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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퍼피 발렌타인

2019.02.14 09:3002.14

- 1 -

 

"이봐! 이봐! 너 그거 알아? 발렌타인데이라고 들어 봤냐고."

 

"야 좀... 채신머리없이 뛰어 오지 좀 마라. 그 짧은 다리로 허우적대는 거 볼 때 마다 내 마음이 짠해지지 않겠냐?"

 

"이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너한테 채신머리라는 말을 들어야겠냐? 아, 됐고. 들어 봤냐고, 발렌타인데이라고."

 

"흠. 물론이지. 마음에 두고 있던 누군가에게 초콜릿이란 걸 주는 날이 아니더냐?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라고 하더군. 휴... 번거롭기도 하지."

 

"애초에 아무나 보고 헥헥 거리면서 꼬리를 쳐 대는 네가 사랑을 이해하길 기대한 건 아니었어. 요는, 그 초콜릿이란 거 말야. 그거 그 짙은 갈색의 덩어리... 맞지? 마치 그... 것처럼 생긴. 냄새는 나지 않는 듯하지만. 얼마 전에 옆집 메리가 멋모르고 주워 먹었다가 바로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지 아마. 하여튼 그 괴상한 덩어리가 정말 초콜릿이 맞느냐는 거지."

 

"너의 저급한 묘사에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내가 알기론 그렇다."

 

"뭐래. 그러고 보니 너의 털색하고도 비슷하구나. 초콜릿하고 비슷해서 쵸파인가? 크크크."

 

"뭣이! 나의 이름은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초인기 캐릭터란 말이다!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그런 영광스런 이름을 지어 줬겠냐고! 그에 비해... 부르기 편해서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성의 없는 이유로 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네가 감히 날 이름으로 놀리다니! 결투다!"

 

"이게 오늘 정말! 한입거리도 안 되는 게... 정말 붙어 볼래? 아, 됐어. 이름 얘기 그만하고. 그러니까 그게 정말 초콜릿이 맞는다는 거지? 대체 인간들은 왜 그런 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거야? 사랑도 모르는 네가 이해할 리는 없겠지만, 어디서 주워들었을 지도 모르니 물어 봐 주마."

 

"흠. 결투는 취소하지. 폭력은 야만적인 동물들이나 택하는 해결책이니까. 설명해 주마. 인간은 말이야.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더군. 쓰기만 하고 마시면 정신을 잃는 술이라는 걸 경쟁하듯 들이키기도 하고, 매캐한 연기를 들이 마시는 능력을 서로 자랑하기도 하지. 초콜릿을 주는 것도 그런 것이다. 이런 걸 먹고도 버틸 수 있다면 너에게 내 마음을 주겠다. 이런 뜻이 아닐까? 일종의 통과 의례라는 거지."

 

"역시... 그렇구나. 너에게 물어 본 게 실수였어. 하지만 소득은 있었다. 그게 정말 초콜릿이었군. 오늘 네 녀석의 쓸모는 여기까지였다. 잘 가라. 초콜릿 색 쵸파. 크크크."

 

"크앙!"

 

 

- 2 -

 

"가자, 쫑. 추워. 얼른 사가지고 들어가야지."

 

목도리를 둘둘 감고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서도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던 수진은 산책길에 자주 만나는 푸들과 엉겨 붙어 있는 웰시코기를 불렀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대는 앙숙이긴 하지만 그래도 집 안에 있을 때는 흐느적거리던 쫑이 저 녀석을 만나면 기운을 차리고 활달해 지는 것 같아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투덕댈 시간을 주는 편이었다.

 

그래, 동물이건 사람이건 서로 부딪히며 살아야 힘이 나겠지. 정작 그렇게 생각하는 수진은 혼자서 자취한 지가 벌써 오 년 째였다. 프리랜서로 맡는 번역 일도 대부분 메일로 오가다 보니 사람을 만날 일은 드물었다. 가끔 만나던 친구들도 결혼하고, 외국으로 떠나고, 일하느라 바쁘고.

