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저 마시멜로 지겨워요.”

 

 

세라의 폭탄 발언에 손끝으로 마시멜로를 굽고 있던 윤재가 나라 잃은 표정을 했다. 윤재의 손끝에서 타오르던 엄지손톱만 한 불꽃은 점점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굽다 만 마시멜로는 반만 까맣게 되어 있어 아수라 백작 같았다.

 

 

“마시멜로 말고 다른 것 좀 먹으면 안 돼요?”

“그래도 구워 먹으면 맛있잖아.”

“그것도 한두 번이죠. 정 구워야 한다면 군고구마 같은 건 어때요?”

“하나 먹으려면 세 시간 정도 걸리는데 기다릴 수 있겠어?”

 

 

세라가 입을 꾹 다문 채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마시멜로를 안 먹으면 그만 아닌가 싶겠지만, 간식 하나 없는 동아리 모임은 세라로선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하는 수 없이 윤재가 구워 준 마시멜로를 받아먹었다.

 

 

“잘 먹을 거면서 왜 또 심술이야.”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혜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혜주의 손길에 세라가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동아리실 구석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머리 쓰다듬지 마세요! 왁왁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라는 씩씩거리며 혜주를 노려봤다. 혜주의 옆에 딱 붙어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오던 아름은 세라의 날카로운 눈빛에 죄도 없으면서 괜히 눈치를 봤다.

 

 

“솔직히 선배도 마시멜로 지겹잖아요.”

“난 안 지겨운데?”

 

 

혜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윤재에게서 구운 마시멜로 하나를 받았다. 그러더니 그걸 자기 입에 넣는 대신 아름의 입에 넣어 준다. 아름은 별말 없이 마시멜로를 우물거렸다.

 

윤재가 마시멜로를 더 굽기 위해 봉지를 뒤적였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그새 봉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였다.

 

 

“여기요.”

 

 

나지막한 도영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 위로 마시멜로 한 봉지가 둥둥 떠올랐다. 길게 늘어뜨린 의자 위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기에 평소처럼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윤재가 봉지 쪽으로 팔을 뻗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물론 늘 그렇듯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제가 뜯어 줄게요.”

 

 

혜주가 말했다. 윤재가 괜찮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혜주의 손 안으로 봉지가 안착했다. 힘을 세게 주지 않았는데도 작게 펑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진 봉지 밖으로 마시멜로들이 새어 나왔다. 책상 밖으로 떨어지려는 걸 잽싸게 잡은 혜주가 탈출한 마시멜로들을 윤재에게 건넸다. 어느새 윤재의 손끝에 작은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거기 계속 서 있을 거야?”

 

 

혜주가 세라에게 물었다. 여태 구석에 서 있던 세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너도 그만 일어나.”

 

 

혜주가 도영의 다리를 툭툭 때렸다. 그 손길에 도영이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겨우 모든 부원이 자리에 앉았을 때, 멍하니 창밖을 보던 아름이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왜?”

“비…… 올 것 같아서.”

 

 

아름의 말에 모두가 창밖을 바라봤다. 날이 흐리긴커녕 구름 하나 없이 화창한 날씨였다. 아름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잘 안 맞는 거 알잖아. 그냥 무시해요.”

“혹시 모르잖아. 오늘은 맞을지도.”

 

 

윤재가 구운 마시멜로를 텅 빈 봉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 다정했다. 아름은 별다른 말없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근데 왜 꼭 마시멜로예요?”

 

 

세라의 말에 다시 대화 주제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윤재가 구워 놓은 마시멜로는 그새 도영의 입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내 능력으로 가장 맛있게 구울 수 있는 게 마시멜로였거든.”

 

 

윤재가 말했다.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윤재는 꼭 웃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사람처럼 언제나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더 이상 투정이나 반박 같은 걸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세라도 더는 투덜거림을 뱉지 않았다.

 

 

“마시멜로 얘기 그만하고 토론이나 하자. 활동 보고서는 써야지.”

 

 

윤재의 한마디에 허울뿐인 토론이 시작됐다. 오늘의 주제는 ‘초능력이란 꼭 필요한가?’였다. 허울뿐인 토론이었지만 하다 보면 종종 격양이 됐다. 혜주가 도영에게 삿대질을 하며 능력이 필요 없는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도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아름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혜주를 말렸고, 세라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윤재는 또 허허실실 웃기만 했다.

 

스피커를 타고 종소리가 울렸다.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비는 내리지 않았다.

