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하마드리아스 -상-

2011.11.20 17:4011.20

  노상을 터벅이며 걷는 사내의 손에서 종이 뭉치가 마구 구겨진다. 살갗에 닿는 지나친 습도와 더운 공기가 젖은 땀 냄새를 일으키는 그런 날이다. 분지에 갇혀있는 회색 구름이 비를 뿌리지 않는 무더운 날씨에 사내의 눈매가 가득 찌푸려진다. 겨울한파에도 견딜 두텁지만 올 빠진 망토와 빛바랜 천에 훌훌 말린 기다란 막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다소 먼지가 앉은 짐과 활이 아니라도, 사내의 얼굴에는 잔뜩 무게가 실려 있다. 건 짜증이 나는 날씨 속에서 노천시장을 걷던 사내는 이내 실 같은 비가 추적이고 나서야 여관 문을 들어섰다.
  간판에 ‘세노스’ 라고 명명 되어 있는 여관은 위쪽을 둥근 아치형 격자무늬 창으로 장식했다.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실내의 곰팡내가 후욱 밀려들어왔다. <날씨가 워낙 궂어서…….> 라며 수건으로 사내를 훔쳐 주는 마담의 말이 가는 사선을 긋기 시작한 창문에 메아리쳤다.
  찡그린 사내의 표정만큼 마담도 만면에 굴곡을 가득 담은 채 젖은 의복을 건성으로 털어준다. 사내의 뒤에서 마담은 빗질하지 않은 머리와 돋아나온 수염, 궂은 길을 다녀 온 듯이 누런 흙먼지로 뒤덮인 신발 따위에 시선을 주며 테이블로 안내했다.
  투숙하겠냐며 마담이 사내에게 던지듯이 묻는다. 사내가 장기투숙을 위해 제법 많은 돈을 던져주자 돌연 태도가 바뀌어, 입 꼬리를 약간 올리고 이를 살짝 드러낸 마담의 코발트 빛 눈동자에 은빛이 가득 담긴다.
  ‘식사 갖다드릴게요’ 에 뒤이어 동공에서 빛난 은빛의 개수만큼 마담의 하얀 치아가 뒤따라 나온다. 무뚝뚝한 어조로 식사를 주문하면서 사내는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뭉치들을 테이블 밑으로 던져버린다.
  깔깔깔!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벽 여기저기에 맹렬히 부딪히며 튀어 다니다가 귀를 후벼 팠다. 쇠가 부딪치거나 유리가 긁히는, 그래서 절로 몸을 지르르 떨게 하고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소리였다. 짙은 화장과 불룩한 모성애의 상징이 드러날 만큼 선정적인 옷차림의 여자들에게, 푸른 제식군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추적이는 광경이다. 옆 탁자에는 눈웃음과 주름이 함께 딸려 나오는 중년 남자가 가장 오래된 반지 자국이 남아있음에도 수줍어하는 젊은 여자에게 속삭이고 있다. 장교하나가 요의를 느끼는지 바지자락을 추스르더니 사내 옆을  ‘꺼윽’ 하고 지나가면서 역한 속 냄새와 술 냄새를 길게 늘어뜨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굴리는 사내에게 이 모든 광경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내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거기엔 술에 취한 병사와 여자들, 능글맞은 유부남과 내연녀가 동공에 담기고 있었다. 마담이 직접 식사를 가지고 나왔다. 빵이 아주 잘 구워졌다고 마담이 추임새를 넣는다. 앞치마 차림의 마담은 포도주 두 상자는 너끈히 들 만한 푸덕한 살집을 원피스 속에 감추고 있었다. 걸레질을 한 마루 바닥에서 쉰내가 강하게 풍겨 나오지만 사내는 묵묵히 먹는다. 사내의 접시가 비워지고 후식이 나오는 동안 옆 테이블의 여자들과 병사들의 체온은 더욱 올라갔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고, 물 컵을 찾는 빈도가 늘어났다.
  병사들의 테이블은 왁자지껄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폭음이 그들의 배꼽 근원에까지 이어진 존재의 가장 뜨거운 곳에 기름을 들이부은 모양이다. 그 때문에 깊은 저변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마구 토해내는 듯 했다. 병사들이 버얼건 얼굴로 공중으로 돈을 던지자 여자들은 서로 쥐려고 난리였다. 그들은 생의 목소리에 충실하게 돈을 움켜잡았지만 그 중 금화 하나가 뚜르르 굴러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밑에 있던 걸레를 빤 구정물이 가득 담긴 통으로 금화가 쏘옥 들어갔다. 굴러가던 금화를 쫓던 여자들의 시선도 구정물속에 처박혔다.
  여자들이 앞 다투어 달려들어 통 채로 바닥에 물을 쏟아버리고는 서로 움켜쥐려 애썼다. 그녀들이 움직이자 강한 향수 냄새와 구정물의 쉰내가 뒤섞여 뭉클 솟아올랐고, 사내는 역한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 바람에 마담이 다그치며 달려와 마룻바닥을 대걸레로 수습하며 투덜거렸다. 사내가 식사를 그만두고 올라간다. 중년남자가 반지를 꺼내자 거절하던 젊은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던 참이었고, 병사들이 여자들의 몸을 마구 더듬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담이 계단으로 향하는 사내에게 다가가 자신의 이름을 캐시라고 밝히며 함께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밖으로 죽 늘어진 살 때문에 가슴이 아닌 곳에서조차 불룩하게 삐져나오는 원피스를 입은 억실한 마담은, 사내가 계단을 올라가면서 병사들을 보자 적국에게 왕국의 공작이 시해 당하는 바람에 경비가 삼엄하다고 알려줬다. 요 근래에는 그 사건이 ‘정치적인 암투였다’ 라는 공공연한 소문을 흘리는 마담의 귀앳말도 사내를 자극하진 못했다. 그래서 지금 인접국가와 대치중이라 병사들과 매춘부들이 들락거린다는 소리였다.
  <뭐 그렇다고 떠날 필요는 없으니까….> 아직 전면전은 아니라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이며 마담은 사내의 의중을 살폈다. 사내의 얼굴은 여관에 들어오기 전보다 중량이 늘었다. 고개를 돌린 마담이 사내에게 어울리지 않게 반지에 박혀있는 보석을 보더니, 손뼉을 딱 마주치며 생긋 웃는다. 마담은 시국이 어수선해서 보석과 금붙이 값이 곱으로 올랐으니 팔라고 재촉했다. 동전 같이 둥근 마담의 얼굴이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사내는 딱딱하게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층에 이를 때까지 마담은 사내를 설득하려고 쉴 사이 없이 떠들어 댔다.
  <참 내 정신 좀 봐, 많이 피곤하실 텐데….> 마담이 멋쩍은 웃음으로 방 열쇠를 건넨다. 비에 젖은 외투를 세탁해주겠다는 마담의 호의도 거절하며 사내는 열쇠를 받아든다. <차라도?> 사내의 거듭된 거부의사에 마담의 말은 앞뒤가 잘려 몸통만 남아있었다. <괜찮소.> 거듭된 제안이 부담스러운 사내의 말도 덩달아 짧아졌다. 토막 난 대화에 기어코 머쓱해진 마담이 계단을 ‘삐그덕’ 거리며 내려갔다.
  창밖에 내린 어둠이 어느새 복도로 흘러들었다. 뿌연 먼지가 앉은 외투를 걸친 채 복도를 걸어가는 느릿한 사내의 관절도 들리지 않게 ‘삐그덕’ 거렸다. 사내가 방문을 연다.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숨을 들이쉬려다 급히 내뱉었다. 문을 열자마자 안면을 가득 찌푸린 채 창가로 재빨리 다가가 짐도 내리지 않고 창문부터 열었다. 여관방의 정돈 됐을법한 흔적이지만 실제로는 지저분한 그 실체가, 피곤하고 지친 사내로 하여금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만들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사내주위의 갇혀있던 공기와 방안의 냄새를 후벼 파낸다. 대충 방을 정리한 후에야 사내가 짐을 내린다. 망토를 벗어 벽에 걸고, 활을 건 다음, 천에 돌돌말린 기다란 막대를 침대 곁에 비스듬히 기대놓았다.
  심호흡을 하며 바깥공기를 마시고 나서야 사내의 표정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진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사내가 의자위에 둔 짐에 시선을 던진다. 창밖에서는 취객들의 고함소리가 올라온다. 사내가 침대에 누운 채로 천으로 돌돌말린 기다란 막대기 같은 물건을 보따리 속에서 꺼내더니, 감싸고 있던 덮개를 와락 잡아당겼다. 금속특유의 반사광이 희미한 빛을 발한다. 검이었다. 침대 옆의 것과는 또 다른 하나였다.
