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아스테로이드 파업

2019.05.03 16:4905.03

 

 

“We need more time to rest. We need a schedule that is not so packed. We don’t want to exercise after a meal. We need to get things under control.”

“우리는 휴식 시간이 더 필요하다. 우리는 지나치게 빡빡하지 않은 계획이 필요하다. 우리는 식사 직후에 운동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 1973. 12. 28. 스카이랩 정거장에서 발생한 최초의 우주파업의 기록 中

 

 

-1-

 

“잠시 후 우리 여객선은 왜행성 세레스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착을 알리는 승무원 로봇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손을 더듬어 안전벨트를 찾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세레스까지 대략 한 달. 장기간의 저온 수면 때문인지 마취된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했다.

  천장에 설치된 스크린에 세레스 정거장의 소개 영상이 재생되었다. 지상 700km 상공의 정지궤도(Geostationary Orbit)에 건설된 정거장은 마치 얇은 은반지를 여러 겹 포개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링 모양의 구조물들이 자이로스코프처럼 회전하며 인공 중력을 생성하는 모습이 화려한 그래픽으로 그려졌다. 그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영상에 멍하니 빠져들었다.

  상주 인력 10만 명. 아스테로이드 벨트의 물류가 집결하는 허브. 사통팔달 성간 교통의 중심. 외행성 개척의 최전선. 화성과 목성의 가교. 정거장을 꾸미는 온갖 화려한 수식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울 즈음, 갑자기 화면이 일그러지며 귀를 찢는 소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멍청한 지구 새끼들! 세레스행 객선을 안쪽에 끼워놨네.

  본래라면 들리지 말았어야 할 무전이었다. 거친 말투에 놀란 승객들이 조금씩 웅성거렸다. 승무원 로봇은 그들을 진정시키려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안심하십시오, 고객님. 객선을 분리하는 작업자분들의 무선이 잠시 혼선된 것뿐입니다. 저희 성간교통공사는 언제나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4773, 4773, 정거장 이탈까지 4분 30초 남았습니다. 수송팀, 듣고 있어요? 시간 안에 분리작업 완료 하셔야 합니다. 세레스 관제실 이상.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4773은 지금 타고 있는 우주선의 고유번호였다. 승객들이 더 크게 웅성거렸다. 성간교통망(Interplanetary Express Line)을 달리는 우주선들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한번 감속하게 되면 다시 표준속도로 회복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제이가 타고 있는 여객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4분 30초 후엔 객선 분리가 이루어지건 말건 우주선은 정해진 스케줄대로 정거장을 이탈해 목성으로 나아갈 터였다.

  —진짜 양심도 없네. 동시에 세 대를 들여보내놓고 정시에 내보내라고? 반장님, 이번 거는 진짜 너무하는거 아니에요?

  —지금 그거 따져서 뭐할 건데? 그런다고 우주선이 멈추냐? 진수랑 민철이는 나랑 같이 객선 떼자. 현민이는 후부로 가서 후딱 화물선부터 끊고.

  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침묵. 잠시 후 객선 내부가 작게 출렁였다.

  —반장님. 화물선들은 분리 완료했습니다.

  —오케이.

  기다란 객선의 앞쪽과 뒤쪽에서 각각 쿵, 하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엑소수트를 입은 작업자들이 객선 위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자, 이제 객선 분리한다. 다른 칸 안건드리게 조심해서 앞 뒤 한번에… 어?

  금속이 불쾌하게 긁히는 소리가 나며 객선이 거세게 흔들렸다. 충격 때문에 군데 군데 선반이 열리며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래에 앉아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머리를 얻어맞고 소리를 질렀다.

  —반장님! 이거 분리가 안되는데요.

  —4773 우주선. 서두르세요. 이탈 30초 남았습니다. 29, 28…

  —연결기가 얼어서 그래. 발로 한번 차 봐.

  쾅. 쾅. 실감나는 충격음이 그대로 선내에 전해졌다. 작업자가 발로 찰 때마다 객선 내부가 거칠게 요동쳤다. 참다못한 승객 한 사람이 일어나 물었다.

  “저기, 승무원아. 지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네. 완벽하게 안전합니다. 유능한 수송원 분들이…”

  “유능은 개뿔이! 10초도 안남았구만. 이대로 목성까지 가기만 해봐! 내가 진짜 가만 안 둘…”

  그 순간 객선이 또 한번 거칠게 흔들렸다. 따지던 승객은 충격때문에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4773. 작업완료. 이탈하세요.

  반장의 목소리였다. 겨우 객선이 분리된 모양이었다.

  어쨌건 도착하긴 했네. 제이는 차분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흥분한 사람들이 죄 없는 로봇에게 몰려가 거세게 항의했지만 로봇은 표정 없는 얼굴로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제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중력이 없는 탓에 넥타이 끝이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넥타이핀도 하나 챙겨올걸. 뒤늦게 후회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선이 세레스 정거장에 도킹했다.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승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터미널 내부로 들어선 그는 창 밖을 보았다. 정말 사용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찌그러진 구형 객선 하나가 승강장에 매달려 있었다. 관짝이나 다름없는 깡통 속에 한 달 넘게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객선을 정리하는 청소 노동자들의 등에 빨간 포스터가 부착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멈추면 우주가 멈춘다!

 

  그 유명한 문구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세레스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합실에 성간교통공사 직원 한사람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녀가 악수를 청하며 표준어로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변호사님. 지아 첸 과장입니다.”

  “제이든 송 입니다.”

  제이는 상대의 손을 맞잡으며 답했다.

  “조합측은 이미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거장? 교섭은 지상에서 하기로 했잖습니까.”

  그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정거장까지만 내려가실 수 있습니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요. 지상행 엘리베이터 이용은 승인 절차가 복잡합니다. 정거장과 시티 양측이 정확히 동일한 질량을 주고받아야 하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작용반작용 때문에요.”

  상대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차가웠다. 입장상 사측에 서 있긴 했지만 그녀도 결국 아스테로이드 출신이었다. 지상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추측이 갔다. 작업자로 가득 찬 정거장이야말로 그들의 홈그라운드였으니까.

  그래, 나 빼고 다 한통속이라 이거지?

  그는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원도 말없이 그를 이동용 캡슐에 탑승시켰다. 케이블카처럼 궤도 엘리베이터에 매달려 아래로 이동하던 캡슐은 중간 지점에서 방향을 꺾어 거대한 링 구조물의 외벽을 따라 가속을 시작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점차 중력이 더해졌다. 오랜 기간 우주선을 타고 있었던 탓인지 몸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갑자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태양빛이 쏟아졌다. 제이는 깜짝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태양에 노출되어도 괜찮은 겁니까? 피폭 위험은 없나요?”

  “네. 정거장 근처는 안전합니다. 궤도 엘리베이터가 거대한 전자석 역할을 하거든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창밖을 보았다. 멀리 새하얀 구조물 위로 차가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제발 이게 세레스에서 맞이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출이기를.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얼마 후 캡슐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머리 위쪽 천장이 열리며 사다리가 내려왔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중력구역 바닥이었다.

  “교섭장은 바로 근처입니다.”

  직원이 말했다. 좁은 통로 끝에 문이 하나 보였다. 7번 소회의실. 낡은 명패 아래로 빈 종이에 ‘성간교통공사 아스테로이드 분과 실무교섭’이라고 커다랗게 손글씨가 쓰여있었다.

  이제 일할 시간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고쳐맨 다음 관자놀이 부근의 감정 절제 스위치를 켰다.

 

 

-2-

 

  간교통공사가 아리온 정거장을 민영화하려 한다는 소문은 단 하루 만에 태양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소식을 접한 조합 측이 곧바로 해명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정책적 검토사항이라는 애매한 답변만 반복할 뿐이었다. 대치가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결국 아스테로이드 지부가 파업을 예고했다. 기장들, 수송원들, 정비사와 유지보수 인력들, 심지어 청소 노동자들까지. 아스테로이드 노동자의 80%가 파업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회사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응에 나섰다.

  파업 여론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아스테로이드 지부장인 ‘유진 문 메그레즈 코델리아-37’ 이었다. 그는 조합 내의 강경파 중에서도 최고의 강경파로 손꼽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노동자 천국이라 불리는 천왕성 출신이었으니까. 지상에 처음 내려오신 도련님께 아스테로이드의 참상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광경이었겠지. 제이는 맞은편에 앉은 상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사측에서는 겨우 한 분, 그것도 파견 변호사만 참석하신다고요?”

  지부장이 그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음성변조 기능이 있는 여우 모양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옆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도, 출입문을 지키는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가면을 쓰고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제이는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 법무법인 화웅은 성간교통공사의 공식적인 법률 파트너로서, 교섭 대리인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면은 말없이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았다.

  “뭐, 좋습니다.”

  지부장은 명함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다음 태블릿을 내밀었다. 조합의 요구사항이 적힌 목록이었다. 제이는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목록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저희 지부의 요구사항은 이렇습니다. 1번. 올해 임금 인상분은 100퍼센트 정액으로 한다. 2번. 명절 상여금은…”

  “매년 하는 이야기는 건너뛰시죠. 시간도 부족한데.”

  가면은 또 다시 침묵했다.

  “…좋습니다. 그럼 38번 부터. 대수송기간에 물량을 처리할 인력이 부족합니다. 수송원과 동력선 운전원을 합쳐 최소 오백 오십 명 증원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얼마나 급박한 상황에서 일을 하는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지는 방금 전에 직접 경험하셨으니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능청스럽게 받아칠 타이밍이었다. 제이는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며 편안한 포즈를 취했다.

  “네. 연기 좋던데요. 아주 박진감 넘쳤어요. 작업하는데 걸린 시간을 재어봤더니 4분이 넘더라고요. 숙련된 수송원들이라면 객선 분리하는데 1분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아, 맞다. 연결기가 얼었다고 하시던데. 우주에서도 서리가 생기나보죠?”

  상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황하는 반응이 온 몸으로 드러났다. 가면 속 표정도 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설펐다. 이상할 정도로 어설펐다.