 

 

*

 

 

윤재가 1학년 때 만든 토론 동아리의 풀네임은 ‘하찮은 초능력을 지녔지만 결코 하찮지 않은 초능력자들의 모임’이었다. 너무 길어서 대체로 ‘하찮은 초능력자들의 모임’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원래의 뜻과 달라진 탓에 잘 부르지 못하고 그냥 ‘토론부’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윤재가 동아리를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기존 동아리들은 모두 고등급 위주니까. 초능력을 가진 신인류가 처음 태어난 게 백 년 전이고, 이제는 모든 인류가 초능력을 갖고 태어나는데, 인간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별을 일삼는 동물이라 초능력으로도 사람을 차별했다. 학생들을 공부로 줄 세우던 등급 문화는 이제 초능력으로 옮겨갔다. 윤재는 저등급 중에서도 가장 낮은 9등급이었다. 손으로 불꽃을 만들 수 있는 열 초능력이었는데, 불꽃의 크기가 엄지손톱만 했다. 고작 마시멜로 하나 구울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니 고등급 위주로 돌아가는 동아리에 들어가 봤자 아무것도 못하고 허송세월로 시간을 보낼 게 뻔했다. 그래서 윤재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자신과 같은 저등급 아름들로 최저 인원 네 명을 채워서 만든 게 ‘하찮은 초능력자들의 모임’이었다. 가입 조건은 딱 하나였다. 저등급일 것.

 

 

“근데 왜 토론 동아리야?”

 

 

함께 동아리를 창설한 지희가 그렇게 물었을 때, 윤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말하는 건 초능력이랑 딱히 연관 없잖아.”

 

 

그런 이유로 토론 동아리인 척했다. 그래도 활동 보고서는 써야 하니 매주 동아리 시간마다 토론을 하긴 했는데, 대체로 놀고 먹고 떠드는 게 주였다. 담당 선생님은 저등급 아이들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듯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고 했다. 사실상 방치였는데, 윤재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윤재가 2학년이 됐을 때 한 학년 밑의 후배들 셋이 들어왔다. 혜주와 아름과 도영이었다. 동시에 함께 동아리를 창설했던 동기 두 명이 탈퇴했다. 그 후로 부원은 다섯 명보다 많았던 적이 없었다. 윤재는 고등급 위주로 돌아가는 동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저등급 학생들은 그런 동아리라도 필요했다. 초능력이 형편없으면 대학도 가기 힘든 시대였다. 고등급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더라도 생활기록부에 쓸모 있는 활동 한 줄이라도 적길 바라는 학생들이 많았다. 윤재는 그런 마음도 이해했다.

 

혜주는 파괴력, 아름은 예지, 도영은 염력이 본인의 초능력이었다. 물론 저등급답게 핸디캡이 있었다. 혜주는 자신의 손 안에 들어찰 정도로 작은 물건 혹은 부위만 파괴할 수 있었다. 아름의 예지는 51% 확률로 맞았는데, 예지 능력의 최저 기준이었다. 도영은 자신이 직접 들 수 없는 건 염력으로도 들 수 없었다. 모두 아주 훌륭하고 다양한 저등급 초능력자였다.

 

동아리 활동은 즐거웠다. 적어도 윤재에겐 그랬다. 부원 모두 토론의 티읕도 관심 없는 탓에 토론이 제대로 흘러가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면 정말로 초능력 따위 상관없는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종종 학교 밖에서도 만났고, 맛있는 걸 먹으며 의미 없는 수다를 떨기도 했다. 윤재는 이대로 오래도록 동아리를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재의 바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혜주와 아름과 도영이 입부했던 그 해 말, 동아리 차장을 맡았던 지희가 탈퇴했다. 지희는 윤재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이런 능력으로는 대학은커녕 취직도 제대로 못할 거야.”

 

 

윤재는 늘 괜찮다고 말했다. 저등급이어도 괜찮다고, 남들이 우리의 능력을 무시한다고 해서 우리까지 우리의 능력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분명 우리의 능력도 필요한 곳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거라고. 그리고 지희는 그런 윤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우리는 늘 제자리인데.

 

 

“너희랑 있으면 계속 도태되는 기분이 들어. 이런 건 우리 같은 저등급한테 하나도 도움 되지 않아.”

 

 

지희는 쌀쌀맞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선 동아리를 떠났다. 지희를 유독 좋아하고 잘 따르던 아름이 지희를 붙잡으며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냐고 했지만, 지희는 아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동아리는 다시 네 명이 됐다.

