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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상쇠의 길 - (1)

2015.04.30 00:4604.30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하얀 뱃살을 어느새 감춘 파도처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타원(橢圓) 앞에 선 상쇠 의 눈에는 하늘 천() 자가 거칠게, 그려진 것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그는 스승이었던 이 아주 옛날에 가르쳐주던 것이 머릿속에 별빛처럼 쏟아졌다. 그 당시 가락골은 지금보다 더 원시의 순수성을 간직한 것 같은 곳이었다. 마을을 감싸던 나무의 모든 것들이 내뿜는 색은 더 진했고, 지층 속에서 표본이 된 시간이 연속체였을 적처럼 이끼를 꼈음에도 그 존재감을 잃지 않던 거대한 돌들과 그 사이를 채우던 자갈들을 바닥으로 시냇물이 유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던 곳을 중심으로 열다섯 가구 정도만 있던 마을이었다. 조상들이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이후 세속으로부터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여 지형부터 마을의 이름까지 뚜렷하게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장소를 지칭하지 않아도 한 몸처럼 같은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유대감을 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며 조, 수수, 콩 같은 것들을 경작하는 것을 주된 일로 삼으며 보냈다.

 매년 대설이 지난 이후면 소금장수 형제가 오곤 했다. 세상의 역사와는 무관하게만 흘러갈 줄 알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은 무릇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들은 매년 서쪽 바다 염전에 송홧가루가 얹힐 때쯤 삼년 동안 간수를 뺀 소금을 지게에 싣고 내륙 곳곳을 파고들 듯 방문했는데, 가락골은 거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서 소금을 주고 소금 값 대신 약초와 들짐승고기나 가죽을 얻어가곤 했다. 마을의 아낙들은 송화냄새가 죽었다느니, 쓴맛만 난다느니 하며 불평을 했지만 그러면서도 매해 겨울만 되면, 장을 만들기 위해, 간을 맞추기 위해 소금을 가지고 오는 그들을 기다린다.

 내륙에 있는 마을 중에서 오지에 위치한 마을인 탓에, 마지막에 오는 순서 중에서도 거의 끝이기 때문에 만약 소금이 전에 다 팔리면 굳이 이곳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는 가락골 사람들이 부업을 할 차례였다. 가락골 근처는 물이 많이 흘렀는데 여름 장마 때는 수량(水量)이 과도해서 마을이 고립되는 경우도 있었다. 물이 많다는 것은 곧 버드나무들이 자라기 좋은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인데, 버드나무는 좋은 목재가 되곤 했다. 가락골의 여인들은 밭일 뿐 아니라 공장이 일에도 능했는데, 버드나무를 이용해서 왕골, 고리짝, 소쿠리 같은 목기와 베틀에 쓰는 바디, 버들피리, 참빗 같은 것들을 만들곤 했다. 그들이 이런 것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까마득한 옛날, 갈대와 버드나무가 무성한 천변과 강변의 황톳길과 생사의 모든 것을 깊게 접합하던 시절부터였다.

 이라는 이름은 그의 조상 때부터 쭉 이어져온 이름이다, 을 낳는 데에 일조한 아버지의 이름 역시 이었고, 그런 그의 조부 역시 이었으며, 그의 증조부, 고조부까지 모든 이름은 이었다. 그렇게 그의 이름을 거슬러올라가고 거슬러올라가면 그 끝에는 모가비가 위치해있었다. 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그의 손자로부터 시작되었다. 손자는 힘이 강해서 소와 씨름을 하는 것을 유희로 여겼고 하루 사이에 장작을 몇 지개씩이나 지고 오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장마로 인해 마을이 고립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앞장서서 제방을 만들고 심지어는 강 주위의 적당한 곳의 돌을 뽑고 흙을 퍼내면서 강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집에서 나오는 아이는 오직 사내뿐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 혼례를 올리고 집안의 가장이 될 때 쯤, 선대의 은 다른 집의 어른들보다 약간 빠르게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산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약간 빠르다 해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손자의 자손들은 대대로 힘이 좋았다. 그리고 말솜씨가 기묘했는데 마을사람들은 그 집안 내력 같은 것들의 원천이 집의 위치에 있다고 추측했다. 그들의 집은 대대로 논지 다음으로 가장 볕이 좋은 곳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기운의 근원을 해로 여겼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태양이 스민 듯 빛이 나는 것 같았는데 그 빛은 빛이지만 딱히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어 빛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을 노을 속 물 묻은 햇빛 같기도 했고 밤에 떠 있는 별빛 같기도 했으며 때로는 밤늦게 해매는 산길 끝에 발견한 술 주()자가 새겨진 등불에 걸린 용주 같기도 했다. 그는 그 빛이 싫어 언젠가는 얼굴에 종일 진흙을 묻힌 채 돌아다닌 적도 있는데, 빛은 사라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어머니의 모진 매질 뿐이었다. 애당초 그런 성질의 빛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 빛이 어미가 그를 낳기 전 볕을 평소에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뱃속에 있을 적에 햇빛이 얼굴에 스며든 것이라고 여겼다.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최근 가락골 근처에 설립되어진 대학에 근무하며 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학자는 그 빛의 정체를 그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던 전자대기로 인한 강한 자기장 중 태양빛과 겹쳐지는 부분서 강한 에너지가 생성되었는데 은 태아시절부터 그것에 집중적으로 노출되었고, 그로 인해 의 몸에는 그 에너지 축적되어, 그것이 신진대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신체의 근육이나 뇌를 통해 발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세상의 수면 위에 조그맣게 떠올랐을 때는 이미 가락골 주위의 물에는 거북한 녹음만이 가득 차 있었고, 이탄층은 모두 말라 육지처럼 되었다. 어떤 건물이든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었고, 옛집의 벽들은 이미 흙과 구별이 되지 않았으며, 지붕은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인해 밀폐되어 볏짚은 한 움큼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소금장수들이 가락골에 두 번째로 안 오던 해, 상쇠 의 스승인 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그는 소금장수들을 처음 봤을 때보다 좀 더 자라 열여섯의 나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체에서 그 모습이 도드라져있었다. 머리와 목소리가 굵어졌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코와 울대뼈가 튀어나와있었다. 그는 마을사람들을 부자 관계로 분류하면 후자에 속했으나, 주위 아이들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그렇다고 어른들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지만 입가와 겨드랑이, 고간이 거무스름해진 것으로 어른 쪽으로 분류하자하면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호한 경계선에 걸쳐진 나이 때문에 그는 상투를 묶었어도 여전히 순수한 총각으로 남아있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페로몬으로부터 비롯된 무엇으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지극히 이상한 일로 여기며 홀로 찬물 속에 들어가며 정욕을 식히곤 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부끄러워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버지 마저 자신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서 그의 괴리감은 더욱 커지던 참이었다.