  만월이 된 두 개의 달이 창을 가득 채웠다. 새파란 달의 여기저기에 뿌려진 크고 작은 구덩이가 지상에서도 윤곽이 뚜렷했다. 사내가 검을 쥔 두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창가에 가득 찬 푸르고 새하얀 달을 배경으로 사내의 팔이 검은 그림자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가 침대에 누운 채로 기다란 칼의 손잡이부근(Hilt을 더듬었다. 정확히는 사내가 손잡이 밑쪽 둥근 장식물(Pommel)을 돌리자 검에서 분리되었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사내가 병을 기울이듯 검을 비스듬히 내리자 비어있던 손잡이 안쪽에서 쏘옥 무언가가 사내의 손바닥으로 떨어진다.
  사내는 그 물체를 들고 창가의 푸르스름한 달 위에 올려놓았다. 새하얀 백월을 배경으로 사내가 그 물건을 이리저리 돌리자 검은 그림자의 윤곽이 작달만한 길이와 끝이 풍성하게 펼쳐진 윤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사내의 눈은 처음 신기한 걸 봤거나 발견했을 때의 그런 눈이 아니다. 마치 오랜 고뇌에 대한 해답을 재촉하듯이 펜대를 이리 저리 돌리며 응시하는 관찰이었다. 가느다란 바늘 같기도 한 모양을 응시하며 사내는 작은 한숨을 내어쉰다. 새하얀 달 위에서 사내의 팔과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검은 윤곽을 달리했다.
  하아흠! 한참 그 물건을 주무르던 사내의 입이 크게 열리며 양 볼과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눈매는 일그러지고 동공은 물이라도 찬 듯이 흐려졌다. 제법 오랜 시간 침대에 누운 채로 물건을 관찰하던 사내의 팔이 뻣뻣해지고 있었다. 만월이던 달이 이지러지고 거리에 흥청망청 하던 주객들이 끊길 정도가 되어서야 사내의 팔이 별안간 아래로 픽 쓰러진다.
  사내의 눈꺼풀이 어느새 무거워져 있었다. 쌔근쌔근 콧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블로우 건(Blow Gun이로군.>
주인이 가느다란 바늘을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알딸딸하고 달콤한 알코올 향이 번져왔다. 이른 새벽부터 사내는 여관에서 아침을 거르고 간소한 차림으로 길을 나서서는 지금은 이상점에 와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는 틈을 노린 의도였는지 가게 안은 주인밖에 없다.
  여러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匠人)은 억센 콧날에 가운데가 반쯤 벗겨졌고 배배꼬인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억실억실한 얼굴에 맞게 속되고 걸걸한 말투를 늘어놓았다. 대화중에 술을 입에 대는 장인이 반쯤 남은 술병을 흔들자 주황색 액체가 찰랑인다. 장인의 버얼건 얼굴만큼이나 원목을 깎고 다듬은 갈색 윤이 나는 목재 공예품이 좁지 않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서가가 많은 서재에서나 날 법한 나무속 냄새와 옻칠향이 고풍스러운 장인의 솜씨만큼 베어 나왔다.
  <블로우 건이요?> 가게로 들어서서 장인에게 물건을 보여준 이후로 줄곧 ‘그 물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지 않던 사내의 목울대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다양한 감정은 첨삭되고 근심과 고뇌가 새겨진 사내의 얼굴조각에서 ‘의문’이라는 오점을 발견한 듯, 장인이 주황색 액체가 든 병을 기울이더니 단번에 삼켜버렸다. 쩝 소리와 함께 말을 잇는 장인의 입에서 강한 술 내음이 풍겨 나온다. 장인은 저 조각 같은 사내의 표정에서 궁금증이라는 티끌을 자신의 연장으로 깎아내고 싶을 것이다.
  <나지아 산맥의 파수꾼을 알고 있나? 저 머언 동쪽 나지아 산맥에 터전을 잡은 부족민들이지. 거긴 워낙 외딴 곳이라 외지인이 발을 들여 놓기가 쉽지 않아. 꼭…… 와이번(Wyvern)이라도 나올법한 험한 산골짜기라…, 실제로도 근처에 거인이 살고 있다고 하더군.> <그들이 쓰는 물건입니까?> 주로 수렵으로 생활하는데 블로우 건 다루는 기술이 탁월해서 대륙 내에서도 제조할 수 있는 상점은 몇 안 된다는 장인이, 사내를 비스듬히 쳐다본다. 사내의 표정에서 도려낼 수 없는 티끌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럼 어떻게?….> 우연히 그 지방에 들어간 외지인이 그들의 제작기술을 배워서 가능하다며 장인이 목울대로 주황색 액체를 주르르 흘려보낸다. 사내가 오른쪽으로 낡은 활과 대나무 공예품과 피리 등이 놓인 선반에서 고개를 돌리자 벽에 걸린 커다란 사슴뿔이 보인다.
  <그 지방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 그들과 접촉한 사람은 극히 드물거든. 이 도시는 치안이 좋은 편이지만 시골촌구석은 다르다고. 변방에서는 아직까지 괴물이나 떼강도들과 싸우면서 하루해가 뜨고 지는 판국인데…. 그래서 건을 파는 곳이 대륙 내에도 거의 없어.> 호탕하게 웃으며 장인의 시선이 머문 곳에서는 손가락 굵기 만한 나무 관들이 길이별로 거치대에 걸쳐 있었다. 장인의 짙은 콧수염에 오렌지 빛 액체가 망울망울 맺혀 있다.
  <이 경우에는 특별히 가공한 형태라 조금 짧은 게 흠이지만…….> 장인은 목재를 다루는 거친 살결이 그대로 드러난 손으로 건을 살피며 말했다. 새까만 떼가 손톱에 드문드문 끼어있다.
  <짧다니요?>
  이제 장인은 도려 낼 수 없는 티끌을 가진, 사내의 저 불완전한 작품을 인정하는 눈치다. 장인이 콧수염에 묻은 술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진열된 작품 중 조금 짧은 나무 대롱을 손수 가져와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암기는 길이가 짧지. 침의 길이가 짧다면 응당 발사관도 짧은 법이거든. 그래서 휴대하기도 용이하고 숨기기에도 좋지…, 게다가 이건 더욱 짧은 형태니까 입 속에 숨길수도 있어, 가까운 상대와 대화한다면 상대방의 일상적인 인사말로 그 날 지는 해를 못 볼 수도 있지. 치명적인 게야…. 단점이라면 아쉽게도 효과를 볼 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그리 길지 않아…. 오랜 기간 훈련 받는다는 기사(騎士:Knight)가 사용한다면 좀 더 길어질지 모르지만, 먼 거리에서의 정확성과 효과는 기대할 수 없지…. 애초에 이 관이 짧은 다음에야…. 하지만 롱 건은 암기가 발사되는 동안 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 훨씬 멀리 날아가고 안정적인 명중률을 자랑하지. 너무 길어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재빨리 발사하는 건 힘들겠지만…….>    
  <여기에서 판매하는 게 맞습니까?>
  장인이 액자를 가리키며 고조부라고 소개하면서 오렌지 빛 액체가 묻은 손을 바지에 스윽 닦는다. 그러면서 진열되어 있던 블로우 건의 귀퉁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사슴뿔이 우리가게를 상징하지. 저 활도 고조부가 만든 거야.> 사내가 가진 암기 뒤의 안정적인 비행에 도움을 주는 물새깃털을 헤집자 쇠로된 암기의 끄트머리에 음각된 문양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걸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꼿꼿해졌다.
