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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래의 어느 날.
김은하는 스카이대학교 우주공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우주공학과는 고등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학과이다. 극심한 취업난으로 요즘 대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진로이다. 우주산업의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 때문에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우주공학과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부는 우주산업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자를 하고는 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빠르게 성장 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우주공학과를 졸업한다고 해서 다른 전공보다 취업이 더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세상은 멀지 않은 시기에 우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기정 사실로 믿고 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전국 최상위권이었고 수능에서 전국 1등을 한 은하는 적성보다는 취업을 고려해 경쟁이 매우 치열한 스카이대학교 우주공학과에 여유 있게 입학을 했다. 기말 고사가 끝났고 오늘부터 여름 방학이다. 친구들과 겨울방학에 따뜻한 나라로 놀러 가기 위해 이번 방학 동안 열심히 알바를 할 생각이다. 기말고사에서 모든 과목을 다 잘 본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아직 알바를 구하지 못해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은하는 막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우주산업시스템학과 최영우 교수가 오고 있다.
은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래 은하구나. 기말고사 잘 보고 있지?”
“방금 마지막 시험 보고 나오는 길이에요. 시험은 대체적으로 잘 봤어요.”
“잘 봤다니 다행이네. 그럼 방학 잘 보내라.”
“네 교수님도 잘 보내시고요. 다음 학기에 봬요.” 은하가 목례를 했다.
잠시 후 최영우 교수가 다시 은하를 부른다. “은하야, 지금 잠깐 시간 되니?”
“네 교수님 괜찮은데, 무슨 일이세요?”
“혹시 이번 방학에 특별한 계획 있어? 알바 구했어?”
“아니요. 지금부터 알아보려고요.”
“그래? 그럼 내 연구실에 잠시 와볼래.”
은하는 최영우 교수가 방학 동안 일거리를 주려나 보다 생각을 한다. 최영우 교수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교수에다 학생들을 항상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고 수업에서는 늘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그리고 최영우 교수는 연구 프로젝트도 많이 진행을 하고 있다. 대학원생인 조교들에게는 전문적인 실험과 리서치를 맡기고, 간단한 작업 같은 것은 학부생들에게 많이 시키는 편이다. 학부생들에게는 최영우 교수 연구실의 알바가 페이도 괜찮고 일도 편한 꿀알바로 소문이 나있다. ‘앗싸’ 은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최영우 교수를 따라갔다. 최영우 교수와 은하가 연구실에서 마주보고 앉아있다.
“은하야, 혹시 방학 동안 시간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알바 할 생각 있니?”
“그럼요 교수님, 저야 너무 좋죠. 그리고 교수님 연구실 알바라면 무조건 해야죠.” 은하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우리 연구실 알바가 아니다.”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 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럼 어디서 하죠?”
“내 후배 중에 김현준 박사라고 있는데, 그 김박사가 운영하는 벤처기업의 일이다. 내가 들어보니 일이 어렵지도 않은데 알바비는 꽤 많이 준다고 하더라. 대신에 두 달 반 동안 9시부터 6시까지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고. 김박사가 학부생 중에 똑똑하고 성실한 친구로 추천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어. 복도에서 은하 너를 보니 네가 딱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할 마음이 있니?”
“네 저야 완전 좋죠. 일이 어렵지도 않은데 페이도 많이 준다니. 어차피 전 이번 방학은 알바에 완전 집중하려고 했거든요. 겨울방학에 해외여행 가려고요.”
“그래 잘 됐구나. 아 참, 그리고 그쪽에서 두 명을 추천해달라고 했어. 은하 네 친구 중에 성실한 친구 한 명 더 데리고 가면 될 것 같은데 가능 할까?”
“그럼요. 알바 하고 싶어하는 애들은 널렸어요. 교수님 추천해주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내가 고맙지. 가서 성실하게 잘 하고 다음학기에 보자. 그리고 내가 김박사에게 연락을 해 놓을 테니 너한테 연락이 갈 거다.”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최영우 교수 연구실에서 나왔다. 얼마 있지 않아 알바 할 회사의 이혜리 팀장이라는 사람한테 연락이 왔고, 대략적인 알바에 대한 내용을 들었다. 그리고 은하는 친한 친구 두 명에게 알바 할 생각이 있는지 톡으로 물어 보았다. 친구 한 명은 기말고사가 끝나고 집에서 자느라고 은하의 톡을 늦게 확인했고, 나머지 한 친구 임혜성은 내일 있는 마지막 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터라 바로 하겠다고 답을 보내왔다. 그래서 은하와 혜성이 함께 하기로 결정이 됐고, 그날 늦은 오후 은하는 혜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으나으나 김은하 안녕.” 혜성이 전화를 받았다.
“혜써엉, 공부 중?”
“아니 나 집에 가는 길에 경부고속도로 방음벽에 왔어.”
“헐 너 또 방음벽에 부딪쳐 다친 새나 죽은 새 보러 간 거야? 아우 진짜 이 기괴한 년 같으니라고, 하여간 너 진짜 특이하다. 다친 새 치료해주는 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죽은 새를 그림으로 그리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돼. 안 무서워?”
“무섭기는, 나는 삶과 죽음을 바로 쳐다보면서 탐구하고 있는 거야.”
“뭐래? 그나저나 내일 시험은 공부 다했어?”
“내일 보는 시험은 그렇게 어려운 과목은 아니어서 대충 끝냈지.”
“그래 내일 시험 잘 봐라. 그리고 아까 톡으로 얘기한 우리가 알바 할 회사는 광화문에 있고, 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시작이래. 우리가 할 일은 태블릿 PC 세팅만 하면 된데.”
“오케이 좋아. 알바비는 얼마나 주려나?”
“정확한 알바비는 못 들었는데, 교수님 말씀으로는 꽤 많이 준다고 했어.”
“태블릿 PC 세팅하는 거면 진짜 간단한 작업일 것 같은데 페이까지 괜찮다니 좋은데. 어쨌든 은하야 다음주에 술이나 먹자.”
“좋지. 내일 시험 잘 보고 다음주에 보자.”
은하와 혜성이 전화를 끊었다.

2
은하와 혜성이 알바를 하기로 한 회사의 이름은 주식회사 스페이스시스템이다. 광화문역 근처 수퍼노바 센터라는 건물 37층에 위치해 있다. 은하와 혜성은 10분 일찍 사무실에 도착 했다. 사무실까지 가는데 신원 확인을 1층에서 한 번 그리고 37층에서 또 한번 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안 요원이 두 사람의 스마트폰의 카메라와 케이블 단자를 모두 테이핑하여 막았다. 그리고 은하와 혜성의 열손가락 지문과 양쪽 눈 홍채를 등록하였다. 스페이스시스템은 알바생의 정보를 보안 목적 외에 사용하면 안 되고, 알바생 또한 회사 정보를 외부로 누출하면 안 되며 이를 어길 시 법적 책임이 따른다는 상호 협약서도 작성하였다. 스페이스시스템은 건물 한 층을 다 쓰고 있었고, 사무실은 모던하고 세련된 분위기이다. 창문 밖으로는 광화문 광장, 경복궁, 그리고 저 멀리 북악산이 보인다. 은하와 혜성은 이혜리 팀장 안내로 꽤 넓은 회의실에 왔다. 회의실 긴 테이블에는 노트북 두 대가 놓여있고, 벽에는 납작한 직육면체 상자가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다. 태블릿 PC가 들어있는 상자인 것 같다.
“안녕하세요. 저는 통화를 했던 이혜리입니다.” 이혜리 팀장은 은하와 혜성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은하와 혜성도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다. 명함에는 스페이스시스템 우주여권 사업팀 팀장 이혜리라고 적혀있다. 이혜리 팀장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정도인 것 같고, 온화한 인상에 세련된 스타일이다. 여학생들이 동경할 만한 잘 나가는 멋진 엘리트 직장인의 포스가 풍긴다.
“잠시 후 저희 회사 대표님이신 김현준 박사님이 직접 오셔서 인사도 하고,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드릴 거에요.”
이팀장이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0대 중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키도 크고 풍채도 좋다. 굉장히 똑똑하고 야심이 있어 보이는 인상이다. 은하와 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고, 둘 다 김현준 대표를 보고 젊은 나이에 크게 성공한 벤처 사업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스페이스시스템 대표 김현준입니다. 최영우 교수님께서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들이라고 칭찬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두 달 반 동안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하실 일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혹시 지구와 같은 궤도에서 태양을 공전하는 호텔과 리조트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그거 모르는 사람은 없죠. 여행 경비가 너무 비싸게 들어서 가고 싶어도 못 가서 그렇죠.” 혜성이 대답했다.
“정확합니다. 이미 여러 나라 기업들이 운영을 하고 있죠. 우리나라 기업들의 리조트도 있고 앞으로 새로 건설 될 계획도 있습니다. 하지만 얘기한 데로 워낙 경비가 비싸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가 없어서 현재로써는 우주 리조트는 그렇게 채산성이 좋은 사업은 아닙니다. 많은 기업들이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주산업 발전을 위해서 올해 4월 정기 국회에서 국내 기업의 우주 리조트로 여행을 갈 경우 경비의 50%를 지원해주는 법안이 통과 됐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용부담이 줄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가 있겠지요. 이 법에 의거해서 정부 지원은 3년후부터 시행이 되고 50년동안 지속이 됩니다. 우주 호텔과 리조트를 운영하는 기업들에게는 아주 희망적인 소식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주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고요. 그리고 또 하나 우주여행 여권 관련한 법도 개정이 될 예정입니다. 내년에 국회에 상정되어 바뀌지 않을까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주여권 법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아니요.” 은하와 혜성은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내년에 법안이 통과되면 3년후부터 우주여행 시에는 우주여권을 따로 발급받아야만 합니다. 아시겠지만 지금은 우주에 나갈 때도 해외에 갈 때랑 같은 수첩형태의 여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 발급되는 우주여권은 생체칩 형태로 손등에 삽입하게 됩니다. 저희 회사에서 이 신규 우주여권 시스템을 개발을 하였고, 내년부터 시범사업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그 동안은 여권을 신청하려면 구청에 가셨을 겁니다. 일반 여권은 우주외교부에서 계속 발행을 하지만, 생체칩 형태의 우주여권은 건강보건부에서 발행할 예정입니다. 지역 보건소나 국공립병원에서 우주여권을 신청을 할 수가 있고, 신청 승인이 완료되면 간호사가 손등에 주사기로 생체칩 우주여권을 주입을 하게 됩니다. 우주여권은 우주여행 시에 신원 확인뿐만 아니라, 여행자의 건강 체크도 자동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건강관리를 통해 여행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시스템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생체칩 시스템을 통한 여행자 건강관리는 아직은 법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 우주여권 법이 개정될 때 국회에 우주여행 건강관리 법도 같이 상정이 돼서 통과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생체칩으로 우주 여행자의 건강과 안전 또한 관리가 가능하게 됩니다. 생체칩 여권 시스템은 저희 회사만 보유하고 있는 혁신적인 기술입니다. 우주여권 관련한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두 분이 하실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뒤에 쌓여있는 상자에는 우주여권 발급 신청에 쓰일 태블릿 PC가 들어있습니다. 그 태블릿 PC에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설정만 해주면 됩니다. 자세한 설치와 설정 방법은 이혜리 팀장이 알려드릴 겁니다. 한 가지 당부할 건 들어오실 때 스마트폰에 테이핑을 했을 텐데, 절대로 사진을 찍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정보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안됩니다. 보안에 특별히 신경을 써주세요. 그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김현준 대표는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김현준 대표를 이어받아 이팀장이 설치 방법을 설명한다.
