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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INA - 포프의 자식

2020.12.11 21:3112.11

베스는 일어나 귀를 쫑긋 거렸다. 땅에 귀를 댄 그녀는 손으로 흙을 더듬었다. 그녀의 꼬리가 경직되어 꼿꼿이 서있다. 뒤늦게 눈을 뜬 캐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베스 지금 뭐하시는..]

 

베스가 손가락을 입에 대어 눈썹을 지푸렸다. 베스는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집중하였다. 일정한 주기로 들려오는 소리. 땅 속에서부터 울리는 높은 울음소리. 땅을 내려다보던 베스는 발톱을 꺼내어 땅을 파내려 갔다.

 

캐시도 말없이 그녀를 따라 땅을 팠다. 흙먼지들이 주위를 덮었고 거친 숨소리만이 퍼진다. 한참을 파던 베스가 땅 파기를 멈추고 자신이 땅 속에서 발견한 것에 손을 대어 본다. 느리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너머로 희미하게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캐시도 자신이 발견한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큰 건 처음 봐요.]

 

거대한 땅벌레의 껍질 일부분이 낮게 진동하고 있다. 베스가 일어나 주먹을 쥐어 든다. 캐시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린다.

 

[잠시만요, 베스.]

[여기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베스가 팔을 내리고 가만히 선다. 그녀의 눈이 땅벌레의 거대한 진동에 고정되어 있다.

 

[이 정도 크기면 마을 하나가 있을 거예요.]

[어떤 녀석들의 둥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캐시가 제 배낭을 거꾸로 돌려 훌훌 턴다. 그의 배낭에서 물건들이 쏟아진다. 약초 잎들과 맑은 빛을 내는 돌 몇 개, 밧줄과 과일 포 몇 덩이. 캐시가 배낭을 멘다.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금방 올 테니 기다리세요.]

 

베스는 그대로 서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드디어 찾았군요.]

 

목소리. 낮고 음울한. 맵시 있는 어투와 예의 있는 단어 선택.

 

[믿고 있었답니다.]

 

베스가 고개를 든다.

 

[베스 씨.]

 

검붉은 색 정장의 남자. 사람이면서도 마녀에게 선택 받은 마법사. 그는 엷게 웃으며 서 있었다. 달빛 아래로 먹구름이 낀 탓에 베스와 남자는 서로를 보지 못하였다.

 

베스가 그에게로 몸을 돌린다. 그가 말한다.

 

[전 들어갈 수 없어요.]

[안타깝게도 저곳 사람들과 좋은 사이는 아니거든요.]

[당신은 늘 그랬듯이.]

[제가 잡아온 아이만 구하면 됩니다.]

 

베스가 그에게로 걸어간다. 그가 손을 펼친다. 붉은 색의 장막이 베스를 가로막는다.

 

[마녀가 선물 하나를 주었죠.]

[수인에 비해서 인간은 훨씬 약하니까요.]

 

베스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발톱을 꺼내 장막으로 글자를 새긴다. 철 조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 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남자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듣기에 좋은 대화는 아니군요.]

 

글자를 다 새긴 베스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난다. 붉은 장막이 그녀의 발톱에 이리저리 찢겨져 있다.

 

- 그녀가 마지막이지?

 

[그럼요, 베스 씨.]

 

여유로운 목소리와 태도. 뒷짐을 진 그가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과도 이제 마지막이죠.]

 

베스가 남자를 노려본다. 남자가 대답한다.

 

[그럼요, 베스 씨.]

 

싱긋 웃는 얼굴. 어둠 뒤로 넘어가는 남자의 발자국. 수인과 인간 사이의 계약 하나. 마녀를 등지고 싸웠던 전사와 동족을 배신한 인간 마법사 사이의 계약 하나.

 

[잊지 않았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붉은 장막과 함께 남자는 사라진다.

 

 

 

 

 

 

 

캐시는 여관으로 돌아가 잽싸게 주위를 훑었다. 커다란 곰이 몸을 일으켜 닦고 있던 접시를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찾고 있는 게 있나 보지?]

 

캐시의 등이 꼿꼿이 펴진다. 그가 긴장할 때면 등이 뻣뻣해지고 꼬리가 어색하게 움직이곤 하였다.

 

[친구가 다쳐서요.]

 

[약초들은 다 챙겨 갔잖아.]

