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슈베르트 바이러스

2020.09.19 00:0809.19

여자는 일렁이는 촛불의 심지를 가위로 잘랐다. 이교도 두 명을 화형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신나게 타던 불꽃이 기세를 잃고 얌전해졌다.

 

"그을음이 심하네."

 

여자는 가위를 수건으로 닦고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언제나 물건을 정확한 위치에 두었고 이불과 쿠션은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반듯하게 올려 놓았다.

 

"20년 전 내가 설산에 갔던 일을 말해주지."

 

또다른 여자가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는 식은 감자 튀김과 커피를 먹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푸른 곰팡이가 정맥처럼 돋아난 스틸턴 치즈와 포트 와인을 마시고 있던 그의 친구가 추위로 몸서리를 치더니 창문으로 가서 덧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집 안이 고요해졌다. 대지를 마구 할퀴어대던 바람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인도에 갔던 일 말인가?"

 

"그래."

 

여자는 눅눅해진 감자 튀김을 접시에 조금 남아 있는 케첩에 묻혀 우걱우걱 씹었다.

 

"그일에 대해 모든 사람이 널 붙잡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도 꿈적도 하지 않았잖아. 나중에는 무슨 고문을 받는 독립 투사같았다니까. 죽어도 입을 열지 않으니."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어."

 

"아니긴? 어제까지 같이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헤어진 사람이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다들 놀랄 수밖에. 우리는 경찰에 실종신고까지 했었다고. 집에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아니면 자다가 술 마신 게 잘못 되서 골로 간 게 아닌가, 혹시 옷장에 목을 맨 게 아닌가, 별별 얘기가 다 나돌았지. 나중에 우리가 사람을 불러서 네 아파트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모든 짐이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잖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원래 내가 결벽증이 좀 있잖아."

 

"그건 그렇지."

 

"원래는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어. 일주일이면 충분했다고."

 

"네 말은, 아무 말 없이 잠깐 볼일을 보고 일주일 뒤에 돌아와서 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 하고 얘기할 생각이었단 말이지? 몇 번 데이트를 하다가 헤어진 남자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

 

"그런데 중간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조금' 일정이 늦어졌다는 말이지?"

 

"응."

 

"일 년 동안 연락 한 번을 못하고 상거지꼴이 되서 다음날 아침이면 결혼을 하는 친구를 새벽 한 시에 공항으로 불러냈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는 거지?"

 

"그건 미안하게 됐어."

 

여자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맞은 편의 친구를 바라 보았다.

 

"난 네가 그날 결혼하는 줄 몰랐으니까."

 

그의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치즈를 집어먹고 와인을 마셨다.

 

"난 지금도 공항에서 너를 비행기에 태워준 것부터가 신기해. 도대체 일 년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문명이 전혀 없는 곳에서 살았어? 우리랑 술을 마신 그 날 이후로 씻기는 한 거야? 나는 아주 지저분하고 거대한 털덩어리가 걸어오는 줄 알았어. 아무리 세수를 안 하고 머리를 안 잘랐더라도 일 년 만에 그 지경이 되진 않을텐데. 넌 마치 40년 동안 시베리아 지하 갱도에서 강제 노역형을 살고 돌아온 꼴이었다니까."

 

"그정도는 아니었어."

 

여자는 흐물흐물한 감자 튀김으로 접시에 조금밖에 남지 않은 케첩을 긁어 모았다. 부엌 냉장고에 뜯지도 않은 케첩 통이 있었지만 엉덩이를 또 일으키기가 귀찮은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인도가 아니라 아르헨티나에 다녀온 거였어."

 

"뭐?"

 

"처음 출발지는 그랬지."

 

여자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에 케첩을 담아 왔다. 커피 포트도 가져와 머그잔에 붓고 냉장고에서 치즈도 썰어 와 친구 앞에 놓았다.

 

"너도 알다시피,"

 

여자가 말했다.

 

“나는 엄마의 얼굴도 본 적이 없어. 대학교 졸업 앨범이 있긴 한데 하필 엄마 얼굴에만 잉크가 잘못 묻어서 시커멓게 되어버렸으니까. 나머지 사진은 모두 할머니가 없애버렸어. 나까지 엄마 인생을 닮게 할 수는 없다면서.

 

엄마는 젊었을 때부터 한 곳에 진득하게 정착해서 살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지. 대학교 때부터 툭하면 휴학을 하고 한참동안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지겨워졌다 싶으면 다시 돌아왔으니까. 엄마가 한국에 제일 오래 붙어 있었을 때는 아빠를 만났을 때였어. 물론 아빠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고, 더 이상 휴학이 불가능한데다 학사 경고까지 받아서 추가로 학교를 더 다녀야했기 때문이었지. 물론 그 틈을 타서 부지런하게 연애도 했었고,"

 

여자는 새로 가져온 커피 향을 맡아보고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연애 상대가 한 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중 한 명이 나의 아버지였다는 건 확실하지."

 

여자의 친구는 잠자코 와인을 마셨다. 이런 주제는 농담으로 받아치기가 어렵다.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말 그래도 나를 이 세상에 내놓는데 필요한 ‘생물학적’ 소임만 다하고 사라졌어. 엄마는 결혼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지만 ‘아이는 한 번 낳아볼까’ 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 시대에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외할머니가 늘 자기 팔자 닮아서 딸년도 애비 없는 자식 키우게 됐다고 맨날 한숨 쉬셨거든. 할머니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그러니까 내 ‘생물학적’ 외할아버지가 덜컥 애만 임신시켜 놓고 가출을 해버렸거든.”

 

"선녀와 나무꾼의 여자 버전이군."