 

지희가 떠난 후 동아리 차장을 맡은 건 혜주였다. 혜주는 지희가 미웠다. 꼭 그렇게까지 말을 할 필요가 있나? 지희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지희의 사정도 안다. 그러니 지희의 말이 백 퍼센트 진심일 거라곤 믿지 않는다. 그래서 더 미웠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지희의 탈퇴로 인해 동아리 분위기가 축 처진 것도 싫었고, 아끼는 친구인 아름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희가 다시 돌아오는 걸 원하느냐 묻는다면,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지희가 떠난 뒤에도 윤재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혜주는 윤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종 궁금했다. 도영은 언제나 맹한 얼굴로 남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번에도 별 생각이 없을 게 분명했다. 또, 아름이 지희를 좋아하고 잘 따르는 건 모든 부원들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름이 스스로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혜주는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윤재의 생각은 도통 알 수 없었다. 혜주가 보는 윤재와 지희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결코 섞이지 않지만, 섞이지 않는 그대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관계. 그 평온함이 잘 어울리는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희 선배가 밉지 않아요?”

 

 

언젠가 한 번은 윤재에게 물었다. 그때 동아리실엔 윤재와 혜주뿐이었다. 그래서 혜주는 윤재가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드러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때도 윤재는 웃기만 했다. 웃는 얼굴로 잘 구운 마시멜로를 건네는 윤재를 보며, 혜주는 더 이상 지희에 대해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학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해의 유일한 새 부원인 세라가 동아리실 문을 두드렸다. 작고 아담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세라는 선배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선배들은 귀여움의 표시로 세라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세라는 몸서리를 치며 순간이동을 했다. 그래봤자 2m가 최대였다. 그게 세라의 능력이었고, 세라의 핸디캡이었다.

 

세라는 귀여움을 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교복을 입지 않으면 초등학생으로 오인 받을 법한 자신의 어린 모습도. 그래서 선배들이 귀엽다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걸 끔찍하게 여겼는데, 그럼에도 동아리를 나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편해서였을까, 아니면 마땅히 갈 만한 동아리가 없어서였을까. 이유는 스스로도 몰랐다.

 

동아리실에는 늘 여섯 개의 의자가 있었다. 세라는 그게 의아했다. 입부하고 한 달이 지났지만 자신 외에 새 부원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세라의 친구들은 세라에게 당장 동아리에서 나올 것을 종용했다. 듣자하니 선배들 사이에서 인기도 없고 무시만 당하는 동아리로 낙인찍힌 모양이었다. 물론 세라는 남의 말 하나로 자신의 선택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기도 없고 무시만 당하는 동아리에 부원의 수보다 많은 의자가 필요한 이유는 궁금했다.

 

 

“우리 동아리실에 귀신이 있어서 그래.”

 

 

윤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했다.

 

 

“의자가 여섯 개면 뭐 어때서? 좋잖아.”

 

 

혜주는 어물쩍 넘어갔다.

 

 

“내가 침대로 쓰려고.”

 

 

도영은 의자를 이어 붙이고선 그 위에 누워 잠을 잤다.

 

 

“…….”

 

 

아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자신에게 의자가 여섯 개인 이유를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세라도 더 묻지 않았다. 부장 말대로 귀신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대충 넘기기로 했다.

 

 

*

 

 

“밖에 혹시 지진 났어?”

 

 

윤재가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머리채만 잡지 않았을 뿐이지 왁왁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바쁘던 혜주와 도영도 윤재의 말에 창밖을 바라봤다. 역시 운동장은 고요했지만, 미묘하게 땅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름이 겁에 질린 얼굴로 혜주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나 본데요?”

 

 

그새 문 쪽으로 순간이동을 한 세라가 문을 열고선 복도를 둘러봤다. 손에 핸드폰을 든 학생들이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소란스럽게 굴지 말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교실이나 동아리실로 밀어 넣었다. 세라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기 전 조용히 문을 닫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영화관이 붕괴됐대.”

 

 

혜주가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혜주의 핸드폰에는 영화관 붕괴 사고와 관련된 실시간 기사가 떠 있었다. 붕괴 사고가 일어난 영화관은 학교에서 걸어서 10분이 걸리는 곳으로 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특히 교내 영화제작부 부원들이 동아리 시간에 종종 찾곤 했다. 그리고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금은 동아리 시간이었다.

 

닫힌 문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선생님을 붙든 채 애원하고 있었다. 거기 제 친구 있단 말이에요. 제발요. 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부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닫힌 문을 바라봤다.

 

 

“……영화제작부 말이야.”

 

 

울음소리뿐인 침묵 속에서 윤재가 말했다.

 

 

“지희가 있는 곳이잖아.”

