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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세상의 중심

2003.07.06 00:3707.06

난 아주 아연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대머리 바퀴벌레와 결혼할 운명을 이고 태어난 남자가 자신의 운명을 알아버렸을 때의 그 얼굴 표정이었다.

“충격이 아주 컸나보군?”

전봇대가 걱정스레 말을 건네왔다. 전봇대와 내가 서있는 거리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우리 둘을 관심있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지금이 일반적인 출근시간을 대체로 30분 남짓 남겨둔 아침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샤워를 한 후 얼굴에 바른 밀크료션이 아침공기에 증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건조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넌 보통의 전봇대로 밖엔 보이질 않는데?”

‘봇’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난 코 주위의 피부가 상당히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 세상의 언어를 모음과 자음으로 구분하는 것보다 코 주위의 피부를 당기는 발음과 그렇지 않은 발음으로 구분하는 것이 피부학적인 측면에서 보다 타당할 줄도 모를 일이다. 그런 식으로 언어를 분류하면 인류는 보다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난 아내가 해주는 닭탕수육의 맛을 문장으로 표현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와의 대화에 집중하라구!”

전봇대가 나에게 소리쳤다. 난 코를 찡긋거리며 반성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미안, 잠시 언어학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 맞아. 넌 아무리 보아도 일반적인 전봇대라구. 네 몸에 붙어 있는 헐렁한 광고지가 그것을 증명한단 말야. 아무리 보아도 너의 주장처럼 니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어.”

전봇대는 말을 할 때 표정 변화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그의 음성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늬앙스와 톤이 미묘하게 변할 뿐이었다. 전봇대가 잠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이 말없이 있다가 대답했다. 그 대답의 늬앙스는 철학적이었으며 톤은 지금까지의 전봇대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낮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중의적인 존재라구.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전봇대지만 틀림없이 난 세상의 중심이라구. 인간인 너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중의적인 존재? 전봇대가 말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표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대화를 할 수있다는 것과 멋진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개체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은 개미들 중에서 아니 절지동물중에서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일본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절지동물이 있을 줄도 모를 일이다.(인간의 청력이 낮아서 못 들을 뿐이다.) 더구나 그런 절지동물은 한 마리 이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절지동물들이 모두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요컨데 언어능력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명제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난 전봇대와 대화를 하느라고 출근시간을 단 29분만 남겨두고 있었다. 지금 대화를 중단하지 않으면 지각할 수도 있었다.

“미안하지만 출근시간에 쫒기고 있는 몸이라서 이만 헤어져야겠어. 난 항상 이 길로 걸어다니니깐. 나중이라도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을 거야.”

이리하여 난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전봇대와 헤어져서 택시를 잡아 타고 회사로 갔지만 유감스럽게 2초나 늦어서 지각으로 채크되고 말았다. 내 책상의 키보드와 필기구들이 놀라면서 말했다.

“웬일이야? 지각을 다하고. 3년만에 처음이지. 분명 사유서를 써야 할텐데. 뭐라고 할꺼지?”

키보드와 필기구들은 모두들 걱정스럽게 날 위로했다. 난 사유서에 출근시간에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전봇대와 길게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늦었다고 솔직하게 썼다. 회사에서 날 정신병원에 보낸다고 해도 거짓말로 사유서를 작성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유서를 받아본 부장의 낮빛이 아주 어두어졌다. 그리곤 부장이 어디론가 비밀스럽게 전화를 했다. 난 내 자리에 앉아서 힐끔거리며 부장의 그런 행동을 훔쳐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자주 다니는 정신병원에 연락했을 터였다. 내 키보드가 날 책망했다.