“대표팀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태블릿 PC는 우주여권 신청 시에 신청자 정보를 입력하는데 쓰이는 거고요. 태블릿 PC에 프로그램 설치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해요. 제가 직접 보여드릴게요. 우선 앞에 있는 노트북과 태블릿 PC를 연결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노트북의 설치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면, 태블릿 PC에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가 있습니다. 설치를 하는 중에 팝업되는 질문은 모두 Yes를 누르면 되고요. 노트북에서 태블릿 PC로 설치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에요. 프로그램 설치가 끝나면 아무것도 없는 태블릿 PC 바탕화면에 앱이 하나가 생길 겁니다. 그러면 앱을 실행시켜서 설정을 시작하면 됩니다. 설정하는 방법은 테이블에 설정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 매뉴얼대로 진행 하시면 되고요. 설정도 아주 간단합니다. 설정까지 끝났으면 지문 인식, 홍채 인식, 서명 인식이 잘 작동되는지를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블릿 PC 하단에 건강보건부 스티커를 붙여 주고, 태블릿 PC를 충전까지 하면 프로그램 설치와 설정 작업이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게 있어요. 절대로 충전을 100%까지 하면 안됩니다. 지금 모든 태블릿 PC가 3%~5% 정도 충전이 되어있을 거에요. 충전은 85%~90% 정도만 하면 됩니다. 현재 프로그램에 약간 문제가 있어서 100%까지 충전을 하면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 부분은 앞으로 수정할 예정이고요. 절대 100%까지 충전을 하면 안되니 주의해주세요.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해요. 100%로 충전하면 프로그램 오류뿐만 아니라 태블릿 PC를 못 쓰게 될 수도 있어요. 알겠죠?”
이팀장은 충전에 대해 조심하라고 수 차례 반복하면서 강조를 했다. “네, 알겠습니다.” 은하와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태블릿 PC는 총 2,500개입니다. 두 달 반 동안 지금 말씀 드린 작업을 하면 됩니다. 제 자리는 회의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궁금한 점이 있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저한테 와서 얘기하면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세요.”
말을 마치고 이팀장도 회의실을 나갔다. 은하와 혜성은 배운 대로 태블릿 PC에 프로그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그야말로 단순한 작업이다. 그리고 페이는 카페 알바에 비하면 4배 정도 많다. 프로그램을 다운 받고 설치가 되는 동안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잠깐 잠깐 게임을 할 수도 있고 책도 읽을 수 있다. 또한 작업하는 회의실에 둘만 있다 보니,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할 수도 있다. 점심 시간에는 이팀장이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것도 사준다. 은하도 그렇고 혜성이도 이게 지금까지 해본 알바 중 최고이다.
첫날 일을 마쳤다. 인사를 하고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이팀장은 프로그램 설치와 설정을 잘 했는지를 묻기보다, 100%로 충전한 태블릿 PC가 없는지를 물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작업할 때 그 부분을 주의해달라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은하와 혜성은 사무실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반포에 산다.
“은하야, 충전 100%로 하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 혜성이 말했다.
“그게 뭐가 이상해. 100%로 하면 프로그램이 오류가 생긴다잖아.”
“그러니까, 이상하지. 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태블릿 PC를 100%로 충전한다고 오류가 생기는 그런 허접한 프로그램이 어디 있어? 그것도 정부에 납품하는 제품인데, 그렇게 허술하다는 게 말이돼?”
“응 난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그거 고친다고 했잖아. 하여간 너는 특이해. 쓸데 없는 생각도 많이 하고, 의심도 많고.”
“이팀장님이 100%로 충전하지 말라고 지나치게 강조한 것도 좀 이상해. 혜성아, 우리 한 개 몰래 100%로 충전시켜 볼까?”
“아이 이 미친년이 진짜, 너 정말로 하지마. 태블릿 PC 못 쓰게 되면 네가 책임 질 거야? 제발 우리 사고 치지 말고 곱게 돈만 벌고 나가자. 우리 겨울방학에 여행 가야지. 아우 진짜 너랑 하는 게 아니었는데. 샛별이가 그때 마침 시험 끝나고 처자는 바람에.. 정말 불안 불안하다 너랑 하니까.”
“에이 혜성아, 왜 그래? 너 샛별이랑 같이 했으면 분명 싸우고 6개월동안 서로 말도 안 했을 걸. 하하.”

3
알바 시작 3주차 금요일. 은하와 혜성은 특별한 어려움 없이 알바를 잘 하고 있다. 두 달 반 동안 태블릿 PC 2,500개를 세팅하는 것이 아주 빡빡한 일정도 아니어서 차질 없이 예정된 기간 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은하와 혜성은 오전 일을 마치고 이혜리 팀장과 함께 사무실 근처 평양냉면집에 왔다. 혜성과 이혜리 팀장은 물냉면을 그리고 은하는 온면을 시켰다. 그리고 만두 6개도 주문했다.
“은하야, 더워 죽겠는데 너는 무슨 이 여름에 온면을 시키냐?”
“어제 술을 먹었더니 속이 안 좋아서 그래. 차가운 거 먹으면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하하 은하씨, 여기 온면도 괜찮다고 하더라고 나는 안 먹어봤는데. 괜찮을 거야.” 이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세 사람은 먹기 시작한다.
“은하씨랑 혜성씨, 둘이 엄청 친한 거 같던데, 같은 과 친구라고 했지?”
물음에 혜성이 대답한다. “네 맞아요. 과도 같고 사는 동네도 같아요. 중고등 학교는 다른데 다녀서 그때는 몰랐고요. 대학 와서 만났는데, 아무래도 동네가 같다 보니 더 빨리 친해졌어요.”
“졸업하면 뭐 할거야?”
“팀장님처럼 우주산업 관련 기업에 취업해야죠. 워낙 취업이 어려워서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은하가 대답했다.
은하에 이어 혜성이 말한다. “저는 원래 미대를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취업하기 좋은 우주공학과에 가라고 해서 왔거든요. 그래서 졸업하면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에요.”
“혜성이 얘는 애가 좀 독특하고, 평범하지가 않아요. 미술, 영화 같은 예술에도 관심이 많고, 직접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요. 그런데 그림을 이상한 것만 그려요. 팀장님도 얘가 그린 그림 보면 깜짝 놀랠걸요. 좀 특이한 애예요.”
“궁금하네, 어떤 그림인지 나중에 꼭 보여줘. 그리고 영화 좋아하면, 내가 추천 하나 할게. 혜성씨 혹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는 영화 알아? 아주 아주 옛날 영화야.”
“아니요. 처음 들어 봤는데요. 우리나라 영화에요?”
“아니 옛날 홍콩 영화인데, 감독은 우리나라 사람이야. 꼭 한번 봐봐. 은하씨도 꼭 봐. 진짜 재미있어. 죽음의 다섯 손가락 꼭 기억해둬.”
“네, 시간 될 때 꼭 찾아서 볼게요.” 혜성이 말했다.
“진짜 꼭 기억해뒀다. 꼭 한번 봐. 정말 재미있어. 완전 강력 추천하는 영화야.” 이혜리 팀장은 다시 한번 강조를 했다.
냉면과 온면을 다 먹고 만두 하나씩을 먹으니 배가 부르다. 은하와 혜성은 남은 만두는 더는 못 먹을 것 같다. 배가 부르다고 하니 이혜리 팀장이 남은 세 개의 만두를 모두 먹었다. 은하와 혜성은 3주동안 이팀장과 매일 점심을 먹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이팀장은 정말 잘 먹는 다는 것이었다. 잘 먹고 많이 먹는다. 그런데도 살이 찌기는커녕 딱 보기 좋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다. 3주동안 같이 일을 하고 점심을 먹으면서, 이혜리 팀장과 사이가 꽤 가까워 졌다.
오후 6시가 됐고 은하와 혜성은 퇴근을 하려고 이혜리 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사무실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이혜리 팀장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꼭 기억하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혜성은 이혜리 팀장이 자꾸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보라고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어서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빈다.
“은하야, 이팀장님 좀 이상하지 않아?”
“아 진짜, 뭐가 또 이상해? 이팀장님 너무 괜찮은 사람 같은데. 멋있고, 예쁘고, 성격도 좋고, 일도 잘하는 것 같고 말이지. 내 워너비야.”
“그건 나도 동의하는데. 뭔가 자기가 당부해야 하거나 추천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나치게 강조하잖아. 강조를 해도 너무 지나치게 하잖아. 이상하지 않아? 우리 퇴근할 때도 굳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를 보라고 다시 강조는 게 너무 이상해.”
“야 네가 더 이상해. 죽은 새 집에 가져가서 부패하고 구더기 나오는데 그거 관찰하면서 그림 그리는 네가 더 이상하지. 도대체 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냐? 좀 평범하게 사고해라.” 은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예술을 몰라서 그러는 거고, 나도 이팀장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하긴 해.”
“너 주말 내내 ‘이팀장님 뭔가 좀 이상한데..’하고 계속 생각할거지? 안 봐도 뻔하다. 나는 이번 주말에 잠이나 푹 잘 거니까, 나한테 연락해서 ‘생각해보니까 이팀장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런 쓸데 없는 말 하지 마라.”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오전이 되었다. 은하와 혜성은 함께 알바하는 스페이스시스템 사무실에 도착 했다. 20분정도 일찍 왔더니, 사무실에 출근한 사람이 한두 명밖에 없다. 두 사람은 사무실 가장 안쪽 끝에 있는 자신들이 일하는 회의실로 걸어간다. 회의실에 앞에 도착해서 은하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불을 켰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불을 켜자마자 은하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은하의 비명에 놀란 혜성은 재빨리 뒤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으아아” 혜성도 들어가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어떤 여인이 테이블 위에 목을 매고 죽어있고, 테이블 위는 응고된 피 범벅이다. 은하는 주저 앉아 울고 있고, 혜성은 죽은 여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시신은 목이 줄에 걸린 채 벽을 향해 있고, 혜성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 목을 맨 여인은 지난주 금요일 이혜리 팀장이 입은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혜성은 테이블을 돌아 죽은 여인의 정면으로 갔다. 목만 매단 게 아니라 왼쪽 손목에는 깊게 패인 상처가 나있다. 왼쪽 손목에서 흘러 떨어진 피가 테이블 위에 넓고 두껍게 응고되어있다. 옷, 체형, 헤어스타일이 이혜리 팀장이 맞다. 얼굴도 이혜리 팀장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목이 매달려 있어서 그런지 핏기가 전혀 없이 새파랗고 또 많이 부어있어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버렸다. 혜성은 울고 있는 은하를 데리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나니 혜성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혜성은 회의실로 들어가 목을 맨 이혜리 팀장을 다시 살펴 보았다. 잠시 후 출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혜리 팀장 죽음으로 인해 사무실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15분정도 지나니 경찰이 도착했다. 최초 목격자인 은하와 혜성은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4
며칠 간 경찰 조사가 진행이 되었고, 이혜리 팀장의 죽음은 자살인 것으로 최종적으로 결론이 났다. 사건 당일 은하와 혜성이 조사를 받고 경찰서에서 나오는데, 은하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었다.
“여보세요?”
“김은하씨죠.”
