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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한 걸음에 삼백리

2021.05.13 19:4205.13

하필. 왜 하필 그날이었니.


가을은 차가운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 안고 침대에 기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양말 속에서 뾰족하게 솟은 엄지 발톱을 내려다 본다. 좁은 자취방. 시선을 돌릴 곳도 없다. 눈이 닿는 곳마다 다미의 표정과 목소리가 겹쳤다. 며칠째 비어 있던 방인데도 그의 재스민 향기가 가득하다.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려 고개를 돌리니 방바닥에 실금 같은 선이 보인다. 단단한 검은색의 곧고 긴 머리카락 한 올.


그런 사람이었다, 다미는.







“집을 나왔다고? 가출?”


다미는 가을의 좁아 터진 자취방이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은색 여행가방을 끌고 들이닥쳤다. 집에서 종종 시간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제 집처럼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가을이 당황하고 말았다.


“나이가 스물일곱인데, 가출은 적절한 어휘가 아닌 것 같다. 독립이라 부르기로 하자.”


다미는 가방을 펼치고 그의 값비싼 옷들을 가을의 스파 브랜드 옷 옆에 걸기 시작했다. 무채색 계열의 기본적인 디자인 옷 몇 벌밖에 없는 가을인지라 그리 넓지 않은 붙박이 옷장에도 공간이 넉넉히 남았다.


“남이 자취하는 월셋방으로 독립하는 경우가 어딨니?”


다미는 기쁜 건지 화가 난 건지 얼굴이 벌개서 항의하는 가을의 둥그런 곱슬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는 귀를 살짝 꼬집으며 대꾸했다.


“그럼 동거로 치든지.”


“그렇게 얼렁뚱땅 넘길 일이 아니잖아!”


가을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재차 따져 물었지만, 마른 솔방울처럼 겉보기에만 날을 세웠을뿐 다미의 굳은 결심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눈썹 라인을 따라 반듯하게 자른 앞머리 아래로 연한 갈색의 눈동자를 굴리며 여행가방을 세워 둘 자리를 찾는 다미 앞에 허망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침 내내 꾸물꾸물하더니 결국 와다다다 자드락비가 쏟아졌다. 겨울에서 봄이 다 지나도록 가물더니, 초여름부터 이른 장마가 찾아 온 건지 비 소식이 잦았다. 필요로 할 때는 오지 않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치는 건 무슨 심보람. 가을은 이제 우리나라도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간다는 기사를 떠올렸다.


“나 그냥 가?”


창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를 강조하려는 듯 다미가 큰소리로 물었다. 가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빗방울이 튀어 들어오는 창문 틈새를 조금 더 닫았다.


가을은 다미도 아열대성 마음을 지닌 걸까, 하고 생각했다. 뚜렷한 건기와 우기처럼, 가을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흐르는 시기와 모든 게 귀찮고 혼자이고 싶은 시기가 확실했다. 이 년 가까이 사귀는 동안 그런 식의 이별을 몇 차례나 겪었는지 모른다. 나를 떠난 건가 하고 있으면 어느 날 다시 나타나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다미는 헤어진 적이 없으니, 가을 혼자서만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 셈이다.


“안 가도 되지?”


다미는 대답은 들은 걸로 치겠다는 듯이 침대에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방안의 공기가 크게 흔들려 다미의 진한 재스민 향기가 퍼졌다. 검은 반소매 티셔츠가 함부로 말려 올라가 배꼽이 드러났다. 가슴팍에 프린트 된 롤링 스톤즈의 로고가 가을을 향해 혓바닥을 내밀었다. 짧은 데님 숏팬츠 아래의 하얀 허벅지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가을은 그 역시도 약올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게 한 달 넘도록 연락이 없던 사람이 맞나. 가을은 빗물이 살짝 묻은 엄지손가락을 바지에 건성으로 닦아 내고,  다미의 거대한 여행가방을 둘 자리를 궁리했다.


“비 들이치는데 창문을 꼭 닫지 그래?”


몰라서 저러는 걸까, 알면서도 무시하는 걸까. 가을은 붙박이장 바닥에 있던 리빙 박스를 한 줄로 쌓아 올려서 자리를 마련하고 다미의 여행가방을 세워 넣었다.







