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네 곁에 있을게

2020.11.19 14:5511.19

“벌써 3시간 째야.”

필립은 격리실 내부를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시란에게 단념하라는 듯이 말했다. 자려고 기지 내의 전원을 최소화하려고 방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시란이 복도에서 미련을 품은 채로 격리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하기도 하지. 오래된 친구가 저렇게 변해버렸으니. 필립은 생각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는 너무나도 익숙하여 가끔은 질려버리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낯선 존재로 변해버린 어떤 존재였다. 신화 속의 용과도 같은 모습을 한 인간. 피부가 형용하기 힘든 색의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보드라웠던 발은 두툼하게 변해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길고 날렵한 꼬리가 부자연스럽게 뒤척였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듯한, 레비아탄을 닮은 인간. 악마의 화신.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곤 하겠지.

용인(龍人). 시란은 현재의 그를 오직 그 단어로만 표현할 수 있었다.

“본 연구소로 보내겠다고 동의했잖아.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 저게 안트아가 맞던, 아니던…. 아무튼, 예전의 안트아도 이 결정을 납득할 거야.”

시란은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차갑다고 느꼈다. 유머러스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필이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과학자이자, 연합의 시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구나. 그는 격리실 내부에 있는 안트아를 바라보았다.

“저 바깥에서 얼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이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보면 신이 도운 거지.”

필립의 말에 시란은 작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약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감고 안트아를 살려주신 신에 대한 감사를 짧게 올렸다. 살아만 있으면.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되돌리건, 무엇을 하던….

속으로 기도를 마치고 시란은 다시 필과 눈을 맞추었다. 그가 씩 웃었다.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바빠질 거잖아. 나는 상부에 이걸 보고해야 하고, 너는 안트아를 연구할 거고.”

“조금만 더 보다 잘래요. 먼저 주무세요.”

“지금은 별다른 반응 안 할 텐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어? 너 많이 힘들었잖아. 좀 쉬어둬. ”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망설임 없이 떠났다. 그 뒷모습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며칠이나 사라진 동료가 눈폭풍을 뚫고 기지에 돌아왔는데.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솔직히 실망했다. 안트아가 나랑 항상 붙어 다니는 걸 가장 많이 본 사람이면서. 시란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고 나오려던 눈물을 꾹 참았다.

서럽고 답답했다. 안트아가 죽음에서 돌아왔는데도.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안트아.”

시란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숙인 채로 제 다리를 감싸 안던 안트아가 고개를 들어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노란색 세로 동공이 꿈뻑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도마뱀과도 같은 눈에 시란은 흠칫 놀랐다.

처음에 그가 돌아왔을 때만큼 놀라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응시하던 그 괴물 같던 눈동자를 보고 기절할 뻔한, 그때와는 달랐다. 차분하게 그것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안트아가 살아 돌아왔다. 크레바스1에 떨어져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안트아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란이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감 넘쳤던 옛날과는 다르게 무릎을 모은 채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는데.

안 자러 가?

안쪽에서 그 생명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톤이 조금 변한 것 같았지만, 그가 기억하는 다정한 분위기의 말투였다. 고개를 저으며 시란은 창문에 손을 댔다. 지금은 안 돼. 적어도 어떤 상태인지 밝히고 나서 가까이 다가가야 해. 이성이 날아가지 않도록 스스로 그렇게 되뇌었다.

“혼자서 심심할 것 같아서. 연구 자료라도 갖다줘?”

생각이 많아서 잠을 못 자겠어. 뭘 읽지도 못할 것 같아.

“별일이네.”

연구할 때 말고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뭔가 변하긴 변했다. 시란은 그 모습에 역으로 마음이 아렸다. 안트아가 이렇게 우울해하는 모습은 본 행성인 엔트라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슬픈 표정을 하는구나.

얼음 행성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크로노스에는 대체 무엇이 있길래 안트아를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러게.

안트아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하느님이 무슨 뜻이 있어서 이러는 거겠지?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시란은 그 말에 웃지 않았다. 격리실과 기지 복도에는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크로노스는 항상 엔트라의 여러 국가가 노리는 행성이었다. 행성의 전체 면적 90%가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행성이었기 때문이다. 지하자원, 엔트라보다 훨씬 더 깊고 정교한 해양 생태계,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의 귀엽거나 흉측한 동식물들. 이 얼음 행성은 사람마다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소설가와 시인은 이곳을 얼음 가득한 고독의 공간으로, 학자들에게는 연구되지 않는 생태계와 자원의 보고로, 그리고 정치가와 성직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정복하여 연합의 깃발을 세워야 할 미개척지였다.

다음 세대의 지구, 행성 엔트라의 작은 나라인 레느아 연합국은 누구보다 먼저 이곳에 깃발을 꽂고 싶어했다. 지구에 있던 원래 나라들은 엔트라로 이주하며 내부 사회를 조금 더 정비하려 했다. 그러나 레느아는 가장 먼저 크로노스 진출 사업에 의욕적이었다. 연구자들을 파견하여 크로노스의 생태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연합은 공식적으로 여러 연구소와 기업, 그리고 대학에게 지원을 해주었다.

레느아가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이들에게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종교 사업과 연구를 연계할 것.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레느아 내에는 악명 높은 유일신 종교가 사회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나라 자체가 크고 작은 지구 시절의 기독교 사회가 독립하여, 엔트라에서 뭉쳐 탄생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각국 여러 도시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국가를 만들었다. 이들을 묶는 것은 오직 신의 이름과 말씀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논리가 종교 아래에 돌아가는 기이한 국가가 탄생했다.

레느아,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 아래에 다양한 연구 사업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경전에서 나온 도시와 사도들의 이름을 딴 기지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자원을 시추하며, 여러 연구소에서 사람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과학과 신앙이 합쳐진, 기이한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란과 안트아는 이 기회를 이용했다. 이 때 두 사람은 고작 20대 후반의 연구원이었다.

“크로노스로 갈 수 있을 거야.” 연구소에서 퇴근하던 중, 안트아는 시란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연구소에서도 사람을 보내라고 하겠지? 그때 우리가 가장 먼저 자원하자.”

“그러다가 소장님 노예 신세가 되면 어떡하려고….”

시란은 안트아가 그토록 싫어하는, 연구소에서도 경전 읽기를 강요하는 헤나 소장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안트아는 표정을 구겼다. 밖에서까지 그 사람을 언급해야 하냐는 듯이.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시란은 잡은 손을 조금 더 꼭 쥐었다. 잡은 손에서 온도가 느껴졌다.

“아니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4~5명 정도를 모집한대. 오직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그러니까 앞으로 잘 어필해야지, 응!”

안트아는 기세 좋게, 즐거운 듯이 외쳤고 시란은 옆에서 웃기만 했다. 가끔 그를 보고 있다 보면, 시란은 신기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이렇게 눈부신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끔은 하느님이 앞으로 어떤 고생을 시키시려고 이러나.

“어필만으로 크로노스에 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는 항상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안트아는 시란을 보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또 걱정 돼?”

“아니, 걱정되기보다는…. 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렇게 기대만 하고 있어도 되나 싶어서.”

“그게 걱정이 많다고 하는 거야.”

안트아는 언제나 당찼다. 씩씩하고 열정적인데다가, 과학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란은 자신의 손에 얽혀오는 그의 감촉을 느꼈다. 부드럽고 작았다.

 

두 사람은 결국 크로노스에 가게 되었고, 연구소 소장님에게 꾸준히 어필한 결과 추천인으로 안트아가 뽑혔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동행인으로 시란을 지목했다.

이후 다른 한 명은 재단에서 추천하는 사람이 가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동기이자 똑같은 수업을 듣던 필립은 그저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레느아 내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인 아론 교회에 뿌리를 둔 재단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절대 크로노스와는 연이 닿지 않게, 재단에서 단순한 업무나 하며 지내야지. 그것만이 그의 바람이었다. 열정적인 두 사람과 다르게 필립은 항상 연구심이 부족한 학생이었다. 가족이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그렇게 그는 안일함 속에 청춘을 보냈다.

