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꿈꾸는 시간여행자

2020.12.18 10:0812.18

나는 우연히 시간여행의 비밀을 알아냈다. 

꼬투리 잡는 사람이 있을까 미리 얘기해두자면 일방통행이라 과거로 가는 것만 가능하다. 미래로 가는 것도 시도는 해봤는데 번번이 그냥 그 시간, 실패였다. 할 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방식으로는 미래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고 있으니 언젠가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첨단 타임머신 따위는 필요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게 눈앞에 있다 해도 기계치인 내가 사용법을 터득할 리가 없다. 죄송한 문과 출신이라 물리학이니 무슨 이론이니 하는 것들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시간여행을 하는 원리를 설명할 도리도 없다. 처음에 고백했다시피 우연히 알아낸 거다. 그러니 어설피 방법을 설명하기 보다는 내가 처음 시간여행을 했던 상황을 이야기 하는 편이 좋겠다. 

그게 그러니까 회사 내에서 두 팀이 경쟁 PT를 하는 날이었다. 상대는 지난 번까지 두 번 연속 우리를 누르고 프로젝트를 따냈던 터라 이번에도 여유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우리 2팀도 자신이 있었다. 컨셉도 실행 계획도 무엇보다 예산 면에서도 우리를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1팀 박대리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뭉개 버릴 기회였다. 이틀 밤을 꼬박 새고 뺨을 때려가며 PT 자료를 준비한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삭제 버튼을 누르고 휴지통을 비웠다. 아니, 저장 버튼을 누르고 창을 닫...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얼굴에 고깔모자라도 씌운 것 마냥 시야가 좁아지고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쥐어짜 초점을 맞추고 바라보니 벽에 걸린 빨간 테두리의 원형 시계는 이미 바늘 둘이 똑바로 정렬한 여섯시, 평소 출근 준비를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흐아아아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든 다시 자료를 완성해서 머리도 못 감고 출근을 했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서 도착한 나를 보고 안도의 시선을 보냈던 팀장님의 표정은 단상에서 발표를 하는 그의 멘트에 맞춰 내가 준비한 자료의 페이지들을 화면에 띄울 때마다 변검술사처럼 계속 바뀌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한 시간 만에 편집한 PPT는 솔직히 중학생 수준도 못 되었고 급하게 정리하느라 중요한 내용을 빼먹은 부분도 많았다. 

팀장님 이 자료는 사실 제가 아니라 외계에서 온 치즈 고양이가 만든 겁니다. 머릿속에서 별별 단어들이 춤을 췄지만 적당한 핑계 거리는 생각나질 않았다. 1팀 박대리가 실실 쪼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열이 훅 올라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셔츠까지 흠뻑 젖기 전에 재킷이라도 벗으려고 단추를 풀다가 허전한 느낌에 멈칫했다. 워메, 브라를 깜빡했네. 내가 여성 동지들의 탈코르셋 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긴 하지만, 오륙남들로 가득한 회의실에서 하늘하늘한 셔츠만 입고 뾰족한 가슴을 들이미는 것은 수십 광년 떨어진 곳으로부터의 용기가 필요했다. 비록 내가 이십대 시절엔 친구들에게 광년이라 불리긴 했어도 그건 다른 얘기다. 재킷은 내버려두고 오타 투성이인 다음 페이지를 화면에 띄웠다. 

1팀의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패배를 직감한 팀장님의 싸늘한 눈빛이 고드름이 되어 나를 후벼 판 덕분에 땀은 멈췄다. PT 가 끝나고 이사님들은 1팀 팀장님의 어깨를 토닥이고 우리 팀장님에겐 내가 길냥이들 간식주려고 부를 때 내는 소리로 평가를 갈음했다. 쯧쯧쯧. 

“수고했다.”

박대리가 재수 없는 표정을 하고 내 왼팔을 징그럽게 쓰다듬으며 방귀를 뀌었다.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반 년이나 사귀었을까. 내가 미쳤지. 두 번 연속 프로젝트 아이디어 뺏기고 석 달 전에 엣퉤퉤 하며 헤어진 게 해피 엔딩이다, 진심. 