  <헌데 블로우 건을 아는 사람은 드문데…….> 어느새 사내의 굳은 안색은 처음과 같은 경도(硬度)였다. 장인이 그런 사내를 보고 의자를 당겨 앉더니 이를 내보이며 사내에게 상체를 기울인다. 장인의 저 호기심은 어쩌면 그 완전한 조각 작품을 다시 보게 되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래 누가… 소개해주던가?> 자그맣게 조근 조근 묻는 장인에게 사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장인이 상체를 세우며 고개를 뒤로 빼고는 샐쭉 뜬 눈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흐음…… 그럼 내 가게엔 무슨 볼일로 온 거지?> 빗어놓은 점토 마냥 장인의 음성은 한 음절씩 뒤로 갈수록 딱딱해졌다. 그 단단하게 굳은 점토 못지않은 사내가 장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이 물건 때문이오.>
  한동안 사내를 관찰하던 장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어리더니 히죽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장인은 밖을 살피고는 걸쇠를 채우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하긴… 소문을 듣고 찾아올 수도 있겠지.>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간, 의미 있는 뉘앙스였다. 장인은 이전과 달리 쾌활하게 말하며 상대를 가늠해보던 비딱한 시선을 바로잡았다. 조근 조근하고 명랑한 태도로 강도, 강간에 이용하기 좋다고 하는 장인은, 비전문분야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추가로 나열함으로써 사내를 배려했다. <지팡이 풀로 여자를 마취시켜서…, 흐흐 마전 -나무와 씨앗에서 얻어낸 흰 결정체. 극히 적은 양이면 흥분제- 도 곁들이면 마음에 드는 어떤 여자라도 품에 안을 수 있지.>
  장인이 고운손질로 다듬어진 테이블위에 새겨놓은 여신의 나신상으로 흘깃 눈길을 주었다. 눈만 껌벅이며 쳐다보는 사내를 향해 장인이 싱글거리며 마전의 효능과 사용법을 간략하게 알려줬다. <아 그리고 이걸 여기서 샀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돼.… 필요한 약물은 자네가 알아서 구입해야 하지만….> 탁자위의 사실감 있게 새겨진 나신상의 유방과 엉덩이가 조명을 받아 매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사내의 두상조각에서는 예의 그 고뇌의 주제만 관찰되었다. 그러더니 사내가 대뜸 묻는다.
  <이걸로 사람도 죽일 수 있소?> 단단한 원목의 나뭇결마저 손바닥의 지문처럼 느껴지는 탁자위의 섬세하게 조각된 여체를 쓰다듬던 장인의 손이 번득 멈춰 선다. 별 반응이 없었던 사내를 장인이 의아한 듯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술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술은 이제 옆으로 굴려도 세어 나오지 않을 만큼 빈 공간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인이 뭔가 결심한 듯 내뱉었다. <독에 따라 다르지.>
  <독이라…….> 사내가 나직이 읊조렸다. 이어서 사내가 나지아 사냥꾼들이 강력한 독물을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물었지만, 그들은 맹독류는 사용하지 않는다며 장인이 고개를 저었다. 장인의 목이 뻣뻣해졌다. <그럼 이걸로 드릴까?> 장인이 구매를 독촉했다. 장인은 서로 입 다물기를 재차 강조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블로우 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세심히 관찰하는듯하더니 블로우 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장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사내를 보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장인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 물건 사러 온 게 아니군.>
  <…….>
  잠깐의 침묵 후에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으로 먼지가 찬찬히 내려앉는 게 보였다. 이른 아침 한산한 문밖 거리에서 구두소리가 다가온다. 돌길을 딱딱 찍어대는 여인의 구두소리가 멀리서 다가와 문 바로 밖에서 가장 크게 울다가 멀어지며 여운을 남길 때까지, 상점 안은 노란 햇살 속에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만으로 가득 찼다. 또각 이는 구두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을 즈음에 사내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이걸 사간 사람을 알고 싶습니다만…….> 장인의 커지던 동공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떨리더니 술병을 든 채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거센 말투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제엔장!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꽈다당! 그 서슬에 목재의자가 뒤로 나뒹군다. 의자가 쓰러지거나 장인이 탁자에 내리친 술병이 박살나는 소리도 그 일갈에 파묻혀버렸다. <경비대 소속이냐!> 장인이 목만 남은 술병을 던져버리고 옆의 낡은 활을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선혈이 베어 나오는 오른 손 위로 거무튀튀하고 숭숭한 털이 긴장으로 꼿꼿이 서면서 이마에는 굵은 선이 돋아 올랐다. 시위를 당기고 있는 활에서는 탄력 있는 활대가 새된 소리와 함께 바르르 떨었고, 압력에 변화가 생긴 시위에서 ‘두두둑’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활대의 양극단이 지속적으로 동일한 탄성을 구사한다면 극도로 긴장된 시위가 끊어질 테지만, 압력이 일방적인 한 극단으로 치달으면 양극 중 하나가 수용할 수 없는 장력으로 부러질 거였다. 잠자코 앉아있던 사내가 시위를 먹인 화살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얼굴이 더욱 붉어진 장인은 그간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다소 비틀거리는데다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돋아있었다.
  <그렇게 흥분할거 없소. 난 경비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 이건 내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  오….> 담담하게,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사내를 보고 다소 누그러진 장인이 소리쳤다. <그럼 그따위 질문은 대체 뭐야!> <그저… 이 가게에서 한 달 전쯤 블로우 건을 다량 구입 하였는지 확인만 하면 되오. 블로우 건과 암기를 다량 사갔을 거요. 게다가 내가 끄나풀이라면 지금쯤 마을 순시대가 들이닥쳤을 거요.> 사내의 말을 들으며 찬찬히 쳐다보던 장인의 경직된 팔이 서서히 풀어진다. 활을 딱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깨진 술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인의 눈도 많이 유연해져 있다. 낡은 활줄은 어느 새 활대에서 끊어져 있었다.
  <… 그랬던 거 같기도 하군.>
  그때까지 무덤덤하게 앉아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눈을 반짝인다. 칙칙한 녹색 동공이 흔들렸다. <대략 두 달 즈음 됐을 거요. 흔적을 남길만한 작자들도 아니었으니 남아있는 것도 없소. 그치들을 찾으려면 약초 상에 가보시구려. 그게 훨 나을게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놓더니 탁자위에 묵직한 게 구른다. <고맙소.> 사내의 사례에 장인이 금화를 다시 사내 쪽으로 민다. <거··· 이거 가져가고 신고는··· 하지 마시오.> 도로 집어 들지 않고 사내가 문을 나섰다. 금화가 내동댕이쳐진다. 장인이 문가로 가더니 영업여부를 알리는 팻말을 거세게 비틀어 놓았다. 문이 쾅 닫힌다.


  깡마른 점원의 입가에 쓴웃음이 베어 나온다.
사내가 가공된 독물에 대해서 연신 문의를 했지만 마법사들이 실험을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포션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로 다량으로 구입하기에 알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거듭되는 곤란한 문의사항에 거북해진 듯 점원은 경청하는 자세가 수시로 바뀌었다. 단답형 대답도 도드라졌다. 사내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조소가 묻어나오기도 했다. 결국엔 상점 안을 가득 채운 쓰디쓴 약초 향만큼 점원의 입가에서 씁쓸한 맛이 베어 나왔다. 미묘한 차이를 내는 사내의 억양과 발음도 점원의 턱을 더 높이 들고 성대를 더 뻣뻣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점원이 원래의 친절한 자세로 돌아왔을 때에는 짙은 화장의 귀부인이 문의를 해 왔을 때였다.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점원은 좀 전과 달리 삐딱한 자세가 아니었다. 꽃이 수놓아진 연두색 드레스 차림의 귀부인은 사내의 행색을 보고 눈이 동그래지더니 되똑 두어 발자국 거리를 두었다. 씁쓸한 얼굴로 되돌아온 점원이 헛기침을 하면서 사내에게 실례한다는 손짓을 보내고 귀부인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내는 여러 번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고 문을 나선 상점이 십여 개가 넘었다. 그 중 몇 번은 쫓겨나기까지 했는데 훤히 속내가 드러나는 딱딱하고 어두운 표정 때문인 듯 했다. 사내는 이 도시에서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안면에 감정상태가 드러나는 유일한 성인인간인지도 몰랐다. 잠시 기다리라던 점원은 귀부인 곁에서 떠날 줄 몰랐고, 그러면서 더욱더 밝은 미소를 귀부인에게 지어 보였다. 기다리다 못한 사내가 점원을 불렀다. 점원은 사내를 힐금거렸지만 귀부인과의 대화로 시종일관했다.
  상점 문이 열린 건 그 때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노인이 입구 주변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왼쪽 다리를 절고 있는 노인 뒤로 망태가 같이 끌려오고 있다. 다리하나로 불편한 신체와 망태를 질질 끌고 오는 모습이 근천스러운 데가 있었다. 마침 귀부인이 볼 일을 마치고 통로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좁은 통로에서 노인이 옆으로 물러섰지만 귀부인은 질겁했다. 벽에 등을 바싹 붙인 채 혹여 노인의 누런 옷깃이나 특히 흙 묻은 망태에 닿을까 드레스 자락을 꼬옥 말아 쥐었다. 노인이 곁을 지나갈 때 부채 사이로 턱을 치켜 든 귀부인의 비스듬히 내리 깔아 진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이 닳은 신발로 망태를 끌며 지나가자 귀부인은 황망한 걸음을 재개 놀리며 사라졌다.