 

“우리 할머니를 선녀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여자는 혀 끝을 굴려 입 안에 남은 커피 맛을 음미했다. 이번에 사온 커피는 신 맛이 강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볶는 시간을 너무 오래 잡았나? 아니면 탬핑을 너무 강하게 했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아,"

 

여자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그 전의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어머니는 졸업 후에 나를 낳고 한 잡지사에 취직을 했어. 물론 결혼도 안 하고 키우는 애가 있다는 사실은 숨겨야 했지. 그 시대는 그랬으니까. 낮에는 외할머니가 나를 돌봐주고, 어머니는 잡지사에서 글을 썼어.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시간 보낼 거리가 별로 없었으니까, 별 시덥지 않은 내용의 잡지라도 기획만 잘 하면 그럭저럭 팔렸거든.”

 

“신식 가정이었네.”

 

“문제는 어머니가 취직한 곳이 잡지사의 여행 담당 부서였다는 거지. 물론 그게 아니었더라도 무슨 핑계를 대서든 어머니는 집을 떠났을 사람이었지만. 아무튼 내가 아직 걸음마도 떼기 전에 어머니의 옛날 버릇이 또 도진 거야."

 

"말도 없이 사라지셨나?"

 

"그건 아니었고," 남자는 감자 튀김을 입에 넣었다.

 

"사람이 그래도 진화라는 게 있어야지. 어머니는 취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베레스트산에 가야 된다고 했지. 그때가 한창 에베레스트니 칸첸중가니 하는 곳에 가서 깃발을 꽂고 오면 높아진 국력을 보여주고 왔다며 텔레비전이며 신문에서 몇날 몇일씩 요란하게 보도를 했거든."

 

"맞아, 그런 때가 있었지."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데 나 혼자 어떻게든 다른 이들에게 스스로를 과시하고 싶은 심리는 의식의 밑바닥 있는 지옥의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한 개인이든, 국가든.

 

"그때 이 나라에서는 그런 게 꽤 먹혔거든. 자랑스러운 한국인 아무개가 지옥의 에베레스트 봉우리를 정복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가난의 한을 벗고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떠들어대면 부정 선거니 독재니 하는 골치 아픈 이야기들은 쑥 들어갔으니까. 아무튼 그때 한창 어떤 등반가가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내리면서 덩달아 잡지사들끼리도 취재 경쟁이 붙은 거야. 물론 내 어머니는 이제 입사한 신참인데다 여자라서 굳이 회사에서도 보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우겨서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자청을 했지. 그리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짐을 잔뜩 챙겨서 비행기를 타고 떠나 버린거야."

 

"외할머니가 슬퍼하셨겠군."

 

"뭐, 할머니도 어느 정도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야. 나까지 낳아 놓고서.”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무튼 어머니는 그뒤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신문사의 말로는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길에 발을 헛디뎌서 절벽에서 떨어졌다더군. 곧바로 눈사태가 났고 말이야. 일행이 어머니를 찾아보긴 했지만 워낙 날씨가 험한 데다 더 지체하면 남은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가 있어서 할 수 없이 그냥 내려왔다고 하더군."

 

"그랬겠지."

 

"그 등반가가 '무사히'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지. 가뜩이나 좁아 터진 공항이 기자들이며 구경꾼들로 완전 아수라장이 된 거야. 그 장면을 피터 브뤼겔이 그렸으면 아주 훌륭한 현대판 지옥도가 되었을텐데."

 

"환영 악단도 등장했겠네."

 

"환영 악단이 뭐야. 대통령까지 등장했다니까. 경호원들까지 잔뜩 대동하고서. 그러니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신문에서도 난리였겠네."

 

"신문이고 텔레비전이고 한동안 온통 그 얘기 뿐이었지. 그 와중에 아직 서른 살이 안 된 신참 기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어. 어머니가 다니던 잡지사에서 아주 짤막하게 '사우'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기사를 실었지만, 사실 입사한지 몇 달도 되지 않아서 어머니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었을 거야. 어머니가 남겨놓고 간 유일한 흔적이 기저귀를 차고 삐약거리고 있다는 사실도."

 

두 사람은 커피잔과 와인잔을 들어 올려 건배를 했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항상 어머니에 대한 말을 할 때면, 그놈의 역마살이 사람을 잡아 먹었다곤 했지. 그리고 나에게 특히 산에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했어. 아마 어머니에게 냈어야 할 화를 풀 곳이 없어서 나를 붙잡고 그런 얘기를 했겠지만, 나는 어머니의 무책임함을 대신 속죄하는 어린 양이었어. 외할머니는 나를 '모험심'을 자극할 만한 것로부터 완벽하게 차단시켰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세발 자전거도 한 번 타보지 못했을 정도니까."

 

"곱게 자란 공주님이였구만."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외할머니가 혼자 돈을 벌어서 나를 먹여 살려야 했으니 부잣집 공주님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외할머니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나는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았어. 이런 건 위험하니까 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 나는 절대로 그 말을 어기지 않았어. 특별히 말을 잘 듣는 아이여서라기보단, 난 어릴 때부터 세상에 큰 호기심이 없었어. 전기 콘센트에 젓가락을 쑤시면 감전이 된다는데, 굳이 그걸 해볼 이유가 없었던 거지.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만."

 

여자가 친구를 놀리듯 바라보았다. 친구의 아들은 어린 시절 얼굴만 봐도 장난기가 줄줄 흐르는 별난 놈이기 때문이었다. 여섯 살 때 벌써부터 동그란 안경을 쓰고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솟은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그 소년은 언제나 눈이 부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틈만 나면 집 밖에서 매미나 지렁이 따위를 잡아와 화분 속에 넣어 놓았다가 친구가 경기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기어코 젓가락을 전기 콘센트에 쑤셔 넣었다가 병원에 실려가는 통에 친구가 회사에서 일하던 중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우리 집에도 그렇게 별난 놈은 없었다고. 너희 집 유전자가 엉뚱하게 그 녀석한테 온 거야. 이게 다 친구를 잘못 사귄 내 업보지."

 

여자의 친구가 남자의 얼굴에 치즈 조각을 집어 던졌다. 여자는 멋진 솜씨로 그것을 한 번에 입 속으로 받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도에는, 아니 네팔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게 된 거야?"