 

외롭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요 녀석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까. 수진은 앞서서 뛰어가는 쫑에게 끌려 편의점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요 녀석 밖에 없네.

 

쫑을 빼고 나면, 최근에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 푸들을 키우는 동네 남자였다. 쵸파라는 그 푸들을 만나기만 하면 쫑이 달려 들어 엉겨붙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서로 말을 걸게 되었다. 공통의 화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적어도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을 덜 어색하게 채울 수 있으니까. 수진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으로 쫑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의미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관계로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교의 양을 보충할 수 있다는 건 유용하면서도 쓸쓸한 일이었다.

 

"왕!"

 

쫑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잠시 멍하니 있어도 길을 잃지 않으니까. 가끔은 내가 이끌어 주기도 하고. 과연 이 길이 맞는지 괜히 고민하는 걸 떨쳐내 버리기도 좋고. 수진이 빨리 움직이지 않자 쫑이 다시 한 번 짖었다. 아 그래. 문은 열어 줘야지. 얼른 다가가 편의점 문을 열어 주자 쫑이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서슬에 수진은 그만 줄을 놓쳐 버렸다.

 

"어머! 얘가!"

 

"어서오세요!"

 

강아지를 황급히 쫒아 들어간 수진에게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서글서글하게 인사했다. 가벼워진 기분 때문일까, 형식적인 인사겠지만 수진의 가슴이 살짝 두근댔다. 머뭇거리는 사이 쫑은 어느새 진열대를 돌아 들어갔다. 한 번도 저런 적이 없던 아인데. 수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재빨리 강아지에게 달려갔다. 수진이 진열대를 돌았을 때, 쫑은 이미 공중에 날아올라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뛰어오른 웰시코기의 뒷발은 자신의 다리 길이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 그러니까 대략 오 센티 정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웰시코기의 몸은 길었다. 허리를 곧추 세운 쫑은 가까스로 무릎 높이 정도에 있던 초콜릿 하나를 물어 낚아챘다.

 

"쫑!"

 

깜짝 놀란 수진이 쫑의 입에서 초콜릿을 빼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쫑의 이빨은 초콜릿 케이스에 선명하게 자국을 내 버렸다. 침으로 범벅이 된 건 물론이었다.

 

결국 편의점을 나서는 수진의 손에는 도시락과 맥주 한 캔, 그리고 평소에 먹지도 않던 초콜릿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유난히 기분 좋게 날뛰는 쫑을 한 대 쥐어박아 주려다가, 수진은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 3 -

 

"이봐! 내가 해냈다고!"

 

"촐싹대면서 뛰어오지 말라고 했다. 안쓰럽다고."

 

"나 지금 기분 좋으니까 초치지 말아줬으면 해. 들어봐. 내가 초콜릿을 구했다고!"

 

"뭣! 내가 알기로 네 동거인은 초콜릿 같은 거 안 먹을 텐데? 누구한테 받은 거냐?"

 

"너 내가 말할 때 안 듣냐? 내가 해냈다고 했냐, 안 했냐? 이 내가 직접! 초콜릿을 구하셨단 말이다. 아, 정말 목숨을 건 모험이었어. 하마터면 내 이빨이 초콜릿 속으로 박혀 들어갈 뻔 했다고. 그랬으면 나도 메리처럼 병원으로 실려 갔겠지. 감동해라, 감동하라고!"

 

"그런 무모한 짓을! 어리석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대체 뭣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런 짓을 한 거냐?"

 

"내가 지금 기분이 좋긴 하지만 이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그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입 조심 하거라. 응? 그러니까 말야, 내일이 그 발렌타인데이가 아니겠냐? 지금 초콜릿은 집에 잘 보관되어 있다. 내일 그 초콜릿을 수진이가 누군가에게 준다면 사랑이 이루어진단 말이지. 크크크."

 

"오. 동거인을 위해 그런 모험을!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한 거냐? 수진 정도면 충분히 네게 잘 해 주고 있을 텐데. 왜 굳이 환경을 바꾸려 하는 거지? 욕심이구나, 욕심. 끝이 없는 욕심이야!"