  노인이 가져온 망태 안에는 풀잎사귀들이 삐죽이 나와 있었는데 모두 채취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흙이 묻어나왔다. 바닥의 흙을 지적하며 점원이 눈을 홉뜨고는 약초꾼 노인에게 언성을 높였다. 점원의 목소리에서 반복되는 업무의 권태와 짜증이 묻어나왔다. 남긴 흙을 치운답시고 부산을 떠는 경비병들이 노인에게 다가가서 툴툴거렸다.
  노인에 대한 푸대접은 그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공기를 마시고 낯선 음식과 문화에 익숙해있기 때문이라는 사내의 경우와는 다른 듯 했다. 주기적인 수입이 발생하는 평탄하고 굴곡 없는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노인이 귀찮은 일상에 대한 표면적인 상징이라면, 사내의 예측불가능하고 비일상적인 질문공세는 평화로운 일상에 대한 크나큰 위협이자 도전이었기에 극도로 경계하는 듯 보였다.  
  점원들이 약초선별작업을 위해 소란을 떠는 사이 사내가 재차 문의사항을 전달했지만 점원은 간단하게 묵살해버렸다. 것도 모자라 점원은 사내를 수상쩍게 여겼는지 비번 중인 기사와 경비병들을 호출한 모양이다. 경비병들이 위협적인 태도로 윽박지르며 쫓아내는 사이 점원들과 약초를 다듬는 노인이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문을 나서기 전 노인을 돌아봤다. 오늘 납품한 삯을 제대로 못 받은 듯이 노인의 얼굴이 흐려진다. 사내가 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들이밀자 점원이 곁눈질로 힐긋 확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까맣게 탄 늙은 약초꾼의 망태 틈으로 흙 묻은 풀내음이 솔솔 뒤따랐다. 노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상점 앞에 놓인 수레였다. 뙤약볕에 몰려드는 벌레들을 쫓으며 노인이 떠날 채비를 한다. 노인이 한 걸음 내딛더니 이내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츰 수레바퀴살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고 수백 회를 회전하더니 돌연 멈춰 섰다.
  산비탈 부근에서 멈춰 선 노인이 잠시 한 숨을 돌리며 땀을 훔친다. 정오가 조금 안될 시간에 재차 바퀴가 움직였다. 노인이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려 용을 써보지만 수레바퀴살은 시계바늘처럼 더디게 옴짝거렸다.
  한동안 지지부진하던 수레바퀴에 갑자기 탄력이 붙었다. 평지마냥 수레가 힘 있게 굴러간다. 수레 뒤에서 곱절로 가중되는 힘에 노인이 홱 고개를 돌렸다. 사내였다. 사내를 확인하고도 노인은 앞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묵묵히 수레를 끌었다. 상점 안에서의 일을 기억한 듯이. 고갯마루에 이르러서야 수레가 멈췄다. 마을과 꽤 떨어진 판자 집이 거처인 듯 허름한 오두막 뒤편은 산길로 이어져 있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외국인인 모양이군.> 오두막에서 차를 내오는 노인이 옹알거렸다. 몇 개 남아있지 않은 이 덕분에 턱 선이 뭉개져 분명치 못한 발음이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구석에는 헤진 시트로 덮인 침대가 뎅그러니 놓여있고 아궁이와 굴뚝은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주전자를 올려놓으며 검버섯이 군데군데 핀 노인이 상점에서의 일을 상기시켰다. 사내가 점원들의 태도를 설명해 주자 노인이 껄껄 웃어댄다.
  <그네들은 그게 일상사요.> 돈이라는 것을 통용 하고 유일하게 그것을 삶의 목표와 판단기준으로 삼는 게 인간이라며 노인이 덧붙였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주머니가 채워지고, 그 중량이 묵직하게 늘어나고, 짤랑거리는 마찰음이 거칠어 갈수록 교만해지기 마련이라고 노인이 감회를 털어놨다. <왕궁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그럴 게요.> 노인은 사내가 점원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만하다는 듯이 그들의 권위적인 태도에 대한 배경을 밝혔다.    
  물이 끓는다. 햇살은 이제 테이블까지 다다랐다. 노인은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차를 건네준다. 알싸한 차향이 은근하게 베어 나왔다. <향이 좋군요.> 사내가 향을 음미하고 찻잔과 받침을 두 손으로 받치며 내려놓았다. <껄껄 차 잎을 잘 말리면 그리되지.> 노인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말했다. <보기와는 달리 차를 즐길 줄 아시는 구려.> 사람대하는 예절 외에 예의와 교양에 대해 배운 게 있다면 이것 뿐 일거라고 사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소?> 노인이 딱딱한 사내의 얼굴을 근심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노인이 빤히 응시하자 사내는 새삼 자신의 얼굴에 뭐가 묻은 것처럼 어루만졌다.
  <뭐가… 이상한가요?> 어리둥절한 그 모습이 우스운지 노인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을 휘휘 저으며 사과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게 아니라… 혹시 글라스 블러드핀(Gloss Bloodfin)이라고 들어보셨소? 손가락보다 조금 덜 되는 길이에, 해파리처럼 속이 비칠 듯이 투명한 몸체와 빨간 꼬리지느러미가 인상적인 물고기인데…. 몸체를 들여다보면 먹이를 어떻게 먹고 어떻게 소화시키는지 다 보이는 신기한 물고기요. 당신 얼굴을 보니 생각나는 구려. 허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하는 사내에게 노인은 이 열대어처럼 속을 다 보여서는 결코 이로울 게 없다고 충고했다.
  사내가 노인의 다리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오자 노인은 과거에 사고를 당해서 그러노라 고 토로하는 한편, 그 때문에 약초 상 자격을 박탈당했다며 구체적인 언급은 회피했다. 사내의 측은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노인이 지그시 물었다.
  <헌데… 날 따라온 까닭이 궁금하구먼.>
  사내가 품에서 블로우 건의 암기를 꺼내더니 나지아 사냥꾼들이 쓰는 강력한 독약을 찾는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가 있다는 노인은 ‘사람을 한순간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 한가’ 라는 물음에,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침통한 사내에게 노인이 사연을 말해보라고 한다. <여기에 사용된 독물을 찾고 있습니다.> 수도의 약초상점들은 모두 돌아다녔는데 일단 이 건에 사용하는 독물들을 조사하면 사용자의 대략적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고 사내는 털어놨다.  
  <그런 식으로는 어려울 거요.>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지아 산맥 부근의 독초나 독물들도 수종이 넘고, 또 수천 킬로나 떨어져 있는데다 워낙 오지라 찾아가기도 쉽지가 않다는 점, 게다가 사람을 즉시 사망에 이를 정도의 독물은 이곳에도 유통되고 있다면서 그 모든 종류를 조사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노인의 회의적인 답변이었다. 사내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이 정도나 적극적인걸 보니 사연이 깊은가 보구먼.> 노인이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유일한 단서죠.>
  노인은 반색을 하며 침을 가까이 당긴다. <자넨 그 독물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나지아들의 독물이 아니네. 그 지방엔 그 정도로 강한 독물도 없거니와 그들의 지식과 기술로는 가공할 수 도 없지.> 그러면서 노인은 덧붙였다.
  <이곳은 약초 생산과 가공으로 유명한 나라이자 그 관리가 엄격히 되는 곳일세. 약초거래대장은 수도의 왕궁과 백작의 별관에 따로 보관하도록 되어 있어, 국왕의 허가를 받아 국가의 감시를 받으며 운영되는 게 약초상이고…. 그 중 가공된 약물은 엄중관리를 받네. 그래서 아까 자네가 봤듯이 약초상점에는 파견된 병사들과 기사들이 경비를 서는 게야….