 

"아마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일 년쯤 지났을 때였을거야. 이제 나에게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상대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던 거지. 그 사실이 딱히 슬프지는 않았어. 외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도 나는 어쩐지 세상에서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할머니의 기일이고 보니 나도 조금은 감상적이 되어서 할머니가 좋아하던 일식집에 초밥을 먹으러 갔어. 할머니는 나고야에서 태어나서 열두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니까, 일식이라면 무조건 좋아하셨지. 꽤 고급인 식당이었는데 맛은 좋았지만 값이 비싸서 자주 갈 수가 없었지. 내가 대학에 입학한 기념으로 할머니와 함께 간 것이 마지막이었어. 그 뒤로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나도 여러 가지로 바빴으니까."

 

여자는 다 먹어버린 감자 튀김 접시를 아쉽다는 듯 바라보다가 곧 결심을 하고 엉덩이를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오징어를 한 마리 구워서 말린 과일과 함께 쟁반에 담아서 가져왔다.

 

"혼자 온 손님이라 그랬는지 나에게는 좋은 자리를 주지 않더라고. 점원은 나를 카운터 옆에 있는 2인용 테이블로 안내했지. 뭐, 자리 따위는 상관없었으니까. 그렇게 광어회와 도미를 먹고 있는데 마침 텔레비전에서 등산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더라고. 어머니가 갔다가 죽은 바로 그곳이었어. 이제는 세상이 좋아졌는지 등산 장비 회사의 협찬을 받아서 인기있는 영화배우가 등반 전문가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지. 그 순간 저 곳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거야. 마치 번개에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어. 지금 당장 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로 떠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지. 그래서 나는 그길로 집으로 와서 밤새 자료를 검색하고 그 모든 준비를 일주일 만에 다 끝내버린 거야."

 

"너희 어머니 유전자를 전혀 물려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는데."

 

여자의 친구는 오징어 다리를 찢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친구가 오징어의 눈알을 떼서 입에 넣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구운 오징어의 눈알을 특히나 좋아했다. 여자의 친구는 그의 그러한 식성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일 년 씩이나 거기 있게 된 건데?"

 

"그동안 등산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에베레스트의 꼭대기를 찍고 오는 것은 불가능했지. 아침마다 늘 한 시간씩 수영을 해왔던 터라 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니까. 나는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지. 아르헨티나에 있는 아콩카과 산이라고, 그곳이라면 걸어서도 올라갈 수 있다는 거야. 물론 엄청난 고지대라서 고산병에 걸려서 중도에 포기할 확률이 60프로나 된다고 했지만.”

 

“그래서 아콘카가? 아콩가카? 발음도 어렵네.”

 

“아콩콰가야.”

 

“아무튼, 그 산에 갔다고?”

 

“응.”

 

여자가 포트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뭐 무슨 항공을 타고 어디를 경유해서 다시 어디 행 비행기를 타고 이런 얘기는 생략할게. 들어도 하품만 나오고, 어차피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여자의 친구는 건포도를 씹으며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참 산을 오르던 나는 길을 잃었어. 함께 가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다 거절했지. 그렇게 등반대도 셰르파도 없이 한참을 가다보니 고산병이 오기 시작했어.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눈앞에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지. 그래도 억지로 발을 옮기고 있는데, 어딘가 발을 헛디딘 거야. 아무리 아콩카과 산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곳이라고 해도 산은 산이지. 어딘가 바위 틈으로 떨어져서 한참을 내려가는데, 당연하겠지만 기절을 했어.

 

한참이 지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발목이 몹시 아프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는 것 같았어. 어지러운 것도, 토할 것 같은 증상도 훨씬 괜찮아졌지. 하지만 발목이 아프다는 건 큰일이었어. 내가 떨어진 곳은 깊이가 몇 백 미터는 될 것 같은 바위의 갈라진 틈이었으니까.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증상이 사라진 건 아마도 낮은 곳으로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어. 한참 위에 가느다랗게 찢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지.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하지?’

 

우선 목이 무척 말랐고 배가 고팠기 때문에 가져온 물병에 담긴 물을 조금씩 마셨어.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져 온 초콜릿도 먹었지. 그리고 내가 떨어진 곳을 살폈어. 저 위에는 내가 떨어진 바위 틈이 있고, 나는 바위를 따라 푹신하게 쌓인 눈더미 위에 넘어져 있었어. 그리고 내 앞으로는 아주 좁고 긴 통로가 보였는데 워낙 캄캄해서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 그렇게 내가 떨어진 곳을 살펴 보고 있는데, 갑자기 키가 크고 화려한 직물로 만든 옷을 입은 여자가-나는 그렇게 추측했어- 남자 둘을 데리고 내 쪽으로 오는 거야.

 

머리에는 붉은색과 금색이 섞인 장식물을 쓰고, 새카만 머리카락은 한 갈래로 땋아 내렸어. 자세히 보니 머리와 옷에 두른 직물 모두 직물 위에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천을 짤 때 무늬를 넣어서 만든 것이었어. 그렇게 복잡한 도안을 직물로 짜다니 대체 머리가 얼마나 좋아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지. 남자 둘의 의상 역시 화려했지만 여자가 입은 옷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아무튼 여자는 내게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난생 처음 듣는 언어였어. 내가 영어로 말을 걸어 보고 스페인어로도 말을 걸어봤지만 당연히 말이 통하지 않았지. 여자는 내 발목을 보더니 남자 둘에게 뭐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어. 남자 한 명이 내 짐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나를 부축해서 걷기 시작했으니까. 여자는 횃불을 들고 있었어. 산소가 부족해서 불이 꺼지는 게 아닌가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마치 지하 도시처럼 잘 설계된 미로 같은 도시가 나오는 거야.”

 

“무슨 인디아나 존스 같은데?”

