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0**년 10월 18일

오늘로 결혼한 지 딱 한 달째이다. 나는 시댁에서 살고 있다. 남편 이름으로 된 집은 다른 사람에게 전세를 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집의 전세 만기일까지 딱 일 년 동안만 시댁에 들어와서 살기로 한 것이다. 결혼 전에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얼마나 무모한 결정이었는지는 지난 한 달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서 살 집을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일 년 후에 결혼을 해야 했다.

스물여덟에 독립하고 7년 동안 반려동물은 물론 식물도 키우지 않고 혼자 살던 내게는 남편 한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도 충분히 버거운 일이었다. 올해 초 홀로 되신 시어머니를 일 년 동안 ‘모시고’ 살겠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층집이니까 생활공간이 보장될 거라는 것도 내 착각이었다. 현관이 나눠진 집이 아니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거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매일 아침 알람을 끄고 5분 더 잠을 청하는 나를 깨우고, 자신이 준비한 아침밥을 먹게 하고, 출근하는 나를 배웅해 준다. 퇴근할 때면 언제나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어제는 곁을 지나치다 시어머니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을 무심코 보게 됐다. 시어머니 무릎 위의 책이 거꾸로 놓여 있었다. 2층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팔에 소름이 서서히 돋았다.

 

20**년 10월 26일

저녁에 퇴근하려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야근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둘만 집에 있고 싶지 않아 나도 일을 만들어 야근을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근처의 바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열두 시가 다 되어 집에 왔다.

출발했다던 남편은 집에 오지 않았고, 거실에서는 시어머니가 ‘언제나처럼’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다녀왔다는 짧은 인사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샤워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조금 후에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어머니는 연인에게나 건넬 듯한 다정한 말투로 남편을 맞았다. 새아기가 고단한지 씻지도 않고 자는 거 같아. 남편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시어머니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 집안은 산소 농도가 50%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다.

 

20**년 11월 10일

토요일, 모처럼 늦잠을 자는데 뭔가 가슴을 눌러 잠에서 깼다. 남편이었다. 남편의 손은 이미 내 속옷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숨죽여 키득거리다가는 이내 터져 나오는 신음을 서로의 입술로 막아야 했다. 한참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시어머니였다. 반사적으로 남편을 밀어냈다.

얘들아, 일어났으면 밥 먹어야지. 엄마가 우리 아들 좋아하는 생선 구웠다. 밥은 먹고 또 자려무나.

시어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이 얼마나 빨리 식을 수 있는지, 쾌감이 얼마나 빨리 불쾌함으로 바뀔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남편은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대충 샤워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갔다.

시어머니는 언제부터 문밖에 서 있었던 걸까? 문틈에 귓바퀴를 갖다 대고 우리 소리를 엿들은 건 아니겠지?

추운 것도 모르고 밖에서 무작정 돌아다니는데 남편한테 연락이 왔다. 우리는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나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했다. 남편은 어머니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밥 먹으라고 했을 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다며 화를 냈다. 화를 내는 남편 때문에 더욱 화가 난 나는 남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악을 썼다. 그제야 남편은 나를 달랬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으니 남은 열 달도 금방 지날 거라고 했다. 나는 이제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참을 수 없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 남편을 봐서라도 조금만 더 참아보자.

 

20**년 12월 3일

남편이 내일부터 중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그 기간 동안 시어머니와 둘이 지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친정이 서울에 있으면 친정집이라도 가 있을 텐데, 엄마 아빠는 나를 결혼시키고 도망치듯 C 시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호텔에서 지낼까도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역시 무리겠지.

 

20**년 12월 4일

회사에서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남편 말대로 그동안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면도 있었다. 원래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나빠 보이는 법이니까. 나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시어머니와 한집에 사는 동안은 좋게좋게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시어머니에게 저녁 준비를 하지 말라고 하고, 집에 오는 길에 초밥을 사서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뭐 이런 걸 사 왔느냐고 하면서도 아이처럼 기뻐했다.