재단 측에서는 감시자가 한 명 필요했다. 기지에서 연구원들이 허튼 짓은 하지 않나, 이교도가 할 만한 연구를 하고 있진 않나, 연구비를 빼먹고 있지는 않나 감시하는 역할. 행성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기지에서 연구하는 분야를 적어도 이해하고 있는 자. 신앙심이 충실한 자.

모든 조건이 필립에게 맞았고, 하필이면 크로노스로 향하는 사람이 같은 수업을 들었던 시란과 안트아였다.

 


 

나사렛 기지에서의 삶은 단순했다. 보온 슈트를 입고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생물을 조사한다. 그날 연구한 결과를 기록하고, 일요일이면 전파를 통해 다른 기지와 함께 예배를 드린다.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연구자가 아닌 필립은 경전을 읽거나 다른 기지의 사람들과 소통했고, 설비를 점검했다. 그는 두 사람과 같은 전공이었지만 사실상 기술자에 더 가까웠다.

반면에 연구원인 시란과 안트아는 좀 더 ‘연구원다운’ 일을 했다. 기존에 있던 자료를 분석하여 새로운 결과를 도출하는 논문을 작성하거나, 날씨가 좋은 날에는 슈트를 입고 연구 범위 밖으로 산책했다. 보온 안전 슈트를 입고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크로노스를 탐험하는 것은 즐거웠다.

나사렛 기지로부터 다른 기지까지는 약 50km 떨어져 있었기에, 반경 20km는 전부 기지의 사람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니 몇 달은 여기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셈이었다.

크로노스는 엔트라의 극지방과 다르게 불안정한 지반을 지니고 있어서, 크레바스가 자주 일어났다. 그렇기에 기지 주변은 협곡에 가까운 모습을 띄었다. 균열이 일어나 절벽처럼 깊게 파인 공간이 항상 존재했고, 그렇게 생긴 지형이 많아져서 거대한 협곡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항상 3명이 동행해야 했다. 순식간에 한 명이 미끄러져 죽을 수 있으므로.

시란은 이곳에 처음 도착해서, 그 거대한 협곡들을 보며 상상했다. 저기 어딘가에는 추위에 떨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살려달라며, 꺼내 달라며 신께 잘못을 빌며 절규하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누가 구해줄 수 있기나 할까.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이 안트아가 될 줄은 몰랐다.

 

“골고다 기지에서 온 전보인데, 너네가 확인해야 될 것 같아.”

몇 주 전이었다. 필립이 통신실에서 나오며 두 사람에게 그렇게 전했다. 당시 안트아와 시란은 며칠 전에 발견한 도마뱀의 이름을 변화뱀으로 할지 아니면 조금 더 멋있고 복잡한 학명으로 할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명석한 토론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빠르게 필의 대화 주제로 넘어갔다.

“대체 뭐길래 거기에서 연락이 와? 우리보다 사람 많은 데 아니야?”

“그게……. 사실, 뭔가 일이 터졌나 봐.” 필은 제 일은 아니지만 곤란한 걸 나타내기라도 하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연합국 연구원들이 전부 이 작업에 매달려야 될 거라고 장담하던데, 그쪽 소장이.”

그 말이 들리자마자 두 사람은 도마뱀의 이름 짓기를 그만두었다.

크로노스에는 연합국 외에 발을 딛은 문명이 없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이번에 위성 경쟁을 하지 않고서 환경 오염 대체 에너지 개발에 공을 더 들였고, 다른 국가들은 나라를 새로운 행성에 펼치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그러니 이곳에 말하고, 생각하고, 소통하며 행동하는 인간은 오직 연합의 국민들 뿐이었다.

필립은 골고다 기지의 보고에 따르면, 며칠 전에 일정한 규칙성을 띄는 신호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안트아는 흥미가 있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신호가? 골고다 기지에서 잡힌 거래?”

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트아는 팔짱을 꼈다.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그러면 본 행성에서 잘못 섞여 들어온 거겠지. 거기 있는 접시 안테나 엄청 크잖아. 외부 우주선의 신호가 섞일 수도 있고.”

“문제는 그거겠네.” 안트아가 가볍다는 듯이 운을 띄우자 시란이 대답했다.

“엔트라에서 쓰는 통신 규격이랑 다른 게 들어왔다면….”

그의 말에 필은 바로 그거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였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수억 개의 신호가 거대한 파라볼라 안테나2를 통해 들어오고 그곳의 통신 팀은 슈퍼컴퓨터와 함께 필요한 정보만을 걸러내 기지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하지만 변환과 해독이 불가능한 신호가 들어 오면 바로 눈치챌 수 있다. 애초에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그래서 확인을 해보면 자신도 모르는 신호, 혹은 암호가 나타날 것이니.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신호는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골고다 기지랑 베들레헴 기지 암호 분석팀이 해독하고 있다는데 잘은 안 되고 있대. 다만 추측하기로는….”

필립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전파 수준을 봤을 때, 본 행성에서 온 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우주를 가로지르려면 더 멀리 나가는 파장의 전파를 써야 하는 데다가, 이번에 골고다 기지에서 잡힌 전파를 음성으로 해독했을 때 정체불명의 언어로 변환됐어. 그에 관련한 보고서도 여기 있으니까 시간 나면 읽어보고.” 필이 책상 위에 20쪽짜리 보고서를 올려놓았다. 신호가 발견된 지 몇 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두 사람은 이를 정리한 연구자에 대한 어떤 종류의 경외감을 느꼈다.

“그쪽 기지 사람들은 우리랑 똑같이 기계를 사용한 지성체가 저 행성 뒤편에 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종류의 생물이 보낸 것이라 판단하고 있어. 어느 쪽이든 조사가 필요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기침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진원지가 여기랑 제일 가까워.”

“여기랑? 얼마나 걸리는데요?”

“남쪽으로 15km 부근. 평소 탐사하던 것보다 2배는 멀지.”

시란은 질문하고 난 뒤에 위축되기라도 한 듯 어깨를 내린 채로 한숨을 쉬었다. 피곤할 일이 쌓였다. 다른 기지들은 상대적으로 덜 춥고 연구 자료가 많은, 북동쪽에 주로 있었다.

나사렛 기지는 최남단이었고,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얼음의 경계’라는 한계선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연구할 게 적기도 했다. 이전에 온 탐사대도 왔다가 몇 명이 목숨을 잃은 뒤, 탐험을 포기한 바로 그 지점. 눈보라가 강하게 불고, 슈트를 뚫는 추위가 감도는 그 경계.

얼음의 경계는 ‘죽음의 경계’라는 이명을 지니고 있었다.

시란은 문득 오한을 느꼈고,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여기서도 신호가 잡혔을 거에요. 그렇죠?”

필립은 어깨를 으쓱하며 확인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통신실에는 정규 통신 시간 외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들어갈 때마다 다른 기지와 통신했으니 신호가 이곳을 지나쳤더라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먼 곳에서도 잡혔는데 여기서 안 잡혔을 리가 없어.” 안트아는 확신했다.

“기록을 좀 확인할 수 있을까?”

“안될 건 없지.”

세 사람은 통신실로 향했다.

시란은 기지에 온 이후로 이곳에 처음 왔다. 필립이 여기 아니면 자신이 전문인으로서 하는 게 없다고 출입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에게 통신실에 있는 기기의 기능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건 신호를 보내는 곳이고, 옆쪽의 매뉴얼을 통해 통신하며….

“됐고, 기록 먼저.”

그 말을 듣자, 그는 복잡하게 생긴 계기판과 그 옆에 있는 키보드를 번갈아가면서 조작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연구원에 불과했던 두 사람은 그저 멀뚱멀뚱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스크린에 통신 기록이 일제히 투사되었다.

