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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FLY WITH ME

2020.11.25 10:1011.25

 

 

fly with me

 

 

 

 

 

 

0.

  비가 멈췄다. 그녀는 새장에 기대 말했다.

  “멍석말이를 한 이상, 그 놈은 죄가 없어도 안 되고, 살아서 입을 열어도 안 되는 거야.”

  “왜요?”

  새가 물었다.

“그럼 사람들이 믿는 것이 무너지니까. 즐거움이 죄책감으로 바뀌고. 끔찍하잖아.”

“그럼 왜 안 되는데요?”

  그녀는 새의 울음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러니 날개가 있어도 날지를 못하지. 내가 이 문을 열 수만 있다면.

 

 

1.

  서울 사대문 안은 1km 높이까지 비주얼편광으로 둘러싸였다.

  북악산 뒤편으로는 북악산보다 2.5배 높이로 과거 63빌딩을 본 따 만든 새하얀 빌딩 일명 순백센터가 서있다. 중앙정부가 위치하고, 고위 정부관료 및 상류층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 앞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 광장은 긴 세월 그랬듯 화려한 빌딩숲들이 감쌌다. 물론 대기업이 사회경제를 지배하던 시절을 상징하던 유리로 마감된 깔끔한 외관들은 시대의 망상과 생존본능이 손을 뻗은 듯, 즐비하게 매달린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들에 의해 지저분하게 뒤덮였지만. 간판이야 대낮에는 묘비명을 새긴 비석마냥 고요하니까.. 단청의 오랜 전통이라 치자. 하늘은 온종일 푸르지만, 사대문 밖은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붉은 모래 바람이 불었다. 다만 서울시민들의 정신건강을 고려해 유리벽 표면에 비주얼편광을 붙여놓아 하늘을 늘 푸른 상태로 유지할 뿐이다. 하지만 밤이 되거나, 날이 흐리면 태양열로 유지되는 비주얼편광은 작동을 멈추고, 도시를 에워싼 유리벽 바깥의 붉은 모래폭풍이 부는 황량한 풍경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고것도 나름 장관이었지만, 역시 사람들을 위축시켰다. 이러니 출처도 불분명한 언어로 쓰인 네온사인의 화려함이 도심을 덮었겠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유리벽 바깥의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아주 긴 경고를 했고, 또 무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결국 남은 건 더 이상 인간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과 간사한 얼굴을 드러낸 메트로폴리스로의 도피뿐이라. 물론 변치 않는 것도 있다. 긴 호리병 속에서 입구를 바라보듯 수직으로 보이는 1km 높이 밖 하늘을 보면 여전히 별이 보이지만, 그 뿐이었다. 사실 소시민에게는 그곳을 올려다보기 전 순백센터가 먼저 보이기 마련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붉은 모래바람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사실이다. 화창한 낮은 완전히 1000년 전으로 돌아갔다. 지하철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식료품 생산 공장이 들어서 인조채소와 가공육을 생산했는데, 화석연료는 끊긴지 오래고, 모래바람에 태양광으로는 비주얼편광을 돌리기도 벅차 하류층은 주로 식료품공장을 돌리기 위해 노상 하루 8시간씩 몸을 갈아 넣어 전기발생유도-노를 젓는 일 따위를 해야 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다시 누군가는 시험으로 관료가 되고, 누군가는 노동을 책임지는 반상의 법도가 다시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말이다. 또 남성의 육체를 더 우대하는 남존여비 역시 되돌아왔다. 최종적으로 경국대전이 다시 이 대도시의 헌법으로 채택되었다. 이 일련의 조치들은 긴 세월의 데이터 속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경복궁의 뜻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경복궁에 설치된 우리들의 새로운 왕 인공지능k 말이다. 갓 세이브 더 킹!

  한편, 서울의 밤은 여전히 살아남은 과거 테크놀로지들이 순백센터에 가지 못한 평민, 노비들이 억압적인 낮의 질서를 부정하며 제 멋대로 힘과 본능을 드러내는데 동원되었다. 마약과 가상현실, 화려한 조명에 자신을 맡기는 영혼들은 언제나 비주얼편광의 인위적인 맑은 하늘이 얼른 사라지기를, 그래서 인공지능k가 큰 질서를 위해 방종을 허용한 골목의 구석구석으로 숨어들 수 있기만을 고대했다. 모든 것들이 이제 낡고, 때가 탔지만 여전히 버튼 하나면 누구나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그 골목 속으로. 술, 약, 가상세계가 삶을 위로해주는 곳으로.

  다만 여기도 암묵적인 법도가 하나 있다. ‘화냥년’이나 ‘호로 자식’은 절대 되지 말 것.

 

  그리고 서울의 한복판, 수백 년을 버텨오며 검푸르게 녹슬고, 때가 낀 세종대왕의 손에는 엉뚱하게도 새장이 하나 들려있다. 만약 과거의 인간이 이곳이 온다면, 가령 가장 개화된 시기로 알려진 2050년 무렵의 한국인이 이 도시를 본다면 가장 이상하다 여길만한 것이었다. 화려한 조명들이 동상의 눈을 슬프게 스치는 가운데, 위대한 왕의 손에 들린 직경이 2.5미터쯤 되는 원통형의 새장 안에 한 성인여성이 갇혀있는 광경 말이다.