시어머니와 둘이서 초밥을 맛있게 먹고 시어머니가 직접 담근 유자차를 마셨다. 여전히 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올해 초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시어머니도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내 생각처럼 훈훈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차를 마신 시어머니는 나한테 줄 게 있다며 방에 들어가서 분홍색 보자기로 싸인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시어머니는 명품 스카프나 가방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기대가 됐다. 그러나 분홍색 보자기 안에 있는 건 흰 천이었다. 시어머니는 이거 내가 생리할 때 쓰던 건데 나한테 딸도 없고, 면이 무척 좋은 거라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했는데 너 줄게, 라고 말했다. 필요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왔지만 그냥 받아서 방으로 왔다. 시어머니가 쓰던 면 기저귀라니 쳐다보기조차 싫으면서도 호기심에 펼쳐 봤다. 얼핏 봤을 때 희게 보였던 천은 대부분 누렇게 변색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간혹 연갈색 피 얼룩이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그걸 보니 구역질이 났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저녁에 먹은 초밥을 고스란히 게워냈다.

어머 아가, 너 임신한 거 아니니.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계단참에 서 있던 시어머니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밀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끔찍하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20**년 12월 5일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카톡으로 남편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리고 집에서 당장 나가야겠다고도. 남편은 출장 다녀와서 얘기하자, 는 짧은 답을 남겼다.

남편은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집에 온다. 나는 내일 저녁까지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반차를 쓰고 회사 근처 부동산으로 갔다. P 신도시의 아파트는 대부분 신축이고 평수도 넓어서 우리 형편으로는 어림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져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돌아다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간 부동산에서 조건이 특이한 집을 찾았다. 일 년 계약에 보증금 5천만 원, 월세 45만 원인 집이었다. 일 년 계약이라니 남편과 나에게는 딱 맞는 조건이었다. 대신 방 세 개 중에서 하나를 쓸 수 없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집주인이 회사에서 1년 동안 미국 연수를 보내줬기 때문에 방 하나에 본인들의 짐을 넣어두고 갔다는 것이다.

부동산 아주머니가 아파트의 평면도를 보여주었다. 붙박이장과 작은 욕실이 딸린 큰방, 그리고 그 옆의 작은방, 현관 옆의 방, 거실과 주방, 큰 욕실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큰방 옆의 작은 방을 가리키며 이방이 잠겨있는 방이라고 말했다. 닫혀 있는 방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푸른 수염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그 잔혹한 동화를 머리에서 떨쳐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죽은 전처들을 방에 넣어둔 살인마 남편의 이야기와는 0.01%의 관계도 없으니까...

방 하나를 쓸 수 없다는 게 찜찜하긴 했지만, 심정적인 문제이지 싫을 이유가 없었다. 가족이라고는 달랑 두 사람인데 방 두 개면 충분하다. 게다가 이런 조건의 집을 다시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선금 2백만원을 내고 가계약을 했다.

 

20**년 12월 6일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내 멋대로 가계약을 해버렸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내 마음을 돌이킬 방법은 없으니까 설득할 생각은 하지도 마. 당신이 싫다면 나 혼자라도 이 집을 나갈 거니까. 나는 단호하게 내 입장을 전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남편은 자기 전 침대에 나란히 누워 알았다고 했다. 나는 스프링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럼 당장 이번 주말에 이사 가자. 거기 지금 비어있거든.

남편은 어머니께 말씀드릴 시간이 필요하니 일주일 정도만 양보해달라고 했다. 그것까지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이사업체를 예약하고 밤늦게까지 인터넷으로 침대와 책상, 의자 등을 주문했다.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 등은 그 집에서 쓰던 걸 그대로 쓰기로 했으니까 일 년 후 남편 명의의 집에 들어갈 때 사면 된다.

명치끝을 막고 있던 작은 돌멩이들이 얼음처럼 녹는 기분이었다.

 

20**년 12월 15일

드디어 이사를 했다!

남편과 나는 이사 기념으로 각방을 돌아다니며 사랑을 나눴다. 그동안 참아야 했던 신음 소리도 마음껏 내면서. 집주인이 거실에 소파를 놓고 갔다. 우리는 소파 위에서도 사랑을 나눴다. 다른 사람 소유의 가죽 소파에 우리의 땀과 얼룩을 남겨 둔다고 생각하니 더욱 자극적이었다.

 

20**년 12월 16일

일요일, 실컷 잠을 자고 일어나니 11시였다. 아무도 방해하거나 깨우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남편과 나는 아침 겸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남편이 편의점에 가서 라면과 김치를 사 오는 동안, 나는 냄비에 물을 끓였다.