불안정한 주파수가 새벽, 아침, 오후, 비정기적인 시간에 각각 짧게 나타났다. 그 외에는 정규 시간에 다른 기지들과 통신한 전파였다. 필립은 각각 파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 있는 파들은 전부 우리가 기지에서 통신하는 규격의 전파야. 저녁 6시, 아침 11시, 새벽 5시, 그리고 밤 19시. 주기적으로 각 기지 간의 상황을 알리고…. 뭐, 가끔 잡담도 하긴 하지. 하지만 여기는 달라.”

그는 새벽 2시에 잡힌 전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곳의 파장보다 훨씬 불규칙하고, 낮은 범위의 주파수를 보였다. 필은 그를 가리키며, 구식 통신기기에서나 이런 전파를 썼다고 설명했다.

“특정 방면에서만 기술이 발달한 문명을 상정해야 할 수도 있어.”

안트아는 중얼거렸고, 시란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 기록까지 확인한 나사렛 기지 대원들은 밖으로 나와 앞으로의 행방을 결정하기로 했다. 필은 그들을 멀뚱히 보았다. 자신에게는 결정권이 없다는 것처럼. 실제로 연구원들이 최종 사안을 결정하고, 재단에서 파견된 감시원은 그를 지켜보고 제재하는 역할만 맡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시란과 안트아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서로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냐는 듯이, 필은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부터 크로노스에 지성체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나 이야기는 많았지…. 눈보라 속에서 귀신을 봤다거나 하는 목격담도 있었고. 그거 못 봤어? 얼음 행성에서 돌아온 탐사대원이 사실은 외계인이어서 러시아 연구소를 점점 잠식해나가는 영화가 있었는데.”

안트아는 즐겁다는 듯이 영화 이야기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등받이가 뒤로 확 젖혔다. “그런데 실제로 나타날 줄은….”

“지성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해?”

시란이 나긋한 말투로 묻자 모르겠다는 듯이 안트아는 표정을 구겼다. 너도 모르는 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는 듯이. 시란은 그의 그런 장난스러운 모습에 익숙한 듯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안트아는 이어서 말했다.

“탐험하지 못한 미개척지라서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특히 해독 불능 신호라면 더더욱.”

나머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필이 이어서 덧붙였다.

“거기에 성과를 내야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적당히 조사하다가 뭔가 없으면 골고다 기지 녀석들의 착각인 거로 하면 되겠지, 뭐….”

그리고 재단 사람들은 지성체가 있는 것보다 없는 걸 더 좋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행성에 자리를 펴야 하는 건 다른 종족이 아닌 인간이니까. 안트아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시란은 그 말을 안에서 곰곰이 되씹었다. 왜 저러는 걸까. 재단에서 나온 감시원이라고 해도, 일단 필립 선배는 우리들의 동기였잖아.

극히 평범한, 연합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시민상이리라. 시란은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뭐가 어찌됐던 내일부터 조사 나갈 거야. 다들 각오하고 오늘은 일찍 자. 힘든 여정이 될테니까.”

시란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내일 눈보라가 세게 불 걸 예고하기라도 하는 듯,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너네 집도 십일조 내라고 해?”

안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란은 자신을 길러준 시설에 꼬박꼬박 후원금을 내고 있었고, 그 돈은 다시 시설을 후원하는 교회에게로 흘러갔을터였다. 레느아 연합에서는 항상, 모든 곳에 교회가 연관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안 내는 사람은 없을 걸. 차라리 이민 가버릴까봐. 잘 되면.”

“어디로? 서쪽 나라로?”

시란은 그렇게 말하고서 장난스럽게 <Go West>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안트아는 짖궂은 말 하지 말라는 듯이 웃었고, 그의 볼을 매만졌다.

“시란은 불신자야?” 안트아는 그가 그래도 상관 없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그는 고민했다.

“모르겠어. 교회는 항상 나가고 있긴 한데.”

“나는 불신자야.”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불신자가 아니라고 했다면 놀랐을 것이다. 연합 내에서 가장 종교를 믿지 않는 직업이 바로 과학자였다. 그는 안트아의 어깨를 감싸고 고개를 기대었다.

“하느님이 싫어?”

“당연히 아니지. 난 지옥 갈까 봐 항상 걱정하는 사람이야.”

그의 말과 다르게 안트아는 항상 무모하고 과감했다. 그는 직접 말하지 않을 뿐이지, 가진 생각으로는 꽤 과격한 불신자였다.

“그러면 왜?”

안트아는 자기도 그 이유를 알지 않냐는 듯이, 물고 있던 사탕을 빼고선 한숨을 쉬었다. 시란이 보기에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깊은 어둠이 있었다.

“우리랑 친구들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게 아니꼬워.”

시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쉬울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얼음의 경계는 비교적 평지에 세워진 기지 부근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었다. 무언가를 보호하듯이 눈보라가 그 주위에만 강하게 맴돌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기조차 힘들었다. 대기 분석을 하려면 기상 관측을 해야 하는데, 전문 기술자도 없었고 꾸준히 조사하기에는 사람이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세 사람은 원인불명의 눈보라를 규명하지 못한 채로 신호의 진원지를 찾아 헤매었다.

세 사람은 같이 나가고 같이 들어왔다. 기지에서 경계까지는 굴곡이 거의 없는 평지기에, 얼음 위에서 계속해서 공기를 분사하며 날아가는 호버크래프트를 타고 편히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소형 호버크래프트에 성인 3명과 탐사에 필요한 기초 장비를 실으면 자동으로 속도가 느려졌고, 무엇보다도 경계에 가까워지면 호버크래프트 자체를 쓸 수 없었다.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것처럼 부는 눈보라 앞에서 기계는 무력했다.

“걷는 수밖에 없겠어.”

시란이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슈트를 입고 있으면 서로의 시선이 보이지 않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연합에서 나누어준 슈트는 영하 60도까지 버틸 수 있었고, 눈바람이 부는 크로노스의 기온은 영하 55도에 육박했다. 그러니 걸어야만 했다. 버틸 수는 있지만, 한계점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오래 있으면 춥고, 얼어 죽는다. 오래 있을 수 없기에, 첫 조사는 기지와의 거리를 감 잡았다는 성과만을 내고 돌아와야 했다.

과감하게 나간 두 번째 조사와 세 번째 조사는 그 영역의 일부분만을 밝힐 수 있었다.

다음에 조사대가 발을 디딘 곳은 아래로 쭉 뻗은, 미로와도 같은 협곡이었다. 크레바스가 만든 협곡이 아니라, 생명체가 지나갈 수 있는 반듯한 길이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 그곳에 있는 얼음은 지상에 있는 것들보다 훨씬 반듯했고, 하늘에서 내려온 눈의 흔적이 거의 없어 깨끗했다. 심지어 벽에는 결정형으로 조각된 무늬가 있기도 했다.

누군가가 오랜 세월 동안 조각한 듯한 미로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 광경을 눈에만 담아둔 채로, 이 이상으로 조사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전문 탐험 대원도 아닌 학자 세 명이, 그것도 지친 상태에서 그곳을 더 탐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만든 미로 같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빔프로젝터로 공유하며 그런 평가를 내렸다.

“이걸 만든 지성체 집단이 있어.”

안트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필립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자연적 현상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동굴도 이렇게 형성되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렇지만 동굴이랑은 달라! 완전히 인공적인 건축물이었다니깐? 크로노스에서 그렇게 바닥이 자연적으로 닦인 곳, 본 적 있어?” 안트아는 그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필립은 시비를 걸 의도가 없었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지만, 자신의 말이 옳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슈트를 입고 있었고, 슈트 신발은 빙하 위에서 다니기 좋게 크램펀3형태로 미세한 가시가 붙어 있어. 안트아, 넌 그걸 간과하고 있어. 자기주장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생물이 모두 인간처럼 진화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어?”

“섣부른 판단이야.”

필립은 그렇게 말한 뒤 으르렁거리듯이, 협박하듯이 안트아를 쏘아붙였다.

“그리고, 불신자 같은 발언을 하면 재단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걸.”

