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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공터에 하차

2018.08.04 19:0008.04

공터에 하차


더듬이를 맞비비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생물이 내는 것처럼 들렸던 소리는 자세히 들으려고 들면 들수록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로 찰칵찰칵 뒤바뀐다....... 이민지 주변의 징조들은 대개 언제나 징조로서만 마감됐다. 이민지도 이에 별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보내져온 진짜 신호들을 놓쳤다가 나중에 혼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중 무의식적으로 추리의 끝에 다다라 이전의 가능성들을 깨닫고는 아쉬워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달랐는데, 게 입에서 끓는 거품 소리를 편집한 듯한 기묘한 소음이 아무리 집중해서 들어도 생활음으로 변하지 않은 채 냉장고 뒤에서 노골적으로 증폭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민지는 악 하고 소리 지르고는 바지를 다리에 꿰며 복도로 뛰쳐나왔다. 끝이 말려들어간 긴 대롱 같은 주둥이를-어디가 주둥이고 몸통인지 구분이 가지는 않았지만-가진 반투명한 흰색 벌레가 냉장고 뒤에서 느리고도 혐오스럽게, 마치 방금 전 어느 무심한 손아귀의 갑작스러운 기습이 있기라도 했다는 듯 능청맞은 모습으로 갑자기 몸을 절반이나 불쑥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벌레의 해상도는 징그러울 정도로 높아서, 아주 잠깐이었는데도 키조개처럼 매끈해 보이는 몸통에 실은 사선으로 미세한 홈이며 주름들이 패여 있고, 그 사이에 갈색 물때 같은 고물들이 새우 등의 똥처럼 들어차 있어 몸통의 주인이 두 개밖에 없는 가느다란 앞다리를 움직여 엉덩이를 운반할 때마다 주름 사이의 흡착물들도 그 틈에서 같이 구물구물 이동하고 새로이 반죽되는 것이 시야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이민지는 즉각 벌레가 뒤집어쓰고 있는 흡착물들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론내리는 것이 늦는 이민지로서 그러한 전광석화와 같은 판단내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방 구석구석에 버려졌던 이민지의 살비듬, 이민지의 생리혈, 이민지의 귓밥, 이민지의 모근들이었다. 벌레는 방의 보이지 않는 모서리에서 이민지 파우더 위에 뒹굴면서 그것을 집어먹기도 하고 몸에 바르기도 해가며 즐겼을 것이며, 밤이면 야참을 위한 찌꺼기를 몰래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을 것이었다. 변기의 물때를 갉아먹고 칫솔모 뿌리를 청소하고 잠든 이민지의 머리카락과 음모 사이를 기어 다니며 모낭충을 잡았을 것이다. 이민지는 자기의 모든 부위들을 알아보았다. 벌레는 탈락한 이민지의 육체를 온몸에 걸치고 이불처럼 덮고 핥아먹으면서 동거하고 있었다. 이민지는 벌레를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민지는 이성을 찾고 까치발을 뜬 채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벌레의 사진을 찍은 후 아까보다는 조금 둔하게 그러나 신중한 걸음으로 다시 뛰쳐나갔다. 벌레는 뽁뽁뽁뽁 소리를 내면서 이민지가 방금 발생시킨 신선한 흔적들을 바닥에서 빨아먹는 중이었다. 이민지는 벌레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고 반응을 기다렸다.

“계속 주파수나. 흔들리는 시선이 등장하잖아요. 트레이드마크라고 해야 할지 매너리즘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것도 등장이라고 부르시네요?”
“아 제가 틀렸나요?”
“아뇨. 재밌어서요.”