라면을 먹고 냉장고에 남은 김치를 넣어두려는데 텅빈 냉장고 한구석에 젓갈 같은 게 들어있었다. 유리병에 비쳐보이는 생김새로는 창난젓처럼 생겼는데 함부로 버릴 수도 없어서, 서랍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깜박 잊고 두고 갔나 보다.

 

20**년 12월 17일

퇴근길 장을 보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회식이라고 연락이 왔다. 월요일부터 무슨 회식을 하냐는 말에 남편은 자기도 원해서 하는 건 아니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나는 장보기를 포기하고 마트 지하에서 김밥 한 줄을 사 먹었다.

집에 와서 책을 보는데 닫혀 있는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사각사각, 이빨로 뭔가를 긁는 것 같은 소리였다. 혹시 저 방안에 쥐라도 있는 게 아닐까? 덜컥 무서워져서 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소파로 돌아와 책을 읽는데 이번에는 손톱으로 벽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 앞에 가까이 가니 소리가 멈췄다. 내가 가까이 갔기 때문에 멈춘 것이다. 방 안에 무언가가 있고, 내가 가까이 가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려봤지만 15도 정도 기울던 손잡이는 단단히 걸려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20**년 12월 18일

어제 일 때문에 일찍 집에 돌아온 남편과 함께 ‘그 방’ 앞에서 맥주를 마셨다.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윗집이나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현관을 마주 보고 있는 옆집의 소리가 안쪽 방에서 들릴 리가 없었다. 윗집이라면... 약간의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윗집에서 난 소리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20**년 12월 28일

남편이 회사에서 송년회를 한다기에 나도 저녁에 친구들을 만났다. 한 명은 대학 동창이고, 한 명은 예전 직장 동료인데 나를 통해 셋이 친해졌다. 저녁을 먹고 2차는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데 진희가 집들이 겸 우리 집에 놀러 가서 차나 마시자고 했다. 정리정돈을 잘하고 사는 편이 아니라 누굴 초대한다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로 흉을 볼 친구들도 아니고 집에서 편히 수다 떠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굳이 집구경을 하자며 방을 둘러보던 연주가 닫혀 있는 방문을 열려고 했다. 내가 그 방은 열면 안 된다, 이러저러하게 됐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대뜸 푸른 수염 얘기를 꺼냈다. 출입이 금지된 작은 방, 푸른 수염의 아내들이 죽어있던 방. 그래, 사람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나도 닫혀 있는 방에 대해 부동산 아주머니한테 처음 들었을 때 그 생각부터 났었으니까. 하지만 자기가 사는 곳도 아닌데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않나?

못 들은 척 넘어가려는데 이번에는 방 하나를 못 쓰는 게 기분 나쁘지 않냐고 물었다.

기분 나쁠 일이 뭐 있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자 연주는 아니 나 같으면 집안에 닫혀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좀 신경 쓰일 거 같아서... 니가 괜찮으면 됐지, 라며 말끝을 흐렸다. 연주는 항상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는 진희랑 둘만 만나야겠어.

 

20**년 1월 7일

연말부터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어제부터 닫혀 있는 방문 틈으로 냉기가 새어 나온다. 혹시 창문이 열려있는 건 아닐까? 열려있다고 해도 14층이라 밖에서 닫는 건 불가능하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자 남편이 만류했다. 문을 닫지 않고 갔다면 그 사람들 책임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면서.

남편은 그 문에서 새어 나오는 냉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 방 앞에 지날 때면 발바닥이 얼어붙을 것 같은데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야?

 

20**년 1월 8일

저 방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오늘 집에 돌아와서 보니 날이 풀려서 그런지 냉기가 좀 잦아들었다 했는데, 조금 전부터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당연히 아기는 아닐 테고 고양이 우는 소리인 것 같다. 설마 열린 창문으로 고양이가 들어온 건가?

남편은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회식도 지나치게 잦고... 연말연시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남편이 예전보다 덜 살갑게 구는 것 같다. 시어머니와 일 년을 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마음이 상했는지도 모르지. 이번 주말에는 시댁에 가자고 먼저 얘기하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너무 가깝고 선명하게 들린다.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녹음을 해둬야겠다.

 

20**년 1월 9일

남편은 술도 별로 취하지 않은 채 새벽 세시에 들어왔다.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고양이 소리를 들려주는 게 더 급했다. 코트도 벗지 않은 남편의 손을 붙들고 그 방 앞으로 갔다. 거짓말처럼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녹음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핸드폰의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뭐가 잘못됐는지 녹음 파일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녹음할 때 볼륨을 너무 작게 해놔서 그런가? 분명 고양이 소리가 났다는 내 말에 남편은 잠 좀 자자며 짜증을 냈다.

