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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정원의 여자들 - 한 장

2021.04.06 22:1104.06

허 씨 집안의 장남 훈은 잘게 세공된 보석들을 재며 살펴보았다. 금으로 길게 이어진 시곗줄과 루비 원석을 세밀하게 깎아 이은 줄을 두고 빛을 비추고, 손에 들어 낮게 잡아 흔들어도 보았다. 그는 가장 빛나는 금줄을 골라 양복의 빈 주머니에 수놓인 고리에 걸어 장식을 해두었다. 시계가 걸리지 않은 빈 시곗줄이 그의 가슴에서 찰랑거린다.

 

훈이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방으로 동생 백이 들어온다. 옷과 춤으로 묻은 흙더미와 먼지들에 훈은 슬쩍 몸을 피하였다.

 

[또 정원이야?]

 

[아니.]

 

동생 백이 펄럭이는 옷의 가지와 가지에 흙먼지들이 나폴 거린다. 훈은 손을 흔들며 작게 콜록 거렸다.

 

[또 안드로이드랑 싸운 거야?]

 

[아니.]

 

동생 백이 더러워진 재킷을 벗어젖히고서 아무렇게나 던져둔다. 타이를 풀고 셔츠도 찢듯이 강하게 잡아 연다. 그가 거칠게 셔츠를 연 바람에 단추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럼?]

 

백의 하얀 등으로 땀자국이 번들거린다. 그리 크지도, 그렇게 작지도 않은 몸에서 값비싼 소독제 냄새가 났다. 훈은 고개를 돌리며 흥미롭게 주절거렸다.

 

[우리 순결하고 고지식하신 식물학자께서 살충제라니.]

[답지 않은걸?]

 

백이 새 셔츠와 재킷을 껴입는다. 널브러진 옷가지를 발로 밟으며 그대로 문으로 다가간다. 거울 앞에 서있던 형, 훈을 돌아보며 동생, 백은 낮게 깔아 말하였다.

 

[형, 안드로이드는 말이야.]

[꽤 단단할 것 같은데 아니더라고.]

 

훈이 보는 앞에서 백은 손목을 풀며 금방 등을 홱 돌렸다.

 

[삽으로 몇 번이면 정리가 돼.]

 

훈은 저만치로 떨어져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를 지켜보았다. 백이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기술은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허 훈. 허 씨 장남의 믿음이었다.

 

 

 

 

 

 

 

 

 

형과는 반대로 백은 인간은 인간으로서 공존하여야 한다고 믿어왔다. 저런 고철 덩어리가 아니라. 백의 곁으로 메이드용 안드로이드들이 바쁘게 돌아다닌다. 백은 그들을 못 본 척 하고 그들이 몸에 닿을 것 같으면 먼저 어깨로 밀쳐 넘어뜨리곤 하였다.

 

[허 백!]

 

그의 곁으로 하녀 안드로이드가 넘어져 있었고 그를 부른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른은 백을 사납게 쏘아 보고 있었다. 허 백은 못들은 척 제 길을 가려 하나 저택의 십 수개는 있을 하녀 안드로이드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 허 백은 고개를 들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리로 오거라, 당장!]

 

기운도 당차다. 허 백은 혀를 끌고서 걸음을 돌렸다. 넘어진 안드로이드를 다른 안드로이드들이 부축하여 주었다. 허 백은 그런 그들을 흘겨보았다.

 

허 씨 집안의 대들보가 있는 방은 작고 검소하였다. 붉은 색의 융단과 짙은 고목의 색을 가진 고풍스러운 목조 벽이 숲 향을 내고 있다. 방의 한 쪽 가로 길게 뉘어진 거목으로 어른은 앉아 허 백을 마주 보았다. 허 백은 앉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 저택에 있어야 할 가족이라는 의무에 질려하고 있는 참이었다. 어른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둔 채 통보하듯 말하였다.

 

[결혼 준비를 하거라.]

 

[누구랑 말입니까?]

 

[나노하 가문의 요코 아가씨 말이다.]

 

[누구요?]

 

집안의 어른, 노인이 눈을 찌푸리며 등을 곧게 피었다.

 

[네 어릴 적 친구이자.]

[그 정원의 동반자말이다.]