“저 사람 누구더라?”
한나가 턱을 긁적이다 말고 물었다. 손톱 밑에는 주황색 때가 끼어 있었는데, 나중에 한나가 입술을 긁은 것이었음을 알았다. 한나의 앞니에서도 자주 보이던 색깔이었다.
“뭐? 너 저 사람하고 사귀었었잖아.”
“아니 당연히 아니지. 걔 말고 옆에.”
한나는 예전 남자친구를 상대로 고른 이유를 ‘두개골 안에 뇌가 들어있어서’로 일축했었다. 
“아 저 사람. 우정 씨. 잊어먹기 힘든 이름인데. 용케 까먹었네.”
“암튼 우정 씨? 맨날 저러더라.”
“말 같은데 사실 맞장구고........허구한날 재밌다느니 흥미롭다느니.”
“아.”
“응?”
“저거 우리 교복인데.”
흡사 자명종처럼 시끄러운 여중생 무리의 떠들썩함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런 걸 어떻게 입고 다녔나 몰라.”
둘은 조악한 졸업영화 포스터가 더덕더덕 붙은 극장 로비를 빠져나왔다. 처음엔 호젓하니 기분 좋게 느껴지던 초저녁 바람에 곧 길거리 가판대 위 시무룩하게 늘어선 오징어니 땅콩 냄새의 부산스러움이 섞여들었다. 상영을 끝낸 학생들이 담배를 피러 나왔다가 얼굴로 불어 닥치는 바람에 뭐야, 움츠리는 동안 한나는 이마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만끽하듯이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잠시 서 있었다. 이선진은 한나의 그런 호들갑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벌레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곧 첫 등장 때와 같이 책장 구석에서 함부로 철푸덕 튀어나왔다. 일행은 우와악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며 이거 굉장하네요 한마디 하더니 뒤늦게 말을 덧붙이듯 코를 싸쥐고 휘둥그레 뜬 두 눈을 껌뻑였다. 멍하니 있던 다른 누군가가 마찬가지로 막 생각난 듯이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막무가내로 눈에 닥쳐드는 벌레의 폭력적으로 기이한 외양에 다들 순간 압도당한 모양이었다. 이민지는 기묘하게도 한순간 벌레를 미리 씻기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벌레는 그 사이에 사양 않고 마음껏 집안을 누빈 탓인지 더더욱 살이 올라있었고, 끓여 굳힌 고약 같은 악취를 풍겼으며, 어느새 등에는 굵은 털까지 빽빽하게 자라있었다. 벌레는 겨드랑이처럼 움푹 들어갔다 펴지길 반복하는 몸을 기역자로 굽히면서 고개로 추정되는 부위를 태평스레 까딱까딱 움직였는데, 둔중한 몸이 허공을 새롭게 침범할 때마다 2차 성징의 증거들이 뒤따라 반 박자 느리게 물결쳤다. 이민지는 언젠가 아침 일찍 탄 기차에서 이런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차창 밖이다. 빠르게 내달리는 기차를 앞세우고 포착과 동시에 넘실대며 바래가는 포장도로와 송전탑들, 음소거된 경마 프로그램의 3등 말처럼 평온히 구르는 작은 자동차들, 굳혀 놓은 듯 단조롭게 펼쳐진 풀밭은 푸르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샛노랗게 구워져 있다.......그 때 기차의 정차가 끼어드는 것이다. 창밖의 눈부심과 어렴풋함은 그 모든 것을 흐려 놓던 햇빛과 동시에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한 플랫폼만이 속도를 늦추며 맥없이 이어진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것이 이선진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하나 먹어?”
“에?”
한나가 운전하다 말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떨어져나간 소보로가 봉지 귀퉁이에 따로 작은  덩어리가 돼서 모여 있다. “그래도 배고프면 먹어.” 둘은 늘 문답 몇 개를 건너뛰어도 대충 대화가 통했다. “이제부터 또 달려?” 이선진이 곰보가 다 떨어져 나가서 볼품없이 부피가 줄어든 찰빵 하나를 한입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한나는 대답 대신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더니 다시 핸들을 잡았다. 
“당연하지.” 
이선진이 더빙하듯이 자기 말을 받았다.
둘은 아침 일찍 한나의 졸업영화를 찍을 장소를 보러 가는 참이었다. 한나가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곤란해 하던 차에 이선진이 예전에 자기 영화를 위해 봐 뒀던 공터가 있는데 마음에 들면 써도 좋으니 한 번 보러 가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낸 것이다. 
이선진은 조수석에 반쯤 누워서 빠르게 차를 모는 한나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까맣게 그림자가 진 옆얼굴에서 눈만이 빛나고 있다. 한나의 눈은 열쇠나 단추처럼 으레 반짝이는 버릇이 있는 물건인 듯 언제나 일정량의 빛을 괴고 있었다. 
“너는 내년에 찍나?” 한나는 ‘나’를 발음할 때 니은이 두 개는 있는 것처럼 발음하곤 했다. 이선진은 한나가 자기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앞의 받침과 이어진 두 개의 자음이 부자연스럽게 울리는 것을 듣는 게 즐거웠다.