“네 맞는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스페이스시스템에 이승호 과장이라고 합니다. 사무실에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저를 봤을 거 같은데. 아마 제 얼굴 보면 아실 거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 대표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알바 2주정도 중단하신다고 해서요. 두 분도 많이 놀라셨을 테니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시잖아요. 저희 회사도 내부적으로 당황스러운 상황이라 수습할 것도 많아서요. 2주 지나면 다시 시작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2주동안 잘 쉬시고 다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해 주세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하가 전화를 끊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1주일이 지났다. 늦은 저녁 은하, 혜성, 그리고 친구 샛별이 동네 실내포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
“와 진짜 무서웠겠다. 누군가 죽는 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구나. 나 같으면 바로 기절했어. 그 알바 내가 안 하길 진짜 잘했다. 너희 둘은 어떻게 그걸 보고도 멀쩡하냐?” 샛별이 말했다.
“야 멀쩡하기는 나는 보자마자 주저앉아서 펑펑 울었어. 지금도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쳐. 혜성이는 놀라지도 않더라. 놀라기는커녕 그 이팀장님 시신을 자세히 봤다고 하더라고 글쎄.” 은하가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혜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도 놀라긴 많이 놀랬어.”
“그런데 그분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궁금하네. 같이 일하면서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은 느낌은 못 받았어? 왜 있잖아. 우울해 보인다던가 아님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던가 하는 그런 자살 징후 같은 거는 없었어?” 샛별이 물었다.
“응 나는 그런 느낌 전혀 못 받았어. 내가 보기에 이팀장님은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어. 예쁘고, 능력 있고, 직장도 좋고 그리고 성격도 아주 밝은 편이었어. 전혀 우울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어. 그래도 모르지 우리랑은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우울한 면이 있어도 잘 들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어쨌거나 나는 자살할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전혀 못 받았어. 혜성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은하야, 내가 계속 얘기했잖아. 이팀장님 좀 이상하다고.”
“어떻게 이상한데?” 샛별이 물었다.
“야야 샛별아, 그건 들을 거 없어.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얘가 더 이상하다니까, 내가 볼 때는 하나도 안 이상해.”
“어쨌거나 이상하든 안 이상하든 간에, 나도 은하처럼 3주정도 이팀장님을 보면서 자살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어. 나는 이혜리 팀장님이 자살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은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한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야, 경찰 조사에서 자살로 결정이 났는데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건 도대체 뭐야? 너야말로 진짜 이상해.”
“왜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소주 한잔을 비우며 샛별이 묻는다.
“내가 다친 새를 관찰을 많이 하잖아. 그 다친 새들을 돌볼 때 얘는 살겠구나 얘는 죽겠구나 하는 느낌이 있거든. 그 느낌이 어떻게 드는 건 줄 알아?”
“어떻게 드는데?” 은하와 샛별이 동시에 물었다.
“먹이를 주었을 때 얼마나 먹으려고 하는 의지가 있느냐에 따라서야. 매번 그런 거는 아니지만, 정말 아픈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먹으려는 새들은 살아날 확률이 높아. 내가 보기에 살아난 새보다 더 심각하지도 않은데, 어떻게든 먹이려고 해도 안 먹는 애들도 있거든. 내가 수의사는 아니니까 안 먹는 애들까지 살릴 수는 없잖아. 나는 관찰을 하면서 그 작은 새들도 그 의지에 따라 삶과 죽음이 많이 갈린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이팀장님은 평소에 음식을 굉장히 잘 먹는 사람이었어. 은하야, 이팀장님 자살한 날을 생각을 해봐. 그 날 우리가 같이 점심을 먹었었잖아. 죽음을 결심을 한 사람이 그렇게 잘 먹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날 유독 잘 그리고 많이 드셨었잖아. 평양냉면 한 그릇에 만두 네 개를 먹었잖아. 너는 이팀장님이 그날 밤에 자살할 사람처럼 보였어? 나는 절대 자살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어.”
“그러게 혜성이 네 말 듣고 보니 그러네. 그날 진짜 유난히 평소보다 잘 드셨거든. 그날 밤 죽기로 한 사람이 그렇게 먹는 다는 건 말이 좀 안되기는 하네.” 은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샛별이 묻는다. “뭐야, 그럼.. 자살이 아니란 말이야?”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강하게 의심이 된다는 거지.” 혜성이 말했다.
“진짜 무섭다. 거기서 사람이 죽었는데, 너네 그 알바 계속 할거야?”
“그럼 당연히 해야지. 알바비를 얼마나 많이 주는데. 우리는 그거 태블릿 PC 세팅만 하면 돼. 자살이든 타살이든 우리랑은 상관 없어. 혜성아, 끝까지 계속 할거지?”
“그럼 은하야, 해야지. 안 할 이유가 없잖아. 당연히 끝까지 해야지.”

5
알바를 쉬는 동안 이혜리 팀장이 태블릿 PC를 100%로 충전을 하지 말라고 강조한 말이 혜성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충전을 완전히 한다고 프로그램이 오류가 나고 태블릿 PC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분명 거기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혜리 팀장이 자신과 은하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자살 사건이 발생하고 2주가 흘렀다. 은하와 혜성은 다시 스페이스시스템 사무실에 출근하였다.
“안녕하세요? 2주 전에 통화했던 이승호 과장입니다. 저 아시겠죠?”
“네 안녕하세요. 정말 오다가다 많이 뵌 분 맞네요.”
이승호 과장은 새로운 회의실로 안내해주었다.
“전에 하던 데는 좀 그렇잖아요. 여기서 계속 하시면 돼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저한테 얘기해 주시고요.”
전에 쓰던 회의실보다는 공간이 좁지만 작업하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이혜리 팀장이 자살한 장소 보다는 새로운 회의실이 은하와 혜성에게 정서적으로 더 편안한 느낌을 준다. 전 회의실에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없었는데, 여기는 밖을 볼 수가 있다. 전망이 좋다. 멀리 보이는 북악산은 한여름답게 짙은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다. 공중에는 간간히 비행자동차와 택배용 드론이 날라 다니는 것이 보인다. 다시 알바 작업이 시작됐다. 혜성은 은하 몰래 태블릿 PC를 100%로 충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복귀한 첫 날 혜성은 태블릿 PC 1대를 100%로 충전하였다. 하지만 프로그램 오류가 발생하지 않았고, 태블릿 PC도 정상적으로 잘 작동을 한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혜성은 다음 날 또 1대를 100%로 충전해 보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번에도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이 아주 잘 작동을 하고, 태블릿 PC도 고장이 나지 않았다. ‘뭐지? 왜 절대로 100%로 충전하면 안 된다고 강조를 한 거야.’ 혜성은 거의 한 달 동안 은하 눈치를 봐가며 태블릿 PC 100대 이상을 100%로 충전을 하였다. 은하는 무신경하게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자기가 맡은 태블릿 PC만을 열심히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세팅할 뿐이다. ‘무심한 것 같으니, 전국 1등의 집중력은 역시 남달라. 내가 은하보다 공부 못하는 이유를 이제 깨달았네.’하고 혜성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100대가 넘는 태블릿 PC를 완전히 충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 단 1대도 오류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주 잠시라도 오류라고 의심할만한 현상조차 없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혜성은 전혀 오류가 없으므로 은하가 노발대발, 지랄발광을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은하랑 상의를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은하야, 나 이상한 거 발견했어.”
“뭐가 또? 혜성아,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어. 우리 제발 조용히 돈 벌고 나가자.”
“너도 이팀장님이 자살 할 사람은 아니다라는 내 의견에는 동의 했잖아. 그렇지?”
“그건 그렇지. 나도 그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해.”
“은하야, 나.. 그러니까.. 그때 이 팀장님이 계속 강조한 거 있잖아. 사실 나 태블릿 PC 한 100대 정도 100%로 충전해 봤어.”
은하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한다. “뭐라고? 아 놔 진짜 이 또라이 같은 년이, 이게 미쳤나.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마네. 진짜 샛별이랑 같이 했어야 했는데.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은하야, 흥분하지 말고 내 말 들어봐. 100대 넘는 거 중에 단 1대도 오류가 안 났고 태블릿 PC도 완전 멀쩡해.”
은하가 놀라며 차분하게 묻는다. “진짜? 단 1대도?”
“응 전혀, 어떠한 오류도 어떠한 고장도 없었어.”
“아유 다행이다. 알바비 못 받는 줄 알았네. 너 도대체 쓸데 없는 짓은 왜 한 거야?” 은하가 가슴을 쓸어 내린다.
“알바비야, 당연히 받을 수 있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이팀장님이 그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 했는데 오류가 전혀 없잖아. 그때는 1대라도 완전히 충전하면 큰 일 날것처럼 말했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진짜 그렇기는 하네. 정말로 1대도 오류가 안 난 거 맞아?”
“응 그렇다니까.”
“진짜 네 말대로 그때는 1대라도 충전이 100%가 되면 프로그램도 문제가 생기고 태블릿 PC도 완전히 못 쓰게 될 것처럼 말했었는데 말이야. 아무 문제가 없다니 이상하다.”
은하와 혜성이 모두 말 없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은하도 생각을 해보니 이혜리 팀장이 자살한 것도 그렇고, 별거 아닌 것에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다. 은하와 혜성은 100%로 충전을 한 태블릿 PC를 말없이 각자 살펴 보고 있다. 은하가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뭐지, 왜 강조했을까?’ 회의실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린다. 그러다 갑자기 은하가 긴 침묵을 깼다.
“혜성아, 이팀장님이 강조하던 것 중에 네가 이상하고 한 것이 하나 더 있었잖아. 거기에 뭐가 있지 않을까?”
“그게 뭐였더라?” 혜성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은하를 빤히 쳐다본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은하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맞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그 영화를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말 했었지. 그거는 뭘 의미 하는 걸까, 은하야?”
두 사람은 또 말 없이 깊은 침묵의 바다 속으로 빠졌다. 은하가 밖을 본다. 눈앞에 한 없이 파랗고 맑은 여름 하늘이 펼쳐진다. 태양은 자비 없이 도시 전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더위를 먹은 것처럼 택배 드론 한 대가 느리게 날아가고 있다. 저 멀리 북악산 너머로 비행자동차 몇 대가 날아간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 왜 강조를 한 거지.. 도대체 뭘까?” 은하가 조용하게 혼잣말을 내뱉다 또 다시 침묵을 깬다.
“저기 혜성아, 100%로 충전된 태블릿 PC에 우리 손가락 다섯 개 스캔 해보면 어떨까?”
“오 그래 그거 좋은 아이디인데,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해보자. 역시 전국 1등은 다르다니까. 그럼 내가 해볼게.”
혜성은 태블릿 PC 하단에 지문을 스캔 하는 곳에 엄지 손가락을 댔다. 잠시 후 “삑” 소리와 함께 스캔이 됐다. 다음 검지를 댔다. “삑” 소리가 난다. 계속해서 중지, 약지, 새끼까지 다섯 손가락을 모두 스캔 했다. 은하와 혜성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태블릿 PC를 쳐다본다.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다.
“뭐지, 아무 변화도 없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왼쪽 손인가? 은하야 왼손으로 한번 해볼까?”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한 번 해볼게.”
혜성이 손가락을 스캔 했던 태블릿 PC에 은하가 오른 엄지부터 혜성이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스캔 한다. “삑 삑 삑 삑 삑” 소리를 연달아 내며 은하의 다섯 손가락 모두 스캔이 되었다. 잠시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갑자기 태블릿 PC의 화면이 파란불빛을 발한다. 아주 강한 파란 불빛이다. 그러다 파란 불빛이 사라지고 태블릿 PC는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왔다. 파란불빛이 나왔다 사라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바탕화면에는 우주여권을 신청하는 어플 하나만 깔려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은하와 혜성의 스마트폰에 “딩동”하고 메시지 수신 음이 울렸다. 무언가 감이 온 혜성은 재빨리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이혜리 팀장으로부터 온 메시지이다.
