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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말실수

2020.03.03 13:3903.03

한줄기 붉은색 광선이 날아들었다.

 

그 광선은 스티븐의 갈색 머리 끝자락을 조금 태우고서 벽에 부딪혀 시커먼 그을음을 남겼다. 몇 줄기의 광선이 그 뒤를 이어 벽에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흔적을 남겼다.

스티븐은 자신의 사지를 향해 날아오는 광선을 겨우 막아내고 있는 철제 상자 뒤에서 몸을 숙이고서 자신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한 여자에게 외쳤다.

 

"진! 탄창이 비었어!"

 

진은 허리춤에 꼽혀 있는 작은 캡슐을 던졌고 스티븐은 자신이 들고 있는 블래스터에 캡슐을 집어넣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광선이 멎어들자 스티븐은 상자 옆으로 몸을 기울여 블래스터를 쏘아댔다.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접근하고 있던 병사 몇몇이 사정거리는 짧지만 파괴력이 뛰어난 지근거리용 블래스터가 내뿜는 플라즈마화 된 탄환을 맞고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상자 밖으로 몸을 내민 스티븐을 보고서 다른 병사가 총을 겨냥했지만 이번에는 진이 쏜 탄환이 그 병사를 무력화시켰다. 자욱한 연기와 함께 목숨을 건 이 대치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두 사람을 향해 광선이 날아들었다. 사방에 불꽃이 튀고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진은 스티븐을 향해 외쳤다.

 

"스티븐, 더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아요!"

 

"뭐라고?"

 

스티븐이 얼굴 주변에서 휘날리는 불꽃 때문에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진을 향해 되물었다.

 

"더 버티기 어렵다고요!"

 

"구조대는 언제 온다고 그래?"

 

진은 총을 들지 않은 팔을 들어 손목에 위치한 작은 스크린을 확인하고 다시 외쳤다.

 

"8분 남았어요!"

 

"뭐라고?"

 

스티븐이 되묻자 진은 더 큰 소리로 대답했다.

 

"8분!!!"

 

"그럼 그게 시체 처리반이지 구조대가 아니잖아!"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리게 생겼나요?"

 

"젠..."

 

스티븐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고열의 광선이 그의 오른쪽 귓가를 지나서 그의 등 뒤에 폭죽 같은 붉은색 불꽃을 뿌렸다. 스티븐은 균형을 잃고서 바닥에 쓰러졌다.

 

"스티븐!"

 

그에게 뛰어가려는 진은 스티븐이 벌떡 일어나서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보이자 다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난 괜찮아, 그 자리에 있어!"

 

스티븐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귀는 붉게 물들었고 피가 끈적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광선이 멎고 점점 피치가 올라가는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스티븐과 진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상자 위쪽으로 몸을 일으켜 전방을 바라보았다. 30미터 전방에는 성인 한 뼘 정도 되는 구경의 대형 블래스터 포가 예열을 마치고 있었다.

 

예열이 끝나자마자 블래스터 포는 시뻘건 플라즈마화 된 포탄을 쏘아냈다. 개인용 광선총의 화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포탄은 순식간에 스티븐과 진이 숨어 있는 철제 상자 앞으로 날아들었다. 철제 상자는 그 자리에서 증발하다시피 했고 철제 상자 뒤에 있던 콘크리트 벽에는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구멍이 생겼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기가 걷히자 광선총을 든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포탄이 만들어 낸 상흔에 접근했다. 순간, 구멍 너머에서 날아든 광선에 병사들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구멍 안에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구체 안에서 스티븐과 진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물리적인 충격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해 주는 푸른색 보호막은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휴대용 보호막 가동장치를 챙기길 잘했군."

 

"제가 가져가자고 그랬잖아요."

 

"잘했어. 그런데 그건 잘 챙겼지?"

 

스티븐의 말에 진은 허리에 메인 작은 가방을 열고 작은 금속통을 꺼냈다. 금속통 한쪽 귀퉁이가 찌그러져 있는 것을 보자 두 사람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진은 재빨리 금속통 뚜껑을 열고서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올렸다. 진의 손바닥 위에 놓인 영롱한 빛으로 빛나는 작은 칩. 이 칩 속에는 행정, 치안, 물류, 소방 등 도시의 기능을 자동화 할 수 있는 AI 모듈, 일명 "황금 왕좌"가 담겨 있었다.

칩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두 사람은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복도를 내달렸다.

 

두 사람은 해치를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살을 에는 것 같은 추위와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이리저리 떠밀었다. 스티븐과 진은 몸을 낮추고 주변에 있는 금속형 돌기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 돌기는 해치 주변의 강철판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그 강철판은 다른 강철 구조물과 서로 연결되어서 푸른 하늘에 거무튀튀하고 인공적인 선을 불길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수천 톤의 강철 전함. 두 사람은 바로 그 전함의 간판 위에 서 있었다. 진은 손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앞으로 3분."

 

스티븐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구조대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눈을 시리게 만드는 창백한 푸른 하늘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진, 조심해!"

 

스티븐의 고함소리에 진은 몸을 바짝 엎드렸고 광선 몇 줄기가 진의 머리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철 갑판 너머에서 거무스름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스티븐의 블래스터가 불을 뿜었지만 그 형체는 플라즈마 탄을 맞고도 잠시 주춤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 형체 뒤쪽에 비슷한 형체가 몇 더 나타나더니 느릿느릿 스티븐과 진 쪽으로 다가오며 손에 든 광선총을 난사했다.