한 남자가 이민지의 화장실에서 토했다. 어떤 여자는 벌레가 먹고 싸는 걸 보겠다며 과자를 뿌려주고 기어코 벌레가 크게 반응하는 걸 보더니 그 후로는 안색이 질려서 벌레가 움직일 때마다 간헐적으로 같이 경련했는데, 그 타이밍이 벌레의 털이 몸의 이동에 반응하는 속도와 같아서 둘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다리를 떨면서 주변을 살피다가 저게 연기를 무서워 할 수도 있겠다는 소리를 입속으로 뇌까리더니 방금 전의 항변적 웅얼거림이 머뭇머뭇 기어 나왔던 속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벌레 위로 몇 번 털었고, 의무를 다한 구실 좋은 구제 도구는 곧장 입에 물려 바쁘게 줄어들었다. 이민지는 바닥에 흩어진 담뱃재며 쿠키 부스러기를 쳐다보다가 멍청한 기분에 사로잡혔고, 진작 그랬어야 했다는 듯 119를 불렀다.
방문자들의 초조하다긴 어딘지 좀 해이한 분위기에 잠식당한 이민지의 좁은 방은 이미 공적인 장소로 판단되었는지, 소방대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문의 노루발을 내리고 흙발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반응은 앞서 방문한 사람들의 그것과 대동소이했고 이민지와 벌레 선배들은 먼저 벌칙 풀에 빠진 버라이어티쇼 참가자들처럼 뽐내듯이 턱을 빼고 공무원들을 다음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민지가 오전에 올린 트윗은 이미 리트윗 다섯 자릿수를 넘으며 퍼져나가고 있었고 이민지가 직접 움직일 것까지도 없이 방문자들이 타래들을 열심히 갱신하며 현재의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이민지의 알림창에는 벌레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으며 방문자들은 이민지보다도 이 상황을 견뎌야 할 입장에 놓여 있기라도 하다는 듯 짐짓 심각한 어조로 새로 관찰한 사실들을 보고했다. 
“살살!”
벌레는 거대한 집게에 붙들려 순식간에 채집통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대원들이 벌레를 잡은 집게를 잘린 목처럼 쳐들고 나가는 장면이라도 기대한 것인지 핸드폰을 바로든 채 시선을 겨누고 기다리던 방문자들은 모두 맥이 빠진 모습으로 신속한 처리 과정을 바라보다가 각자 가방을 챙겨 대충 목례하며 떠나갔다. 어딘지 덩달아 실망스러운 것은 이민지도 마찬가지였다. 소방대원들은 의례적인 말 몇 마디를 건넨 후 전문가다운 산뜻하고도 가차 없는 태도로 사라졌고, 이민지는 재빠르게 문을 잠근 후 또 다른 벌레를 목격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에 때로 소스라치듯 동작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면서 혼자 바닥의 발자국을 닦았다. 침대 밑에서 나온 제 2의 벌레가 버르적거리며 소방대원에게 들려나가는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그때부터는 모두가 벌레가 두른 오물의 정체를 알아차릴 것이었다.

“이게 선뜻 다가오지는 않지.”
“아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전에 봤던 거 기억 나? 하룻밤 샜다는 설정인데 다음 장면에서도 리젠트 머리를 유지하고 있잖아. 그런 뻔뻔한 연출 같은 걸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걸 다 넣어서 보기에 아 얘가 넣고 싶은 걸 다 넣었구나 싶게. 또 이게 읽어만 봐선 장면 장면이 탁탁 끊기는 신인 같은 편집이 들어가겠구나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지 않고 좀 능청스럽게? 가려고.”
“내레이션이겠네?”
“응 근데 이민지 말고 안 어울리는 다른 목소리가 할 거야.”
“이미지? 이민자? 아니면 그냥 평범한 이름으로 한 건가.”
“아니 식민지 같은.......그런 거 생각했어.”
“여기서 벌레는 뭐지.”
“아직 못 정했어. 이민지 얘기는 여기까지 밖에 못 썼고 방향만 있는데.......뭔가 방이 낡아가고 막 ‘이민지의 방은 파도에 깎여나간 듯이~’하는 내레이션이 나오면서 방에 옆에서부터 파도가 들어오고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거야말로 애니메이션으로 할 수 있겠다. 여기 맞지? 아까 오른쪽에서 꺾었는데.”
 

