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안이 골치 아픈 일들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무작정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앞에 절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 서야 그는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방 앞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방 앞에 듬직하게 서 있는 일곱 명의 병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수안을 보자,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수안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헤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가구나 장식 도구 없이 삭막할 정도로 휑덩그렁했다. 방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는데, 기본적인 사무를 볼 수 있는 집무실 성격의 방과 편히 쉴 수 있는 개인용 방이었다. 수안이 자동문을 통해 들어선 방은 집무실 성격이 짙은 방이었다. 일을 볼 수 있는 책상과 머리끝까지 받혀주는 등받이를 갖춘 의자만이 적막한 방안을 그나마 채워주고 있었다. 깔끔한 외모와는 달리 그의 방은 제대로 청소해 두지 않은 듯 바닥에 여기저기 종이나부랭이들이 널려 있었다.

"청소 담당부원이 아직 오지 않았나 보군."

수안도 약간 지저분한 방 풍경이 창피했던지 헛기침을 한 번하고는 얼른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일곱 명의 듬직한 병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고요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한 방안을 둘러보고는 기가 찬 표정을 내비쳤다.

"자, 자네들이 무슨 일로 내 방까지 온 건지 알고 있나?"

"옛!"

수안이 묻자, 모두들 우렁차게 답했다.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많은 동료들이 이 빌어먹을 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수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들 숙연해 졌다."지금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이 끔찍한 땅, 레드라인의 중심부이다. 통신 위성조차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조사만 하러 간다. 모두들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이 땅에 뼈를 묻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난 싫소."

덩치가 산(山)만한 사나이가 모난 소리로 말했다. 수안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기름이 번들거리는 대머리였다. 그 아래로 흉악한 범죄자만이 갖고 있는 악랄한 눈빛이 강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눈썹이 없는데다가 약간 휘어진 뭉툭한 코, 주위와 경계가 뚜렷한 두꺼운 입술, 그리고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구리 빛 피부가 한데 어울려 전형적인 범죄자의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덩치까지 워낙 커서 웬만한 사람은 너무 무서워 오줌을 찔끔 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수안은 달랐다.

"지금 뭐라고 했나!?"

수안은 험상궂은 모습에 전혀 기죽지 않고 날카롭게 외쳤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덩치나 믿고 설치는 종자들을 가장 경멸했다. 훈련생 시절에도 가끔씩 그런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싫다고 했소."

그가 콧김을 강하게 뿜으며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자네가 고창천인가?"

"그렇소이다."

"듣던 대로군. 상관을 개만도 못하게 대한다더니......허나! 그게 나한테까지 허용될 거라고 생각 치는 말게. 내 명령에 따르기 싫으면 꺼져라. 너 같은 놈은 군인 자격이 없다. 어서 꺼져버려!"

수안이 강하게 밀어 부치자, 오히려 고창천이 당황한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고개를 떨굼으로써 말을 대신했다. 연방대 내에서 손꼽히는 악동인 고창천에게 당당한 기백으로 맞서는 수안의 모습에 다른 대원들 모두 감탄한 듯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보좌관 님이 저희를 이끌어 주신다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맨 오른쪽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가 말했다."저는 김찬건 준위입니다. 12사단에 배속돼 있습니다."

"오, 자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자네와 같이 일하게 되다니 기대가 되는군."

"감사합니다."김찬건은 몹시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자, 자기 소개를 하지."수안이 모두를 두루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사령부 소속 수석 보좌관 겸 전황 분석관인 최수안 대장이다."

수안이 말을 끝내고 김찬건의 옆 사람에게 고갯짓을 했다.

"저는 2사단의 잇튤란 부대에 배속돼 있는 고수휘 중령입니다."

"자네......여잔가?"

"뭐가 잘못 됐나요!?"

고수휘는 여자라는 단어를 무척 싫어하는 듯 수안의 물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앙칼지게 되묻자, 수안은 얼른 입을 다물고 다음 사람에게 고갯짓을 했다.

