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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아홉살>

 

마사코는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선 길목을 걸어갔다. 알고 있는 곳이다. 무척이나 보고픈 곳이었지만 동시에 두려운 곳이기도 하였다. 공원으로 이어지는 탁 트인 가로수 길에서 마사코는 한참을 서 있는다. 나는. 마사코는 무서웠다.

 

가고 싶지 않아.

 

휴대전화를 열어 뚫어지게 바라본다. 기억에서 장소를 밀어내 새까만 그을음만이 가득한 곳. 마사코의 앞으로 아이가 지나간다. 얼굴 한가득 걱정을 찌푸리고서. 아장아장. 그 아이는 아직 젖먹이 때의 모습을 벗지 못하였다. 그때 그 아이의 시절이 어떠했더라. 계절은 지나지만 마사코만은 그때 그곳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녀. 마사코의 그.

소년이 공원의 호숫가로 걸어간다. 빠질 듯,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손을 뻗는다. 넘어질 듯, 자빠질 듯. 마사코는 아이에게로 달려가 붙잡는다.

 

뭐 하는 거야, 위험하게.

 

아이가 눈을 내리깐다. 울먹이는 숨소리. 아이가 손을 뻗은 곳에는 작은 카네이션이 피어 있었다. 더운 날이 다 지난 10월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은 여름꽃 하나. 마사코는 성큼성큼 호숫가로 걸어가 아이가 따려 했던 꽃을 꺾었다. 아이에게 건네어준다. 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저만치로 달려간다. 아이는 마사코가 아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호수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턱수염을 깎지 않아 듬성듬성 난 지저분한 턱과 볼록하게 나온 배. 환경미화원 옷을 입고 하얀 운동화는 흙으로 덮여 있었다. 마사코는 얼굴을 쓸며 멍하니 제 모습을 관찰하였다. 가을과 호수에서 꺾어온 여름꽃. 마사코는 어렴풋이 더듬어 나갔다. 안다. 알고 있다. 아득히 떠나오는 배를 향해 나아가듯. 마사코는 자신의 옛집으로 걸어갔다.

 

기억 그대로 옛집이 있다. 나무로 된 벽과 짓다 만 벽돌담. 구멍가게와 고소한 내를 풍기는 빵집이 골목 어귀를 반기고 잡초들이 제멋대로 자란 공터가 한가로이 쉬고 있다. 담 너머로 불들이 밝혀지는 집들. 마사코는 고개를 빼었다. 분명 2층 어딘가에.

 

탁 탁 탁.

 

아이 하나가 밖으로 뛰쳐 나간다. 마사코는 아이를 좇았다. 2층 어딘가 있을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분명.

아이는 공원으로 달려 흙바닥 위로 아무렇게나 앉았다. 어깨가 처져있다. 해가 저물고 밥 냄새가 골목 골목으로 번진다. 마사코는 아이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낯선 남자의 접근에도 아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늦었다, 들어가야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제 저녁이야. 밥 먹어야지.

 

싫어.

 

엄마 말 들어야지.

 

마사코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저 혼자 놀라지만 아이는 심드렁하게 말하였다.

 

어차피 엄마는 밥 안 해.

 

밥을 안 하다니?

 

밥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해.

 

얘야, 일단 가자.

 

밤늦게 아이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하다. 돌아가서 씻기고 옷도 빨아야 한다. 밥도 안치고 나물도 무쳐야 한다. 돌아가자. 집으로 돌아가자.

 

싫어.

 

마사코는 아이를 억지로 들어 끌고 가려 한다.

 

싫어, 싫어, 싫어!

 

떼를 쓰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 마사코는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구부렸다. 아이의 눈을 마주 본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

 

마사코의 설득에도 아랑곳 않고, 아이는 공원으로 힘껏 걸어갔다. 늦은 저녁이 되면 공원은 사람을 받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시비를 걸고 남 보기 부끄러운 애정행각을 하는 남녀가 모여들 것이다. 마사코는 그런 모습들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서 가자. 집으로 가자, 아이야.

 

어디 가는 거니?

 

꽃을 따야 해요.

 

아이는 공원에 핀 온갖 꽃들을 꺾고 손에 쥐었다. 마사코는 아이에게 끌려다니며 우거진 나무 틈새나 공원 깊숙한 곳처럼 위험한 곳으로 아이가 가리키는 꽃을 따러 갔다. 

 

이제 다 됐니?

 

아니요.

 

아이가 손을 가리킨다. 

 

저것만 있으면 되요.

 

보라색 나팔꽃이 공원 화장실 벽을 따라 피어 있었다. 마사코는 아이를 두고 꽃으로 다가갔다. 그때가 8시 였고 어두워지기에 충분한 시각이었다. 그리고 마사코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저리 비켜!

 

고함 소리. 마사코는 고개를 돌렸다. 술에 얼큰 취한 남성이 아이에게 팔을 흔들고 있다. 

 

안 돼!

 

마사코는 나팔꽃 덩굴을 쥔 것도 모른 채 남성에게 달려들었다. 취객이 아이의 얼굴로 주먹을 휘두른다. 주먹은 마사코의 팔을 가격했고 마사코는 불의의 습격에 신음을 흘렸다. 취객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는 또 뭐야!

 

마사코를 밀고 욕을 뱉는다. 얼굴이 온통 벌겋다. 냄새가 지독했고 취객이 풍기는 술내음에 같이 있던 마사코까지 비틀거렸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뭐가!

 

지나갈게요, 제발.

 

팔이 밀쳐진다. 어깨가, 발이, 몸이, 등이. 몸의 온 곳이 취객의 손에 밀려난다. 제발, 우리를 내버려 둬요. 마사코의 짜증과 화가 목덜미까지 번졌다. 제발. 그녀가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취객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허둥지둥거렸고 몰래 숨어있던 남녀 한 쌍이 달아난다. 

마사코는 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이 따뜻하다. 아마 그 아이도 내 손을 쥐고 있던 것 아닐까. 아이가 마사코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괜찮아. 괜찮단다, 얘야. 경관들이 마사코와 취객을 붙잡는다.

 

마사코는 아이와 함께 경찰서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취객은 손을 비비며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아이의 손이 갖은 꽃의 줄기와 뿌리로 지저분해져 있다. 

 

왜, 꽃을 모으려고 한 거니?

 

마사코는 궁금해졌다. 이 아이는 무얼 하려 했던 걸까. 그리고 왜 이때의 계절에서 아이의 얼굴이 그토록 흐릿했던 걸까.

 

엄마 주려고요.

엄마는 집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해요.

옆집 아줌마가 대신 밥을 챙겨주고 빨래도 해줘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엄마가 무척 힘들대요.

 

안다. 그 계절에서 마사코는 크나큰 상실을 겪었다. 그는 분명 이런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꽃을 주면 엄마가 괜찮아질 것 같니?

 

모르겠어요.

 

아이는 담담히 이야기하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는 듯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으려는 듯이. 마사코는 그때 그 기억으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만다.

 

엄마는 잠에서 깨어나시면 멍하니 꽃만 보고 계세요.

 

안다. 마사코는 알고 있다.

 

그래서 꽃을 선물하려고요.

 

마사코는 아이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너무도 조용히 끌어안아 우주가 눈을 감은 밤 속으로 물이 들 듯. 마사코는 아이가 쥔 들꽃의 향으로 맘껏 유영하였다. 자신의 기분으로,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으로.

마사코는 안다. 이 아이가 말한 엄마가 바라보던 꽃이 국화라는 것을. 그리고 이 늦은 시각까지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찾는 전화 한 통 돌리지 않았다는 것을. 마사코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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