명절도 아닌데 기별도 없이 철 지난 허수아비 같은 몰골로 시골집을 찾아온 손녀의 충혈된 눈을 보고 숙정은 가슴이 철렁했다. 안부도 묻기 전에 두 손을 먼저 확인했다. 손톱 밑에 검은 흙이 끼어 있거나 손가락에 상처가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무구의 환영을 좇아 산천을 헤매다 아무 땅을 파헤치지는 않았구나.


“무병을 앓은 게냐?”


“아니, 할머니, 그런 건 아니야.”


숙정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손녀를 방으로 이끌었다.


한 대를 건너 신이 지피는 사례를 워낙 많이 접했기 때문에, 숙정은 가을이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 났을까 늘 걱정이었다. 모시던 신이 수년 전 자신을 떠나 신기를 잃고 나서는 그 염려가 더욱 커졌다. 신령님이 손녀를 찾아서 떠나신 게 아닐까 의심 되었기 때문이다.


“방울 소리 같은 거 들리지도 않았고?”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잔뜩 웅크린 손녀를 아랫목 이불 안으로 앉히며 재차 확인했다.


가을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이 사고를 당해 함께 숨졌다. 한꺼번에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숙정은 장례를 치른지 채 두 달이 되기 전부터 낮이고 밤이고 산으로 들로 거지꼴을 하고 헤매고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혀를 차며 어린 가을을 번갈아 돌봐주었다.


하지만 숙정은 미친 것이 아니라 무병을 앓고 있었다. 눈앞에 형형의 사물이 떠있는 색색의 강물이 이리로 저리로 굽이쳐 흘렀고, 누구인지 주인을 알 수 없는 고함이 귀청을 때렸다. 그리고 방울 소리... 쉼 없이 흔드는 방울 소리가 방문을 닫고 몇 겹의 이불 속에서 귀를 막아도 계속 들렸다.


고개를 돌리는 방향에 따라 미세하게 커졌다가 작아지는 방울 소리를 찾아 논밭을 하릴없이 맴돌다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삼봉산의 세 봉우리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발이 부르트도록 오르락내리락했다. 중앙봉 선암사에 며칠을 기거하며 부처님께 기대어 보아도 목탁 소리와 불경 암송을 뚫고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이라도 삼킨 것 마냥 온몸의 피가 펄펄 끓고 혈관이 경련했다.


그러던 그믐날 온갖 산짐승들이 아우성치는 어둠 속에 아홉 번을 넘어지고 다시 세 번을 구른 뒤에, 동쪽 봉우리 중턱에서 열 손가락의 손톱에 전부 피가 배이도록 땅을 파헤쳐 찾아낸 것이 청동 방울 세 개씩 세 송이가 달린 무구였다. 흐르는 계곡 물에 씻어 짤랑거리는 방울을 손에 쥐자 무병의 증세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고, 무악산 근처의 무당을 찾아가 내림굿을 하고 비로소 숙정이 입을 열었다. 그 후로 이십 년 동안 신령님을 모시며 이 마을에서 무당 노릇을 했다. 가을이 스물넷이 되던 해에 갑자기 신령님이 떠나시기 전까지 말이다.


“신병 같은 거 아니야. 할머니, 나 배고파.”


숙정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가을의 이마를 자꾸 짚어보고 눈을 까뒤집어 들여다 본 후에야 시래기 된장국과 흰 쌀밥을 내왔다.


“잘 먹고 다녀야지, 얼굴이 왜 그래?”


가을은 따끈한 쌀밥을 크게 한 숟갈 떠서 오물오물하다 된장국과 함께 삼켰다.


“할머니나 잘 챙겨. 가슴 답답한 건 어떠셔? 의원에서 큰 병원 가라고 했대매. 몇 년째 약만 받아다 먹고...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 건강이 나빠져서 신령님도 떠나버렸다고 수군댄대.”


“헛소리들 하지 말라고 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그러지 말고 병원 좀 가.”


“이상한 게 보이거나 들리거나 하면 바로 말해야 한다.”


지난 삼 년간 늘 가을 걱정이었다.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생활하느라 신체를 물려줄 신딸도 없는 상황에서 신령님이 떠나버린 이유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권속을 찾아 떠나셨을 경우에는 여자 혈육인 손녀 가을이가 가장 유력한 목표였을 것이다. 숙정은 차라리 자신에게 다시 오시길 새벽마다 기도 드렸다.


“창문은 잘 열어두고 있지?”


“응, 걱정 마. 한겨울에 눈발이 날려도 창문 틈은 열어 두고 있으니까.”