 

스티븐과 진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블래스터로는 저 방어막 발생장치가 장착된 갑옷을 무력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스티븐은 재빨리 해치 뚜껑을 세우고 그 뒤에 진과 함께 숨었다. 광선이 날아들어 해치 뚜껑을 때리며 그 주위로 무수한 불꽃과 유독한 가스를 만들어냈다. 스티븐과 진은 해치 뚜껑이 다시 닫히지 않게 몸으로 버텨내고 있었지만 고열의 광선을 두들겨 맞는 해치 뚜껑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광선총과 세찬 바람, 그리고 공중 전함의 엔진이 만들어내는 소음 때문에 서로 등을 마주대고 있는 스티븐과 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은 목청껏 스티븐에게 소리쳤다.

 

"1분! 그쪽에 뭐 보이나요?"

 

"뭐라고?"

 

스티븐도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지만 진에게는 작은 소리로만 전달될 뿐이었다. 진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뭐 보이냐고요!"

 

"나도 사랑해!"

 

쥐어짜듯 외친 스티븐의 말이 진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이 잘못 얘기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스티븐의 말을 잘못 들은 건지 헷갈렸다. 아니면 스티븐이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인가? 스티븐과 자신이 혹독한 훈련과 어려운 임무를 헤쳐나간 좋은 동료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은 스티븐이 더 잘 알 것이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라도 수행해내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진은 다시 외쳤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스티븐은 자신의 말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대꾸가 없었다. 진은 몸을 돌려서 스티븐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몸을 잘못 움직였다가는 해치 뚜껑 바깥쪽으로 몸이 노출될 것이 뻔했다.

 

그 순간, 진과 스티븐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전신을 감싸는 무광택의 갑옷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의 보호막이 번쩍이고 있었다. 중무장한 병사는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총구를 들이댔다. 스티븐은 상대를 향해 블래스터를 쏘아댔지만,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의 시도는 족족 갑옷을 보호하는 보호막에 막혀서 불꽃이 되어 사그라졌다.

 

총구가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진은 광선이 자신의 세포를 불태우며 연약한 신체를 꿰뚫었을 때 자신의 신경계가 느낄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될지 보다 방금 전 스티븐이 자신의 말을 뭐라고 이해했길래 갑자기 그런 엉뚱한 말을 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지척에서 그녀는 몸을 돌려 스티븐을 보고 다시 물어보고 싶어 졌다.

 

자신을 향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줄곧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에게 무엇이라 말했는지.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무슨 표정이었는지.

 

무수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진의 얼굴을 다양한 표정으로 스쳐 지나간 그 찰나의 순간에 갑자기 자신을 향해 총을 쏘려던 병사의 몸이 흐릿해 보이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주변에 있던 다른 병사들은 일제히 총구를 하늘을 향해 광선을 날리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마름모꼴의 커다란 비행체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급박한 순간에 도착한 구조대가 스티븐과 진을 위협하던 병사들을 처리하고 두 사람을 구출해내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설치한 폭탄이 작동하자 공중 전함은 힘을 잃고서 천천히 지상을 향해 추락해갔다.

 

"고생 많았습니다, 스티븐 소령."

 

구조대의 수송선 뒷자리에 침낭을 뒤집어쓰고 있는 스티븐에게 중무장을 한 소대장이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표했다. 스티븐은 자신의 옆에서 두터운 잠바를 걸치고 있는 진에게 커피를 건넸다. 진은 말없이 커피잔을 받고 두 손 사이에 끼고서는 가만히 온기를 느꼈다. 스티븐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시지 않는 진을 몇 번 흘낏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들었어?"

 

스티븐의 말에도 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구조대 병사들은 앞쪽에 앉아서 소대장이 덜컹거리는 수송선의 소음을 뚫고서 악을 쓰며 외치는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A 루트는 제공권이 미확보되었기 때문에 B 루트로 향한다! 도착하는 대로 알파 분대와 브라보 분대가 들어가서 그 젠장맞을 기지를 확보한다! 알아들었나?"

 

"아이 아이 써!"

 

병사들도 소대장보다 더 크게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는 듯 목청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자신이 한 말에는 깊은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다는 듯이 짐짓 무심한 투로 소대장과 병사들의 모습을 보던 스티븐은 다시 진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까 진이 나한테 구조대가 보이냐고 물어본 것 같은데 말이야."

 

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입을 일자로 다물고서 허공을 보며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스티븐은 깊게 한숨을 쉬고서 말을 이었다.

 

"진, 아마 내가 말실수..."

 

"스티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차분한 진의 목소리에 스티븐은 고개를 돌려 진을 쳐다보았다.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진을 보자 스티븐은 아뿔싸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수년간 꾹꾹 눌러온 감정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갑자기 터져 나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스티븐은 다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건 실수다. 적절하지 못한 때에 적절하지 못한 말을 한 자신의 실수. 그렇기 때문에 진이 뭐라고 말을 하던 실수였다고 인정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은 그런 스티븐의 생각을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그런 얘기는 다음부터는 듣기 쉬운 조용한 곳에서 해줘요."

 

말을 마치면서 진은 부드럽게 손을 뻗어 잔수염이 거칠한 스티븐의 빰을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수송선 앞쪽에서 브리핑을 하는 소대장의 목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주선을 확보한 뒤에 이 빌어먹을 행성에서 탈출하는 게 계획이다! 알아들었나? 힐끗힐끗 뒤돌아보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라, 이 망할 놈들아!"

 

"아이 아이 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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