 

 

모두의 시선이 윤재에게로 향했다. 윤재는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영화관은 총 3층짜리 건물이었다. 낡고 오래되고 상영관도 몇 개 없지만, 학생들에게는 핫플레이스인 공간이었다. 언젠가부터 건물 외벽에 금이 가고 천장이 내려앉은 것 같단 소문이 돌긴 했지만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게 문제였다.

 

지희가 매몰된 곳은 1층에 위치한 1관 상영관이었다.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영화관에 있던 사람들은 교내 영화제작부 학생들과 담당 선생님, 영화관 직원들이 전부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은 지희 하나뿐이었다.

 

윤재는 붕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영화제작부 부원들을 찾았다. 다들 놀란 기색이 가득했지만 다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윤재는 영화제작부 부원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묻고 싶은 게 있었으나 그들이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부원들의 대화는 간단했다. 영화를 보던 중 건물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고, 저마다 옆자리의 부원들을 챙기며 비상구를 통해 탈출했다. 다행히 비상구로 인파가 몰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기에 신속한 탈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지희를 챙긴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지희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제 어떡할 거예요?”

 

 

혜주가 물었다. 그 옆의 아름은 차마 붕괴 현장을 보지도 못한 채 현장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고 있는지 눈과 코가 붉었다.

 

윤재는 아무 말 없이 붕괴된 건물을 바라봤다. 자신들이 여기에 온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동아리실에서 지희의 구조와 관련된 기사를 기다리는 것과 이곳에 와서 지희의 구조 소식을 기다리는 것, 모두 같은 일이라면 차라리 지희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는 게 나았다.

 

경찰관과 구조대원, 기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고등급 능력을 지닌 구조대원들이 지희를 구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 않은 듯했다. 파괴력은 건물을 또 한 번 무너뜨릴 위험이 있었고, 염력은 잔해를 옮기는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 낼 위험이 있었다. 순간이동 능력을 지닌 구조대원이 지희를 꺼내오려 했으나 고등급답게 가까운 거리를 이동해 본 경험이 없어 능력 조절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등급은 그 능력만큼이나 위험도도 높았다. 모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기자들은 카메라에 대고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다들 고등급이 하지 못하는 일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늘 그렇게 믿어 왔고, 그래서 사람들은 초능력 없이 구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선배.”

 

 

혜주의 부름에 윤재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요.”

“하지만,”

“나도 지희 선배 걱정돼요. 그 선배가 밉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을 만큼 싫은 건 아니니까.”

“…….”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재를 보면서 혜주는 우리가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실감했다.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과 능력이 보잘 것 없어서 쓸모도 없는 건 달랐다. 후자가 압도적으로 비참했다.

 

윤재는 말없이 붕괴된 건물을 보다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부원들이 따랐다. 다들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저등급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야.”

 

 

윤재가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부원들의 걸음도 멈췄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고등급이었으면 진작 나왔을 텐데.”

“괜히 인력 낭비 하는 거 아냐?”

“능력 안 돼서 못 나온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사람들은 저마다 좋을 대로 떠들었다. 누가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물론 모든 이가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진심으로 지희의 생환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말이라는 건 언제나 나쁜 말이 가장 먼저 몸속으로 침투하는 법이다. 윤재는 손톱으로 귀 뒤를 긁어댔다. 그렇게 하면 나쁜 말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안 가요?”

 

 

혜주가 물었다. 일부러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느껴졌다. 윤재는 한참 동안 귀 뒤를 긁다가, 별안간 세라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순간이동 말이야, 사람도 이동 시킬 수 있지?”

 

 

 

 

 

 

 

 

 

“이건 진짜 아니라고 봐요.”

 

 

혜주가 사색이 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달린 것도 아니고, 오히려 세라의 능력 덕분에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숨이 찼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손발도 차가웠다.

 

 

“저도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마찬가지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름이 주위를 둘러봤다. 정작 사태를 이렇게 만든 윤재는 무너진 벽을 주먹으로 두드리기만 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윤재가 순간이동에 대해 언급했을 때, 윤재의 다음 행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혜주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미친 거 아니냐고 했고, 세라도 입을 떡 벌린 채 윤재를 쳐다봤다. 늘 남에게 관심이 없고 잘 나서지 않는 도영마저도 무모한 짓이라며 한 소리를 했다.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할 건데요. 2차 붕괴라도 일어나면 우리 다 죽는 거예요!”

“세라가 어떻게든 옮겨주지 않을까?”

“제가 무슨 퀵서비스인 줄 아세요? 그리고 저 2m가 최대라고요!”