“아이고 이쁜 것.”


가을은 항상 창문을 빼꼼히 열어 두고 살았다. 누구든, 무엇이든 안에 가두지 말고 자유롭게 들어왔다가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숙정의 당부 때문이다. 그래야만 신이 가을에게 집착하지 않고 밖으로 다시 나간다는 생각이었다.


“보살님 계셔요?”


마당에서 여인의 음성이 물었다. 숙정은 내다 보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하이고 평산댁, 나는 이제 은퇴했다니까요. 이렇게 자꾸 찾아 오셔도 도움을 줄 방도가 없어요.”


“보살님, 그러지 마시고요. 저희 손주가 곧 대학 시험을 치는데, 조상님들 묘를 이장을 해야 하는지, 하면 어느 날에 해야 하는지 그것만 좀 일러 주셔요.”


“글쎄 제 곁에 신령님이 안 계셔요.”


“물려 받은 사람이 없는데, 신령님이 어디 가셨겠어요.”


“사람들 말마따나 제 몸이 곯아서 곧 죽을 거라 신령님도 그냥 떠나버렸나 보네요.”


“아이고, 뭐 그런 흉한 말씀을 하셔요.”


“죄송합니다. 돌아가세요.”


가을은 평소 모습과 다른 할머니의 쌀쌀맞은 행동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평산댁 할머니가 매일같이 찾아와 오죽 성가시게 했으면 저럴까 싶기도 했다. 밖에서는 한참 말이 없었다.


“보살님 드시라고 고구마 좀 가져 왔어요. 여기 두고 갑니다.”


“아니, 뭔 고구마를... 갖고 가셔요!”


숙정이 몸을 일으켜 쫓아 나갔지만 평산댁 할머니는 이미 사립문을 돌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참...”


숙정이 고구마가 가득 담긴 스테인리스 양푼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막 삶아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지금 벌어진 상황 중에 무엇 하나 기억을 자극하는 것은 없었지만, 가을은 수저를 된장국에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고 내 새끼,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숙정은 옆에 앉아 손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할머니.”


“응.”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렀다.


“된장국이 매워.”


숙정은 눈물을 글썽이며 마른 나무 가지처럼 거친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손녀의 손을 감쌌다. 보드랍고 여린 손을 위해 스스로 딱딱한 껍질이 되어주겠다는 듯이.


“그래... 이 할미가, 이 할미가 잘못했다. 또 말해 봐. 내가 다 들어줄게... 이 할미가 다 고쳐줄게.”







장난감처럼 귀엽게 생겼던 다미의 2인승 전기자동차는 형편없이 구겨졌다. 외제차라고 다 튼튼한 건 아니었나 보다. 왕복 8차선의 넓은 도로 위, 사거리에서 가로 방향으로 차들이 한참 달리는 중이었다고 한다. 어째서 빨간 신호를 보지 못했을까. 도대체 왜 가로질러 달리는 차량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무슨 생각으로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교차로에 달려들어 흉폭한 트럭의 바퀴가 차체를 깔아뭉갤 때까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은 걸까.


가을의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다미는 이제 없다.


“내 인생에서 나가줘.”


가을이 그렇게 말했다. 뱉어 놓고 자신도 조금 놀랐다. 항상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던 다미를 기다려주고 안아주던 가을이었다.


“더는 못하겠어.”


다미의 짐은 이미 며칠 전에 모두 은색 여행가방에 담아서 현관에 세워두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울다 지쳐 잠든 가을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묵직한 솜이불 밖으로 빠져 나오니 방안 공기가 찼다. 스스로를 껴안는 모양으로 오소소 닭살이 돋는 팔을 문지르며 방안을 둘러봤다. 오래된 자개장롱이며, 벽에 붙은 사진들이며, 두꺼운 구식 텔레비전까지, 가을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서 달라진 게 없었다. 할머니가 무당일을 그만둔지 3년이 지났지만, 집안에 밴 향냄새는 여전했다.


옆방으로 통하는 쪽문을 열었다. 법당으로 쓰던 방이다. 제단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였다. 제단 위에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사자관을 쓰고 옆구리에 소공후를 끼고 앉아 있는 전단건달바왕(栴檀乾闥婆王)의 화려한 목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을이 어린 시절 호기심에 알아본 바로는, 전단건달바왕 혹은 간다르바는 불교의 수호신인 팔부중의 하나였고, 제석천의 악부를 관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목상에도 작은 하프처럼 생긴 소공후를 끼고 있는 모양이다. 향을 피울 때 피어나는 묘한 향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고기나 술은 먹지 않고 오직 향기만 먹는다고 한다.


