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Tender - 2.ॐ: on

2017.10.17 02:2110.17

나는 신체에게 공손히 절을 올린 후 한 쪽 무릎을 꿇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이 쥔 손등에 입술을 닿이자 온기가 나의 입술을 데웠고 젖으로 씻은 듯 부드러운, 습기를 머금은 투명한 피부 아래로 농롱히 빛나는 구체들이 반짝이며 움직였다. 신체는 나의 하산(下山)을 아쉬워 했던 것인지 어떤지, 인간 것의 형태를 한 손을 보고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러러본 신체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슬픈듯한 안색을 짓고 있었는데, 옛날에 죽은 나의 언니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나의 착각이나 환영이었는지 어떤지……… 나는 눈물을 짓게 될까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나섰다. 신체가 템플을 떠났다는 것을 알리듯 바람이 불며 놋종을 달그랑 울렸다. 하산하는 길에 마주치게 되었던 나무며 약초, 꽃 한송이마저 내가 수도승으로 있던 날들에 신체를 모시기 위해, 나의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기 위해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고, 지금 이순간 이후로 다시는 그런 날들이 반복될 일이 없을 것임을 통감하자 가슴이 아려왔다.

 


 

몇 달 전, 내가 아직 신체를 모실 적의 일이었다. 악기점에 류트를 맡기러 가는 길에 약초와 향료를 사고 팔러 시장에 갔다 신전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어느 나그네가 바삐 달려와 나를 불러세우더니 숨을 고르곤 사뭇 딱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말인즉슨, 나의 쌍둥이 자매가 내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행선지와 일거리를 모를리가 없는 사람이 나를 그리 애타게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그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놀란 나머지 잠시 벙쪄있다, 나그네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대전화를 빌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반가움보다는 자신과 가족, 현생을 이루는 삶의 요소들을 모두 저버리고 목소리조차 한 번 들려주지 않고 산 딸에 대한 원망이 섞인 건조함이 더 많이 깃들어 있었다. 내 자매의 결혼 상대는 대학원생으로, 여유 있는 집안의 자제로 땅 놓고 돈을 벌면 학비와 생활비를 대고도 줄줄이 외제차며 맨션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뜻밖의 소식에 처음에는 무척 놀라고 당황했으나 곧 나와는 이제 상관 없는 일임을 되새겼고 짧은 축하의 말을 전해달라 부탁한 뒤, 휴대전화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답례로 향나무와 향료들을 가공한 것을 한 주머니 주려고 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나는 이내 신전으로 돌아와 그날의 태스크를 모두 완료하는 동안 해가 졌고 곧 잠자리에 들었는데, 침상 위에서 낮동안에는 전혀 들지 않던 잡상들이 피어오르더니 과거의 꿈을 꾸었다. 나의 언니가 죽기 직전, 내가 그녀를 저버렸을 때,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악몽이었다. 꿈에서 깬 나는 식은땀에 젖어있었고 꿈을 잊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담배를 말아 피워야 했다.

 

