음 ##
댓글 3
  • No Profile
    jxk160 04.05.19 18:21 댓글 수정 삭제
    멋지비요! ;ㅁ; 글고 쇼핑 호스트 대사에 올인!
  • No Profile
    상상력이 엽기발랄 자체네요. 웃다가 궁금해지고... 뭣보다 거침이 없고 시원스럽군요. 장난처럼 읽었는데, 공포+유머=유쾌한 식은땀입니다.
  • No Profile
    Mr. 송 04.05.27 13:35 댓글 수정 삭제
    노총각인 필자 본인의 경험담이 처절하게 묻어나는 소설이군요.귀하의 대단한 상상력과 거침없는 표현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번역만 하지말고 창작을 하는 날이 반드시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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