"저는 7사단에 속한 잇사로 부대의 곽철민 중위입니다."

수안은 만족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다음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고창천이었다.

"목숨을 함께 할 동료들에게 자기 소개를 부탁하네."

수안이 정중하게 말했다. 고창천은 한동안 묵묵히 있더니만, 이내 입을 열었다.

"난 텐챠로 부대의 고창천 하사올시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성격이 매우 드럽소. 괜히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의 공포스런 소개에 모두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안은 얼른 다음 사람에게 고갯짓을 했다.

"저는 3사단의 서기수 준위입니다."

"저는 9사단의 다리아 부대에 속한 박 권 소령입니다."

용감한 전사들의 소개가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이제 한 사람만이 초조한 기색으로 자기 차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꼬챙이처럼 비쩍 마른 사내였다. 키가 큰 편이었는데, 워낙 마른 탓에 더 커 보였다.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텅 빈 눈은 바보스럽게 빛나고 있었고, 유독 튀어나온 광대뼈와 굵고 기다란 매부리코, 얇은 입술, 거기에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가 어울려 더욱 불쌍하게 보였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이 사내가 군인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수안은 마지막 대원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내는 도저히 군대와는 거리가 먼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 모두 그를 힐금힐금 쳐다보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앞으로 가야 할 힘든 원정길에서 듬직한 동료야말로 가장 큰 보물이었다. 그런데 저런 비쩍 마른 약골을 모시고 가야 하는 게 그들은 매우 못 마땅했다.

"자네 소개를 해야지."

수안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 사내는 며칠동안 안 감은 듯한 푸석푸석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긁적하더니 매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저는......프...프로그래머인 장......문수입니다."

그는 심하게 더듬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수안을 비롯해 듣는 사람 모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골인데다가 말까지 저렇게 더듬거리다니......그나마 그가 군인이 아니라, 프로그래머인 게 위안거리였다. 만약 이런 자가 정식 군인이었다면 다른 연방대에서 한참이나 자신들을 똑같이 취급하며 놀려댈게 뻔했으니 말이다.

"좋아. 자네가 우리의 핵심 장비를 다루겠군. 잘 부탁하네."

수안이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수안의 관심에 몹시 부끄러운 듯 장문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쳇, 저런 녀석까지 데리고 가야 하다니 환장하겠군."

고창천이 큰 소리로 딱딱거렸다. 그는 두꺼운 입술을 씰룩거리며 장문수를 노려보았다.

"그만! 이제부터 우리는 목숨을 함께 해야 한다. 모두들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그런데 모두들 한국계 출신인가?"

"옛!"

수안의 물음에 모두들 기운차게 대답했다. 수안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같은 계통간에는 의사전달이 보다 쉬워, 쓸데없는 잡음 없이 팀을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속으로 아버지의 배려에 감사했으나, 여전히 원정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직도 기분이 착찹했다.  

"자, 오늘은 일찍 자도록. 새벽에 출발해야하니까......"수안이 모두를 두루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외쳤다."내일 새벽 네 시까지 스플린트 A창고 앞으로 집합하도록. 알겠나?"

"옛!"

그들은 일제히 거수경례를 하고는 밖으로 질서정연하게 나갔다. 수안은 그들의 뒷모습을 힘없이 바라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이 두 번째 원정이다. 첫 번째 원정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내주고 승리했다. 그 때......그는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 어쩌면 이토록 원정 가는 것이 꺼려지는 건 그 오래 전의 일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사진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아리따운 한 여인이 밝게 웃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고, 다른 한 장은 어릴 적 수안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아이와 함께 활짝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어머니......현수......"

그는 두 장의 사진을 하릴없이 바라보면서 오랜 추억을 회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사진을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몸을 나른하게 뒤로 눕혔다. 푹신푹신 의자의 편안함 때문일까...... 그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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