“이 바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늦잠을 자서 늦었다고 썼으면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일이었잖아. 난 너의 키보드치는 리듬감이 좋아서 널 아주 좋아했는데. 이제 넌 정신병원에 수감되겠구나. 그리고 난 다른 사람의 리듬에 익숙해져야겠지. 새로올 사람도 키보드를 너처럼 아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너처럼 발라드풍의 리듬으로 날 두들겨주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키보드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울기 시작했고 필기구들이 키보드를 위로했다. 아 정말이지 오늘은 아침부터 재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회사로 건장한 사내들이 들어왔다. 헌데 그들은 군인이었다. 군인들은 철모를 쓰고 있었으며 군화대신 검정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나로써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군인 특유의 사람을 압박하는 군사적인 느낌은 그 어느 군인들 못지 않았다. 지금 사무실에 들어온 군인들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 3일도 지나지 않아 범죄로부터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아마도 헌병인 듯한 이들 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군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군인들을 바라보면서 난 정신병원에서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군대와 손잡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입니까?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전봇대를 보았다는 사람이.”

매우 강압적인 목소리로 군인이 나에게 물어왔는데, 어찌나 강압적이던지 난 겁먹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원망의 눈초리로 부장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 있는 군인들은 내 대답을 듣고 나서 뭔가 해결되었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일의 진상을 설명해 주었다.

“Q요원의 첩보가 사실이군요. 지금 당신과 함께 근무하고 있던 부장은 바로 저의 기무부에서 이 회사로 잡입시킨 첩보원입니다. 저희는 일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 중에서 가장 리얼하게 40대 중반의 평범한 남자역을 해낼 40대 중반의 죄수를 섭외해서 공작에 투입시켰죠. 물론 공작이 성공하면 모든 죄를 말소시켜주고. 6급 공무원으로 취직시켜준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군인이 설명을 하자 나와 직장동료들은 마법에 걸린 얼음 공주처럼 모든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숨도 쉬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3년동안 함께 근무한 부장이 기무부에서 잡입시킨 첩보원이라니! 기무부는 무엇 때문에 포장지 도매업을 하는 이 회사에 요원을 침투시킨 걸까? 그리고 첩보원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길 일이지. 나에게 고백조의 음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도대체 그 의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갑자기 지금까지 낸 소득세가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와! 이제 완전 사면이다!”

부장이 소리치면서 즐거운 듯, 뛰면서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난 군인들에게 연행되듯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내 키보드는 기가 차다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키보드는 국산이지만 CIA에서 포장지 도매업을 하는 회사에 잡입시킨,  한국산 키보드로 위장한, S라는 요원일 줄도 모를 일이다.

회사 앞에는 헬기가 대기되어 있었다. 난 군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헬기에 올라탔는데, 헬기는 아무 소음도 없이 이륙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이 헬기는 국방부에서 초 일급 비밀에 해당하는 무소음 헬기였다. 하지만 왜 일급 비밀인 이 무소음 헬기를 서울 한복판까지 끌고 나왔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무소음 헬기에 앉아 서울 정경을 내려다 보았다. 뿌연 스모그가 마법진처럼 서울을 감싸고 있었다.

“도데체 무슨 일이죠?”

군인들 중에서 가장 똑똑해 보이는 군인이 철모를 벗고나서 바지 주머니에서 머리 빗을 꺼내 짧은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전 머리를 빗어야 맘이 가벼워지거든요. 그래서 실례인 줄 알지만 머리를 빗으며 설명하겠습니다. 사실 전 대통령님에게 작전회의를 설명할 때도 머리를 빗으면서 한답니다. ”

분명 이 군인이 머리를 빗어야 맘이 편해진다는 것도 탑 시크리트일 것 같았다. 난 하루의 반이 지나가기 전에 일반인치곤 너무 많은 군사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이제 다시는 일반인으로 돌아갈수 없을 것 같았다. 똑똑해 보이는 군인이 머리를 빗으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군인의 머리 빗는 동작은 너무나 독특해서 마치 사막에서 모래로 이뤄진 진귀한 생명체로부터 선인장을 구하려는 군사작전을 연상시켰다.