  “작업량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정거장 주변 정지궤도에 떠 있는 물량만 10억 톤이에요. 화물선이 20만개가 넘는다고요. 우리 직원들이 이걸 두 달 안에 전부 지구로 실어 보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우주선이 정거장을 지나는지 상상이 되십니까? 하루에 스무시간씩 꼬박 일해야 겨우 물량을 맞출 수 있어요. 안전선을 연결할 시간도 없어서 우주 공간을 점프하듯이 날아다녀야 하고요. 우주선은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아요. 속도를 맞춰야 하는 건 언제나 우리 직원들이죠.”

  속절없이 쏟아지는 말속에서 상대의 원래 말투가 조금씩 섞여 튀어나왔다. 제이는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인력 충원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그럼 39번. 노후화된 안전장비에 대해서…”

  제이는 한숨을 쉬었다.

  “요구사항이 137번까지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하나씩 다 말씀하실 건가요? 서면 답변으로 끝낼 수 있는 사안들도 많을 텐데요.”

  “전부 확인해주셔야 합니다. 사측에서 저희 요구에 제대로 답변하신 적이 없으니까요.”

  “전부 받아들이겠습니다.”

  “뭐라고요?”

  상대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조합 측 요구 대부분을 사측이 동의했어요. 안전장비 교체, 트로이 소행성대 1인 근무자 장기 파견 금지, 해고자 복직까지 전부 여러분들 요구사항 그대로 수정 없이 합의문에 들어갈 겁니다. 복지 관련 요구사항들은 세부적인 금액에 이견이 있지만 실무진 사이에서 의견이 접근 중인걸로 압니다.”

  “전부 들어준다고요? 10년 동안 한 번도 들어준 적 없는 요구사항들을요?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요. 저는 교섭 대리인으로서 사측 의견을 전달할 뿐입니다. 개인적인 조언을 드리자면 이번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양보하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제이는 태블릿을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럼, 남은 안건은 하나죠. 어차피 제가 여기까지 온 것도 이것 때문이고요.”

  상대도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곧게 펴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진짜 요구사항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137번. 사측은 아리온 정거장의 민영화 계획을 철회하십시오.”

  “불가합니다. 사업 매각 여부는 조합측에서 관여할 수 없는 사항이에요. 법적으로 명백한 경영권 침해입니다.”

  쾅.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책상을 내려쳤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지부장이 팔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듯했다. 옆사람 대신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요구할 수 있어요. 우리 처우와 연관된 문제라면.”

  “설명해보시죠.”

  “아스테로이드 벨트 내에서 운행 중인 지역노선들은 대부분 적자상태예요. 공익을 위해 적자를 감수하고 운행하는 거죠. 성간교통공사가 이 적자를 어떻게 메꾸는지 아십니까? 목성이에요. 목성행 장거리노선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아스테로이드 교통망이 유지되고 있는 거라고요.”

  “그게 아리온 매각과 무슨 상관입니까?”

  “아리온 정거장은 세레스의 외합지점(태양을 기준으로 정 반대편)에 건설되고 있어요. 장기적으로 목성행 노선 절반을 나눠 갖게 될 거라는 뜻이죠. 아리온을 잃게 되면 성간교통공사는 적자로 돌아서게 될 거고, 대대적인 감축이 불가피해요. 그중에서도 아스테로이드가 가장 큰 피해를 보게될 거고요.”

  “지나친 걱정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민간교통기관 출범 시 오히려 성간교통공사의 수익이 개선될 거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경쟁 때문에 두 기관이 오히려 더 많은 우주선을 투입하게 될 거라고요.”

  “경쟁이라고요?”

  경쟁이라는 단어에 상대는 코웃음을 쳤다.

  “성간교통에 대해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우주에선 경쟁이 불가능해요. 시간과 비용이 전부니까. 우주선은 그저 가까운 루트를 택할 뿐이라고요. 세레스와 아리온 둘 중 하나는 태양 반대편에 있는데, 거기까지 무슨 수로 찾아온다는 건가요?”

  상대는 기술적인 이야기를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더 이상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제이는 대화를 중단시켰다.

  “조합 측에서 이 문제를 계속 붙잡고 늘어진다면, 사측은 기존에 동의한 요구 조건들도 다시 거부할 겁니다. 챙길 수 있을 때 챙기세요. 더 큰 포도가 나오길 기대하면서 걷다 보면 금세 농장 끝까지 가버리고 말 겁니다.”

  “137번은 포기 못 합니다.”

  상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는 수밖에. 제이는 상대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지부장님. 당신 대체 누굽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

  “유진 메그레즈 씨의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9개월 전에 이미 천왕성으로 떠났더군요. 당신은 대체 누구죠?”

  조합측 인원들이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국 지부장은 한숨을 쉬며 가면을 벗었다. 가면 속에 감춰진 얼굴은 역시나 그녀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마주하게 되니 어이가 없었다.

  “한세경 씨. 당신은 이제 교통공사 직원도 아니잖습니까.”

  제이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해고자야. 간부 자격 있어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변호사님.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이건 뭘 주고 받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거거든.”

  세경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교섭은 무효입니다. 당신은 명단에 없는 사람이니까요. 다음 번엔 제대로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참석하세요.”

  제이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경도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권했다. 하지만 제이는 그녀를 무시한 채 교섭장을 빠져나왔다.

  텅 빈 캡슐에 앉자마자 감정 절제 스위치를 해제했다. 억눌려있던 죄책감이 한번에 가슴으로 쏟아졌다. 캡슐이 궤도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긴 시간 내내 제이는 큰 소리로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아무리 흘려도 속이 깨끗해지지 않았다.

  터미널에 도착할 즈음에야 겨우 감정이 가라앉았다. 휴대전화에 팀장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교섭 결과 확인 완료. 굿. 잘했음. 다음 교섭 때까지 세레스에서 대기하세요.

  새로운 교섭 팀이 지구에서 지시받고 출발하는 거 아니었어? 그는 대합실 구석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

  —언제까지 대기합니까? 선전포고만 하면 된다면서요.

  30분이 지나서야 답장이 돌아왔다.

  —상황이 바뀌었어. 유진이 없으면 조합도 파업까진 못 갈 것임. 민영화 확정시까지 교섭 반복하면서 최대한 시간 끌 것.

  빌어먹을. 한세경 얼굴을 매일 쳐다보라고? 그는 전화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 * *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교섭은 계속되었다. 제이는 매일 좁아터진 7번 소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한세경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때마다 조합은 민영화 철회를 요구했고, 사측은 거부했다. 한세경은 그를 바라보며 웃었고, 제이는 교섭이 끝날 때마다 죄책감을 되새겨야 했다. 그렇게 의미 없이 두 달이 흘렀다. 어느덧 아리온 정거장은 완공 직전이었다. 평행선을 달리던 노사 간 교섭은 결국 최종 결렬되었다.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이미 지구행 발사창이 닫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구와 세레스가 근접하는 약 두 달간의 회합기간이 지나면 성간 우주선의 운행 거리가 길어져 운임이 1000배 가까이 비싸졌다. 하지만 회사는 제이에게 비싼 운임을 지급할 마음이 없었다.

  —제이든 송 변호사님과의 근로계약을 일시 정지합니다.

  법무 법인은 냉정하게도 그에게 계약 정지를 통보했다.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었다. 지구와의 다음 회합주기까지 350일. 그는 적진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했다.

  제이는 곧장 지상으로 내려와 사무실을 얻었다. 세레스 시티(Ceres City)에서 그가 가진 저축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이라곤 1/3중력의 3평짜리 고층 오피스텔이 전부였다. 수면캡슐 하나 추가로 얻을 여유도 없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업무와 숙식까지 모두 해결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레스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가 의지할 곳이라곤 성간교통공사의 직원들 뿐이었다. 그는 교통공사 직원들을 상대로 법률 상담을 시작했다. 처음엔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지만, 몇몇 직원들의 떼인 임금을 받아내는데 성공한 뒤로는 조금씩 괜찮은 소문이 돌면서 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큰 수입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1년간 먹고 살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그는 직원들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 * *

 

  그 즈음, 한세경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제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황급히 감정 절제 스위치의 전원을 켰다.

  “변호사님. 내가 개업 축하가 좀 늦었네.”

  세경은 조그만 축하떡 세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저 아직 사측 대리인입니다. 이거 못 받는 거 아시잖아요.”

  “응. 내가 먹을 거야. 감상만 하세요.”

  그녀는 능청스럽게 포장을 뜯어 꿀떡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러곤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빨면서 물었다.

  “어때요? 회사에 뒤통수 한 번 맞아보니까.”

  “별로 기분이 좋진 않네요.”

  “장사는 잘돼요?”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는요.”

  “우리 직원들에게 손을 내밀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고마워요. 도움받았다는 직원들이 많아요.”

  “달리 방법이 없었을 뿐입니다.”

  “방법이 없다고요? 변호사님처럼 유능한 분이? 설마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었다.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위험과 피로로 가득 찬 우주에서 이렇게 활기찬 표정을 마주할 기회는 드물었다.

  “첫날. 교섭장에서 엄청 긴장하시더군요. 본인답지 않게.”

  그가 말했다.

  “응. 남자처럼 보이려고 맞지도 않는 옷을 입었더니 엄청 불편했어.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오픈할 걸 그랬네요. 그랬으면 협상이 좀 더 쉬웠을 텐데.”

  “그랬다면 제가 세레스에 오는 일도 없었겠죠.”

  세경은 두 개째 집어 든 떡을 다시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호르몬이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변호사님. 솔직히 나한테 좀 미안하지?”

  그녀가 아픈 곳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평생 이렇게 직접 얼굴 보게될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직접 보게 되니까 좀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런다 그지?”

  그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괜찮아요. 너무 그렇게 미안해 하지 마. 어차피 정년도 얼마 안남았었는데 뭘.”

  그녀가 떡을 하나 내밀었다. 제이는 한참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니 아니.”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앞으로 가져갔다. 입 안으로 떡 하나가 쏙 들어왔다. 세경은 또 한번 활짝 웃었다.