그날 팀장은 나를 울려보겠다고 맘을 먹은 듯이 온갖 인신공격과 성희롱 및 성차별 발언들을 이과수 폭포처럼 쏟아 부었다.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도가 심해서 일단 녹음을 했는데 결국 활용할 기회는 없었다. 내 인생에서 그 장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날 밤 고양이도 없이 쓸쓸한 나의 집에 와서 에일 맥주 몇 캔을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꿈을 꾸었다. 그게 꿈인 걸 바로 알아차린 건 나와 똑같은 잠옷을 입은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꿈속의 나는 하품을 하고 자기 뺨을 때리며 내 집 내 책상에 앉아서 내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 이른 아침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면 저 똥멍청이가 작업한 파일을 삭제하고 휴지통을 비울 거다. 

“으이구, 이 답 없는 인간아!”

술에 취한 상태였던 나는 화딱지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꿈속의 나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꿈속의 내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얼굴의 모든 구멍이 활짝 커졌다. 주변의 공간이 서서히 왜곡되고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때는 술기운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죽어라, 죽어!”

나는 꿈속의 내 목을 조르는 내 손에 힘을 더했다. 꿈속의 나는 내 손을 잡고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버둥거리다가 결국은 몸에 힘이 탁 풀리며 손을 떨구었다. 다음 순간 꿈속의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뒤틀리며 무너지던 공간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숙취해소 드링크도 안 마셨는데 술기운이 싹 가셨다. 

눈 앞에 완성된 PPT가 열려 있었다. 저장 버튼을 누르고 창을 닫았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다. 이제 슬슬 출근 준비를 하면 되겠다. 휴우, 꿈이었구나! 깜빡 잠이 들었나? 이번 PT는 정말 자신 있는데, 그래도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다. 파일을 날리는 꿈을 꾸다니. 후아, 정말 끔찍하고 리얼한 꿈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타올로 몸을 닦고 머리를 틀어 올린 다음 검은색 브라의 후크를 채우다가 문득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야, 그건 꿈이 아니었어!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거야! 신이 내게 다시 기회를 주신 거야! 아미타불! 인샬라! 할렐루야! 

경쟁 PT는 대성공이었고, 팀장님은 이사님들과 한참을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나를 돌아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지난 번 오늘은 나한테 내민 게 저 손가락이 아니었는데 다행이다. 

“수고했다.”

복도에서 나는 박대리의 축 늘어진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놈은 짜증섞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자기네 팀장의 호통을 듣고 호다닥 달려갔다. 쪼다같은 놈. 네가 차지한 지난 두 번의 프로젝트도 사실은 내 머리에서 나온 기획안이었잖아, 이 거머리 새끼야. 

나는 그날 하루종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 수시로 뺨을 꼬집고 브라 착용 여부를 확인했다. 매번 뺨이 얼얼하고 크지도 않은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오는 걸 보면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파일을 날린 쪽이 꿈이었나. 아니면 내가 진짜로 시간여행을 한 건가. 입사 이후 최고 수준이었던 팀장님의 칭찬과 팀원들의 존경 어린 눈빛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하고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그래도 퇴근 후엔 한우로 배불리 회식을 하고 집에 와서 꿀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어떤 게 진짜 현실인지 불안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침대 옆 방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들과 내 머리카락에서 진하게 풍기는 소고기 기름 냄새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뭐가 어떤게 된 건지 확실친 않지만 내가 진상을 알아낼 뾰족한 방법도 없고, 어쨌든 잘 됐으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더 열심히 살자!

“슬기야!”

출근하는데 회사 로비에서 나를 기다렸던 눈치의 박대리가 다가왔다. 왜, 어제 쳐발리고 나니 다시 나한테 달라붙어 기생해야겠다 싶니? 일찌감치 포기해라. 너와 사귄 6개월은 내 31년 인생 최악의 흑역사야. 

“나 어제 팀장한테 깨지고 저녁에 혼자 포장마차 가서 술 먹었는데...”

“또 필름 끊겼어? 그러다 알콜성 치매 온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휴대폰을 잃어 버렸어.”

“그래, 안됐네. 신상으로 사.”

“폰에 우리 동영상 있어.”

“뭐?”

“미안해. 내가 몰래 찍은 적 있었어.”

“이런 미친 놈이!”

나는 박대리의 촌스런 파란 넥타이를 움켜쥐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이걸 어디 매달아 버릴까 하고 두리번거렸는데 아쉽게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박대리는 구차하게 똥파리 마냥 양 손을 비비고 있었다. 

“그냥 혼자만 가끔 봤어. 맹세코 진짜야.”

“이 변태 새끼야. 그런 걸 왜 찍어서 또 가끔 보고 자빠졌어. 토 나올 것 같다.”

나는 폰을 꺼내 <박쓰렉> 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쓰렉?”