 

[그랬...죠.]

 

곁눈질로 주위를 흘겨보며 캐시는 조금씩 움직였다. 필요한 것들을 되뇌며 눈동자를 굴린다.

 

[여관이 조용하네요?]

 

[그렇지.]

 

곰이 캐시를 죽 지켜보고 있다. 긴장한 모습이 눈에 보였지만 곰은 캐묻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오른다.

 

[조용히 챙기고 나가.]

 

[네, 아저씨!]

 

캐시는 이리저리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다. 갈색 줄무늬 고양이가 여관을 떠나 빠르게 달려간다. 곰이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여관으로 다시 들어간다. 2층으로 올라 가장 첫 번째 방의 문을 연다. 방안은 갖은 종류의 수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베커, 손님이었나?]

 

[응.]

 

[어떻게 하지, 입을 열지 않아.]

 

[다리를 부러뜨려 봐.]

 

[아니면 아예 자르는 것도 괜찮지.]

 

곰, 베커가 방의 중앙으로 걸어간다. 인간 하나가 줄에 묶여 피를 흘리고 있다. 베커가 재갈을 푼다.

 

[어때, 말할 생각이 드나?]

 

수인들이 둘러싼 좁은 방으로 인간은 겁 없이 침을 뱉는다.

 

[말할 필요는 없지.]

 

베커가 제 얼굴에 묻은 침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등을 돌려 방을 나가 문을 닫았고 문 너머로 재갈을 문 인간의 비명이 찢어진다.

 

베커는 잎을 말아 불을 지졌다. 연기가 짙게 허공으로 흩어진다. 잎이 다 타고 다음 잎을 말 때까지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어.]

 

[올그는?]

 

[아직.]

 

[그에게도 알려.]

[이제 시작이야.]

 

올그. 아버지를 따라 영웅이 되려 했던 물소 소년. 그의 아버지는 강인한 전사로, 포프의 주민이기도 하였다. 마을 포프가 사라지고 올그는 아버지가 져야 했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애썼다. 다만 그의 방식은 아버지가 가려했던 길과는 다른 길로의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수인과 그 마을의 생존에 힘썼다.

 

방으로 들어가는 베커. 두 다리가 잘려 나간 인간이 거품을 물며 신음을 흘리고 있다. 바닥 전체가 피로 끈적했고 몸부림을 친 흔적이 벽 곳곳에 새겨져 있다.

 

[뭐라고 했나?]

 

산양이 팔에 난 흉터를 더듬으며 무심하게 말하였다.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지는 않나봐.]

[대부분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하나 보더군.]

 

[그들이 죽인 수인들과 마을에 대해선?]

 

[마녀에게 팔려는 이들을 죽이고.]

 

산양이 고개를 돌려 베커를 본다.

 

[마법사가 거주하는 마을은 파괴한다는군.]

 

베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아 같은 수인들끼리도 그들을 알지 못하였다.

 

[어떻게 알아내는 거지?]

 

[인간들이야.]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여우가 피를 물든 손을 옷으로 닦으며 똑바로 말하였다.

 

[영악한 녀석들이라고.]

 

[그가 왔어.]

 

문 너머로 묵직한 발굽 소리가 다가온다. 검은 물소가 어깨를 비틀며 방으로 들어온다. 그의 커다란 몸집 때문에 방은 한층 더 좁아진다.

 

[녀석들의 방식을 알아냈어요.]

 

수인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떠들었다.

 

[몰래 마을로 잠입해 정보를 수집한답니다.]

 

[술집, 여관, 시장 등에서 이야기를 엿듣는 가 봅니다.]

 

[지금도 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올그는 하반신이 잘린 인간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대로 방을 나간다. 베커는 그를 불렀다.

 

[이제 무엇을 할 건가?]

 

올그가 뒤를 돌아본다.

 

[알지 않습니까.]

 

그의 눈이 번뜩인다. 빛이 들지 않아 칠흑 같은 거대한 체구에서 하얀 눈빛만은 똑바로 베커를 응시하고 있었다.

 

[찾고 잡아서 바쳐야지요.]

 

그가 짊어 져야 했던 전 세대의 흔적과 의무들. 그것은 빛나는 영광이나 올바른 정의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생존 앞에서 수인들은 저 스스로 독해져야 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잡아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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