좀비도 좀비 나름

각자 좋아하는 뇌가 있지

좀비도 좀비 나름

골고루 입맛들이 있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프로젝트들이 기획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민지는 우울해지곤 했다. 좀비 프로젝트는 그런 우울한 기획들 중 하나였다. 네덜란드 민요를 약간 손본 성의 없는 멜로디에 언뜻 듣기에 번역 투가 짙은 좀비 가사를 더한 물건이었다. 우주에서 온 좀비라니 너무 어딘가에서 들어봤음직하다. 애초에 외계란 뭔가? 좀비들은 빅뱅이 일어났을 때 함께 발생했다. 빅뱅의 부작용이었다. 좀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를 원한다는 속성을 남겨뒀기 때문에 우주 좀비들도 똑같이 뇌를 찾는데, 우주 좀비는 기존 좀비와는 다르게 취향이 있어서 아무 뇌나 입에 대지 않는다. 빅뱅이라는 단어에서 풍겨오는 싱싱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좀비들은 처음에는 작은 고치 속에서 동면하는 무정형의 반(反) 생물들이었다. 보통 크기의 인간보다 조금 큰 정도였으니 얼마나 작았는지 알만하다. 어느 날 지구에서 가장 처음으로 절벽에 그림을 그리게 될 생명체가 막 끈끈한 점액에 뒤덮여 추위에 떨리는 첫 울음을 터뜨렸을 때, 좀비들은 고치 속 자신들의 몸이 더 이상 무정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앎과 동시에 부화의 첫 조짐을 보였다. 단순히 빛나는 기체에 불과하던 고치가 경도를 지니게 된 것이다. 
고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딱딱해져 마침내 다이아몬드의 일곱 배 정도로 단단해졌고 좀비들은 작은 알 속에서 차차 가능성을 잃어가는 형태를 즐기며 코끝으로 알껍데기를 안쪽에서부터 두드려 깨부쉈다. 코가 단단함으로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곧잘 꺾이거나 부러지고 마는 연골이 들어 있어 끝이 물렁한 냄새 맡는 기관으로 바뀌어 버리자 변화를 받아들여 미덥지 못한 작은 가리비 모양 앞발로 그 일을 대신했다. 이렇게 약 30억구의 좀비가 새로운 입술로 입맛을 다시며 부활, 아니 부화했다. 이미 지구는 20세기를 뒤로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처음 좀비를 만난 인간은 러시아에 체류 중이던 도굴꾼 발지르 색손이었다. 색손을 찾아온 것은 색손-좀비로, 색손-좀비는 색손이 색손이라는 성을 얻기 아주 오래 전에 잠시 머물렀던 한 인간을 본으로 한 좀비였던 것이다. 색손-좀비는 도시 외곽의 허름한 술집에서 주전부리를 훔쳐 달아나는 중이던 색손과 마주치자마자 발지르색손- 좀비 외의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색손에게 덤벼들어 충격으로 가득 찬 두개골을 으스러뜨리고 순간의 어리둥절함으로 양념된 색손의 뇌를 꺼내 찌꺼기 한 조각 남김없이 맛있게 긁어먹었다. 뇌를 빼앗긴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활동을 계속했지만 그 사는 방식이란 딱 한 가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발지르 색손은 제일 먼저 노래하기 시작했다.
“반 생물들이요? 반은 생물이고 반은 아니란 건가.”
“아니 그 반이 아니라.”
“안티, 안티. 우리 진기가 좀 이래요.”
“아니 지도 몰랐으면서 알았던 척 하네.”
“남들도 지만큼 멍청한 줄 아는지........”
“반 생물이라는 게 말이 되나요?”
“좀비도 어차피 없는데요. 암튼 잘 쓰겠습니다.”