 아버지 역시 얼굴에는 빛이 스며져 있었다. 그러나 한창 크고 있는 이 가지고 있는 그것에 비하면 달에 가려진 별빛처럼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빛은 그동안 가락골에 산성(産聲)과 실종을 남기고 간 들에 비하면 결핍된 듯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비교할 대상들은 일찍이 없었고, 또 그들은 그것에 대해 그렇게 개의치 않았기 때문에 그 역시 여타 조상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빛의 결핍은 살아가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는 집안 내력과도 같은 힘에서부터 나타났는데, 그는 아버지보다 힘이 세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던 의 나이였을 적에도 그는 아버지보다 힘이 세지 못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비교를 많이 받아왔다. 얼굴에 스민 빛의 세기를 구별하지는 못해도, 그 집안의 힘으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온 주민들로써는 그 점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밭에 물을 대기 위해 도랑을 판다거나 장마철 강물의 방향을 바꿀 때, 그의 힘은 언제나 어딘가 부족했다. 그러나 기존에 비해 부족하게 보였을 뿐, 들이 해주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점에 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나타난 또 다른 징후는 말솜씨에 있었다. 모가비를 조상으로 두고, 깽쇠를 배우며 자라오던 은 대대로 말솜씨가 좋았다. 그들의 말은 침엽수림의 흙처럼 가벼우면서도 단단했고, 침착함이 얹혀있었으며 지속성이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공수가 아니었음에도 그 말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부자사이서는 대화를 할 수 있었으므로 말로 분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어렸을 적, 아버지와 둘이 있었을 적에는 때때로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슬펐고 지금 자식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홀로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가 실종될 때처럼 자신의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끝내 아버지와 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떠나기 전날 밤, 은 아버지 이 덮고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그는 이번에 내려가지 못하게 됐다. 의 모친이 겨울이 시작될 무렵 원인모를 병에 걸려 방에 누워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몇 세대를 걸쳐 가끔 일어나던 병이었다. 그리고 이 병에 걸린 안주인들은 곧 오래 살지 못하곤 했다. 병에 걸리지 않던 여인들은 노을에 사라지는 파란 하늘처럼 자연스럽게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안방은 차가워진 적이 없었는데, 그때마다 옆에는 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병은 산에 있는 어떤 약도 통하지 않았고, 광대들만으로 들어온 이후, 단절된 곳이라 의원이 있지도 않을 터였다. 때문에 그녀들의 남편들이나 마을사람들 역시 그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가는 길을 혼자 두는 것은 아니라면서 사람들은 그녀의 곁에 남아있으라고 했다. 아버지 에게 혹시 모르니 탕약 같은 것이 있다면 구해와주라고 했다.

 아버지, 밖은 커요?”

 매우 크지. 우리 집보다 큰 집들이 이곳에 있는 나머지 집들보다 더 많단다.”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밖은 크냐고요.”

 아버지는 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뿐 아니라, 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 의 말 역시 쉽게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계곡에 동녘이 걸리자, 마을의 아낙들과 노인들과 아이들을 제외한 자들은 유기를 들 수 있는 만큼 들고 가락골을 나섰다. 힘이 약한 이들은 손수레에 짐을 싣고 그것을 끌며 마을에서 멀어졌다. 계곡 위의 하늘은 보기에 저녁인지 새벽인지 쉬이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사물에 물처럼 묻어있는 어렴풋한 밤은 산 속에서의 시간이 새벽임을 알 수 있었다. 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락골이 아닌 다른 곳에 처음으로 가는 것에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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