이런 걸 아직도 다 기억하고 있다니. 가을에겐 실로 깊은 애증의 공간이다. 어디 한 곳 먼지가 내려앉은 데가 없는 걸 보니 할머니가 여전히 매일같이 쓸고 닦고 하는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가을이 도맡아 하던 일이었다. 향을 피우지 않은지 오래 된 향로는 금빛으로 반짝반짝했다. 그 옆에는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이 있었다. 신령님이 다시 오실까 향은 피우지 않으면서도 새벽마다 깨끗한 물을 받아 올리는 할머니의 마음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다미의 마음도, 가을 자신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다미와 헤어지고 싶었던 걸까. 다미와 사귀었던 기간 동안 비슷한 질문을 수없이 여러 번 자문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두 달까지 연락이 끊겨버리는 다미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건 아니다. 이제 끝내야겠다. 이별을 원한 것은 진심이었을까. 다미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답은 매번 아니오였다.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는 다미의 재스민 향기를 늘 반갑게 맞이한 가을 자신의 모습이 그 답이었다. 가을은 이별을 원하지 않았다. 그동안은.


마지막에 가을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알 수 없다. 이제 다시는 다미가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다섯 살 시절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던 날 이후로 며칠간 할머니가 이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사실은 잊히지 않았다. 걸어 잠근 방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던 향냄새가 가을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처음으로 맡아 본 향냄새였고, 며칠 뒤에 방에서 나온 할머니가 신병을 앓기 시작하던 모습은 어린아이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 방엔 왜 들어갔어? 이리 와 저녁 먹어.”


숙정이 가을을 끌어다 밥상 앞에 앉혔다. 하지만 가을은 목이 까끌해서 밥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젓가락으로 밥알만 세던 가을이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으응.”


“그 애... 울고 있었던 것 같대. 운전하면서.”


“...”


“그래서... 눈물 때문에 정지 신호를 못 본 걸까?”


숙정은 말 없이 굴비 살을 발라서 한 조각을 가을의 밥그릇에 얹었다.


“나 때문에 죽은 거잖아.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그치?”


“아이고, 그냥 재수가 없어서 사고가 난 거지, 그게 왜 네 탓이냐? 그런 생각 하지 마라, 아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그렇게 한 가지 이유로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란다. 일어날 일이어서 일어난 거야.”


“걔가 그날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다는 거야?”


“세상만사가 다 천지신명의 뜻에 따른 끝없는 흐름인데, 먼지 같은 사람 한 명이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붙들고 이건가 저건가 속만 썩이는 게 의미가 없다는 말이란다. 지나간 일은 담아둘 것이 아니라 창틈으로 내보내고 순리에 따라서 살아가면 되는 거야.”


“하지만 할머니,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걔의 못된 장난 같아. 항상 그렇게 나를 애태웠거든. 정말 가버린 건가 싶다가도, 어느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서는 나를 귀찮게 했는걸. 며칠만 기다리면 다시 오지 않을까? 걔가 그렇게 죽었을 리가 없어.”


“이 불쌍한 것...”


수저를 내려놓고 상을 밀어내는 손녀를 보며 숙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부모도 없는 다섯 살배기 어린 애를 홀로 키웠다. 자신이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는 바람에 또래들의 불편한 시선 속에 평탄치 못한 성장과정을 거쳤을 것은 물으나 마나였다. 아들 며느리의 장례를 치르자 마자 무병을 앓아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니느라, 조그만 것을 이집 저집 떠돌게 방치했던 것도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깊숙히 박혀 있다.


무거운 밥상을 치우고 방으로 돌아오니, 가을이 베개도 없이 모로 누워 있었다. 엉덩이를 토닥여 담요를 덮어 둔 아래쪽으로 가라고 손짓을 하자, 문득 일어나 앉는다.


“할머니가 어떻게 좀 해줘.”


“으응?”


“할머니 무당이잖아. 신령님께 빌어서 다미 좀 살려줘.”


“이 할미는 이제... 아니, 그 보다 이미 간 사람을 무슨 수로 살리냐. 붙들고 있지 말고 그만 놔 줘야 돼.”


