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INA - 나를 믿으렴

2020.12.21 03:4412.21

올그는 포프의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하고 싶었다. 자신과 형제의 부모들은 마녀와 전쟁을 선택했지만 패배하였고 그들이 들던 깃발도 마을에 걸리지 않았다. 올그는 깃발에 그려진 장식들을 지워갔다. 마을들이 모이고 수인들이 무기를 들어 행군을 하던 걸음들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멀어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 이름들을 외우고 기억하려 하였다.

 

천막 밖으로 거대한 나무 우리가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움직이고 불을 피워 솥을 끓이는 수인들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마법사가 왔습니다.]

 

습격에서 선봉을 섰던 나르가 천막을 들추어 밖을 보였다. 하얀 토끼의 매끄러운 털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제법 지도자 같군요.]

 

올그는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앞장 서 죽이려 했던 마법사는 이제 수인들을 보호해 주는 수호자가 될 것이다. 벨바가 허리를 흔들거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르가 천막을 내려 올그의 천막 입구를 지켰다.

 

[당신 아버지도 꽤나 용감하였죠.]

 

[그때는 그랬죠.]

 

[그 전투에서 누구랑 싸웠는지, 기억하시나요?]

 

벨바의 손아귀로 사과 한 알이 들린다. 붉은 빛의 사과와 벨바의 새빨간 드레스가 올그의 눈 앞에서 살랑거린다. 올그는 허리를 피고서 벨바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다. 아버지가 하셨던 말. 아버지가 경고하셨던 말.

 

[마녀를 신봉하던 자들 아닙니까.]

 

[신봉이 아니라 맹신이죠.]

[그들은 마녀를 세상의 신이라 생각하니까요.]

 

[마녀가 창조한 세계에서는 당연하지요.]

 

[그들이 와있어요.]

 

벨바가 탁상으로 사과를 굴리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포프 전쟁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죠.]

 

[회색 늑대 말입니까?]

 

[그 여전사도 유명하지만 당신도 아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벨바가 올그를 바라본다. 올그 역시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고 있다. 그는 제 입으로 말을 내지 않았고 내고 싶지 않았다. 마법사라는 작자에 대해 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충고하셨던 말.

 

[당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바깥이 조용하다. 함성을 내지르고 노래를 부르던 소리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장작이 타는 소리와 나무 우리의 삐걱거리는 소리 뒤로 수십의 발자국 소리들이 몰려온다. 한 발자국이 멈추지 않고 천막으로 다가오고 있다. 창대가 기우는 소리를 따라 발자국도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벨바가 웃음을 짓고 있다.

 

올그는 곧바로 천막을 들춰 밖으로 나갔다.

 

나르의 창대로 길이 막힌 한 수인이 올그를 노려보고 있다. 커다란 몸집과 묵직한 갑옷. 하얀 갈기와 굳센 뿔. 하얀 물소가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올그는 포프 전투에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이 있었다. 벨바, 저 작자가 말하는 유명한 일화를 맨몸으로 느꼈었다. 검은 물소와 하얀 물소에 관한 이야기. 포프 마을에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킨 검은 물소와 마녀의 편에 서서 반란을 진압했던 하얀 물소.

 

두 전사와 남겨진 두 자식에 관한 이야기.

 

[감시자들이 인간들을 옮길 겁니다.]

 

하얀 토끼, 벨바가 올그와 하얀 물소 사이를 지나며 말하였다. 벨바가 올그를 보며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은 서로 아시죠?]

[포프 전투에서 남은 두 자식 분들.]

 

창으로 길을 막은 나르를 뒤로 물리며 올그는 하얀 물소에게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말. 닳도록 남기셨던 말. 올그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귀하신 분들이 오셨군요.]

 

올그의 정중한 인사 아래로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추한 곳으로 오게 하여 송구스럽군요.]

 

아버지의 말.

 

‘교활한 작자들에게 네 감정을 보이지 마라.’

 

[영광입니다. 감시자 여러분.]

 

하얀 물소가 말없이 등을 돌려 인간들이 갇힌 나무 우리로 다가갔다. 밋밋한 무늬에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검은 갑옷들이 나무 우리를 어깨로 짊어 멨다. 하얀 물소를 따라 나무 우리가 앞으로 옮겨간다.