“은하야, 팀장님 메시지야.”
“진짜? 정말로 팀장님이 강조한 이유가 있긴 있었던 거네. 혜성아, 빨리 읽어봐.”
혜성이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메시지를 읽기 시작한다.

혜성씨, 은하씨 많이 놀랬죠? 이혜리 팀장입니다.
두 사람이 이 메시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쓰기 시작합니다.
저는 원래 우주예산감시연대 소속의 활동가입니다.
스페이스시스템에는 위장 취업을 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위장 취업한 이유가 궁금하겠죠?
신규로 발행 될 우주여권 사업과 우주 여행 보조금 지원 사업에는 아마 두 분은 상상 하지도 못할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이 되고 있고 또 투입 될 예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이권을 두고 정부, 정치권, 그리고 기업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저희는 우주여권 생체칩 시스템을 개발한 스페이스시스템 대표 김현준 박사가 우주여권사업을 성사 시키기 위해 정관계에 지속적으로 불법 로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우주여행 보조금지원 법이 통과된 것도 김현준 대표의 불법 로비가 있었던 거고요.
그래서 저희는 이와 관련한 비리를 밝혀내기 위해서 몇 년 전부터 조사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정부패를 입증할 좀더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제가 스페이스시스템에 위장 취업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스페이스시스템에서 일하면서 김현준 대표의 야심이 단순히 우주여권사업을 성공시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주여권을 우주외교부가 아닌 건강보건부에서 발행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우주외교부는 개인정보 유출의 이유로 생체칩 여권을 오래 전부터 반대해 왔습니다.
그래서 김현준 대표는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람의 몸에 삽입하는 거기 때문에 건강보건부에서 관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보건부에 우주건강외교국이 신설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김현준 대표의 로비 능력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체칩 여권은 단순히 신원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여행자 건강관리라는 명분 하에 사람들의 건강, 유전자 등의 다양한 신체정보까지 수집할 수가 있습니다.
건강관리만 한다고 하겠지만, 칩이 몸에 들어가는 순간 개인 신체정보를 수집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우주여행 보조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주여행을 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생체칩 여권을 삽입할 거고 그러면 저들에게 사람들의 개인 신체정보는 계속해서 축적이 될 것입니다.
일단 그들이 개인 신체정보를 다량으로 확보하고 나면, 그들이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그 정보를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스페이스시스템의 부정한 거래와 불법 로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많이 수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스페이스시스템에 제 신원이 노출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저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혹시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은하씨와 혜성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알바를 계속 하면 됩니다.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에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두 분께 무슨 일 생긴다면, 스마트폰의 볼륨 위아래 버튼을 동시에 세 번 누르세요. 그러면 누군가 도와주러 나타날 거에요.
그럼 두 분 알바 무사히 잘 마치고, 겨울방학에는 해외여행 즐겁게 다녀 오길 바래요.
이 메시지를 다 읽은 후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세요. 그럼 영구히 삭제됩니다.
안녕!

은하와 혜성은 메시지를 읽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삭제 됐다.
“자살이 아니네. 혜성이 네 말대로 자살이 아닌데.”
“그러게 은하야, 우리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팀장님이 아무일 없다는 듯이 알바만 하라고 했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팀장님이 자살이 아니라 살해 당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야 혜성아, 나는 너무 무서워.”
“은하야, 경찰에 신고할까?”
“너는 안 무서워?”
“나도 무섭기는 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어때?”
“그런데 경찰에서 자살로 결정이 난건 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이 걸린 일에 경찰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신고를 하면 분명 이 부정과 관련된 경찰이 알아차릴 거고 그러면 우리를 가만 두겠어?”
“그러네 진짜. 그럼 어쩌지?”
“어쩌기는 뭘 어째? 우리는 그냥 조용히 알바만 하고 알바비 받아서 이팀장님 말대로 겨울방학에 여행이나 가면 되지. 넌 안 무서워 이 상황이.”
“나도 무섭다니까. 은하야, 그러면 우리 추천해준 최영우 교수님이랑 의논해 보는 거 어떨까? 최영우 교수님은 시민운동에도 관심 많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분명 이런 비리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 같아. 어때?”
“맞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최영우 교수님이라면 믿을 수도 있고, 또 정의로운 분이시니까. 그게 좋을 것 같아.”

6
은하와 혜성은 주말에 최영우 교수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주중에는 스페이스시스템으로 출근하여 태블릿 PC에 여권신청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에 집중을 했다. 토요일이 되었고 은하와 혜성은 거의 두 달 만에 학교에 왔다. 학교의 길게 뻗은 큰 길을 따라 줄지어 서있는 플라타너스와 몇몇 단 과대 건물의 벽을 촘촘히 뒤덮고 있는 덩굴나무의 잎들은 한여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듯 짙은 녹색으로 물이 들어있다. 나뭇잎의 짙은 색깔만큼이나 무더운 날이다. 잠시만 걸어도 습기를 머금은 뜨거운 열기에 금새 지친다. 얼마나 더운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열을 이곳에 다 모아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연구실에 도착하니 최영우 교수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오랜만에 뵙는 교수님도 반갑고, 무더위를 식혀줄 에어컨도 반갑다.’ 최영우 교수는 직접 커피를 내려 은하와 혜성에게 건넸고, 자신의 것도 한잔 내렸다. 연구실 안에 고소한 커피 향이 퍼진다. 연구실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따뜻한 커피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 혜성이 커피를 마시며 그 동안 알바를 하면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태블릿 PC 여권신청 프로그램 설치, 이혜리 팀장의 죽음, 우주여권 생체칩, 우주여행보조금, 우주예산감시연대, 스페이스시스템과 얽힌 부정부패, 그리고 이혜리 팀장으로부터 받은 메시지까지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되고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상세하게 말했다. 최영우 교수는 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었고, 혜성의 이야기가 진행이 될수록 표정은 굳어져만 갔다. 혜성의 설명이 끝났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많이 당황스럽고 황당하네. 어떻게 이런 일이..”
놀란 최영우 교수는 말을 하다 멈추었고, 그 틈을 타 혜성이 다시 말한다. “교수님, 김현준 대표라는 사람이 궁금해요. 어떤 사람이에요?”
“김현준 박사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됐지. 내가 박사후 과정에 있을 때, 그 친구는 박사 과정에 있었고, 우리는 꽤 친하게 지냈었어. 물론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어. 김박사는 성품도 훌륭하고, 대인관계도 좋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 그리고 학교 다닐 때 보면 꿈이 상당히 크고 도전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어. 그리고 독한 면도 있었지. 논문을 쓴다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 하거나 할 때는 거기에 빠져서 몇 달 동안 철저하게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몰두하고는 했거든. 보는 사람에 따라 독하다고 할 수도 있고 열정적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무서울 정도였어. 그래도 김현준 박사가 부도덕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하기야 그런 모습이 학교 다닐 때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럼 교수님 저희는 어떻게야 하죠? 우리랑 같이 일했던 팀장님이 살해도 당하고 너무 무서워요.” 은하가 물었다.
“그 팀장이라는 사람의 메시지만 가지고 살해 된 거라고 확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많이 걱정은 되겠지만 들어보니, 너희 둘이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인 걸로 보인다. 그 거대한 사업의 이권과 얽혀서 벌어지는 일이니, 너희처럼 단기 알바를 하는 학생들과는 전혀 무관하지. 그러니 내 생각에도 남은 한 달 동안 지금 하는 알바 조용히 잘 마무리 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너희한테 들은 이 엄청난 얘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고민을 해보고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마무리만 잘 하도록 해.”
“그래도 사람이 살해 당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드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혜성아, 우리가 하기는 뭘 해? 교수님께서 고민 하신다잖아.”
“그래 은하 말이 맞다. 내가 고민을 할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저희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은하가 얼른 대답했다.
은하와 혜성은 최영우 교수 연구실에서 나왔다.
“혜성아, 그래도 교수님께 얘기하니까 기분이 한결 낫다.”
“교수님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혜성아, 제발 우리 조용히 알바만 하자. 교수님도 그러셨잖아. 너 왜 이렇게 유별나냐?”
“그래 알았어. 교수님이 김현준 대표도 잘 안다고 하시니까, 현명하게 처리하시겠지. 그럼 은하야, 우리 샛별이 불러다가 한 잔 어때?”
“나야 좋지.”

주말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왔다. 은하와 혜성은 스페이스시스템으로 출근을 했고, 오늘도 태블릿 PC에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 설치를 반복해서 한다. 이제는 작업을 하면서 태블릿 PC가 100%가 충전이 되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하지는 않는다. 열심히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3시가 되었다. 은하와 혜성은 10분만 쉬었다 하기로 한다. 고개와 허리를 조금 숙인 자세로 계속 작업을 해서 그런지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다. 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은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목을 풀어주면서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뉴스를 본다.
“으아아아” 뉴스를 보던 은하가 비명을 지르며 스마트폰을 떨어트렸다.
“아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혜혜혜성아, 이게 또 무슨 일이래?”
“왜? 또 무슨 일인데..”
혜성은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집어서 은하가 보던 뉴스기사를 보았다. 은하가 보던 뉴스의 제목은 <스카이대학교 최영우 교수, 연구실에서 변사체로 발견>이었다. 기사 내용은 최영우 교수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고 경찰에서 조사 중이라고 써있다. 기사를 보는 순간 혜성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최영우 교수님이..’ 은하는 옆에서 소리 내어 운다. 이때 김현준 대표가 노크를 하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두 분 신문기사 보셨나요?”
“네.” 은하와 혜성이 동시에 대답을 했고, 은하는 울면서 말을 했다.
혜성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모르겠네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부터 저는 교수님이랑 가깝게 지내왔습니다.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그러게요. 이게 무슨 일이죠?”
“글쎄요. 이번 일과는 무관하지만 그래도 여러분과 같이 일하던 이혜리 팀장은 자살을 하고 또 여러분을 추천해주신 최교수님은 살해 당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한꺼번에..” 김현준 대표는 감정이 복받쳐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말을 이어간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 또한 충격이 매우 큽니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 두 분은 일이 손에 안잡히겠지요. 많이 힘드신 거 압니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프로그램 설치를 더는 미룰 수가 없습니다. 이번 주만 쉬면서 마음을 추슬러주세요. 뜻밖의 사건으로 계획보다 3주가 늦어지는 거니, 다음주부터 다시 열심히 해서 차질 없이 끝내도록 부탁 드릴게요. 그리고 오늘은 두 분 힘들 텐데 저의 비행자동차로 집까지 바래다주도록 직원에게 시키겠습니다.”
“대표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그냥 지하철을 타고 갈게요. 저희는 그게 더 편해요.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출근하면 되는 거죠?” 혜성이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게 두 분한테는 편할 수도 있겠네요. 그럼 다음주에 보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하는 여전히 울먹이고 있다.
은하와 혜성은 사무실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다. 은하는 계속 흐느껴 운다. 혜성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은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위로를 해준다. 혜성의 눈에 눈물이 고여서 지하철 안 사람들의 얼굴이 흐리고 굴곡져서 보인다. 눈을 깜빡이니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는다. 잠시 후 다시 눈에 눈물이 고인다. 깜빡이면 다시 흘러내리고 손수건으로 닦기를 반복한다.