 

“나는 황금을 찾으러 간 게 아니니까, 인디아나 존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여자가 포트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도시는 대충 산업 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의 스페인의 어느 산골 마을 같았어. 지하수로 움직이게 만든 물레방아도 있었고, 빵을 굽는 화덕으로 보이는 돔 형태의 벽돌 더미도 있었지.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촛불이었어. 도시 전체에 촛불이 마치 가로등처럼 길게 늘어서 있어서 마치 한밤의 등불 축제라도 보는 것 같았지. 아무튼 여자가 나를 이끈 곳은 계단 위에 있는 조그만 방이었어.

 

나를 부축하던 남자가 업히라는 듯이 등을 내어줬지만 나는 끝까지 내가 걷겠다고 사양했지. 그러자 여자가 짐을 들고 있던 남자에게 뭐라고 하더니 짐을 들고 있던 남자가 나를 부축하던 남자에게 업히도록 만들었어. 마음은 불편했지만, 사실 더 이상 걷는 건 무리였고 계단을 올라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지. 꽤 높은 계단이었는데도 남자는 전혀 힘들어하는 눈치가 아니었어. 앞서 가던 여자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능숙하게 계단을 올라갔지. 계단은 돌을 하나하나 쪼개서 만든 거였어. 끝이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계단은 마치 어린 아이의 발처럼 짧아서 어른이 그곳을 올라가려면 까치발을 들고 갈 수밖에 없었지. 내가 아무리 절뚝거린다 해도 그 계단을 올라가긴 힘들었을 거야. 여자가 나를 억지로 남자에게 업히도록 한 게 이해가 되었지.

 

마침내 도착한 방은 굴을 파서 만든 집처럼 어둡고 서늘했어. 남자 한 명이 벽에 놓인 촛대에 불을 켰지. 방 안은 한 33 평방미터 넓이의, 크진 않은 곳이었어. 한쪽에 침대가 놓여 있었고, 다른 쪽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게 전부였지. 마치 수도사의 방에 들어온 것 같았어. 여자가 나를 침대에 앉혀놓고 발목을 살피더니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지. 그리고 남자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 왔을 때 약초 냄새가 나는 뜨거운 주머니를 갖고 왔어. 여자가 주머니를 내 발목에 대었지. 처음에는 무척 아팠는데, 잠시 그렇게 하고 있으니 어느새 몸이 노곤노곤해지면서 졸음이 쏟아졌어. 긴장이 풀리고 그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나는 기절하듯이 잠에 빠졌지.

 

얼마나 잤는지, 잠에서 깼을 때는 여전히 어두웠어. 말했다시피 바위를 깎아서 만든 곳이었으니까, 햇빛이라곤 들어오지 않았지.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촛불은 이미 꺼져 있었지. 신기하게도 발목이 전혀 아프지 않았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밖을 내다보았지. 여전히 도시는 한낮처럼 돌아가고 있었어. 물레방아도, 빵을 굽는 화덕도, 새로 굴을 파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여전했지. 밖으로 나가 보려고 했지만 계단이 워낙 가팔라서 잠시 망설였어. 겨우 나은 발목을 또 다치긴 싫었으니까. 그런데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젊은 여자 둘이서 바구니를 들고 이쪽으로 올라 오는 거야. 여자들은 지난 번의 여자처럼 알록달록한 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길게 땋아서 나무 모양의 장식 위로 틀어 올렸어. 그녀들은 손짓 발짓으로 내게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 물었고 다리는 어떠냐고 물었지. 나는 몹시 배가 고팠고, 목도 말랐고, 다리는 많이 나아졌다고 했어. 그랬더니 아주 활짝 웃으며 잘 됐다는 몸짓을 하고는 다시 나가려고 했지. 그래서 내가 몸도 씻고 싶고, 화장실도 가고 싶다는 몸짓을 했지. 나는 그저 씻는 곳과 화장실을 알려주면 내가 가겠다고 했는데, 그녀들이 한사코 고개를 젓는 거야. 그러더니 재빨리 밖으로 나가 버리더라고.

 

나는 할 수 없이 테이블에 앉아 여자들이 가지고 온 빵과 우유를 먹기 시작했어. 치즈와 요구르트도 있었는데, 무슨 종류의 치즈인지는 알 수 없었어. 아마 우유를 끓여서 발효시킨 종류였을 거라고 생각해. 아무튼 빵도 맛이 있었고, 우유와 요구르트도 아주 신선했지. 대체 농사를 어디서 짓는 건지, 이 햇빛도 안 드는 곳에서 어떻게 가축을 키우는지 궁금했지.

 

그 때 아까 그 여자들이 다시 돌아왔어.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여자들이 함께 왔지. 뜨거운 목욕물이 든 커다란 통과 작은 도자기 함을 가지고. 나더러 거기서 씻고, 볼일은 ‘도자기’에 보라는 얘긴 거 같았어.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지. 말은 도저히 통하지 않았고,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몰랐으니까.

 

나는 그녀들보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지. 꺄르르 웃기만 하고 나가지를 않길래 발을 구르며 강하게 얘기해야 했어. 그러자 그들은 밖으로 나갔지. 나는 그녀들이 돌아올까봐 조심하면서 재빨리 ‘도자기’에 볼일을 봤어. 다행히 뚜껑이 있어서 얼른 덮었지. 하지만 누군가가 이걸 치울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지. 그런데 더 기절할 것 같은 일은 따로 있었어. ‘도자기’를 받아 들자마자 여자들은 뚜껑을 열어서 냄새를 맡고 불빛에 비춰서 색깔을 보는 거야. 그렇게 한참을 관찰하고 난 다음에야 ‘합격’이라는 듯이 나한테 웃어 보였어. 정말 죽을 맛이었지.”

 

“널 무슨 제물 삼으려고 했던 거 아냐? 건강한지 아닌지 보려고 한 건 아니고?”

 

여자의 친구가 물었다.

 

“뒷이야기를 미리 하자면 맞아. 다행히 장작 더미 위에 산채로 올라가는 일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제물은 맞았어. 하지만 이건 조금 뒤의 이야기고.