“사람이 왜 이렇게 무모해.”

“……가능성은 있어요.”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부원들 사이에서 아름이 조용히 말했다. 그 순간 모두의 이목이 아름에게로 집중됐다. 아름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횡설수설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당장의 가능성은 보였다는 건데…… 막상 들어가면 달라질지도 몰라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제 능력은 고작 51%밖에 안 된다는 거…….”

“절반보다 조금 더 높잖아.”

 

 

윤재가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1%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된 거 아냐?”

 

 

그 순간 그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 한마디 때문에 윤재의 계획에 곧장 찬성을 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무모하다고 생각했고,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저곳 벽을 두드려가며 지희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지금조차도.

 

 

“왜 그렇게 직접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건데요?”

“그러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동아리 부장이라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끝내 부원들은 윤재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죽지 않고 살아 나온다면 당장 윤재를 탄핵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뒤에 공간 있는 것 같은데.”

 

 

윤재가 금이 간 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곳보다 맑은 소리가 났다. 혜주가 한숨을 쉬며 벽에 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살짝 힘을 주자 딱 손 크기만큼 벽이 부서졌다. 그 너머로 윤재의 말처럼 공간이 보였다. 모두가 통과할 만한 커다란 구멍을 내기 위해선 시간이 걸릴 듯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혜주가 벽을 부수고, 그 잔해들을 도영이 옮기는 사이, 세라가 윤재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도영 혼자서 모든 잔해를 치우는 건 무리일 것 같아 하나둘 돕던 윤재가 고개를 들었다. 세라는 윤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작은 돌덩이들을 등 뒤로 던져 놓으며 말했다.

 

 

“혹시 동아리실에 있는 여섯 번째 의자, 그거 우리가 지금 구하러 가는 선배 거예요?”

 

 

앞쪽에서 혜주와 도영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났다. 야, 머리에 부딪칠 뻔했잖아! 네가 머리를 저쪽으로 치웠어야지. 윤재는 그 목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걸었다. 발밑에 작은 돌멩이들이 밟혔다.

 

 

*

 

 

윤재가 지희를 처음 만난 건 1학년 때였다. 같은 반이었던 둘은 성격도 취향도 정반대였다. 윤재는 자신의 능력처럼 따뜻하고 온화한 사람인데 반해 지희는 다소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둘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윤재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도 지희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윤재는 모른다. 아마 지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연히 둘이서만 지각한 날 남아서 청소를 하다가 친해졌던가? 아니면 그 전에 공통의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를 통해 말을 섞기 시작했던가? 여전히 시작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윤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시작이 어땠든 자신에게 지희는 좋은 친구라고.

 

지희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동아리실에서 혜주와 도영이 티격태격하고, 아름이 그걸 말리고, 윤재가 허허실실 웃는 동안, 지희는 동아리실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그러다 시끄럽다며 한마디 하는 게 지희의 역할이었다. 지희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맡은 일은 최선을 다 하는 학생이었다. 윤재는 그런 지희를 좋아했다. 지희도 자신을 좋은 친구라고 여겼는지는 솔직히 알 수 없지만, 만약 싫어했다면 자신에게 말도 걸지 않았을 거라고, 윤재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토록 솔직한 말들 또한 하지 않았겠지.

 

지희의 능력은 텔레파시였다. 단, 능력을 쓰기 위해선 반드시 상대방과 접촉을 해야만 했다. 지희는 언제나 자신의 능력이 보잘 것 없다고 말했다. 이따위 능력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했다. 그렇게 말할 때면 꼭 덧붙이는 문장이 있었다. 내가 언니처럼 고등급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희의 언니인 정희는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다. 성형을 하거나 가면을 쓴 것도 아닌데 능력을 쓸 때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정희는 그 능력으로 배우를 꿈꿨고, 교내 영화제작부에서 매번 주연을 도맡았다. 대학을 가기도 전에 상업 영화 오디션에 합격했을 땐 집안이 몇 날 며칠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지희는 덩달아 신난 척을 해야만 했다.

 

 

“난 한 번도 언니를 이긴 적 없어. 아마 죽을 때까지 이길 수 없겠지.”

 

 

지희의 보호자들은 늘 지희와 정희를 비교했다. 네가 언니 반이라도 됐다면, 네가 언니처럼 특출 났다면, 넌 왜 언니랑 달라서……. 그런 말들이 지희를 갉아먹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지희를 갉아먹은 건, 그런 말들 뒤에 숨어 자신을 무시하는 눈으로 보던 정희의 얼굴이었다. 어떤 날은 비웃었고, 어떤 날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봤으며, 어떤 날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지희는 정희가 미웠고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싫었던 건 어떻게든 언니를 이기려고 아등바등하던 자기 자신이었다.