안트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시란은 예전에 그가 소리 지르는 남자를 상대하는 게 무섭다고 한 걸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싸움을 막고 싶었지만 안트아가 나서려는 시란을 손짓으로 막았다.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다는 듯이.

“넌 과학자인 주제에 연구하는 데 종교 끌어오기야? 재단 눈치 보는 게 그렇게 무섭냐? 그럼 넌 여기 왜 왔어? 이런 걸 밝히지 않을 거면 크로노스까지 와서 시간 노닥일 이유가 뭐가 있냔 말이야!”

“이게 진짜…….”

“둘 다 그만해!”

보다 못한 시란이 외쳤다. 아이들 싸움 같은 광경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자신들 사이에서 인간 외의 새로운 지성체의 발견이라는 중요한 논제가 오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란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안트아는 감정에 격앙되어 씩씩대고 있었고, 필립은 아까까지는 여유로웠다가 안트아가 뱉은 말에 자극되어 분노하기 직전이었다.

“내일 다시 가. 그곳에서 흔적을 발견하면 안트아의 승리고, 아니라면 필립의 승리야. 그렇게 하기로 해. 연구 결과를 알리느냐 마느냐, 이게 재단이나 레느아 연합에게 해가 되느냐 마느냐는 조사를 하고 난 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

이 말을 한 시점에서 안트아가 필립을 쏘아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무시한 채로 시란을 바라보았다.

“…오늘 고생했어. 힘들었을 텐데 이제 쉬어.”

다정한 시란의 말과는 달리 기지 내의 공기는 싸늘했다.

 


 

시란은 고아원에서 많은 영상물을 보고 자랐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연극이나 홀로그램을 투사하여 실제 배경에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투사하는 ‘투사극’ 같은 것들. 현실과 가상이 어우러지는 지점이 좋았다. 그때 당시에는 그냥 인간 아닌 것들이, 상상 속에만 있던 것들이 실제로 튀어나와서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이곳 아닌 어딘가로 향할 수 있을 것 같은 감각. 그것에 매료되었던 게 아닐까.

옛날 옛적에, 크로노스에는 용이 살고 있었습니다. 용은 크로노스 주민들을 잘 보살피고, 가끔은 힘을 나누어주기도 했어요.

용님의 축복 아래에서 우리는 행복하다네!” 마을의 악사는 그렇게 노래하곤 했죠.

그는 맨 앞자리에 앉아 마을이 번성하는 장면을 보았다. 초원에 아이들이 뛰놀았다. 저 멀리서 가족들이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그 가장 뒤에는 커다란 용이 있었다.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며, 농사를 지었다. 책을 만들어 이야기를 썼다. 편리한 도구를 만들었다. 마을이 번성해간다. 아이가 태어나고, 모두가 행복했다. 모든 감사를 용에게 돌렸다. 수호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기나긴 겨울이 찾아왔답니다. 겨울의 전조를 확인한 사람들은 불안함에 떨었어요.

‘빙하기야.’ 어린 시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홀로그램이 이내 하얗고 푸르게 바뀌었다. 멸망이다. 식물들이 말라죽기 시작하고 동물들이 픽픽 쓰러졌다. 찬바람이 갑자기 불기 시작했고, 선생님이 에어컨을 틀어 실제로 추워졌다.

시란보다 어린애들 중에는 벌써 우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도 추위의 공포를 안 것일까.

크로노스 주민 대표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용님, 제발 저희를 살려주세요. 저희에게는 날아오를 날개도, 추위를 버틸 비늘 갑옷도, 이 추위를 버틸 지혜도 없습니다.’

시란은 마지막 한마디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 품으로 와서 잠들라.’

모두가 용에게 다가갔다. 빙하기가 찾아오고, 인간들은 용 아래에서 모두 고스란히 잠들었다. 봄이 올 때까지. 사람이 다시 살 수 있을 때까지.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고아원에 와서 그 투사극을 상영한 사람은 불신자 떠돌이 예술가였다. 시란은 연극이 끝난 뒤 그 연출가가 고아원 원장님한테 연신 사과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혼나기에는 꽤 멋진 이야기였다. 적어도 경전보다는 재밌었다.

 

 


 

세 사람은 얼음도끼를 가지고 벽을 등반했다. 빙하 미로에는 길이 닦여 있긴 했지만, 자연적인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지상과 수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빙하 등반을, 아래로 향하여 도끼를 찍으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면서 내려와! 얼음이 단단하지가 않아!”

먼저 내려간 필립이 위에서 밧줄을 잡고 느릿하게 내려오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불안하게 말했다. 그는 클라이밍 경험이 있어서 손쉽게 내려왔지만, 하던게 고작 연구소에서 하는 실험과 논문 쓰기, 그리고 머리 굴리기 밖에 없던 학자들에게는 아래서 던져준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것도 고작이었다.

안쪽은 그야말로 미로였고, 인간이 만든 것 같지 않은 건축물 같았다. 죽음의 경계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과 걸맞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미끄러울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음 바닥과, 벽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기하학적인 모양의 조각이 어우러져 동화 속에 나오는 세계와도 같았다.

이 안에서 몇 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얼음 공주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란은 주위를 둘러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대 유적을 탐험하는 탐험가의 기분이 이런 걸까. 경이감과 두려움.

외부 온도는 영하 25도로, 크로노스 평균 기온보다 높은 축에 속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밖보다 훨씬 생활할 만했다.

“신호는 잡혀?”

필이 그렇게 묻자, 안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시란도 자신의 손에 있던 단말기를 확인했다. 통신실에서 확인했던 것과 비슷한, 그렇지만 훨씬 더 선명한 파장이 화면에 떠오르고 있었다.

“귀가 시끄러울 정도야. 아무래도 이 아래 어딘가가 진원지인 것 같은데….”

세 사람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푸른 심연.

미궁의 바깥을 걷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얇고 낮은 벽 너머로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선형으로 정교하게 짜인 길이 끝도 없이 나 있었다. 바닥이 어디인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깊었고, 이 안에 방이 몇 개나 있을지 모를 정도로 복잡했다. 시란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얼마나 깊으면, 저 아래에서 푸른빛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계속 가자.”

필립은 길을 걸으면서 불안했는지 찬송가 멜로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손에는 평소에 목에 걸고 다니던 십자가를 꽉 쥔 상태였다. 시란과 안트아는 함께 그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교회를 싫어하긴 해도 연합의 시민이라면 그 노래를 한 번쯤을 들어보았으니까. 그러는 편이 긴장을 덜었다.

미로를 걸으면서 주변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고, 의견을 나누었다. 오히려 지상에서 탐사하는 것보다 위험이 없었다. 안트아와 필립은 또다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지만, 시란은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

그는 신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상을 만든 누군가가 있다면, 이곳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었을까. 인간이 살 수 없는 이 겨울의 왕국은 어떤 생물을 위해 만든 것이란 말인가. 어릴 적 보았던 투사극을 떠올렸다.

무언가가 잠들어 있는 요람이 아닐까. 이렇게 고요하고, 따뜻한 곳이라면….

단말기를 들고 주변을 휘휘 젓던 안트아가 갑자기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광기에 가까운 거친 숨을 내쉬며 이리 저리를 돌았다. 한 방향으로 올곧게 가던 두 사람은 그의 이상 행동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왜 그래?”

“신호가 증폭됐어.”

안트아는 멍하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하기라도 한듯이 두 사람을 지나쳐 계속 향했다. 단말기가 이끄는 곳으로. 단말기 화면에는 미친 듯이 증폭하는 파장의 신호가 잡혀 있었고, 옆에서 같이 허둥지둥 따라오던 시란은 그걸 바라보고 놀랐다.

“근처에 있는 거야?”

“진원지가 여기였잖아. 확실해. 여기 어딘가에 분명…….”

시란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얼음 바닥을 밟으면 밟을수록 지반이 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필립도 그걸 눈치챘는지 앞으로 성큼성큼 나서는 안트아를 말렸다.

“잠깐, 뭔가 낌새가 이상한데….”