 

아무튼 목욕통 속의 물은 들어가기에 딱 알맞은 온도였고 심지어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잎까지 뿌려져 있었어. 기분 좋은 향이 나는 오일도 섞여 있었고. 나는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서 온몸에 퍼지는 따뜻한 기운을 즐겼지. 생각해보면 열흘 넘게 씻지를 못했어. 그러니 얼마나 찝찝했겠어? 이곳이 천국이다 하며 목욕을 하고 있는데 아까 그 여자들이 또 들어왔어. 아이고 참, 이 동네는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도무지 없는 것 같았어. 여자들은 또 깔깔 웃으면서 내 팔을 만져보고 내 피부를 쓰다듬고 내 가슴을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을 주고 받았어. 이쯤 되니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지. 빨리 목욕을 관두고 나가고 싶었는데, 그 중 어려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내 어깨를 마사지하기 시작한 거야. 난 긴장하면 어깨부터 굳는 체질이라 사실 목을 돌리기도 힘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어깨와 뒷목을 주무르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 솜씨가 여간 좋은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받아 온 비싼 스파 따위는 저리가라 할 정도였어. 한참을 작은 손가락으로 뼈마디 사이를 꼭꼭 눌러가며 마사지를 하고 나니 목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면서 정말로 피로가 풀렸어. 프라이버시 개념이 없는 이 동네 여자들에 대한 짜증도 날아갔고, 나에게 이런 환대를 해 준 이들이 고맙기만 했어. 물론 그게 공짜가 아니었다는 건 잠시 뒤에 알게 되었지만.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여자들이 미리 가져다 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으려니 여자들이 목욕통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 마침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거라고 착각했지. 내 옷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침대 위에 이곳 여자들이 입는 화려한 직물로 만든 옷이 있길래 그걸 입었어. 그리고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었어. 그렇게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피로가 풀리면서 당장이라도 계단을 달려 내려가 이 도시를 실컷 구경하고 싶어졌어.

 

그런데 갑자기 침대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 온 거야. 나는 잔뜩 긴장했지. 내 손에는 나를 지킬만한 그 어떤 물건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 방에 찾아온 건 맨 처음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젊은 남자였어. 다시 보니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어렸고, 십 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청소년 꼬맹이었지.

 

꼬맹이는 한참을 서서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다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었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것이 떠올랐지. 남미에 사는 어느 고립된 부족 얘기였어.”

 

여자가 얘기한 것을 옮기자면 이랬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산악 지역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일찍 죽는 일종의 풍토병이 있다. 이들은 지하 도시를 파고 자기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이어간다. 18세기 독일의 탐험가 슈베르트(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음악에 재능이 있고 뚱뚱하고 안경을 끼고 여자에게 인기가 없었던 그 슈베르트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가 최초로 발견하여 기록된 이 부족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차단하고 자기들끼리 자체적인 문명을 이루고 살아간다. 남자들의 병은 대체로 스물 두 살이 되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치사율은 90퍼센트 이다. 따라서 마을은 여자들이 꾸려 나간다. 슈베르트는 이들의 바이러스가 고립된 생활에 따른 근친상간 결혼이 그 원인이 아닐까 추측했다. 한번 발병하면 대개 2주 안에 죽으며 시신은 지하 묘지에 파묻는다.

 

가끔 실수로 이곳까지 오게 된 외부인이 있을 경우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극진히 대접하여 아직 살아 있는 십대 소년과 잠자리를 함께 하게 한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어 출산까지 무사히 이르도록 기도를 한다. ‘임무를 다한’ 외부 여자들은 평생 지배 계급으로 살 수 있지만 이곳을 떠나길 원한다면 죽여 버린다. 그리고 시신은 썩지 않는 ‘자연 냉동 창고’에 보관하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중세의 돌로 만든 무덤 조각상처럼 살아 있는 것 같은 모습 그대로 보존한다. 그곳이 일종의 ‘성지’인 셈이다. 반 년 마다 한번 씩 이들 부족은 종교적인 큰 행사를 하는데 이 때 죽은 시신에 대한 경배를 하며 자신들의 생존을 빈다.

 

이 기록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슈베르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조피 마리아 다이앤 슈베르트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슈베르트는 이들의 풍토병을 ‘슈베르트 바이러스’라고 이름 붙였다. 슈베르트는 우연한 기회로 이 고립된 부족들로부터 탈출하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기록한 바가 없다. 대서양을 건너다가 배 위에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니 우르술라가 동생이 남긴 물품들을 정리하다 발견한 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잊혀졌을 기록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만든 대부분의 기록물들이 그렇듯이 ‘슈베르트 바이러스’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한국의 어느 대학교의 독문과 교환 교수로 오게 된 슈트라우스(이 역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작곡한 슈트라우스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다) 박사가 짊어 지고 온 짐 속에 우연히 들어와 한국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낡고 오래된 책은 시험 점수 확인을 위해 교수 사무실로 갔었던 독문과 학생 이연경의 손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다.

 

이연경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일을 그만 두고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아콩카과 산의 어느 중턱에서 실수로 바위 틈 사이로 떨어져 이 고립된 부족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20년 뒤, 이제 막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친구 김주원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연경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혀 끝에 남는 커피의 쓴맛을 느꼈다.

 

“꼬맹이는 덜덜 떨고 있었어. 녀석이 내 침대로 온 이유는 대번에 알 수 있었지. 외부인이 오면 생식 능력이 있지만 아직 죽지 않은 십 대 후반의 남자 아이들과 동침을 시키는 거였어. 그렇게 해서 새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풍토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 남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니까. 나는 오늘 밤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이 아이의 ‘성인식’이라는 걸 알아차렸어. 여기서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또래 집단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다시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을 지도 모르지. 어쨌든 나는 소년을 옆에 앉게 하고 어깨를 토닥였어. 그랬더니 그 소년이 조용히 울기 시작했지. 사방이 온통 조용한 가운데 촛불이 일렁이는 방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꼬맹이와 한 침대에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어. 보통 이런 상황에선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는 게 흔한 일이잖아?