“뭐가 그래? 무당이고, 신령님이고,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힘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애들 말대로 그냥 사기꾼이었어?”


“미안하다, 아가.”


가을은 말을 할 수록 울화가 치밀어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림 받았는지 알기나 해? 니네 할머니 작두 탈 줄 아느냐, 다 미신이고 혹세무민하는 사기다, 할머니한테 시험 정답 좀 미리 알려달라고 해 봐라.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할머니가 미리 안 알려줬었냐, 니네 엄마 아빠 사고나는 거는 왜 몰랐대냐...”


엄밀히 따지면 숙정이 신내림을 받은 건 사고 후였지만, 어차피 사실관계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테다. 숙정은 눈물을 글썽이며 애꿎은 무릎만 두드렸다.


“왕따에 외톨이로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 엄마 아빠 없는 게, 할머니가 무당인 게 내 잘못이야? 그래 놓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하나 살려내지도 못해?”


가을은 가슴 속에서 열기구처럼 팽창하는 분노를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러다 정말 풍선처럼 터져 죽거나, 시커멓게 타서 죽거나, 둘 중 하나는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단어들을 할머니에게 모두 쏟아내는 것이 과하다는 건 알았지만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아아악!”


가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날이 찬데 그러고 나가면 어떡하니?”


숙정이 서둘러 외투를 챙겨서 따라나섰지만, 가을은 이미 멀리까지 달아나버렸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숙정은 망연자실 마루에 주저앉아 가슴을 쥐어뜯었다. 저 아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다시 이 육신을 포기하는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 숙정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허옇게 퍼져 나와 차가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가을이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환경도 친구들도 바뀌었지만, 가을을 향한 주변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울며 집에 돌아와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는 가을의 손을 쓰다듬으며 숙정이 말했다.


“아가, 비밀 하나 얘기해줄까?”


유리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던 가을의 눈이 금세 초롱초롱 해졌다.


“비밀?”


“응.”


“뭔데?”


“울음 그친다고 약속하면 얘기해주지.”


“약속!”


숙정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네 엄마랑 아빠가 사고로 떠났을 때, 할미가 이 방에서 꼼짝 않고 지냈던 거 기억하지? 그때는 여기가 법당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방이었지. 그때 할미가 여기서 뭐 했는지 알려줄까?.”


가을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할미는 네 엄마랑 아빠를 만나고 왔단다. 사고를 당하기 전으로 가서, 몸조심하라고, 행여나 죽더라도 너무 멀리 가지말고 우리 가을이 옆에서 잘 지켜주라고, 그렇게 얘기해주고 왔단다. 엄마 아빠도 그러겠다고 약속했어. 우리 가을이는 엄마 아빠가 없는 게 아니야. 할미가 보니까 항상 가을이 옆에 붙어서 지켜주고 있는데, 가을이는 안 느껴져?”


“거짓말!”


“진짜야.”


“몸조심하라고 미리 말했는데도 사고를 당했어? 무슨 어른들이 그래!”


“세상 순리가 그래. 할미도 몇 날 며칠을 뛰어다녔는데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어. 그래도 엄마 아빠가 가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다 듣고 왔지.”


“정말?”


“그러엄.”







얇은 니트 스웨터 차림으로 초겨울 밤의 단단한 바람을 맞으며 두어 시간 동안 열을 식힌 가을이 파래진 입술로 돌아왔을 때, 방안에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쪽문 너머에서 향냄새가 흘러들어왔다.


“할머니?”


“아가, 이리 온.”


법당에서 숙정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쪽문을 열고 넘어가니 향냄새가 가득했다. 제단 아래에 숙정이 붉은 활옷에 청대란치마를 차려입고, 꿩털을 꽂은 홍립까지 쓴 채 앉아 있었다.


“할머니, 이게 무슨...”


“여기 앉으렴.”


숙정이 제단 앞의 붉은 방석을 톡톡 두드렸다. 가을은 영문도 모르고 자리에 앉았다. 숙정이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홍립 위로 똑바로 선 꿩 깃털이 파르르 흔들렸다. 한 번은 괜찮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전단건달바왕을 칭송하는 무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을 다스리시매

십오 귀신을 처단하실 적에

식향하는 신루 따라

향훈에 취해 허공을 날으시며

긴나라천께 발을 맛쳐

악곡을 타고 세월을 거스르니

한 걸음에 삼백리 두 걸음에 삼일

세 걸음에 수미산 중턱에 도달하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단 앞에 앉아 있던 가을은 할머니가 다미의 혼을 달래주려고 굿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몇 년 전에 신력을 잃었다며 무당 일을 접고, 평산댁 같은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도움을 청해도 냉정하게 거절하더니, 자신을 위해 애를 쓰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가을도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두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돌면서 휘청 현기증이 났다.


