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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12월의 코끼리

2020.12.31 19:3012.31

12월의 코끼리

 

“한 마디로, 그 차원의 운명은 너희 결정에 달려 있어. 이대로 두면 이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쁜 일들이 저쪽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할 거야. 미세먼지. 열기. 배출되는 탄소.. 그런 것들이 너희들 꿈을 통해 점점 저쪽 차원으로 번지기 시작할 테니까.

다섯 명 다 꿈의 문을 닫을 필요는 없어. 문제는 꿈의 문이 다섯 개나 열려 있다는 점이거든. 너희 중 네 명.. 아니 딱 세 명만 꿈을 포기해 주면 돼.

너희도 꿈에서 봐서 알겠지만 저쪽 차원은 꽤 좋은 곳이야. 구하기로 해주면 좋겠어. 올해가 끝나는 날 여기로 다시 올게. 그때 너희의 결정을 알려줘.”

요정이 그 말을 남기고 떠난 뒤 그들은 요정이 사준 커피 하나 씩을 앞에 놓고 한참을 둘러앉아 있었다.

영훈은 작고 서리 낀 창 밖을 바라보았고 안나는 주머니 깊이 손을 넣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경은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암호를 풀지도 않은 채 만지작거렸으며, 현우는 거기에 뭐가 써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메리카노 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세미는 바닐라 라떼를 목적 없이 휘저어댔다. 요정이 있던 자리에는 빈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토 컵과 그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말들만이 놓여 있었다.

조명이 어둡고 테이블로 빼곡한 2층 카페의 구석에서였다. 영훈의 학교 앞이었고, 토요일 저녁이라 카페는 빈 의자 하나 없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한 구석에서 한 차원의 운명이 걸린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공평하게 다 같이 포기하는 수 밖에 없어.” 침묵을 깬 것은 결심한 듯한 현우의 말이었다.

그건 가장 깔끔한 해결책이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기분 좋은 생각은 아닌 듯 하다. 미경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영훈은 뭔가를 생각하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린다. 여전히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안나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다. 세미의 생각에도 가장 공평한 방법은 다 같이 꿈의 문을 닫기로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공평한 방법은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 뿐이었다. 좋지도 않고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딱 공평할 뿐이었다.

“나름대로 공평한 방법이 하나 더 있어.” 이 분 쯤의 공백을 두고 영훈은 말한다. 카페의 창가 자리는 꽤 추운 데다가 밖이 흐릿하게 보여서 영훈의 어깨 너머로 마치 눈이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라고 세미는 생각한다). 어쩌면 정말 눈이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건조한 일주일이 될 거라고 했지만 그 해는 일기예보 대로 된 날이 없었으니까. 날씨는 쭉 이상했다.

“일단 각자 그 꿈을 얼마나 자주 꾸는지 적어봐.” 그는 미경이 자리로 오면서 챙겨왔던 냅킨을 집어서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놓는다. 그리고 가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네 사람은 영훈의 명령대로 한다. 그들은 각자 냅킨을 하나씩 가져가고 주섬주섬 가방에서 펜을 꺼내서(가방을 가져오지 않은 안나는 현우에게서 펜을 빌린다.) 얼마나 자주 “그 꿈”을 꾸는지 적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래된 겨울의 꿈이었다. 그리고 삼 년 전까지 다섯 사람이 함께 다녔던 고등학교의 꿈이기도 했다. 꿈은 매번 똑같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방과 후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는데, 창 밖으로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하나도 단 하나도 외롭지 않은 것이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든 비어 있든 학교란 항상 조금씩은 외로운 곳이었는데도. 어째서 외롭지 않은 걸까, 평생 이만큼 외롭지 않은 일이 또 있을까, 그 꿈에서 깰 때마다 세미는 생각한다.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

현우: 한 달에 두 세 번(많으면 네 번)

영훈: 이틀에 한 번은 꾼다

미경: 일 년에 3, 4번.

안나: 겨울에는 이틀에 한 번 이상. 여름에는 두 주에 한 번 정도?