“대체 왜 맨날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시비를 거는 거야, 필? 지금 그동안 우리가, 사람들이 그렇게 찾던 게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게 아니야, 안트아!”

시란은 그렇게 말하며 안트아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레 팔이 잡힌 그는 시란을 바라보았지만, 슈트를 입은 채로는 눈을 볼 수 없었다. 안트아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똑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귀에는 여전히, 정체불명의 진원지로부터 흘러나오는 신호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반이 약해지고 있어. 잘못하다간 무너질 거야. 돌아가고 다음에 오자. 세 번째 조사에서 눈보라 너무 많이 불 때 네가 먼저 돌아오자고 했잖아.”

절박했다. 이 순간만큼은 안트아가 사라지는 상상을 하면 안 됐다.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르니. 하지만 그는 시란의 심정을 몰랐다. 저 눈앞에 있는, 진실을 좇고자 했다.

“가야 돼.”

단호하게 말한 뒤, 안트아는 시란의 손을 뿌리쳤다. 자신이 떠나야 할 길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처럼. 시란은 자신을 내치는 그 손을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은 지반을 조심하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깊으면 깊어질수록 햇빛은 닿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푸르스름하게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벽을 살펴보니 얼음 안에서 은은히 빛을 내뿜는 게 있었다. 안트아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래도 문명의 흔적이 없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누가 봐도 인공 건축물이잖아.”

당연히 필립을 노리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안일함과 무지함을 알았기에, 필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놀라워하는 척만 했다.

“그럼 여기에 전기가 통하고 있는 건가? 전구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는데….”

“아니에요, 필립 선배. 여기 자세히 보면….”

시란은 슈트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확대경 기능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안에 자그마한 벌레가 박제된 모습이 보였다. 그 녀석의 꼬리가 광원이었다. 반딧불이처럼. 그런 조명들이 불빛이 적어질 때마다 나타나곤 했다.

“호박 같은 원리인가?”

“비슷하겠죠.”

시란은 이 치밀한 건축가가 누군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다시금 긴장감이 경이감으로 바뀌어 갈 즈음에, 사고는 일어났다.

앞에서 걷던 안트아의 아래쪽 바닥이 쩌적 하고 갈라졌다. 순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란은 기억했다. 순간 슈트 너머에서 그의 눈동자가 보인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처럼.

생에 단 한 번 일어나야 할 사고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때 일어난 사람처럼.

안트아!”

그의 다급한 외침은 구원이 되지 못했다.

안트아가 밟은 바닥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고, 그의 손을 황급히 잡으려 뻗은 시란의 손은 이내 허공을 쓰다듬었다. 그대로 안트아가 사라졌다. 저 아래로, 빠르고 확실하게. 슈트가 부서지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는 사라졌다. 있었던 존재가 소멸하는 것처럼.

시란은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 보았다. 분명 이곳에 얼음 다리와 그 위에 서 있던 안트아가 있었다. 그런데 너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돌아가야 돼!”

멍하니 있는 시란을 보고 필립은 그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시란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얼음 미로 전체는 붕괴하지 않았다. 다만 안트아가 서 있었던, 유독 연결 부분이 빈약하게 형성된 얼음이, 그의 크램펀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시란은 그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후퇴한 것은 다름 아닌 이곳이 앞으로 더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필립의 손에 이끌려 그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안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ㄱ, 구하러 가야 돼요! 슈트까지 입고 있으니까…. 늦지 않으면….”

“이 멍청아! 너도 같이 죽고 싶어?!”

필립은 그를 돌아본 채로 강경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시란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푸른 심연이 있었다. 안트아가 사라진 그곳은 더이상 호기심으로만 재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죽음. 얼음의 경계는 순식간에 제 이름을 그 무시무시한 두 글자로 바꾸었다. 시란에게는 이제 발걸음을 내딜 용기가 없었다.

과거의 누군가가, 혹은 대자연이 매끈하게 닦아 놓은 얼음 길을 힘겹게 올라가며 시란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 있었더라면. 조금만 덜 겁쟁이였다면. 너를 구하러, 혹은 같이 죽으러. 지금 저 아래로 뛰어들 텐데.

 


 

길을 가다가 손을 잡으려 했는데, 필립이 갑자기 나타나서 안트아는 시란을 황급히 밀쳐낼 수밖에 없었다. 잘못하면 넘어질 뻔했고, 왜 그러냐는 필립의 물음에 얘가 자꾸 걸으면 옆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해명했다.

“같이 밥 먹으러 가?”

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하품을 하면서 연구소 쪽으로 걸어갔고, 두 사람은 식당이 있는 대로변 쪽으로 건너갔다.

레느아에는 즐길 거리가 적다. 국가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권장하기 때문에, 그런 업소 자체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규제가 너무 빡빡해서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할 바에는 다른 곳에서 하게 만든 것이었다.

의기소침해 있던 안트아가 손을 뻗어왔다. 시란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있지, 시란.”

“응?”

“크로노스에서도 우리, 사귈 수 있을까?”

시란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두 사람은 경전에서 제시하는 사랑의 형태와 어긋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정형에서 벗어난 사랑은 항상 과녁이 되곤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술자리에 오르기 좋은.

무엇보다도 필립이 두려웠다.

“어려울지도 몰라.”

시란은 그렇게 말하고서 안트아와 눈을 맞추었다.

“그렇지만 난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그것만이 두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었으므로.

안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시란에게 깍지를 끼었다.

시란은 문득 불안함을 느꼈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제 갈 길을 갔다. 그렇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지로 돌아온 필립과 시란은 망연자실하여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이렇게도 죽는구나.

그 생각이 들기도 전에 안트아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저 멀리 사라지는 비명이 메아리처럼 귀에 맴돌았다. 죄책감이 안트아의 목소리가 되어 시란을 옥죄었다. 왜 돌아온 거야, 나를 두고. 나를 구하고 왔어야지.

‘아니야, 안 죽었어. 아직 살아 있을 뿐이야.’

비어버린 안트아의 침대를 보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저 자리도 온기로 다시 물들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혼자 있어야만 해. 약해지지 마. 안트아라면 어떻게 했겠어.

“뭘 그렇게 꿍해 있어. 지나간 열차 안 돌아와. 앞을 봐!”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란은 그대로 쓰러져 자신의 이불 위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없는 기지는 너무나도 황량하고 커다랗게만 느껴졌다.

사실상 시란은 안트아를 포기하고 있었다. 슈뢰딩거의 상자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안트아는 몇 번이고 죽고 되살아나는 걸 반복했다. 그렇지만 그의 관찰 결과는 죽음이었다. 사인은 추락사. 마지막으로 남긴 표정은 당황하는 표정. 사고로 인한 절명.

그 날 시란은 잠을 설치고, 해가 뜨고 난 이후에야 잠들었다. 그 때에도 안트아의 부스스한 머리칼이 떠올랐다.

 

아무리 근처에서 다시 연락을 해보아도 신호가 닿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단말기와 통신실의 컴퓨터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그 정체불명의 신호만 이따금 받을 뿐이었다. 그것이 안트아가 죽었다는 확률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다른 기지에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그 메시지의 해독이 안트아의 죽음을 해명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래야 안트아가 사라진 의미가 있는데. 시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또 다시 일말의 자괴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필립이 미로 아래로 내려가는 건 위험하다며 말렸고, 그렇게 말다툼이 계속되었다.

“포기하는 게 좋겠어.”

필립의 잔인한 말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다가오는 역경에 화내지도 못하고 그저 맥없이 바스라졌다.

“그렇지만, 이대로 정말 시간을 보내다간 안트아가….”

“안 돼. 너도 죽어. 지반 약한 거 봤잖아. 추가적인 조사는 가도, 저 아래까지 가는 건 위험해. 사람을 더 부르면 되잖아. 지금은 무리야.”

싸움이 계속되자 시란은 지쳐버렸다. 결국 필립에게 설득되기로 했다. 자기방어적인 체념.