 

"때 맞춰 밥 주고 가끔 쓰다듬어 주기만 하면 만족하는 너란 녀석으로선 이해 불가의 영역이겠지. 외로움이야. 수진이와 나는 좋은 파트너지만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어. 인간과 개, 서로 다른 종은 채워 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지. 애초에 네가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흠. 중생들의 수많은 번뇌를 일일이 이해하기엔 나의 공력이 너무나도 높구나. 근데, 그 초콜릿은 누구에게 줄 생각이냐? 아, 그 편의점 직원? 후후후. 네 동거인이 그 직원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음은 내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만."

 

"아니, 틀렸어. 초콜릿을 받을 건 네 동거인이다."

 

"컹! 뭣! 어째서 그런! 어설픈 혀로 그럴 듯하게 사랑을 논하더니, 이제 보니 나보다 보는 눈이 없구나. 내 두 사람의 대화를 수없이 지켜보았지만 거기에는 어떤 떨림도 없었다. 너와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 둘은 아무 관심 없이 서로 스쳐지나 갔을 거야. 그런데 사랑? 어리석구나, 쫑."

 

"순수하다고 해야겠지? 너의 그런 면을... 아니 됐고.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고 판단하지 마라. 물론 두 사람에게는 설렘이 부족해.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어림도 없지. 그래서 이 몸이 나서는 것이야. 촉매제라고 들어 보셨을까? 지금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초콜릿이라는 촉매제가 더해지면 어떨까?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 크크크."

 

"흥. 하지만 네 계획에는 커다란 빈틈이 있군. 넌 내 동거인이 그 끔찍한, 마치 그... 것의 색과 같은 초콜릿을 넙죽 받아 줄 거라고 가정하고 있어. 정말 그렇게 확신하나? 핫핫."

 

"응."

 

"핫핫. 응? 뭐지? 그 단호한 대답은?"

 

"확신한다고."

 

"어... 어째서?"

 

"그렇지 않으면 마치 그... 것의 색과 같은 널 키울 리 없으니까?"

 

"크앙! 결투다! 쵸파의 명예를 걸고!"

 

"더 이상 긴 말은 필요 없어. 계획을 실행한다. 그리고, 넌 나를 돕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크... 크앙."

 

 

- 4 -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 녀석이 난리야. 밖에 나가자고? 그래서 그런 거야?"

 

"컹!"

 

현석은 오늘 하루 종일 집 안에서 뒹굴 생각이었다. 이틀 뒤가 설날이었지만 고향에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미리 얘기해 두었다. 회사에는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는 핑계로 하루 미리 휴가를 내 두었다. 이번 설 연휴 만큼은 진짜 휴가,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원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요 녀석, 쵸파를 들인 후로는 더더욱 누군가를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쵸파가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 바람에 아침저녁으로 집 주변 산책이라도 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테니까. 자신과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그래서 좋은 일이기도 했다. 그 누군가가 다름을 극복하게 할 매력이 있다면.

 

그렇게 보면 웰시코기를 키우는 동네 여자에게도 그런 매력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건 현석에게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그 여자와의 대화만큼은 뭔지 모를 달콤함이 있었다. 날씨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이야기로 넘어가는 뻔한 패턴임에도 대화를 끝내고 헤어질 때면 항상 아쉬웠다.

 

외로워서 그러나. 하지만 현석은 혼자 있을 때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처럼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쪽이었다. 그냥 그 여자와 나누는 짧은 대화가 좀 더 즐거울 뿐이었다. 혹시 오늘도 만나려나. 그런 생각에 현석은 귀찮음을 이겨내고 샤워까지 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 5 -

 

편의점에서 우연히 초콜릿을 사가지고 나온 그날 이후로 수진은 이상하게 가슴이 설렜다. 쫑의 침이 묻은 초콜릿을 불평 한 마디 없이 깨끗이 닦은 뒤 바코드를 찍고 건네주는 직원의 미소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겨우 그것 때문에 내가 이런 짓 까지 하고 있는 건가.