 

 

“연기는 왜 잘해서, 짜증 나게. 차라리 로봇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희의 온전한 속마음을 아는 건 윤재밖에 없었다. 혜주도 아름도 도영도 지희의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지희와의 관계는 어떤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지희가 날카로운 말을 뱉고 동아리를 떠났을 때, 오로지 윤재만이 미움 대신 슬픔을 느꼈다.

 

 

 

 

 

 

 

 

 

그날의 우연만 없었다면 지희는 아직도 동아리에 있었을까. 가끔 윤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답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별거 아닌 일이었다. 주말에 부원들과 만나 맛있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것쯤이야 종종 하던 일이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정희를 만난 것도 정말로 별거 아닌 일이었다.

 

 

“아직도 그 동아리에 있니?”

 

 

하지만 정희의 말들은 별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희에게는.

 

 

“잘해 봐.”

 

 

그때 정희는 스무 살이었다. 열여덟과 스물은 고작 두 살 차이지만, 열여덟에게는 스물이 어른으로, 스물에게는 열여덟이 어린아이로 보일 법한 때였다. 정희는 테이블에 단 두 마디를 남긴 뒤 그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지희의 눈치를 봤다. 지희는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퍼 먹었다.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지희가 동아리를 떠났다. 윤재는 단 한 순간도 지희를 붙잡을 수 없었다.

 

 

*

 

 

“저기 1관이라고 쓰여 있지 않아?”

 

 

혜주의 손가락이 동그랗게 파괴된 벽 너머를 가리켰다. 천장이라고 부르기 애매할 정도로 내려앉은 곳에 방향을 잃은 이정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다들 조그마한 구멍에 매달려 이정표를 쳐다봤지만 불빛 하나 들지 않는 곳이라 글씨를 읽기 어려웠다.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등 뒤에서 들려온 세라의 목소리에 혜주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인 세라는 온데간데없었다. 다시 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파괴된 벽 너머였다.

 

 

“1관 맞아요!”

 

 

메아리치듯 들려온 세라의 목소리에 혜주가 벽에 조금 더 큰 구멍을 냈다. 네 명이 옹기종기 모이지 않아도 벽 너머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과 바닥 사이, 아주 좁은 틈에 그보다 더 작은 몸을 끼워 넣은 세라가 손으로 이정표를 가리키고 있었다.

 

 

“……쟤 말이야.”

 

 

멍하니 세라를 보던 도영이 말했다.

 

 

“순간이동 말고,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게 능력인 거 아냐?”

“나도 그 생각했어.”

 

 

혜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라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세라에게 윤재가 고생했다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몸집이 작은 게 나쁘진 않네.”

 

 

혼잣말처럼 말한 도영이 부서진 잔해들을 옮겼다. 아닌 척해도 얼굴에 뿌듯함이 떠오른 세라가 두 손으로 돌덩이를 들어 옮겼다.

 

그로부터 또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건물이 멀쩡했을 땐 입구부터 1관까지 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방향도 거리도 제대로 알 수 없어 이 길이 맞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햇볕 하나 들지 않는 내부는 봄인데도 싸늘했다. 세라가 입고 있던 카디건을 여미며 선배들의 뒤를 따랐다. 좀 더 깊은 내부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협소해진 탓에 모두 허리를 숙인 채 걸었다. 그 사이에서 오로지 세라만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었다.

 

 

“……다 온 것 같아.”

 

 

지친 숨소리만 가득한 공간 사이로 아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아름을 쳐다봤다. 기쁜 소식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아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혜주가 아름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앞으로 5분이면 지희 선배를 만날 수 있어. 그런데……”

“근데?”

“2차 붕괴가 일어날지도 몰라.”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똑, 똑, 하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그 소리를 다섯 번 남짓 들은 뒤에야 아름이 습관처럼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내 능력은 고작 51%잖아. 아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아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늘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두 손으로 애꿎은 교복 재킷의 밑단만 꾹꾹 잡아당겼다. 그때였다.

 

 

“괜찮아.”

 

 

윤재가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 괜찮을 거야.”

 

 

언제나 괜찮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윤재. 아름은 그런 윤재가 신기했다. 정말로 괜찮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건데. 하지만 윤재의 부드러운 얼굴과 목소리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있으면, 그의 말대로 전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건 아름뿐만이 아니었다.