  자네는 외국인이라 잘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는 산에서 나는 여러 약초를 가공하여 의약이나 시약, 포션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되파는 걸로 먹고 산다네. 의약, 시약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의약 대국이지. 자네가 여태껏 돌아본 단 몇 군데뿐인 상점에 가공된 약품은 없을 걸세…. 있다고 해도 위험성이 높은 몇몇 질병에 대한 빠른 처방이 필요한 약물만 보관하고 있는 것이고…. 록사나 뿌리 같은 극독이나 위험물들만 왕궁에서 보관하고 있지….>  
  노인이 바늘을 들고 이리 저리 살펴보더니 코에 슥 갖다 댄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인이 재차 코를 대어 보더니 말했다. <흠, 희미하긴 하지만…, 투구꽃 향기 같기도 하고…….> 사내의 얼굴에 아주 잠깐 화색이 돌았다. 노인이 암기를 들고 부엌으로 가더니 잠시 후, 푸른색 용액이 든 물 컵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약초꾼 노인은 암기에 남아있던 향이 투구 꽃인지의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사내에게 다른 약물로 반응시켜 변색된 용액의 색깔을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내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용액이 보랏빛으로 물들면 투구 꽃이 틀림없다고 노인은 재차 주지시켜줬다. 긴장된 사내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노인은 암기를 유리잔 속에 떨어뜨렸다.
  꼭 새파란 바닷물같이 퍼런 용액 속으로 바늘이 찬찬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물체의 주위로 붉은 실타래가 넘실넘실 풀어헤쳐졌다. 곧이어,
  번짐 현상이 일어났다.


  와아아-
  사내가 모퉁이를 돌아서자 밀려오는 대화의 파도 속에서 그간 밀초로 귀를 단단히 막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수많은 대화 속에서 얽히고설킨 낱말의 홍수였다 라고 누구나 그렇게 고백할 것이다. 더불어 시야를 꽉 메운 인파의 파도를 경험하게 될 게 분명하다. 이 특별한 파도는 자력으로 소음을 토해내는 괴상한 재주가 있었다. 쉴 사이 없이 꽥꽥거리며 열고 닫히는 상층부의 동굴에서는 저마다 다른 소리와 높낮이를 발산하는데, 때로는 하얀 석순과 종유석이 부딪쳐 석주를 형성 할 때면 둔탁한 마찰음을 내거나 구수한 물방울을 뱉어내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간판에는 ‘오스토르’ 라고 명시되어 있는 꽤 큰 규모의 시장이었다. 시끌벅적한 대로에 위치한 노천시장에는 쥐도 많은 모양이지만,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은 유형의 범죄자들도 들끓는 듯 했다. 지극히 일방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철저히 개인적 이익을 고수하는 일방통행옹호자들은 항상 쫓겨 다니고 있었다. 물건을 훔치고 도난당한, 저마다의 생존권이 걸린 필사의 도주와 추격을 바라보면서 사내가 혀를 차며 인상을 찡그렸다.
  약초꾼 노인은 투구 꽃이 사용되었다면 필시 허가증이 발급되었을 거라며, 사내에게 코메스 백작의 성(成)을 알려주었다. 노인이 언급하기로 말이 성이지 사실 큰 저택에 불과하다는 백작의 고택이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투구 꽃이 워낙 극독이라 판매도 잘 되지 않으며, 허가가 거의 떨어지지 어려운 독물이니 찾기 쉬울 거라고 했다. 사내가 사례금으로 20에퀴쯤 지불할 용의를 보였지만 한사코 싫다는 노인의 갈라지고 부르튼 손을 보곤 억지로 쑤셔 넣어주고 나온 게 조금 전이었다.
  ‘마르쉘의 보금자리=>’
  대로 옆 골목길의 주소를 나타내는 표지판 앞에서 사내가 대뜸 멈춰 선다. 노천 시장에서 성으로 방향을 잡는 듯 보였던 사내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사내가 대로 옆 골목으로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 갈래로 뻗은 갈림길에 다다랐다. ‘마르쉘의 보금자리 1번가 32번지’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알림판을 향해 사내가 턱밑을 쓰다듬으며 한참동안 빤히 응시했다. 큰 눈을 끔벅이며 응시하던 사내가 조그만 탄성의 코웃음을 보냈다.
  네 개의 갈림길 중에서 사내는 1번째 골목길로 찾아들어갔다. 주택가 너머 노천 시장의 소음이 지붕을 타고 스멀스멀 넘어왔다. 이윽고 나타난 세 개의 갈림길에서 사내는 3번째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사내는 32번지를 지나고 있었다. 처음 갈림길은 네 사람이 지날 수 있는 폭이었지만, 들어가면 갈수록 다소 좁아졌고, 미궁처럼 지그재그로 뻗은 골목길은 직선이 없었다.
  미묘하게 각도가 조금씩 틀어진 길은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고, 오차를 불러일으킬 만해 곧 방향감각을 상실할 정도였다. 이번엔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2번째 길로 방향을 전환했다. 어둡게 그늘진 골목 안에선 사내의 발소리만 울렸다. 빼곡하고 깊숙한 이 골목길에서는 대로의 소음도 무의미했다. 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폭은 이내 막다른 길로 이어졌다.
  사내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좌우를 살핀다. 사내의 옆으로 한 사람이 모로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협소한, 길이라기보다 틈새에 가까운 그곳을 겨우 비집고 들어가자 조그마한 나무문이 단출하게 붙어 있다.
  겨우 운신도 하기 힘든 이 틈새에서는 양 쪽에서 공격이라도 받는 날에는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정도로 좁았다. 사내는 이런 공간에서 통상적이고 정상적인 원리로 문이 안에서 밖으로 열리리라는, 그렇게 열려는 멍청한 시도를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사내는 문고리를 돌리고 앞으로 밀었다.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지만 문은 꿈쩍도 안했다.
  사내가 멈칫한다. 나무문을 두들기자 놀랍게도 둔탁하게 울린다. 내부가 비어 있지 않았다. 사내가 의아해 하는 동안 왼쪽 위로 나 있는 커다란 창이 열리더니 조용히 사다리가 내려온다. 사내는 어이가 없는지 눈매를 살짝 찡그린다. 협소한 틈새로 인해 밖에서 안으로 열리는 창문이 유난히 큰 점을, 사내가 막 창문으로 들어설 때 알 수 있었다.
  내부는 컴컴했다. 어스름한 윤곽을 보이며 앞서가는 안내자는 사내의 앞에서 말 한마디 없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몇 번 어두운 모퉁이를 돌았지만 골목길과 마찬가지로 각도가 미묘하게 어긋나있었다. 안내자가 멈춰 섰다. 맹목적으로 뒤따르던 사내가 제동을 걸었다. 그가 옆으로 몸을 돌리자 자그마한 협탁 뒤로 수납인이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내자는 그 옆에 서서 사내를 관찰하는 한편, 사내를 감시하려는 의도인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 기만했겠군. 루이의 소개로 왔소.> 사내가 어둠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수납인을 향해 내뱉었다. 요구사항을 적은 종이도 함께 건넸다. <준비해주시오. 지금 즉시.> 사내가 딱딱하게 말했다. <알겠소.> 대답은 신속하게 돌아왔다.
  <40에퀴. 위험성을 감안해서…….> 수납인이 가격을 책정했다. <30에퀴!> 사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은 조용했다. 대치는 잠시 동안 이어졌다. 침묵으로 거절을 표했던 수납인의 태도에 마침내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은 정말 못 말리겠군. 하지만 물건은 깨끗해야 하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한숨 섞인 어조로 사내가 마지못해 승낙하자, 수납인의 허연 이가 암흑 속에서 드러났다.
  깜깜한 저편에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 손짓한다. 사내가 따라나선 방향은 온 길과는 반대방향이다. 되돌아가지 않고 구부렁한 통로를 이리저리 꺾는다. 사내가 의아한 듯 묻는다.
  <이 길이 맞는 거요?> 안내자가 어둠속에서 능숙하게 몸을 틀면서 조그맣게 웃었다. 안내자의 두 눈에서 깨알만한 반사광과 허연 치아가 간신히 보였다. 사내는 그 유일한 순백을 따라가자 이윽고 문의 사개로 새어 나오는 하얀빛 자락을 볼 수 있었다. 앞서 가던 안내인은 인사와 함께 봉투를 전해주고는 어둠 속으로 빠져나갔다.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었다. 사내가 문으로 다가섰다.
  새하얀 광선이 사내를 순식간에 에워쌌다. 사내는 손을 올려 다급히 빛을 가린다. 눈을 질근 감았다가 뜬 사내가 비로소 앞을 응시했다. 노천시장 ‘오스토르’ 였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갈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과 아까와 똑같은 흥청망청한 대로의 ‘오스토르’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지만 문은 어느새 굳게 닫혀있다. 사내는 곧 한낮의 인파 속에 묻혀갔다.

    
  고운 양털 카펫이 깔린 복도에 대기 줄이 가득했다. 폭신한 카펫덕분에 구두소리는 경감되어 부산하진 않았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로 복작였다. 눈썹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뛰어난 솜씨로 그려진 저택주인들의 초상화가 통로의 벽면을 장식했다.