  속칭 열녀문이라 불리는 그 커다란 새장에 갇힌 여자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아있었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도 남을 크기의 거대한 날개였다. 서울시민이면 누구나 그 기형적인 새-인간에게 모이를 주거나, 침을 뱉거나해도 무방했는데, 그것 역시 인공지능k의 선택이었다. 새-인간은 아주 어릴 적부터 그곳에 있어 시민들에겐 살찐 비둘기처럼 익숙한 풍경이다. 전통은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법이니, 경험 없는 처녀를 죽여 신에게 바치기도 한 지난 역사들에 비하면 붉은 모래바람의 시대는 그래도 인류가 성숙했던 시절의 흔적이 꽤 남았다 할만 했다.

  그녀는 낮에는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밤에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움츠리고 앉아있었는데, 그저 괴상한 돌연변이일 수도 있지만, 사대문 안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져있었다. 새-인간은 사실 이 세계가 홀로그램우주라는 증거이며 프로그램의 오류로 존재하는 이물질이라고. 시민들이 이 세계의 비틀린 비대칭성의 원인을 자신들이 해 진 뒤 즐기는 가상현실들처럼 세상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발상에서 찾았다. 자신들이 믿는 질서가 가짜일까 새-인간을 가두고, 모욕을 줌으로써 삶이 허무해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말 중에 가장 비이성적인 공포는 새-인간이 날면 이 홀로그램우주, 현 서울은 무너지리라는 믿음이다. 그렇다고 새-인간을 죽여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현명하게도 대충 먹여주면서 중세의 돌연변이처럼 무시와 멸시를 통해 붉은 모래바람이 주는 불안을 잠재우는 방식을 택했다.

  새-인간은 7살 무렵부터 날개가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얼굴을 보면 20대 중반쯤은 되어 보이니 적어도 10년 이상 열녀문 안에서 산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누구도 그녀가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 했다. 그녀는 언제나 무표정 했는데..

  광화문광장 한복판, 열녀문 앞에서는 자주 멍석말이가 펼쳐진다.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이 대신하는 것에 대한 민중의 무의식적인 반발인지, 순백센터의 권위에 대한 하류층의 분노인지 알 수 없지만, 매일 밤 위태롭게 일렁이며 표출되는 이 도시의 불순한 에너지를 잠재우는데 효과적이라 너무 자주 일어나거나, 이유가 허무맹랑하지 않다면 인공지능k 역시 그 필요를 인정한 듯 보였다. 자신 앞에서 멍석말이가 벌어질 때가 새-인간이 유일하게 웃는 순간이었다. 유리벽 안의 사회가 유지되려면 새-인간의 웃음도 필요한 것이다. 더 바닥이..

 

 

2.

  채윤이 새-인간과 친구가 된 것은 최강소방선발대회에 참가한 직후다. 그 대회는 공식적이지도, 비공식적이지도 않은 애매한 성격이 있었는데, 모든 것을 도박의 소재로, 가상현실의 무대로 만드는 명동거리의 왈패들에 의해 주최되긴 했지만, 인공지능k와 순백센터 역시 지원하고 있었고, 우승상금만 보통 공무원의 10개월분이었다. 채윤에게는 기회였다. 기록에 따라 순백센터로 바로 신분이 넘어간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채윤은 과거에는 정부종합청사 쓰인 건물의 8층에 있는 좁은 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직업소방관으로 과거 유전자 개선이 성행하던 시대의 마지막 세대를 조상으로 둔 탓에 육체적인 능력이 자연 잉태된 남성보다 뛰어났는데, 덕분에 대부분의 여성이 밤이 아니면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에서도 아버지 뒤를 이어 소방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유전질환에 일찍 돌아가셨고, 많은 병원비를 채무로 남겼다. 또한 그녀의 타고난 근육질의 육체는 언제나 남자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자신과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었다. 채윤이 스스로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은 오로지 불을 끄는 순간뿐이었다.

  그녀는 일명 ‘선두’였다. 자신의 몸에 꼭 맞는, 화씨 2400도와 중력의 8배 충격을 견디게 해주며 근력의 8배를 내게 하고 도끼, 망치, 강화로프 등 각종 구조장치가 장착된 방화기계를 입고 화제 현장에 투입되면, 영광되게도 인공지능k의 직접 지시를 받는다. 그녀는 언제나 화점을 향해 제일 먼저 달려갔다. 그녀가 화염에 중심부에 일명 ‘수리부엉이’라 불리는 물방울 모양의 폭탄을 던지면 근방 2m 내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고, 채윤이 낸 길을 따라 관창호수를 쥔 후발대가 들어와 진화작업을 했다. 화제는 밀폐된 서울에서 정말이지 위험한 문제였고, 화제진압의 ‘선두’를 맡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큰 자부이자 삶의 이유였다. 채윤처럼 인공지능k와 많은 대화를 나눈 서울사람도 없을 것이다. 일급 ‘선두’인 그녀의 긴장완화를 위해 인공지능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채윤 역시 마초집단으로 구성된 자신의 소방부대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인공지능에게 말했다. 같이 고생한 뒤, 숯검정이 되어 소방차에 올라타 본서로 돌아가는 길에 담배를 나눠 피고, 맥주 캔을 같이 따 마시는 시간이 즐겁다고.