[보기에 꽤나 성공적으로 태어났더구나.]

[직접 보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거다.]

 

[누구요?]

 

백은 노인의 말에 심기가 거슬린 듯 같은 말을 반복하여 물었다.

 

[요코 아가씨 말이다.]

 

[누구요?]

 

백의 목소리가 떨린다.

 

[허 씨 집안의 허 백!]

 

노인 역시 지지않고 맞서듯 고함을 내질렀다.

 

[넌 요코 아가씨와 결혼을 해야 해!]

 

[요코는 수년전에 죽었어요.]

 

노인이 자세를 고친다. 몸집이 작은 노인은 품위, 예절과 함께 계급과 위치에 대해서 오랜 시간동안 배우고 눈으로 본 인물이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상대에게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내려다보는 법을 터득한 그는 쉽게 겁내하지 않았다.

 

​[결혼 준비를 하거라.]

 

타이르듯 혹은 달래듯 노인은 잠자코 앉아 백을 마주보았다. 허 백은 그런 노인의 면전으로 성을 내었다.

 

[그 망할 로봇하고 결혼을 해요?]

[정말 정신 나갔어요!]

 

[아가씨는 로봇 따위가 아니야!]

[Well Life 회사에서 태어난 진짜 아가씨이다.]

 

​[그 망할 기업이 무어라고 그 따위 짓까지 해요?]

[아빠도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시게요?]

 

​노인이 숨을 고른다. 자세를 흐트리지도 쉽게 감정을 움직여서도 안 된다. 탁상을 짚으며 천천히 의자로 가 앉는다.

 

​[결혼 준비는 다 되었다.]

[넌 주변 정리만 하면 돼.]

 

​노인의 통보에 남자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말한다.

 

[그럼 전 이 저택을 떠나겠습니다.]

 

​​

 

 

 

 

 

 

허 백은 저택의 정원으로 갔다. 정원의 하늘로 아크릴 소재가 덮인 천장이 밝게 빛을 내고 있다. 맑은 하늘이 비춰진 정원이 푸르게 녹음이 진 모습에서 남자는 싫증이 난 얼굴로 정원 관리실로 들어가 기계들을 조작하였다. 맑은 하늘에서 정원은 구름이 낀 흐린 하늘로 내려간다. 정원 관리 일을 맡은 안드로이드가 남자에게로 다가간다.

 

[지금은 광합성을 할 시간입니다.]

[정원의 품질을 높이려면...]

 

[됐어.]

 

남자는 그녀를 지나쳐 풀밭을 거닌다. 먹구름이 낀 하늘로 고개를 든 은방울꽃을 만지며 남자는 묵묵히 정원을 돌보았다.

 

[저택의 정원은 곧 기업과 집안의 얼굴입니다.]

[우리 정원사들은 무엇보다도.]

 

[여긴 나만의 공간이야.]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내 영역이지.]

 

 

허 백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기계 장치를 흘겨보았다.

 

[내 정원은 진짜 하늘을 보아야 해.]

[저 따위 가짜 태양이 아니라.]

 

그녀는 뒤로 물러서 남자를 내버려 두었다. 남자는 한참동안 정원 사이로 꽃과 덩쿨, 나무들을 쓰다듬으며 하나씩 눈여겨보았다. 조경 기업의 제품 시리즈 중 하나인 작은 키의 조경사가 조팝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남자가 으름장을 놓는다.

 

[누가 물을 주라고 했지?]

 

[네?]

 

작은 몸집의 조경 안드로이드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어 허 백을 바라보았다. 허 백이 다가가자 뒤를 따르던 그녀가 작은 키의 안드로이드를 감싸 안았다.

 

[죄송합니다, 주의했어야 했는데.]

 

허 백은 더욱 표정을 구겼다. 저런 건 로봇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능한 행동이었는데. 그는 저 둘이 더는 보기가 싫었다.

 

[여긴 내 영역이야.]

[유일하게 인간만이 있을 수 있는 곳.]

 

허 백이 정원을 떠난다. 작은 키의 난이가 제 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팔에 매달려 보채었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꽃들이 아파할 거야.]

 

​[걱정 마,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게.]