세미: 밤에는 거의 x. 낮잠 자거나 버스 같은 데서 깜빡 졸 때만 꾼다. 그럴 때는 거의 항상.

“낮잠은 얼마나 자주 자?” 영훈은 수거한 냅킨들을 훑어보다가 세미에게 진짜 설문 조사원 같은 태도로 묻는다.

“나는 자주 자는 편이야.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 세미는(확신은 없었지만)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대답한다.

“그러면 이 순서로 자주 꾸는 거네.”

영훈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냅킨을 자신, 안나, 세미, 현우, 미경의 순서로 늘어놓는다.

“이 순서대로 세 명 포기하는 방법도 있어. 이틀에 한 번을 꿨다, 이러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쳐서(다들 그때부터 꾼 거 맞지?) 오백 번은 꾼 거잖아. 그런데 일 년에 열 번도 안 꾼 사람도 있는 거고. 이렇게 해야 서로 꿈을 꾼 횟수의 총합이 맞을걸.”

“그것도 말은 되네.”

현우는 얼떨떨 동의하기 직전 같고 미경은 안도한 표정이다. 세미로서도 영훈의 말이 어디가 틀렸다고 집어 말할 수는 없다.

“크리스마스 쯤까지 생각해보고 더 좋은 생각이 안 나면 영훈이 생각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현우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영훈은 어깨를 으쓱하고 미경은 고개를 끄덕인다. 안나는 코트에 파묻혀 앉아서 잠든 것 같기도 하다. 세미는 이대로 가면 일은 크리스마스 즈음 해서 어영부영 영훈의 말대로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미는 원래 조별 과제 같은 것이(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대화의 우연들 속에서) 어딘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아도 굳이 나서서 말하거나 고치려 드는 성격은 아니었다. 즉 모든 일의 최선의 방식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 편도 아니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또 어떤 일들은 절대로 대충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두어서는 안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그녀 안에 있었다. 그 마음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고개를 든다.

“이거는..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일수록 저쪽 차원이랑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거잖아. 문이 더 큰 거. 그런데 만약에 우리 꿈을 통해서 우리 차원의 나쁜 것들이 저쪽 차원으로 흘러들어가는 거라면 언젠가 그 꿈의 문으로 저쪽 차원의 좋은 것들이 이쪽으로 흘러들어올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세미는 말한다. “그러면 우리 세상을 위해서라면 되도록 큰 문을 열어놓아야 되는 것 같아. 모르는 세상을 위해 꿈을 포기하기까지 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것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었고 어떻게 보면 반대를 위한 반대였지만, 미경은 복잡한 표정이 된다. 현우는 뭔가 중얼거리면서 냅킨에 쓴 걸 다시 들여다보고 영훈은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세미를 쳐다본다. 안나는 목도리 도마뱀처럼 잠자코 있다.

“보자. 그러면 세미 말대로 하면 미경이, 나, 세미가 포기하면 되는 거고, 영훈이 말대로 하면 영훈이, 안나, 세미가 포기하면 되는 거네.” 현우는 조금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빼고 계산해도 돼. 나는 포기할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안나가 가만히 말한다. 그와 동시에, 어느새 가까이 와서 타이밍을 보고 있던 카페 아르바이트 생도 말한다. “그런데, 저희 매장이 20분 후 문을 닫아서요. 혹시 다 드신 거 있으면..”

그로 인해 발생한, 목도리와 코트와 가방과 모자를 챙기는 혼란과 분주함 속에서 그들은 안나의 선언에 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하고, 어떤 합의에도 다다르지 못하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거리로 쫓겨난다. 그런 와중에 다음 회의는 12월 24일로 결정되고(미경은 그 틈에도 재빨리 카페 문에서 12월의 코끼리 카페가 오전 9시면 문을 연다는 것을 확인하고 온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가진 채로 뿔뿔이 흩어지고, 세미는 어느새 반짝이는 찬 바람이 들이치는 버스 정류장에 안나와 단둘이 남는다.

 

둘은 버스 정류장에서 밤하늘과 그 앞을 가리는 수많은 것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말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다. 그것은 겨울의 좋은 점이었다. 항상 손을 둘 곳이 있는 것.