  땀 앞에 차등은 없었기에, 채윤은 밤의 환락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다만 최강소방에 도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상금만  월급의 10배인데다, 혹시 아는가? 순백센터에서 그녀를 부를지.. 채윤은 서울에서 인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그 경주에 참여하기 위해 꼬박 1년을 준비했다. 시뮬레이션 된 화재상황에 신경센서로 연결된 소방관들의 고스트가 투입되어 화재를 진압하고, 그 기록을 다투는 최강소방선발대회는 참가자격도, 룰도 소방관이면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현실의 육체적 능력과 실제 쓰는 방화기계의 성능을 그대로 게임 판으로 옮겨, 그 고스트들이 시합을 펼치는 전형적인 밤의 게임이었다. 사실 웬만한 선두들에겐 다들 참가 권유가 있었다.

  “재미없잖아. 현실에서 불만 끄는 건. 그래서 한번 해본거야.”

 

 

3.

  예선은 쉬웠다. 1990년대 시골국도로 맞춰진 시뮬레이션에서 소형차량화제를 혼자 힘으로 진압하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방화기계를 하체에만 걸치고, 소방호수를 전개시키는 동시에 자신 쪽으로 잡아당겨 튀어 오른 호수의 암컷과 관창을 공중에서 순식간에 연결시키는 참신한 방식으로 신기록을 세웠다. 구급차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대라 시간이 빠를수록 높은 점수가 높은 판이었다. 평소에는 감춰야했던 상상을 맘껏 펼치자 그녀는 자신이 정말 자유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시합 내내 좋은 컨디션을 보이며 순항했는데..

  하필 결승시합 직전에 왼손의 검지손톱이 깨지다니. 좁은 사대문 안에서 자동차의 효용이야 부유층의 과시적 유물이거나, 급할 때 렌트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서인지 사고의 비율은 옛 시절보다 높았다. 채윤은 차량사고 현장에서 억지로 핸들과 의자사이에 낀 시신을 빼내며 생각했다. 이 고물들은 결국 자기들끼리 사고를 내다 다 사라질 것이라고.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진 그때, 그녀는 금속절단-칼을 쓰다 제 손톱을 깨먹었다. 퇴근 후 그녀는 창으로 도시 불빛을 내려다보며 인조손톱을 매달았다. 시합 규정상 현재 신체를 강화하는 어떤 행위도 금지되어 있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손톱쯤이야. 결승은 전통대로 2차 대전 시기, 독일군의 폭격을 받던 런던을 배경으로 했는데, 이건 가상현실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그녀도 평소 여러 차례 해봤던 시뮬레이션이어서 감이 너무 좋았던 탓이다. 컨디션만 유지하면 기록도 가능할 것 같았다. 긁어 부스럼이란 동료들의 만류에도 대회 주체 측에 문의전화를 건 그녀가 새장에 행운의 동전을 던지고 올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대응창구 직원의 상관없다는 응답을 전했다. 그녀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

  결승 날, 기분대로 기록은 못 냈지만, 그녀는 결국 우승을 따냈다. 1000년전 정도전의 설계대로 돌아간 이 도시에서, 하류층이나 여자는 직업을 갖기 어려운 사회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주눅 들었던 그녀로써는 눈물 나는 걸 의식적으로 참아야하는 성취였다.

  채윤이 소방관들에게 둘러싸여 맥주 집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전화가 한통 왔다. 어제 자신과 통화했던 대회의 대응창구의 직원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떨면서 자신은 그녀의 규정위반을 알고 있으며 상금의 30퍼센트를 주지 않으면 주최 측에 말하겠다고 소리쳤다. 남자 동료들은 그 전화가 무슨 의미인지 채윤보다 먼저 파악한다.

  “어차피 손톱이야 센서가 감지도 못하고, 감지해도 오류로 파악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는데..”

  동료들은 골목의 방식대로 해결해야한다고 권했지만, 채윤은 일단 그 제안을 거절한 뒤, 곧바로 명동의 골목으로 달려갔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밤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 경위다.

  “네까짓 것이 감히 날 무시해? 넌 내 도움 없이 우승 못했어. 갑자기 그러더라고.”

  그녀의 요구에 명동거리의 왈패 측의 대표로 나온 깡마른 남자가 바로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던 그 직원의 목소리임을 확인했을 때, 그제야 채윤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직원에게 전후사정을 들은 명동거리 왈패들은 그녀를 에워싸고 상금포기각서를 내밀었다.

 

 

4.

  “뭐? 멍석말이를 본 적이 없어? 항상 눈을 감았다고? 난 여러 번 봤어. 우리 집 창에서도 이 광장이 보이니까. 낡아빠진 유물로 보이지만, 멍석에는 전압에 따라 모양을 바꾸는 나노전선이 촘촘히 박혀있어. 10대들이 열광하는 게 바로 그거지. 전원버튼만 누르면 그물형태로 멍석이 펴지는데, 특히 여자들이 거기 덮여 비명 지를 때 쾌감이 장난 아니라나.”

  명동의 왈패들은 이 일이 경복궁의 판결까지 가지 않길 바랐다. 채윤이 그대로 상을 받고, 돈만 빼낼 수 있다면 그게 최선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시합 전에 문의를 했음을 강조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채윤이 그들이 돌리는 게임에 뛰어주면, 즉 도박성 시뮬레이션에 선수로 참여해주면 상금의 절반은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거절한다면 수상취소와 그로 인한 대회의 피해를 청구하겠다고 위협했다.