 

며칠 뒤 안트아가 찾아왔다. 인간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슈트도 없이, 그저 기이하고 이상한,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시란은 설마하는 마음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생물학자인 시란도 보지 못한 생물체가 그의 눈 앞에 있었다.

거의 모든 몸이 비늘로 덮여 있는데도 두 다리로 서 있었다. 파충류와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손과 발이 달려 있었고, 자신의 눈을 맞추며 똑바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그것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파충류는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었다.

갈색 눈동자는 불길한 노란색의 세로동공으로 변해 있어서 고양이 같다는 느낌이 짙었다. 인간에게는 절대로 나지 않는 꼬리 역시 돋아 있었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용인의 모습이었다.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실했다.

지금 눈 앞에 서있는 건 시란 그렇게 그리워했던 이름이었다.

“모습이 좀, 흉하지…?”

안트아는 일을 저질러버렸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인간 외의 존재가 되어도 그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시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 일을 경험하면 막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놀랍고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란은 안트아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 그저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었다는 것.

“누구 왔어?”

통신실에 있던 필립이 소리를 듣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안트아는 순간 필립과 눈을 마주쳤고, 필립이 놀라는 것까지 보았다.

시란은 안트아에게 달려가 껴안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필립이 그의 손을 낚아채 다시 기지 안쪽으로 끌어 들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다시 문을 닫았다. 쾅.

그리고 시란의 뺨을 후려쳤다.

얼얼한 감촉 때문에 잠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대체 내가 왜 맞은 거지? 시란은 원망하는 눈으로 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목걸이에 걸린 십자가가 전등의 빛에 반짝였다.

“너 누구랑 이야기한 거야.”

“…안트아요. 죽다 살아왔다고요. 목소리도, 말투도, 표정도 전부 안트아였어요.”

“아니, 누구랑 이야기한 거냐고. 그게 인간 맞아? 너 지금 외계인이랑 포옹하려고 했어. 정신 나갔어? 바이러스가 있었다면 어쩌려고? 미친 게 틀림없지. 신원확인부터 해야 될 거 아니야!”

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밖 온도가 영하 45도에 육박하는데 안트아를 밖에 멀뚱히 내버려 뒀다는 것에서 분노를 느꼈다.

“일단 안으로 들여야 될 거 아니에요! 안트아 맞아요. 모습이, 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고, 필립은 그를 보고 흠칫 놀랐다. 의기소침해질지언정 우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안트아에요. 모르겠어요? 그렇게 싸워 놓고서?”

시란의 호소를 듣고 그는 유리창을 통해 밖에 있는 생명체를 바라 보았다. 두 발로 서 있는 그것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괴물의 모습에 가까웠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안트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까 들려온 목소리, 역시 그의 것이었다. 이렇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지만 그게 인간이 아니라면?

그는 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주여,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지난 탐사대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지마다 1-2명씩은 실종되었어. 대부분 얼음의 영역 근처였고. 그곳이 죽음의 영역이라는 이명이 붙게 된 건 자꾸 사람들이 그곳에서 없어졌기 때문이야. 너 나사렛 기지에 왜 사람이 없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시란은 고개를 적었다. 골고다 기지에는 수십 명의 대원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대학생 때부터 크로노스에 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정부, 그리고 세 사람을 후원해주는 아론 재단과 같은 수많은 교회 재단이 직접 밀어주는 사람들.

변방 기지는 소규모로 운영된다고 해도 나사렛 기지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기지가 너무 크다고 느껴질 정도로.

“여기가 죽음의 영역이랑 가장 가까운 곳이라서 그래. 그리고 실종자가 제일 많았지.”

시란은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추었다. 늘어나는 실종자, 처음으로 걸려온 신호, 인외의 존재로 변해버린 사람들. 그들을 변화시킨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사람들은 아직 모른다.

“저 빌어먹을 용인이 제 발로 온 건 이번이 처음이야. 나머지는 이 행성 어딘가에 있던, 아니면 그냥 얼어 죽어서 주님 품으로 갔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러니까 경계했던 거라고. 저 인간 아닌 것이 얼마나 위협이 될지 모르니까!”

필립은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는 항상 박력 넘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추해보이는 때가 없었다. 시란은 이를 꽉 깨문채 그를 바라 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환되었다.

“…격리실에 가둔다. 그 다음에 나는 본 행성이랑 연락을 취하겠어. 그 때까지는 우리 기지에서, 너가 직접 담당해서, 안트아인지 뭔지 모를 저 외계인을 연구하도록 해. 가능하면 재단과 연합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시란은 사람의 말 한 마디로 세상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그 역으로도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루 보충수업 듣는대.”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정규 예배 시간에 딴짓하는 사람, 설문 조사에서 ‘평소 신앙생활 점수’가 낮게 나온 사람, 그 외의 이유로 불신자와 같은 행동을 보인 사람은 방학 때에 보충수업을 들어야 했다. 예배를 드리고 종교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이 수업 대상자가 되면 낙인이 찍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란은 히루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지만, 건너서 들은 성격이나 특징보다는 불신자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동성 애인이라도 들킨 거야?”

“그건 아니고, 신학 수업에서 강사님한테 대들었나 봐. 자기 말로는 토론이었다고 하는데.”

“걔 원래 좀 그렇잖아. 말 안 되는 거 잘 못 참고.”

“그래도 그렇지, 불신자가 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시란은 뒤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무나도 날선 대화. 그는 그런 것을 버티기 힘들어했다. 손에는 해외 소설가가 쓴 판타지 소설이 들려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겉커버를 다른 것으로 바꿔 끼운 채였다.

불신자는 공식적으로는 연합의 포용 대상이었다. 다만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였다.

연합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흘러들어왔다. 외부 국가에서 모종의 사정으로 이민을 온 사람도 있었고, 취업하러 비자를 딴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외부자들이었고, 외국인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신을 믿던, 어떤 형태의 사랑을 하던, 심지어 그 사람이 어떤 성별이던 상관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미지가 향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국인이라면 달랐다. 레느아인들은 오직 주만 믿어야 했고,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주변의 압력에 의해 안쪽으로 짓눌렸다.

히루도 흔한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시란은 그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보충 수업을 듣고 나서 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지만, 대학에서도 채플 반대 성명서가 잊을 만하면 대자보에 걸릴 때마다 그의 생각을 했다.

 


 

세 번째 세션.

안트아와의 의사소통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변했다고 해도 언어는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성대가 조금 퇴화한 것 같다고, 스스로 말했다.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기억이 희미해.”

안트아는 담담하게 그렇게 말했다. 필립은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단어나 문장이 생각이 안 나는 거야?”

고개를 젓는 용인. 그리고 뒤이어 말했다.

“그건 아니야. 그런데… 입으로 말하기가, 좀 힘들어. 혀가 굳은 것처럼. 잘 안 움직여져.”

그는 단답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문장을 하나 말하면 끊어서 곰곰히 생각하고,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평소의 그 유창하던 말솜씨가 어디갔나 싶을 정도였다. 필립과 시란은 눈을 맞추었다. 무언가 변화가 있다.

“전부 다 기억나는 게 확실한 거지? 기억상실증의 증상은 없고?”

안트아는 긍정의 의미로 다시 한 번 끄덕거렸다. 인간 외의 존재지만 자신의 다른 종족에 대해서 모른다. 외계인보다는 변이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실제로 두 번째 세션에서 필립이 존재론에 관한 질문을 수없이 던졌을때 그는 몇 번이고 받아쳤다. 이 용인은 확실히 안트아였다.

필립이 마이크를 끄고 고개를 돌렸다. 안트아가 보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빨리 본 연구소에 회부시켜야겠어.”

“뭐가 그리 성급한 거예요?”

“그야…… 이상하잖아. 괴물처럼 생겼다고. 그냥…. 기분이 이상해. 하느님이 저런 형태의 생물을 만드셨겠어?”

물론 과학적인 얘기가 아닌 건 알아.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시란의 귀에는 필립이 창조과학론을 믿는 사람처럼 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시 안트아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안트아였다.