“나는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인 줄 알았어. 그러니까, 학교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고 그걸 꿈으로 계속 다시 꾸는 줄 알았어.” 세미는 뜬금없이 말한다.

세미는 안나가 카페에서처럼 아무 말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안나는 의외로 씩 웃는다.

“나도 한참은 실제 있었던 일인 줄 알았어. 있었던 일을 꿈에서 다시 꾸는 줄. 사실 말이 안 되는데. 우리 교실에는 그렇게 높은 창문 없었잖아. 얼마 전 동생 졸업식 때 학교 다시 가보고 알았지. 아, 여긴 꿈 속 거기가 아니다.”

둘은 고등학교 삼 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만 그렇게 길게 말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차원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다 이해가 되더라구. 왜 그러게 지나치게 좋은지까지.”

“그곳을 구하고 싶은 거야?” 세미는 묻는다.

“글쎄. 망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우리가 살지도 않는 차원을 꼭 구하고 싶은 그런 것도 아니야. 그냥 너무 좋은 세상을 꿈 꾸는 거,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기분 좋은 곳이지만 거기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꿈에서라도 가 있으면 좋지 않아?” 자신은 그랬기 때문에 세미는 묻는다.

“그건 그런데, 좋기만 한 것도 아니잖아. 깰 때 말이야. 그리고 영훈이 말대로 사실 몇 백 번이나 같은 곳의 꿈을 꿨던 건데, 아무리 좋은 꿈이라도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닐까.”

안나는 팔을 기지개 켜듯 쭉 편다. 어깨를 무겁게 하던 무언가를 서울을 둘러싼 어둠 속으로 떨쳐내듯. 세미는 안나가 다음 12월의 코끼리 모임에는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닫는다. 안나는 이 세상에서, 이 차원에서 자기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될 생각인 것 같았다. 이 차원이 어떤 나쁜 것들로 가득하든 상관 없이. 그녀는 이상한 눈 내리는 날의 꿈과 빈 고등학교 교실의 행복을 떠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현우는 워낙 바빠서, 현우를 만나기 위해서는 현우의 학교 앞까지 찾아가서 조별 활동과 동아리 모임과 21학점이나 되는 수업 사이에 짬을 내어 나오는 그를 붙잡아야만 한다.

“같이 커피라도 마셔야 되는데, 미안해.” 학관 앞 계단에 앉으면서 현우는 말한다.

“미안할 것 없어.”

그들이 만난 것은 어차피 아침도 점심도 아니고, 커피를 마시기에도 식사를 하기에도 이상한 시간이었다. 더 거대한 시간의 구조 속에서도 그것은 이상한 -- 절묘한 시점이었다. 이를테면 일 년 후에 세미가 현우를 만났더라면 그는 조금 더 경영대생다운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고, 세미는 어떤 논리로도 그가 가진 것을 포기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경을 만나기는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세미는 집을 나와 이사를 세 번 하고 더 많은 아르바이트들을 거친 미경으로 하여금 자신의 것이 아닌 행복을 신경쓰기는 커녕, 상상하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먼 미래였다면 영훈은 아예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테고, 잘 기억나지도 않는 고등학교 동창의 말을 들으러 굳이굳이 추운 날에 옷을 챙겨입고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때는 아직 누구도 완전히 혼자가 되기 전으로, 그들 모두 완전한 혼자와 고등학교 교실의 불가피한 북적댐 사이, 가장 외로운 시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세미를 만나주기로 하고, 이야기는 진척된다.

“내가 계속 생각해봤는데,” 겨울 용이라기에는 조금 얇아 보이는 과 점퍼를 입고 나온 현우는 말한다. “아무래도 네 말대로 하는게 맞는 것 같아. 저쪽 차원이 좋은 곳이고 우리가 꿈을 통해 저쪽 차원과 연결되어 있는 거라면,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그 연결을 강하게 해두는 게 맞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순순히 포기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해.”

서울의 밝은 겨울날이었다. 현우는 조금 추워 보였고 말하면서도 계속 아쉬워 보였지만,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미경은 길게 말할 것 없이 그냥 세미가 편한 날 세미가 있는 쪽으로 오겠다고 한다.