  의외의 상황에 잠깐 혼돈을 겪던 그녀는 큰소리가 이어지자 오히려 머리가 명징해졌다. 단련된 소방관으로써 상황판단을 해야 하는 순간에 결정이 빠른 것이다. 채윤은 협상내용을 공식화하는 서류를 작성하는 조건으로 그들의 제안을 받았다. 물론 서로를 위해 공식서류에는 도박성 시뮬레이션에 참여한다는 내용은 빠졌다. 그녀는 명동 골목을 나오자마자 받은 상금을 모조리 비주얼편광 개선 기금에 기부해버렸다. 돈 욕심 부리면 당한다. 여론에 민감한 인공지능k의 성향 상 그들이 공식 합의를 깨고 판결로 이 사안을 끌고 가도 상금이 공적으로 쓰인 사실은 그녀를 유리하게 할 것이다. 그 뒤로 그녀는 다시는 명동패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틈날 때마다 그 일을 주변에 떠들었는데, 결국 겨우 인조손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꼴이라 결과가 개운치 않아 말로 털어내고 싶었고, 상금은 죄다 기부했으니 돈으로 상을 더럽히진 않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녀는 도박이 체질적으로 싫었다. 암튼 채윤은 맥주 캔을 딸 때마다 동료들에게 자신의 우승과 왈패들의 제안에 대해 얘기하고 다녔다.

  그리고 곧 소문이 시작되었다. 채윤이 부당하게 시뮬레이션 수치를 조절 받는 방식으로 최강소방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녀가 심드렁히 소문을 무시하는 사이, 이번 최강소방이 소방조직에 아버지의 인맥 덕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뒤로도 채윤은 인격파탄에 소아성애자, 패륜아 등이 차례로 되었는데, 가장 황당한 것은 그녀가 실력이 아니라 몸을 여기저기 굴려 ‘선두’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나이가 한참 연배가 위인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분명 어제까지 같이 화재현장에 있던 동료였다. 그 남자의 지분거림을 채윤은 완강히 거절했다. 문제는 동료의 체면을 생각해 그녀가 입을 다문 사이, 그 남자가 채윤이 자신에게 꼬리를 쳤다고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그렇게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채윤은 자신의 얼굴이 합성된 불법동영상이 유통되고 있는 것을 몰랐다. 골목 속 어둠들이 조용히 자신들을 무시한 여자를 응징한 것이다.

 

  “한번 멍석에 몸이 말려지면, 그 사람 얼굴은 누구도 다시는 볼 수 없어. 매일 밤 가상현실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실제 사람을 죽이는 감각은 쉽게 맛볼 수 없는 자극이지. 게다가 멍석에 부착된 미세한 칩들은 사람을 밟는 감각을 원하는 모두에게 전송해준다고. 멍석이 그물처럼 펼쳐질 때! 진짜 집단지성이 나타나는 거지. 그래서 명동 패거리는 낮에만 멍석말이를 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인공지능도 어쩌지 못하거든..”

  여러 문제를 같이 상의하던 동료들은 사라지고, 사실관계를 어설피 주워들은 애송이들만 설쳤다. 진짜 화냥년이 된 것이다. 그녀를 싫어하던 누군가는 그녀에게 대놓고 이렇게 얘기했다.

  ‘계집애가 최강소방이라니. 내가 그렇게 더러운 방법을 쓸 줄 알았어.’

  멍석말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들던 이였다. 모든 것이 재빠르게 한 방향으로 향했다.

  채윤이 핸들 위로 다리를 올리고 자율주행모드로 차를 운행하다 다리가 목뒤로 넘어간 양아치를 구조하기 위해 을지로로 출동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멍석이 자신을 향해 그물처럼 펼쳐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다행히 방화기계를 입고 있어 칼로 끊어낼 수 있었지만, 본서로 돌아왔을 때 채윤은 조직이 멍석을 던진 사람이 아닌, 자신의 행실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기댈 곳이 결국 경복궁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마침 바라마지 않던 불이 났다. 채윤은 일부러 불타는 지하실에 진입해 누구도 ‘선두’에 선 자신을 따라오지 않음을 확인한 뒤, 인공지능에게 길을 물었다. 막다른 장소였다. 인공지능은 일단 불법동영상을 모조리 삭제했다.

  ‘영상이 잘못된 것을 몰라서가 아니야. 이미 본사람 입장에서 죄책감을 느끼느니 당신이 추락하길 바라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예상판결결과.. 당신은 관노가 될 거야.’

  ‘관노라니. 피해자는 난데, 왜 내가 처벌을 받아야합니까?’

  ‘자기 조직의 인정은 중요해. 여성은 판결이 박하고. 여긴 봉건사회라는 것을 잊지 마.’

  인공지능k의 입장에서 지난 정을 계산해 정성껏 답을 준 것이었지만, 채윤은 충격이 너무 심해 자신이 불길에 갇히는 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관노가 된다는 것은 언어능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직업선택의 자유가 사라지고, 인공지능이 지정한 일만 해야 했다. 그중에는 대단히 험하고 굴욕적인 일도 있었다. 기껏 받아낸 절반의 상금은 모조리 기부해서 보석금도 없는 상황이었다. 왈패들의 1차 목표는 성공했다. 한번 남을 밟기로 한 사람들은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누가 괴물인지 결정하는 게임에 참여했다고 생각해 많은 쪽수를 확보하려 할 뿐. 소방조직 같은 곳에 여자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축들은 많았다. 채윤은 홀로 화염을 뚫고 다시 새파란 비주얼편광 아래로 나왔지만, 곧바로 멍석이 그녈 향해 날아들었다. 지친 그녀는 결국 멍석에 갇힌 뒤, 순식간에 돌돌 말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명동거리의 왈패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희가 시작한 거구나. 날 놔줘.. 이미 상금의 절반을 가져갔잖아.’