 

[벨바 님.]

 

올그가 종종 걸음을 걷던 벨바를 불렀다.

 

[무슨 일이신가요, 포프의 지도자시여.]

 

올그는 올곧은 자세 그대로 하얀 물소의 무리가 이끄는 나무 우리를 멈추어 세웠다. 올그가 말한다.

 

[저들은 우리의 몫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옮겨야지요.]

 

하얀 물소가 몸을 돌려 올그를 보고 선다. 올그는 당당히 선채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손과 피땀으로 얻어낸 인간들을.]

[우리의 손과 땀으로 옮겨 하지 않겠습니까.]

 

올그의 고함에 하얀 물소가 걸음을 뗀다. 땅을 밟은 거대한 울림이 올그의 앞까지 걸어간다. 하얀 물소와 올그가 서로를 노려본다. 벨바는 올그에게 물었다.

 

[마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아십니까?]

 

[모릅니다.]

 

[어떤 강과 들을 넘어야 하는지는 아십니까?]

 

[모릅니다.]

 

[어째서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창조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싶습니다.]

 

벨바가 그의 동행을 허락하여 주었다. 하얀 물소가 불편한 기색으로 거친 콧김을 내뿜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올그가 고개를 돌려 동행자들을 추렸다. 전쟁의 선봉장이었던 나르와 몇몇 수인들이 올그의 편에 선다.

 

하얀 물소가 다시 나무 우리를 앞으로 이끌었다. 올그와 그의 동료들이 우리를 함께 민다. 수십 마리의 수인들이 둘러싼 나무 우리 안에서 한나는 숨을 죽인 채 옷 속에 숨겨둔 부러진 화살촉을 꼭 쥐었다.

 

 

 

 

 베스의 상처가 더 벌어지고 있었다. 치료가 필요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마을 여관에서 도망쳐 나온 그때부터 베스를 쫓는 수인들이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트라나는 베스를 등에 이고서 수풀 사이를 돌아다녔다. 겨우 숨만 쉬던 그녀가 어떻게 여관에서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건지, 트라나는 물끄러미 그녀의 가픈 숨을 보고서 생각에 잠겼다.

 

[나를 살려준 이유가 이나를 찾기 위해서인가요?]

 

베스의 가슴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내려간다.

 

[왜 그녀를 찾으려는 거죠?]

 

트라나는 자신이 이 세계로 오면서 만났던 그 하얀 토끼를 떠올렸다.

 

[그녀도 마녀에게 팔 건가요?]

 

베스는 대답이 없다.

 

[그 애도 마녀에게 팔 건가요?]

 

가파른 숨으로 거친 호흡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 모두 여기서 죽게 되나요?]

 

트라나의 눈으로 핏발이 선다. 붉게 물든 그녀의 눈이 똑바로 베스의 상처를 보고 있다. 자신의 가족. 피비린내가 나는 산장. 눈으로 덮인 기나 긴 침묵에 묻히지도 못한 시체들.

 

똑똑하지 않나요.

 

트라나는 베스의 곁으로 다가가 돌을 움켜쥐었다. 돌이 공중으로 들린다. 숨을 고르고 눈을 주시한다. 딱 한번. 단 한 번의 기회. 만약 들키면 여관의 그 수인들처럼 죽게 될까. 저 늑대가 발톱을 들어 올려 온 몸이 찢어지게 될까. 트라나는 온 힘을 다해 돌을 들어올린다.

 

[다행이야, 생존자가 더 있어.]

 

트라나가 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올렸다. 가죽 옷과 나무 방패로 몸을 감싼 사람들이 낮게 기어가며 트라나에게로 다가왔다.

 

구원자, 인간의 둥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트라나를 손으로 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늑대도 데려가야 해요.]

 

사람들이 피가 엉겨 붙어 붉게 물든 회색 늑대를 바라보았다. 트라나가 고집을 부린다.

 

[저 늑대가 제 친구를 데려갔어요.]

 

 

 

 

 

 

 

나는 어디 있는 걸까.

 

[다른 세계에 있지.]

 

누구의 목소리이지.

 

[네가 있는 곳의 목소리이지.]