‘은하와 나는 그냥 알바만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지만 우리에게 누군가가 위협을 가하거나 우리를 해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일과 관련해서 두 명이나 죽었다. 얼마 안 남았지만, 많이 무서워하는 은하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알바를 중단해야 할 것 같다.’ 은하를 달래주며 혜성이 생각을 한다.
다시 혜성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지하철 안이 흐릿하고 일그러져 보인다. 눈을 깜빡이니 고인 눈물이 뺨으로 떨어져 내려오고 지하철 안이 또렷하게 보인다. 지하철 끝 쪽에서 몇몇 사람이 은하와 혜성을 흘끗 흘끗 쳐다본다. 아마 여자 둘이 지하철 안에서 울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혜성은 생각한다.
“은하야, 그만 울어 사람들이 자꾸 우리 쳐다 본다.”
“응 알았어.”
은하와 혜성은 3호선에서 9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렸다. 붐비는 사람들 속을 헤치고 9호선을 탔다. 9호선에도 사람들이 많다. 혜성은 무심코 지하철 안을 둘러보다, 지하철 안 가장 끝 쪽에 3호선을 타고 올 때 은하와 자신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보였다. 갈아타기 전 3호선의 같은 칸에 탔던 사람과 또 같은 칸에 탄 것이다. 흔하게 일어나는 우연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사람들은 은하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다. 혜성은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다른 곳을 보다가 그 사람들을 다시 봤다. 분명 3호선에서 은하와 자신을 곁눈질해가며 쳐다보던 사람들이 맞다. 남자 세 명이고, 지금은 서로 얘기를 하고 있다. 그 중 한 명은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다. 혜성은 자신의 느낌이 틀렸기를 바란다. 은하는 아무 말이 없다. 지하철은 구반포역에 도착을 했고 은하와 혜성은 내렸다. 내릴 때 혜성은 고개를 돌려 지하철 안 끝 쪽의 문을 바라봤다. 그 사람들도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최근에 이상한 사건이 많아 예민해 진 것일 수도 있다. ‘에이, 아니겠지.’라고 생각을 해보지만, 불안감은 계속 남아있다. 그 순간 혜성은 이혜리 팀장의 메시지가 생각났다. 무슨 일이 있으면 스마트폰의 볼륨 위아래 버튼을 동시에 세 번 누르면 누군가가 도와줄 거라고 했다. 구반포역을 나왔다. 한 참을 걸어간 후 뒤를 살짝 보니 세 명이 따라오고 있다. 좋지 않은 예감이 점점 확신으로 변한다.
‘광화문역에서부터 우리를 따라 온 게 분명한 것 같은데.’
혜성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은하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은하야 내가 오늘은 집 앞까지 데려다 줄게.”
“그래 고마워.”
혜성은 가던 길의 방향을 틀어 좁고 인적이 드문 길로 걸어간다. 뒤를 흘끗 보니 그 남자 세 명이 여전히 따라오고 있다.
“이리로 가면 우리 집까지 조금 돌아가는 건데.”
“은하야, 내 말 잘 들어, 저 앞에 보이는 17동까지 빠르게 걷다가 17동 끼고 왼쪽으로 돌면 너는 무조건 뛰어. 뛰면서 스마트폰 위아래 볼륨버튼 세 번 연속으로 눌러 알았지?”
“뭐야, 왜?”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지금 우리 미행 당하고 있어. 이혜리 팀장님이 말했던 거 있잖아. 위아래 볼륨버튼 세 번 꼭 눌러.”
“뭐라..”
말을 하려는 은하의 팔을 잡아 끌어 혜성은 빨리 걷기 시작한다. 둘은 속도를 점점 내서 빨리 걷고 있고, 멀리서 따라오던 사람들은 뛰기 시작한다.
“너 코너 돌자마자 뛰어가면서 버튼 눌러. 아니다 그냥 지금 누르고 코너 돌면 바로 앞만 보고 달려가.”
은하는 버튼을 눌렀고 은하와 혜성은 17동을 끼고 왼쪽으로 돌았다. 은하는 뛰기 시작했고, 혜성은 코너를 돌자마자 17동 외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오던 길을 보니 남자 세 명이 뛰어오고 있다. 혜성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각목을 하나를 발견했다. 각목을 들고 뛰어오는 사람들이 코너를 돌기만을 앉아서 기다린다. 잠시 후 그 세 명이 코너를 돌았고, 혜성은 맨 앞에 뛰어오는 사람의 정강이를 향해 각목을 사정 없이 휘둘렀다. 각목에 정강이를 맞은 남자가 심하게 앞으로 고꾸라졌고, 뒤따라 오던 두 명도 넘어진 남자의 몸에 발이 걸리면서 크게 넘어졌다. 혜성은 뒤에 넘어진 두 명도 차례로 각목으로 내리쳤다. 이제 혜성이 도망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다섯 명의 남자가 나타나 넘어진 세 명을 발로 짓밟기 시작한다. 잠시 후 뛰어갔던 은하가 돌아왔다. 넘어진 남자 세 명은 여기저기 얻어맞다가, 저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도망을 치려고 한다. 두 명은 재빨리 일어나 도망을 쳤고, 모자 쓴 남자는 도망가다가 스텝이 꼬이면서 다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쓰고 있던 야구모자가 벗겨졌다. 그리고 빠르게 다시 일어나 도망갔다. 그런데 야구모자를 썼던 사람의 낯이 익다. 그 사람은 바로 스페이스시스템의 이승호 과장이다. 잘 못 본 것이 아니고, 분명 이승호 과장이었다. 혜성은 ‘이건 또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은하도 ‘어, 이승호 과장이잖아.’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은하와 혜성을 도와준 사람 중 한 명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그리고 명함을 준다.
“우주예산감시연대 사무국장 구영호입니다. 많이 놀라셨죠?”
“우주예산감시연대? 그럼 이혜리 팀장님이랑 같이 일하셨던 분들이네요?” 혜성이 물었다.
“아까 내가 버튼을 눌렀더니 금방 나타나셨어.”
“저희 우주예산감시연대에서는 팀장이 아니라, 이혜리 예산감시위원회 위원장이었어요. 안타깝게도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어쨌든 이혜리 위원장 요청으로 저희는 안전을 위해 두 분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일단 오늘은 집에서 쉬고, 내일 명함에 적혀 있는 저희 사무실로 오시면 우주여권 사업과 관련해서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내일 사무실로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희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할 것 같긴 하네요.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이런 일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네요. 은하야 우리는 일단 집으로 가자.”
“그나저나 저희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안전할까요?”
“네 안전합니다. 전혀 걱정 안 해도 돼요. 혹시 많이 불안하면 내일 저희가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그러면 저희야 조오..”
혜성은 은하의 말을 끊는다. “아니요. 저희가 내일 직접 찾아 갈게요. 일찍 가도 되죠? 오전 10시에 찾아 뵐게요.”

7
다음날 은하와 혜성은 우주예산감시연대 사무실로 가기 위해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구반포역에서 만났다. 우주예산감시연대 사무실은 삼성동에 있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주변 건물에 비하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건물이 꽤 좋아 보인다. 건물 입구에서 혜성이 말한다.
“은하야, 우리 이팀장님한테 받은 메시지는 여기서는 얘기하지 말자.”
“왜? 얘기 해야 되지 않을까?”
“그냥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사업을 두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전혀 없고 그냥 알바만 하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주변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그래. 괜히 아는 척하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다는 예감이 들어. 그리고 알바를 그만 두는 것도 고민해 보자.”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그렇게 하자. 알바비가 많이 아깝긴 하지만 더 큰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지금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위치한 우주예산감시연대 사무실에 왔다. 혜성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 보다 사무실이 훨씬 좋아 조금 놀랬다. 사무실 인테리어는 마치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벤처기업처럼 꾸며 놓았다. 세련됐으면서도 혁신적이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실용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디자인이다. 인테리어만 보면 시민단체 사무실이라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도착하자마자 회의실로 안내를 받았고, 구영호 사무국장 외에 직원 2명도 함께 참석했다.
“혹시 이혜리 위원장에게 우주여권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들으셨나요?”
은하가 혹시 알고 있다고 대답을 할까 봐 혜성이 얼른 대답한다. “아니요.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혜리 티임.. 아니 위원장님이 원래는 우주예산감시연대 소속이라는 것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만 메시지를 통해서 전달 받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주위에서 자꾸 이상한 일이 발생하니 더 불안해요.”
“네 그렇군요.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구영호 국장은 스페이스시스템을 중심으로 우주여권 사업에 대한 비리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이미 이혜리 팀장의 메시지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은하와 혜성은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반응을 했다.
구영호 국장이 얘기를 마치자 혜성이 말한다. “이권을 중심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네요. 저희 같은 학생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에요.”
“맞아요 너무 복잡해요. 그리고 저는 너무 너무 무서워요. 그래서 저희는 지금하고 있는 알바를 그만두려고 해요.”
그만두려고 한다는 말에 구영호 국장이 눈을 크게 뜨면서 말한다. “이상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해서 좀 무서우시겠지만, 그만 둘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알바생일 뿐이에요. 오히려 두 분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만두지 말고 반드시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김현준 대표는 이승호 과장을 시켜서 우리를 미행했잖아요. 우리는 그냥 알바만 하고 있는 건데, 김대표는 우리가 스페이스시스템에 위장으로 들어와서 알바를 한다고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를 미행할 이유가 없잖아요. 더욱이 어제 우리를 미행하다 다툼이 있었기 때문에 분명 이승호 과장이 보고를 했을 테고 그러면 우리에 대한 의심은 더 커졌겠죠.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알바를 계속하는 게 안전하다는 거죠?” 혜성은 구국장의 말에 반박하듯 강하게 말했다.
“실제로 여러분은 그냥 알바생이잖아요. 그리고 김현준 대표도 여러분들을 단순히 알바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그저 똑똑하고 성실한 대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스페이스시스템 측에서는 오히려 이승호 과장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어제 여러분의 미행은 김현준 대표가 지시한 게 아닙니다. 스페이스시스템 측은 이승호 과장을 산업스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차세대 우주여권 사업을 따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큰 규모의 돈을 벌 수 있는 확실한 국가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차세대 우주여권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보안 시스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우주여권 시스템에 요구되는 기술에 대한 정보도 사전에 파악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간 스파이 활동이 매우 심할 수 밖에 없고, 또 고급정보를 얻기 위해서 기업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스페이스시스템이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상황임에 불구하고 기업들은 포기하지 않고 사업수주를 위해 물밑에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어제 혜성씨와 은하씨를 미행한 걸로 이승호 과장이 산업 스파이인 것은 좀더 명확해 졌습니다. 아마도 두 분을 단순한 알바가 아니라고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조사를 더 해봐야 하지만 이승호 과장은 스페이스시스템의 경쟁사인 에어로플랜에서 보낸 첩자인 것으로 의심이 됩니다. 그러니 두 분은 끝까지 알바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알바보다 훨씬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이유도 없이 그만 둔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거에요. 그렇잖아요, 두 분은 그냥 학생이고 단기 알바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그냥 알바 마치고 알바비를 받으면 되는 거에요.”
구영호 국장의 말이 끝나자 은하가 말한다. “국장님 말씀을 들으니, 이제 이해가 좀 되네요. 그런데 스페이스시스템에서 이승호 과장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이혜리 위원장 말고도 스페이스시스템에 위장취업으로 투입 되어있는 우리 쪽 사람이 또 있습니다. 확실한 정보원으로부터 정확한 정보가 수집 되고 있으니,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김현준 대표의 불법 비리를 반드시 밝혀낼 겁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붙어 버러지같이 국민의 혈세를 부정하게 빼먹는 모든 악덕한 인간들을 끝까지 추적해 감옥에 다 처넣을 거고요.”