니가 감히 나한테 짜증을 내? 새벽 세시에 들어온 주제에?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남편은 코트와 양말만 벗고 소파에 누워 코를 골기 시작했다.

기가 막혀 눈물만 흘렀다.

 

20**년 1월 10일

도저히 출근할 기분이 아니라 회사에는 식중독에 걸렸다고 하고 휴가를 냈다.

어제 남편 때문에 잠도 설쳤고 집에서 느긋하게 잘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혼자 집에 있으니 결혼하기 전처럼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닫혀 있는 방에 대해서는 되도록 잊으려고 노력하며 영화도 보고 책도 읽다가 동네 중국집에서 잡채밥을 주문했다. 그런데 아저씨한테 이상한 말을 들었다. 어쩌면 이건 임대 사기 같은 걸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기 전에 아저씨와 나눈 대화를 좀 적어놔야겠다.

아저씨: 아이고, 정말 1402호에 사람이 들어왔네.

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 여기 빈집으로 꽤 오래 있었거든.

나: 그럴 리가 없는데요? 여기 살던 주인이 1년 동안 해외연수 간다고 했는데...

아저씨: 그 주인 본 적 있어?

나: 직접 본 적은 없어요.

아저씨: 그럼 부동산 여자한테 들은 거지?

나: 맞아요.

아저씨: 그 여자 말은 믿을 게 못 돼.

나: 이 집이 얼마나 비어있었던 건데요?

아저씨: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고... 참, 저 작은 방은 여태 닫혀 있나?

*

잡채밥에 손도 대지 않고 부동산에 내려갔다. 별다른 메모 없이 부동산 문이 닫혀 있었다. 빈집으로 오래 있었다니 부동산 아주머니와 말이 다르지 않은가. 백번 양보해 몇 달 전에 해외연수를 떠났다고 생각해도 연수 기간이 일 년이라고 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집주인 얼굴을 보긴커녕 통화도 한 번 하지 않고 계약을 했다. 부동산이 대리인이고 위임장에 도장까지 갖고 있으니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급하게 이사하느라 꼼꼼하게 알아보지 못한 내 책임이다.

부동산 아주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보증금 5천만 원을 날리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20**년 1월 11일

새벽 두시다. 그러니까 오늘은 1월 10일이 아니다. 11일이 맞다.

남편은 아직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새벽 세시에나 오려는 걸까?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회식이 있다거나 늦는다거나 하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깐,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왔나보다.

 

*

 

퇴근길에 부동산에 들렀지만 역시나 문이 닫혀 있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계약서를 찾아 집주인의 연락처로 전화를 해봤다. 아예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손톱을 물어뜯다가 손톱 옆에 살까지 물어뜯었다. 한참 동안 피가 나오다 멈췄다.

일곱 시가 되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늦게 들어와서 미안하다며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했다. 마땅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집 근처의 한정식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모처럼의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에게 집 계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해버렸다. 내 말을 들은 남편은 계약할 때 임대인의 주민등록증도 확인했고, 그와 동일한 명의의 통장에 입금내역도 있으니 보증금을 날릴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부동산이 연락이 안 된다는 말에는 너무 과민반응하지 말고 두고 보자고 했다. 중국집 배달원의 말에 뭐 그리 신경 쓰느냐는 투였다.

나는 말 나온 김에 솔직히 털어놨다. 그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방에서 이상한 소리도 나고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 가능하면 다른 데로 옮겼으면 좋겠다...

남편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이사온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웬 변덕이냐며, 정 싫으면 다시 본가에 들어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말하나 마나 그건 더 싫었다. 그렇지만 그런 속을 내보일 수는 없어 화제를 돌렸다. 내일 어머니 뵈러 가면 어때? 남편은 기뻐하는 기색 없이 괜찮다고 주말에 어머니는 절에 가실 거라고 말했다.

내 딴에는 선의로 제안했는데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한정식은 가짓수만 많지 정작 맛있는 요리는 별로 없었다.