  명예로운 작위를 가진 역대의 주인들은 대부호답게 근엄한 자태와 표정을 갖추고 있었다. 정복을 입고 눈을 살짝 아래로 치켜 뜬 커다란 전신 초상화는, 보는 이의 눈높이보다 위에 걸려 있어 그 의도를 짐작케 했다.
  붉은 색 실크 천에 쌓인 상자를 든 청년의 차례였다. 청년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방문자들을 내려다보는 듯이 생동감 있는 초상화들 사이에서 순번을 유지하던 대기자들이 웅성거렸다.
  한 남자가 대기 열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접수자에게 걸어가서 두어 장의 간단한 확인절차만 마치고 대기실로 바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접수자는 방금 전 외국의 어느 저명한 관리의 인장이 찍힌 알현허가증을 보여주며 볼멘소리로 나지막이 항의하는 대기자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대기실에 있던 사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백작의 알현실에서 나온 청년은 빈손이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백작에게 다음 손님을 아뢰었다. 문이 닫히자 복도에서 들리던 불만에 가득 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편에 앉아 있는 중년남성이 앉으라는 말 대신에 손짓으로 의자를 가리킨다. 붉은 색 천으로 둘러진 상자는 거기에, 반쯤 풀어진 채로 놓여 있었다. 백작은 방금 들어온 선물상자(?)를 들여다보고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내는 백작의 손가락에 끼워진 큼지막한 다이아가 박힌 반지에 주목하고 있었다. 다면체의 귀금속에 투영된 중년남성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여러 모습으로 비춰졌다.
  백작의 알현실은 고요했다. 정갈하게 손질된 정복차림의 베르그 데 요트문레크 백작은 사내를 의식해서인지 방문서  에 적힌 사내의 간략한 신상명세와 방문용건을 막 훑어보는 중이었다. 방안의 창문으로 사내를 애먹게 했던 요트문레크 가의 방대한 정원과 본관 앞의 자그마한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사내가 저택의 대문에서 보았던 불을 뿜는 용을 역동적으로 조각한 작품이, 문양으로 승화되어 백작의 정복위에 세심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아울러 사내는 본관 앞에서 보았던 수많은 방의 창문들을 떠올릴 것이다.
  <투구꽃 판매 허가서를 열람하고 싶… 으시다고?> 외국인임을 고려했는지 백작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사내가 방 저편에 쌓여있는 상자 더미들을 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요?> 턱을 슬며시 들고 눈을 아래로 치뜨는 백작은 복도의 초상화들이 주는 분위기와 비슷했다. <예?> 사내는 당황했는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애초 사내의 대답이나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백작은 말없이 장부를 뒤적거렸다. <내 기억에는 그런 전례가 없소…. 가만, 전임자의 기록을 보니 30년쯤 전에 있었군.> 안면에 딱딱하게 중량을 더해가던 사내가 경악했다.
  <그럴 리가!… 불과 일 년이나 몇 달 사이에 판매 되었을 겁니다. 직접 확인한 결괍니다!> 밑도 끝도 없다는 듯이 백작이 소리쳤다. <무슨 소리요! 당신! 대체 뭘 봤다는 거요? 승인된 기록이 없거늘….> 사내는 아랑곳 않고 외쳤다. <시약이 보랏빛으로 변하는 걸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다!> 백작이 손님의 무례한 태도에 눈을 치켜뜨고는 곧 무서운 불호령을 내릴 기세였으나, 사내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를 감지했는지 백작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곤조곤 물었다. <혹… 당신네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오?> <아닙니다.> 사내가 한숨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르브레에서 벌어졌다는 거요?…. 앞 뒤 사정을 말해보시오!>
  <그건!…….> 사내의 동공이 좌우로 움직이며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작이 재차 다그쳤지만 사내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지 그 허가서를 보기 만 하면 되는 것인데… 틀렸군요.>
  백작이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당신은 르브레 사람도 아니잖소? 이런 추천장이라도 지나치면 외국에 대한 간섭이오! 약물에 대한 허가는 데 지크리트 후작께서 하시는 것이고 본관은 발급승인만 할 뿐이오. 당장 나가시오!>
  왕궁에 소속된 약물을 가공하는 의사들은 물론 그 비법의 관리에도 엄격하다고, 그런 유출은 있을 수 없다고 백작은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대단히 불쾌해했다. 사내를 구금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가했으나 그냥 돌려보내노라 며 짐짓 선처를 베푸는 아량도 보였다. 사내는 어디까지나 이방인 이였으니까. 아마도 데 요트문레크 백작이 백국을 다스리고 있었다면 사내는 오늘 지는 해를 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방문을 열고 사내를 밀쳐낸 시종이 백작의 호된 질책 때문인지 눈을 흘긴다. 사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 방문자들은 또 다시 술렁였다.
  <저 영감, 다시 허가를 받으려고 왔구먼.> <밀매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장사를 하려는 건지 쯧쯧.> <백작의 먼 친척뻘이라는군.> <저게 다 저 노인네가 백작 놈한테 바친 거란 말이야.> <저 다리는 아직도 저러네.> <저렇게 동정이라도 유발해야 먹고살게 아닌가. 숨겨놓은 재산도 많을 텐데… 지독한 노친네야.> <컴컴한 지하에 사는 난쟁이마냥 흉측하고 속이 시커멓지.>
  방문자들은 약초 상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 막 걸어오고 있는 노인을 향해 악의적인 험담을 늘어놓았다. 거만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노인이 자신을 향해 시기와 경멸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향해 실룩 비웃음을 날리자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다. 그 모습이 사내의 주의를 끌었다.
  노인이 그들에게 경멸의 미소를 보내고 고개를 돌렸을 때 사내의 시선과 마주쳤다. 약초꾼 노인이다. 사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지 못했다. 약초꾼 노인은 뜨악한 눈이다. 사내는 익히 알고 있던, 믿었던 사실에 대한 부정의 증거라도 목도한 양 놀라움과 불신이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내가 우두망찰하는 사이 다리를 절지 않는 약초꾼 노인은 안정된 걸음으로 지나갔다. 짐짓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애써 외면하는 식으로 노인은 인사를 대신했다. 노인이 백작에게 가지고 온 꾸러미가 한 아름이었다.
  그런 노인을 보고 사내는 한참 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을 때 상인들의 웅성거리고 나서야 사내는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마구 구겨진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은 사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범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전으로 집무실로 들어갔던 사내의 이력이 작용했는지 서로 환심을 사려 애썼다. 청탁의 언사는 대단했다. 일일이 부탁과 돈을 거절하면서- 그 중에는 몇 백 에퀴나 되는 전표를 사내의 주머니에 마구 쑤셔놓는 치들도 있었다. -사내는 복도를 나서기 직전 자신을 억세게 붙잡는 한 상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들어오세요.>
  사내는 후문을 지키는 근위병들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시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망루를 지나 해자로 들어서니 ‘빠끔’ 검은 공간을 드러낸 성 탑의 무수한 석궁 안이 쏘아보는 듯 했다.
  사내의 남루한 행색 때문인지 앞으로 만나게 될 인물의 채신 때문인지 시종은 후문의 옆으로 난 작은 쪽문을 가로질렀다. 외벽을 넘어서자 돌을 빼곡히 쌓아올린 성의 내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의 외곽에 마련된 자그마한 별관으로 안내된 사내는 곧 대기실로 들어섰다. 대기실의 고풍스러운 탁자에서 하인은 사내의 행색을 보고는 비아냥거렸다.
  <만나기 어려울 거요.> 하인은 사내의 알현목적을 묻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내가 어디 머물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캐물었다. 싫은 내색 없이 성실한 답변을 하고서야 만족 시켰는지 하인은 잠깐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하인이 데 펠트로 백작께옵서 부재중이라고 알려왔을 때, 그 고약한 의도를 짐작한 듯 사내는 인상한번 안 쓰고 전서를 보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했다. <이 서명이면 될 겁니다.> 사내가 간단히 ‘아스타를로아’ 라고 휘갈겨 쓴 종이를 건넸다. 깐깐하고 오만한 하인은 당황했는지 그제야 사태를 짐작하고 편지를 들고 황망히 사라졌다.  
  조금 지나지 않아 화랑을 헐레벌떡 뛰어온 젊은 청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사내와 몇 마디 주고받은 후 건물로 사라졌다. 그들이 알현실로 들어설 때 청년이 뭐라고 둘러댔다. 경비를 서던 기사가 곁눈으로 사내를 관찰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검상을 입은 듯, 곧게 뻗은 콧날에 비스듬히 내려앉은 갈색 선이 인상적이었다. 청년은 밖의 기사를 의식해서인지 사내를 상대적으로 문에서 멀리 떨어진 서재로 데리고 갔다.  