- 누가 나를 불러내었느냐?


가을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우레와 같은 외침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사방이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눈 앞에 사자관을 쓰고 갑옷를 입은 장군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삼차극에는 세 갈래의 날에 각 다섯 개씩 도합 열다섯 개의 귀신 머리가 꽂혀 있었다. 무시무시한 눈을 부라리는 표정은 제단 위의 목상과 닮은 면이 거의 없었지만, 가을은 그가 전단건달바왕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대답이 없는 가을을 노려보며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숙정의 무가에 귀를 기울였다.


- 돌아가고 싶은 때와 장소가 있느냐?


머릿속에서 들리는 질문에 가을은 다미와 다퉜던 날의 자취방을 생각했다. 꿇은 무릎 양 옆으로 손을 짚고 납작 업드렸다.


- 좋다. 그곳의 향기를 떠올리거라.


전단건달바왕이 삼차극으로 허공을 가르더니 왼손의 여의주를 높이 들었다. 가을은 다미의 진한 재스민 향을 떠올렸다. 사방이 뱅글뱅글 돌았다. 아니, 도는 것은 가을 자신이었다. 도는 것은 우주의 이치였다.


- 허나 조심하거라, 어린 중생아. 갈라진 시공의 틈으로 다른 존재들이 따라 들어갈 수 있을지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고를 끝으로 회전이 멈추고 안개가 걷히면서 재스민 향기가 가을을 감쌌다.


눈 앞에 다미가 있었다. 가을의 자취방이었다.


“다미야!”


가을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응, 그래.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다미가 한 손으로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마구 헝클어트렸다. 함께 살겠다며 짐을 싸들고 가을의 월셋방으로 쳐들어온지 채 몇 달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 자취를 감췄다가 열흘만에 돌아온 날이었다. 그날 가을이 다미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나가 달라고 말했었다. 여기서부터 고치면 다미를 구할 수 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가을의 어깨가 들썩이자 당황한 다미가 몸을 뒤로 빼고 눈을 맞췄다. 가을은 다시 그를 끌어당겨 꼭 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립던 향기, 그립던 온기, 그립던 감촉.


“아냐. 너 때문 아니야. 네가 뭘 잘못해.”


다미가 가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가을은 그의 허리를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랑해, 다미야. 사랑해.”


다미는 가을의 얼굴을 떼어내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눈에 입을 맞추고, 코에 입을 맞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을아, 가을아. 너는 어쩜 이름도 가을이니?”


가을의 양 볼이 단풍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내 이름 별론데. 가을은 너무 짧고 금방 시들어 겨울이 되잖아.”


“나는 봄 꽃 보다 가을 단풍이 더 예쁘다고 생각해. 추운 겨울을 앞두고 힘껏 응원해주는 느낌이잖아. 그리고 가을이 지나가면 또 어때? 계절이 몇 차례 바뀌면 다시 돌아오는 걸 알고 있는데.”


가을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다미를 안은 팔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였다.


“아무데도 가지 마, 다미야. 내 옆에만 있어. 알았지?”


다미는 자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 가을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안해, 가을아. 이런 나라서.”


“그런 말이 어딨어. 너라서 사랑하는 건데. 얼른 약속해.”


“그래. 약속할게.”


그때 무언가 가을의 발 뒤꿈치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다미를 안았던 팔을 풀고 내려다 보니 조그맣고 검은 그림자가 방바닥을 빠른 속도로 달려 현관으로 향했다. 쥐?


“저게 뭐야?”


가을의 시선을 따라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미가 신발장 옆에 세워 둔 자신의 은색 여행가방을 가리켰다.


“아... 네 가방... 이잖아.”


“그러니까. 김가을, 너 설마 나 쫓아내려고 짐까지 다 싸둔 거야?”


가을은 허둥지둥 가방을 옷장 쪽으로 옮겼다. 다미를 밖으로 내보내면 안 돼. 짐을 다시 풀어야 해.