 

20**년 1월 12일

남편과 마트에 가서 과일과 채소, 찬거리를 잔뜩 사 왔다. 냉장고 서랍을 여는데 구석에 젓갈통이 보였다. 가만, 이 집이 쭉 비어있었다면 저 젓갈은 언제부터 냉장고에 있었던 거지?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론은 중국집 아저씨가 괜한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것.

다시는 거기서 시켜먹지 말아야지. 누굴 호구로 보고.

 

20**년 1월 13일

사악, 사악, 사악. 침대에 누워 있는데 옆방에서 맨발로 방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그야말로 귀신은 아닐테고 문짝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20**년 1월 20일

진퇴양난. 적들에게 포위되어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장수의 심정이다. 닫혀 있는 방문 뒤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지만, 남편에게 말해봐야 본가에 돌아가자는 핑곗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20**년 1월 22일

남편은 오늘도 늦는다. 정말 바람이라도 난 걸까?

 

20**년 1월 25일

눈 내리는 밤, 금요일. 나는 집에서 혼자 치킨과 맥주를 마신다.

닫혀 있는 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매일 약간씩 달라진다. 하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아. 저 방문 너머에 귀신이 있다면 거실로 불러내 왈츠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거든. 하하!

 

20**년 1월 28일

주말 내내 눈이 온 데다 기온이 더욱 떨어져 온통 빙판길이 되어버렸다. 집에 오는 길에 두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20**년 1월 29일

나는 지금 병원에 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일기를 쓰는 건 그래야 내 마음을 어느 정도 가눌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오늘도 퇴근 무렵 남편에게서 늦을 거란 연락을 받았다. 이제는 당연한 일인 듯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밤 아홉 시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J 병원 관계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남편의 이름이 나왔고 내가 그의 배우자가 맞는지 확인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병원 관계자가 나를 달래며 왼쪽 다리 골절과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택시를 불러 서둘러 병원에 갔다. 다리에 깁스를 한 남편은 3인실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남편이 울먹이며 말하는 바람에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 진정된 후에 차분히 들어보니 시어머니랑 외식을 하고 본가에 들어가던 길에 둘이 함께 트럭에 치였다는 것이었다. 건널목을 앞에 두고도 과속하던 트럭이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매일 밤 늦은 이유가 회식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본가에 들러 밥을 먹고 어머니가 주무시는 걸 보고 오느라 그랬다는 게 더 큰 충격이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어머니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니...

그냥 어머니랑 둘이 살지 나랑 결혼은 왜 한 거야?

 

20**년 2월 2일

시어머니의 장례는 수목장으로 치러드렸다.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남편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고 나니 내 잘못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내가 그냥 본가에 있었다면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일도 없지 않았을까?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20**년 2월 18일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컸는지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온종일 밖에도 나가지 않고 핸드폰 게임만 하고 있다. 하긴 다리도 성치 않으니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퇴근해서 집에 와보면 컵라면 용기나 과자봉지가 싱크대 위에 굴러다닌다.

눈밑의 다크서클과 홀쭉하게 들어간 볼...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20**년 2월 23일

남편과 크게 싸웠다. 발단은 집 때문이었다. 내가 본가를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 본가를 팔아서 우리가 살 새집을 마련하자고 했더니, 내게 악마 같은 년이라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본가는 절대 팔지 않을 테니 이 집에서 살든가 본가에서 살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내 탓이 아니라고 하자 남편이 깁스를 한 발로 내 옆구리를 찼다.

순간 남편과 이어진 끈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손에 집히는 물건들을 남편을 향해 던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안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내 블라우스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옷을 벗고 어디가 다쳤는지 살펴봤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일단 물티슈로 바닥의 피를 닦기 시작했다. 피는 거실에서 침실로 이어져 있었다. 남편은? 남편은 어디 갔지? 본가에 갔나? 하긴 내게 욕을 하고 발로 차기까지 했으니 내 얼굴을 볼 면목이 없겠지.

 

20**년 2월 24일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화를 해도, 문자를 보내도 응답이 없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래 봐야 본가에 가 있을 테니 별로 걱정이 되진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닫혀 있는 방에서는 뭔가가 썩는 냄새까지 나고 있거든.

 

*

 

냉장고를 열어봤다. 냉장고 안은 수십 개의 밀폐용기로 가득 차 있었고 각각의 밀폐용기 안에는 젓갈이 가득 들어있었다. 젓갈? 누가 넣어놨지? 나는 젓갈을 담글 줄 모르는데...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엄마가 우리 집에 반찬 놓고 갔어? 얘는 엄마가 너희 시댁에 왜 간다니. 엄마, 나 시댁에서 나왔다고 말 안 했어? 나왔어? 그럼 지금 어디 살아? 알았어, 끊어.