  ‘늦었어. 시작은 우리가 했지만, 이미 넌 화냥년이 됐으니까. 다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 아니겠어? 넌 뛰어난 선두잖아.’

  이젠 그들의 제안을 받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녀는 상황판단을 끝냈다. 깨진 손톱이 다 아물 무렵 일이었다. 조건은 단 한번으로 빚을 끝낼 강력한 게임으로.

 

 

5.

  비가 내렸다. 물론 비주얼편광에서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런 드문 일에 예보가 없던 것을 보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절한 것이 뻔했다. 하긴 살인게임에 너무 맑은 날씨는 어울리지 않는다. 암살 대상은 ‘하야시’라 불리는 명동패의 반대 조직 종로파의 보스로 세력은 별 볼일 없었지만, 순백빌딩과 끈이 있는 자였다. 그 자는 뇌물을 바칠 때만 주변을 무르고, 인공지능의 접속이 불가능한 택시로만 순백빌딩에 갔는데, 워낙 셀프-증강을 이용한 변검술이 뛰어나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그 구형택시 뿐이었다. 그녀는 방화기계에서 칼 한 자루만을 꺼냈다. 엄지에 닿는 버튼을 누르면 순식간에 금속을 녹이는 온도까지 칼날이 달궈져 주로 어딘가 끼어있거나 갇혀있는 이들을 구하던 장치였다. 이것을 흉기로 쓰다니. 암담해진 기분의 그녀 앞으로 차가 한 대 섰다. 명동패거리가 코드를 바꿔놔 채윤이 살해를 결심한 남자를 태우기로 예약이 변경된 택시였다. 채윤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제 그 남자를 죽인다면 그녀는 완벽한 밤의 인간이 된다. 평생 명동거리 왈패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누구도 다시는 그녀에게 멍석을 던지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손님 앞에 차를 세웠다.

  채윤은 인적이 드물어지는 북악스카이 초입에서 차를 자율주행모드로 바꾸고, 칼의 온도를 높여 운전석과 뒷좌석을 막고 있는 강화유리를 찢고 표적 옆으로 갔다. 어차피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어둠속의 인간 중 하나일 뿐. 채윤은 칼의 온도를 차갑게 낮췄다. 그 순간, 백미러에 피곤에 젖은 한 여성의 눈이 스쳤다. 얼른 표적의 목에 베려던 칼을 치우자 살짝 벤 하야시의 피부에서 쓱 피가 베나왔다. 택시는 가드레일을 박고 멈춰 섰다.

  암살체험은 밤의 서울에서 가장 비싼 가상현실 체험이었다. 실제 암살을 수행하는 킬러와 체험센서로 연결된 순백센터의 고객들은 그녀가 중간에 멈추는 것을 보았다. 모두가 공범인 가운데 증인이 남았고, 이제 채윤이 멍석말이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때, 그녀는 새-인간에게 처음 말을 걸었다. 비주얼편광이 꺼진 뒤 모래바람이 용솟음치는 유리벽을 바라보며 광화문광장까지 내려와 비틀비틀 거리를 걷다가 그랬다. 그저 간판들이 내뿜는 형광 빛에 물든 새의 얼굴이 그날따라 너무 슬퍼보여서. 자신의 심정이 투영되었을 뿐인 줄 알지만. 물론 그녀가 대답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그저 자신의 행운을 빌어줄 동전을 찾아 바지춤 뒤지다 나온 말일 뿐. 채윤 역시 그녀를 한 마리 새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봐. 아가씨. 날아본 적 있어? 새장 밖으로 나가본 적은? 없지? 그러니 멍석말이나 좋아하는 거야. 네가 날면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이 드러난다는데? 어때? 여기 서울은 진짜야?”

  새-인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오물거렸다.

  “제가 날면 사실을 알 수 있데요. 근데 저는 날아본 적이 없어요. 저는 순결해야 하거든요.”

  채윤은 그 말에 그만 웃어버렸다.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20대 중반쯤 되어보였지만, 말투와 눈에 비친 정신의 나이는 10대 초반 정도에 불과했다.

  “누가 그래? 넌 순결해야 된다고?”

  “다들 모이를 주면서, 욕을 하면서, 침을 뱉으면서.. 제가 순결해서 살려두는 거랬어요.”

  “넌 언제부터 말을 할 줄 알았니?”

  “날개가 없을 때는 꽤 말이 많았어요. 여기 온 뒤로 말을 건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채윤은 그때 처음으로 이 새를 새장 밖으로 꺼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에 취한 듯 칼의 온도를 높여 새장을 썰었지만, 철장은 끄덕도 없었다. 대신 새벽까지 그녀는 새장 옆에 앉아 새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어서 날이 밝아 그물이 자신이 덮치길 기다리면서.

 

 

6.

  “네가 우산장수가 되어있으면, 널 싫어하는 사람이 짚신장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거야. 짚신장수가 되어있으면 네가 비오니 욕하더라. 이런 소문을 낸 것이고.”

  “전 우산장수도 아니고, 짚신장수도 아닌데요?”

  “나도 마찬가지야.. 어머니 걱정은 끝이 없지만. 뭐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럼 뭐가 중요하지요?”