“그러면 국장님, 이혜리 팀장님은 아니 위원장님은 어떻게 된 거죠? 자살 할 분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혜성이 물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이혜리 위원장은 자살한 게 맞아요. 경찰 조사에서도 자살로 결정이 났잖아요. 겉으로는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어요. 이혜리 위원장은 평소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으로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시민 운동이라는 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힘을 쏟는 일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이혜리 위원장 같은 엘리트가 시민 운동에 뛰어 들었을 때 넘지 못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훨씬 더 힘들어 하죠. 평범하게 살았으면 돈도 잘 벌고 즐겁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후회도 하게 되고, 또 활동을 하다 보면 부정한 유혹의 손길이 많이 뻗쳐오죠. 이혜리 위원장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정말 누구보다 정의롭고 따뜻한 활동가였거든요.” 구영호 국장의 표정이 침울하다.
은하도 약간 울먹인다. “이혜리 티임.. 아니 위원장님이 우울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밝아 보이셨는데.. 그러면 국장님, 최영우 교수님은 어떻게 된 건지 혹시 아세요?”
“최영우 교수님 돌아가신 거는 아직 정확하게 파악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일단 언론에서는 살해 당한 걸로 나왔었죠. 경찰 수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음독 자살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은하와 혜성이 크게 놀라며 동시에 말했다. “음독 자살이요?”
“그럴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왜 그런 선택을..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혜성이 물었다.
“최영우 교수는 저희 우주예산감시연대 자문위원단 중 한 분이셨습니다. 사실 자문위원단을 하시면서 저희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종종 뵐 기회는 있었죠. 최영우 교수와 스페이스시스템의 김현준 대표는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이입니다. 김현준 대표가 미국에서 어렵게 공부를 할 때 최영우 교수에게 도움도 많이 받고 의지도 많이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문위원단에 들어 오기 전까지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사이인 줄 몰랐었습니다. 아마 최영우 교수도 스페이스시스템의 우주여권 사업 비리에 연루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두려움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합리적으로 의심은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교수님도 자살이요? 그러실 분은 아닌데.. 그리고 비리를 저지를 분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요. 도무지 이해가 안되네요.” 은하가 말했다.
“저에게 비쳐진 이미지도 그럴 분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죠. 우주여권 사업은 어마어마하게 큰 이권이 걸려 있기도 하고요.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을 하는 것이고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은하 말대로 최교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생각은 하는데, 지금 돌아가는 걸 보면 무엇이 진실이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네요. 어쨌든 국장님 말씀은 우리가 끝까지 알바를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럼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여러분은 그냥 알바를 하는 학생일 뿐이에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그래도 불안하다면 스페이스시스템 내에 저희 사람이 있으니까, 두 분 안전은 저희가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셔서 감사해요. 국장님께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알바를 그만 둘 생각이었거든요.” 은하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 이혜리 위원장 부탁도 있었고요.”
“감사합니다.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은하와 혜성은 우주예산감시연대 사무실에서 나왔다. 둘은 잠시 말이 없이 걷다가 은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무국장님 얘기를 듣고 나니까, 난 마음이 좀 편해졌어.”
“그래? 편해졌다니 다행이다.”
“우리는 그냥 알바하는 학생일 뿐이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랑은 아무 상관없잖아. 겁먹을 필요 없을 것 같아.”
“맞아 이제 한 달 남았으니, 마무리하고 겨울방학에 여행이나 가자.”
“좋아.” 은하가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사실 난 아직도 이혜리 팀장님이 자살했다는 건 믿어지지가 않아.”
“맞아. 그건 좀 이상하기는 해. 분명 메시지에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었잖아. 우울증이 있었다는데 나는 전혀 그런 거는 못 느꼈어.”
“은하야, 왠 일로 나의 의심에 호응을 해주냐?”
“왠 일이라니, 아무리 네가 엉뚱한 말을 많이 해도 이혜리 팀장님 자살만큼은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잖아. 진짜 마음이 안 좋아.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맞아.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분명 좋은 사람 같았어. 그나저나 우리 이번 주는 푹 쉬고 다음주부터 한 달 동안 열심해 보자. 설치할 태블릿 PC가 몇 개 남았지?”
“내 기억으로는 한 800개 조금 넘게 남았던 것 같아.”

그리고 늦은 밤, 최영우 교수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뉴스가 언론을 통해서 보도 되었다. 음독을 한 최영우 교수가 사망을 한 것은 오보이고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다는 내용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조사 중이라고 했다.

8
한 주가 지났고 은하와 혜성은 스페이스시스템으로 출근을 했다.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을 태블릿 PC에 설치하는 작업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김현준 대표가 회의실로 와서 한 주 동안 잘 쉬었는지 안부를 물었고, 남은 한 달 마무리를 잘 해주기를 부탁했다. 은하와 혜성은 자신들을 미행한 이승호 과장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이승호 과장은 보이지 않았다. 김현준 대표는 이승호 과장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고, 은하와 혜성도 물어보지 않았다. 구영호 국장 말대로 이승호 과장은 산업 스파이인 것으로 드러났나 보다고 생각을 했다. 알바를 다시 시작한지 한 주가 지났다. 한 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은하와 혜성은 묵묵히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 설치에 집중을 했다. 하루에 한 번 정도 김현준 대표의 비서가 찾아와 차질 없이 진행이 되고 있는지 확인을 하였고, 혹시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어보고는 했다. 은하는 다시 알바를 시작하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또 일어날 가봐 걱정이 많았지만, 하루하루 별일 없이 지나가다 보니 걱정은 서서히 사라졌다. 혜성도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고 태블릿 PC에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에만 전념 했다. 알바를 다시 시작한지 2주차 금요일이 되었다. 2주차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은하와 혜성은 지난 두 달 동안 너무 이상한 일들을 겪어서 그런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제 2주만 더 작업을 하면 알바가 완전히 끝난다.
“혜성아”
“응?”
“2주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하루 종일 같은 작업만 반복해서 하니까, 이제 좀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
“그래? 그럼 내가 뭔가를 찾아내서 파헤쳐 볼까? 확실히 김현준 대표는 무언가 미심쩍은 게 많은 것 같거든.”
“야야, 너 또 쓸데 없는 짓 하지 말아. 제발 조용히 있다가 나가자.”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놀래기는.. 하하”
그리고 2주가 또 흘렀고, 드디어 알바 마지막 날이 되었다. 한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태블릿 PC에 여권신청 프로그램 설치 작업도 차질 없이 진행이 됐다. 태블릿 PC 서른 개가 남았다. 남은 30대에만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설정하고, 충전만 하면 완전 끝이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은하는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길 바라고만 있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었고, 작업해야 할 태블릿 PC는 13대가 남았다. 한대 한대 작업을 해나가면서 남아있는 태블릿 PC가 줄어들 때마다 은하는 묘한 희열감이 느껴진다.
“혜성아,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그러게 남아있는 거만 다 하면 완전 끝이네. 한 달이 정말 후딱 갔다.”
회의실 밖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은하와 혜성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잠시 후 웅성거리는 소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로 바뀌었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은하와 혜성은 밖에서 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때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금 하시는 작업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은하와 혜성은 회의실 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다. 놀란 은하와 혜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입니다. 협조 부탁 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스페이스시스템 직원인가요?”
“아니요. 저희는 대학생이고요. 여기서 단기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혜성이 대답했다.
놀란 은하가 묻는다. “무무무슨 일이에요? 10개만 하면 저희 알바 끝나거든요. 그래야 알바비를 받을 수 있는데..”
“여기 있는 물건은 모두 압수수색 대상입니다. 일단 회의실에서 나가주세요.”
큰 박스를 든 경찰 여러 명이 들어와 태블릿 PC를 박스에 담기 시작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하와 혜성은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회의실 밖은 큰 소리가 오가고 있다. 사무실 저 멀리 끝에 몇몇 스페이스시스템 직원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어디론가 가고 있다. 사무실 끝에 있는 사장실 문이 열리더니 수갑을 찬 김현준 대표가 경찰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다. 김현준 대표는 격렬히 저항을 하지만 경찰 세 명이 강제로 연행을 한다. ‘이건 또 뭐지? 알바비는 받을 수 있는 건가?’하고 은하는 생각을 한다. 혜성은 소란스러운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혜성씨, 은하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누군가 뒤에서 은하와 혜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뒤를 돌아보니 이승호 과장이다. 이승호 과장의 얼굴에는 여기저기 흉터 자국이 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하고 있다.
“어? 이승호 과장님” 은하가 말했다.
이승호 과장을 보고 침착한 말투로 혜성이 묻는다. “어떻게 여기 계시는 거죠?”
“저는 사실 우주외교부 직원입니다. 스페이스시스템에는 위장으로 들어와서 일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우주외교부 직원이라고요? 그럼 공무원이시네요. 공무원이 위장취업 같은 것도 하나요?” 혜성이 물었다.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니죠. 신규 우주여권 사업이 워낙 규모가 큰 사업이기도 하고, 스페이스시스템에서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의심이 되는 상황에서 우주경제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국가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국민의 혈세를 가지고 사적 이익을 챙기려는 무리들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결국 부정 청탁, 불법 로비 등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스페이스시스템뿐만 아니라 정관계 연루된 사람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있습니다.”
혜성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럼 그때 저희를 왜 미행했던 거에요?”
“그건 제가 정식으로 사과를 드릴게요. 저는 혜성씨와 은하씨가 국가우주정보원의 요원이거나 아니면 그 조직에서 임무를 받고 투입된 사람으로 오해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된 이유는 이혜리 팀장님이 갑자기 자살을 해서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자살 할 분 같지 않았는데, 은하씨, 혜성씨와 태블릿 PC 작업을 하면서 갑자기 자살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희 우주외교부는 오래 전부터 국가우주정보원에서 스페이스시스템의 비리를 조사해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국가우주정보원이 스페이스시스템의 비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이혜리 팀장에게 접근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팀장 본인도 비리에 연루되어있는 상황에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게 아니었나 하고 판단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국가우주정보원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했던 거였고,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뒤를 밟았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을 추천한 최영우 교수 사건도 있었잖아요. 그것도 좀 이상하게 보였고요. 미행한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 드리겠습니다.”
은하와 혜성은 이혜리 팀장도 위장취업 중이었다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았다. 이승호 과장의 말을 듣고 혜성이 말한다.
“아 네 그렇게 된 거였군요. 얼굴과 다리는 저희를 미행 했을 때 다치신 거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가 많이 서툴렀죠. 아, 그리고 두 분을 구해주었던 우주예산감시연대 구영호 국장도 체포 되었습니다.”
“뭐라고요?”
“우주예산감시연대는 스페이스시스템 비리에 대한 핵심 증거를 많이 확보하고 있었고, 그걸 미끼로 스페이스시스템으로부터 거액의 지원을 받아오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구영호 국장은 최영우 교수 살인미수 건에 대한 살인교사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네, 정말이요?”, “말도 안돼.” 은하와 혜성은 너무 놀랬다.
한 달 전에 자신들을 도와준 사람이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다니 소름이 돋았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혜성이 묻는다.
“스페이스시스템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왜 최영우 교수님을 살해까지 하려고 했을까요?”
“혐의를 받고 있는 거여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최영우 교수가 스페이스시스템과 우주예산감시연대의 관계를 알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구국장 입장에서는 최교수가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였을 수도 있겠죠.”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은하가 말한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일을.. 사람의 탈을 쓰고 정말 말도 안돼.”