 

나는 그 소년에게 어떻게든 상관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내 말을 전달할 길이 없어서 그냥 어깨를 토닥이고만 있었지. 그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앞으로 살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두려워할까? 아니면 오늘 밤의 ‘의식’을 잘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에 떨고 있을까? 아니면 단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실망했을까?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 마침내 소년이 울음을 그치고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어. 그들의 생김새는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얼굴이 더 창백하고 체격이 조금 더 작았지. 길다란 속눈썹이 크고 검은 눈동자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숱이 많은 까만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곱슬거렸어.”

 

연경은 그의 이름을 물었다. 몇 번의 손짓과 발짓 끝에 그의 이름이 ‘추알코타르(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발음이 아니다. 그가 연경의 이름을 ‘용쿙’이라고 발음한 것과 마찬가지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연경은 추알코타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고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용히 키스했다. 촛불이 일렁이는 것이 마치 등불을 타고 뱃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옷을 벗기고 살갗을 맞대고 껴안고 쓰다듬는 동안 침대가 조금씩 삐걱거리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추알코타르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뒤에도 연경은 한참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추알코타르는 연경의 군살 없는 배를 손끝으로 만지며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연경은 추알코타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변성기가 막 끝난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집중했다. 추알코타르는 마음 속에 담아 둔 깊은 얘기를 꺼내듯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마침내 그가 말을 끝냈을 때, 연경은 그를 꼭 끌어 안았다. 연경의 품 안에서 그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뒤로 세 명의 소년과 더 동침을 했지만 연경은 임신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와는 달리 연경은 평생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고, 생리하는 것도 귀찮아 자궁에 IUD를 장착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생리를 하지 않는 연경을 보며 여자들은 한번에 임신이 된 줄 알고 기뻐했지만 그게 아닌 것을 알고 난 후에도 크게 실망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 소년들을 연경에게 보내지 않았을 뿐, 밥을 주지 않거나 힘든 노동을 시키는 일도 없었다. 마치 연경이 그들을 찾아 온 가까운 친척이라도 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었다.

 

“추알코타르는 삼 개월 후에 죽었어.”

 

연경이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풍토병’이 뭔지 똑똑히 보았지. 처음에는 매우 심한 복통을 호소해.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먹은 것을 다 토해내지. 그 뒤로 피부에 발진이 돋는데 본래 피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발진이 돋고 참을 수 없이 가려워 해. 칼로 살을 긁어 내는 사람도 있어.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찬 얼음물 통에 집어 넣고 가려움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것 뿐이야. 하지만 그런다 해도 가려움증은 가라앉지 않지. 그렇게 일주일을 고통 속에서 보내다가 기력이 다 해서 죽게 되는 거야.

 

나는 추알코타르의 마지막을 함께 했어. 그의 눈처럼 희고 아름다웠던 피부는 온데간데 없고 벌겋게 부어 오른 고깃덩어리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았지. 나는 그의 손을 잡았어. 우리가 함께 했던 아름다운 밤을, 그리고 그가 내게 들려준 긴 이야기(비록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를 생각하니까 저절로 눈물이 나더라구.

 

장례식엔 참석하지 않았어. 장례식이랄 것도 없었거든. 그냥 죽은 시신을 갱에 넣고 흙을 덮어 버리는 게 다였어. 노래나 울음 소리도 없었고, 장례 행렬이란 것도 없었지. 나를 빼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어. 그렇다고 그 소년이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던가 그런 것도 아니야. 엊그제 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소녀들이 묵묵히 땅을 파고 소년을 묻었어. 본래부터 땅 속에 살던 사람들이니‘땅에 묻는다’는 게 우리와는 다른 의미일지도 몰라.

 

내가 한참을 울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툭툭 쳤어. 돌아보니 추알코타르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 아이가 울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 어두컴컴한 갱에서 나와 촛불이 있는 통로로 나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어. 남자 아이의 얼굴은 정확히 우리 외할머니의 복사판이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주원은 그 다음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 다음날 아침, 편의점에서 식빵을 사오는 길에 언덕길에서 후진 기어를 걸어 놓은 트럭이 미끄러지면서 연경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연경은 즉사했다. 그 점이 차라리 다행일지 몰랐다. 어차피 가망도 없는 상태에서 며칠을 고통받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상주도 없었고, 찾아온 손님도 많지 않은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연경은 평소에 아무런 신도 믿지 않았지만, 장례식은 천주교 식으로 치뤘다. 어릴 때 유아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고 주원과 함께 주일학교에도 같이 다녔기 때문이었다. 주원도 연경이 천주교 식 장례식을 싫어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천주교만큼 의식을 제대로 갖춘 종교도 드물지.”

 

평소에 입버릇처럼 연경이 하던 말이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한 가족인 소피아 이연경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므로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난 소피아 이연경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위령기도는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주원은 그 며칠 전 연경이 말해 준 어린 소년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기도문을 외웠다. 갱에 시체를 집어 넣을 때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연경의 외할머니를 똑같이 닮았다는 그 소년의 이야기는 어찌 되었을까.

 

연경의 장례가 끝난 후 짐을 정리하는 일은 주원이 맡았다. 일가친척이나 다른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원이 해야 하기도 했지만, 연경이 남긴 일기나 기록이 있으면 아콩카과 산에서 있었던 뒷이야기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연경의 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형광등은 쓰지 않았는지 아예 전구가 끼워져 있지도 않았고, 군데 군데 스탠드로 부분 조명을 사용해 지나치게 집안이 밝아지지 않도록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밤이 되면 몸에 받는 빛의 양도 줄여야 돼. 해가 졌는데도 대낮처럼 불빛을 환하게 받으면 생체 리듬이 깨진다니까. 양계장에서 닭을 어떻게 키우는지 알아? 새들은 어두워져야 밤인 줄 알고 자는데 하루종일 밝은 빛을 켜놔서 잠도 안 재우고 쉴 새 없이 알을 낳게 해. 상상만 해도 내 어깨에 담이 걸릴 지경이야.”