그리고, 말하지 못한 비밀 하나. 그 용과 닮은 모습도 어쩐지 친숙했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그랬던가.

“뇌파가 인간의 것과 다르게 작용하는 거랑 상관이 있을까?”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안트아는 비교 대상인 필립과 확연히 다른 주파수와 파장을 보였다. 그것만이 이상한 점이었다. 평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뇌파가 항상 불안정했고, 주파수도 파장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안트아가 온 날에 거쳤던 온갖 검사들을 기억했다. 두 사람 모두 의학이나 뇌과학에 전문인은 아니었지만 매뉴얼을 철저히 지켜가며, 할 수 있는 검사와 방역 조치를 최대로 했었다.

그 중 하나가 뇌파검사였다. 나사렛 기지에는 안내 인공지능이 붙어 있는 전문 검사 기계가 꽤 있었고, 뇌 분야에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의 검사밖에 없었다. 기타 혈액 검사나 바이러스 검사는 전부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거나 안전한 수준으로 검출되었다.

“조사는 더 안 가는 거야?”

안트아가 격리실 내부에서 그렇게 말하자, 필립이 대답했다.

“지금 우선인 사항은 다른 것보다 너야. 다른 기지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던데.”

“실험쥐가 되게 생겼네. 이럴 수가. 내가 연구원이 되길 바랐는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시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변해버린 눈동자는 익숙하지 않아 정감이 덜 갔지만, 그래도 묘하게 빠져드는 눈이었다. 한 번 바라보면 계속 바라보게 되는.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어.」

“응, 좀만 참아.”

시란은 안트아의 목소리에 답했고, 그에 돌아본 것은 필립이었다. 목소리를 낸 용인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응?”

“누구한테 얘기한 거야?”

시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필립과 유리창 너머의 안트아를 번갈아 보았다. 세 사람 모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이 현상의 본질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발화자 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안트아한테.”

“아, 참으라고? 그래, 조금만 참아.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긴 하지만.”

필립은 평소의 그 유머러스했던 말투로 슬쩍 웃었다.

잠시 뒤, 그는 자리를 떠났다. 통신실에서 신호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시란은 격리실 밖에 남아 그대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냥….」

안트아의 입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들려온 소리는, 환청도 실제 소리도 아니었다. 제 3의 소리.

시란은 확신했다. 자신이 들은 목소리가 착각이 아니었다고. 혀가 움직이지 않는 건 그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새벽에 여기로 올래? 할 얘기가 있어.」

이런 순간에 같은 종족인 거리감 있는 선배와, 처음으로 조우한 낯선 지성체로 변해버린 안트아 중에서 안트아에게 마음이 가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상하지는 않았다. 시란은 날 때부터 그렇게 자라난 사람이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날, 안트아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걱정스레 되물을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평생 남들을 속이면서, 그리고 널 속이면서 살아가야 할 거야. 교회 나가는 거 좋아하잖아, 너.”

시란은 다름 아닌 그 때 눈물을 흘렸다. 그의 목소리는 경험자의 목소리였다. 이미 지옥을 갔다와본 사람의, 초연하면서도 걱정하는 목소리. 이 앞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물음.

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를 평생 속이면서 살아왔어. 이번이 처음으로 솔직해지는 거야.”

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은 키스하지… 않았다. 대신 얼싸안으며 엉엉 울었다. 두 존재의 포옹은 너무나도 작고 나약했다. 인간의 말은 신의 경건한 말씀을 이길 수 없다. 다만 저항할 수는 있었다. 비록 그 앞이 천벌과 속죄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지옥의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 뼈와 근육이 모두 타버린다고 해도.

‘우린 혼자가 아니야.’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잡은 손에서 느끼는 체온, 타액의 달콤함 같은 것들.

 


 

「용을 봤어. 잘 들어. 이건 새로운 종류의 진화니까!」

격리실에 몰래 들어오자마자, 안트아는 그에게 그런 내용의 텔레파시를 보냈다. 혀를 움직이며 말을 할 때보다 훨씬 유창하고, 시끄러웠다. 정신으로 말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평소 궁금했던 안트아의 머릿속이 조금은 밝혀지는 기분이었다.

시란은 앞에 앉아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용을? 어떻게 생겼는데? 말을 하긴 했어? 생물로 치자면 어떤 거에 가까웠어? 공룡 닮았어?”

「그게 지금 중요한 거냐고!」

물론 생물학자에게는 중요한 화두였다. 안트아는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져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그 용이었어. 죽기 전에 보는 환각 같은 건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말을 건넸어. ‘저 지옥 가나요?’ 그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아니. 대신 이 품으로 돌아올 수는 있을테지.’」

“정말로 환각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

시란이 자신 없이 말하자, 안트아가 그의 볼에 자신의 손(아니, 앞발?)을 올려놓았다. 생경하고 생생했다. 바닥의 찬 온도가 그대로 전해졌지만, 곧 따뜻해졌다. 시란의 온도를 닮아가고 있었다.

「내가 있잖아.」

안트아는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 아닐때에도 사람 설레게 하는 데에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신호에 대해서 물어봤어. 당신이 보낸 거냐고. 그러자 용이 그러더라. ‘항상 주기적으로 외부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구조 요청으로. 하지만 그를 듣는 사람들은 없었어.’」

“이런 방식의 신호였을까?”

시란은 용인이 보내는 텔레파시가 사람에게 들릴 정도라면, 커다란 용이 보내는 신호가 크로노스 전체에 뻗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뇌파와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텔레비전 신호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난 물었어. 그러자 용은 대답했어. 낙원이 부서지고 있다고.」

용은 자신을 닮은 많은 ‘아이들’을 품고 있었다. 그들을 자신의 내부 세계로 초대해서 겨울이 지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했다고, 안트아는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오래 있었고, 그 안에서부터 늙기 시작한 거야. 상상 속의 세계로 보내는 발상은 좋았지만, 끝에는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구나.”

안트아는 죄책감을 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주기적으로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완벽한 유토피아에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굴곡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죽는다. 그는 용인들의 삶을 생각했다. 만나는 사람과만 만나고, 그중에서도 마찰이 빚어지고.

「용인들은 멸망하고 있었어.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사람들이 용에게 오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지.」

그는 자신을 가리켰다. 썩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나, 네 이야기도 했어. 너만 좋으면 보내주겠다고 하더라. 그곳으로.」

시란은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무섭지 않았다. 두렵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여전히 안트아였기 때문에.

「시란. 나 하나만 이야기해도 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트아의 표정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이없다는 듯이 하, 하고 웃더니 이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들이 밀려왔다.

「…ㅁ, 미안해.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어. 이렇게 되어버린 이후로 자꾸 계속해서 생각나고 감정을 느낀단 말이야. 슬퍼. 화나. 너한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안트아는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그의 마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도망치고 싶어. 사람들한테 끌려가면 조롱당하고 경멸당할 거야. 그러면 정말로 내가 아니게 되어버릴지도 몰라.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해버릴 것 같아. 그게 아닌데도. 그냥…. 이렇게 되어버린 거잖아. 우리는 이렇게 태어난 거잖아. 그렇지, 시란?」

생각의 물결은 말과 달리 정제되지 않았다. 거칠었다. 말 중에 욕설이 깃들기도 했다.

문득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주님은 죄인을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사탄의 꾀임에 넘어간 자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함께 안트아 성도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너 불신자였어? 그러다가 지옥 간다.

교회 다니는 거 좋아했잖아. 너 엄마 말 듣기 싫니?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어?

그는 안트아가 훌쩍거리는 걸 보았다. 단단한 비늘을 타고 흘러 내리는 반짝이는 물방울이 처연했다. 입을 열지 않아 더 괴로워보였다.

그것은 이제 안트아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 기억은 이제 시란의 것이기도 했다.

안트아는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벌벌 떨며 그에게 다가갔을 뿐이었다. 지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시란은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다독여줄 뿐이었다.

「교회 사람들이 싫어. 가족이 미워. 필립은 그냥 나가 뒤졌으면 좋겠어. 내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어.」

“응.”