  내실엔 은은한 향기로 그득했다. 멀리 동방에서 들여온 방향이라고 청년이 덧붙였다. 청년의 말끔한 의복과 잘 정리된 머리는 사내의 너저분한 행색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사내가 청년을 ‘쟌센’ 이라고 가볍게 칭하는 걸로 봐서 동등한 관계라고 봐야겠지만, 청년은 사내를 존대하는 걸로 보아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진 않는군.> 사내가 스무 살이 겨우 될법한 쟌센을 가까이서 보자 나온 소감이었다. <그 많은 세월을 단숨에 계산하시다니 명석하시군요. 귀도 여전하시고…….> 쟌센이 손가락을 놀려 대충 셈을 해보며 말했다. 그러곤 덧붙였다.
  <정확히 삼십 년 만이군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계속 쟌센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저히 육십이 다 된 나이라곤 믿기 어려운…… 아니 마법(魔法)인가? 대단하군! 그 정도까지 깨우치다니…….> 사내가 새삼 쟌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눈가나 이마의 자글한 주름이나 거친 피부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쟌센이 그런 사내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당신도 다를 바 없는 데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갑작스런 침묵이 흘렀다. 둘은 오랜 해후로 인사말을 건네며 즐거운 감상에 빠질 법도 하건만, 꼭 필요한 시점에 웃음의 공감대를 찾을 수 없어 어색한 적요만이 심지처럼 박혔다.  
  <참, 오실리아 산맥 부근에 머물렀다고 하셨죠?> 쟌센이 힘겹게 말을 잇는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쟌센이 최근 오실리아 산맥 부근의 다툼문제를 언급했다. 바로 옆에서 보고 들은 사내의 주관적인 생생한 체험과 알려진 대부분의 사실들을 취합한 쟌센의 객관적인 정보가 합쳐져 가장 신뢰할만한 정황을 도출해냈다. 그런 식으로 서로 주고받다가 주변정세로 화제가 넘어갔다. 시골에서 살았다던 사내와는 달리 쟌센은 여러 소식에 능통했다.
  쟌센의 말에 따르면 남으로는 마로덴 왕국이 신흥강국으로 부상하여 광대한 평야지대를 흡수하고 있고, 머나먼 서쪽 사막에서는 연합된 부족과 마을들이 세력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듣기로는 마법사들을 모아 사막에서 무언가 실험을 한다는 군요….> 지난 삼십 년 동안 세상사에 까마득했던 사내의 요청으로 쟌센의 입에서는 이야기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테로사 평원은 제후들의 내전으로 치열하지만 조만간 스웨인 공작에 의해 결말이 날 듯한 조짐을 보이고, 카스티오 산맥 서쪽의 여러 국가들은 서로 다투고 있는데 특히 투르 왕국과 발렌시노 공국이 크게 충돌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그 지역은 넓은 고헨 평원을 차지하려는 전쟁이죠.> 쟌센은 이곳 동쪽에서 함디르 공국이 가장 강성하지만 아직 개척하지 못한 땅이 많아서 누가 그걸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덧붙였다. <난세입니다. 열세이거나 조금이라도 위태하게 보이면 곧 주변국가의 침략을 부르는 현실이죠.> 쟌센이 밝지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내는 묵묵히 하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경청하고 있었는데 그 또한 쟌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쟌센이 그런 사내를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탐욕과 다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쟌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난로 앞으로 걸어가 그 위에 걸린 그림 앞에 멈춰 섰다. 커다란 전쟁기록화였다.
  쟌센의 말에 따르면 거대 제국이 세워질 무렵 새롭게 건설된 도시에는 주민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제국을 일으킨 강력한 군대의 군인들을 반드시 새로운 수도에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다. 군인들이 정착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무력에 기반을 둔 제국의 영토를 유지 할 수 없을 테니까. 제국의 황제는 꾀를 냈다. 국내에서 여자를 공출해오는 건 자칫 반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으니, 국외의 다른 도시의 아내들을 훔쳐오자는 것이었다.
  결국 변경의 부족 남자들을 화친을 핑계로 연회에 초청해 그들의 도시를 비우게 한 다음, 군인들이 남편이 없는 집으로 들어가 그들의 아내를 약탈해왔다. 뒤늦게 분개한 부족의 남자들은 힘을 길러 제국의 수도를 침공했고, 도시 곳곳에서 그들의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그들의 아내가 아니었다. 새로운 남편을 두고 이미 아이를 여럿 낳아 부유한 제국의 수도에서 유복하게 살고 있었다고 쟌센이 말했다.  
  그즈음에서 사내는 고개를 돌려 그림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내를 찾으러 온 남자들과 제국의 군인들이 도시의 광장에서 악귀 같은 형상으로 뒤엉켜 있었다. 유혈이 낭자했다. 시뻘건 화염이 곳곳에서 묘사됐다. 이미 늙어버린 한 군인은 아내의 과거 남편에게 짓밟히고 있었고 그들의 아이들은 땅바닥을 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거기에 두 남자를 남편으로 둔 아내는 서로를 뜯어 말리고 있었다. 악의에 가득 찬 부족남자들과 군인들의 얼굴을, 두 남편 사이에서 절망과 고뇌에 빠진 공동의 아내의 표정을, 본능적으로 울음을 터트려 모성을 찾는 아이들의 몸짓을 사내는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 사내를 보고 쟌센이 중얼거렸다. <전쟁만큼 인간을 잘 보여주는 예가 없겠죠.> 쟌센은 벽난로 선반위의 조각상을 만지며 또 다른 예를 들었다. 흔히 왕좌의 사연이 그렇듯 조각으로 남겨진 그 위대한 인물은 정적이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공왕에 등극한 왕이었다. 또한 왕좌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외척들과 공신들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강력한 왕가를 세운이라고 호평했다. 반면 사내는 회의적이다. 고개를 절레 흔들며 형제들을 살해 할 수 있다는 데에 대해, 그들을 진짜 피붙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진저리 쳤다. 형제끼리 말도 안 되는 행위라고 중얼거리는 사내에게 인간은 본래 부정적 이면이 더 큰 법이라며 쟌센이 동조하며 말을 더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의 지자나 현자들도 모습을 감췄을 겁니다. 세상에 환멸을 느껴 은둔했을 테죠.>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을 그렇게 편협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너와 우리 옛 동료들이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내의 의견은 또 다시 쟌센과 엇갈렸다.
  <그건 그렇고… 그 칼은 아직도 날이 서 있는 모양이군요.> 사내가 천에 쌓인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 중 하나를 어루만지더니 이제 마법이 신통치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 옆의 다른 하나로 눈을 돌리더니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천을 뒤적이자 둥근 구 모양의 장식이 단촐 하게 달린 칼의 힐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둘에게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내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고 쟌센도 애써 시선을 지우지 못했다.
  <돈 코라레스…… 의 것이군요.> 복잡한 시선으로 쟌센이 말했다. <싸구려 칼이지.> 사내가 씁쓸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죠.> 쟌센이 응수했다. 그 순간, 사내의 씁쓸하고 희미한 미소가 쟌센에게서도 떠올랐다. 옛 이야기를 회상할 때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둘은 서로를 경쟁적으로 전염시켜 흡사 거울을 보는 듯 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항시 떠올라 있는 사내는 달무리가 낀 뿌연 달처럼, 애써 밝게 보이려는 쟌센은 햇무리에 가려진 눈부시지 않는 태양처럼, 둘은 빛날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더 이상 공감 할 대상이 없다는 듯이.
  찰나의 쓴웃음 뒤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사내의 얼굴도 왠지 어두웠고 쟌센도 근심어린 얼굴로 사내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양쪽 모두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사내는 도자기로 장식된 탁자로 눈길을 돌리면서 그늘지기 시작한 쟌센의 얼굴을 힐금거렸고, 사내의 시선이 지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쟌센은 먹구름이 드리운 사내의 표정을 살피다, 사내의 눈길이 되돌아오면 시선을 책장으로 옮겼다.
  사내가 실내의 소품들과 천장의 장식들을 모두 훑는 동안 쟌센은 방안의 가구들과 카펫의 무늬와 패턴을 분주히 관찰했다. 점점 시선을 두는 반경이 좁아진다. 이제 상대의 옷이나 신체부위로 시선이 옮겨 다녔다. 그러면서 서로의 눈길을 피하는 속도도 더 가팔라진다. 옷자락에서 얼굴로, 수심이 가득 드리운 안면에서 깍지 낀 손으로 둘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인다.