 

당신이 마녀인가요?

 

[마녀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야.]

 

왜 저희를 죽이려 하죠?

 

[이 세계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필요해.]

 

왜죠?

 

[글쎄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이 세계는 없어지나요?

 

[죽인다니, 영양분이 되는 거야.]

[가치가 있는 일이란다.]

 

누구에게요?

 

[물론 나에게.]

 

정말 인간을 바치지 않으면 수인들이 사라지나요?

 

[전부는 아니야, 일부는 그렇지.]

 

당신 마음대로 그들을 조종하는 건가요?

 

[그렇고 싶어, 한번은 실패도 했지.]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수인들이 있지만.]

[곧 날 따르게 될 거야.]

 

대체 당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 거죠?

 

[궁금한 게 많구나.]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지 않니?]

 

...... 당신이 그 편지를 보냈나요?

 

[편지라니?]

 

제가 받은 그 가족이 부친 편지요.

 

[물론, 아니지.]

 

역시 그렇군요.

 

[내가 보낸 게 아니고 정말 네 가족이 보낸 거란다.]

[아이야.]

 

네?

 

[간절한 소망이 닿으면 난 그걸 만들 수가 있어.]

[때때로 배달부가 제멋대로 일을 망치지만.]

[네 경우는 너의 소망이 실현된 거란다.]

 

제 가족이 있다는 말인가요?

 

[가족이 있으면 좋겠니?]

 

네.

 

[만들어 줄게.]

 

제 가족을요?

 

[그럼, 아이야. 난 뭐든 할 수 있단다.]

 

그걸 어떻게 믿죠?

 

[네가 만난 그 인간 마법사가 말하지 않던?]

 

인간 마법사, 그 남자에게도 뭔가가 있나요?

 

[그 남자는 수인들을 피해 나를 보러온 최초의 인간이었어.]

[그 남자는 인간들을 피해 나에게 소원을 빈 최초의 인간이었지.]

 

그 남자가 소원을 빌었나요?

 

[소원을 빌었지.]

[그리고 그 대가로 내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거란다.]

 

정말 소원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그럼.]

 

정말 제 가족을 만들어 줄 수 있으신가요?

 

[했었던 일을 다시 하는 건 쉬운 일이지.]

 

정말 제 소원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그럼 나를 믿으렴.]

[나를 찾아와, 가족이 널 기다리고 있단다.]

 

어디로 가야 하죠?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죠?

마녀님 저는 어떤 길로 가야하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긴 어둠이 나를 덮는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571 단편 12월의 코끼리 작은것들의미밍즈쿠 2020.12.31 0
2570 단편 두 베녜라 이야기 붉은파랑 2020.12.31 1
2569 단편 플라잉 봅슬레이 미믹응가 2020.12.30 0
2568 단편 아무도 읽지 않습니다2 소울샘플 2020.12.30 6
2567 단편 엔딩의 발견 작은것들의미밍즈쿠 2020.12.29 1
2566 장편 INA - 네명의 소녀들 (1부 끝) 키미기미 2020.12.23 0
2565 장편 INA - 믿음과 영웅 키미기미 2020.12.23 0
2564 장편 INA - 생존자들 키미기미 2020.12.23 0
장편 INA - 나를 믿으렴 키미기미 2020.12.21 0
2562 장편 INA - 옛날 이야기 키미기미 2020.12.19 0
2561 단편 꿈꾸는 시간여행자1 오메르타 2020.12.18 0
2560 단편 프타우스의 인형1 붉은파랑 2020.12.16 1
2559 장편 INA - 불안한 동행 키미기미 2020.12.16 0
2558 장편 INA - 수인들의 행군 키미기미 2020.12.14 0
2557 단편 갈림길이 없는 미로 붉은파랑 2020.12.14 0
2556 장편 INA - 맹세의 깃발 키미기미 2020.12.12 0
2555 장편 INA - 포프의 자식 키미기미 2020.12.11 0
2554 장편 INA - 전쟁 나팔 키미기미 2020.12.10 0
2553 장편 INA - 믿어선 안되는 것들 키미기미 2020.12.09 0
2552 장편 INA - 구원자 키미기미 2020.12.08 0
Prev 1 ...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