  “…요즘은 잘 지내세요?”

  그가 물었다.

  “응. 자청비 크레이터에 꽃감관으로 취직했어. 꽤 보람있는 업무야. 이런 삭막한 소행성에도 꽃이 많이 필요하거든. 사랑도 해야 하고, 축하도 해야 하고, 장례도 많고.”

  한때 태양계 교통망을 총괄하던 사람이 지금은 꽃이나 기르는 농부라니. 제이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또 한번 깨달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러자 세경은 손사래를 쳤다.

  “너무 그러지 마. 변호사님은 평생 열심히만 살다보니 적당히 일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뿐이야. 앞으로 개과천선하면 돼.”

  그녀는 웃으며 아픈 곳을 계속 찔러댔다. 그는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유진 메그레즈 씨는 왜 천왕성으로 돌아간 겁니까?”

  유진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 그 씹새끼?”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의외였다. 이렇게 화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니. 그녀는 하얀 곱슬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 이야길 하려면 아무래도 술이 좀 필요하겠는데…”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와인 한병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3-

 

  “그런 다이아(운행계획)는 못 그린다니까요.”

  세경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CEO 지시야. 그것도 취임 첫 지시. 이거 ‘위’에서 오더받고 온 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적자 노선을 한방에 50%나 감축해요.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 절반이 잘릴 텐데, 저보고 그 원망 다 감당하라고요?

  “그럼 어떡해. 다들 이 정도 운행계획 짤 수 있는 사람은 한 차장뿐이라는데.”

  “아, 몰라요. 부장님이 배워서 하시던지.”

  “세경 씨, 진짜 나랑 한번 해보자 이거야?”

  부장이 책상을 내려치며 고함질렀다. 그녀는 보란 듯이 컴퓨터에서 마우스를 뽑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래 한번 맘대로 해보시지.

  그러자 반나절 만에 아스테로이드 벨트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누가 봐도 명백한 보복 인사. 최은희CEO가 직접 내린 결정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위에서 내려온 오더라더니, 이번엔 정말 높은 곳에서 내려온 모양이었다. 30년을 쌓아 올린 커리어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날아갈 수 있다니. 세경은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세레스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출근 시간에 맞춰 선외활동복을 입고,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다 퇴근 시간이 되면 방에 틀어박혀 빈 맥주캔을 쌓을 뿐.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고, 아무 일도 꾸미지 않았다. 무언가를 이루는 삶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차분히, 무의미한 시간을 빼곡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즈음이었다. 유진이라는 이름의 새파란 신입사원이 그녀를 찾아온 것은.

  “제가 도울게요.”

  그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그녀는 쌓인 숙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뭘요?”

  “복수하시는거요. 회사에.”

  “회사에 복수한다고 누가 그래요?”

  “그럼 이대로 포기하시게요?”

  그녀를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거절했다간 부스러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얼떨결에 그를 방 안으로 들이고 말았다.

  “어떻게 도울 건데요?”

  그녀는 상대에게 맥주캔을 건네며 물었다. 그는 캔을 받아 들더니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맥주 정말 반갑네요. 여기 분들은 다들 와인만 드시던데.”

  “…지구 토박이라 그래.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어떻게 도울 건데요?”

  “공식적으로 요구해야죠. 노조를 통해서요.”

  그녀는 이마를 감싸쥐며 한숨을 쉬었다.

  “아스테로이드에 노조가 없다는건 알고 있죠?”

  “네. 지부를 새로 조직할 겁니다.”

  “아하.”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우면 왜 지금까지 없었겠어.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최악의 환경이란 건 인정해요.” 유진도 맥주를 한모금 삼켰다. “소행성마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데다, 직접 찾아갈 방법도 없고, 절반은 태양 너머에 있어서 실시간 통화도 불가능하고.”

  “공부 많이 하셨네.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해요?”

  “방법은 있어요.”

  그녀는 맥주를 삼키며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대체 뭘 믿고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뭐, 맘대로 하시는 건 자유니까.”

  그녀의 대답을 들은 유진은 웃음꽃이 핀 얼굴로 그녀의 방을 떠났다. 하지만 세경은 그에게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철없는 마음에 사내 메일로 메시지나 몇 번 끄적이다 그만두겠지. 겨우 그 정도 기대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 착각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천재였다. 그는 그녀가 평생 생각조차 못 할 방식으로 사람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업무용 통신주파수에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얹어 완전한 익명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 시스템을 구축했다. 시스템은 직원들에게 어떠한 인증도 요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름조차 필요 없었다. 어차피 업무용 주파수를 사용하는 건 직원뿐이었고, 단말기도 1인당 하나씩밖에 지급되지 않았으니까.

  완전한 익명성이 보장되자 가입을 망설이던 직원들이 순식간에 조합으로 몰려들었다. 불과 한 달 만에 3만 명. 유진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태블릿 하나로 그 많은 사람들을 조직해낸 것이었다.

  —이건 정말 천왕성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에요.

  유진은 타고난 리더이기도 했다. 어느샌가 그는 사람들을 채팅방에 모아놓고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부당노동행위예요. 이건 법적으로 이렇게 되어야 맞는 거잖아요. 그가 한마디 한마디를 던질 때마다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분노했다. 어느새 유진은 아스테로이드 지부의 지부장이 되어 있었다. 세경은 그를 돕기 위해 조합 간부로 자원했다. 둘 뿐인 집행부였다.

  그들은 아스테로이드 지부의 존재를 회사에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생각지도 못한 조합 결성 소식에 사측은 적잖이 당황한듯했다. 유진은 그 혼란을 영리하게 이용해 회사로부터 많은 것들을 얻어냈다. 조합원들의 휴식시간. 위험수당과 응급용품. 작게는 휴게실 소파 교체까지. 그가 작은 승리를 하나 거둘 때마다 새로운 가입자가 수만 명씩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테로이드 지부는 성간교통공사 내의 노동조합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유진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사측에 요구하는 요구사항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세경은 그가 너무 앞서나가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녀는 매번 그를 말려야 했다.

  “겨우 이걸로 되겠어요? 승리가 코앞인데 더 가야죠.”

  “지부장님. 이건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니까. 사측에도 적당히 퇴로를 열여 줘야지. 조만간 임단협 기간인데 너무 몰아세우다간 얻을 것도 못 얻게 돼.”

  “최은희CEO에게 사과를 받아내야죠. 그래야 우리가 이기는 거예요.”

  “굳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이제 그만 해.”

  “아뇨. 제가 왜 이걸 시작했는데요. 다 세경 씨 때문이에요. 세경 씨 도우려고 여기 취직한 거란 말이에요.”

  그가 기묘한 이야기를 했다. 나 때문에 취직하다니? 혼란스러웠다. 세경은 그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 천천히 되물었다.

  “방금 그거, 무슨 말이야?”

  “위장취업이요. 당신을 도우려면 내부에서 조합을 조직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미쳤어? 지부장님이 날 왜 도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녀의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유진은 밀리지 않고 꿋꿋이 맞섰다.

  “이야기 들었어요. 아직까지 지구-천왕성 노선이 유지되고 있는 거, 전부 세경 씨 희생 덕분이라고요. 본사에서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도 다 알아요. 우리 천왕성 사람들에게 당신은 고립을 막은 영웅이에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많이 각색된 소설이야.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아뇨. 당신은 그런 사람이 맞아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압니다.”

  “아무튼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위장취업이었다니 차라리 잘됐네. 다시 천왕성으로 돌아가. 회사가 본격적으로 유진 씨 괴롭히기 전에.”

  “싫어요.”

  망할 운동가 놈들은 왜 원치도 않는 사람을 멋대로 돕겠다며 설치는 거야?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리 설득해도 유진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세경을 도우려 나섰다. 그는 매일 같이 채팅방에서 세경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노선 감축을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측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도. 하나같이 실제와는 동떨어진 과장된 이야기였다. 유진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진이 노선 감축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걱정처럼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최은희CEO가 노조 파괴 전문가들인 ‘법무법인 화웅’을 끌어들인 것이다.

  화웅의 Q-P 전략팀은 순식간에 조합원들을 몰아세웠다. 처음엔 거친 직원들을 앞세워 폭력을 행세하더니, 직원들에게 작은 꼬투리까지 잡아내 징계를 내리고 급여를 압류하기 시작했다. 조합을 탈퇴하고 싶다는 비밀 메시지가 하루에도 수백 건씩 유진에게 쏟아졌다.

  —조합 가입여부는 상관없어요. 사측은 누가 조합원인지도 모릅니다. 이럴수록 우리가 단결해야 해요.

  유진은 필사적으로 그들을 설득했지만 이미 논리가 먹힐 상황이 아니었다. 사측이 징계를 철회해 주겠다며 조합 탈퇴를 종용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수천 명이 빠져나갔다. 유진은 그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배신자 새끼들!”

  “지부장님. 저 사람들 행동은 당연한 거야. 당장 한달 월급에 생계가 걸려있으니까. 모두가 지부장님 같을수는 없어요. 미워하면 안 돼. 설득을 해야지.”

  세경은 그의 고집을 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

  “지부장님. 쓸데없는 다툼 그만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교섭을 해요. 급여나 복지 같은 것 말이야. 그럼 사람들은 떠나지 않을 거야. 나 때문에 고생할 필요 없어.”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여러분, 사측이 노조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보여줍시다. 파업으로 갑시다.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

  —와아아아! 최은희를 몰아내자!

  —옳습니다! 가자! 파업!

  물론 채팅방 속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세경은 불안했다. 저 메시지들이 정말로 진심일지. 실제로 파업까지 따라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유진은 조합원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결국 그는 사측에 공식적으로 파업을 예고했다. 이제는 파업을 향해 계속해서 굴러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비슷한 시기, 신입 변호사 제이가 화웅에 입사했다. 회사는 그를 곧장 Q-P팀에 배치했다. 입사 첫날부터 그는 조합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관리’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약점을 찾아내는 일을 뜻했다.