좀비도 좀비 나름, 각자 좋아하는 뇌가 있지. 좀비도 좀비 나름, 각자 입맛들이 있지.
좀비 프로젝트란 이러한 배경 아래 뇌를 잃어버린 네 명의 밴드 멤버 박유경, 이진기, 김상지, 구주영 이하 박유, 이기진, 김상(씨), 어린구주가 함께 좀비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닌다는 기획이었다. 이민지가 보기에는 너무 붕 떠 있었다. 좀비 세계관의 일부는 이민지에게 빚지고 있었는데, 밴드는 공연이 끝난 후에 늘 트는 감사 크레딧이나 협력해준 인물들 이름 란에도 이민지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정확히 하자면 넣긴 넣었지만, ‘민지 그리고 민지’ 로 들어가 있었다. 녹음을 도와준 여민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민지는 영 마뜩찮아서 두 번째 공연부터는 구태여 보러 가지 않았다. 나중에 밴드 멤버들이 발지르 색손을 일본에서 해녀 일을 하고 있던 18살의 니시구치 카렌 짱으로 바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복을 따러 잠수한 깊은 곳에서 맨틀을 뚫고 올라온 니시구치-좀비와 조우한 것이다. 듣기로는 박유경은 이미 박유가 아니라 카렌 짱 역할이 된 것이나 다름없어서 닉네임도 그걸로 굳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듯 했다. 

“부작용이라고 쓰여 있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인간한테만 부작용인거지 그게.......빅뱅의 부작용이라니, 멍청해 보이잖아요. 내 이름도 들어가 있는데 그거 하나 못 고치게 하나.”
“이민지. 민지 씨구나. 이미지 같네요. 미지 같기도 하고.......식민지도 괜찮다.”
“식민지로 하면 갑자기 너무 이것저것 부여되는 감이........”
“과감하게 지 만 살려서 굴착지라든지 발파지 같은 건.”
“발파지는 그거에 나올 것 같은데. 호걸 이름인데 그건.”
“그럼 뒤집어서 지민이?”
“아 초한지.”
“안 읽었어요. 좀비 얘기 막혔대요. 들었어요? 민지 씨가 빠져서 그런 거 아닌가. 계속 궁금했는데 거기서 뺀 거예요 아님 스스로 빠진 거예요? 지금 딴 거 하죠?”
“아뇨 그게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요.......아까도 말했지만 제 쪽에서 나왔다고하기에는 또 그쪽에서 애초에 깊게 관여를 안 시켜줘서.”
“쌤통이다. 그거 엄청 이런저런 사람들한테 도움 받았으면서 넷이서 한 것처럼 굴잖아요.”
“쌤통? 실생활에서 쓰는 거 처음 들어요.”
“많이 쓰는데? 아무튼 인지도가 생긴 게 신기할 지경인데. 슬슬 갱신은 해야겠는데 이제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거죠. 그러게 미리 예견을 했어야지.”
“선진 씨는 뭐 하세요?”

20대 초반 이후로 중반에 접어든 지금까지 이선진은 별다른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기존의 좁은 인간관계에 유착이라도 된 듯 그들 이외의 누군가하고 잡담이라도 나눌라치면 일상적인 단어며 표현들이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한순간에 모호해져 도무지 붙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대화의 수조 안에서 다음 말을 추적하며 기다리는 동안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이 당혹스러움에서 따분함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에 지친 이선진은 더 이상의 시도를 그만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맥없이 한나 곁으로 돌아왔다. 좁은 인간관계라고 해봤자 단 한 명이었다. 한나에게는 어떻게 해 왔던가 생각을 해 봐도 그나마 또렷한 것은 급속도로 친밀해졌다는 것 뿐 역시 머릿속이 자욱한 게 이렇다 할 다른 사항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한나는 특이하다면 특이한 인물이니 이를 떠올려 봤자 이제와 다른 누군가를 사귀는 일에 별다른 참고가 되지는 못할 거였다. 한나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이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공기 같다고 하기는 애매하나 그 존재감의 특성이 확실히 자연계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로, 이 사람을 설명하려면 그 본인을 설명하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을 설명하는 편이 빨랐다. 요컨대 한나는 수용성 잉크였고 이선진은 풍선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중에 찾아 봐.”   
한나는 새된 목소리로 ‘마이 달링’ 부분만 따라 흥얼거리고 있다. 그런 모습이 굉장히 익숙해서 어떤 장면을 흉내 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좀스럽게 굴지 마요 마이 달링. 비가 내리면 우산 하나쯤은.”
“가사 이상하다.......”
“다 왔다. 다 왔지? 내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넓네.”  
“아냐 내가 왔을 땐 좀 더 좁았어. 이게 알아서 좀 넓어졌네.”
“계곡 있나? 왜 뭔가 시끄러운 것 같지.”
“아니 없는데.......없을걸.”
“보는 건 나중에 보고 저기서 뭐 판다. 나 아침 안 먹었어.”
공터는 확실히 예전의 둥글고 아늑한 인상을 잃고 산만한 사다리꼴로 확장돼 있었다. 가장자리에 거의 우거지다시피 풍성하게 피어 있던 개망초 덤불을 모조리 뽑아낸 듯 크고 작은 흙둔덕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안쪽의 잣나무 숲 가운데 작은 캠핑장이 조성된 모양인지 멀찍이 조악한 식수대 하나가 나무진을 뒤집어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며 캠핑용 식기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잡초를 말끔히 깎아내 만(灣)처럼 숲 그늘 안쪽으로 꽤 깊숙이 들어간 맨땅에 평상이 하나 박혀 있고 옆으로 감자떡이니 팥떡이 적힌 현수막을 건 작은 가게가 있었다. 이선진은 잣잎을 털어내고 평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나는 스티로폼 용기를 받아 들고 넉살 좋게 몇 마디 주고받더니 웃으며 돌아왔다. 
   