  지독한 사선을 긋던 서로의 시선이 점차 평행에 가까워지다 겹쳐졌다. 충돌의 스파크는 없었다. 서로의 시선만이 맹렬히 한 점에서 얽히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의 관찰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듯이 두 눈으로 깊은 수렴과 무한한 발산을 병행하고 있었다. 굳이 눈동자를 살피려 하지 않아도 사내의 안면지도에서 감정의 기호를 속속히 발견한 듯 쟌센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요.>
  사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쟌센이 일어서더니 포도주가 진열된 보관대로 걸음을 옮겼다. 따로 열쇠를 밀어 넣어야 하는 깊숙한 곳에서 고풍스러운 병을 꺼내왔다. 쟌센이 밀봉을 풀자 그윽한 포도주 향이 쏟아져 나왔다.
  사내는 쟌센이 잔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널 먼저 찾아오려 했었지.> 원래 사내는 쟌센을 먼저 찾아오려 했지만, 자신이 의도치 않은 위험에 처하게 될까 염려하여 홀로 조사했다고 고백했다. 쟌센은 밖으로 나가 문을 걸어 잠그고 서재의 문에도 빗장을 질렀다. 쟌센은 극도로 남의 이목을 염려하고 있었다. 하인이 차를 내올 때도 손수 받아 오는 등 문 밖의 기사에게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미 항간에 소문과 정황은 인접국의 짓으로 밝혀졌더군.> 사내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쟌센이 병을 들어올렸다. <요 몇 년간 국경에서 잦은 충돌이 있어 났었죠. 적국의 공작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시해 당하고 나서 벌어진 일입니다.>
  잔이 다시 가득 찬다. 선명한 선홍빛이 인상적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어떤 단서나 증거도 없이 깨끗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억마법이나 탐지마법도 통하지 않아.> 쟌센이 잔에서 입을 떼고 물었다. <정령들도 별 소용이 없었겠군요.> 사내는 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말문을 이었다. <마치 깨끗이 지워진 것처럼….>
  <난… 코라레스의 무덤을 파헤치려 했었어.> 쟌센의 눈이 함지박 만하게 커졌다. <설마… 그런!> 사내가 잔을 기울이며 빠르게 내뱉었다. <물론 도중에 그만뒀지만.> 취기가 오른 사내의 얼굴이 불그스름하다. 쟌센이 독한 술이라며 과음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배후는 적국의 크바지르 공작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만간… 마로니카와의 전면전이 일어날 겁니다.> 쟌센의 말에도 사내는 도통 관심이 없는지 술잔만 바라보며 이리저리 돌려 댔다.
  이윽고 술잔을 내려놓더니 난데없이 고풍스러운 장검을 탁자에 탁 올려놨다. 묵직한 저음을 토해내며 우아하면서 감각적인 자태가 드러났다. 사내가 힐트의 둥근 장식을 돌려 빼고 있었다. 빈 손잡이 공간에서 나온 가느다란 암기를 사내가 눈가로 들어올린다. <그, 그게 뭡니까?> 쟌센이 놀라 물어왔다. <무얼 말하는 거지? 이 칼? 아니면 이 바늘인가? 전자라면 절친한 돈 코라레스의 유품이고 후자는….>
  사내는 코라레스의 유품에서 블로우 건의 암기를 찾아낸 연유와 그 단서로 조사해온 그동안의 경과를 들려줬다. <단서가 남아있다면 오히려 그걸 의심해봐야 할 만큼 완벽해. 이 암기는 제외하고….> 쟌센이 다급히 말했다. <오히려 이게 우릴 기만하기 위한 함정일수도 있습니다.> <난 마로니카에도 들렀었어. 그 나라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봐서는 도저히 그런 일을 벌일 만큼 한가하진 않더군.>
  술은 이제 거진 비워져 있었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말이 없던 쟌센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쟌센은 사내의 얼굴을 힐긋 거리며 술병과 바늘을 번갈아 쳐다봤다. 사내가 고개를 들자 쟌센과 눈이 마주쳤다. 쟌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 드리죠…. 이미 짐작하셨다시피 그건 마로니카 짓이 아닙니다.> 사내가 눈을 치켜뜬다. <국왕파와 공작파로 나누어 진 국내의 권력 암투였죠.> 쟌센은 근래 들어 국외로 나가있던 중에 화를 모면했다고 털어놨다. 살아남았다고 안도할 수도 없는 쟌센을 보며 사내는 분통을 터트렸다.
  <당신에게 진작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쟌센의 어조가 점점 떨리고 있었다. 사내가 격하게 내뱉었다. <대외적인 발표와는 달리 이건 독살이야!> <그들일 겁니다! 그들이 이 르브레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요.> 그들의 방해로 홀로 조사하기가 여간 위험하고 힘든 게 아니었다며 흐느끼는 쟌센이 몸을 부르르 떤다.
  잠시 후 쟌센이 조금 안정되자 사내는 투구 꽃의 산지가 가깝고 또 그 암살범들이 이곳에서 무기를 구입했으므로 독물구입처도 이곳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을 입증하려면… 그게 필요해.> 사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가서를 볼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사내를 보고 쟌센은 난색을 표했다. <허가서 같은 명백한 증거를 그들이 그대로 두었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정식으로 독물을 구한 게 아닐 겁니다!>
  사내는 단호했다. <아니, 그 독은 쉽게 못 구해. 구한다고 해도 아무나 가공할 수 없는 물건이야.> <허가 담당 백작 역시 내부 공모자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어차피 저는 그럴 권한도 없습니다.> 쟌센이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왕을 알현하면 안 되겠느냐?> 쟌센은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덕택에 근처에도 갈 수 없어요. 게다가 저도 감시받는 입장이라….>
  <네가 안 된다면 나는 가능하겠지. 어차피 방법은 하나야. 저 궁의 내벽을 뛰어넘을 수밖에!> 사내의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놀란 쟌센이 극구 만류한다. <안됩니다! 당신이라 해도 혼자 궁 안으로 들어간다면 온전치 못 할 겁니다.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
  사내도 암담한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등 이라는 가면이면에는 그간의 억압과 인내에 금세 폭발하려는 폭풍 같은 감정들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너무나 큰 폭풍우라 주체 스스로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거기엔 폭발적이고 거친 충동에 휩싸이게 만든 현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가 만든 가면으로의 현실도피의 의도 또한 포함될 거였다. 쟌센에 비해 사내는 시종일관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다. 쟌센이 복잡한 얼굴로 가까스로 입을 뗐다.
  <지금 그들을 건드려선 안 됩니다. 섣불리 움직이면 우리 둘 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몰라요. 자칫… 르브레 전체를 상대로 싸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내가 쟌센을 바라봤을 때 그는 두려운 듯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자리도 아무 권한이 없는 작윕니다. 그들이 한 장의 문서 하나로 허울뿐인 자리로 만들어버렸죠. 그들의 힘은 칼과 마법뿐만이 아닙니다. 펜과 잉크와 허가 인장이 찍힌 한 장의 종이 나부랭이만으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어요!>
  <그들이 저를 왜 살려두는지 아십니까? 요행히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깨끗이 청소를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저를 살려두고 있습니다. 그 일이… 정치적인 암투로 보이는 걸 원치 않아서이고 그들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게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혐의의 면제부인 셈이죠. 나 하나를 살려둠으로써…….>
  밖의 기사를 가리키며 자신도 언제 제거될지 모른다며 불안에 떠는 쟌센의 물기 젖은 동공을 사내는 그저 묵묵히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쟌센은 이제 당신도 위급한 상황이니 몸조심 하라고 당부했다. 서로 안타까운 시선을 교환하며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가 문을 나설 때 쟌센이 말했다.
  <저는 당신마저 잃을 용기는 없습니다.>    



1)칼의 손잡이 부분을 이르는 명칭. 다시 가드, 폼멜, 그립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2)검의 손잡이 끝을 지칭. 둥그런 모양이나 각진 모양의 형태로 근접전에서 상대를 가격하거나 장식용으로 쓰임.
3)속이 빈 긴 나무대롱 속에 침을 삽입하고 숨을 내뿜어 그 반발력으로 침을 발사하는 무기.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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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담 11.11.26 21:52 댓글 수정 삭제
    시스템상으로 본문이 수정이 안되네요. 본문에 각주번호가 없는데 할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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