  갓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상사들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최선을 다해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그가 조합 직원들의 작은 불법행위라도 하나 잡아내면 상사들은 그를 칭찬했고, 그는 더욱 힘이 솟아 열심히 직원들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잘못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오히려 첫 직장 생활을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다. 매번 칭찬을 받았고, 에이스라며 치켜세워졌으니까. 자신이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실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모두 서류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었다. 그렇게 제이는 점점 더 자신의 역할에 몰입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팀장님. 이거 사유재산 침해로 엮을 수 있겠는데요.”

  그는 밤새워 작성한 보고서를 팀장에게 건넸다.

  “아스테로이드 지부가 블록체인 통신에 사용하고 있는 기지국 중에 민간 소유 시설들이 꽤 많이 섞여 있습니다. 보통 통신설비는 보안 문제 때문에 성간교통공사가 100% 소유권을 갖고 있는게 원칙인데, 아스테로이드는 워낙 넓다보니 민자로 지어진 경우도 있거든요. 유진은 천왕성 출신이어서 이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제이가 만든 한 장의 보고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팀장은 곧바로 그의 아이디어를 사측에 전달했고, 사측은 민간 기지국들을 움직여 유진을 압박했다.

  —귀하가 무단으로 사용한 기지국 사용료 100만 달러를 청구합니다.

  민간 기지국들은 유진이 아닌 성간교통공사에 배상을 청구했다. 유진에게 직접 소송을 걸어 지루한 재판을 이어가는 대신, 사건을 핑계로 일단 그를 파면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유진이 징계를 받고 파면된다면 조합원들은 크게 움츠러들게 될 것이고, 지부도 빠르게 흩어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세경은 홀로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한참 어린 아이에게 큰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애당초 자신이 등을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결과도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감사실의 친분 있는 직원에게 연락했다.

  “천 감사님. 나 자수할게. 중계 기지국 무단사용 한 거 전부 내 잘못이야. 통신망 관리는 제가 알아서 한 일이에요. 지부장님이 아니라.”

  “…한 차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이번엔 나 하나로 끝내요. 피차 더러워지지 말고.”

  세경이 직접 자수하고 나선 이상 사측은 유진을 파면시킬 명분이 없었다. 어설픈 징계로는 오히려 조합원들만 자극할 뿐이었다. 결국 유진은 징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녀는 안심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유진이 그녀를 찾아왔다.

  “대체 왜 그랬어요!”

  “걱정 마. 구상권 청구는 안 한대. 그냥 퇴직 몇 년 일찍 하는 셈 치지 뭐.”

  그녀는 최선을 다해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진에게 경고했다.

  “지부장님. 파업까지 가지 마. 성공 못 할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서 포기하라고요? 끝까지 해봐야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정말 끝이야. 지부는 살리고 봐야지. 껍데기뿐이더라도. 그게 지부장님이 하셔야 할 역할이야.”

  하지만 유진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꼭 구해드릴게요.”

  세경이 해직될 것이란 소문이 퍼진 뒤로, 조합 채팅방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마치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새하얀 화면 속에서, 유진은 조합원들을 향해 홀로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여러분, 해직을 막읍시다! 막을 수 있습니다! 파업에 찬성해 주세요. 우리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유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담했다. 조합원 총투표 결과 기권 82%, 반대 11%. 찬성에 표를 던진 조합원은 겨우 7%에 불과했다. 유진은 하루종일 물건을 집어던지며,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 욕설을 뱉었다.

  며칠 후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세경은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고 정거장에 위치한 임원 회의실로 향했다.

  캡슐을 타고 궤도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복기했다. 처음 시작은 다이아 담당자들 사이의 약속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담당자 모두가 무능한 척 연기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자신이 총대를 메고 본사를 떠난다. 소심한 저항의 결과, 사측의 노선 감축 계획은 상당기간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인력 감축 후 성간교통공사를 민간 기업에 팔아넘기려 했던 ‘윗분’의 계획도 함께 무산되었고.

  거기까진 전부 계획대로였다. 세레스에서 맥주나 마시며 월급을 축내다 퇴직금을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유진이 나타났다. 천왕성에서 온 순진한 도련님은 그 순결한 눈동자로 그녀를 유혹했다. 그가 좋았다. 엉망진창인 그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다. 아주 작은 성취라도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결국 이렇게될 줄 알면서도.

  캡슐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천 감사가 비장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긴긴 복도를 지나 정거장 최심부, 임원 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임원들이 원을 그리며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들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았다.

  징계위 임원들은 잠시도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세레스 지상 화물팀 계산원 한세경 차장. 본인 맞습니까?”

  임원 중 하나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럼 징계사실 확인하겠습니다. 첫 번째…”

  세경은 임원들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할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정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임원들의 어깨 너머, 회사가 비싼 돈을 들여 설치한 전망창 밖 우주공간에 모든 관심이 쏠려있었다.

 

  왜냐면, 그곳에 유진이 작업용 해머를 들고 서 있었으니까.

 

  통. 통. 그가 창을 두드렸다. 놀란 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을 향했다. 선외작업이라곤 해본 적 없는 그들은 아무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진이 왜 거기에 있는 건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오직 세경만이 상황을 이해하고, 비상공구함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확인한 유진은 천천히 해머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헬멧 앞 유리를 내려쳤다. 유리가 깨지며 그의 맨몸이 진공에 노출되었다. 분신(焚身)이었다. 전신의 수분이 순식간에 끓어오르자 그의 몸이 고통스럽게 버둥거렸다. 임원들은 뭘 어쩌지도 못한 채, 그가 온몸으로 내지르는 소리없는 비명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비켜!”

  세경은 비상용 해머를 꺼내들고 소리치며 창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임원들은 모두 놀라 급하게 방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해머로 유리창을 내려쳤다. 쾅. 유리는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몇 번 더 내려치자 일부가 갈라지며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균열을 향해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휘둘렀다. 유리가 깨졌다. 망설일 틈도 없이 진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겨우 유진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 공기 유출을 막는 차단 거품이 뿌려지기 직전, 그녀는 그의 몸을 실내로 끌어당겼다.

  유진의 눈이 꿈벅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4-

 

  “…그렇게 내가 겨우 살려놨더니, 그 띱때끼가 감자 부스러기들이랑은 더는 같이 일 못 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퇴원하자마자 짐 챙겨서 천왕성으로 가버렸어. 다시는 얼굴도 쳐다보기 싫다면서.”

  세경은 흉터가 가득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이미 많이 취해있었다.

  “아, 안 되겠다. 변호사님도 한잔해.”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제이는 잔을 받아들었다. 세경은 와인병을 높이 들어 올렸다. 코리올리 효과에 의해 크게 휘어진 와인 줄기가 완벽하게 잔을 향해 떨어졌다.

  “변호사님도 앞으로 여기서 생활하려면 이거 할 줄 알아야 해. 이거 못하면 세레스 사람으로 인정 안 해주거든.”

  세레스에서 술잔을 제대로 채울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 항상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세경의 눈을 바라보며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알겠어요, 변호사님? 전부 내가 선택한 일이야. 아스테로이드 사람들이 선택했던 결과고. 그냥 다들 조금씩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변호사님이 책임감 느낄 필요 없어.”

  그녀가 비틀거리며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니까 이딴 건 필요 없다고.”

  그녀가 갑자기 그의 감정억제장치를 붙잡아 뜯었다. 제이는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이상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픔을 잊을 만큼 다른 감정이 더 컸던 걸까?

  그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거 봐. 괜찮지?”

  그녀가 미소지었다.

  “…많이 취하셨어요.”

  “취하긴 무슨. 이제 시작인데.”

  그녀가 다시 병을 내밀어 그의 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잔을 부딪쳤다.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운 다음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나 정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어. 그 따위 채팅 시스템 같은거 안 쓰고, 진짜 사람들 하나하나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설득하고, 욕먹어가면서. 옛날 식으로 발로 뛰어서 다시 사람들 모았어.”

  “유진 씨 때문인가요?”

  “처음엔 그랬지. 우리가 감자 부스러기가 아니란 걸 보여줘서, 그 친구가 다시 꿈을 꾸게 해주고 싶었지. 처음엔 분명 그랬는데… 이젠 책임감 때문에 못 그만두는 것 같아. 3년 동안 우리 조직이 꽤 커져버렸거든.”

  그녀가 다시 병을 내밀었다. 그는 남은 와인을 한번에 비우고 다시 잔을 받았다.

  “뭘 어떡하실 생각인데요?”

  후우. 그녀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파업까지 가야지. 아리온 민영화 이슈 덕분에 조합원들 의지가 강해. 지금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어. 이온엔진 기술은 점점 발전하고 있고, 목성행 직항로가 늘어날 수록 아스테로이드의 가치는 떨어질 테니까. 지금이 고립을 막을 마지막 기회야. 지금 막지 못하면 여기 사람들 전부 굶어 죽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웠다. 따뜻할 거라 생각했는데. 얼음처럼 차갑고 까슬한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변호사님. 있잖아… 내가 홧김에 다시 시작하긴 했는데. 솔직히 좀 무섭다? 그러니까 변호사님이 나 좀 도와줘.”

  “제가 뭘 할 수 있다고요.”

  “노조 많이 파괴해봤잖아. 이번엔 거꾸로 우리 한 번만 살려줘.”

  와인 때문일까? 간절한 그녀의 얼굴에 자꾸만 눈이 갔다. 솔직히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오랜 저중력 생활 덕분에 주름이 거의 생기지 않은 얼굴은 스무살 가까운 나이 차를 완전히 잊게 만들 정도였다. 문득 부끄러워진 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많이 늦었어요. 이만 돌아가시는 게…”

  쪽팔리게. 수줍은 아이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절할 것처럼 어지러웠다. 감정억제장치 없이 이런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확 술기운이 오르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어디 불편해?"