“떡 싫어한다지 않았었나?”
“그래도 먹기는 먹어.”
한나가 손톱으로 잇새에 낀 팥껍질을 우아하게 빼내면서 덧붙였다.
“그것밖에 없으면.”  
“여기 좀 검색해보고 올 걸. 나는 전처럼 아무도 안 오고 그래서 쳐도 안 나올 줄 알고.”
“아니 뭐 상관없는데. 여기 나쁘지 않아.”
“미안.”
이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동안 발밑의 평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상이 있는 미적지근한 그늘 저편으로 보이는 공터에 숨 막힐 듯 노란 햇빛이 끈질기게 머물고 있다. 단무지 냄새 같은 큼큼한 단내가 공기중에 감돌아 어지러웠다. 한나는 벌렁 몸을 누이는 이선진을 잠깐 쳐다봤을 뿐 굳이 같이 드러눕지 않았다. 
“따라 와줘서 고마워. 아까 시나리오 뭐라 그랬지.”
“응........” 
이선진이 자세를 고치더니 짐짓 망설이는 척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인간을 이루는 요소에는 뭐가 있다고 생각해?”
한나는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지만 토를 다는 대신 입술을 모아 호두턱을 만들었다. 
“마음. 뇌. 뇌하고 마음이 같인가? 심장.”
“또........” 
“장기. 장기를 이루는 뭐 어쩌고.”
“외계. 이민지는 벌레를 보면서 외계에 대해 숙고하고.......우주 좀비 기획을 완성시키는 거야.”
“음.”
“벌레가 곧 외계라는 건 아니야.”
“음.........”
“좀 장황한가?”
“글쎄. 그렇다고 그런 부분을 죽이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고.”
“그렇지?”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이민지는 민지 씨야?”
“뭐.......엥? 누구?”
“민지 씨. 성은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민지 씨 있는데.”
한나가 입술을 올려 인중을 덮으면서 이선진을 빤히 쳐다봤다. 
“수업도 같이 들었고. 김기훈하고도 나름 친했어.”
이선진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한나와 공통으로 아는 민지 씨는 딱히 짚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민지의 외계는 닻 없는 작은 배였기 때문에 아무리 바람이 순한 날에도 여지없이 조금씩 흔들렸다. 늘 흔들리는 채로 둥둥 떠 있는 것이 그 성질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막 청소를 끝낸 이민지는 이제 손을 씻은 다음 손가락 사이의 작은 갈퀴 표면 위로 재빠르게 모여든 물기를 요리조리 손을 꺾어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도 지금 모습이 우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확인 작업이 누구나가 한번은 맛보게 되는 아리송함을 완료시키는 데에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에 속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정도의 피부 조직에도 안팎이 있는 것이다. 어딘가 약간 우묵한 것이다. 맺히지 않는 쪽은 밖이고 맺히는 쪽은 안이었다. 이번에는 눈썹 위를 한번 질릴 때까지 긁어 보았다. 놀랍게도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벌레는 이민지의 무엇을 가져가 버린 것일까. 가져간 게 맞다면 그건 과연 빼앗긴 것일까? 빼앗긴 거라면 되찾아 와야 하나? 