  “글쎄. 예전에 난 최고의 소방관이 되고 싶었어. 한편으로는 평범한 삶을 지키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고. 다른 여성들처럼 일부종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근데 지금은 관노가 될 참이야. 나 때문에 어머니까지 관노가 된다면.. 그럴 바엔 멍석말이를 당하는 게 나아. 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넌 꿈이 뭐야?”

  “그런 건 없어요.”

  “난 진짜가 보고 싶어. 네가 날면 진짜 세상이 나타난다잖아? 어때?”

  “이 새장이 진짜가 아니라고요? 이렇게 단단한 새장이 가짜일리 없어요.”

  사실 그 순간, 이 세계가 가짜이길 바라는 것은 새-인간이 아닌 채윤이었다. 홀로그램인지 뭔지가 아니어도 좋다. 인공지능과 천박한 밤거리,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멍석이 펼쳐지는 세상과 한번 싸워보기라도 했으면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현실과 말이다.

  “더구나 제가 새장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불행해진대요.”

  “빌어먹을. 그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하고 똑같은 거야. 그 암탉이 아버지 병원비를 다 대고, 홀로 남은 엄마까지 모시고 살아도 새한테까지 이런 얘길 들어야하다니. 사람들은 그냥 네가 거기 있었으면 하는 것뿐이야. 마음껏 침 뱉을 사람이 필요하니까.”

  타고난 몸과 마음이 가상현실을 거부하는 채윤에게 새-인간을 새장에 가둬놓은 이유라고 사람들이 늘어놓는 말들은 가짜에 취해 사는 인간들의 변명에 불과했다. 물론 새 입장에서도 새장 밖으로 나가는 건 두려운 일일 것이다. 저 거대한 날개를 달고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 수 있을까? 게다가 날아본 적도 없으니. 어차피 세상은 가짜든, 아니든 흐르게 되어있다. 새한테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새장 밖과 새장 안이 다르지 않고 익숙해진 모욕을 포함한 모든 건 어차피 모두 모래바람이 부는 세상의 유리벽 안의 일일 뿐.

  “내가 멍석말이를 당해도 눈을 감을 거야? 어쩌면 나도 너처럼 돌연변이일지도 몰라.”

  “아니오. 그럼 눈물이 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새장 밖에서 어떻게 살아요?”

  채윤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결국 멍석말이보다는 관노의 삶에 익숙해질 것임을. 그녀는 자리를 떠나 다시는 새장에 오지 않을 거라 다짐하면서 마지막 농담을 새-인간에게 건넸다. 저 모래바람 너머 진실의 땅이 있고, 돌연변이들의 유토피아가 있다고. 우리같이 세상의 미움을 받는 돌연변이들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곳이. 그저 농담이었다.

  “그런 곳까지 한번 날아가 보고 싶지 않아?”

  그때였다. 새가 날개를 펼치더니 철장 밖으로 날개를 꺼내 그녀를 안아주었다.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너무 꿈같이 이야기에요.”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내는 유아적인 표현이었지만, 분명 느껴졌다.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그때였다. 채윤이 어떤 결심을 한 것은. 새에게도 운명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새-인간의 눈물에 도취되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별로 잃을 것도 없었다. 어차피 모래바람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유리벽에 뜨면, 지금의 자신은 죽을 것이다. 채윤은 동전을 하나 꺼내 새장 안으로 던졌다. 그리고 움찔 날개를 접는 새를 보며 큰 기대 없이 물었다. 새장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아는지.

 

 

7.

  그녀는 오랜만에 소방서에 들렀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채윤이 캐비닛에서 자신의 방화기계를 빼내자 누군가 관노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봤다. 평소 그녀를 계속 욕하던 이였다. 그 시선이 그녀의 결심을 굳게 만들었다.

  방화기계를 걸친 채윤은 도끼를 꺼내 광화문을 단번에 부셔버렸다.

  순식간에 경복궁의 경보장치들이 작동하며, 방어기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모방망이를 든 로봇들은 수리부엉이 몇 발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채윤은 문을 하나씩 깨부수며 성큼 나아갈 때마다 최강소방다운 위용이 뽐냈다. 그녀는 희열을 느꼈다. 삼엄한 레이저 건 시스템이 그녀의 달궈진 칼에 쪼개지고, 경비원들은 순식간에 그녀가 던진 강화로프에 목이 감겨 버둥거렸다. 그녀는 다짐했다. 당장 멍석말이를 당하더라도 새만큼은 날게 해주겠다고. 뒤는 없어. 앞을 막는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 어쩌면 이곳이 세상에서 채윤이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도끼를 들고 인공지능k를 향해 근정전으로 가는 이 순간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과 피와 이상한 공포를 함께 닦아내며 그녀가 근정전 문을 열었을 때, 인공지능k는 그녀의 아버지의 얼굴에 도포를 입은 왕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채윤은 코웃음이 나왔다. 이런 것에 놀라기에 인공지능k가 뿌려놓은 밤의 문화가 황당한 수준이었으니까.

  인공지능k는 얼른 채윤의 표정을 읽은 다음, 복장을 아버지의 그것으로 바꿨다.

  “철장 안의 여인에게 왜 그리 집착하니?”

  막상 아버지 음성을 듣자 채윤도 마음이 흔들렸다.

  “나와 같아서.. 왜 새를 가둬놨지?”

  “너는 생각도 못할 복잡한 계산 끝에 이른 결론이다.”