“그게 덜 번거로워.”

그래서 그들은 세미의 학교 뒷문 근처에서 만난다. 밖에 앉아 있기에는 추운 시간이었지만 미경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어차피 금방 가봐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골목 틈으로 마침 눈에 띈 놀이터로 들어간다.  

“네 말도 일리가 있는 건 알겠어. 뭔가, 그러니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야. 그런데,” 미경은 굳은 얼굴로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구질구질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일년 내내 그 꿈을 꾸는 날만 기다려. 나도 알아. 가끔 좋은 꿈을 꾼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질 게 뭐 있겠어. 약간 기분이 좋아지고 그게 다지. 내 인생에 달리 기다릴 게 없어서 그런거 맞는데. 어쨌든 갑자기 그것까지 내놓으라고 하면..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영훈이 말처럼 나는 몇 번 꾸지도 않았는데.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곳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

미경은 세미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화가 나 있는지 변명하고 싶은지 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그네에서 일어선다. 세미가 놀이터를 나설 때에 날은 여전히 밝고, 금방 그칠 것 같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참이다.

 

그녀가 기말고사용 책을 몇 권 가방에 넣고 동네로 돌아왔을 때 영훈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사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여름에도 몇 번 편의점에서 스쳐지나가서 알고 있었다. 의외로 제대로 된 눈이 내리기 시작한 터였지만 세미에게는 아직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고 영훈에게도 그런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정말 우리 학교에서 있었던 일인 줄 알았어. 다른 차원의 모르는 학교가 아니라.” 세미는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우리 학교에서 있었던 일 맞아. 그날 오후에 우리 학교는 차원의 분기점이었대. 그래서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사람들 몇 명이 저쪽 차원에 잠깐 발을 들여놨던 거고.”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제일 일찍 왔었거든. 우리 약속 날. 요정(요정 맞지?)이 먼저 와 있어서. 어색해서 뭘 좀 물어봤어.”

조금 허무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세미는 굴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너도 안나처럼 꿈을 그만 꾸고 싶은 거야?”

“안나가 그래? 왜 그만 꾸고 싶은 거지?” 영훈은 진심으로 의아한 표정이다.

“그럼 너는 왜 양보하려는 거야?” 세미는 묻는다.

“다 같이 포기하기는 싫은데, 억울한 사람을 만들 수도 없으니까. 그러려면 그 방법 밖에 없어. 다른 차원으로의 문이 너무 자주 열려서 문제가 생긴 거면, 문제의 반은 내가 만들었을 걸.”

“너는 정말 그렇게 자주 갔어?”

“응. 나는 거기서 살다시피 했지 뭐.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데, 꿈이라 그런지 졸리지도 않고 창문도 크고.”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래된 아파트 벽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눈송이들을 올려다보면서 말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좀처럼 돌아봐주지도 않는 것을 향한 미경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에 대해, 그리고 질리지도 않고 교실 오후의 고요함 안에 머물러 있는 영훈의 사랑에 대해서도 한참을.

 


굳이 왜 크리스마스 이브로 약속을 잡았던 걸까, 그것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24일 점심에는 세미와 미경에게 일이 있고 저녁에는 현우와 영훈이 선약이 있어서, 네 사람은 점심 전 12월의 코끼리 카페로 약속을 정한다. 아홉시 반. 지저분한 창 밖으로 간판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다보이고, 빈 테이블들 위로는 만져질 것 같은 먼지 조각들이 반짝이면서 떠다닌다. 카페는 저녁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고 그때는 생각도 못했을 정도로 평화롭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침형 인간은 아닌 듯 하다. 영훈은 아주 졸려보이고 미경은 몇 번이나 하품을 감추려고 한다. 조금 늦게 도착한 현우는 아무래도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이 꿈을 갖고 있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내 생각에도 그래.” 세미는 말한다.

미경과 영훈은 동시에 그녀를 쳐다본다.