박대리는 그 와중에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심 죽고싶나. 

“입 다물어라. 고 박쓰렉으로 바뀌기 싫으면.”

이놈을 죽이는 건 나중 일이고 우선은 폰을 찾는 게 급했다. 신호가 가긴 하는데 아무도 받진 않았다. 쉬지 않고 세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누군가 받았다가 바로 끊어 버렸다. 다시 걸었더니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누구 손에 들어갔든 주인을 찾아 돌려줄 의사는 없는 게 확실했다. 아냐, 전화를 받는 순간에 배터리가 떨어져서 전원이 꺼진 걸 수도 있어. 희망을 갖자. 제발 다시 충전을 해주세요. 

팀장님께 전화해서 병가를 낸 다음 박대리를 끌고 전날 밤에 갔다는 포장마차를 찾아 갔다. 하지만 아침 시간이니 당연히 포장이 내려져 검은 고무 밧줄로 묶여 있었다. 혹시나 해서 보도블럭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바닥을 살폈지만 지저분한 쓰레기 쪼가리와 소주병만 뒹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폰이 있었어?”

“어, 그건 백퍼 확실해.”

필름 끊겼다더니 뭐 그리 확실해. 이 쓰레기 설마 여기서도 동영상을 본 건가. 짓밟힌 자존심의 복수로 영상을 어디다 올려 버릴까 고민한 건 아니겠지. 폰을 찾기만 하면 너는 진짜 죽은 목숨이다. 

“너무 걱정하지마. 각도를 잘 맞춰서 얼굴은 안 보여. 어둡기도 하고.”

“입 다물라고 했다.”

포장마차에서 박대리의 집까지 200 미터 정도 되는 길을 여러차례 왕복하며 뒤졌지만 소득은 없었다.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혹시 이거 찾아요?’ 라며 휴대폰을 들고 나타나길 기대한 면도 있었는데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화도 백 번 넘게 걸었는데 계속 전원이 꺼져 있었다. 박대리한테 집에 가서 나노 단위로 샅샅이 뒤지라고 들여 보냈다. 폰을 찾고 나면 너도 뒤지라고 덧붙였다. 

나도 집으로 향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자꾸 나를 흘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벌써 동영상이 어디 올라간 건가. 불안감에 식은 땀이 흐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회사도 그만둬야 하나. 엄마 아빠한테는 뭐라고 하지. 이제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다. 머릿속에서 아까부터 계속 노크하며 나를 불렀지만 무시해왔던 그 방법. 과거로 가야한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나도 방법을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꿈 속에서 과거의 나를 만나면 그 시간으로 갈 수 있는 건가? 꿈 속에서 과거의 공간에 가면 그곳으로 가는 걸까? 집에서만 되는 걸까? 술에 취해야 하나? 그날 마셨던 브랜드의 맥주를 마셔야 하나? 혹시 그 캔에만 특별한 약이 들어있던 것은 아닐까? 그거 진짜 그냥 꿈이었으면 어떡하지?

간다면 작년 11월 이전이다. 나년이 쳐돌았는지 박대리가 갑자기 괜찮아 보여서 만나기 시작한 게 12월이니까. 근데 꿈이란 게 원하는대로 되나? 모르겠다. 일단 마시자. 나는 그날과 똑같은 에일 맥주를 편의점에서 잔뜩 사와서 꿀꺽 꿀꺽 마셨다. 술에 약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금세 취해서 졸음이 몰려 왔다. 

달달한 향기가 집 안에 가득했다. 3월의 내가 주방을 난장판으로 해놓고 팔자에 없는 초콜릿을 만들고 있었다. 3월 13일이네. 내가 미쳤지. 정 초콜릿을 주고 싶으면 로이스 아니면 페레로 로쉐나 사주고 끝내면 될 것을 뭔 정성이 뻗쳐서 저 짓을 했을까. 저 탁자 위에 있는 박스는 명품 넥타이핀과 커프스 세트다. 박대리는 후진 취향의 셔츠와 넥타이 뿐인데 저런 걸 줘서 뭐 한다고. 다음 달에 추파춥스 하나와 리어카표 머리핀 하나 받을 줄은 몰랐지. 얘기라도 해주자. 

“야 이 똘추야!” 

3월의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초콜릿을 젓던 주걱을 놓치고 나를 돌아 봤다. 그러자 우릴 둘러싼 공간이 조금씩 흐물거리며 아래로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지난 번에도 이랬지. 

“너... 너는...?”