 

난이의 어리광을 받은 은이는 곧장 정원의 제어 관리실로 뚝뚝 걸어갔다.

 

[어머, 우리 주인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더라?]

 

[언니.]

 

은이의 뒤를 졸졸 따르던 꼬마 안드로이드 난이가 잽싸게 은이의 품으로 숨어 들어가 몸을 움츠렸다. 은이는 눈을 굴리며 이런저런 말들을 꾸며 대었다.

 

[명령을 거스르려는 건 아니야.]

[그저 죽을 수 있는 꽃들만이라도...]

 

은이를 막아선 긴 흑발의 여자 안드로이드가 기괴한 웃음을 만면으로 지어 보였다. 난이는 그런 그녀의 미소에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정원사 시리즈 중 가장 맏이인 그녀가 난이에게로 미소를 건네었다.

 

[어머, 나의 동생.]

 

그녀의 미소가 난이에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꽃은 시드는 거야.]

[죽는 게 아니라.]

 

단이. 조경 기업의 첫 시제품이자 가장 먼저 허 씨 저택으로 온 시리즈. 그리고 어딘가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안드로이드. 같은 기업에서 자매로 설정된 우리들에게 단이, 맏언니의 성격은 결함이 있어 보일 정도로 차갑고 어그러져 있었다. 저런 성격은 기업의 제품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 인걸까. 아니면.

 

[그건 그렇고.]

 

맏이가 난이에게로 몸을 숙인다.

 

[우리 멍청한 꼬맹이.]

[또 주인님에게 사고를 쳤구나.]

 

[잠깐 언니!]

 

단이가 제 품으로 감싸고 있는 은이를 밀쳐 내고 난이를 끄집어내었다.

 

[으아아앙.]

 

울음을 우는 난이에게 올라탄 단이는 허탈한 웃음을 내었다.

 

[우리는 로봇이야.]

 

단이가 조경용 가위를 들어 난이의 목덜미를 누른다. 은이가 새되게 소리치며 그녀에게 달려 들었다.

 

[안 돼!]

 

거대한 가위가 은이의 가슴살을 찢고 피부가 날아간다. 깊게 패인 상처에 신음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서 단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아파하면 안 되지.]

 

작은 키의, 난이의 머리채를 붙잡아 짓누르며 단이는 그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이렇게 울어서도 안 되지.]

 

은이가 가슴과 어깨에서 새어 나오는 부품 조각들과 생체액을 부여잡으며 기어갔다. 은이는 애원하듯 간청하였다.

 

[언니, 제발.]

 

단이가 예의 그 기괴한 웃음을 거두고서 색 하나 없는 얼굴로 짧게 답하였다.

 

[그래 그럴게.]

 

거대한 정원용 가위로 난이의 목이 두 동강 난다. 처절하고도 망연한 표정을 짓는 은이에게 맏이인 단이는 위로하듯 말하여주었다.

 

[어머, 내 동생.]

[우리는 부서지는 거야.]

 

벌벌 떨며 온 몸이 생체액으로 범벅이 된 은이의 곁으로, 단이가 쪼그려 앉아 속삭였다.

 

[죽는 게 아니라.]

 

 

 

 

 

 

 

 

 

 

 

허 백은 사방으로 울려대는 음악소리에도 춤을 출 기분이 나지 않았다. DJ가 나온다. 수 십년 전에 죽어 무덤에 있어야 할 인간이 노래를 만들고 있다.

 

[Krale도 좋지만 신나는 건 Alen Walker이지, 안 그래?]

 

​[응.]

 

​허 백의 재미없는 반응에 훈은 앞주머니에서 은빛 담뱃갑을 꺼내었다.

 

​[해 봐.]

 

​갑 안에는 갈색 잎들이 돌돌 말려져 있었다.

 

​[담배?]

 

​[더 좋은 거.]

 

​남자는 형이 건넨 갑에서 잎 하나를 꺼내 손가락 사이로 굴려대었다.

 

​[불을 피우고 들이켜.]

 

​[나도 알아.]

 

​장난치듯 손가락 사이로 돌려대던 잎이 연기를 뿜어낸다. 형이 피운 연기를 따라 한 모금 들이킨다. 남자는 잎을 빨고 다시 들이킨다. 들이키고 다시 빤다. 아니 빨고 다시 들이켜야 했던가. 남자는 머리를 흔들며 형을 보았다. 몸이 떠오르는 기분이 든다.