  그녀가 빈 술잔을 옆으로 치우더니, 슬며시 곁으로 다가와 이마에 손을 짚었다. 나란히 앉은 어깨가 닿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그녀에게 떨리는 몸을 기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술을,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술이…"

  제이는 그녀에게 뭐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말하며 가늘게 웃었다.

  "그런데 변호사님 끝까지 오케이 안 해줄 거야? 그럼 나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데."

  "아직도 더 하실 말씀이 남았나요?"

  “응. 아직 하나 남았지. 내가 알린스키 책을 좀 읽었거든. 그 사람 말이,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으면 딱 세가지만 이야기하면 된대. 술, 똥, 섹스."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시늉을 했다.

  "어디보자. 우리 술도 충분히 마셨고, 개똥 같은 회사 이야기도 충분히 했으니까…”

  그녀가 짓궂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이제 섹스 이야길 할 차례인가?”

  훅. 뜨거운 숨이 뺨에 닿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조금씩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제이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키스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무한정 늘어나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폭소를 터뜨렸다.

  "푸핫. 지금 한참 누나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부끄럽게."

  다시 눈을 뜨자, 세경이 눈물까지 쏟아내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제가 뭘요. 방금 세경 씨가 분명히 저한테,"

  "알았어. 알았어."

  그녀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정말로.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무안해진 그는 한숨을 쉬며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 오랜만에 한참 웃었네. 변호사님, 나 너무 졸리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니까 재워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윙크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마음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인 거야?

 

* * *

 

  다음 날 아침, 세경보다 한참 먼저 일어난 그는 곧바로 화웅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리온을 민영화하면 안 되는 이유 세 가지. 오늘 저녁까지 한 장으로 만들어 주세요. 단, 지구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내용으로요. 거기서부터 작업 시작합시다.”

  세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자 그녀가 자료를 마련해왔다. 제이는 한 시간 만에 자료를 다섯 줄로 요약하고, 세련된 그래픽을 입혀 카드뉴스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뉴스를 내보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메이저급 뉴스 채널들은 대부분 친정권 성향이었다. 그들이 민영화를 반대하는 기사를 실어줄 가능성은 없었다. 반면, 그나마 조합에 우호적인 성향의 채널들은 영향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제이는 우회적인 방법을 택해야 했다.

  “우선 정치권을 공략합시다.”

  그가 말했다.

  “최은희는 성간교통공사를 발판으로 행성대표의원이 되고 싶어 해요. 그러니까 우린 그 사람이 가장 싫어할 만한 상황을 만들 겁니다. 정치권을 시끄럽게 들쑤시는 거.”

  “정치인들이 우리 말을 들어 줄까?”

  “듣게 해야죠. 솔깃한 미끼를 엮어서.”

  제이는 가장 먼저 세레스 시티에 있는 ‘호세 안드레스’ 의원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목성의 작은 위성 몇 개와 세레스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의원이었다. 예상대로 호세 의원의 보좌관은 아리온 민영화의 위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온 정거장이 민영화되면 세레스행 우주선이 절반으로 줄어들 겁니다. 소행성대 지역 노선들도 마찬가지고요. 의원님 재선에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제이의 설명을 들은 보좌관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협력을 약속했다. 제이가 만든 카드뉴스는 성간교통공사 노동조합이 아닌 호세 의원의 이름으로 태양계 전역의 메이저 뉴스 채널에 배포될 수 있었다. 대부분 단신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적어도 성간교통위에 속한 행성대표의원들을 술렁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뉴스11 텍스트 기사 - ‘성간교통 경쟁하면 좋아진다더니 실제로는…’>

만약 성간교통공사에서 아리온 정거장을 운영한다면, 세레스에서 지구로 돌아온 우주선은 반대편인 아리온을 거쳐 다시 목성으로 떠날 수 있다. 그런데 두 회사가 나뉘게 되면 세레스에서 온 우주선은 세레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회합주기가 돌아오는 400일동안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지구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효율적인 방안인지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혁신민주당 호세 안드레스 의원은 ‘정부의 책임있는 해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 자세히 살펴보시려면 스와이프 >>>

 

  동시에 제이는 친분있는 기자들을 통해 성간교통공사가 우주선 운행계획 전면 개편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을 흘렸다. 세경은 비밀스럽게 본사의 다이아 담당자들을 움직여 성간교통위원회 소속의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들 지역구에 더 많은 우주선 운행 횟수를 할당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야당 의원들은 경쟁하듯 한목소리로 민영화 반대쪽에 손을 들었다.

 

<뉴스 팩토리 - 쫄지마 정치 1387회>

—유미 칸자키 의원 : 아리온 컨소시엄 측은 아스테로이드 지역 노선을 운영할 계획이 없다고 하더군요. 돈이 되는 목성행 노선만 운영하겠다는 거죠. 경영 측면에서 보면 합리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럼 아리온을 코앞에 두고도 이용할 수 없는 소행성 주민들의 불편은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앵커 : 저는 좀 납득이 가질 않네요.

—기자A :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최은희 사장님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진이 있어요. 바로 이건데요. 안전모를 왜 거꾸로 쓰신 걸까요?

—앵커 : 푸핫, 이건 국감장에서 최은희 사장님이 꼭 답변해주셔야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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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감사 시즌이 되자 의원들은 각자 근거를 들어가며 최은희CEO를 맹비난했다. 민영화를 시도하는 정부의 위험성부터, 그녀의 사소한 개인 비리, 공천 청탁을 의심할만한 정황, 심지어 안전모를 거꾸로 쓴 우스꽝스러운 사진까지. 나중에 전해 듣기로,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최은희는 명패를 던지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도 별수 없었다. 이미 온갖 방송이 그녀를 희화화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합성 영상들이 온라인상에 쏟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 많은 자료들은 모두 제이가 제공한 것들이었다.

 

<뉴스 채널5 - 익명의 전문가 인터뷰>

—전문가 : 71년 정부 계획서를 보시면 아리온 정거장은 원래 성간교통공사가 운영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입수한 D건설의 72년 사업계획서를 보시면 이미 아리온을 매입하는 것을 전제로 계획이 수립되어 있습니다. 아직 민영화 방침이 세워지기도 전인데 말입니다. 이후 73년에 수립된 정부 계획서를 보면 민영화로 계획이 변경된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내용도 D건설쪽 자료랑 똑같고요.

—사회자 : 전문가님 말씀은 정권 차원에서 D건설에 사업을 밀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아리온 사업 계획을 수정했다. 뭐 이런 뜻입니까?

—전문가 : 어느정도 의심되는 측면이 있죠.

—사회자 : D건설은 지금 아리온 인수를 추진중인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죠?

—전문가 :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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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가 언론과 정치권을 움직이는 동안 세경은 매일같이 직원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녀는 직원들을 “오빠, 동생”하고 부르며 가족처럼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었고, 휴게실 벽지 따위를 교체해 달라는 부탁을 해결하느라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래. 가출한 니 딸래미 승무원들이 봤대. 내가 꼭 찾아서 다시 학교로 보낼 테니까 정수 넌 출근이나 해.”

  “시호 씨, 휴게실에 개인용 수면 캡슐을 갖다 놓으면 안된다니까. 집 쫓겨났어? 어휴. 근처에 재워줄 사람 있는지 따로 한번 알아볼게.”

  “알, 나 너희 나라 말 몰라. 공용어로 말해, 공용어로.”

  매번 이런 식이었다. 제이가 보기에 그녀는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민원을 처리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합원분들은 아리온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요.”

  그가 말했다.

  “맞아. 사실 그래. 민영화는 아직 한참 미래의 일이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도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그녀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동의했다.

  “3년 전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그녀가 물었다.

  “글쎄요. 사람들은 이기적이다?”

  “일단 사람들과 친해져야 된다는 거야. 신뢰를 얻기만 하면 내가 똥통에 뛰어들라고 해도 사람들은 따라올 거야. 그게 아니면 현찰을 다발로 쥐여줘도 의심할 거고.”

  그녀는 주섬주섬 가방에 와인을 챙겼다.

  “그러니까 관심 없는 사람들한테까지 굳이 아리온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젊은 동생들이랑 맘 편히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고요?”

  “아, 들켰네. 변호사님도 같이 한잔할래?”

  그녀가 윙크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즈음, 세경은 본격적으로 지도부를 결성했다. 그녀가 가장 믿을 수 있고 영향력 있는 직원들을 불러모아, 이번엔 채팅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했다.

  “여러분, 이런 식으로 모이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야. 원래 이 멤버로 모이면 밤새 달려야 하는 건데.”

  그녀의 농담에 사람들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서, 누님.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정수’라는 이름의 남자가 물었다. 그는 세레스 토박이인 베테랑 수송원으로, 몇 달 전 제이가 타고 있던 객차를 분리했던 바로 그 수송팀의 팀장이었다. 그의 질문을 받은 세경은 조심스럽게 선언했다.

  “준법투쟁을 시작할거야.”

  예고된 파업을 두 달 앞둔 시점. 여론의 충분한 관심을 모은 아스테로이드 지부는 준법투쟁을 개시했다. 최은희CEO를 압박하기 위해 준비한 마지막 카드였다. 우주선 운행 시간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무리해가며 몸을 던져왔던 직원들은 그 순간부터 철저하게 안전규정에 맞추어 행동했다. 규정과 매뉴얼을 철저히 지킨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은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레스와 아스테로이드의 교통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편을 겪은 고객들의 민원이 성간교통공사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민원 뿐만이 아니었다. 세레스 정거장을 경유하는 노선이 심각한 지연을 일으키게 되면서 우주선들은 어쩔 수 없이 감속해야 했다. 다시 우주선의 속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료가 소비되었다. 이는 고스란히 성간교통공사의 손실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측은 오히려 강경하게 대응했다. 최은희CEO는 더 큰 손실을 감수해가며 아스테로이드 경유 우주선들을 목성으로 직행시켰다. 제이는 어이가 없었다. 목성으로 직행하는 우주선은 세레스를 경유하는 것보다 몇 배나 많은 연료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나 비용과 손익을 따져가며 노선을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회사가, 이제는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의미한 압박을 고수하는 중이었다. 제이는 상대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논리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미움으로 가득 찬, 불필요한 자존심만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사측이 먼저 두손을 들었다. 모든 뉴스 채널이 사측을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나섰음에도 민영화 반대 여론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자 정부 관료들이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정치권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공천 시기를 목전에 둔 최은희CEO는 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직접 세레스를 찾아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접한 제이는 당황했다.