“그러면 생체칩 우주여권 사업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혜성이 물었다.
“생체칩 우주여권 사업은 전면 무효화 될 거에요.”
“정말이요? 그럼 우리가 이때까지 한 거는 뭐죠? 완전히 헛수고만 한 거네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주여행에 수첩 형태의 여권이 사용되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은하랑 저는 석 달 동안 쓸데 없는 짓만 한 꼴이 됐네요.”
“그러게요. 두 분이 열심히 작업을 했는데 그 부분은 좀 아쉽게 됐네요. 그리고 우주 여행에 필요한 여권은 결국 교체가 될 예정이에요. 수첩 형태 여권보다 보안이 좋은 카드형 여권으로 바뀔 겁니다. 저희 우주외교부에서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아마 빠르면 내년 하반기, 늦어도 내후년부터는 시범사업이 시작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은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그러면 저희가 열 개정도 덜 하기는 했는데, 저희 알바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생체칩 우주여권사업은 무효화 됐고, 스페이스시스템 회사도 풍비박산 나는 분위기라 알바비는 받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은하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한다. “뭐라고요, 여름방학 3개월을 통째로 여기에다 받쳤는데 한 푼도 못 받는 다고요?”
“네 아쉽게도 알바비는 못 받을 거 같고요. 대신에 저희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알바비랑은 비교도 안 되는 고가의 선물입니다.”
“선물이 뭔데요?”
“저희 우주외교부에서 나오는 우주여행 상품권입니다.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 리조트인 <호텔&리조트 고구려> 2주 숙박권입니다. 리조트까지 갔다 오는 왕복 우주비행기 항공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 방학은 끝났으니, 겨울 방학에 두 분이 함께 갔다 오면 될 것 같네요.”
“진짜요?”
“와와와 대박”
은하와 혜성은 너무 기쁜 나머지 서로 마주보며 양손을 잡고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었다. 스페이스시스템의 사무실에 직원들은 보이지가 않고, 경찰들만 남아서 계속 수색을 하고 있다. 그날 은하와 혜성은 경찰서에 가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금방 나왔다.

9
2학년 2학기가 시작 되었다. 은하와 혜성에게는 이번 여름방학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은하와 혜성은 가끔 최영우 교수가 생각이 난다. ‘우리가 그때 상담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으셨을 텐데’라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다행히 최영우 교수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고 빠르게 회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혜리 팀장을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아리다.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학교로 돌아와 수업을 들으니, 마치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다. 지난 학기보다 교정의 공기는 훨씬 맑아진 것 같고 캠퍼스는 더 아름다워 보인다. 여름 동안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와서 그런가 보다. 학교 내를 돌아다닐 때면 너무 익숙해서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나무들, 벤치, 건물 기둥, 책상, 문 손잡이, 친구들이 자주 입는 옷 같은 소소한 것에 이상하게 눈길이 자주 가고 유심히 보게 된다. 가을로 들어가 직전의 계절은 캠퍼스 전체를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따뜻함은 안정감을 준다. 가을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캠퍼스는 녹색에서 조금씩 노랗고 붉게 변해 간다. 빛 알갱이와 사물이 만나 빚어내는 색과 풍경의 변화가 유독 신기하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솔직히 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동안 감추었던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공간에서 시간의 변화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변화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고, 변화 앞에서는 한 없이 무기력 하다. 변화는 순수함과 불순함, 선함과 악함, 도덕과 부도덕, 아름다움과 추함, 사실과 거짓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변하는 가가 중요하다.
혜성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고 있다. 수업 듣고, 공부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서 집 근처 카페에서 알바도 한다. 여전히 다친 새를 찾으러 다니고, 치료도 해준다. 이제는 죽은 새를 그리지는 않는다. 대신에 한 입, 두 입 베어먹은 사과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린다. 사과가 시들고, 상하고, 곰팡이가 피고, 초파리가 날리고, 문드러지고, 말라 비틀어져 가고, 소멸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또 그리고 있다. 혜성은 사과를 그릴 때마다 “사과 하나로 파리 전체를 놀라게 하겠다.”고 한 폴 세잔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믿음이 맞는다는 확신이 들면 세상의 시선과 무관하게 그 믿음을 실행 할 것이고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은하도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고 있다. 공부를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고 있다. 우주여권 신청 프로그램 설치 작업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한 달 정도 알바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여름방학 동안 알바를 하면서 무섭기도 했고 스트레스도 컸지만, 느낀 것도 많았다. 은하는 2차성징 이후 몸은 성인이 되었고, 19살 이후에는 법적으로까지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는 술과 담배를 하고 안 하고의 선택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좋아하는 이성을 눈치 안보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진짜 어른의 세계에 들어온 줄 알았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 세계는 생각 이상으로 깨끗하지도, 현명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는 것을 직접 보았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일단 공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은하와 혜성은 얼른 겨울방학이 되어 위성 리조트에 놀러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친구인 샛별은 은하와 혜성이 부럽기만 하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한 학기 내내 알바만 한다고 해도 위성 리조트에 놀러 갈 수 있는 돈을 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공부와 분식집 알바에 집중하고 있다. 샛별은 대학교 1학년때부터 동영상 플랫폼 비디옵로드에 영상을 꾸준하게 올리고 있다. 내용은 주로 일상과 맛집 탐방인데 조회수도 그렇고 구독자수도 그리 많지가 않다. 얼마 전 샛별은 우연한 기회에 혜성을 따라 다친 새를 찾으러 경부고속도로 방음벽에 갔었다. 샛별은 인공 구조물에 새들이 다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혜성이 다친 새를 찾고 돌보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촬영을 했고, 편집을 해서 비디옵로드에 영상을 올렸다. 그런데 이 영상이 사람들의 관심을 엄청나게 끌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구독자 수도 큰 폭으로 늘었다. 구독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와 관련된 영상을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혜성이를 따라가 계속해서 다친 새를 구조하는 영상을 업로드 했다. 조회와 구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를 했고, 그에 따든 광고 수익이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다. 한 학기 동안 벌어들인 샛별의 영상 광고 수익은 위성 리조트에 갈 수 있는 충분한 돈이었다. 은하와 혜성은 샛별이와 함께 우주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학기말이 되자 세 친구는 시험 공부하느라 우주여행 준비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출발 날이 되었고, 수첩 형태 여권으로 출국심사를 하고 우주비행기에 올랐다.

10
은하, 혜성, 샛별은 태양을 돌고 있는 위성 리조트인 <호텔&리조트 고구려>에 도착했다. 긴 시간 우주비행을 하고 왔지만, 처음 하는 우주여행의 설렘으로 피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피곤하기는커녕 세 사람은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지구까지 흘러내릴 판이다. 체크인을 했고, 25층에 위치한 방을 받았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은하, 혜성, 샛별은 짐을 바닥에 놓고 방을 둘러본다. 세 명이 함께 쓰기에 충분히 넓은 방이다. 방이 마음에 쏙 든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니, 호텔 바로 앞에 거대한 인공 해변이 있다. 고개를 들면 우주에 떠있는 지구가 눈에 들어온다. 세 사람은 처음 보는 광경에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혜성아, 은하야, 진짜 멋지다. 지구를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그러게 너무너무 좋다. 우주에 이런 해변이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은하가 말했다.
조용히 밖을 보던 혜성이 말한다. “인간이 우주에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리조트를 건설했고, 이 인공물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그리고 저 지구에서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는 게 현실적이지 않고 가짜 같아.”
샛별은 침대로 뛰어가서 뒤로 넘어지듯 눕는다. “혜성아, 은하야, 침대에 누워봐, 진짜 편해. 잠도 잘 오겠다. 여기 진짜 마음에 든다. 아 너무 좋다.”
잠시 말 없이 침대에 누워 감상에 빠져있던 샛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희들 배 안고파? 난 배 고픈데. 우리 맛있는 거 먹고 해변에 가서 일광욕 하자.”
“좋아. 얼른 뭐 좀 먹고 해변에 가자. 혜성아 너도 일광욕 하러 갈 거지? 쟤는 어디로 튈지 몰라서 불안 하다니까.”
“은하야, 내가 이 우주까지 와서 튀기는 어디로 튀어? 당연히 일광욕하러 같이 가야지.”
호텔 내에 한식당에 갔다. 수영복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배가 나오는 걸 감안해, 세 사람은 허기만 채울 수 있을 정도로만 간단하게 먹었다. 우주에서의 첫 식사라는 이유만으로도 맛있고 즐거웠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고 선글라스, 타월, 태닝오일을 챙겨서 해변으로 나왔다. 방에서 내려다 보는 것 보다 직접 와서 보니 해변이 훨씬 더 크고 길게 뻗어있다. 파도 치는 모양이 진짜 바다 같다. 프론트 직원의 말에 따르면 밀물과 썰물도 있다고 한다. 길가에는 야자수가 길게 늘어서 있고, 해변에는 부드럽고 하얀 모래로 가득하고, 공중에는 갈매기들이 날아다닌다. 모래사장에 책을 읽으며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몇몇이 모여 원반 던지기나 배구 같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인공 바다에는 서핑과 수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은하, 혜성, 샛별 옆으로 아이들이 튜브를 몸에 끼고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지구의 해변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다른 게 있다면 저 높이 인공 해변 위를 덮고 있는 리조트의 투명 천장 너머로 지구가 보인다는 거다. 파라솔 세 개를 빌렸고, 적당한 위치를 찾아 파라솔을 설치를 했다. 큰 타월을 모래 위에 깔고 은하, 혜성, 샛별은 나란히 누웠다. 공중에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날고는 있지만 어딘가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눕자마자 샛별이 말한다.
“와 너무 좋다. 너희들 덕분에 우주여행도 오고 말이지.”
“그러게 좋네. 은하야, 샛별아, 우리 가위바위보 해서 서로 태닝오일 발라주기 할까? 2등이 1등 발라주고, 3등은 2등 발라주고 어때?”
은하가 묻는다. “오 재미있겠다. 그럼 3등은?”
“3등은 혼자 알아서 발라야지. 하하”
셋은 가위바위보를 했고, 1등 샛별, 2등 혜성, 3등은 은하였다. 샛별이 엎드렸고, 혜성과 은하가 샛별의 몸에 오일을 바른다.
“좋아 아주 좋아. 너희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발라라. 1등을 잘 모시란 말이야.”
샛별의 등에 오일을 바르고 있는데, 옆 파라솔에서 일광용을 하던 여자 한 명이 다가온다. 그 여자는 멋진 비키니에 알이 큰 선글라스와 챙이 둥근 모자를 쓰고 있다. 은하와 혜성은 그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고 샛별의 등과 다리에 열심히 오일을 바르고 있다.
“그렇게 바르면 안될 텐데, 태닝오일 처음 발라보나 봐요?”
은하와 혜성은 자신들한테 말을 건 여자를 올려다 보았다. 은하와 혜성이 쳐다보자 그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는다. 이혜리 팀장이다. 은하와 혜성은 느닷없이 나타난 이혜리 팀장을 보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냥 머리 속이 하얘졌다. ‘이 건 또 무슨 상황인가?’하고 혜성이 생각한다. 이혜리 팀장이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을 보고 있다. 엎드려 있던 샛별도 일어나 앉았다. 잠시 멍하게 그녀를 보던 은하가 말한다.
“팀장님.. 아니.. 위원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자살 했었는..”
“자살할 사람이 점심에 평양냉면 한 그릇이랑 만두를 네 개씩이나 먹겠어? 하하하 혜성씨, 은하씨 잘 지냈어? 옆에 계신 분은 친구 샛별씨 맞죠?”