“아니야, 아니야. 잠깐 화가 나서 그랬어. 미안해. 아무 데도 가지 마, 제발.”


아까 그건 뭐였을까? 어디로 갔지? 가을은 다미의 짐을 다시 풀기 위해 여행가방을 옷장 앞에 눕히고 비밀번호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는데, 가방이 열리지 않는다. 다이얼의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맞는데? 비밀번호를 생일로 하는 바보가 어딨냐고 다미를 놀렸던 그 가방인데.


“뭐해?”


가을이 새삼 가방을 붙들고 씨름하는 모양이 우스운지 다미가 피식거리며 다가왔다.


“이게 안 열려.”


“비번 까먹었어? 내 생일이잖아. 내 생일을 잊은 건가?”


다미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아니, 0-5-2-0 맞잖아! 근데 안 열려.”


다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이얼을 직접 확인했다.


“에이, 뭐야. 0-5-2-3으로 맞췄네.”


그럴 리가? 가을이 눈을 비비고 다이얼을 살폈다. 정말로 마지막 번호가 3이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0에 맞췄는데. 가을이 머리를 긁적이고 다이얼을 아래로 돌렸다.


딸깍. 3.


응?


딸깍. 3.


딸깍. 딸깍. 딸깍. 돌려도 돌려도 계속 3이 나왔다.


“이거 왜 이래? 이상해!”


둘은 가방을 팽개치고 벌떡 일어나 당황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거대하고 차가운 손이 두 사람의 등을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방안 가득 구식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다미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다미의 휴대폰 벨소리였을 리는 없다. 그는 항상 휴대폰을 진동도 울리지 않는 무음으로 설정해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란하게 진동하는 다미의 휴대폰 화면에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는 표시가 떠있었다. 빨간색 거절 버튼을 눌렀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거절 버튼을 연거푸 눌러대도 전화는 끊기지 않았고, 음산한 전화벨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별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미야!”


다미 엄마의 목소리가 옆에 있는 가을에게까지 크게 들렸다.


“너는 그렇다고 새아빠를 신고하면 어떡해? 누구 덕에 이렇게 호의호식 하는데! 새아빠가 너를 친딸처럼 살갑게 대하다가 실수로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 잘못은 없니? 네 몸 간수는 네가 잘 했어야지, 어? 내 말 듣고 있어?”


다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이 양반 지금 자살한다고 칼 들고 난리났어. 빨리 와! 빨리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 고소도 당장 취하한다고 말씀드리고! 네까짓 게 새아빠 인생을 이렇게 망치면 안 돼! 지금 당장 들어와!”


몰랐다. 가을은 다미의 사정을 전혀 몰랐다. 비싼 옷에 외제차만 보고 그저 자유롭게 사는 부잣집 딸래미라고만 생각했다. 미안했다. 가슴이 아파왔다. 충혈된 다미의 두 눈을 양손바닥으로 덮었다. 내가 이 손을 치웠을 때 이 아이의 앞에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미의 입에서 절망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을아, 나 가야할 것 같아.”


“안 돼! 가면 안 돼!”


“가을아...”


“나가면 안 돼... 안 되는데...”


가을은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 속에 차츰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화해의 순간에 여행가방으로 관심을 집중시키고, 가방의 숫자 다이얼이 이상해지고, 다미를 호출하는 전화가 오는 이 모든 상황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 순리가 그래. 할미도 몇 날 며칠을 뛰어다녔는데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어. 그래도 엄마 아빠가 가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다 듣고 왔지.”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며 가을을 예정된 시공간, 교통사고 현장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열린 창문틈으로 흉포한 맹수가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에 검은 그림자가 점점 번져갔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계속 버티면 끝내 저들이 달려들어 눈앞에서 다미를 먹어치울 것임을 직감했다. 다미에게 사실을 이야기할 시점이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자 눈물이 주륵 흘렀다.


“다미야...”


다미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을을 위로하려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너를 구하고 싶어서 돌아온 건데...”


천장의 전등에서 벌떼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텔레비전이 제멋대로 켜지더니, 호러 영화에서 사람이 죽는 장면들만 모아 짜깁기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방안에 고기 썩는 악취가 차올랐다.


다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죽는 거구나...”


가을은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미안해, 다미야...”


“네가 뭐가 미안해, 바보야.”