  그녀는 달려드는 경호로봇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왜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낮을 만들어냈지? 왜 1000년 전 문화가 남아있는 거야? 유리벽 밖에 부는 붉은 모래바람이 가짜란 생각은 안 들어?”

  “아니야. 정말로 진실을 알고 싶어? 여긴 홀로그램 우주도 아니고, 모래바람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어. 인간이 살 수밖에 없는 유일한 땅이란 말이야. 다만 순백센터와 새가 있어서 사람들의 절망이 다른 식으로 전이돼. 그래서 질서가 유지된다고! 너야 말로 왜 새-인간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거야? 새를 위해서? 그렇게 가상현실에 빠지는 것을 경멸했으면서 왜 이 세계 자체를 부정할까? 그건 가짜 희망을 갖고 싶은 네 욕망에서 나온 착각에 불과해. 약속하지. 다시 너의 현실로 돌려보내줄게. 지금 당장 판결공시를 바꿔서 전송할 수 있어. 최강소방이 되길 원했지? 순백센터는 어때? 원하는 걸 가져.”

  “아버지가 날 무서워할 때가 있네. 당신 본체가 날아갈까 그게 두려운 거겠지. 새장 열쇠나 어디 있는지 알려줘. 모든 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날 호로 자식까지 만들지 마.”

  “답은 줄 수 있어. 하지만 넌 거기가면 죽을 거야. 내 마지막 충고야.”

  “난 이미 여러 번 죽었어.”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청와대는 텅 비어있었고, 그가 알려준 장소인 국무회의 실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녀는 유리를 깨고 텅 빈 공간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거대한 침묵 속에서 채윤은 긴 책상의 구석자리 500년 전이었으면 환경부장관쯤이 앉아있었을 자리에 열쇠가 하나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둥근 고리에 매달린 쇠막대에 이빨 몇 개가 붙은 단순한 형태로 손바닥으로 쥐면 꽉 차는 크기였다. 그녀가 그 열쇠를 들어 올리자마자 저 멀리서부터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발은 순식간에 그녀가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8.

  그녀는 터덜터덜 새장 앞으로 갔다. 채윤이 살아남은 것은 방화기계 장치의 자폭탈출옵션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청와대가 모조리 날아간 폭발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준 갑옷을 잃었다. 채윤은 발가벗겨진 듯 창피하고, 무력해진 기분으로 다시 새 앞에 섰다. 어쨌든 그녀는 경복궁의 끝, 청와대까지는 가봤다.

  “난리가 났구먼. 원래 나는 불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끄는 사람이었는데.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 곧.. 제압부대가 닥칠 거야.. 뭐. 이제는 네가 결정해. 내 할 일은 끝났어.”

  채윤은 팔등으로 피가 흐르는 손을 들어 새장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든 새-인간의 눈이 커졌다. 사방에서 싸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린 곧 잡혀.. 그전에 한번 날아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새는 머뭇거렸다. 채윤은 피를 토하며 새에게 안겼다.

  “언제나 세상이 답답했지만 용기가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저 순백센터로 가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지. 나도 너처럼 날개가 있었다면 더 높은 곳을 꿈꿨을지도 몰라. 바보 같지만.. 진짜 세상이 변하는지 보고 싶어. 우리가 잃을 건 없잖아. 너도 뭔가 바뀌길 바라잖아. 직접 확인해보자. 새장문은 열렸어. 선택은 너의 몫이야.”

  새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채윤의 손목을 끌어 새장 문밖으로 향했다. 멀리 총을 들고, 중무장을 한 기갑무대가 그들을 포위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광장의 바닥에 첫발을 내딛은 새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이 말을 했다.

  “그저 날고 싶을 뿐이에요.”

  그녀가 날개를 힘껏 휘저었다. 생각보다 큰 바람이 일고, 몸이 둥실 떠올랐다. 새는 채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새의 몸이 둥실 조금 더 떠올랐다. 그리고 점점 더 높이. 순식간에 광화문 광장이 내려다보일 만큼 떠올랐다. 채윤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다시 푸른 하늘로 바뀐 비주얼편광과 새장에 모인 기갑무대 대원들이 두려움에 마스크를 벗고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들을 올려보는 광경이었다. 거 봐. 할 수 있잖아. 날 수 있었어.

 

  새는 힘에 부쳐 순백센터 꼭대기에 채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뜨기 기다렸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새는 그저 한 번의 희열로 만족했다. 그리고 이곳이라면 채윤도 만족하리라 생각했다. 곧 채윤이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을 깨닫고 씩- 웃고 말았다. 새-인간은 프로그램 오류가 아니었다. 진짜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채윤은 몸을 일으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하늘로 둘러싸인 서울 사대문 안이 보였다. 그녀가 나고 자란 곳. 북악산 아래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를 보자 이상한 슬픔이 밀려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유리벽 너머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세상이. 그리고..

  채윤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불빛이었다.. 순백센터와 비슷한 높이의 건축물 옥상에서 내뿜는 불빛이 유리벽 너머 황량한 모래바람 저 멀리에 보였다. 그것도 여러 개가.

  “저 불빛 보여? 여기만 도시가 있는 것이 아니야! 여기가 유일한 도시가 아니라고!”

  “네. 보여요. 당신 말한 돌연변이들의 도시인가요?”

  채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이 새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모래바람 너머 다른 세상이 있는지 몰랐다. 미안했지만 지금 선택은 저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꼭대기에 불빛을 내뿜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의미일 것이고, 이런 높이의 건물이 여러 개라는 것은 여기보다는 덜 답답한 사회일 확률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저곳으로 날아가면 된다.

