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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INA - 맹세의 깃발

2020.12.12 19:3612.12

올그는 지평선 위로 모인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각 마을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올라가 있다. 산양, 훌터가 말하였다.

 

[마법사님들만 계셨다면 쉬웠을 텐데.]

 

올그는 훌터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 인간 무리 몇을 상대하는 겁니다.]

[마법사라니, 당치도 않죠.]

 

[그런 소리 하지 말게.]

 

훌터는 제 몸에 난 흉터를 들어 보였다. 팔에서 가슴에 까지 이어진 흉터는 털을 갈라 살 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말씀이 있네.]

[목숨을 끊을 때까지.]

[절대 사냥감을 잡은 손을 놓지 말라.]

 

몇 마을의 군대로 함성이 들려온다. 거대한 우리를 짊어 멘 수인들이 무기를 들고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우리에는 인간들이 붙잡혀 있었다.

 

[우리 이웃마을인 마호 마을이야.]

 

훌터는 감탄하며 턱을 쓸었다.

 

[상당하군.]

 

올그는 제 몸 만 한 검은 도끼를 손에 쥐고서 일어난다. 아직 사용하지 않아 숫돌로 벼린 강철 냄새가 그대로 전해졌다. 우리를 끌며 우렁찬 함성 소리를 내던 마을의 한 수인이 올그에게로 달려간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하게 바람에 휘날리고 작은 뿔이 머리에 난 암컷 양 한 마리가 올그가 있는 둔덕 아래로 달려와 멈추었다.

 

철과 나무로 덮은 갑옷을 입고 기다란 창대를 등에 메고서 양이 말하였다.

 

[마호 마을의 선봉장 나르라고 합니다.]

 

올그가 답한다.

 

[반갑소.]

 

올그가 눈을 들어 턱으로 그녀가 온 마을 사람들이 자랑스레 끌고 온 우리를 가리켰다.

 

[그대들이 잡은 것이오?]

 

[맞습니다.]

 

[대단하...]

 

[맹세의 아들이자, 포프의 후손이시여.]

 

나르는 올그의 말을 자르고 힘차게 목청을 키웠다. 그녀의 고함에 전사들이 고개를 올렸다. 모두가 그녀의 간청을 듣고 있었다.

 

[저희 마을을 선봉으로 세워 주십시오.]

 

올그는 고개를 올리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올그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하였다.

 

[이유가 무엇이오?]

 

나르, 한 마을의 선봉장이 자신이 멘 창대를 들어 고함을 친다.

 

[이 창으로 인간이 제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 창으로 인간들이 제 자비심을 죽였습니다!]

[이 창으로 인간들이 제 마을의 구원을 져버렸습니다!]

 

그녀의 고함이 들판으로, 무기를 든 수인들의 어깨로, 마을들이 모인 군대의 사이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퍼진다.

 

[이따위 창으로 인간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훌터가 일어나지만 올그가 그를 막았다. 그녀의 간청이, 고함이, 울부짖음이 모든 수인들의 귀로 들어갔을 것이다. 올그는 물었다.

 

[그대의 마을이 선봉으로 서게 해야 하는 이유가 뭐요?]

 

나르의 눈빛이 올곧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눈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인간들을 죽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올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마호 마을이 끌고 온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우리 안에는 너 덧 명의 인간들이 족쇄에 묶인 채 발가벗겨져 있었다. 그중 하나를 올그는 잡아 땅으로 끌었다. 장대를 세워 인간을 매단다. 침을 흘리며 신음을 내는 인간을 두고서 올그는 외쳤다.

 

[이제 우리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이제 우리는 사냥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두 발과 한 갈래의 숨으로 일군 땅을 지켜낼 겁니다.]

 

올그가 허리춤에 찬 채찍을 들어 인간을 내려친다.

 

비명 소리.

 

올그의 채찍으로 살갗이 벗겨진다.

 

비명 소리.

 

[말해, 네 둥지가 어디 있는지 말해!]

 

간신히 세어 나오는 바람 소리를 끝으로 인간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축 늘어진 몸뚱어리를 치우고 올그는 우리에 남은 인간을 다시 끌고 와 장대에 매달았다. 한쪽에 쓰러진 동족의 시체를 보고서 겁에 질린 인간이 애원을 한다. 올그가 채찍을 내려친다.

 

살갗이 벗겨지고 비명을 잘못 지른 인간의 혀가 제 이빨에 잘린다. 피를 쏟은 그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올그가 제 손으로 직접 인간들을 하나씩 끌어 장대에 매달았다. 마지막 남은 인간의 혀에서 둥지의 위치가 알려진다. 채찍을 거칠게 던지고서 올그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올그의 눈이 나르의 눈과 마주친다. 올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간밤에 아들을 잃은 어미 양이 제 아들을 죽인 창대를 높이 세워 군대를 이끌었다.

 

훌터가 올그의 옆으로 와 물었다.

 

[이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 같나?]

 

올그는 짧게 대답하였다.

 

[결국 옳은 쪽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훌터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군대를 이끌었다. 훌터와 함께 올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외치며 깃발을 들었다.

 

[대답이 있는 곳으로!]

 

새벽녘이 오르고 올그의 등 뒤로 포프 마을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날리고 있다.

 

 

 

 

땅이 흔들리고 있다. 캐시는 겁에 질린 채 비명을 질렀다.