“거봐 내가 그랬잖아. 자살할 사람은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다고.”
“혜성씨, 은하씨 솔직히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이혜리 팀장도, 이혜리 위원장도 아니야. 나는 국가우주정보원 우주정보국 소속 정보요원이야.”
이혜리 요원이 가방에서 봉투 두 개를 꺼내 은하와 혜성에게 건넨다.
봉투를 받은 혜성이 묻는다. “국가우주정보원이요? 그리고 이 봉투는 뭐에요?”
“봉투는 약속했던 알바비야. 10개 정도 못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2,500개 다 한 걸로 계산해서 넣었어.”
“알바비요? 알바비를 왜 팀장님이, 아니 요원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멍한 표정으로 은하가 물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두 사람을 고용한 거나 다름 없으니까. 정당한 노동의 대가는 당연히 받아야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혜성이 물었다.
“우리 국가우주정보원에서는 오래 전부터 스페이스시스템이 정관계에 전방위적으로 불법로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해오고 있었어. 수사를 하다 보니까, 우주예산감시연대가 기업의 불법행위 증거를 미끼로 기업들에 거액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그래서 국가우주정보원에서는 우주예산감시연대에 위장해서 들어가면 신분 노출 위험도 덜 하면서 스페이스시스템의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할 수 있겠다고 판단을 했어. 그래서 내가 우주예산감시연대에 위장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또 어찌어찌 하다 보니까 우주예산감시연대 사람으로써 스페이스시스템에 위장취업까지 하게 된 거였어. 스페이스시스템에 거의 5년을 다녔어. 그 동안 우리는 충분한 불법 정황의 증거를 확보할 수가 있었고, 터트릴 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어. 마침 그 시기에 여러분들이 알바를 하러 들어왔던 거야.”
“때를 기다리다니요. 어떤 때를 말씀하시는 거에요?” 혜성이 물었다.
“우주국가정보원에는 크게 국가정보국이 있고, 그리고 내가 속한 우주정보국이 있어. 그런데 우리나라 우주산업 발달이 생각보다 더뎌지면서 우주정보국의 역할이 크지 않았어. 그러다 보니 정치권에서는 예산만 쓰고 실적이 없는 우주정보국을 폐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어. 우리 조직은 존폐의 기로에 서있었고, 어떻게든 폐지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지. 그리고 스페이스시스템의 불법로비가 우리 조직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을 했어. 한 참 오래 전부터 스페이스시스템의 불법과 관련된 확실한 정보를 확보하고는 있었지만, 스페이스시스템이 상당히 공을 들여 불법적으로 로비를 했던 우주여행 보조금 지원 법안이 통과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법안이 통과만 되면 우주여행은 당연히 활성화가 될 것이고, 그에 따라서 우주산업의 발달 속도도 빨라질 테니까. 그렇게 되면 우주첩보 업무가 늘어나게 될 거고 그러면 우주정보국의 존재 이유가 명확해지는 거잖아. 스페이스시스템은 불법로비를 통해서 우주산업을 발전 시킬 법안을 통과시켰고 그게 존폐의 기로에 선 우리 조직을 살릴 수 있게 도와준 꼴이 됐지. 그러고 나서 우리는 스페이스시스템의 불법 로비와 부정부패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사법처리가 되도록 처리를 해서 실적까지 쌓을 수가 있었어. 결과적으로 스페이스시스템이 우리 조직을 살린 거나 마찬가 된 거야.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야?”
“정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네요. 그럼 우주여권 사업 비리 수사는 끝났으니까, 팀장님은.. 아니 요원님은 다른 첩보 활동을 하고 있겠네요?” 혜성이 물었다.
“생체칩 관련한 수사는 끝이 났는데, 또 다른 우주여권 사업 관련해서 비리 첩보가 들어와서 수사를 할 예정이야. 카드형 우주여권이라고..”
이혜리 요원이 말하는 중에 은하가 끼어들어 물어본다. “카드형 여권은 이승호 과장이 말했었는데, 그거 맞죠?”
“알고 있구나. 맞아 그런데 과장은 아니고 그 사람은 우주외교부 소속 이승호 주사야. 우주외교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카드형 우주여권 시스템은 에어로플랜이라는 회사에서 개발을 했어. 에어로플랜도 카드형 우주여권 사업을 추진하면서 각종 불법에 연루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수사 중이야. 태양 그룹 알지?”
“네 알아요. 우리가 지금 있는 <호텔&리조트 고구려>도 태양 그룹 소유 아니에요?”
“맞아, 여기 위성 리조트도 태양 그룹 소유이고, 그 에어로플랜이라는 회사는 태양 그룹 회장의 둘째 부인 장남의 회사야. 그리고 에어로플랜 대표의 조카 그러니까, 태양 그룹 회장 둘째 부인의 장남의 조카가 바로 우주외교부 이승호 주사야.”
“뭐라고요?”
놀란 은하, 혜성, 샛별은 눈을 동그랗게 이혜리 요원을 빤히 쳐다본다.
“놀랬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어쨌든 아직 우주여권 사업 수사는 끝나지 않았어.”
“세상이 정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은하가 말했다.
“그나저나 혜성씨랑 은하씨 성실하고 똑똑한 줄만 알았는데, 지켜보니까 꽤 용감하고 정의롭기까지 하던데. 지금 2학년 마쳤지?”
“네.” 은하와 혜성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남은 2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졸업할 때쯤에 우리가 연락할지도 모르니까.”
은하가 반가운 듯 말한다. “대박, 이혜리 요원님 혹시 저희 우주국가정보원에 취직시켜주시려고 그러는 거에요? 그리고 요원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얘 샛별이도 용감하거든요. 그렇지 샛별아?”
“그럼요. 저는 용감함 빼면 거의 시체에요. 취직만 시켜주시면 이 한 몸 나라를 위해 불사르겠습니다.”
“하하 나 취직시켜준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졸업할 때 보자고 했지.”
가만히 듣고 있던 혜성이 말한다. “저는 취업은 됐고요. 카드형 우주여권 사업에도 알바 필요할 거잖아요. 다음 여름 방학에 거기 알바에 또 투입 시켜주세요. 우리가 해보니까 이 알바가 은근히 위험하더라고요.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선뜻 한다고 한 거였거든요. 다음에 할 때는 알비를 두 배로 올려주시는 거 가능할까요? 우리만큼 우주여권 사업 알바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도 없잖아요.”
“혜성씨 보통이 아니야. 마음에 드는 제안인데, 생각 한번 해볼게. 그럼 잘 들 놀다 지구로 돌아가. 나는 오늘 지구로 돌아 갈 거야. 다음에 연락할게.”
이혜리 요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짐을 챙겨 가버렸다. 해변가를 따라 호텔 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다 이혜리 요원은 저 멀리서 이 쪽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의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다.
팔짱을 끼는 모습을 보고 은하가 말한다. “애인인가 보다, 멀리서 봐도 멋있네.”
둘을 유심히 보던 혜성이 입을 연다. “샛별아, 은하야, 저 남자 자세히 봐봐. 저 사람 최영우 교수님인 것 같지 않아?”
“뭐, 최영우 교수님이라고? 말도 안돼.”
샛별이 옆에 놓여있던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줌으로 당겨서 두 사람을 확대해서 본다.
“정말이네, 혜성이 말대로 최영우 교수님 맞는 거 같은데.”
“진짜? 나도 볼게.” 은하가 샛별의 카메라를 뺏어서 본다. “진짜 최영우 교수님이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혜리 요원과 최영우 교수는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샛별이 말한다. “최영우 교수님, 아직 결혼 안 했나?”
“응 결혼 안 한 걸로 알고 있어.” 은하가 대답했다.
“은하야, 샛별아 우리 놀러 왔는데 복잡한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음껏 놀다 가자. 샛별아 다시 엎드려 오일 발라줄게.”
은하, 혜성, 샛별은 태닝오일을 바르고 위를 보고 누웠다. 우주에 있는 해변에서 햇볕을 받으면서 누워있으니, 기분이 설레면서도 조금은 생경한 느낌으로 좋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중 한 마리가 유난히 높게 날고 있다. 혜성은 높이 날고 있는 갈매기를 눈으로 따라가면서 지켜본다. ‘왜 혼자 유독 저렇게 높이 나는 걸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 갈매기가 고도를 조금 더 높여서 날다 투명한 천장에 부딪쳤다. 천장에 부딪혀 기절한 갈매기는 수직으로 떨어진다.
“아 어떻게, 갈매기가 천장에 부딪쳤어.” 
혜성은 바로 일어나 인공 바다로 뛰어 갔다. 갈매기는 계속 떨어 지고 있다. 혜성이 외치는 소리에 놀라 누워서 일광욕을 하던 은하와 샛별도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두 사람의 시야에도 떨어지는 갈매기가 들어왔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혜성이 보인다. 샛별은 재빨리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혜성을 따라 뛰기 시작한다. 갈매기는 바다에 떨어졌고, 혜성은 바다로 들어가 갈매기에게로 헤엄을 쳐서 간다. 뒤따라 샛별도 바다에 뛰어 들었다. 은하는 그 자리에 앉아서 바다에 들어간 두 사람을 보고 있다.
갈매기를 구하러 가는 혜성이를 보며 은하가 생각한다. 대학에서 와서 혜성이를 처음 봤을 때 여자든 남자든 누가 봐도 외적으로 호감을 가질만한 친구라는 생각을 했다. 적당히 예쁜 얼굴, 평균보다 훨씬 큰 키, 보기 좋게 날씬한 체형, 어깨 너머로 내려오는 긴 머리, 튀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잘 살린 패션 센스. 그리고 조금 가까워진 후에는 성격 또한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항상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고, 누군가를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늘 밝고 경쾌한 모습까지 전반적으로 모든 면이 괜찮아 보였다. 친분이 깊어지면서 혜성은 호기심이 많고, 도전적이고, 열정적이며 자신이 좋아는 것에 몰입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호기심, 도전, 열정, 몰입이 평범 또는 정상 범위를 넘을 때가 있다. 기이한 취미에 매달리기도 하고, 엉뚱한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혜성의 기이함과 엉뚱함을 보고 미쳤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친한 나도 혜성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광기가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어떨 때는 쟤가 제 정신인가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름 방학 동안 함께 알바를 하면서 혜성이는 누구보다 순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까지 든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은 임혜성이고, 그를 이상하다고 말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호한 욕망으로 영혼에서 썩은 비린내가 나고 불투명한 불안으로 서로의 몸에 똥을 발라 똥독이 오른 채 구역질 나는 광기에 휩싸여 집단적으로 미쳐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어느 누구도 혜성이를 보고 이상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들과는 다르게 혜성이는 그냥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다.
혜성은 천장에 부딪쳐 인공 바다로 떨어진 새를 양손에 받치고 은하에게로 뛰어온다. 그 옆에서 새를 들고 뛰는 혜성을 샛별은 카메라로 찍고 있다.
“은하야, 다행히 많이 안 다쳤어. 금방 회복 할 거 같아. 그런데 신기한 게 지구에 있는 갈매기보다 크기가 훨씬 작아. 은하야, 갈매기 한 번 봐봐.”
혜성은 양 손바닥으로 갈매기를 받쳐 들고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나 새 무서워한단 말이야. 가까이 오지마. 정말 미친년이 진짜.”
갈매기가 무서운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뛰어간다. 뛰어가면서 생각한다. 혜성이가 내 친구라서 다행이라고.
우주에 떠 있는 지구는 푸르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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