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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학교의 살인자(19)_완

2014.06.28 14:3306.28

19

 

그런데 학생회장은 어디 갔어?”

추기경의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 개표 결과 98% 투표율에 96% 찬성이라는 북쪽의 어느 나라를 연상케 하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승표, 즉 새 학생회장은 행방이 묘연했다. 추기경은 학생회장 임명장을 들고 흔들어대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도 그럴것이 전날 밤 내내 다섯 장이나 망친 끝에 겨우 완성한 임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정성을 들여 썼다고는 볼 수 없지만 3년만에 치른 학생회장 선거였기 때문에 규정집을 통째로 외우는 기억력을 지닌 추기경조차 임명장 양식을 온전히 머릿속에서 되살려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결과적으로 임명장 한 장을 완성하느라 귀한 백지가 여섯 장이나 사용되어야 했던 것이다. K담임은 그런 노고를 잘 알고 있었기에 추기경의 분노의 찬 손에서 흔들거리는 임명장을 어떻게 구조해낼까 고심했다. 자칫하면 시험 답안지들처럼 조각조각날 운명에 떨어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K담임이 개표 용지를 포커 카드처럼 가득 손에 쥔 채 고민하는 동안, 다행히 경화가 덩크슛을 하듯이 추기경의 손에서 임명장을 빼앗은 다음 교복치마가 찢어지도록 다리를 재빨리 놀려 도망쳤다. K담임은 박수를 쳤고, 추기경의 노려보는 눈을 피해 목공실로 자신이 만든 의자를 들고 역시 도망쳤다. 추기경은 분노하다가 문득 자신이 더 이상 분노에 떨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분이 좋아져서 퇴근 준비를 한 다음 교무실을 떠났다. (그 뒤로 방학이 계속되는 두 달 동안 아무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승표는 얌전히 추기경 옆에 앉아 입후보 연설을 준비하는 게 원래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대신 운동장에 나가는 아이들 사이로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승표는 고함을 질렀다.

얘들아! 나 살려줘! 누가 나 끌고 간다!”

아이들은 흘끗 돌아보았지만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복도 끝까지 끌려가던 승표의 발이 문턱을 넘자마자 쾅하고 문짝이 닫혔고, 축축한 바닥에 쓰러지고나서야 화장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승표는 고개를 흔들어 뒷목을 잡은 손의 주인을 보고서야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선거운동을 도맡던 여자였던 것이다.

승표가 겁에 질려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뭘 하다니? 난 네 엄마야.”

무슨 소리예요? 아줌마는 그냥 우리 아버지 회사 직원이잖아요.”

회사 직원인 건 맞아. 그런데 난 네 엄마야.”

증거 있어요?”

여자는 한 손으로 승표를 잡은 채 블라우스 속에 손을 넣어 구깃구깃 구겨진 종이를 꺼내어 폈다. 종이를 한손으로 펴기 위해서는 길고 뾰족한 손가락을 고통스럽게 놀려야 했다. 승표는 손목을 단단히 붙잡힌 채 그녀의 손가락이 나무옹이처럼 뒤틀리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다.

이걸 봐.”

여자는 펴진 종이를 승표에게 내밀었다. 승표는 받아들고 내리 훝은 뒤 잉크가 물에 풀어지듯 표정이 변했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네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야. 승표야, 믿어. 난 네 엄마야.”

그녀는 반짝이는 속눈썹에 마스카라로 시커멓게 된 눈물방울을 매달고 말했다. 승표는 한쪽 손을 잡힌 채 여자에게 받은 종이를 접었다. 한손으로 종이를 접기 위해서 손가락을 이상한 모양으로 틀어야만 했다. 승표는 여자를 노려보면서 종이를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여자의 손을 비틀어 뺀 뒤 온 힘을 다해 밀쳐버렸다. 여자는 뒤로 넘어지면서 화장실 벽에 뒤통수를 쿵 하고 박았고, 근복을 죽인 것과 비슷한 성격의 죽음을 가져올 수 있는 상처를 입었다. 승표는 재빨리 뛰쳐나와 문을 밖에서 걸어잠갔다. (그 뒤로 방학이 계속되는 두 달 동안 아무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한편 용식은 마이크 앞에 섰다. 먼지를 머금은 침묵이 학교를 감쌌다. 말 한마디는 물론 발장난을 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물을 부어 얼린 것처럼 분위기는 조용하고 단단했다.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용식은 종이를 눈앞에 똑바로 펴들었다. 진지하고 무거운 자세였다. 1분동안 용식은 그대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서 있었다. 학교는 졸아드는 듯한 침묵에 감싸였다.

1분이 지나자 용식은 팔을 내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용식은 운동장에 도열한 아이들을 둘러보고, 고개를 들어 구령대 위의 추기경을 한 번 올려다본 다음 종이를 찢어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교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 뒤로 그는 죽을 때까지 다시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미리 받은 투표 용지를 접어서 K담임이 들고 있는 함에 차례로 넣고 역시 교문을 빠져나았다. K담임은 의아해서 구령대를 내려오는 추기경을 붙잡았다.