  “변호사님. 최은희가 왜 직접 여길 찾아오겠다는 걸까?”

  세경이 그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뭔가 숨겨진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냥 ‘윗분’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뿐일지도 몰라. 최은희같은 사람들은 은근히 그런 쇼맨십을 좋아하잖아.”

  “지금 공천 경쟁이 한창인 사람이 한 달 가까이 지구를 비운다고요? 그건 아닐 겁니다. 분명 뭔가가 있어요.”

  그녀는 연료를 허공에 흩뿌려가며 보름 만에 직접 세레스로 왔다. 법무법인 화웅의 팀장과 아리온 인수를 추진 중인 D컨소시엄 대표도 함께였다. 세경과 지도부는 정거장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제이도 여우 가면을 쓰고 그들과 함께했다.

  최은희CEO가 터미널에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이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구보다 차갑고 완벽하리라 생각했던 상상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멈추면!”

  “우주가 멈춘다!”

  미리 소집된 조합원들이 피켓을 들고 일렬로 서서 경영진을 압박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최은희는 불쾌한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세경은 앞으로 한걸음 나서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사장님.”

  “…솔직히 별로 오고 싶진 않았어요.”

  뉴스 채널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그들을 의식한 탓인지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 외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노사 양측은 지체없이 회의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멈추면!”

  “우주가 멈춘다!”

  “우리가 멈추면!”

  “우주가 멈춘다!”

  터미널에서 회의실까지 이동하는 내내 조합원들의 구호는 계속되었다.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휴식시간도 없이 곧바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양측의 입장은 평행선이었다. 사측은 이상할 정도로 민영화에 집착했고, 조합 또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최은희CEO와 D컨소시엄 사장은 한목소리로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노선 감축은 절대 없을 것이며, 인력 감축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합의서에 그런 약속을 담아줄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협상은 공허한 말뿐이었다.

  첫날 교섭이 물거품으로 끝나고 최은희CEO는 세경에게 비공식 회담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집무실로 장소를 옮겨 공식적인 자리에서 할 수 없었던 대화를 이어갔다.

  “한세경 차장님. 우리 이쯤에서 끝을 봅시다. 나도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 때문에 미치겠으니까.”

  최은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사장님 위에 또 누가 계세요? 조직도에 안보이던데.”

  세경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쪽이 원하는 걸 줄게요. 다시 복직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요. 운행계획부장 자리를 비워뒀어요. 아니, 아예 두 직급 높여서 총괄수송처장은 어때요?”

  “사장님. 내가 겨우 그거 바라고 이러는 거 같아요?”

  “왜? 아닌 척 그만 해요. 당신네 조합 사람들 난리 치는 거 어차피 다 그런 목적이잖아요. 나도 기업가 생활 20년이에요. 안 그런 사람 하나도 못 봤어.”

  세경은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아님, 나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그래요? 지금 내가 사과하면 되나요? 여기서 무릎이라고 꿇을까?”

  최은희가 그녀의 앞까지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얼굴은 조금도 사과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최은희는 차갑게 미소지으며 손끝으로 세경의 신발에 묻은 먼지를 떼어냈다.

  “지금 분명히 합시다. 한세경 씨는 1급 처장으로 복직하고, 나는 이거 잘 수습해서 공천받고. 그럼 서로 깔끔하게 끝나는 문제 맞잖아. 지금까지 요구사항도 다 들어줄게요. 직원들한테 내려진 징계랑 손배소도 깔끔하게 전부 풀고.”

  “사장님, 지금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그런 제안은 3년 전에 하셨어야죠.”

  최은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무릎을 털고 일어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하는게 대체 뭐에요?”

  그녀가 물었다. 세경은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대체 왜 이러실까. 민영화 철회라니까요.”

  “예전 일 생각해서 많이 자제하고 있는 건 아시죠? 유진이라고 했나요? 그 청년.”

  “아, 그런 짓 또 하시게요? 그 사건 때문에 근로기준법이 좀 개정된건 아시죠? 사장님 그 때 처럼 하시다간 감옥 가세요.”

  “아스테로이드 작업량 전부 외주로 돌릴 수도 있어요.”

  “해보시죠. 그 사람들도 다 조합에 가입시킬테니까.”

  “무인화 계획도 대폭 앞당길 겁니다.”

  “못하는거 압니다. 소행성마다 인공지능 서버를 놓는 것보단 사람이 훨씬 싸니까.”

  “당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최은희가 참다못해 소리질렀다. 위압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맹한 목소리. 그 모습을 바라본 세경은 맥이 풀렸다. 나는 3년 동안 피를 토하며 널 만나러 여기까지 왔는데, 너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면서 쉽게 쉽게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구나. 겨우 이런 사람에게 사과를 받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유진이 가여웠다.

  “착각 좀 그만해. 당신은 뭘 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까.”

  그녀가 말했다.

  “뭐?”

  최은희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당신 어차피 아무 결정권도 없잖아. 윗분한테 돌아가서 전달이나 똑바로 해. 아스테로이드는 아리온 민영화를 끝까지 막을 거라고.”

  세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떠났다. 최은희가 그녀의 등에 대고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빨갱이 새끼야! 가만 안 둬!”

 

 

-5-

 

연봉 10만 달러가 넘는 귀족들의 노조가 행성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성간교통공사는 오랜 독점 구조에 안주하며 만성적으로 적자를 내고 있는 방만한 공기업의 대표적인 사례로, 경제 불황이 몰려오는 어려운 시기에 개혁을 거부하고 협박을 일삼는 이들 노조의 행태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이번 기회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반드시 근절할 것이며, 성간교통공사 노동조합의 불법 파업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히 대처해 나갈 것이다.

— 행성 연립정부 대통령 메이슨. B. 글레드스톤

 

  “끽해야 우주교통청 차관이 발표할 줄 알았는데.”

  세경이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이 정도 일에 대통령이 직접 담화문을 발표하는 게 말이 돼요? 태양계가 우리한테 선전포고를 한 거나 다름없어요. 이러면 승산이 없다고요.”

  제이는 짜증을 내며 서류를 집어 던졌다.

  “어차피 뭐 비슷하게 흘러가게 될 줄 알고 있었잖아. 적어도 뒷배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았네.”

  “높아 봐야 어디 행성대표의원 정도인 줄 알았죠.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부는 파업까지 못 가게 확실히 찍어누르려고 할 겁니다. 앞으로 더 가혹한 일들이 벌어질 거예요. 화웅이 했던 짓 정도는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요.”

  “다른 지도부 친구들한텐 그런 얘기 하지 마. 안그래도 사정 복잡한 친구들인데.”

  “걱정도 팔자시네요. 그 친구들이라고 돌아가는 분위기 모르겠어요? 뉴스 채널만 틀어도 우릴 완전 죽일놈으로 만들고 있는데.”

  제이의 걱정처럼 곧바로 공세가 시작되었다. 사측은 아스테로이드 지부에 작은 직책이라도 지닌 간부들은 모두 직위해제하고, 즉시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작게는 1개월 감봉부터 크게는 6개월 정직까지. 들어와야 할 소득이 갑자기 끊기자 직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나마 3년 전과 나아진 점이 있다면 조합이 이런 경우에 대비해 파업 기금을 충분히 쌓아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높은 징계 수위때문에 기금은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었다. 파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금이 먼저 고갈될 지경이었다.

  뉴스 채널들은 연일 성간교통공사의 방만함에 대해 허위사실을 쏟아냈다. 직원들의 급여 수준은 몇 배로 부풀려졌고, 업무량은 실제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것처럼 축소되었다. 패널들은 '일 년에 한 번 우주선이 운행하는 소행성에 수십명이나 근무하고 있다.'고 말하며 연일 비난을 쏟아냈다. 그 수십명의 직원들은 위성 항법 시스템의 정비와 지구 근접 소행성 감시를 위해 파견된 필수 안전관리 인력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결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뉴스 속 영상에서 보여지는 조합 지도부는 거의 범죄집단이나 다름없었다. 유진을 구하기 위해 유리창을 깼던 세경의 행동은 임원들에 대한 테러로 둔갑되었고, 블록체인 커뮤니티는 간첩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더욱 미칠 노릇인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제보들의 출처가 모두 우주교통청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스테로이드 지부의 조합원들에게는 연일 협박 문자가 쏟아졌다. 사측도 화웅도 아닌 행성민들의 직접적인 협박. 여객터미널에서는 직원들에 대한 폭행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더 심각한 것은 자녀들에 대한 폭력이었다. 아이들은 주위의 따돌림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이사를 고민하는 직원들도 늘어났다.

  파업 예정일까지 앞으로 일주일. 제이는 일주일 후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화웅의 지인들에게 몰래 연락해 분위기를 살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사측은 이미 명단 준비 끝났어. 파업 들어가는 즉시 직원들 전부 체포될 거야.

  —회계팀 쪽에서 파업 시 손실금액 추정해서 올렸는데 최은희가 그걸 다시 3배 뻥튀기하라고 했대. 1인당 손배금액이 30만 달러가 넘어. 그냥 죽으란 소리지.

  —세레스 자치정부도 분위기 안 좋아. 노동청 담당자 말로는 진압에 군 투입까지 생각하고 있다더라. 세레스에 군이 어디 있다는 건지. 다 민영 경비대면서.

  세경은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것처럼 메시지를 보내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연락을 받지 않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직접 만난 사람들도 차마 그녀의 면전에 대고 말하진 않았지만,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몇 명이나 끝까지 함께 해줄지 그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루 일과를 마칠 때면 세경은 매일 밤 맥주를 잔뜩 싸 들고 제이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녀도 그도 이미 잔뜩 취해 있었지만, 기어이 함께 열두 캔을 비우고 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맥주를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업을 하루 앞둔 마지막 밤. 최후의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그거 알아? 유진의 이름 뒷부분 말야. 코델리아-37은…”

  “코델리아 위성에서 생산된 37번째 클론이란 뜻이죠.”