 

약 60 평방미터 넓이의 아파트는 방 두 개와 거실, 그리고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구조였다. 한 방은 침대와 옷장, 화장대가 놓인 침실, 그리고 다른 방은 서재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에는 가나다 순으로 정확하게 책들이 꽂혀 있었고, 책상 위에는 쓰다 만 니베아 핸드크림과 맥북 프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랍을 뒤져도 나오는 건 없었다. 스카치테이프와 스테이플러, 슈테들러 연필 몇 자루, 지우개와 볼펜 따위가 나왔을 뿐이다. 연경은 손으로 일기를 쓰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사람이 머문 적 없는 것 같은 방이었다. 마치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해놓고 살았던 사람처럼.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들은 전부 헌옷 수거함에 버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 역시 밖에다 내놓았다. 30분도 되기 전에 책들은 폐지 줍는 노인이 전부 가져가 버렸다. 그 무게만으로도 엄청날 텐데, 과연 돈은 얼마나 벌게 될까. 그 책을 쓰고, 읽고, 짊어지고 나른 수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일게 분명했다.

 

연경의 맥북을 집으로 가져 온 주원은 한동안 그것을 열어보지 않았다. 아직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남의 허락 없이 사생활을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낼 목적으로 찍은 누드 사진이라도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와 성관계를 하는 동영상이 나올 수도 있다. 혹은 아주 친구의 사적이고 내밀한 취향(이를테면 자해 포르노나 구토 포르노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을 원하지 않게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래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죽은 친구의 이미지는 영원히 손상되고 훼손될 것이다. 적어도 김주원이라는 한 사람에게는.

 

한달 쯤 지난 후에야 겨우 주원은 연경의 맥북을 열어 볼 마음이 섰다.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이미 죽고 없는 친구를 판단하지 않으리라. 과연 가능할지는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 연경이 주원에게 하지 못한 그 뒷 이야기를 어딘가에는 기록해놓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신중한 성격의 연경이라면 자신의 사적인 생활을 컴퓨터에 무방비상태로 저장해놓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남의 컴퓨터를 허락 없이 열어 보고 싶은 주원의 핑계에 불과했다. 사실 주원은 낯선 아르헨티나 어느 산골짜기에서 발견한 연경의 외할머니를 닮은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맥북의 비밀번호는 걸려 있지 않았다. 주원이 문서 프로그램을 열자 꽤 많은 일기와 수필이 쏟아져 나왔다. 짧은 소설도 몇 편 있었고, 시도 꽤 많이 있었다.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지하 도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을까 기대했던 주원은 약간 실망했지만 연경이 글로 써 놓은 지하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콩콰가’가 들어가는 제목의 글은 없었다. 한참을 파일을 열었다 닫은 끝에 찾은 것은 가나다 순으로 거의 끝 항목인 ‘ㅊ’에서였다. ‘치즈와 산사태’라는 글이었다.

 

 

 

 

 

 

 

***

 

 

 

 

 

 

 

소년은 내 외할머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 답지 않게 아시아인의 피가 섞인 얼굴, 솟아 오른 광대뼈, 튀어나온 이마, 짧은 턱선. 하지만 무엇보다 외할머니를 닮은 건 그의 표정이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과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까지, 그는 정말 외할머니의 복사판이었다. 소년은 내 등을 두드리며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마도 울지 말라는 얘기 같았다.

 

다리가 다 나았을 때쯤 나는 이 지하도시의 모든 계단을 걸어다닐 수 있었다. 지하도시의 곳곳에 바위와 언덕이 있어서 걸어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마치 산양의 발이라도 단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밑창이 납작한 가죽신을 신고 척척 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장작을 패고 나뭇가지를 주워 와 땔감을 보충하는 일을 맡은 듯 했다. 비단을 짜는 일이나 음식을 만드는 일처럼 배우는 기간이 길고 익히기 어려운 기술은 여자들이 도맡아 했다. 아마도 남자들은 일찍 죽기 때문에 굳이 그런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소년의 얼굴을 보아 이곳에 혹시 내 어머니가 살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들을 아무리 관찰해봐도 내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다. 이방인은 나 하나였다.

 

여자들은 내가 소년과 장작을 패고 나뭇가지를 주으러 다니는 일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아침에 치즈와 빵을 넣은 주머니로 도시락을 챙겨 주고 저녁이 되어 돌아오면 닭의 뼈로 육수를 내어 만든 스프와 닭고기, 그리고 빵과 요구르트를 줬다. 그들은 나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귀한 손님처럼 극진히 대접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나를 챙겨주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눈치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도 그들처럼 알록달록한 문양으로 짠 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그들과 같은 가죽신을 신었다. 보기에는 불편해 보였지만 신으니까 마치 양말을 신은 것처럼 편안했고, 높은 곳에 올라갈 때도 미끄러지지 않았으며, 뾰족뾰족한 돌들이 튀어 나온 곳에서는 발바닥이 아프지 않았다. 그들이 신발로 만드는 가죽은 소도, 돼지도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마치 라마 같이 생겼지만 라마처럼 털이 복실복실하진 않았다. 내가 우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 동물에게서 짠 젖이었다. 여자들이 동물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내가 올바로 알아 들은 거라면) 그 동물의 이름은 울루미였다.