“지금 각국에서는 ‘고정밀도 지구위치 파악 체계’를 차지하기 위해서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정밀도 지구위치 파악 체계를 먼저 완성하는 국가가 앞으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죠. 헌데 최근 저의 요원이 이스라엘 카페에서 우연히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고정밀도 지구위치 파악체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중심에 볼펜안테나를 설치해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의 중심에 볼펜안테나를 설치하지 않은 ‘고정밀도 지구위치 파악체계’는 군사적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고정밀도 지구위치 파악 체계와 볼펜안테나. 이 두가지 소재의 등장으로 난 그만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식 체념이 일기 시작했다.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정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요컨데 현실에 관한 논리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느낌이었다. 만일 볼펜안테나가 내가 알고 있는 볼펜안테나라면 전파점에서 1200원에 두 개를 살 수 있는 제품일 것이었다. 보통 이 볼펜안테나는 낱개로는 판매하지 않았다. 똑똑해 보이는 군인은 빗을 꺼낸 바지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볼펜안테나를 꺼냈는데,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흔해 빠진 볼펜 안테나와 같은 것이었다. 분명 1시간 전의 내가 고정밀도 지구위치 파악체계의 완성이 전파점에서 구할 수 있는 볼펜안테나의 부착으로 완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난 충분히 놀라 머리가 뒤로 젖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1시간동안의 경험은 이미 현실의 벽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똑똑해 보이는 군인의 바지에서 일반적인 볼펜안테나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볼펜안테나를 낱개로 구입했는지 묻고 싶어졌다. 연간해서 전파점에서는 볼펜안테나를 낱개로 팔지 않았다.

“기무부에서는 그 첩보를 접하고 곧 세상의 중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은 전봇대로 위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아마도 전세계의 첩보 위성이 이미 세상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모든 전봇대를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저희는 당신이 세상의 중심에게 가서 이 볼펜안테나를 설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한국은 미국을 뛰어넘는 군사력을 갖게 될 겁니다.”

난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나름대로 탄탄한 논리 위에 사건을 나열해 보았지만 번번히 종이 카드로 만든 성처럼, 깃발을 꽂기 전에 사건의 나열은 붕괴되고 말았다. 혹시 난 내 생각보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똑똑해 보이는 군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빗질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빗질은 도시 한 가운데에서 고양이를 생포하기 위한 해병대의 수색작전을 연상케했다. 도대체 해병대는 고양이를 무슨 목적으로 생포하려는 것일까?

“당신이 볼펜안테나를 세상의 중심에 꽂아 주신다면, 저희는 오늘 당신이 지각했다는 회사 기록을 없애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흔하진 않지만, 여성들에게 멋진 남자로 어필하기 위한 전과기록이 필요하시다면, 원하시는 죄목으로 전과기록도 만들어드리지요. 아마 폭행치사가 그렇듯 하겠지요. 제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특수강도보다는 폭행치사가 여성들에게 더 인기가 있더군요.”

난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이 군인들에게 가장 필요로 한 것은 볼펜안테나를 세상의 중심에 꽂는 것이아니라,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일반론적인 강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똑똑해 보이는 군인은 손을 바꿔 머리를 빗으면서 차분한 어조로 제안했다.

“볼펜안테나를 세상의 중심에 부착해 주시면, 세상의 1/12을 드리지요. 물론 열대지역이든 아열대 지역이든 당신이 원하는 지역으로 산듯하게 포장해서 드리겠습니다.”

분명 난 짐작도 하지 못하겠지만, 세상의 중심에 볼펜안테나를 설치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전세계를 장악할수 있다는 것을 지금 똑똑한 군인이 한 제안으로 알 수 있었다. 일순간 헬기 안은 긴장이 감돌았다. 마치 이제부터는 내가 말을 하기 전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이 헬기를 날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1/12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난 지금 잡고 있는 것이었다. 난 곰곰히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무소음 헬기를 종로에 착륙시켜 헬기를 탄 지 1시간 30분만에 지면을 밟았다. 그리고 구두와 보도블록이 접하는 느낌을 상세하게 느끼면서 서점에 들어가 시집을 한 권 샀다. 서점 안에 있는 햄버거 식당에서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친한 친구들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전화도 해보고, 서점을 나오면서 새로 나온 통계책을 살펴보곤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통화중이었다. 오늘 일어난 일들을 미뤄보건데 아내와 단 한 번에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울 것 같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 근처에서 내려 아침에 만났던,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한 전봇대에게로 갔다. 내 안주머니에는 똑똑한 군인에게 건네 받은 볼펜안테나가 들어 있었다. 내가 전봇대에게 다가갔지만 전봇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 봐! 세상의 중심!”