승표 어딨습니까? 입후보 연설 안 들을 거예요?”

그걸 뭐하러 들어.”

추기경이 대답했다.

그런 놈을 위해서 전교생 앞에서 1분동안 쪽팔리게 서 있었으면 된 거 아냐?”

 

창고 문에 부딪친 머리가 아파서 어질어질한 경화는 역시 화장실에서 구르느라 온몸이 아픈 승표와 교문 앞에서 딱 마주쳤다. 경화는 승표에게 임명장을 내밀었다. 승표는 말없이 임명장을 받아든 다음, 구깃구깃 구겨서 교복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은 함께 학교를 빠져나왔다. 학교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걸어내려가면서 경화는 휴대폰을 켜고 학원 전화번호를 눌렀다. 몇 분 후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밴이 도착하자 두 사람은 올라탔다. 밴은 곧 국도로 가는 길을 타고 시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 승표가 말했다.

나 정말로 아이비리그에 합격했어. 오늘 통지가 왔어. 난 떠날거야.”

경화가 대답했다.

, 가기 전에 교무실 청소 좀 해 놓고 가.”

정말이야. 농담하는 게 아냐.”

그래, 난 케임브리지 가기로 했어.”

이것 봐. 진짜라구.”

관심 없어.”

승표는 화장실에서 여자에게 받은 종이를 들이댔다. 경화는 종이 앞에서 코를 치웠지만 승표는 집요하게 들이댔다. 경화는 하는 수 없이 받아들어 읽기 시작했고, 곧이어 잉크가 물에 풀어지듯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감격에 차서 말했다.

진짜구나. 너 합격한 거구나.”

웃음을 띤 승표가 책을 경화 코 앞에 들이댔다.

내 말이 맞지? 이게 무슨 책이라고 생각해?”

미국 대학만 나오면 인생이 다 해결된다고 보는 쓰레기같은 돈벌이 책이지.”

바보, 그게 아냐.”

승표는 책을 펼쳤다.

넌 이 책 읽어본 적도 없잖아.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책이 아니야. 책 표지를 뒤집어봐. 난 이 책을 잃지 않기 위해 표지를 씌워놓은 거란 말야.”

그게 대체 무슨 책인데?”

도망치는 방법이 적혀 있어. 여기서. 끔찍한 곳에서 도망치는 방법이.”

승표는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리그를 노려라를 잡고 책등을 꺾어 표지를 뜯어냈다. 속표지에는 탈출의 모든 방법 : 살인과 자살, 그리고 해탈이라고 적혀 있었다. 경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추기경이 썼다는 그 책이야?”

서울대가 아니라 아이비리그를 노려라로 씌워놓지 않았다면 진작에 뺏겼을거야. 안 그래?”

경화는 다시 한 번 감격해서 말했다.

승표야.”

너 이제보니 머리 좋구나?”

당연하지.”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승표가 활짝 웃었다.

여기에 보면, 내가 아무짓 안 하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들이 나와 있거든. 그대로만 하면 아이비리그에 갈 수 있대. 추기경이 쓴 대로 말이지.”

아이비리그라니 그만해. 말만 들어도 입에서 신맛이 나.”

그게 아냐. 이제까지 몇 명이 죽었는지 알아? 너 다 봤잖아. 창고에서.”

뭐라구?”

경화는 물러앉았다.

교장이랑 여자애 하나랑, 근복이랑...그리고 전화 받는 남자까지, 네가 다 죽인 건 아니지?”

아냐.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아. 하지만 선거를 시작하면 누군가 죽는다는 것쯤은 알았어. 추기경이 이 책에 써놓은 게 바로 그거야. 난 그대로 한 것뿐이고.”

경화는 생각했다. 창고에 쌓인 시체들에 대해. 지금쯤 교장실에 앉아 있을 추기경을. 뜯어진 커텐을 달고, 먼지낀 상패와 대리석 조각들에 둘러싸여 담배 선생이 두고 간 담배를 피워 물고 있을 추기경을 생각했다. 목공실에서 평생 떠나지 않을 K담임과 구령대 아래 갇혀 있는 담배 선생에 대해서도. 승표가 가둬 버린 화장실의 여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소각로 아래서 영원한 불에 타고 있는 변태 아저씨에 대해서도. 모두 죽은 자들이었고 살아있다 한들 죽을 터였다. 그들은 경화와 승표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지만 어떤 부조리함도 추기경이 미리 예언한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한 번 일어난 폭력은 끝장을 보고 싶어했다. 흐르는 피를 원했다. 승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부조리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화는 이를 악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운전석에 앉은 용식이 웃었다. 밴은 미친 듯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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