나의 쌍둥이 자매의 이름은 온. 나보다 3분 먼저 세상에 나왔고 우리는 그로부터 사흘 뒤 서로 다른 사람의 손에서 길러졌다. 내게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은 내가 글을 짓는 법을 갓 터득했을 때인데, 나는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나와 완벽히 똑같은 신체 특징을 가진 나의 자매에게 수없이 많은 편지를 써부쳤다. 당시 나의 문장은 희떠운 수사어구로 점철된 한껏 멋을 부리는 글이었는데, 그게 온에게는 썩 귀엽고 멋있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매일 새벽마다 촛농을 닳아내며 촛불로 데워진 편지지에 펜끝으로 무수한 글귀를 수놓아내리길 몇달,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다.  집에서 선생님과 공부하던 나에겐 말쑥한 교복을 입고 단정히 빗어내린 예쁜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온이 꼭 인형 같아 보였다. 얇게 뻗은 짙은 눈썹 아래로 또렷한 밤색 눈과 새까만 속눈썹, 말끔한 코끝과 그 밑에 자리잡은 잘 여문 버찌같은 부드러운 입술은 분명 나의 것과 똑같았음에도 나는 선명한 이물감을 느꼈다. 그와중에 그가 과연 나의 혈육이라고 분명히 느끼게 한 것은, 뺨에 자리잡은 작은 점이었다. 나에게는 없는 것이었어서, 그가 나와 다른 삶과 햇볕을 받고 자랐다는 것이 실감이 나자 낯선 마음은 사라지고 이내 꿈결처럼 주고받던 편지 속의 그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있는 온이라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쌍둥이라 똑같이 생겼다고는 해도 나는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에 깡마른 몸 위로 허름한 차이나칼라 셔츠와 어부바지를 입고 고작 낡은 팔찌와 목걸이나 좀 하고 있는 게 멋을 부린 것이었는데, 온은 정말 나와 다르게 생긴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정하고 세련되었다. 윤이 나게 다듬고 관리한 손톱과 매끄러운 손, 가는 허리에 꼭 맞는 잘 다려진 교복치마 밑으로 뻗은 가녀린 종아리의 반까지 올라오는 검은 양말에 신은 예쁜 구두까지, 온은 나와는 생김새 말고는 무엇 하나 같은 점이 없어보였다. 그때의 내가 으레 그랬듯 온에게도 온갖 호들갑을 떨며 그의 아름다움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는데, 온은 처음엔 어이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사근사근 웃어주기 시작했다. 온은 아주 얌전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부산스레 나를 앵겨잡거나, 환하게 웃어주다가도 곧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죽은 듯한 무표정을 일관하거나, 그와중에도 나의 손을 계속 잡고 있거나 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들에 나는 생경한 기분을 느꼈는데, 익숙치 않다 뿐이지 나는 온이 나에게 그러는 것이 싫지 않았고 내심 즐겁기까지 했다. 나는 나를 거두어 키운 선생님과 그의 딸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나는 선생님의 딸을 언니라고 곧잘 불렀다. 그는 나를 잘 보살펴주고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껴안고 달래고, 서로 냄새를 맡고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과 표현을 자주 했다. 그래서였는지 혈육과 눈을 맞추거나 손끝을 맞추거나 ― 입을 맞추거나 하는 게 특별히 이상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온과 만나는 때가 잦아질수록 나는 더욱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나는 평소에 어떤 일이건 그래왔듯이 언니에게 온에 관한 모든 것을 떠들고 찬미했다. 언니와 사이가 멀어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가 하는 말에 대꾸하지 않거나 말없이 나를 슬프게 쳐다보거나,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손을 꼭 쥐고 무어라 기도하다 내가 눈을 조츰조츰 뜨면 크게 놀라고 내 앞에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내게 별것 아닌 일로 크게 화를 내고 그 즉시 내게 울며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고, 아침에 깰 때 비명을 지르거나 밤 늦게 울었다. 

 

언니가 나더러 더이상 온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전에 없이 크게 화를 냈고, 그날 내가 온과 밤을 보내는 동안 언니는 죽은 눈을 하곤 말없이 집을 떠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데,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주검이 된 채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는, 나는 원래의 모부와 온과 함께 지내게 되어 떨어질 일 없이 온과 원없이 함께 있곤 했으나, 나는 언니의 자세한 소식을 듣고 난 이후로 말수가 줄고 감정표현이 적어지게 되었다. 내가 속세의 일들을 정리하고 신체를 모시기 위해 산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겠다고 결심한 후 그를 집안에 통보하자 모부는 나의 총명함을 들어 밝은 장래를 들먹이며 나를 뜯어말렸고, 온은 울며 애원하기도 내 앞에서 물건을 부수며 화를 내기도, 다시 나의 옷자락을 끌며 자신을 생각해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그 검은 눈을 그렁그렁 적셔 빛내며 애걸했다. 눈물이 사색이 된 흰 뺨 위로 구슬져 떨어질 때마다 나의 마음도 땅끝으로 떨어지는 듯 하였으나 무의식에 있던 모종의 모럴이 슬픈 마음을 겉으로 전혀 내비치지 않게 했고, 나는 집을 떠나 침례를 받고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신전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기를 벌써 십년이 넘었다.

 

온이 남자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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