  “맞아. 저곳으로 가. 어서!”

  “같이 가요.”

  “난 안 돼. 몸도 엉망이고. 게다가 난 원래 바닥에 있는 사람이었잖아.”

  채윤은 다시 몸을 일으켜 새의 어깨를 붙들고 마지막 힘을 짜내 열변을 토해냈다. 높은 고도에서 부는 바람이 그녀들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날아. 넌 날개가 있잖아. 해봤잖아. 날아서 모래 바람을 건너라고..”

  채윤은 순백센터 옥상의 구석으로 가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몸을 던지겠다는 듯 결연하게 새를 바라봤다. 새는 커다란 눈망울을 그렁거리다 다시 날개를 펼쳤다.

 

 

9.

  새가 유리벽을 넘는 것까지 확인하고, 채윤은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새는 보이지 않은 무언가에 가로막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천장이었다. 거대한 유리천장이 도시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비가 오지 않더라니.

  채윤은 그 순간 모든 희망을 놓았다. 그녀는 새가 돌아오면 같이 순백센터로 내려가 자수할 생각이었다. 결국 운명대로 채윤은 멍석말이를 당할 것이고, 새-인간은 다시 새장으로 돌아가 모이를 받아먹는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빙 돌아 자신에게 돌아오던 새가 다시 유리천장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새는 있는 힘껏 유리천장에 몸을 던졌다.

  “안 돼.. 그만 해. 그만 돌아와..”

  새는 절박한 표정으로 채윤을 보더니 계속해서 유리천장을 향해 몸을 던졌다. 마치 다시는 새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듯, 다신 펼친 날개를 접지 않겠다는 듯 그리고 채윤 역시 동의해주길 원하는 표정으로 유리에 계속 머리를 찧었다. 채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스르르 감기는 눈으로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새를 보았다. 그녀의 책임이었다. 새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한 것은. 소리치고 싶어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초점이 흐려지며 눈물을 뱉어낸 채윤의 눈동자가 갑자기 한껏 커졌다. 하늘에 균열이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새의 몸부림이 유리천장에 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채윤은 새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래.. 계속 해..

  그때였다. 갑자기 순백센터가 주저앉기 시작했다. 채윤은 놀라 바닥에 붙어 위를 쳐다봤다. 살짝 벌어진 유리천장 틈으로 모래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순백센터를 둘러쌌다. 도시를 감싼 비주얼편광들이 빌딩들 위로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도시가 서서히 반으로 접히더니, 멀리서 보이는 불빛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서울을 감쌌다. 건물이 바닥에 쑥 꺼지고, 길이 줄넘기하듯 다른 곳으로 건너가 사라졌다. 검은 연기가 음악소리로 바뀌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프로그램이 붕괴되는 가운데, 새가 채윤을 향해 돌아왔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나란히 누웠다. 꽃가루처럼 유리천장의 가루들이 그녀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이 이상한 희열과 해방감에 들떠 죽음을 맞이할 때, 도시의 여러 건축물들이 다시 바닥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고, 먼 불빛들이 눈앞에 다가와 합쳐졌다. 모든 사물은 마치 원래 제 위치를 찾아가는 듯 새로 구성되어 펼쳐졌다. 채윤은 마지막으로 모래바람을 흡수한 순백센터가 황금색으로 빛을 내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감았다.

 

 

10.

  채윤이 일어나 시계를 봤을 때, 시간은 08시 18분이었다. 2020년 8월 31일.

  이 시간에 씻는다면 아마 지각을 할 거야. 괜히 맥주를 마시고 잤어.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자 멀리 아침햇살을 받은 63빌딩이 보였다. 그녀가 과거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기억이었다. 새 한 마리가 있었지. 아마 그 새도 이 도시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겠지.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스친 이런 공상을 즐기며 지하철 유리창을 괜히 쓰다듬었다. 모래바람은 많이 나아졌지만 변치 않는 것도 있었다. 채윤은 다른 여성의 치마에 슬쩍 카메라를 대는 한 남자의 손목을 확 꺾었다.

  그녀가 근무하는 소방서는 광화문광장 옆에 있었다. 아침 장비점검을 하던 채윤은 길 건너, 새로 오픈한 두 평 정도의 조그만 테이크아웃 커피숍을 바라보았다. 한 아가씨가 웃으며 개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채윤은 용기를 내, 길을 건너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래 지켜보던 이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도 나오는 건 녹슨 동전 뿐. 딱히 할 말이 없는 가운데, 주문 대신 이상한 말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자신을 빤히 보는 커피숍 아가씨의 맑은 눈동자가 한 마리 새 같아서였다.

  “혹시 날개가 있으신가요?”

  그 말을 들은 한 마리 새가 샐쭉 웃으면서 대꾸했다.

  “제가 들은 작업멘트 중에 가장 느끼하네요.”

 

  그녀들은 두 손을 깍지 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돌연변이였는지도, 프로그램 오류로 섬세한 감각을 가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세상의 저주일수도, 선물일수도 있고, 어쩌면 인공지능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몸에는 여전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새-인간의 깍지를 끼지 않은 다른 손에는 열쇠가 쥐어져있었다. 그 감각.. 날개는 날기 위해서, 열쇠는 무언가를 열기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그 감각.. 

  제 위치를 찾은 그 소중한 감각을 그녀들은 꼭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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