“너다, 너! 9월의 너야! 박대리한테 쓸데없이 정성 쏟지 말고 당장 헤어져!”

“아니, 그게 무슨...? 이거 꿈인가?”

“어, 꿈은 꿈인데 네 꿈이 아니라 내 꿈이야.”

어리둥절한 3월의 나와 꿈꾸는 나를 둘러싼 천장과 벽이 점점 흘러 내리고 빈 자리에는 하얗고 밝게 빛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만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보였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그렇게 모든 공간이 무너지고 바닥까지 아무것도 없이 빛이 날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시간여행은 실패했다. 뭐 3월로 가는 건 별 의미도 없으니까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다시 잠을, 아니 꿈을 청했다. 

머라이어 캐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12월의 내가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건 너 뿐이라며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으이구 저 화상! 브리짓 존스야 뭐야. 

“여기도 아니야. 한 달 더 과거로 가야 돼.”

소파 위에서 눈을 감고 열창 중이던 12월의 내가 나의 혼잣말에 깜짝 놀라서 노래를 멈췄다. 

“누구세요?”

동시에 천장과 벽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패턴을 좀 알 것 같았다. 과거의 내가 꿈꾸는 나를 발견하면 공간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붕괴가 끝나면 꿈에서 깬다. 

“신경쓰지 말고 노래나 계속 불러, 이 바부팅아.”

꿈에서 깬 나는 다시 화장실에 다녀와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꿈이 무너지고 꿈에서 깨는 과정은 파악했다. 그런데 과거의 그 시간 그 공간으로 가는 방법은 뭘까? 역시... 역시 그건가? 꿈꾸는 내가 과거의 나를 죽여야 하나? 좀 거시기하긴 한데 뭐 꿈이니까. 

이후 한참 동안은 주로 개꿈만 꾸고 별 소득이 없었다. 알고 보니 꽤나 훈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날 내가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았던 거다. 실제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꿈꾸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가 나오는 꿈을 꾸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과거 상황이 꿈에 나와도 내가 보이지 않는 1인칭 시점일 때가 많았다. 그동안 꿈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다 꿈에 내가 나와도 주변 공간이 사실적이지 않으면 꿈 속의 내가 꿈꾸는 나를 인지하지 못했다. 영화 <인셉션>에 나왔던 것처럼 주변 배경이 제대로 구현되어야 했다. 이게 내가 미래로는 가지 못한다고 했던 이유다. 겪어 보지도 못한 미래 상황을 실제와 같은 수준으로 리얼하게 꿈꿀 능력이 내겐 없었다. 

한편 내 실제 생활은 당연히 엉망이 되었다. 내 동영상이 어디선가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을 제외하면 온통 꿈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빨리 집에 가서 꿈을 꾸고 싶었다. 그렇다 보니 사무실에서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내 건강 상태를 걱정해주던 팀장님과 동료들도 이내 짜증을 내고 내게 분통을 터트렸다. 박대리도 소문을 들었는지 나를 위로한답시고 디지털 장의사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내가 시간여행 확실하게 설계하고 나면 꼭 너를 죽이고 간다. 

나는 집 내부의 세세한 부분들을 기억하는 일에 집중했다. 꿈에서 배경의 디테일이 살아 있을수록 무너져 내리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꿈꾸는 내가 꿈속의 나를 살해하는 시간을 더 벌 수 있다는 뜻이다. 줄자를 늘려가며 모든 곳의 치수를 측정하고, 모든 무늬의 개수를 셌다. 무대는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이제 시간만 정하면 된다. 사실 11월로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생각나는 날짜가 있긴 했다. 꿈에 나올만한 다른 사건이 없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꾸만 11월 16일 토요일만 떠올랐다. 그날에 대한 것은 정말 세세한 것 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나와 12년을 함께 한 치즈냥 메롱이가 고양이별로 떠난 날이다. 고양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할까봐 자기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더니, 메롱이도 줄곧 씩씩하게 버티다가 내가 잠깐 편의점에 다녀온 사이에 혼자서 자기 별로 돌아갔다. 그날의 슬픔을 다시 한 번 겪을 자신이 없어서 다른 날을 선택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휴대폰 갤러리와 다이어리를 뒤적여 봐도 마땅한 날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힘들게 마음을 정했다.  

술이나 한 잔 하자며 박대리를 집으로 초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엄청나게 기뻐하며 술은 자기가 사오겠다길래 꼭 그 맥주로 사야 한다며 브랜드를 알려주었다. 

띵동. 