이민지는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현관 바닥에서 뒤집어진 채 버르적대고 있던 바퀴벌레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몸통은 귀가 뾰족한 품종견처럼 기름을 바른 듯 까맣게 번들거렸고 그 풍족한 색감 때문에 필사의 버둥거림조차도 방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이민지는 사과를 던져서 벌레의 등딱지를 까부수거나 뱃살을 찢어놓는 대신 침착하게 살충제통을 집어 들어 꼼꼼하고도 치밀하게 몸통의 모든 곳을 조준 분사함으로서 거대한 벌레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약에 흠뻑 절은 세 쌍의 다리는 죽어가는 얼룩말의 그것처럼 한 번 쫙 펴졌다가 서서히 허공을 포옹하며 오므라들더니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민지는 벌레의 동작 정지를 확인한 후 결연히 꽉 쥔 쓰레받기로 얼른 벌레를 떠내 변기에 던져 넣었는데, 이러한 결단의 행동까지는 시체 주위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동물 같은 맴돌기의 시간이 있었다. 
이제 이민지는 어떤 시체도 없는 방 안을 알 수 없는 요구에 재촉돼 불안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누구의 죽음을 탐색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벌레가 입을 맞춘 부위들이 축축한 발자국처럼 방 전체를 어지럽게 구획해 버려 안심하고 발 디딜 만한 깔끔한 바닥이 실종돼 버린 것 같았다. 멸종인가? 이민지는 전지가 다 한 듯 우뚝 멈춰 서서 양팔을 쫙 펴고 그 상태로 얼마간 가만히 서 있었다. 바닥이 멸종했다. 침대 위로 풀쩍 뛰어오르자 바닥은 잠시 고민하더니 양해를 구하곤 점잖게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팔꿈치가 닿은 벽이 별안간 쑥 들어갔다. 천장을 눌러보니 물컹했다. 습기를 먹은 벽지가 가장자리를 포함한 몇몇 자리들 외의 접착력을 잃은 채 중구난방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붙어있는 자리는 대패질을 한 것처럼 깎여나가더니 그 자리에서 말리다 만 모양으로 뻣뻣해지거나 입술의 각질처럼 육각형으로 부슬부슬 부서져 내렸다. 은박지에 불을 붙인 듯 타닥타닥 하는 강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끓는 소리는 벌써 잦아들고 있었고 부서진 페인트 조각은 낮게 물결치는 바닥 속으로 수제비처럼 빠져 들어갔다. 잠잠해지는가 싶으면 또 다른 소리가 등장해 방을 요리해 놓았다. 전등은 침착하게 그러나 절도 있게 뛰어내렸다가 솜씨 좋은 거미처럼 스스로를 짜 맞추며 기어올랐고 방은 한순간 물구나무섰다가 수축하며 이민지를 한 팔로 끌어안고 재빠르게 방 가운데 데려다놓더니 곧 박수라도 친 듯 깜깜해졌다. 
이민지는 코앞까지 바싹 다가온 창문의 미세한 무늬, 방충망이 만드는 무수한 빛의 모자이크를 지켜봤다. 모자이크는 창 뒤에서 나뉘고 감수 분열하는 세포들이 흔히 그리하듯 부드럽게 서로를 밀어내더니 또다시 그 안에서 핵을 맺고 배 밖으로 천천히 내보내면서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줄지어 선 빛무리는 서로를 부싯돌 삼아 불어나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개미의 거대한 턱이 흐릿하나 분명한 모습으로 부지런히 잘게 부순 빛의 신호들을 어둠 저편으로 출하하고 있었다. 
금고를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민지의 방은 완전히 새롭게 낡아 있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무들 위로 그 가장자리의 들쭉날쭉함과 대비되는 둥근 분홍색 하늘이 단조롭게 흐르고 있다. 한 단락이 끝나고 있었다........가위로 자른 바짓단을 아무리 다시 다듬어도 해진 솔기가 빠져나오듯이 불분명한 형태로 그러나 확실히 저물고 있었다. 한나는 무언가 일방적인 유대감을 느낀 듯 짐짓 너그러운 얼굴로 엉뚱한 대답을 했다. 
“묘사가 너무 많지.”
이선진이 서먹하게 중얼거렸다. 