 

외할머니를 닮은 소년은 나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추알미체흐가 그의 이름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후두음을 많이 써서 특히나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한글로는 도저히 정확히 표기할 수 없지만 비슷하게나마 적어 보는 것이다. ‘추알’이라는 말은 여자들의 가문을 표시하는 성(姓) 같은 것인 듯 했다. 그렇다면 추알코타르와 추알미체흐는 친척인 셈이었다. 나는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가계도를 그린 뒤 나와 어머니와 내 외할머니를 한 데 묶어 여자라고 표시하고 외할머니와 추알미체흐를 가리키며 손짓으로 얼굴이 닮았다고 말했다. 추알미체흐는 씩 웃기만 했다. 이곳 사람들과 다르게 생긴 얼굴을 보면 아마도 외부인이 추알미체흐를 낳은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어디 있냐고 물었고, 그는 잠이 든 시늉을 해 보였다. 아마도 죽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 나는 날짜와 시간 관념을 잃어버렸다. 시계도 없었고,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하루를 5등분으로 나누어 썼고, 숫자 역시 5진법을 썼기 때문에 한동안 나는 셈도 못하는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내가 10진법을 이용한 계산법을 보여 주자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몇몇 호기심이 강한 소녀들은 10진법을 가르쳐 달라며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6이라는 숫자를 적을 때마다 마치 카메라를 처음 본 사람들처럼 호들갑을 떨곤 했다. 그들의 숫자 표기법은 영어의 소문자 m과 비슷한 모양으로 박쥐 날개를 간단히 그린 것으로, 5가 넘어 갈 때마다 박쥐 앞에 사선을 그어 10의 단위를 표시했다.

 

여자들은 내게 자수 놓는 법을 가르쳤다. 이곳의 자수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주로 나비와 꽃, 그리고 일렁이는 촛불을 수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촛불이 마치 식물의 꽃처럼 퍼져 나가는 도안도 있었다. 추알미체르가 멀리 나무를 주으러 가면 나는 여자들과 함께 수를 놓곤 했다. 간단하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자 나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그들은 나의 부정확한 발음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있게 말을 들어 주었다. 그들은 내가 살던 세상에서 여자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내가 그림으로 몇 가지 원피스와 청바지, 스웨터를 그려서 보여주자 그들은 매우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것을 관찰했다.

 

추알미체흐는 풍토병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스물 두 해를 넘겼다. 사람들은 축하하는 의미로 사흘 밤낮 동안 축제를 벌였다. 솥에서는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고,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말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울루미의 창자로 만든 바이올린과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그는 이곳 여자들 누구와도 원하면 언제든지 잘 수 있었다. 건강하게 살아남은 남자인 만큼 최대한 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해야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붙어 다녔지만 그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을 치르기 전날 밤, 그는 나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손짓을 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잠자코 그를 따랐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출입이 금지된 어느 동굴이었다. 그러니까 동굴 속 동굴인 셈이었다.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몹시 추웠고 안은 더 추운 것 같았다. 그는 울루미의 털로 만든 겉옷을 내게 주었다. 나무로 세워 놓은 가리개를 치우고 그는 등불을 든 채 나를 따라 오라고 했다. 입구의 폭은 좁았고 바위는 울퉁불퉁했다. 마치 거대한 조류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온도가 어찌나 낮은지 손이 시려워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그는 가끔씩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느라 뒤를 돌아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어느 넓은 방이었다. 한 가운데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추알미체흐의 행동으로 봐선 아주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사방에 향불을 피워 놓은 흔적이 있었고 진홍색으로 짠 두터운 카펫이 제단 위를 덮고 있었다. 추알미체흐는 제단 앞 계단에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를 하더니 나에게 가보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는 제단 위를 보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반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추알미체흐가 인내심 있게 나를 계속 제단으로 가보라고 했고, 어느새 호기심과 반감이 반반씩 섞여서 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마침내 나는 제단 곁으로 다가갔다. 나와 비슷한 키의 사람이 누워 있었다. 진홍색과 금색으로 짠 옷을 입고 양손은 X자로 교차하여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수분이 빠져서 피부가 검어지거나 말라 비틀어지는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넘어질 뻔 했다. 네모 반듯한 이마와 숱이 많은 눈썹, 가지런한 치아와 살짝 누런 빛을 띠는 피부까지, 내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내 어머니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취재하겠다고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은 내 어머니,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내 어머니가 여기에 누워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 보았다. 어느새 추알미체흐가 내 곁에 와 있었다. 그는 이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있다가 죽었으며 자신은 이렇게 살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외할머니를 닮은 추알미체흐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어머니가 이곳에서 죽어 있단 말인가? 나는 다시금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다. 나는 추운 것도 잊고 가슴 위에 교차 되어 있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갑자기 눈물이 떨어졌다. 처음 한 두 방울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콧물과 범벅이 되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반듯한 이마 위로 내 눈물이 떨어졌다. 추알미체흐는 조심스럽게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나를 떼어내더니 멀리 도망가야 한다는 몸짓을 했다. 아이를 낳지 못한 외부에서 온 여자는 이 부족이 남자의 성인식을 맞을 때 제물로 바친다는 것이었다. 추알미체흐는 그것이 내일이 될 것이며 나는 그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건지,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이곳 생활에 꽤 적응한 상태였고, 정이 가는 친구도 사귀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건 바로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추알미체흐는 동굴 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미끄럽고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며 빨리 걷기란 무척 힘들었다. 추알미체흐는 좁은 동굴 길을 한참을 돌고 돌았다. 갑자기 더운 바람이 확 불어 왔다. 바위를 가늘게 쪼개 놓은 것 같은 틈 사이로 빛이 보였다. 내 눈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적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빛 만으로도 눈이 부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마치 계곡을 흐르는 듯한 물소리가 들렸다. 물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추알미체흐는 나를 곧장 동굴 밖으로 밀어 버렸다.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꼭 감고 바위 아래 흐르고 있는 물 속으로 풍덩 빠졌다.

 

 

 

 

 

*****

 

 

 

 

여기까지가 연경의 글이었다. 그 뒤로 어떻게 계곡을 빠져 나왔는지, 그곳은 대체 정확히 어디인지는 적어놓지 않았다. 연경을 덮친 트럭만 아니었어도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자 무척 아쉬웠다. 연경의 ‘동생’인 추알미체흐는 그 뒤로 무사히 오래 오래 살았을까? 만약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외할머니를 닮았다던 추알미체흐를 생각하며 주원은 맥북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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