문을 열었더니 맥주가 가득한 편의점 봉투를 양손에 든 박대리가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와 슬기네 집 엄청 오랜만이다. 넉 달만인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맥주를 요란스럽게 내려놓고 거실을 한바퀴 돌았다. 

“별로 바뀐 건 없네.”

이번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장을 둘러보더니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이게 영화로 나왔던 책인가?”

“원래 자리에 그대로 꽂아 놔라.”

책을 꽂더니 이번에는 옆 칸의 피규어에 관심을 보인다. 

“이거 새로 산 거야? 원래 있던 건가?”

“만지지 마!”

나는 11월과 최대한 똑같이 세팅 해놓은 무대를 함부로 휘젓고 다니는 단역 배우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저기 앉어. 얼른 술이나 마시자.”

“아 뭐야? 배달 치킨이야?”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한 폼이 내가 거창한 요리라도 손수 준비할 줄 기대했나 보다. 내가 준비한 걸 언제쯤 공개할까 고민 중인데 저게 자꾸 재촉하네. 

“오랜만에 슬기가 말아주는 소맥 좀 먹어 볼까?”

그래, 마지막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소주와 맛 없는 국산 맥주를 5:5의 비율로 섞어 박대리에게 건넸다. 나는 주문했던 에일맥주를 마셨다. 

“오오, 오늘 쫌 쎄게 탄다? 나 일찍 취하게 하려고?”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그 이유는 네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란다, 이 변태새끼야. 

“폰은 새로 샀어?”

“어, 샀지. 최신형!”

닭다리를 들었던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더니 전화기를 꺼내서 나한테 자랑했다. 

“잠금 패턴은 지금도 기역자?”

“어, 크크. 딴 걸로 하면 내가 기억을 못해.”

분실폰 주운 사람이 잠금 해제하기 딱 좋은 패턴이지. 

“와우, 이거... 술이... 확 올라오네.”

5:5 소맥을 연거푸 스무 잔 쯤 먹였더니 박대리의 혀가 꼬이고 눈이 슬슬 감기려고 했다. 

“그 동영상은 잃어버린 폰에만 있었어?”

박대리는 헤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흐허헝, 사실은... 클라우드에 저장해놔서... 새 폰에도 다운 받았다. 헤헤... 한 번 볼래?”

용서할 마음도 없었지만 용서가 안 된다. 오늘 밤으로 계속 돌아와서 이놈을 계속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미 무늬 칼로 박대리의 목을 그었다. 피가 생각보다 세게 뿜어져 나와서 나도 온통 피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바로 다음 씬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잠드는 시간이 오래 걸릴까봐 샤워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결국은 타올로 대충 닦고 맥주를 더 마셨다. 보기 흉하게 드러누워 있는 박대리의 시체가 거슬렸지만 거실의 모습을 최대한 머리에 담은 상태로 잠이 들어야 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맥주를 두 캔 더 마시고 메롱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제일 좋아하던 방석 위에 누워있는 메롱이를 보자마자 나는 울음이 터졌다. 가슴이 미어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나의 사랑스러운 메롱이. 내 손이 닿기만 해도 골골거리며 꼬리춤을 추고, 컴퓨터로 일을 하면 꼭 키보드 위에 드러누워서 방해를 하고, 잠을 잘 때면 항상 옆구리를 파고 들어서 내 팔에 턱을 올리고, 새벽에 내가 화장실에 가면 졸린 눈을 하고서도 꼭 따라와서는 발닦개 위에 앉아서 나를 기다렸지. 

슬픔에 빠져있던 나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른 몸을 숨겼다. 11월의 내가 두툼한 외투를 입고 안으로 들어왔다. 11월의 나는 외투를 벗어 소파에 던지고 나서야 메롱이가 대답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11월의 나는 하염없이 메롱이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쏟아냈다. 나도 커튼 뒤에서 함께 울고 있었다. 나는 11월의 나에게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한참 후 두 사람의 울음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11월의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눈물로 범벅된 내 얼굴과 차갑게 굳어가는 메롱이를 번갈아 봤다. 그 모습에 나는 그만 다시 울음이 터져버렸다. 11월의 내가 나를 안고 토닥이며 위로를 해주었다. 

“미안해. 내가 일이 좀 있어서 너를 죽이고 여기로 와야해.”

내가 사실대로 고백했다. 

“그래, 괜찮아.”

“정말 미안해.”

“괜찮아. 너무 미안해할 것 없어.”

11월의 내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가 처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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