  “하하. 끔찍하지 않아? 천왕성엔 유진이랑 똑같은 인간이 최소 36명이나 더 있다는 거잖아.”

  그녀는 구겨진 맥주 캔을 톡, 톡, 건드리며 한참동안 멍하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속삭였다.

  “많이 외로웠겠지? 그렇게 형제들이 많은데, 여기 혼자 와버려서는…”

  “대신 세경 씨가 있었잖아요.”

  “나는 뭐 곁에 있으나 없으나 별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인데…”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제이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침대 위에 웅크린 그녀의 몸이 작게 떨고 있었다. 눈동자도. 그리고 목소리도.

  “변호사님. 만약에 말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만약에 파업 시작했는데, 변호사님하고 나하고 둘 뿐이면 좀 웃기겠다. 우리 둘 다 여기 직원도 아닌데.”

  “그건 확실히 좀 웃기겠네요. 하하. 설마 그렇지는 않겠죠?”

  세경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빌어먹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었어야 했는데. 제이는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잠이 들기 직전, 그녀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 *

 

  결국 지도부가 먼저 무너졌다. 총대를 메고 입을 연 것은 정수였다.

  “누님, 우리 아리온 정거장에 채용됐어.”

  “뭔 소리 하는 거야? 오늘이 파업 개시일인데.”

  세경은 화낼 기운도 없는 듯, 죽어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번에 최은희 왔었을 때 말야. D컨소시엄에서 제의가 들어왔어. 지도부 모두 아리온으로 채용하겠다고.”

  “그래서? 그걸 덥석 받았니? 받았어?”

  “그럼 어떡해. 연봉을 15%나 올려준다는데.”

  그녀는 정수의 등을 몇 번이나 때렸다.

  “어휴 이 모지리야. 최소 두 배로는 올려달라고 했어야지. 그래도 저놈들이 다 받아줬을 건데. 아주 그냥 내가 다 억울해서 내일부터 잠을 못 자겠다!”

  “…미안해 누님.”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지도부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됐어. 이 새끼야.”

  그녀는 분주하게 와인병을 찾았다. 테이블 위를 더듬던 손이 병을 잘못 건드려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아 씨발! 진짜 다들 왜, 왜 그러는 건데!”

  결국 세경은 울음을 터뜨렸다. 가장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았던 정수가 등을 돌린 것이 그녀에게도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제이는 꺽 꺽 거리는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아, 그럼 어쩌라고! 누님 진짜 몰라서 그래? 아리온 그거… 우리가 다 만들었어. 나노튜브 와이어를 스물 일곱바퀴나 감고, 합판 용접하고, 펄스엔진 조립하고, 그거 전부 내가 다 했다고. 그 정거장 건설하느라 내 친구들 거기서 다 죽었어. 그 집 새끼들도 내가 다 챙겨야 돼. 회사에서는 당장 다 때려치고 나가라는데, 거기서는 어서 오라고, 우리 전부 받아준다잖아. 그게 뭐가 나빠?”

  “그래. 다 때려칩시다. 누님.”

  또 다른 조합원이 말했다. 제이는 그를 째려보았다.

  “그렇게 징징거리기나 할거면 뭐 하러 여기 찾아 왔습니까? 그냥 사표 내고 나가면 되지. 갈거면 빨리 꺼져요. 사표 쓰나 파업하나 일 안하는건 똑같으니까.”

  “뭐? 당신은 또 왜 끼어들어? 당신 어차피 1년 뒤엔 여기 뜰 거잖아. 그런 사람이 쓸데없이 여기저기 부채질이나 하고!”

  “전부 그만 해.”

  세경이 모두를 중단시켰다.

  “그래. 이제 그만하자. 파업도 접고, 조합도 해산…”

  

  삐                                                                                                      

 

  그 순간. 모두의 왼팔에 달린 단말기에 붉은색 메시지가 떠올랐다.

  —안전확보 긴급명령 7호 발령. 접근 중인 소행성 '멸망꽃'에 대한 궤도 수정 요망

  갑자기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수야 리드타임은?”

  세경이 물었다.

  “음… 여유는 좀 있어요. 일곱바퀴 반? 근데 22시간 후에 세레스 근처를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이쪽으로 안 와요.”

  홀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제이가 물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누군가가 답했다.

  “멸망꽃이 지구로 접근하고 있대요.”

  “멸망꽃?”

  “소행성. 지구에서 태풍 이름 짓는 거랑 비슷한 거야.”

  세경이 말했다.

  “소행성이 지구로 접근한다고요?”

  “그래. 예전엔 지구에 충돌하지만 않으면 괜찮았는데, 요즘은 궤도상에 물체가 워낙 많으니까 전부 제거하지 않으면 위험하거든. 아무튼 다들 빨리 선외활동 준비해.”

  그녀의 지시를 들은 지도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만! 잠깐 멈춰봐요.”

  제이가 양팔을 뻗으며 소리쳤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함정이에요. 멀쩡한 소행성이 갑자기 왜 지구로 향한답니까. 뭔가 이상해요. 이거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거라고요.”

  세경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변호사님은 잘 모르겠지만 이거 그렇게 특이한 일 아니야. 일 년에 서너번씩 꼭 있어요. 이안(IAWN, 국제소행성경보네트워크)이 소행성 포착하면 그거 막는 게 우리 직원들 의무야. 법으로 정해져 있어.”

  “그래도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잖습니까.”

  “만약 이게 함정이면, 가든 안 가든 정부는 어차피 우리한테 덮어씌울 거야.”

  그는 세경을 가로막았다.

  “이번엔 그냥 보냅시다. 그런 다음 협상 카드로 써요. 어차피 지구로 곧장 날아가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변호사님. 우리가 꽤 멀리까지 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 목숨으로 내기를 할 순 없잖아. 지구에도 사람이 살아. 그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이 생겼고.”

  세경은 그를 제치고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제이는 완강히 버텼다.

  “네. 그래요. 좋네요. 낭만적이고. 근데 교섭이 낭만으로 되는 줄 알아요? 세경 씨, 진짜 실수하시는 거예요.”

  세경이 그를 밀치고 캐비닛을 열었다.

  “미안해, 변호사님. 실수 좀 할게.”

  그녀는 선외활동복을 꺼내들고는 직원들과 함께 뛰쳐나갔다. 

  "아니, 일단 제 말 좀 끝까지 들어 보시라고요!"

  제이는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6-

 

  개월 전, 궤도공명지역에 위치한 소행성 하나가 목성 중력의 영향으로 튕겨 나갔다. 지나친 채굴 때문에 질량이 줄어든 탓이었다. 목성 궤도 안쪽으로 되돌아오는 소행성을 UN의 소행성 감시 네트워크가 제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다행히도 이안의 망원경이 소행성을 포착했고, 소행성에는 ‘멸망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같은 시각, 성간교통공사 직원들에게 안전확보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행성대표의회가 제정한 성간교통안전법에 따라, 성간교통공사는 근지구 공간으로 유입되는 소행성을 제거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동법에 따라 근무지 근처로 소행성이 지나가는 경우 교통공사 직원들은 모두 작업을 멈추고 궤도 수정 작업에 투입되어야 했다.

  소행성 발견 열 시간 후. 감압을 마친 세경과 백여 명의 직원들이 세 대의 메탄 동력선에 핵 펄스 엔진을 하나씩 싣고 세레스 정거장을 출발했다. 멸망꽃 근처까지 접근했을 때, 남은 시간은 다섯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서둘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귀환 한계선을 넘어버려 세레스 정거장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천체수송 자격자인 세경의 계산에 따라,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핵 펄스 엔진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토목 팀이 평탄화 작업을 마친 지점에 파일럿들이 메탄 동력선을 착륙시켰고, 정비 팀과 수송 팀 직원들은 엔진 설치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신호 팀은 각 엔진에 통신 케이블을 가설했다. 세 개의 엔진을 한 곳에서 정밀하게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계산원인 세경은 세 줄기 케이블이 만나는 지점. 채굴이 끝난 지하 탄광 중심부에 콘트롤 박스를 설치했다.

  뉴스 채널의 드론들도 멸망꽃 근처로 다가와 직원들의 움직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촬영된 영상은 즉시 태양계 전역으로 중계되었고, 화면에는 새빨간 헤드라인이 둘러쳐졌다.

 

  성간교통공사 노조가 소행성 점거! 최악의 테러 참사!

 

  정부는 성간교통공사 아스테로이드 지부 노동조합이 멸망꽃을 점거했으며, 소행성을 지구에 추락시키기 위한 농성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소행성을 막기 위해 나선 백여명의 조합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혔다.

  기다렸다는 듯 왜곡된 인터뷰 영상이 온라인상에 떠돌기 시작했다. 세경의 얼굴을 한 딥페이크 영상 속 인물은 정부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소행성을 지구로 떨어뜨리겠다며 투사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영상 속 여성은 목소리도 말투도 그녀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세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작이라는 것을 알아챌만큼 조잡한 영상이었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그녀를 몰랐고, 영상이 가짜라는 사실도 당장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뒤이어 세레스 민영 경비대가 멸망꽃으로 들이닥쳤다. 영상을 보고 출발했다면 도저히 도착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경비대는 소행성 궤도 위를 선회하며 공용 주파수에 대고 소리쳤다.

  —성간교통공사 직원들은 불법 행위를 멈추고 즉시 투항하십시오. 저항한다면 강제로 체포하겠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상황을 알 리 없는 직원들은 그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경비분대 하나가 가까운 펄스 엔진 근처에 강하한 다음 직원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공용 주파수로 또 한 번 경고가 전달되었다.

  —경고합니다. 항복하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듯, 수송원 한 사람이 펄스 엔진을 가리켰다.