다미가 가을의 둥그런 곱슬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가을아, 가을아. 나 네 덕분에 행복했어. 이런 나를 사랑해줘서 정말 고마워. 너한테 이 말을 해줄 수 있게 다시 와준 것도 고마워. 사랑해.”


가을은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집안 전체가 MRI 기계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요란하게 윙윙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창밖의 괴물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듯이 벽을 긁어댔다. 끝이 다가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까지 다치기 전에 가야겠다.”


다미가 잡았던 가을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가을이 손을 다시 내밀었지만 손끝만 살짝 스치고 멀어져버렸다. 서로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않으려 시선은 놓지 않았다. 사랑해. 가을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언젠가 다시 찾아갈게. 창문틈 열어둘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가을을 뒤로 하고 다미는 현관문을 나섰다. 가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침대보를 적시며 한참을 울었다.


창밖에서 짙은 안개가 흘러들어와 이내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앉은 다리 위로 구렁이가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 위에서는 날짐승이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은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짤랑 짤랑.


방울 소리. 할머니의 방울 소리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 방울을 흔들고 계신다. 가을은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끌거리는 손이 발목을 잡아 힘껏 뿌리쳤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을은 걸음을 재촉해서 점점 빠르게, 몇 차례를 넘어져 구르면서, 방울 소리에만 의지하여 안개 속을 내달렸다.


짤랑 짤랑.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짤랑 짤랑.


향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짤랑 짤랑.


가을이 숙정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됐다. 이제 됐어. 잘 돌아왔어, 내 새끼.”


숙정이 손녀를 꼭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긴장이 풀린 가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 품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래, 그래. 고생했어. 실컷 울렴.”


“할머니, 걔를 구할 수가 없었어.”


“그래. 지나간 일은 바꿀 수가 없단다.”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했어. 그치?”


“아무렴. 우리 가을이, 잘 해냈어.”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할 수 있었고.”


“그렇고 말고.”


숙정은 지칠대로 지친 손녀를 안방으로 옮겨 이부자리에 눕히고, 법당을 정리했다. 홍립도 벗고, 활옷과 대란치마도 잘 접어서 상자에 담았다. 얼마 남지 않은 향불을 끄려다가 그냥 두고 제단 위를 흘끔 쳐다봤다. 사자관을 쓴 목상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숙정을 마주 봤다.


오래전 아들과 며느리를 사고로 잃고 절망에 빠져있던 숙정에게 전단건달바왕이 찾아왔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으로 돌아가서 그 애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하겠다는 간절한 기도에, 우연인지 변덕인지, 그가 친히 응답한 것이었다. 며칠 동안 반복된 시도 끝에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 아들과 며느리에게 온전한 작별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숙정을 기다린 것은 무병이었다. 전단건달바왕이 숙정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령을 찾아 헤매는 고행의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혼과 육신을 구속해 그를 모시는 권속으로 부렸다. 몇 년 전 갑작스레 숙정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


손녀의 상처를 달래주기 위해 한 번 더 신령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숙정은 다시 그의 권속이 되어 명이 다하는 날까지 무당일을 하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가을이 돌아온 후 자신을 짓누르는 신령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간의 정을 봐서 한 차례 은혜를 베풀고 떠나신 걸까.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는대로 내 건강 상태가 신통치 않아서 나를 원치 않으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행이다, 다행이야. 상심에 빠진 가을이를 제정신으로 보살펴줄 수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가을은 눈을 감은 채 쌔근쌔근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머리맡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고르게 쓸어 주었다. 이마에 손을 짚어 보니 미열이 느껴졌다.


“보살님 계셔요?”


문 밖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리자 숙정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투덜거렸다.


“평산댁 저 노인네가 또 왔네.”


앉은 채로 몸만 문쪽으로 틀어서 차갑게 대꾸했다.


“왜 또 오셨어!”


“아직 안 주무셨네.”


“글쎄 그만 좀 찾아오셔요.”


“보살님, 저희 좀 도와주세요.”


평산댁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더해졌다.


“이제 신령님을 모시지 않는다고 몇 번을...”


“할머니.”


밖에 나가서 평산댁을 돌려 보내려고 몸을 일으키는 숙정을 가을이 차분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돌아 보니 가을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반듯이 앉아 깊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숙정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이 꺼진 것처럼 풀썩 주저 앉았다. 가을이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어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동시에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쪽문 너머 법당에서 향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끝.

댓글 1
  • 강엄고아 21.05.15 11:58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가을이의 인생에 행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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