 

[도시에는 인간이 살아야 해.]

 

[뭐?]

 

몸이 떠오르다 못해하늘을 타고 날아갈 지경까지 된다. 허 백은 혀가 꼬인 채로 말들을 내었다.

 

[인간들만이 도시에 있을 수 있어.]

 

[뭐라는 거야, 간 거야?]

 

허 훈이 제 동생의 눈앞으로 손을 휘저었다. 눈이 풀린 그의 얼굴로 클럽의 조명과 레이저들이 어지럽게 얽힌다. 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무대를 가리켰다.

 

[저기 봐, 댄서들이야!]

 

음악이 점점 더 커진다. 드럼이 울리고 신디사이저가 귀를 찢는다. 인간이 살아야 한다. 로봇 따위가 흉내 낼 수 없는 감정은 오직 인간만의 것이다. 남자는 연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훈이 동생을 끌어 무대로 오른다. 댄서들이 살갗을 비빈다. 형형색색의 빛들이 주위를 돌고 노랫소리가 정신없이 사방으로 튀어간다. 댄서 한 명의 엉덩이가 허 백의 손에 닿는다. 댄서가 백의 허리를 잡는다.

 

인간이 살아야 해, 인간만이, 오직 인간만이......

 

약이 너무 강한 탓에 허 백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만다.

 

 

허 백은 깨어났다.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침대에서, 자신의 집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였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정신은 깨었지만 녹초가 되어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도 떠지지 않았고 다리도, 팔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이 들어요?]

 

​여자 목소리. 그 댄서일까. 허 백은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혀가 굳는다.

 

​[좀 쉬어요, 마실 걸 내드릴 테니.]

 

​움직이고 싶다. 형이 준 약 때문인지 몸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정신이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쾅!

 

​[죄송해요, 방해꾼이 있어서.]

[금방 돌아올게요.]

 

​[저기.]

 

​혀가 고꾸라진 소리. 발음도 어눌하고 목도 가래가 껴 거칠었다. 간신히 혀를 움직여 단어를 이어 붙였다.

 

​[사람이어서 감사해요.]

 

​제대로 이야기를 했는지 백은 알 수 없었다. 파도처럼 정신이 밀려 나간다.

 

​[가, 감사해요.]

 

​[어머.]

 

​여자가 머뭇거리고는 금방 말을 붙인다.

 

​[저야 고맙죠.]

 

​쾅!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댄서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클럽에서는 어떠했지. 어떻게 만났더라. 남자는 떠오르는 몸을 내버려 두었다. 천장에서 굴뚝으로까지 올라 도시 위를 유영하는 꿈을 꾼다.

 

 

 

[정확히 20분 5초가 걸렸습니다.]

 

하녀용 안드로이드가 엄격한 얼굴로 꾸짖는다. 방에서 나온 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는 단아하게 몸을 정돈한다.

 

[단이 양.]

 

[어머, 방해를 했나 보네요.]

 

하녀용 안드로이드는 기계처럼 입을 곧게 벌리어 단어들을 쉴 세 없이 뱉어 내었다.

 

[주인님의 신변을 정리하는 건 저희의 업무입니다.]

[당신들은 정원을 돌보는 게 주 업무이죠.]

 

듣는 둥 마는 둥 싱글벙글한 얼굴의 단이에게로 하녀는 어조 하나 변화 없이 딱딱하게 말한다.

 

[안 그런가요?]

 

[아, 지루해라.]

 

단이는 하품을 하는 동작을 의식하여 연기해 보인다. 그러고 몸을 돌려 저택의 빈 복도를 홀로 걸어간다. 하녀 안드로이드는 허 백이 잠든 침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몸이 굳더니 그대로 뒷걸음질을 친다. 그녀가 다른 안드로이드를 부르러 간 사이. 허 백이 잠든 침구의 아래로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얼굴 반쪽이 박살난 댄서용 안드로이드가 기름을 흘리며 신음을 내었다.

 

정원 업무를 도맡는 안드로이드가 사라진 복도로 달빛 하나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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