 

쫑이 물고 온 초콜릿을 녹여 하트 모양의 틀에 부으며 수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그냥 이렇게 만든 초콜릿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나 요즘 외롭나봐. 모르겠다, 일단 가보자. 그 앞에 서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거잖아. 초콜릿 하나 가지고 뭐 그리 심각하게.

 

아직 바람이 찼다. 수진은 정성들여 포장한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고 목도리를 둘둘 두른 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오늘따라 쫑이 이상했다. 수진의 마음을 먼저 알아채고 앞장서던 쫑이 오늘은 자꾸 편의점 반대쪽으로 수진을 끌고 갔다. 결국 수진은 발버둥치는 쫑을 끌어안고 편의점으로 향해야 했다.

 

"어서오세요!"

 

편의점 문이 열리는 쨍그랑 종소리와 함께 언제나처럼의 서글서글한 인사가 들려 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직원의 인사가 설레지 않았다. 너무 긴장해서 그러나. 갑자기 초콜릿을 건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냥 도시락이나 사가지고 돌아갈까. 머뭇거리는 수진을 직원이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수진은 쫑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신이 준비해 온 작은 상자를 확인해 보았다.

 

"왕!"

 

며칠 전 그날처럼 쫑이 다시 한 번 뛰어 올랐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높았다. 허리를 곧추 세운 채 무려 십 센티 가량을 뛰어 오른 쫑의 주둥이는, 그러나 수진이 든 상자에는 턱도 없이 못 미쳤다. 쫑은 비참한 자세로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고 깜짝 놀란 수진은 얼른 몸을 숙여 쫑이 다치진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그때,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쫑이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벌떡 일어서서는 수진의 손에서 상자를 낚아챘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쫑은 그만 투명한 편의점 문에 쿵 하고 부딪혔다. 그래도 쫑은 상자를 놓지 않았다. 동시에 문이 바깥쪽으로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앳된 여자의 품에는 화려한 리본으로 묶은 커다란 상자가 안겨 있었다. 직원의 표정이 햇빛을 받은 것처럼 환해졌다. 저런 표정, 본 적이 없는데. 그다지 아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역시 초콜릿을 건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쫑은 열린 문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수진은 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쫑을 쫒았다.

 

쫑이 향하는 곳은 공원 산책로였다. 수진은 온 힘을 다해 뛰었지만 쫑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공원 바로 앞 횡단보도에서 쫑이 멈춰 섰다. 빨간 불이었다.

 

"컹!"

 

공원에서 작은 푸들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쵸파였다. 그 뒤를 현석이 쫓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강아지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현석에게 붙잡힌 쵸파가 쫑을 향해 연신 짖어 댔지만 상자를 입에 문 쫑은 짖을 수 없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횡단보도에 도착한 수진이 쫑을 잡기 직전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쫑은 아직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차도로 뛰어 들었다. 망설이던 쫑은 결심한 듯 차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때 현석이 서 있는 차도 쪽으로 모퉁이를 돈 차 한 대가 달려왔다. 정신없이 달리던 쫑은 미처 그 차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쫑! 안 돼!"

 

수진과 현석이 동시에 소리쳤다. 차도로 뛰어든 건 현석이 빨랐다. 달려오던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 댔다. 쵸파를 내려놓고 뛰어 들어 달려오는 쫑을 안아 든 현석은 반대쪽 차도에서 입을 막고 얼어붙어 있는 수진을 향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현석은 쫑을 안은 채 가까스로 멈춰 선 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바닥을 굴렀다. 현석에게 부딪히며 쫑은 물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놓쳤다. 상자는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컹!"

 

단호한 짖음과 함께 쵸파가 달려 왔다. 멈춰 선 자동차 보닛에 뛰어오른 갈색 푸들은 보닛 위에서 다시 한 번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믿을 수 없는 점프력이었다. 무려 사람 키보다 더 높은 곳 까지 뛰어오른 쵸파는 상자를 멋지게 낚아챘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겨울 햇살을 받으며, 상자를 물고 떨어지는 쵸파를 바라보는 쫑의 눈빛이 떨렸다.