 

[무너지는 건 아니겠죠?]

 

베스는 자신을 가로막은 판자와 돌덩이들을 손으로 짚었다. 인간들이 숨어 살고 있는 마을까지 왔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곳곳에 난 구멍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막혀 있었다. 캐시는 초조한 목소리로 발을 굴렀다.

 

[이제 어쩌죠?]

 

진동이 커진다. 베스는 천장을 짚어 땅 위로 전해지는 수 백 가지의 발소리들을 느꼈다. 베스가 캐시의 손을 잡아 끄적거렸다.

 

[올그요?]

[그 애가 왜?]

 

캐시와 나이가 같은 올그는 다부지고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한동안 조용히 지낸다는 말을 듣고 베스는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포프의 맹세. 전사들과 그 자식들. 베스, 그녀와 포프의 전사들이 지키고자 했던 평화. 그녀는 그들의 자식들 역시 마을 주민들처럼 그저 잊기를 바랐다. 그 마을과, 그 맹세와, 그 갑옷과, 그 전쟁을. 베스가 다시 캐시의 손위로 끄적였다.

 

[뒤로 물러서라니?]

 

베스가 주먹을 쥐고 자세를 취한다.

 

[잠깐!]

 

입구를 막고 있던 판자들과 돌덩이들이 무너져 내린다. 캐시는 소리 없이 입을 틀어막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분명 인간들이 몰려올 것이다.

 

베스가 아래로 뛰어 내려가 주위를 살핀다. 먼지와 바위들만이 굴러다니는 땅 위로 베스는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캐시도 그녀를 뒤따라 달리지만 연신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흘깃거린다. 예감이 좋지 않다.

 

 

 

 

구원자의 껍질 곳곳으로 창과 함정들이 설치된다. 정찰을 나갔던 이들이 전하고 수인들의 마을에 들어간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지평선 너머에서 수 백 개의 걸음들이 다가온다. 여자들이 검을 들고 남자들이 창을 든다. 구원자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곳저곳을 뛰며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세상에서 제 것들을 잃은 이들이 가진 증오가 수인들에게로 향한다.

 

인간들의 생명을 빼앗아 돌아가는 저주받은 세상에서 인간들이 외친다.

 

우리는 서있으리.

우리는 함께 있으리.

우리는 깨어 태양을 맞으리.

 

일어서 싸우리.

맞서 부딪히리.

마지막 숨에 까지 버티리.

 

우리는 서있으리.

우리는 함께 있으리.

우리는 깨어 태양을 맞으리.

 

노래소리가 커진다. 두려움이 부풀어 구원자의 천장에 매달린 수정을 삼킨다. 빛을 잃은 수정의 아래로 횃불들이 일어난다. 지면의 빛을 삼키고 밤이 되면 구원자의 내부를 비추던 거대한 수정은 한 인간의 발명품이었다.

 

함께 일어서 싸우리.

함께 맞서 부딪히리.

우리는 깨어 태양을 맞으리.

 

동족에게서 등을 돌린 한 남자의 물건들. 그가 지녔던 모든 물건들을 불태우고 산산조각 냈지만 저 수정만큼은 없애지 못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수정들을 가리켜 없애야 한다고 말하였다.

 

함께 태양을 맞으리.

 

노랫소리. 횃불들과 믿음들. 사람들은 믿었다. 탈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안전하게 살 수는 있으리라고. 태양 빛을 그대로 옮기는 구원자의 수정들은 언더시티, 지하마을을 비추며 안식을 주었다.

 

[다행이지 않습니까?]

 

여사제가 등을 돌려 방문자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커다란 귀와 솜뭉치 같은 꼬리. 빨간 눈. 입가로 그려지는 미소.

 

[빛 하나 없는 구원자의 등껍질 속에서.]

[이렇게 풍족하게 살 수 있다니, 기적 같은 일이지요.]

 

여사제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다.

 

[덕분입니다.]

 

수인들의 편에서 몰래 인간들을 빼오는 조력자. 수인들로부터 구원자를 지키며 인간들을 키워준 수인. 여사제가 몸을 비켜 사원 너머로 보이는 마을의 전경을 보여 주었다.

 

[이제 만나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요, 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은덕에 우리가 살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토끼 수인이 조용히 말한다. 길게 입 꼬리가 그어져 한없이 발갛게 번진다.

 

[전 그저 여러분들을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여사제가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은다.

 

[당신이 저희를 살리셨습니다.]

[벨바 님.]

 

 

 

 

 

 

 

훌터에게로 편지가 쥐어진다. 꽃 향이 벤 종이엔 마법사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땅을 파야 해!]

 

올그가 훌터의 편지를 보고는 팔을 벌리며 소리를 쳤다.

 

[마법사님께서 도움을 주셨다.]

 

올그의 말에 따라 수인들이 땅을 파내려 간다.

 

[아래에 인간들의 둥지가 있다고 하신다.]

 

땅을 깊게 파지도 않았다. 얕은 흙더미 속에서 거대한 등껍질이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부셔라!]

 

병장기를 든 수인들이 구원자의 껍질을 두드려대었다.

 

[벨바께서 이르셨다.]

[아래에 인간들이 있다고 하신다.]

 

구원자의 숨죽인 비명의 틈 사이로 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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