난 큰 소리로 전봇대를 향해 외쳤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날 이상하다는 듯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출근시간에 쫒기는 들짐승 같은 어른들과는 다른 빛깔을 띄고 있었다. 난 발로 전봇대를 차면서 다시 말했다.

“이보라구! 세상의 중심!”

그러자 잠에서 막 깬 목소리로 전봇대가 말했다.

“왜 그래? 지금 막 잠이 들었는데.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이야기 하자구. 이 시간에 잠을 자면 좋을 꿈을 꿀 수 있거든 웬만해선 방해받고 싶지 않다구.”

난 전봇대에 붙어있는 너덜한 광고지를 뜯으면서 말했다.

“나도 조용히 볼펜안테나를 이 광고지처럼 붙이고 이 일을 끝내고 싶다구. 아무리 세상의 중심이라고 해도 전봇대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단 말야.”

“볼펜안테나? 그렇다면 넌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정부기관에 이야기 한 모양이군.”

세상의 중심은 불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어. 3년동안 같이 일한 부장이 기무부 공작요원이었거든.”

“그래서 볼펜안테나를 나에게 설치할 생각이야.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로써는 널 막을 방법이 없지만.”

난 전봇대에 붙은 광고지를 모두 뜯고나서 주머니 속에 있는 볼펜안테나를 만지작거리며 잠자코 있었다. 광고지는 보기보다는 견고하게 전봇대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하얀 얼룩 때처럼 뜯어지지 않은 종이가 여전히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지금보니 광고지를 뜯기 전보다 보기 흉하게 된 것 같았다. 난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하얀게 늘어붙은 종이를 떼려다가 손톱이 부려졌다. 그리고 부러진 손톱을 보면서 말했다.

“네가 싫다면 난 굳이 이 볼펜안테나를 설치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원한다면 네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말하지 않을거야.”

“아저씨 지금 전봇대랑 이야기하는 거야?”

전봇대와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물어왔다. 아이들은 마치 피카츄를 보듯이 나와 전봇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와 전봇대는 둘 다 아무 말도 않고 두 개의 전봇대인 양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은 10분정도 흥미롭게 구경하더니 이내 ‘재미없다’라고 말하곤 다른 곳으로 갔다.

“정부기관에서 상당한 것을 제시했을텐데?”

아이들이 떠나자, 세상의 중심이 말했다.

“세상의 1/12를 준다더군. 내가 원한다면 날 전과자로 만들어주겠다고도 했어. 어떻게 보면 믿을 수 없는 제안이고, 어찌보면 멋진 제안이지. ”

“그런 것 같군. 그럼 자네 맘대로 해. 난 볼펜안테나를 달던 달지 않던지 간에 세상의 중심이니깐.”

난 볼펜안테나를 꺼내 들고 전봇대에 기댔다. 전봇대에 기대고 있자니 편안함이 밀려왔다. 전에는 전봇대에 기대는 것이 이처럼 편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하루 동안에 10년 동안 할 모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어찌한다. 볼펜안테나를 달까? 말까? 그러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아주 곤한 잠이었는데, 꿈의 내용도 아주 건전했다. 세상의 중심의 말대로 이 시간에 잠이 들면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건전한 꿈이 약간씩 변질되면서 하나의 고함으로 다가왔다. 난 고양이를 본 생쥐처럼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전봇대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날 포위한 사람들은 나 같은 황인종 이외에도 백인도 있었으며 흑인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들 권총이라든지 바츄카포따위를 들고 서로를 견재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세상의 중심에 접근하면 바로 사격할 태세였다. 마치 ‘휴대용 군사화기를 들고 있는 전세계의 인종 전시’라는 제목의 전위예술을 길거리에서 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소리쳤다.