숲 안쪽이 소란스러웠다. 집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어린 아이들의 칭얼거림에 가까운 비명 소리와 젊은 부모들의 당황한 말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먹다 만 그릇이며 강아지를 양팔에 낀 세 가구 정도가 공터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모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으나 그 표정들은 공포에 질렸다기 보다는 어리둥절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워!”
뒤이어 통통한 얼굴이 상기된 한 십대 여자애가 가로로 든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뒷걸음질로 교목 숲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키 큰 나무들 사이 허공이 엉키더니 돌연 문이 열린 듯 리트리버 두 마리 정도 크기의 허여멀건한 살덩이가 벌컥 쫒아나왔다.  
“아니, 어, 아익, 저게 뭐야!”
엉덩이로 추정되는 울퉁불퉁한 부분이 알약이 가득 든 자루처럼 흔드는 모양에 따라 윤곽을 바꾸며 흙바닥 위를 요령 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투명하고 질긴 가죽 안으로 무언가 불균질한 구슬들이 꽉 들어차 누가 주걱으로 뒤적이는 것처럼 초마다 끓어오르며 골고루 뒤섞이는 것이 비쳐 보이고 있다. 이선진과 한나가 요란하게 의자를 넘어뜨리며 달아나는데도 벌레는 시세를 재는 부동산 업자처럼 시큰둥한 태도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볼 뿐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한나가 난생 처음으로 차 시동을 걸어 보려고 애쓰는 중인 이선진을 다급히 붙들었다. 
“카메라 좀 줘.”
벌레는 플래시 빛에 우뚝 서더니 바로 방향을 바꾸어 차 쪽으로 빠르게 미끄러져왔다. 미끄러져 온다고는 하지만 뱃속의 오물들이 요동쳐 무수한 돌기들을 만들며 바닥을 딛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누군가 무서운 속도로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동영상을 찍어야지.” 이선진이 안전벨트를 붙잡고 면박을 줬다. “아이고 시부랄.”
벌레가 차 문 앞에 입으로 추정되는 빨판을 붙였을 때, 이선진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핸들을 빼앗아 차를 출발시켰다. 한나의 머리가 갓난아기처럼 뒤로 홱 젖혀졌다.
“살살 좀!”
동시에 벌레도 차창에 붙은 빗방울처럼 힘없이 뒤 풍경으로 휘익 빨려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벌레는 흙바닥에 나동그라지나 싶더니 곧 구물구물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군가 힘없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물러났다. 차는 10미터쯤 기세 좋게 튀어나가 갓길의 작은 나무에 코를 박고 연기를 내며 멈춰 섰다. 찌그러진 보닛이 실패한 깜짝 상자처럼 후들후들 튕겨 올라가 펑 소리와 함께 시야에 닥쳐들었다. 윽 하는 두 개의 짧은 신음이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이어졌다. 
“괜찮아!”
“괜찮냐는 거야 괜찮다는 거.......”
“괜찮으냐고.......” 
“운전을 배워 놓을 걸 싶지?”
“그런 소리 할 때야.”
“........불은 안 났네. 영화 보면 이다음에 터지던데.”
한나는 턱까지 동원해 카메라를 꽉 잡고 있던 탓인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안전벨트 대신으로 한나 앞을 가로지른 채 굳어 있는 이선진의 왼팔은 어깨까지 에어백에 파묻혀 있다. 
“어디 갔어?”
이선진은 대답 대신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차 시트에 팔을 걸치고 뒷좌석으로 넘어가려 힘을 준 상체를 몇 번 퍼덕였다. 한나는 자신의 어색할 정도로 산만한 덩치를 운영해보려 애쓰다 결국 투정하듯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이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좀 더.......뭐냐, 제대로 해 봐. 안간힘을 써 봐.”
이선진은 대꾸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제멋대로 번진 희미한 웃음이 같이 주름졌다.
한나가 답하듯 피식 웃으며 좌석을 기울여 뒷좌석으로 조심조심 기어 넘어갔다. 뿌연 유리 너머로 사람들이 길목의 커다란 벌레에 기겁하면서도 웅성웅성 차 옆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소리에 셔터 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려왔다. 벌레는 금세 흥미를 잃은 듯, 방금 전까지 차가 서 있던 자리의 흔적을 열심히 빨아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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