  —이거 핵폭탄이야, 이 새끼들아. 쏠 수 있음 쏴 봐.

  경비대는 당황했다. 그들 중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리지 않게 지시를 내리자, 대원들은 모두 총을 내려놓고 전기충격봉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 판단이야말로 큰 실수였다.

  경비대원들이 봉을 휘두르며 직원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저중력 환경에 익숙지 않은 그들은 우스꽝스럽게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반면, 평생을 저중력 환경에서 보낸 데다 엑소 수트까지 입은 수송원들은 경비대 대원들을 손쉽게 제압해냈다.

  

* * *

 

  —지부장님. 민영 경비대가 투항하라는데요.

  수송원 중 한명이 세경에게 무전을 날렸다. 정수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세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지시를 내렸다.

  —무조건 엔진 사수 해. 책임은 내가 질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곧이어 또 다른 무전소리가 들렸다.

  —1번 엔진 설치 완료했습니다.

  —오케이. 1번 동력선은 픽업 준비해 주세요.

  —2번 엔진 공격받고 있습니다!

  —3번 엔진도 공격받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전이 바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송 팀이 나가서 시간 끌어. 정비 팀은 엔진 설치 서두르고. 90억 지구사람들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무슨일이 있어도 완료해야 해.

  세경은 외부에 연결된 CCTV 영상들을 모니터로 확인하며 지시를 내렸다. 또 동시에 양손으로는 컨트롤 박스의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정확한 궤도 입력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져버리는 수가 있었다. 침착해야 했다. 정부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주어진 일은 해내야 했다.

  그 순간 화면 하나가 심하게 흔들렸다. 직원들이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2번 엔진, 무슨 일이야?

  —경비대 새끼들이 군용 전투봇까지 갖고 왔어요.

  —엔진은?

  —벌써 설치 완료 했지요. 신호 케이블도요.

  —오라이. 안전하게 터널 안으로 후퇴하세요.

  잠시 후 3번 엔진도 설치가 완료되었다는 무전이 들렸다. 신호 팀 직원들이 통신 케이블을 어깨에 매고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는 세 개의 케이블을 모두 콘트롤 박스에 연결했다. 이제 마지막 단계였다.

 

* * *

 

  세레스 민영 경비대는 도합 일곱 대의 군용 전투봇을 멸망꽃에 투입했다. 전장 2미터, 무게 1톤에 육박하는 살인기계는 여섯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성간교통공사 직원들을 제압하기 위해 나아갔다.

  교통공사 직원들이 통로마다 빈 컨테이너를 쌓아놓고 저항했지만, 군용 전투봇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투봇은 손처럼 생긴 두 개의 다리로 컨테이너를 집어 던지고 직원들을 후려쳤다. 로봇에게 얻어맞은 직원들은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지부장님 이제 얼마 못 버팁니다.

  —안쪽까지 후퇴 해.

  조합원들은 더 안쪽, 전투봇이 진입하지 못하는 좁은 통로로 피신했다. 다시 경비대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경비대는 좁은 통로를 빠르게 통과해 세 방향에서 직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나아가려는 경비대와 막으려는 직원들. 길고 지루한 다툼이 이어졌다. 직원들은 좁은 통로에 똘똘 뭉쳐 길을 막아섰고, 방패를 든 경비대는 그들을 조금씩 밀쳐내며 하나씩 끌어내 체포했다. 한 명, 또 한 명. 통로를 막아선 직원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윽고 인간 방벽이 무너지며 중앙으로 길이 열렸다. 탄광 중심부에는 선외활동복을 입은 사람이 홀로 서있었다. 경비대는 빠르게 그를 둘러싼 다음, 뒤를 걷어차 무릎을 꿇렸다.

  —지부장 한세경 씨. 당신을 체포합니다.

  경비대 분대장이 케이블 타이를 꺼내 그의 양 손을 포박했다. 그 순간, 갑자기 소행성이 크게 흔들렸다. 세 개의 펄스엔진이 점화를 시작한 것이었다. 경비대원들은 조금씩 휘청거렸지만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늦었나.

  분대장이 작게 중얼거렸다.

  —안타까우시겠어요. 발사하기 전에 우릴 제압했어야 테러범을 막았다고 속일 수 있을 텐데.

  세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분대장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궤도를 바꾼거라고 적당히 이야기를 꾸미면 돼.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똑똑하셔.

  세경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양 손이 묶인 상태로 주섬주섬 작업복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경비대원들을 향해 노란 막대를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경비대원들은 몸을 움츠리며 물러나 막대를 뚫어져라 살폈다. 위험물이 아니었다. 그냥 커피믹스였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선바이저를 올려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지금 여기 상황 전부 카메라로 찍고 있는 거 아세요?

  제이가 말했다.

 

 

-7-

 

  —러는 무슨, 진짜 어이가 없네. 쉬바 나는 그냥 할 일 했을 뿐이라니까!

  화면 속에서 누군가가 양손을 포박당하며 소리쳤다.

  —제발요. 저희 진짜 테러범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제발…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

  이미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는데도, 경비대는 그를 거칠게 발로 차 넘어뜨리고 배를 걷어찼다.

  그 모습을 보고 흥분한 직원 하나가 작업용 해머를 휘두르며 거칠게 저항했다. 그러자 경비대는 충격봉으로 그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감전된 몸이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여기 상황 전부 카메라에 찍혔다니까요! 당신들 대화도 전부 녹취 끝났습니다. 나중에 법정가서 후회하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제이가 거칠게 저항하며 연행되어 가는 모습이 CCTV 화면에 잡혔다. 그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세경은 태블릿을 접어 허공에 던져버렸다. 그녀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무중력 상태인 메탄 동력선 내부를 어지럽게 표류했다.

  그녀를 믿고 따라와 준 지도부도, 사정을 알 리 없는 백여명의 직원들도 모두 테러범의 누명을 쓰고 민영 경비대에 체포되었다.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세경만이 홀로 탈출할 수 있었다. 제이가 대신 잡혀들어간 덕분이었다.

  전부 제이의 아이디어였다. 직원들이 펄스엔진을 설치하는 동안 제이는 멸망꽃 곳곳에 소형 CCTV와 통신 감청장비를 설치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록했다. 소행성의 궤도를 바꾸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직원들과, 그런 그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세레스 민영 경비대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공용 주파수로 나눈 모든 음성 대화까지.

  사건의 전말이 담긴 모든 기록들은 실시간으로 세경의 태블릿에 저장 되었고, 세경은 유진이 구축한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통해 아스테로이드 전역에 그 내용을 방송했다. 성간교통공사 직원 모두가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함께 분노…… 해주기를 바랐다.

  확신이 없었다.

  우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소행성대(Asteroid Belt)라는 이름과 달리, 소행성들은 서로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는 먼 거리에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유진아. 우리 목소리가 정말 저 먼 곳까지 닿았을까? 네 마음이 정말 전해졌을까?

  불안했다.

  어찌할 수 없는 불안을 한가득 안고서, 그녀는 무전기의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들하십니까, 여러분? 나 한세경이에요. 우리 오늘 파업하기로 약속했었죠?”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떨림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우리 아스테로이드는 한때 인류 문명을 지탱했습니다. 자원이 고갈되어가는 지구가 멈추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던 건 모두 우리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목숨 걸고 이곳을 개척한 우리를, 소행성 깊은 곳까지 굴을 파고 뼈를 묻은 우리를, 이제 저들은 버리겠다고 합니다. 더이상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요. 더 돈이 되는 목성이 개척되었다는 이유로요.

  3년 전,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저항하던 젊은 청년이 분신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당했고, 상처받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들 곁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함께 싸워주지 못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회사는 우리를 감자 부스러기라고 부릅니다. 서로의 얼굴도 모르고, 평생 만나는 일도 없는, 절대 뭉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우리를 멸시하고 괄시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참았습니다. 참으라고 배웠고, 참아야 되는 줄 알았으니까.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안녕하신가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신 건가요?”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어요. 저는 보여주고 싶어요. 증명하고 싶어요. 우리가 부스러기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두 시간 뒤. 오늘이 끝나기 전인 11시 59분이 되면, 우리 모두 붉은색 조명을 켜기로 해요. 아주 잠깐.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0.1초라도 좋아요. 작은 손전등이라도 좋아요. 우리 그냥 잠시 일을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만이라도 해봐요. 지부장이 아닌, 여러분의 친구 한세경으로서 드리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무전기를 내려놓는 순간, 심장도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핸들을 당겨 동력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레스에 도착하는 즉시 모든 책임을 지고 자수할 작정이었다.

  세레스가 멀리 보이기 시작할 즈음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아무런 기대 없이 엔진의 시동을 끄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레스 정거장 주변은 분주히 움직이는 작업자들로 가득했다. 몇 명이나 깜빡일까? 열 명? 스무 명? 금방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빛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11시 58분 57초. 58초. 59초… 그리고 11시 59분.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주가,

  셀 수 없이 많은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놀란 조합원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확인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모두가 붉은색 전구를 켜고 있었다. 그들은 불을 끄는 것도 잊고서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도? 너도였어?

  에이 시바 모르것다.

  이름 모를 소행성에서, 말 없이 눈빛만 주고받던 누군가가 벽에 붙은 커다란 버튼을 눌렀다. 인근을 운행중인 모든 우주선을 멈춰세우는 붉은색 비상정지 스위치였다. 위성에서 피어오른 붉은 봉화가 아스테로이드 전역에서 보일 정도로 밝게 타올랐다. 그 빛을 발견한 누군가가 뒤따라 버튼을 눌렀다. 하나가 켜지자 또 하나가. 다음엔 무수히 많은 빛이 파도처럼 아스테로이드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그 순간, 어쩌면 실수였을까. 고요한 정적을 깨고 공용 주파수로 누군가 힘껏 소리 질렀다.

  —우리가 멈추며어어어어언!

  그러자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셀 수도 없이 많은 목소리가 함께,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우주가 멈춘다아아아아아!

 

  그렇게 아스테로이드 최초의 파업은 시작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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