 

신호등이 녹색 불로 바뀌었다.

 

 

- 6 -

 

"정말 고마워요. 쫑을 구해 주셔서."

 

"큰일 날 뻔 했어요. 요 녀석, 평소에는 수진 씨 말을 잘 듣더니 오늘은 왜..."

 

"모르겠어요. 전에도 한 번 초콜릿 때문에 말썽을 피우더니... 오늘도 그러네요. 초콜릿을 좋아하나."

 

"저런, 강아지에게 초콜릿 먹이면 큰일 나요! 아시죠? 이게 초콜릿 상자였나 보네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발렌타인데이죠? 하마터면 중요한 선물이 망가질 뻔 했네요. 좋겠어요. 이거 받는 사람은."

 

현석은 초콜릿을 수진에게 돌려 주며 쵸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쵸파는 늠름한 표정으로 컹 하고 짖었다.

 

그때 문득, 수진은 깨달았다. 편의점에 갈 때 기분이 좋았던 이유를. 현석과 날씨 이야기, 강아지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에는 항상 기분이 좋았다. 의미 없는, 그냥 덜 어색할 뿐인 대화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이 사실 수진의 마음을 조금 열어 주고 있었다는 것을. 편의점 직원의 형식적인 미소에도 가슴이 설렜던 건 사실 그렇게 열린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거, 현석 씨 드리는 거예요."

 

"...네?"

 

"그 초콜릿. 현석 씨 드리는 거라고요. 직접 만든 거예요. 제가."

 

수진은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그냥 그렇게 말해 버렸다. 현석의 표정이 햇빛을 받은 것처럼 환해졌다.

 

 

- 7 -

 

"이봐! 너 점프 좀 뛰더라?"

 

"지금 그게 문제... 너 미쳤냐?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 차도로 그냥 뛰어 들어?"

 

"흐흠. 나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성공했지. 크크크."

 

"하... 정말 너의 어리석음은 구제할 길이 없구나. 내 동거인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 살아남지 못했을 지도 몰라. 그런데도 웃음이 나오는 거냐? 정녕?"

 

"호... 걱정했나 보네?"

 

"뭐, 뭣! 누가? 내가? 널? 물론이다. 걱정했지. 너의 그 어리석음이 우리 강아지들 전체의 지성에 먹칠을 하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 동거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마음이야 가상하지만, 그게 목숨까지 걸 정도였나?"

 

"애초에 네가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어리석음을 순수하다고 봐 주는 내게 감사해라. 그보다,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지만 물어봐라. 뭐든 대답해 주지."

 

"푸들은 털이 잘 빠지지 않는다고 들었어. 네가 잘난 게 아니라 그저 종의 특징일 뿐이지. 나도 마찬가지다. 웰시코기는 유난히 털이 잘 빠지는 종이야. 나의 흠이 아니란 뜻이지. 이종 감수성이 떨어지는 네가 혹시나 나에 대해 오해를 할까봐 미리 말해 두는 거야. 앞으로 같이 지낼 날이 많을 것 같으니..."

 

"..."

 

"뭐야, 놀란 거야? 나와 같이 있는 게 싫다는 거야? 아니면, 지금 상황이 어떤 분위기인지 모를 정도로 두뇌 회전이 느리단 뜻인가."

 

"무슨 소리! 나의 빛나는 지성은 벌써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어. 잠시 그 생각을 했을 뿐이다."

 

"무슨 생각?"

 

"...몰라도 된다."

 

"흠. 역시. 생각은 무슨.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날 무시하지 마라! 크앙!"

 

"뭔데 그럼? 말을 해야 알 지."

 

"...푸들과 웰시코기의 교배종은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한다더군."

 

"이게 미쳤나... 죽고 싶어 너?"

 

"크앙!"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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