“미국을 위해 볼펜안테나를 달아주면 세상의 1/11을 주겠다.”

백인이 소리쳤다.

“남아프리카를 위해 볼펜안테나를 달아주면 세상의 1/9을 주겠다. 그리고 두 장의 도서상품권을 얹어주겠다.”

흑인이 소리쳤다.

“우리 국가를 위해 볼펜안테나를 달아주면 세상의 1/2을 주겠다. 그리고 세 장의 도서상품권과 두 장의 영화 초대권을 주겠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황인종이 소리쳤다.
자세히 보니 중간 쯤에 똑똑해 보이는 군인이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각국의 제안을 내가 수락할까봐 불안해 하고 있었다. 나를 둘려싼 사람들은 새벽시장의 상인들처럼 소리를 질렸다. 분명 이 동네사람들이 고성방가로 이들을 경찰에 신고했을 것 같은데, 경찰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이는 요원이 들고 있는 기관총에 겁을 먹고 모습을 숨겼을 것이다. 이윽고 3층 빌라에서 할머니가 창문을 열고 이들에게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외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은 조용해졌다. 분명 예절 교육이 잘 된 첩보요원일 것 같았다. 모두들 다른 나라 요원들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펜안테나를 세상의 중심에 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 없었다. 그러니깐 이들의 견재를 받지 않는 사람은 한국 국적의 ‘나’라는 사람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커진 것일까? 헬기 소리가 들려서 하늘 위를 바라보니 CNN이라는 마크가 찍힌 헬기 두 대가 나를 촬영하고 있었다. 난 촬영사실을 알고 거의 반사적으로 웃을 뻔 했다. 하지만 다행이 웃진 않았다. 될 수만 있다면 난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서 급격한 진화를 해서 전봇대로 변하고만 싶었다. 사실 인간 진화의 궁극저인 목표는 하늘을 향해 뻗은 전봇대일 줄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가만히 서있는 전봇대로 진화하기 위해 지금껏 생존한다는 새로운 학설을 접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세 시간정도 나를 둘려싼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미 첩보요원들은 나에게 세상의 4/5를 주겠다는 제안을 한 상태였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그런 제안을 받고보니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온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난 네 시간이 지나기 전에 전봇대에 볼펜안테나를 부착시켰다. 나를 둘려싼 사람들 모두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와 전봇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들 어느 국가를 위해서 볼펜안테나를 부착했는 지를 물어왔다. 아! 이런 아직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 미국? 북한? 일본? 프랑스? 호주? 영국? 멕시코? 우간다? 러시아? 이스라엘? 이란? 이집트? 이탈리아? 캐나다? 남아공? 중국? 대만?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 . . .

그들이 나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담담하게 말했다.

“전 방금 ‘세상의 중심’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으며, 이 나라를 위해 볼펜안테나를 세상의 중심에 부착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올바른 예절교육을 받은 모든 요원들이 아!하는 실망섞인 한숨을 뒤로 하고 자신들의 국가로 떠나갔다.

이리하여 난 모든 세상을 얻었으며 전 세상에 아내가 원하는 만큼의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이 중심이라는 전봇대 근처에서는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내 생활은 이후로 별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회사에 출근한다. 물론 지각한 기록은 말소되지 않았으며 당연히 전과기록도 생성되지 않았다.
cancoffee1
댓글 4
  • No Profile
    oz 03.07.30 23:37 댓글 수정 삭제
    읽는 내내 유쾌했습니다. 유쾌하지만 X파일 버금가는 음모를 그린 글이군요 ^^ 건필하시고, 다음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_@
  • No Profile
    해랑이 03.08.12 18:45 댓글 수정 삭제
    간만에 본 정말 재밌는 단편이었습니다.
    다른 작품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No Profile
    코아씨 08.08.02 09:38 댓글 수정 삭제
    즐거웠습니다.
  • No Profile
    아무 10.03.26 15:42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잘 봤습니다, 유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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