“그런데 그렇게만 하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문은 제일 큰 거 하나만 남겨두고, 그 다음엔 공평하게 하자. 자주 꾼 순서대로 양보하는 걸로.” 그녀는 현우를 쳐다본다.

현우는 약간 놀란 것 같지만 납득한 얼굴이다.  

 

그런 이상한 시간에만 잘 수 있는 아주 깊은 잠이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도 켜지 않고 침대로 들어가서, 이불 대신 코트를 끌어안고 잔다.

오후 두 시쯤 코트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 진동이 그녀를 깨우지 않았더라면 세미는 그대로 쭉 저녁까지 어둠에 찬 잠을 잤을 것이다. 깼더니 여전히 아무도 없고, 한 세상이 지난 것 같고, 어두운 냉기만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까지. 영훈의 때 아닌 전화가 그녀를 깨우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렇게 가장 외로운 시간에 일어났을 운명이었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세미가 눈을 떴을 때 방은 아직 빛을 받는 쪽에 있었다.

“너 집에 갔지?”

“..”

점심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결국 거짓말이 된 셈이었다.

“내 것 남겨줘서 고마워.” 영훈은 그녀가 케이크 한 조각을 남겨주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고 밝게 말한다. “그런데 너 먼저 가고 다들 얘기했어.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었다면..”

연말은 아무래도 모두 약간 약속에 늦고, 모두 약간 착해지고 마는 시간인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기에 그녀는 말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아깝지는 않아.”

대걸레 봉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던 그 평화를 세미가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평화를 더 소중히 해야 했는지도 몰랐다. 요정 말대로라면 그들이 사는 세상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고, 그녀는 안나처럼 확실한 개인적인 행복으로 그걸 대체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가능하다면 눈 내리는 그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애매한 사람이었다. 이 세상이 틀린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연애하고 학점 따고 모임이란 모임은 다 나가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 살려고 하면서도 마음은 또 눈 내리는 교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에 권리 같은 것이 있다면, 그런 애매한 사랑보다는 조금 더 맹목적인 사랑에 있는 것 같았다. 맹목적이거나 순수한.

그렇지만 세미는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영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따로 잔뜩 있었다.

“그 대신 너도 가끔은 알려줘야 돼. 우리 대신 가져간 거니까. 그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눈이 얼마나 천천히 많이 오는지, 책상이 얼마나 차갑고 교실이 얼마나 따뜻한지. 그렇게 좋은 게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다른 세상에라도 있다는 걸 내가 기억할 수 있게.”

그녀는 그 말을 소리내어 하지 않는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그들보다 훨씬 친한 사이여야 할 수 있는 부탁 같았고, 그 오후 그녀는 생색을 내지 않고 깔끔하게 양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꿈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빨리 저무는 겨울날처럼.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세미는 바랬던 대로 영훈의 꿈 얘기를 듣게 된다. 그가 어째서 그날 교실 구석에서 가방을 싸다가 고개를 들었는지, 학교 주변의 낮은 건물들에 어떤 식으로 눈이 쌓여가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그리고 그것 말고도 그녀는 아주 많은, 청하지 않은,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이상하고 대체로는 쓸데 없는 꿈 얘기들을 듣게 된다. 영훈은 일단 아주 많이 잤고, 그 꿈 말고도 꿈을 정말 많이 꿨고, 평화보다는 스릴이나 액션을 묘사하는 데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그만큼 친해진다. 서로 꿈 얘기들을 나누고 (영훈이 독립한 다음에는) 공강 시간에 세미가 서울을 가로질러 와서 영훈의 방에서 낮잠을 자고 갈 만큼. 꿈을 꾼다는 건 외로운 일이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꿈을 정말로 서로 나눌 수는 없었지만, 잠은 꿈과 달리 스며나오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영훈의 방은 우유색 창문과 회색 이불들로 덮인,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미는 그곳에서 자기 방에서보다 훨씬 더 잠이 잘 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특히 주인이 없을 때 그랬다.

그것들도 다 다른 차원일까, 세미는 때로는 그녀의 생보다 생생한 그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생각한다. 어떤 것들은 그저 영훈의 낮꿈이었으면 했지만 어떤 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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