 

아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은 윤재가 통로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가자.”

 

 

 

 

 

 

 

 

 

아름의 말과 달리 10분이 지나도록 지희는 보이지 않았다. 아름은 오히려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직 지희를 만나지 못했으니 2차 붕괴도 일어나지 않겠지.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이 마음에 든 순간이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왜 안 보여?”

 

 

그런데 혜주를 보면 또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혜주가 잘게 생채기가 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말했다. 소량의 피가 바지에 묻어났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아름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혜주의 손에 쥐어 주었다. 혜주는 아름의 손수건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말하면 더더욱 안절부절못할 아름을 알았기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손수건을 받았다. 혜주가 손수건에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마저 길을 찾았다.

 

 

“저거 1관 문 아니야?”

 

 

도영이 부서진 벽 너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크고 두꺼운 문이 천장에 눌려 있었다. 그 옆에 상영관의 숫자와 좌석 배치도가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본 순간 모두가 문을 향해 달려갔다. 윤재가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아름이 두꺼운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지희를 불렀다. 하지만 문 너머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켜봐.”

 

 

혜주가 부원들에게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 손길에 부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내려앉은 천장을 손으로 더듬으며 상황을 가늠하던 혜주가 천장과 문 사이에 두 손을 대고선 손바닥에 힘을 줬다. 혜주의 능력만큼 소량의 돌덩이들이 혜주의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 돌덩이들이 혜주의 머리에 쌓이기 전, 허공 위로 둥둥 뜨게끔 만든 건 도영이었다.

 

윤재가 다시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이전과 달리 부드럽게 열리는 문에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지희야!”

 

 

그리고 지희의 이름 또한 구토처럼 쏟아져 나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망가진 의자와 깨지듯 구겨진 스크린, 내려앉은 천장, 부서진 벽…… 어둡고 싸늘한 공간 한가운데,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지희가 있었다.

 

 

*

 

 

동아리를 떠날 때, 지희는 생각했다. 다시는 윤재를, 부원들을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없을 거라고.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 한 번 건네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쳐 가고, 사소한 연락조차 주고받지 못 할 거라고. 어차피 어른이 되면 그때의 일 따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할 테니 상관없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 하겠지.

 

그러나 지희가 간과한 게 있다면, 그런 어른이 되기까지 견뎌야 하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영화제작부에 들어간 건 오로지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를 이기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아등바등 살았다. 누군가가 왜 그렇게 언니를 이기고 싶으냐고 물으면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살았으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단 한 번이라도 언니를 이기고 싶었고, 그럴 수 없다면 언니의 옆에라도 나란히 서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하등 쓸모없는 걸 알면서도 영화제작부에 들어갔다. 지희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화제작부 부원들은 정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자신들의 동아리에서 재능 있는 배우가 탄생했으니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머나먼 선배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희보다 더 출중한 인물이 있겠지만, 자신들과 매주 부딪치며 함께 영화를 만든 사람은 정희가 유일했으니까. 지희도 그걸 알았다. 알았기 때문에 부원들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희 선배 동생이래. 너무 다른데? 게다가 저등급이잖아. 정희 선배 동생이라고 하면 우리가 좋아할 줄 알았나 보지? 지희는 그들의 눈만 봐도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알았다. 정작 자신이 먼저 정희의 이야기를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동아리를 떠난 뒤부터 지희는 줄곧 외로웠다. 친구가 없던 건 아니다. 같이 급식을 먹는 친구도 있었고, 쉬는 시간에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그건 윤재가 유일했다. 그래서 지희는 윤재를 잃은 뒤부터 줄곧 외로웠다.

 

아주 가끔, 다시 돌아가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늘 생각에 그쳤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윤재에게 상처를 줬으면서, 후배들에게 못된 선배로 남았으면서. 지희는 뻔뻔하지 못 했고, 그래서 외로움에 잠겨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기로 했다.

 

 

*

 

 

그렇게 죽을 줄 알았던 날에 나를 찾아온 게 너라니. 지희는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희야,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지희의 앞에 쪼그려 앉은 윤재가 지희의 어깨를 붙잡은 채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름은 그 옆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혜주는 그런 아름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영과 세라의 시선도 지희에게 향해 있었다. 지희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양손으로 감싼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두를 쳐다봤다.

 

 

“왜 너희가 여기에 있어? 대체 어떻게…….”

“그건 나중에 윤재 선배한테 듣고요. 선배 진짜 괜찮아요? 몸 엄청 떠는데.”

 

 

혜주가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지희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지희는 말없이 후드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여기 온도가 너무 낮아서 그래. 일단 몸부터 따뜻하게 하자.”