「전부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고 싶어. 지옥에 가서 평생 고통받을 거야. 그리고 용서받고 싶지도 않아.」

“그래.”

비늘을 쓰다듬는 손. 부드럽지 않지만 서로의 체온은 공유되고 있었다.

 


 

선배는 아마 저희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거에요. 평생.

안트아와 시란은 실종되었습니다. 저를 맡아주신 고아원의 주소를 적어두겠어요. 좋은 분들이었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불신자 키우시느라 애쓰셨다고 전해주세요. 안트아는 미련 남는 사람이 없대요. 친구들한테 술 그만 처먹으라는 말밖에 없다던데요.

일방적으로 이렇게 억지 부려서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저한테 그만 좀 죄송하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었죠.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은 못 드리게 되었어요.

저는 긴 시간동안 위선자였어요. 주님의 존재를 계속 의심하면서도 믿는 척했고, 교회에 십일조를 내면서 아까워했으며 말씀 시간에 과학을 생각하는 뺀질이였어요. 그렇게 안 보셨을테니 제가 생각보다 거짓말을 잘하는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달아요.

아, 제가 안트아랑 사귀는 것도 모르실테니 거짓말을 잘 한다는 게 하나 더 증명되었군요. 그리고 지옥에는 한 걸음 더 가까워졌고요.

저희는 불신자이자 동성애자이며, 과학자들이자 친구들, 연대자이자 도망자에요.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실 거에요. 선배는 저희에게 모든 것에서 반대니까요.

「크로노스의 이해와 미래 비전」이라는 수업 기억하시죠? 세 번째로 같이 들은 수업이잖아요. 그 뒷풀이 술자리에서 선배가 하신 말 기억해요. TV에 나오는 외국 퀴어 배우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쟤 연합국 오면 머리 염색 풀고 맨날 교회 나온다. 안 그러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버릴 거니까. 안트아와 제가 맞은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책상 아래에서 서로 저 선배의 개소리를 조금만 버티자는 의미에서 손을 잡고 있었어요.

또 이런 적도 있죠. 연구소 근처 교회에서 돌아오는데 목사님 말씀 참 좋다고. 특히 사회와 종교를 결부시키는 데에 혜안이 있으신 분이라고 칭송하셨어요. 저도 그 교회의 목사님이 좋은 분인 건 알아요. 하지만 그 날 말씀에는 ‘퀴어’들이 전부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비난하지 말라고. 따스하게 대해주라고 말하셨지요.

지옥의 업화에 불타 죽으리라고 저주하는 것보다 그게 더 싫더라고요. 우리의 삶이 전부 잘못된 것처럼 몰아붙이니까.

연합은 안트아와, 그 이전의 실종자, 그리고 저에 대해서 당분간 알 수 없을 거예요. 저희는 당신들을 피해 도망칠 테니까요. 많은 인원들이 와도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주 꽁꽁 숨을 거예요. 설령 들켜서 우리 모두가 죽는다 해도, 우리는 또 생겨날 거예요. 인간의 모습으로, 동물의 모습으로, 그 중간 어딘가의 모습으로.

그렇지만 선배가 바뀐다면, 주님의 말씀을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 대화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진정으로 제가 선배를 용서하고, 선배는 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요.

선배가 그날까지 살아 있다면, 다시 크로노스로 찾아오세요. 그게 아니라면 아이들을 보내세요. 저는 선배가 이 편지를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태워버리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저는 필립 선배를 싫어하지 않아요. 선배가 추천해준 돈가스 집을 좋아했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닮고 싶었어요. 그러니 말없이 떠나진 않았어요.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주세요.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며.

 

주님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시란.

 


 

“무섭지 않았어? 혼자 남겨진 거.”

시란은 용의 서식처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미로의 가장 끝. 던전의 심장부. 무시무시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 곳. 아래는 지상보다 따뜻했다. 기온이 영하 10도로 올라갔을 정도였다. 얼마나 깊은걸까?

「여기는 생각보다 따뜻해. 그리고 그걸 생각할 틈도 없이 용을 만났으니까. 이렇게 변해버렸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닫힌 문을 열었다.

거대한 예배당 같은 풍경이었다. 방의 가운데에는 눈의 결정 표식이 있었고, 그 위로 넓은 홀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오랜 세월이 지난,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일 텐데. 시란은 어째서인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경외. 압도. 교회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을, 낯선 행성에서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용이 있었다. 방안을 거의 가득 메울 정도의 크기였다. 장엄한 그 위상에 순간 무릎을 꿇을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인간이 개미처럼 느껴졌다.

그는 용 너머에 굳게 닫힌 문을 보았다. 저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 용을 매개로 하여, 이 행성 어딘가에 만들어진 정신세계가 있다. 시란은 용의 크기를 보고서 그제야 실감했다.

아, 그렇구나. 가상세계는 전기로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거대한 생체 컴퓨터가 있다면. 그 존재의 생명력으로 수많은 존재가 안에 무사히 있을 수 있다면.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의 출입문이 있다면.

안트아는 털옷을 벗었다. 눈을 부릅 뜬 채로 그에게 무언으로 말을 건넸다. 시란은 옆에서 보고만 있었다.

감긴 용의 눈이 서서히 움직였다.

말하라.

시란은 안트아의 눈초리를 느꼈다. 어떻게 답해야하지? 그는 사람을 대하는 법은 알았지만 이렇게 신성하고 경이로운 존재를 대하는 법을 몰랐다. 다만, 시란은 단 하나만을 원했다.

“제가 당신의 종이 되게 하소서.”

돌이킬 수 없다. 죽어갔던 이 자와는 달리 너는 살아 있는 존재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내 품으로 오겠는가? 우리 아이들의 대열에 합류하겠는가?

“후회하지 않습니다.”

용은 다시 눈을 감았고, 이내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땅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진동이 몇 번 지나치자, 용의 입에서 과실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안트아가 주워, 털옷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으로 닦았다.

 

시란은 신을 떠올렸다. 실체도 없고, 그림을 보아도 와닿지 않던 그 존재를. 지금 어딘가에서 그의 죄악을 심판하고 있을 그분을. 그동안 그를 애증했었다. 우리의 존재를, 그의 종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지워온 자를. 그러나 여전히 나의 빛이자, 걸어가야 할 이정표인 존재를.

언젠가 당신의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그는 속으로 기도하고서, 속죄의 한 마디를 보냈다.

주여, 어린양 한 마리가 당신의 품을 떠납니다. 부디 용서해주소서. 앞길을 비춰주시고, 인도하여 주소서. 당신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짖지 않는 저를 부디 내치소서.

그것이 그의 마지막 신앙이었다.

 

시란은 안트아를 마주보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미소가 아름다운,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나의 반려. 그는 미소지었다.

약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열매를 함께 한 손으로 나눠 쥐었다. 안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이라고. 앞으로의 생에서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사랑해, 안트아.”

인간으로서 뱉은 마지막 말.

피부에 비늘이 돋고, 꼬리가 돋아났다. 관절이 뒤틀리며 눈동자가 갈라졌다. 용은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자신의 세계로 옮길 준비를 했다. 이제 그들도 크로노스의 주민이었다. 아직 봄이 찾아오지 않은, 겨울의 아이들이었다.

 

시란이 용인이 되었을 때, 안트아는 가장 처음으로 이 생각을 건넸다.

「사랑해.」

두 용인이 입을 맞추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크레바스 : 빙하의 표면에 쪼개진 틈을 크레바스라고 한다. 좁은 곡지를 흐르던 빙하가 넓은 장소로 나가는 곳이나, 곡류하는 곳에서 크레바스가 생긴다.
2 파라볼라 안테나 : 회전포물도체면(回轉抛物導體面)을 반사기(反射器)로 한 안테나. 접시 안테나라고도 한다. (네이버지식백과)
3크램펀 : 경사가 심한 얼음이나 단단한 설사면과 빙하지대를 오르내릴 때, 등산화 밑창에 부착하여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금속제 장비.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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