붉은 기운이 도는 분홍빛 젓갈이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밀폐용기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말고기처럼 두툼하게 썰린 젓갈을 손으로 집어 먹어보았다. 내가 상상했던 맛은 아니었는데,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뭔가 먹은 기억이 없었다. 나는 젓갈을 프라이팬에 구워서 먹었다. 환풍기를 틀었는데도 집안에 누린내가 가득 찼다. 그렇지만 저 망할 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썩은 냄새보다는 차라리 누린내가 나은 것 같았다.

 

*

 

남편이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난 걸까? 날짜 감각이 없다. 오늘이 며칠이지? 회사에도 가봐야 할 텐데.

 

*

 

저주받은 방에서 여자 우는 소리가 들려. 근데 그 여자 목소리가 시어머니 목소리랑 똑같아. 죽은 시어머니의 혼령이 저 방 안에서 울고 있는 걸까? 어머니, 아들이 있는 본가에나 가시지 왜 여기 와서 우는 거예요. 시끄러워요. 시끄러워 죽겠단 말입니다.

 

*

 

귀신이 곡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지내고 있다.

 

*

 

그 방 앞을 지나가는데 엄지발가락 아래에서 뭔가 톡, 하고 터지는 느낌이 났다. 주저앉아 발가락 밑을 봤다. 구더기였다. 구더기가 내 발 아래 한 마리, 두 마리...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저 문을 열어야겠어. 열쇠공을 불러야지. 지금 몇 시지? 열한 시? 밖이 깜깜한 걸 보니 밤 열한 시겠지? 열쇠공은 시간 같은 거 상관없지 않나? 나는 인터넷에서 열쇠공을 검색해 위에서부터 전화를 걸었다. 대부분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한 사람은 전화를 받았는데 지역이 너무 멀어서 안 되겠다고 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되겠지. 나는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마침내 한 사람이 집에 왔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열쇠공이었다. 열쇠 구멍이 보이지 않아도 방문을 열 수 있나요. 그럼요, 저는 누구보다 잠긴 문을 잘 여는 눈먼 열쇠공이랍니다. 눈먼 열쇠공은 가방에서 도끼를 꺼내 방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방문이 다 부서졌을 때 눈먼 열쇠공은 사라지고 없었다. 돈도 받지 않고 가버리다니 착한 사람이군.

너덜너덜해진 방문 구멍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고, 드디어 그 방안을 볼 수 있었다. 방안에는 부동산에서 들은 대로 가구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창문이 열린 것도 아니었고, 고양이가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시어머니의 혼령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구더기는 어디서 나온 거지? 썩은 냄새는? 방안을 들여다봤지만 해결된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궁금증만 더 늘어난 셈이다. 게다가 멀쩡한 방문을 부숴버렸으니 이 집에서 나갈 때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방문 가격은 얼마지? 십오만원? 삼십만원? 무책임한 열쇠공 같으니라고. 내일은 열쇠공에게 다시 연락해서 부서진 문을 물어내라고 해야겠다. 아, 피곤하다. 너무 피곤해. 눈알이 빠질 것 같아. 일단 침대에 가서 누워야지.

근데 침대에 누워있으면 누가 자꾸 나를 쳐다보는 거 같아. 기분 탓이려나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정말 이 방에 누군가 숨어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맞아, 남편이 숨어있나보다! 나랑 숨바꼭질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랬구나, 남편은 나랑 숨바꼭질을 하는 거였어. 저기 붙박이장 속에 숨어있잖아. 근데 당신 눈은 왜 그렇게 충혈된 거야? 그렇게 부릅뜨고 있어서 그렇구나. 언제부터 숨어있었어? 완전 뼈만 남았잖아. 하얀 뼈 위에 살점이 좀 붙어있긴 한데... 어휴, 냄새. 여기서 구더기가 나온 거구나. 당신이 이런데 불편하게 숨어있으니까 시어머니 귀신이 찾아와서 그렇게 울었나 보다. 자, 그만하고 빨리 나와. 내가 당신 찾았거든. 이제 당신이 술래야. 빨리 나오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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