 

 

윤재의 손끝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윤재의 불꽃은 유일한 빛이었다. 지희가 말없이 그 빛을 바라봤다. 고작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불꽃이었지만 지희에게는 어떤 온기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일어설 수 있겠어?”

 

 

윤재가 물었다. 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봤다. 흰 양말 아래,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부어 있는 발목이 선명했다.

 

 

“그냥 제 능력으로 가면 되잖아요. 좀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세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으로는 그게 최선인 듯했다.

 

윤재와 혜주가 양 옆에서 지희를 부축했다. 지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면, 부원들이 그 옆에 붙어 이동할 준비를 했다. 하이파이브를 하듯 모두가 한가운데에 손을 모았다. 그때였다.

 

쿠구궁.

 

어디선가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땅이 움직였고, 가만히 있어도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머리 위로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에 모두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2차 붕괴예요!

 

 

“아씨, 빨리 잡아요!”

 

 

세라가 손을 뻗었다. 한없이 작은 그 손이 지금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두가 손을 뻗어 세라의 손과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소음과 함께 천장이 그들을 삼켰다.

 

 

 

 

 

 

 

 

 

지희가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날리는 흙먼지가 시야를 더욱 방해했다. 지희가 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동시에 각기 다른 기침 소리들이 무너진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가기만 해 봐! 선배 진짜 탄핵시킬 거니까!”

 

 

어두컴컴한 시야 너머로 잔뜩 화가 난 혜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조금씩 부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생쥐 꼴을 하고 있었다. 지희가 연신 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앞에 있던 좌석들이 내려앉은 천장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행히 세라의 능력으로 상영관 입구까지 이동할 수 있었지만, 2차 붕괴가 일어난 탓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한아름, 너 괜찮아?”

 

 

어디선가 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희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아름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발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동 중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었다. 그걸 본 순간, 갑자기 겁이 났다.

 

 

“어디 봐봐.”

 

 

윤재가 아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름의 발목을 매만졌다. 아름은 윤재의 손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윤재는 마치 의사라도 되는 듯 아름의 발목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은데. 걸을 수 있지?”

 

 

아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아. 나가서 치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

 

 

윤재의 얼굴 위로 평소처럼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미소가, 괜찮을 거라 말하는 목소리가, 지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넌 만날 뭐가 그렇게 괜찮아?”

 

 

그래서 결국 또 날이 선 말을 뱉고 말았다.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거 다 알아.”

“지희야.”

“지금도 그래. 이게 뭐야. 그냥 어른들한테 맡기지, 왜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죄인처럼 만들어? 지금 이 상황에서 괜찮은 건 하나도 없는데, 넌 대체 뭐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지희의 목소리가 매몰된 공간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것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누구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은 지희가 숨을 골랐다. 산소가 모자란 건지 가만히 앉아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작 나 하나 살리겠다고 무모한 짓을 벌인 부원들에게, 윤재에게 화가 났다.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문지르며 그저 숨을 쉬는 데에만 열중했다. 윤재의 발끝이 시야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지희야.”

 

 

지희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는 윤재가 이전과 다를 바 없다고 지희는 생각했다. 윤재의 눈 안에는 언제나 윤재만의 다정함이 존재했다. 그래서 지희는 종종 윤재와 눈을 맞추는 게 버거웠다. 윤재를 보고 윤재의 다정함을 느끼고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괜찮아.”

 

 

그 빌어먹을 괜찮다는 말 또한 자신을 울게 만들 거라는 걸, 지희는 알고 있었다.

 

 

“지희는 내가 업고 갈게. 너희는 아름이 좀 부축해 줘.”

 

 

윤재가 부원들에게 말했다. 부원들은 대답 대신 아름을 일으켜 세웠다. 혜주와 세라가 아름의 양팔을 잡았고, 도영은 부상자들의 발에 잔해가 걸리지 않도록 돌덩이들을 치웠다. 어서 가요. 혜주가 되돌아온 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윤재가 말없이 지희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 등을 본 순간, 지희는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윤재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걸.

 

지희가 팔을 뻗어 윤재의 목을 끌어안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허공으로 붕 떴다. 자신의 몸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윤재의 팔이 느껴졌다. 윤재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재야.”

 

 

지희가 말했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윤재는 대답 대신 지희를 고쳐 업었다.

지희가 윤재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윤재는 그 손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희의 손을 타고 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재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지희를 바라봤다.

 

 

“응, 알아.”

 

 

그리고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지희는 그 동그란 뒤통수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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